고은서가 이메일을 열었을 때 안에는 전에 그녀가 이력서를 넣었던 회사에서 답장이 와 있었다.그녀는 대학 시절 금융 투자분석사 자격증을 땄었고 그로 인해 투자회사에서는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다.두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고, 다른 두 회사는 그녀를 채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경력이 없었기에 월급이 다른 투자자들보다는 조금 낮았다.고은서는 그 회사들에 간단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전에 그녀는 회사에 다니며 자신의 전공을 살려볼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민시후와 협력하기로 했으니 당분간은 다른 회사로 갈 수 없었다.답장을 보낸 뒤 고은서는 명운 자료를 열었다.명운은 최근 몇 년 동안 비교적 빠르게 발전한 고량주 양조장으로 오랜 역사와 무형 문화 유산이라는 슬로건으로 많은 명성을 얻었다.고은서가 기억하기론 전생에 명운은 PE를 통해 상장한 뒤 시가총액이 빠르게 상승하여 이로 인해 판주 투자은행이 큰돈을 벌었었다.좋은 프로젝트를 따고 싶은 회사는 많았다.민시후도 실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자금이 많고 통도 큰 GS 그룹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전생에 민시후도 아마 경쟁에 참여했지만 패배했을 것이다.고은서는 당시 곽승재에게만 정신이 팔렸었기에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신경 써 본 적은 없다.지금 그녀가 이 프로젝트를 얻으려면 판주보다 더 유리한 가격을 제시해야 하는 동시에 그 이상의 가치를 넘으면 안 되었다.전생에 명운이 상장한 사실은 많은 매스컴에서 앞다투어 보도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론 기사에 판주의 투자 금액과 지분 비율이 적혀 있었다.그러나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단지 참고용으로만 써야 했고 구체적인 것은 실제 상황에 따라 분석하고 작성해야 했다.고은서는 열심히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저녁 무렵, 곽승재가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이미숙은 그를 보고 살짝 놀랐다.“도련님, 돌아오셨어요? 저녁을 드시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이미숙은 최근 곽승재가 집으로 돌아오는 횟수가 좀 잦아졌다고 생각했다.전에는 일
곽승재는 그녀가 그날의 일로 화가 나서 이혼을 제안한 것이라고 오해했다.굳이 따질 필요가 없는 걸 알고 있음에도 고은서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그날이 우리의 5주년 기념일인 거 알고 있었잖아. 내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왜 유미 씨랑 밥 먹으러 간 거야?”곽승재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그날? 나한테는 평소랑 다를 것 없었어.”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기념일을 챙길 필요가 있을까?모든 건 고은서의 일방적인 기대에 불과했다.“언젠가는 봐주겠지 하는 마음 하나로 기다렸던 내가 바보네.”고은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그걸 듣지 못한 곽승재는 줄곧 싸늘한 태도를 유지하며 고은서를 바라봤고 그녀는 어느새 마음을 가다듬었다.“이렇게 말다툼할 기분 아니거든? 이혼은 진심이야.”아직도 이혼으로 왈가왈부하는 그녀의 모습에 곽승재는 표정이 잔뜩 어두워졌다.“고은서, 이혼하는 걸 제멋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정신 차려.”고은서는 그저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왜? 하루라도 빨리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 아니었나? 그러면 여사친이랑 당당하게 만날 수 있잖아.”곽승재는 비아냥거리며 말하는 그녀의 무관심한 태도가 매우 언짢았다.“이혼할지 말지는 나한테 달려있어. 할머니를 내세워서 결혼을 강요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혼? 헛소리 그만해.”“그럼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네가 날 괴롭힌 만큼 나도 똑같이 돌려줄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드디어 미쳤네.”고은서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할머니 생신까지 30일 남았어. 그날이 지나면 무조건 이혼할 거야. 더 이상 질질 끌고 싶지 않거든.”“고은서, 꿈 깨.”곽승재는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너 사모님 되는 거 좋아했잖아. 그럼 내가 질릴 때까지 버티고 있으라고.”말을 마친 그는 젓가락을 뿌리치고 식탁을 떠났다.“곽승재, 너 진짜 미쳤냐?”고은서는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고은서는 예전에도 종종 쇼핑을 즐겼지만, 오늘처럼 미친 적은 없었다.큰 자극을 받은 게 틀림없다.그녀는 웃으며 되물었다.“무슨 일 있는 것처럼 보여?”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엄청.”고은서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 지금 제정신이고, 무슨 일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있거든.”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채 그들은 남성복 코너에 도착했다.박지연은 정성스레 넥타이와 옷을 고르며 물었다.“은서야, 그러지 말고 승재 씨 것도 좀 골라봐.”고은서는 단칼에 거절했다.“됐어. 받을 자격 없는 사람이야.”화가 잔뜩 났음에도 걱정하지 말라는 그녀의 모습에 박지연은 할말을 잃었다.“이렇게 더럽히면 어떡해요? 대여할 때 분명히 그 어떤 얼룩도 용납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잖아요.”그때 맞은편의 브랜드 정장 샵에서 하소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훤칠한 키에 미소년처럼 생긴 남자가 정중한 태도로 판매원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행사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혹시 드라이클리닝 가능한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비용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이걸 어떻게 드라이 클리닝해요! 디자이너 선생님들이 고급 원단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만든 옷이라고요. 세탁하면 값어치가 떨어지니까 당연히 그쪽이 정가로 사야죠.”남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세탁 비용은 제가 많이 지불할게요.”“안 됩니다.”“그 옷 얼마예요? 제가 살게요.”고은서는 그들 앞으로 걸어왔다.판매원과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판매원은 양손 가득 들려있는 쇼핑백을 보고선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손님, 이 정장은 이번 가을 최신 상품이고 가격은 5,500만입니다.”고은서는 블랙 카드를 건넸다.“비밀번호 없어요.”판매원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재빨리 다가가 카드를 받았다.청초하게 생긴 남자는 고개를 돌려 고은서를 바라보더니 고마움에
순간 후회가 밀려온 주민기다.기분이 안 좋은 듯 하루 종일 정색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어젯밤 새벽까지 야근한 게 떠올랐다.이런 타이밍이 고은서 얘기를 꺼내면 독이 되지 않을까?곽승재는 짜증이 가득했다.“귀찮게 하지 말고 할 말 없으면 나가요.”주민기는 곽승재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건넸고 그는 곁눈질로 힐끔 화면을 보았다.그 위에는 백화점에서 쇼핑한 카드 결제 내역들로 꽉 찼다.수십만 원부터 수십억까지 가격대는 다양했고 전부 여자들이 좋아하는 쥬얼리나 명품 옷과 가방이다.띵!때마침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xx 남성 정장 샵에서 고객님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5,500만 원을 소비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오시기를 기대합니다.]주민기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으나 문자를 보고 나서 곽승재의 표정이 풀린 것 같았다.비록 곽승재의 옷장에 절대 볼 수 없는 저렴한 가격대의 옷이지만 옆에서 최선을 다해 아부를 떨었다.“사모님은 쇼핑하러 가서도 대표님 생각뿐인가 봐요. 이렇게 옷까지 사시다니 정말 배려심이 많은 분이네요.”역시나 예상대로 곽승재의 표정은 한결 좋아졌다.하지만 여전히 싸늘한 분위기를 유지했다.“전 이런 걸 바란 적 없어요.”주민기는 뭔가 떠오른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대표님, 어제 늦게까지 야근한 데다가 오늘도 하루 종일 바빴으니 많이 피곤하실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시는 건 어떨까요?”곽승재는 피곤한 듯 몸을 쭉 뻗었다.“아줌마한테 기운 돋우는 차 한잔을 준비해달라고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고은서가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5시가 되었다.박지연이 떠난 후 불현듯 기분 전환하고 싶다는 생각에 미용실에 가서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했다.그녀는 거울 속 자기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신이 났다.“사모님, 도련님은 서재에 계십니다.”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미숙이 다가와서 말했다.‘웬일로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거지? 설마 카드 긁은 것 때문에 화내려고 온 건가? 아니다, 차라리 잘됐어.
고은서가 타이어로 애를 먹고 있던 그때, 귓가에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이미 차 옆으로 다가왔다.비록 그녀는 이 상황이 조금 창피했지만 이런 일로 토라질 만큼 유치한 사람은 아니었다.고은서는 입을 삐쭉 내민 채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을 내어줬다.차에 앉은 곽승재는 여유롭게 핸들을 돌리면서 페달을 밟았고 후진하는 동시에 오른쪽 타이어가 흙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이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운전석에서 내려왔다.“계속해.”고은서는 다시 입을 삐죽거리며 운전석에 올라탔고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곽승재가 조수석에 앉았다.“뭐 하는 거야? 갑자기 왜 앉아?”눈살을 찌푸린 채 묻는 고은서의 모습에도 곽승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되레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머리는 이게 뭐야?”고은서는 어깨까지 오는 길이의 히피펌을 했다.“내 머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뭔 상관이래.”순간 곽승재는 표정이 어두워졌다.“할말 있어? 없으면 내려. 나 지금 바쁜 거 안 보여?”명령하듯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도 곽승재는 꾹 참고 안전벨트를 맸다.“운전 연습한다며? 멀뚱멀뚱 가만히 뭐 하는 거야?”고은서는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혼자서도 잘할 수 있으니까 쓸데없이 참견하지 마.”곽승재는 비아냥거렸다.“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구덩이에 빠져서 혼자 낑낑대냐?”“날이 어두워서 안 보였던 것뿐이야.”“밝은 대낮에만 운전할 거야? 나중에 네가 운전하는 곳마다 조명이 비칠 것 같아?”“그건...”반박하기도 전에 곽승재는 단칼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네 뒤치다꺼리 하고 싶지 않으니까 얼른 연습해.”지난번의 일은 확실히 그녀의 잘못이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었다.고은서는 전방을 주시한 채 페달을 밟았다.비록 수시로 조언하는 그의 모습이 꼴불견이지만 그래도 옆에서 가르쳐 준 덕분에 확실히 전보다 능숙해졌다.이제 직진과 유턴은 눈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손에 익었다.“힘들어. 다음에 연습하자.”힘든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벽에 부딪힌 듯한 소리였다.집에 있는 사람은 이미숙과 곽승재뿐인데 주정뱅이가 나타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철컥!방문이 열리자 곽승재가 비틀거리며 들어왔다.한껏 달아오른 새빨간 얼굴에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그는 눈마저 빨갛게 충혈되었다.뭔가 위험을 직감한 고은서는 곧바로 노트북을 닫았고 사람을 부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술 마셨어?”그녀는 침착하게 물으며 아무 내색 없이 방문을 열었다.“아줌...”아줌마라는 세글자가 나오기도 전에 입술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곽승재가 입을 맞추고 있었다.“갑자기...”고은서는 너무 놀라서 밀어내려고 했지만 곽승재는 오히려 그녀를 더 힘껏 끌어안고 키스했다.그의 몸은 매우 뜨거웠고 발버둥 칠 공간마저 주지 않은 채 빈틈없이 고은서를 품에 껴안았다. 곧이어 벽으로 밀어 세우더니 마치 그녀의 모든 숨결을 빼앗아 가듯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고은서는 주먹으로 그를 때리려고 했지만, 두 손 전부 잡힌 탓에 꼼짝달싹 못 했다.늘 그렇듯 남녀의 힘 차이는 현저하다. 고은서는 몸이 완전히 짓눌려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었고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르러서야 끙끙대며 애원했다.그녀의 간절한 부탁에도 곽승재는 멈출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뭔가 자극을 받은 듯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아!”고은서의 비명에 곽승재는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숨 고를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마치 목을 물려는 듯 다가갔다.“아줌마!”소리를 들은 이미숙이 부랴부랴 위층으로 올라왔다.그러나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그들의 애매한 자세를 보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아줌마, 도와...”“내려가요.”곽승재는 고은서의 입을 막고선 쉰 목소리로 명령했다.고은서가 많이 걱정되었지만, 일개 도우미가 젊은 부부의 사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건 주제넘은 행동이라고 판단되어 재빨리 발걸음을 돌렸다.“이거 놔!”고은서는 그가 한눈판 틈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내 인생 가장 눈부신 시기를 함께 보낼 그이를 기다리며.]정교한 요리가 담긴 사진은 백유미의 옆모습 셀카와 함께 업데이트 되었다.긍정적인 문구와 사진은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심히 그녀의 셀카를 살펴보면 구석에서 반쯤 드러난 남자의 팔을 확인할 수 있다.셔츠를 입은 남자는 손목에 명품 시계를 차고 있었다.너무도 익숙했다. 곽승재가 항상 차고 다니는 시계 중의 하나였으니까.역시나 예상대로 그동안 백유미와 함께 있었다.하긴 그날 욕구가 치밀어 오른 상황에서 고은서가 거절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사생활이 깔끔한 곽승재는 여태껏 그 어떤 스캔들에도 휘말린 적이 없었다. 그러니 욕구를 주체 못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사친을 찾아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두 사람의 관계가 한층 더 가까워진 건 백유미의 게시물에서도 느껴졌다.고은서는 그저 웃으며 백유미의 인스타를 차단했다.전에는 ‘라이벌’의 성향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 팔로우했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마음이 편할 정도로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지하 주차장에서 나오자마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전생에 가깝게 지냈던 절친 성아연이다.성씨 일가는 최근 2년 동안 금융업에 발을 디뎠고 현재 그룹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그녀가 전생에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성씨 일가는 갑자기 GS그룹과 손을 잡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가도 상승했다.성아연은 그녀가 정신병원에 갇힌 걸 알고 있었음에도 방문안 온 적이 없었다.이해득실을 따지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했기에 원한을 품은 건 아니었지만, 도저히 전처럼 사이좋게 지내며 마음을 나눌 엄두가 나지 않았다.하여 환생한 후에도 지금까지 성아연에게 연락한 적이 없었다.내심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건지 궁금했던 고은서는 브레이크를 밟고 화면을 터치했다.“은서야, 너 지금 어디야?”전화를 받자마자 성아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잠
고은서는 웃으며 답했다.“방금 복싱 클래스 끊었어요.”주인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살다 보니 이런 우연도 있네요. 저 복싱 클래스 코치예요.”참 신기한 인연이다.다음번 만남은 서로 거래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되다니.“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고은서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럼 볼일 봐요. 전 이만 가볼게요.”“잠깐만요.”주인혁이 그녀를 불러세웠다.“하실 말씀이라도?”고은서의 질문에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지난번 일은 정말 고마웠어요.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이 감사함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뭐라도 한 잔 사드리고 싶은데...”고은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업무에 방해되면 안 되니까 다음번에 사줘요.”“괜찮아요. 안 그래도 퇴근하려던 참이었어요.”주인혁은 다급하게 말했다.수줍어하며 소년미를 뿜어내는 그의 모습은 풋풋한 대학생 같았다.순간 연하남을 덕질하는 누나 팬들이 어떤 마음인지 이해가 됐다.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을 보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럼 저도 사양하지 않을게요.”“옷만 갈아입고 바로 나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줘요.”주인혁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었고 고은서가 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그가 나왔다.“타요.”그녀의 손짓에 주인혁은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운전 실력이 별로니까 마음 준비 단단히 해요.”“괜찮아요. 믿을게요.”진지한 그의 표정과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니 왠지 모를 책임감이 크게 다가왔다.“어디로 갈까요?”주인혁이 답했다.“전 다 괜찮으니까 마음껏 선택해요.”고은서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버블티는 어때요??”버블티를 좋아했던 학창 시절의 고은서는 늘 곽승재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하여 대학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버블티를 사기 위해 한 시간 동안 줄을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곽승재는 불량식품에 관심 없다며 매몰차게 내쳤다.“이 버블티에는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첨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
“곽승재보다 더 나쁜 놈이잖아!”고은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백유미가 약물 알레르기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곽승재는 그녀가 다친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있었다.하지만 온 닥터는 박지연의 상처를 봤으면서도 그녀를 혼자 병원에 보냈다.“네 시어머니도 너무해! 널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는 거잖아!”고은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자기 아들이 힘들까 봐 다친 며느리를 혼자 병원에 가게 하는 사람이 어디있어! 아들 첫사랑한테는 친절하게 굴면서 며느리한테는 밥하라고 시키는 게 정말 시어머니가 할 짓이야?”이미 화를 냈던 건지 박지연은 오히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시어머니는 항상 날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으셨잖아. 그런 사람이 내가 다쳤다고 해서 신경 쓸 리가 없지.”“더 나쁜 건 온 선생님이야! 네게 다정하지도 그렇다고 네 편을 들어주지도 않고 무슨 일이든 너한테 얘기조차 안 하잖아. 이런 생활을 어떻게 견디는 거야!”고은서가 화를 내며 말했다.“지연아, 너도 온 선생님 그냥 차 버려! 우리 둘이 지내면 되잖아. 남자는 필요 없어!”박지연은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너도 알잖아. 속상하긴 해도 남편 얼굴만 보면 그래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단지 성격이 차갑고 딴짓 안 한다면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첫사랑이 작정하고 돌아왔잖아. 안 그래도 어중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인데 뭘 더 버티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네가 다친 이 며칠 동안 네 상태에 관해 물어본 적 있어?”“의사잖아. 얼마나 다쳤는지 알고 있으니까 물어봐도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 게다가 요즘 학회가 많아서 바쁘거든. 얼굴 마주 볼 시간도 별로 없어.”“결국 물어본 적 없다는 얘기네?”화가 난 고은서가 저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바빠서 다친 아내 상태를 물어볼 시간은 없으면서 첫사랑이랑 쇼핑하고 커피 마실 시간은 있나 보네.”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말을 밖으로 뱉은 고은서는 곧바로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이미 입 밖으
박지연의 안색이 확연히 어두워졌다.그녀는 팔을 살짝 뒤로 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요리하다가 실수로 데었어.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검진받으러 왔다며? 같이 있어 줄게.”고은서는 직감적으로 박지연과 온 닥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대화하기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기에 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따랐다.고은서는 잘 회복하고 있었다.전에 옥상에서 떨어지며 생긴 부상도 별 탈 없이 회복 중이었다.“아직 밥 안 먹었지? 같이 뭐라도 좀 먹을까?”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도 거절하지 않았다.“식당에 가자. 당직이라서 얼른 가봐야 해.”“그러자.”병원 식당은 환한 조명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곳곳에 식물들이 배치되어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병원 환경 좋네.”고은서가 칭찬하자 박지연이 답했다.“평소에는 이렇게 깔끔하지 않아. GS 그룹에서 병원에 새 건물 몇 개 지어준다며 시찰 나온 사람들이 있어서 환경이 좀 나아진 거야.”‘GS 그룹에서 병원에 새 건물을 지어준다고?’“네 덕일지도 몰라. 너 전에 여기 입원해 있을 때 곽승재가 자주 왔었잖아. 병원 측에서도 그 틈에 후원을 요청하기도 쉬웠겠지.고은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이전에 병원장이 곽승재와 관련된 일은 간섭하지 말라고 했던 지시가 생각났다.‘후원 때문이었네.’박지연이 식판을 두 개 받아 와서 조용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지연아, 이제 말해줄 수 있지 않아? 온 선생님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전에 온 선생님께서 해외에서 만났던 그 여자가 같은 병원에 온 거야?”박지연은 부인하지 않았다.그녀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보름 전에 발령받아서 왔어. 전에 오기로 했던 사람이 국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 여자로 교체됐다고 하더라고.”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온 선생님께서 이 사실을 계속 너한테 숨겼던 거야?”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그 사람은 바로 박지연의 남편 온 닥터 였다.온 닥터 옆에는 가녀린 여자 한 명도 함께였다.그 둘은 캐주얼한 차림에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있었는데 어디론가 함께 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지연이가 선생님께서 많이 바쁘시다고 했는데... 발에 불이 날 정도로 바쁘다던 사람이 왜 다른 여자와 카페에 나타난 거지?’고은서는 비록 그 여자를 본 적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으로 고은서는 그 여자가 온 닥터의 첫사랑일 것으로 생각했다.‘지연이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신호등이 깜빡이고 있어 고은서는 생각을 이어 나갈 겨를 없이 얼른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 한 장을 찍었다.뒤차의 재촉에 서둘러 출발하면서 고은서는 백미러를 통해 함께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이전에 박지연이 온 닥터에게 물었을 때, 그의 첫사랑은 같은 병원으로 발령받지 않았다고 했었다.‘온 선생님께서 거짓말하신 건가? 아니면 내 직감이 틀린 걸까? 평범한 동료나 친구인 걸까?’두 사람은 단지 카페에서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을 뿐 특별히 친밀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운 후 박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다행히 그녀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지연아, 병원에 있어? 재검진받으러 가려고 하는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병원에 있긴 한데 당직이라 어려울 것 같아.”“요즘 별일 없지?”고은서는 박지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힘없이 느껴졌다.두 사람은 고은서가 외할아버지 집에 있는 동안 연락한 적이 없었다.박지연은 고은서가 이혼했단 사실도, 요양 중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고 그간 있었던 일에 관해 묻지도 않았다.평소 박지연답지 않은 행동이었다.“무슨 일 있을 게 뭐가 있어.”고은서는 통화만으로 박지연의 기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만나서 얘기하자.”전화를 끊은 고은서가 병원으로 향했다.박지연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몇몇 간호사들이 고은서를 알아보고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지난번
원지훈은 굽히지 않고 손을 뻗어 찻잔을 내팽개쳤다.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고은서는 그를 흘깃 보더니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내 목적이 뭔지 너도 잘 알겠지. 협조해. 이 위기에서 널 구해줄게. 네 삶은 지금보다 더 빛나게 될 거야.”원지훈은 고은서의 말을 믿지 않았다.이미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는 같은 실수를 다시 범하고 싶지 않았다.고은서가 웃으며 말했다.“지훈 씨, 똑똑한 사람이잖아. 아니면 백유미도 지훈 씨를 선택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그 생각은 안 해봤어? 지금 상태로 고은혜는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을 거야. 물론 회사도 지키기 어렵겠지. 백유미가 지훈 씨가 횡령했다는 사실을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한 신뢰도 깨져서 앞으로 도움은 기대할 수 없겠지. 정말 이대로 모든 걸 잃고 싶어?”원지훈은 잠시 망설였다.그동안 풍족하게 살며 누렸던 시간이 너무나도 편하고 좋았다. 그러나 얼마 못 누리고 이 모든 게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하지만 고은서를 믿어도 될까?’고은서는 원지훈의 망설임을 눈치채고 말했다.“지훈 씨, 우리 사이에는 이익 관계가 없잖아. 지훈 씨가 고은혜에게 실질적인 행동을 해서 피해준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내 목표는 오직 백유미뿐이지 지훈 씨랑은 상관없어.”이어 고은서가 말을 이어가며 원지훈을 설득했다.“지훈 씨, 당신은 잃을 게 없어. 이번 프로젝트가 무산되면 당신은 백유미의 버린 패가 될 뿐이야. 나랑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아?”원지훈이 그녀의 말에 흔들렸다.“뭘 원해요?”“걱정하지 마.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고은서가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지금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어. 이틀 동안 시간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이건 선착금이야. 내 제안을 받아들이든 말든 이 돈은 갚지 않아도 돼.”원지훈은 아직 백유미와 완전히 틀어진 상태가 아니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돌아설 가능성도 있었다.하여 고은서는 바로 목적을 밝히는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