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간의 연애 끝에, 강도겸은 새로운 연인과 함께하며 소정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소정은은 싸우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짐가방을 차분히 정리하고, 도겸이 마련해준 천문학적인 이별 수당을 받아든 채 과감히 떠났다. 도겸의 친구들은 익숙한 내기를 걸었다. 과연 이번에는 소정은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J시에서 소정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가 강도겸을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존심도, 분노도 없는 사랑, 그들이 알고 있는 소정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생각했다. 사흘 안에 돌아와 사과할 거라고. 하지만 사흘이 지나고, 또다시 사흘이 지나도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결국 도겸이 먼저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그가 처음으로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넌 이제 그만 장난칠 때가 되지 않았어? 그만하면 돌아와...”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뜻밖의 낮은 남자의 웃음소리였다. “대표님,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습니다. 이별을 후회해도 어쩔 수 없죠.” “정은을 바꿔줘, 걔랑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죄송하지만, 제 여자친구는 지쳐서 방금 잠들었어요.”
View More마침 이때, 백지영과 송보미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수민은 재빨리 동건의 손을 뿌리쳤고, 동건도 재빨리 자리로 돌아왔다.송보미는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감지하며 입을 열어 떠보았다.“너희들... 괜찮은 거니?”동건은 말을 하지 않고 수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지금 당장 대답을 하라는 뜻이었다.수민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방긋 웃었다.“괜찮아요, 저와 동건이 다 별일 없어요.”그렇게 두 사람은 우연히 관계를 맺은 파트너에서 합리적으로 관계를 맺는 파트너로 됐다....추억에서 정신은 차리자, 수민은 입을 내밀고 있는 동건을 밀어냈다.“넌 끝도 없는 거야? 빨리 운전해!”“키스 좀 더 하자! 나 더 하고 싶단 말이야...”수민은 눈을 부라렸다.“고동건, 너 어쩜 우리 파푸보다 더 매달리기 좋아하는 거지?”파푸는 수민이 마장에서 기르고 있는 Y국 조랑말이었다.성격이 너무 좋은 데다가 주인을 특히 좋아했다.매번 수민이 보러 갈 때마다 애교를 부렸다.동건도 수민을 따라 가본 적이 있었는데, 떠날 때 은근히 발로 파푸를 걷어찼다.그 결과, 오히려 파푸한테 되차였다.배에 든 멍은 이주 만에 사라졌다.“그 난폭한 짐승과 비교하지 마!”“파푸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그렇지 않으면-”그녀의 시선은 동건의 배에 떨어지더니 이어서 아래의 어딘가에 멈추었다.동건은 저도 모르게 똑바로 앉아 있었다.“너, 너, 너... 즐기고 싶지 않은 거야?!”수민은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난 언제든지 사람을 바꿀 수 있지.”동건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운전해! 계속 쓸데없는 소리 한다면 오늘 밤 소파에서 자!”“네, 아가씨, 잘 앉으세요.”...수민은 병원에서 정은을 3일간 돌보았고, 동건도 3일간 내내 따라왔다.“이거 대체 무슨 상황이야?” 정은은 절친이 끓인 보신탕을 마시면서 의자에 앉아 원망을 하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아마도 욕구불만이겠지.”“크헉...”“천천히 마셔, 사레 들리잖아!”동건을 바라보며
“사실 요즘 우리 엄마가 자꾸 너에 대해 물어보셨어.”동건이 갑자기 말했다.“뭘?” 수민은 여전히 송보미를 존경했다. 첫 만남에 비싼 보석 팔찌를 선물로 줬으니까.‘아, 그 팔찌 아직 돌려주지 않았는데...’“너 왜 우리 집에 안 오냐고, 나 때문에 화난 거 아니냐고.”“넌 어떻게 말했는데?”“아! 실수로 널 임신시켰다고 말했지.”“뭐?!!!”수민은 귀가 터질 목청으로 말했다.동건은 헤헤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야.”“너 정신 나갔구나!”“네가 일 때문에 바빠서 날 무시했다고 했어. 그리고 난 화를 내며 소란을 피우다가 널 화나게 했고.”‘쯧쯧... 그래도 책임을 자신에게 떠맡길 줄 아네.’수민은 미소를 지었다.동건은 그녀의 기분이 좋은 것을 보고, 이 기회를 틈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우리 계속 합작할까? 내 말 좀 들어봐... 우선 양쪽 어머니들이 만약 우리가 이미 헤어졌다는 것을 아신다면, 우린 엄청난 욕을 먹지 않을까?”백지영은 남을 욕하지 않지만 비아냥거리기 좋아해서, 듣기 거북한 말 하지 않아도 사람을 몸 둘 바 모르게 할 수 있었다.재벌 집 사모님들에게 모두 이런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둘째, 욕을 먹은 뒤, 두 분은 계속 결혼이며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하실 거야. 우린 예전처럼 잔소리를 들으면서 감히 짜증조차 내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야 하고.”이 모든 것은 전부 수민이 원하지 않은 점이었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협력 대상을 다시 물색할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이 사람도 우리와 같은 재벌 출신이어야 해. 그건 쉽지 않을 거야.”이렇게 보면,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우리가 계속 협력하는 거야. 상대를 바꾸는 것보다 우리가 전처럼 연기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시간도 절약하고.”동건은 말주변이 확실히 좋았다.적어도 그 순간, 수민은 정말 마음이 움직였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내가 말했지, 협력 상대와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고.”설령 마음이 움직였다 해도 수민은 원칙
동건의 손은 수민의 스웨터를 파고들어가 손쉽게 속옷 단추를 풀었다.“수민아... 수민아...”키스를 하면서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로 수민의 이름을 불렀다.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기세가 사나워 마치 그녀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수민은 엄청난 힘을 써서야 동건을 밀어냈는데, 얼굴은 새빨개졌고 숨을 약간 헐떡였다.“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야? 꺼져.”남자는 여전히 그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좀 더 키스하자...”말하면서 또 뻔뻔스럽게 달라붙었다.“요 며칠 너 병원에서 정은 씨 돌보았잖아. 나 정말 네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내가 보고 싶었다고?” 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도도하게 말했다.“뭐가 빠진 것 같은데?”“헤헤, 맞아, 너랑 자고 싶었어, 왜?”말하면서 긴 팔을 뻗더니 마치 억지를 부리는 코알라처럼 수민을 끌어안았다.수민은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동건의 모습에 이미 습관되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여자를 수도 없이 만나 본 고동건 도련님이 왜 동물처럼 툭하면 발정기에 들어서는 거지?”동건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지금 누굴 욕하는 거야?”“너.”동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앞으로 이런 질문 좀 하지 마. 한 번 모욕을 당했는데도 또 한 번 모욕을 자초하다니, 그럴 필요가 없잖아?”“조수민! 너 계속 내가 듣기 싫은 말만 할 거야?! 그래, 나한테도 다 방법이 있어!”“야, 너... 으윽!”동건은 웃음을 짓더니 다시 수민의 입술에 키스했다.이 키스는 유난히 길었다.중간에 수민은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고,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러나 동건은 한사코 손을 놓지 않았는데, 수민은 그의 입술을 깨물어서야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너 개띠야?” 동건은 아파서 줄곧 숨을 헐떡였다.수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신선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빨갛게 달아오른 두 얼굴은 마치 잘 익은 사과와 같았다. 두 눈은 촉촉했고 입술은 또 약간 부었다.눈빛은 앞유리를 뚫고 지나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한쪽
“너, 너희 둘 지금 뭐 하는 거야?”동건은 대야를 든 채로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치 바보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수민과 정은은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왜 이제야 왔어? 대야를 하나 사는데 한 시간이나 걸리다니.”수민은 동건에게서 대야를 빼앗아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정은을 볼 때, 다시 환한 미소를 지었다.“뜨거운 물 받아왔으니까 이따가 닦아줄게. 그럼 많이 편해질 거야.”“고마워, 수민아! 사랑해!”“그럼 다음엔 피하지 말고 나랑 뽀뽀하자, 응?”“안 돼, 나 하루 종일 누워 있었잖아. 얼굴도 안 씻고 머리도 안 빗었으니 어떻게 여신님의 뽀뽀를 받아들일 수 있겠어?”“괜찮아, 난 상관없거든.”대야를 빼앗기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동건은 어이가 없었다.“어? 이 로고...”수민은 대야를 바라보더니 깜짝 놀랐다.“너 설마... 에르메스 매장에 가서 산 거야?”“맞아!” 동건은 턱을 살짝 들더니 콧방귀를 뀌었다.“어때? 내 안목 괜찮지?”수민은 말문이 막혔다.“너 그게 무슨 표정이야?”“너 정말 머리가 없는 사람이구나? 병원 밖의 편의점에서 몇천 원이면 대야 하나를 살 수 있는데, 넌 에르메스에 가서 이걸 사다니?”“그게 뭐가 어때서?”“바가지를 쓴 거와 다름이 없잖아? 돈 많아서 아주 좋겠어.”동건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했다.“됐어, 그냥 쓸 수밖에 없겠군.” 수민은 싫어하는 감정을 드러냈다.‘예쁘기만 하고 실속이 없는 것... 천 원짜리 플라스틱 대야보다 못하잖아, 쯧쯧...’“야, 조수민, 네가 사오라고 했잖아! 사왔는데도 계속 트집을 잡을 거야! 이 몸이 언제 심부름하는 거 봤어? 너 그래도...”“이제 입 다물어도 될까, 고동건 도련님?” 수민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동건은 바로 입을 다물더니 찍소리도 내지 않았다.정은은 눈을 깜박이며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음,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수민이 입을 열었다.“거기 서서 뭐해?”“어? 그럼 뭐 하라는 거야?”“나가
핸드폰 비밀번호와 은행카드 비밀번호.재석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하는 말은 그의 뒷모습처럼 사람을 화나게 했다.“정은이가 알려준 거예요.”현빈과 도겸은 묵묵히 이를 갈았다....정은이 깨어났을 때, 이미 아침이 되었다.햇빛도 없고 비도 오지 않았으며 찬바람이 벌거벗은 나뭇가지를 무정하게 때리고 있었다.그녀는 일어나서 앉았다. 병원에 속하는 소독수 냄새가 자극적이고 고약해서 정은은 코를 비볐다.그리고 정은은 자신의 다친 발목을 바라보았다. 이미 꽁꽁 싸맨 발목은 그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가볍게 움직이자, 다행히도 조금 아프지만 전처럼 심하진 않았다.보온병을 들고 들어온 수민은 정은이 일어난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너 왜 일어났니?! 빨리 누워 있어!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단 말이야.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침대에 누워야 한다고! 내가 회사에서 우리 오빠 전화 받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어. 별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수민은 요즘 아주 바빴다. 두 사람은 이미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하나는 일하느라 바쁘고 다른 하나는 학술 연구에 바빴으니 한담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그러나 자신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사람이 바로 절친인 게 아니라, 자신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절친이었다.예를 들면 지금.“수민아, 나 얼마나 잤어?”“꼬박 하루, 지금은 아침이야.”정은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수민은 그녀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내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네 병상 옆에 남자 세 명이나 지키고 있는 거 봤거든. 우리 오빠는 그래도 괜찮지만, 심현빈과 강도겸은 틈만 나면 기싸움을 해서 정말 눈에 거슬렸어, 그래서 모두 쫓아냈지 뭐야!”“아, 맞다. 그리고 네 동창이라는 애들 두 명 왔었어. 하나는 민지, 다른 하나는 서준이라고. 두 사람도 아주 오래 기다렸는데, 너무 피곤한 것 같아서 먼저 돌아가서 쉬라고 했어.”“내 핸드폰은? 우리 엄마 아빠한테 전화 온 적 없어? 내가 받지 않
세정은 자신의 친오빠가 정은을 쫓아간 것을 보며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난 친동생이잖아! 날 집으로 데려다줄 수도 있는데... 또 그 소정은을 위해서 날 무시하다니. 그 여자와 난 정말 잘 안 맞아!’...병원 구급실에서.의사는 정은의 기본 상황을 물어본 후, 즉시 전신 검사를 안배했다.현빈이 말할 때 재석은 옆에서 보충했다. 열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몇 시에 열이 내렸는지, 몇 시에 땀이 났는지 등 디테일을 전부 상세하게 설명했다.의사조차도 그런 재석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검사가 끝나자, 정은은 병실로 밀려났고 그사이 한번 깨어났다.재석은 즉시 앞으로 다가갔다.“정은아, 내 말 들려?”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괜찮아, 지금 병원에 있으니까 졸리면 안심하고 자.”말이 끝나자 정은은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현빈은 한발 늦어서 정은과 말을 하지 못했다.“왜 나한테 정은이 깨어났다고 말하지 않은 거예요?” 그는 재석을 바라보았다.“그럴 책임이 없으니까요.”게다가 재석은 정은과 이야기하느라 바빴으니 또 어찌 현빈이 생각나겠는가?현빈은 말문이 막혔다.재석은 곧장 주치의를 향해 걸어갔다.“의사 선생님, 정은이의 상태는 좀 어떤가요?”“방금 이미 환자분에게 전면적인 검사를 했는데, 일부 검사 보고서는 좀 늦게 나올 거예요. 그러나 현재로 볼 때, 환자분은 열이 이미 내려갔어요.”“비록 발목이 심하게 삐었지만 다행히 뼈를 다치지 않았으니 약을 먹고 휴양하기만 하면 돼요. 적게 걷고 평소에 침대에 누워 있으면 빨리 나아질 거예요. 다른 주의할 만한 점은 아직 없어요.”“감사합니다.”“두 분 중 한 분이 간호사를 따라 병원비부터...”“제가 갈게요!”재석과 현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도겸은 성큼성큼 걸어와 의료비 지급명세서를 받았다.현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여자친구를 달래지 않고 왜 여기에 온 건데?”도겸은 냉소를 지었다.“왜? 난 여기에 올 수 없어?”“정은이는 널 보고 싶지 않을 텐데
민지와 서준도 와서 도와주었다.곧 구급차가 도착했다.간호사와 의사는 환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간단하게 검사를 한 후에야 재석, 현빈과 함께 정은을 들것에 옮겼다.간호사가 물었다.“환자 가족분 여기에 계세요? 빨리 타세요!”“제가 갈게요!”“저요!”“저예요!”세 남자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간호사는 눈살을 찌푸렸다.“두 분이면 충분해요. 나머지는 혼자 병원으로 가시면 되고요.”그녀는 재석과 현빈을 가리켰다. 방금 이 두 남자가 가장 먼저 달려왔고, 초조함과 초췌함도 연기 같지가 않았다.‘남은 그 남자는...’차 문이 닫힌 순간, 간호사는 도겸을 힐끗 쳐다보았다. 온몸에서 심한 술냄새가 풍겼을 뿐만 아니라, 눈빛은 마치 수시로 사람을 죽일 것만 같았다.‘그냥 혼자 오라고 해.’구급차에 올라가지 못하자, 도겸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그러나 도겸은 곧 자신의 스포츠카에 올라타더니 시동을 걸고 뒤쫓아 갔다.처음부터 끝까지 경혜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경혜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은 칼처럼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주위에서 구경을 하던 군중들은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야?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를 위해 떠났다니?”“이제 버려진 여자가 눈에 점을 찍고 다시 돌아오는 거 아니야?”“드라마 좀 적게 봐.”“그 남자 상장회사의 대표님이야. 심경혜의 집안사정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어?”“남자친구가 부자인데, 다른 여자랑 도망가는 게 뭐가 어때서?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아도 난 산후조리까지 다 해줄 거야!”“심경혜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들고 있는 가방 좀 봐. 강 대표님은 손도 참 크셔. 누가 이런 남자와 헤어지려 하겠어?”지예는 팔짱을 끼고 고소해하며 경혜를 흘겨보았다.“야, 네 남자친구 이미 도망갔는데, 안 쫓아가고 뭐 하니?”경혜는 정신을 차리더니 담담하게 웃었다.“정은이가 기절을 했으니 가보는 것도 당연하지. 게다가 난 도겸 씨를 믿어.
사방에서 바람이 들어올 수 있는 정자에서, 재석과 현빈은 바닥에 앉아 있었고, 정은은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다.현빈은 머리를 살짝 떨구며 눈을 붙이고 있었다. 도겸의 각도에서 보면 마치 정은의 어깨에 기댄 것 같았다.재석도 마찬가지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다만 나름 몸에 힘을 주고 있어 현빈처럼 정은에게 기대지 않았다. 한손으로 머리를 지탱하고 있었지만 어깨는 여전히 정은과 바싹 달라붙었다.딴마음을 품어서가 아니라 정은이 편하게 자게 하기 위해서였다.그래서 잠이 들었어도 어깨에 힘을 주며 이 동작을 유지했다.한밤중에 일어난 현빈은 그런 재석이 안쓰러워 자리를 바꾸자고 했다.“아니에요, 정은이는 가벼우니까요.”‘이 자식도 은근히 뒤끝이 있어!’세 사람은 분명히 옷을 입고 있었고, 지나친 스킨십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애틋한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정은은 열이 내렸지만 얼굴은 여전히 빨갰다. 그리고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질투에 눈이 먼 남자는 지금 이성을 완전히 잃었다.도겸은 머리가 새하얘지더니 마치 무언가에 맞은 듯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뒤따라 쫓아온 직원과 일찍 일어나 구경하러 나온 학생들도 이 상황을 보고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이, 이게 무슨 아수라장이야?’‘두 남자... 아니지, 이 강 대표님의 반응을 보면 세 남자가 동시에 한 여자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은데?’민지는 문을 연 순간 바로 달려왔다. 비록 도겸과 같은 시간에 달리기 시작했지만, 체형이 육중하여 빠르게 달릴 수 없었다.심지어 서준까지 그녀를 따라잡더니 앞으로 돌진했다.이때 민지는 구경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힘들게 빠져나왔다. 다음 순간,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뭐야? 하지만 이 세 사람은 다 예쁘고 잘생겼으니 같이 자도 나쁠 건 없잖아?’자신이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민지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밤새도록 걱정을 한 그녀는 번개와 같은 속도로 정은을 향해 달려갔다.그러나 한 사람이
두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은 기둥에 기대고 있었고 두 볼은 새빨갰으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지금 두 손으로 자신을 꼭 껴안고 있었다.“정은아? 정은아?! 정신 좀 차려 봐, 응?” 재석은 정은을 깨우려고 했다.그러나 여자는 두 눈을 꼭 감으며 속눈썹까지 파르르 떨고 있었다. 깨어나고 싶어도 깨어나지 못한 듯 매우 불편해 보였다.재석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고, 얼른 정은의 이마를 만져보았다.“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정은이의 체온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으니 이러다가 문이 열리기도 전에 기절할지도 몰라요.”현빈도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긴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해열제도 없고, 히터도 없고, 심지어 바람을 피할 변변한 곳도 없었다.재석은 현빈을 힐끗 본 다음 한 손을 내밀더니 허리를 쭉 펴고 섰다.“지금 뭐 하려고요?”재석은 급하게 대답하지 않고 잠시 후에야 손을 거두며 해석했다.“지금 서북풍이 불고 있어요. 정은을 맞은편 그 기둥으로 옮겨요. 비록 바람을 막을 순 없지만 적어도 바람을 등지고 있으니 그리 춥지 않을 거예요.”“좋아요.” 현빈은 바로 재석의 말대로 했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재석을 바라보았다.“그 다음엔요? 나한테 라이터가 있으니 마른 나뭇가지라도 찾으면 불을 피울 수 있을 텐데.”“안돼요.”재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북쪽과 남쪽을 봐요. 모두 스모그 경보기를 설치했으니 섣불리 불을 피우다 경보가 울리면 전 구역에 ‘비’가 내릴 거예요.”‘경보’라는 두 글자를 듣자, 현빈은 골치가 아팠다.“그럼 어떡하라고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재석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심 대표님, 지금 내 지시대로 움직이겠어요?”“허.” 현빈은 입가를 실룩거렸다.“지금 그런 거 따질 때에요? 비록 난 교수님이 싫지만, 그래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어요.”재석은 현빈을 잠시 바라보았다.“내 가방에 해열제가 있으니 가서 꺼내요. 그리고
알만한 사람들은 소정은이 강도겸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은 자신의 생활도, 공간도 없이, 하루 24시간 강도겸을 중심으로 돌아갔다.매번 이별 후 사흘이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재회를 청했다. 누구나 이별이라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정은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도겸이 새로운 연인을 안고 들어올 때, 방안은 오묘한 정적이 5초간 흘렀다. 그러자 정은은 귤을 까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왜 다들 말이 없어? 나를 왜 봐?”“정은아.”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도겸은 아무렇지 않게 여자를 안고 소파에 앉았다. 노골적이고도 태연했다.“생일 축하해, 선우야.”정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일인 선우를 생각하며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화장실 좀 다녀올게.”문을 닫을 때, 정은은 안에서 이미 대화가 시작된 것을 들었다.“형, 정은이 여기 있잖아요. 미리 얘기했는데 왜 여자를 데려왔어요?”“맞아! 도겸아, 이번에는 너무했어.”“신경 쓰지 마.” 도겸은 여자의 허리를 매만지며 담배를 피웠다. 흰 연기 속에서 미소 짓는 모습이 마치 세상을 게임처럼 여기는 방탕한 사람 같았다. 남은 대화는 문이 닫혀서 정은은 듣지 못했다. 정은은 침착하게 화장실에서 나와 화장을 고치며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정말 비참하군.”비참한 삶. 정은은 깊이 심호흡하며 결심했지만, 방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정은은 참을 수 없이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도겸은 여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고, 타액이 두 사람 사이에서 티슈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웃으며 소란을 피웠다.“역시 도겸이네! 제대로 놀 줄 알아!”“분위기 끝내주네, 한 번 더!”정은의 문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렸다. 이 사람이 자신이 6년간 사랑한 남자라니. 지금, 이 순간 그저 헛웃음만이 났다.“야, 그만해.” 누군가가 작게 경고하며 문 쪽을 가리키자, 모두가 일제히 그쪽을 보았다.“정은, 돌아왔네? 이거 다 장난이야, 신경 ...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