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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재석은 한 걸음 뒤에서 정은을 따르고 있었다. 어젯밤의 불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차분함을 되찾은 것 같았다.

차를 몰고 온 재석이 문을 열어주자, 정은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과일 가게를 지나칠 때, 정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깐만 멈춰 줄 수 있을까요? 2분만요. 과일 좀 사려구요.”

“과일?”

“네, 교수님 드리려고요.”

재석은 핸들을 잡고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

정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선배님은 손님을 방문할 때 항상 빈손으로 가시나요?”

재석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고 정은은 조용히 엄지를 세우며 감탄했다.

‘역시 대단한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봐?’

하지만 이내 재석은 차를 길가에 세웠다.

...

오미선 교수의 집은 서비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환산로에 위치한 작은 양옥집이었다. 서양식과 동양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 집은 단풍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어, 고요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6년 만에 찾아온 이곳에서, 정은은 안절부절 못하며 발밑의 과일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용기가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정은의 마음을 읽은 듯, 재석이 물었다.

“내리지 않을 거야?”

정은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렸다가요.”

재석은 긴장해 하는 정은을 몇 초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먼저 들어갈게.”

정은은 재석이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두 번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이맘때쯤이면 백화가 만발해 있었다. 작은 정원에 들어서자 부드러운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정은의 코끝에 스며들었다. 난간 옆에는 주인이 돌보지 못한 듯 시들어 버린 채소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 정은은 오미선 교수의 목소리를 들었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재석을 따라 걸었다.

“교수님.”

오미선 교수는 손에 들고 있던 최신 생물학 학술지를 내려놓고 돋보기를 올려 썼다.

“어? 재석이구나? 어떻게 왔니?”

재석은 오미선 교수를 부축하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

“별거 아니야. 너희들이 이렇게 다들 찾아올 필요 없는데.”

오미선 교수는 재선의 손을 톡톡 쳤다.

“너희들이 신경 써줘서 고맙지만, 나는 괜찮아, 정말 아무 문제없어!”

재석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오늘 데리고 온 사람이 있어요.”

“누구?”

오미선 교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재석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정은이 현관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오미선 교수의 표정이 놀라움과 반가움에서 차갑고 의도적으로 냉정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여기 왜 왔니?”

“교수님.”

정은은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오미선 교수는 목소리를 굳히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때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다고 말하던 아이가, 지금은 왜 온 거니?”

정은은 입술을 꽉 다물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교수님, 죄송해요, 실망하게 해드려서.”

“또 다른 할 말은 없고?”

오미선 교수는 드물게 이렇게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또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고 잠시 멈추고 나서 낮게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나요?”

“드디어...”

오미선 교수는 한숨을 쉬며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6년, 꼬박 6년이야.”

정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몰랐어요.”

오미선 교수는 계속 기다렸다는 사실을 정은은 몰랐었다.

“지금이라도 이해해서 다행이야.”

오미선 교수의 얼굴에 마음 아픈 표정이 스며들자 정은은 코끝이 시큰해지며 참지 못하고 품에 안겼다.

“교수님.”

오미선 교수는 정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래, 그래. 그런데 이렇게 큰 사람이 울면 웃음거리가 될 거야.”

재석은 조용히 그 장면을 지켜보다가, 두 사람이 화해하는 모습을 보며 거실을 떠나 발코니로 나갔다.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오미선 교수는 정은의 연애 이야기는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오늘 정은이 잘못했다고 말한 것은, 그 당시 선택한 길, 아니면 그 사람에 대해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정은의 마음에 상처를 다시 들추고 싶지 않았다.

“학교 근처에 집을 구했어요.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올해 말에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가려고 준비 중이에요.”

그러자 오미선 교수의 눈이 반짝였고 생각 밖의 희소식에 굉장히 행복해했다.

“정말? 진짜로?”

오미선 교수는 놀란 나머지 두 번 확인했다.

“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는데 오미선 교수를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좋아! 좋아! 정말 잘했어! 네가 나에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올해에 너를 위해 내가 티오 하나를 비워뒀으니까.”

정은은 놀랐다. 병문안을 가면서도 오미선 교수가 티오를 비워뒀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렇게 확인되니 믿기 어려웠다.

“교수님, 제가 합격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죠.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그러자 오미선 교수는 말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못 붙을 이유가 없어! 네 능력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네가 일부러 망치지 않는 이상, 농담하는 거겠지!”

“그럴 리 없어요.”

정은은 눈가는 촉촉해졌지만 애써 웃었다.

“시간이 늦었구나. 재석이랑 너... 어? 재석이 어디 갔지?”

“교수님.”

재석이 발코니에서 들어왔다.

“마침 곧 점심시간이네, 오늘 둘 다 여기서 점심 먹고 가. 내가 직접 요리할게!”

정은은 얼굴이 변했고, 재석의 표정도 복잡해졌다.

“저기... 교수님, 그러면 제가 할게요.”

정은은 오미선 교수의 마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오미선 교수가 요리하면 부엌이 엉망이 될까 봐 걱정했다. 오미선 교수는 약간 당황하며 기침했다. 자신의 요리 실력을 잘 알고 있기에 제자들 앞에서 체면을 잃을 수 없어 말했다.

“콜록콜록... 그래, 그래. 나는 요양 중이라 요리는 안 하는 게 좋겠지.”

정은은 재빠르게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들어갔고 재석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따라갔다.

“내가 도울게.”

오미선 교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입꼬리가 계속 올라갔다.

냉장고는 가득 차 있었고, 재료는 모두 신선했다. 오미선 교수는 막 퇴원해서 요양 중이었으니, 정은은 담백한 요리를 만들기로 했다.

“뭐 도와줄까?”

재석이 묻자 정은은 재료를 보며 물었다.

“야채 씻을 줄 알아요?”

그 말에 재석은 잠시 망설였다.

“어려운 건 아니지.”

정은은 자리를 내주었고, 재석은 서툴지만 정성껏 야채를 씻기 시작했다. 잎사귀에 묻은 흙과 모래를 꼼꼼하게 씻어내는 그의 모습에서 진지함이 엿보였다.

“먹지 못하는 거 있어요?”

“없어.”

“싫어하는 건요?”

“딱히 없어.”

“입맛 맞추기 쉽네요.”

정은은 작게 중얼거렸다. 까다롭지 않고 요구도 많지 않은 재석의 모습이, 어딘가 강도겸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조용히 요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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