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정략결혼에서는 남자가 바깥에 두세 명의 여자를 두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집안의 본처만 흔들리지 않으면, 밖에서 누구와 어떻게 놀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서영숙 역시 엄마로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오늘 서영숙은 소정은에게 공식적으로 약속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은의 반응은 감사의 눈물이 아닌 차가운 비웃음이었다.“사모님, 그런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 주시죠. 저는 받을 자격이 없어요.”“그리고 저와 강도겸은 이미 헤어졌습니다. 앞으로 다시 만나도, 우리 그냥 남남으로 지내는 게 좋겠네요.”이전에는 정은이 도겸을 위해 서영숙의 비난을 무조건 참아왔다. 서영숙은 정은의 학력이 낮고, 유학 경력이 없으며, 졸업 후에도 직업이나 경력이 없어서 자신의 귀한 아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정은은 이 미래 시어머니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하려고 애썼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도겸조차도 필요 없게 된 마당에, 어머니 따위가 안중에 있을 리가 없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참, 제가 조언 하나 드리죠.”“뭐라고?”정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말을 그렇게 신랄하게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그리고, 원숭이가 옷을 입어도 결국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걸 기억하시길 바랄게요.”그 말을 남기고, 정은은 태연하게 돌아서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서영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눈동자가 흔들리며 충격에 빠졌다. “방금 뭐라고 했어? 감히 나한테 그렇게 말해? 그게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직도 우리 강씨 집안에 시집올 생각이 있는 거야?!”서정은 자기 엄마의 팔을 잡아 흔들며, 충격에서 깨어난 후 중얼거렸다. “엄마, 언니가 방금 오빠랑 헤어졌다고 했어요?”“흥, 그걸 믿니?”“사실 그렇죠. 오빠랑 몇 번이나 헤어졌다가도 다시 돌아왔잖아요.”결국,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정은은 도겸을 미치도록 사랑했고, 마치 주인에게 충성하는 개처럼 어떻게 내쳐도 떠나지 않았다
“밥은 다음에 먹자. 나 좀 일이 있어서. 나중에 다시 보자.”정은은 선우와의 관계가 꽤 좋아서, 거절할 때도 미소를 지으며 체면을 세워주었다. 선우는 정은의 손에 하이엔드 주얼리 보석함이 들려 있는 것을 보고, 정말로 바쁘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저 핑계가 아님을 알았다. 선우는 한마디 대답을 하며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정은은 이미 도겸을 지나쳐 곧장 떠났다. 또한 단 한 번도 도겸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자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싸늘해졌고, 선우는 몰래 도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는 억지로 분위기를 풀려고 시도했다. “저기 도겸이 형, 정은 누나가 형을 못 봤나 봐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선우가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선우의 말이 끝나자 도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머쓱한 선우는 헛기침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으나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번엔 정말 단단히 화가 났구나, 정은 누나.’“손님, 구매하시겠습니까?” 도겸은 차갑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구매하죠. 왜 안 사겠어요? 제일 비싼 걸로 줘요.” 정은이 관심 없더라도, 다른 누군가는 분명히 좋아할 테니까!...파티 장소는 운계로에 있는 한 단독 주택이었다. 정은이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몇몇이 정은을 알아보자, 눈빛이 복잡해졌다. 예전에는 도겸과 함께 자주 이런 자리에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정은은 친숙한 얼굴이 되었다. 사람들은 정은의 본명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고 그저 도겸의 여자친구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려는 참새 같았다.하지만 최근 그들 사이에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오늘 정은이 혼자 이 파티에 나타난 것을 보니, 그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빛이 더욱 미묘해졌다. 곧 봉황으로 변할 것 같았던 작은 참새가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일까? 6년 동안 애쓴 보람도 없이 결국 버림받은 여자가 된 걸까? 이것이야말로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아니겠는
유민규 비서가 정은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정은은 차에서 내려 감사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옆에 있는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20분 후, 정은이 양손 가득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저 멀리서 재석이 저녁 햇살을 받으며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하늘은 이미 조금 어두워졌지만, 재석의 몸은 주황빛 노을에 감싸여 있었고, 원래도 긴 그림자가 더 길어 보였다. 재석은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고, 마치 어떤 일에 집중한 것처럼 걸어오고 있었다.“오, 또 만나네요.” 정은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재석은 고개를 들어 안경을 살짝 밀며 대답했다. “그러네, 또 만났네.”“저녁 먹었어요? 제가 장을 좀 많이 봤는데, 같이 먹을래요?”재석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 했지만, 정은의 요리 솜씨를 떠올리며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은의 집은 재석이 처음 방문하는 곳이었다. 앞쪽 발코니에는 튤립이 활짝 피어 있었고, 뒤쪽에는 네모난 어항 안에서 두 마리의 붉은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흰색 커튼은 저녁 햇살 속에서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고, 체리 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는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 온화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웠다.유리 테이블 위에는 대학원 시험 문제지와 책이 펼쳐져 있었는데, 재석은 한눈에 문제지에 적힌 답이 거의 모두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뭐 마실래요?”“물만 줘.”정은은 재석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고마워.”“오늘 장을 좀 많이 봐서요. 샤부샤부 해 먹기 딱 좋은 재료들이에요.”정은은 장바구니를 열어 다양한 채소와 한 덩이의 소고기, 그리고 손수 만든 미트볼을 꺼냈다. 그리고 집에는 지난번 남겨둔 소고기 뼈가 있었기에, 담백한 소고기 샤부샤부를 만들기에 딱 맞았다.“선택 문제 하나 틀렸어.”재석이 갑자기 말하자 정은의 시선이 재석의 시선을 따라가 오늘 아침에 푼 시험지로 향했다. 그리고 재석이 말하는 문제가 어떤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 문제는 생물학과 물리학의 교차 학문에 관
수민은 사시미를 좋아해서 신선한 연어와 평소에 자주 먹는 새우 등 해산물을 주문했다. 정은은 차가운 음식을 잘 못 먹기 때문에 라멘과 스시를 시켰다. 라멘 맛은 그저 그랬지만, 재료가 신선한 덕에 먹을 만했다. 수민은 정은이 꽤 잘 먹는 걸 보고 일부러 장난을 쳤다. “이 연어 진짜 신선하고 맛있는데, 한 번 시도해 볼 생각 없어?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자 정은이 웃으며 거절했다. “너도 알잖아, 나는 날 것을 심리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그냥 라멘이나 먹을게.” 그 말에 수민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넌 한결같아.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말이야.” 수민은 정은이 좋아하는 것에는 항상 고집 있게 행동한다는 걸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다. 마찬가지로,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도 항상 그랬다.“그러고 보니, 며칠째 스파를 못 갔더니 손이 거칠어졌어. 요즘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었거든.” 수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 아빠 탓이야. 요즘 자꾸 나 보고 소개팅을 하라고 하셔. 엄마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아빠와 함께 나를 몰아세우고 있어.”“나를 못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게다가 사촌 오빠도 아직 결혼 안 했는데,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수민이 조재석을 언급하자 정은은 그들이 비록 이웃이지만 각자 바빠서 거의 만날 시간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함께 핫팟을 먹은 후, 삼각김밥을 한 번 가져다준 것 외에는 따로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수민은 정은의 생각을 읽지 못하고, 스시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그때 너 내 오빠랑 같이 오미선 교수님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 그 후에는?” 정은은 고개를 숙여 면을 흡입하고 한동안 씹더니 이내 삼키며 말했다. “그게 말이야. 오미선 교수님께서 나를 위한 티오 이미 마련해주셔서, 올해는 반드시 통과해야 해.” 그 말에 수민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재석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물리학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나름의 속도와 경로를 가지고 있으며, 당신이 멈추라고 한다고 해서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고승찬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한번 말해본 것뿐입니다.”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헤어졌다. 재석이 돌아섰을 때, 정은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네, 이웃.”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은은 아까의 일을 피하려는 듯 가볍게 대화를 이어갔다. “지난번 도움 주신 덕분에, 요 며칠간 문제 풀이가 순조로웠어요.” 그러자 재석이 겸손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잘 이해한 덕분이야. 오미선 교수님께는 다녀왔어?” 정은은 손을 뒤로 잡고, 발밑의 돌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아뇨, 몇 번 전화만 했어요. 오미선 교수님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서 곧 학교에 돌아오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오미선 교수님은 항상 자신의 교육 업무에 책임감을 가지고 계셔서, 이 며칠 쉬는 것도 아마 답답하실 거야.” 해가 점점 저물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균형을 잡지 못해 흔들거렸다. 정은은 마침 고르지 않은 돌판을 밟아 비틀거렸고, 균형을 잡지 못해 자전거와 부딪칠 뻔했다. 순간적으로 재석은 정은의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고는, 조금 힘을 주어 정은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정은은 자전거와 충돌하지 않고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괜찮아?” 재석의 따뜻한 손이 옷소매 너머로 정은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여름옷은 얇았기에 따뜻한 온기는 곧바로 전해졌고, 정은의 귀는 순간적으로 뜨거워졌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두 사람은 너무 가까이 있었다. 호흡이 닿을 듯 가까웠다. 이 사실을 인지한 정은은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재석도 그제야 깨닫고, 손을 놓았다. 그 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집까지 걸어갔다. 이윽고 집에 도착하자 각
서연희는 몇 걸음 만에 계단을 내려와 학교 대문 쪽으로 달려갔고 도로 옆에 주차된 도겸의 차가 금방 눈에 들어왔다. 도겸은 차 앞에 기대 서 있었다. 베이지색 티셔츠 위에 짙은 회색 긴 코트를 걸치고, 매끄러운 라인의 검은색 캐주얼 바지를 입어 대학생처럼 보였다. 또한, 젊고 활기찬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도겸은 세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한 시간이 10시였지만, 이미 10시를 지난 후였다. 도겸이 핸드폰을 꺼내 연희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려던 순간,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도겸의 코끝을 맴돌았다.연희는 두 손으로 도겸의 목을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오래 기다렸어요?” “너 늦었어.” 도겸은 검은 눈동자로 연희를 힐끗 보며, 두 손을 느긋하게 주머니에 넣었다. “미안해요, 다음엔 꼭 제시간에 올게요.” 연희는 도겸이 화내지 않는 것을 보고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타.” 연희의 작은 속셈을 도겸이 모를 리 없었지만, 도겸은 굳이 그것을 들추지 않았다. 연희는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탔고, 차 안에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도겸은 핸들을 돌리며 앞만 바라보았고, 간혹 대답만 했다. 신호등에서 차가 멈추었을 때, 연희는 우연히 창밖을 보았다. 커다란 LED 화면에 새로 개장한 유니버설랜드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연희는 순간 마음이 설렜는지 도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자기야, 오늘 우리 유니버설랜드에 갈래요?” “그래.” 오늘은 연희의 생일을 위해 시간을 낸 거기 때문에 도겸은 어디를 가든 상관없었다. 이윽고 도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명품 주얼리 로고가 새겨진 가방을 건네주며 말했다. “생일 선물이야.” 연희가 열어보고는 놀라서 외쳤다. “이거 C사 최신 시즌 한정판 팔찌잖아요? 엄청 비싸고 구하기도 힘든 건데!” 연희는 바로 상자에서 팔찌를 꺼내어 손목에 착용했고, 조개 모양 디자인에 체인에 박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를 보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때요?
수민은 정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가자! 오기 전에 내가 계획을 다 세웠어. 오늘 한 번 제대로 놀아보자!” “아아! 누가 살려줘!”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5분 동안 귀에서 멈추지 않았다. 정은은 귀가 멍해져서 손으로 문질렀다. 그리고는 방금 토하고 나서 창백해진 얼굴의 수민을 보고 웃음이 나오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에 수민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 좀 나아졌어?” “나, 웩.” 수민이 다시 쓰레기통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토할 것 같다. 정은은 재빨리 휴지를 꺼내고 물병을 열어 수민이 토하고 나자마자 물을 건네주었다. 이윽고 수민이 입을 헹구고 더 이상 토하지 않자, 정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기 롤러코스터가 악마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제 알겠어. 정말 지옥 같았어. 너무 무서워.” 수민은 힘없이 말하며 입을 닦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정은이 말했다. “누가 익스트림을 하겠다고 했더라? 네가 자초한 일이야.” 수민은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다. 그런데도 이런 놀이기구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니, 그저 겁이 많으면서도 놀기를 좋아하는 거였다. “흑흑, 지금 와서 후회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제 안 할래.” 수민은 정은의 어깨에 기대어 겨우 숨을 골랐다. 잠시 쉬고 난 수민은 그제야 기력을 회복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정은은 먼저 식사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수민과 정은은 길을 걸으며,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하늘을 보며 흥분해서 사진 찍는 모습에 덩달아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풍선이 엄청 많네. 이게 무슨 개장 기념 이벤트인가?” “요즘 상인들 왜 이렇게 경쟁이 치열해? 저렇게 많은 풍선을 불려면 몇 시간은 걸렸을 텐데?” 정은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푸른 하늘에 거대한 풍선들이 떠다니며, 마치 거대한 푸른 바다를 연상케 했다. 풍선에 묶인 컬러 리본이 자연스럽게 내려오면서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마치 나비들이 춤추는 것 같았다. 관광
점심을 먹고 난 후, 수민은 동물 공연 티켓 두 장을 사서 소정은과 함께 돌고래 쇼를 보러 가자고 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곳을 지나 두 사람은 남서쪽에 있는 동물 공연장에 도착했다.공연장 안에는 에어컨이 켜져 있어 밖의 뜨거운 열기와는 전혀 다른 천국 같은 분위기였다. 정은은 동물 공연에 크게 흥미가 없었지만, 수민이 돌고래를 매우 좋아했기에 관객들과의 호응시간에 수민이 정은에게 카메라를 맡기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수민의 밝은 미소에 감염된 정은도 미소를 지었다.30분 후, 공연이 끝나자 정은은 가방을 수민에게 건네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이윽고 모퉁이를 돌자,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고 있는 서연희가 보였다.정은은 연희를 발견한 후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연희를 지나쳐 그대로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볼일을 마치고 나왔을 때, 연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보아하니, 정은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정은은 그런 연희를 무시한 채 손을 씻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흐르는 가운데, 주변은 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분위기는 점점 긴장감이 더해졌다. 잠시 후, 정은이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연희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러나 곧바로 시선을 돌려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무심하게 행동했다. 그러자 연희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 정말 우연이네요.”정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연희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요즘 잘 지내세요?”정은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응.”연희는 정은의 차분한 태도가 진짜인지, 아니면 꾸며낸 것인지 알아내려는 듯 정은을 자세히 관찰했다. 몇 초 후, 연희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정말로요? 빌라에서 나와 사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그러자 정은이 단호하게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사실 제가 정은 언니에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진심으로 말이에요.” 연희는 말하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순수하고 어린 얼굴에 눈물이 고이니 정말 청순하고 연약해
여전히 서비대학교 근처의 그 식당이었다.정은과 재석이 도착했을 때, 현빈은 이미 안에 있었다.“정은아, 왔어...”그는 웃으며 앞으로 다가가더니 정은에게 집중했다.마치 재석이 보이지 않은 것처럼.“오래 기다렸죠, 심 대표님.”‘심 대표님’이란 호칭에 재석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현빈은 그제야 그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조 교수님, 또 이렇게 만났네요.”재석은 여전히 웃음을 지었다.“그러게요, 심 대표님과 꽤 인연이 있나 봐요.”“그럼 들어오세요.”말하면서 현빈은 재석을 자신의 옆자리로 인도한 후, 또 정은을 위해 다른 한쪽의 의자를 당겼다.이 순서대로 앉으면, 재석 옆에 현빈, 현빈 옆에 정은이었다.“저쪽은 대문을 마주하고 있어. 사람들 드나들면, 바람이 세니 정은아, 넌 그냥 내 옆에 앉아.”말하면서 재석은 자기 옆의 의자를 당겼다.정은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곳에 가서 앉았다.그렇게 정은 옆에 재석, 재석 옆에 현빈, 세 사람은 이런 순서로 앉았다.“좀 따뜻해졌어?” 재석은 현빈의 어두운 안색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현빈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이쪽은 바람이 정말 세서 확실히 쌀쌀하네요. 그럼 나도 안쪽으로 앉을게요.”그리고 세 사람은 현빈, 정은, 재석의 순서대로 앉았다.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현빈은 웃으며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난 이미 주문했어. 모두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야.”정은은 고맙다고 말했지만, 재석이 아직 여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선배님, 메뉴에 먹고 싶은 거 있는지 좀 봐요.”“아니야, 난 다 돼.”“그럼 절대로 사양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먹어요.”“좋아.”현빈은 마음이 씁쓸했다.‘왜 나한테 메뉴 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거지? 왜 나한테 좋아하는 요리를 주문하라고 하지 않는 거냐고?’그러나 현빈은 자신이 요리를 주문했다는 것을 잊었다.정은은 자연히 현
물의 온도가 컵을 통해 손바닥으로 전해지자, 정은은 방금 허리에 닿은 그 뜨거운 온도를 떠올렸다.똑똑-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 정은은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재석이 밖에 서 있었다. “신발.”정은은 멍해졌다.재석은 뜻밖에도 개에게 물려간 그 신발을 되찾았던 것이다.“고마워요, 선배님.”“별 거 아닌데 뭘.”...오후에 정은은 한잠 잤다.그리고 2시에 일어나서 실험실로 향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서준은 이미 있었지만, 민지는 없었다.“아, 민지는 마실 거 사러 갔어요.”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민지는 밀크티를 들고 돌아왔다. 물론 정은의 것도 있었다.이 실험실은 여전히 전처럼, 실험대에서 멀리 떨어진 구역에 그들이 물건을 둘 수 있는 곳을 하나 만들어 놓았고, 수시로 간식과 물컵을 여기에 놓을 수 있었다.서준이 먼저 밀크티 한 잔을 받을 때, 정은은 깜짝 놀랐다.전에 민지가 아무리 말려도 서준은 한 번도 마시려 하지 않았다.가끔 한 번 마셔도 민지의 핍박을 받아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것만 골랐고, 마지막에 태반이 남아 있었다.이번엔...“쮼, 어때? 새로 나온 밀크티 맛있어?”“...음.”“다음에 내 거 한 번 마셔 봐, 이것도 맛있어.”“응.”정은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태양이 보이지 않아, 지금 동쪽에 걸려 있는지 아니면 서쪽에 걸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세 사람은 실험실에서 오후 내내 실험을 했고, 밤이 되자, 민지와 서준은 떠날 준비를 했다.“정은 언니, 안 가요?”“난 마무리 좀 하고. 이따가 갈게.”“그럼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마요.”“응.”7시, 정은은 실험대를 정리하고 문을 잠근 다음 떠났다.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가로등의 불빛이 밝아졌다.찬바람이 불자, 정은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는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멀리서 보면 마치 걸어가는 뚱뚱한 공과 같았다.“정은아...”뒤에서 누가 그녀를 불렀다.정은은 고개를 돌렸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
정은은 두 손으로 남자의 목을 꼭 안고 있었고, 두 다리는 상대방의 몸을 감고 있었다.이때의 정은은 마치 나무에 걸린 코알라와 같았다.재석이 바로 그 나무였다.“미안해요, 선배님,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방금 그 개가 너무 무서웠어요...”정은은 사과하면서 내려올 준비를 했다.그러나 남자의 큰 손은 여전히 정은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두꺼운 외투를 사이에 두고도 그 뜨거운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정은의 볼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이어서 얼굴 전체로 번졌다.마지막에 귀까지 빨개졌다.“선, 선배님...”정은은 힘을 조금 썼다.그러나 재석의 두 손은 마치 집게처럼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어 정은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무서웠어?” 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더니 목소리가 약간 쉬었다.그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몰랐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조, 조금이요.”개든 사람이든 정은은 다 조금 무서웠다.“네가 스스로 뛰어오른 거 맞지?”재석이 또 물었다.이번에 정은의 볼은 더욱 붉어졌는데, 마치 피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미안해요. 나도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무서운 바람에...”문제는 무서웠던 것이다.그렇게 큰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뛰쳐나왔으니, 좁은 계단에서 피할 곳도 없었다.만약 멍하니 서 있다면, 그 개는 정은의 다리에 꼿꼿이 부딪힐 것이다.그래서 정은은 어색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고 해도, 정은은 여전히 재석의 품에 안길 것이다.“선배님, 저기... 나 좀 내려주겠어요?”정은은 가볍게 입을 열었다.그녀의 입술이 남자의 귓가에 있었는데, 말 할 때 내쉰 숨결은 재석의 볼과 귀에 떨어지며 따뜻한 향기를 띠고 있었다.재석은 온몸이 굳어지더니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정은을 내렸지만, 손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은 그렇게 꽉 달라붙지 않았다.“확실해?” 한참 후에야 재석이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좀 더 잠겼다.“네?” 정은은 그제야 그 개가 자신의
곧 수업 종소리가 울렸다.재석이 교실에 들어섰다.“오늘 우리는 분자의 진화 및 시스템의 발생에 대해 이야기할 거야...”수업 시작한지 10분, 민지는 풀이 죽은 채로 책상 위에 엎드렸다.서준은 이 상황을 보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너 요 며칠 상태가 아주 안 좋아!”“지금 나랑 얘기하는 거야?”“그래!”민지는 화가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찬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렇게 생각해!”서준은 멈칫했다.“나도 엄청 야위었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고생을 해 본 적이 없어... 다이어트는 정말 어려우니까 이제부터 나도 결심했어.”“응?”“다이어트 포기할 거야! 죽어도 살 빠지 않겠다고!”“방금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이따가 수업 끝나면 내가 너랑 정은 언니한테 밥 사줄게, 응?”서준과 정은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민지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그래, 그럼 이렇게 정하자!”서준과 정은은 어리둥절해졌다.“스테이크를 먹을래, 아니면 샤브샤브 먹을래? 아니면 분식집? 아니면 뷔페? 아니면 햄버거, 감자튀김? 치킨과 콜라도 되는데! 아니면... 다 먹을까? 종류별로 시키면 되지! 이게 좋겠네!”민지는 배를 곯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벨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준비...’재석은 강단에 서서 말했다.“오늘은 여기까지.”말이 끝나자마자 민지는 정은과 서준을 끌고 교실을 뛰쳐나와 바람처럼 사라졌다.“정은 학생은 좀 남아...”재석이 말을 하기도 전에, 정은은 이미 사라졌다....한끼 배불리 먹은 민지는 만족스럽게 의자에 기대었고, 온몸에서 쾌적함을 발산했다.그녀는 문득 깨달았다.‘내가 왜 살을 빼야 하는 건데? 누가 원하면 가서 빼라 그래, 어차피 난 다시는 이런 고생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중에 호감이 가는 남자를 만나도 굶지 않을 거야.’태민에 대해서는...상대방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민지는 더 이상 헛된 상상을 하지 않았다.‘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남의 남자친구에게 반하겠어?’오
하정남은 제자리를 맴돌며 중얼거렸다.“예전에는 남이 어떻게 말하든 넌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왜 갑자기 살을 빼겠다는 거야? 누가 널 괴롭힌 거 아니야?”민지는 사랑으로 가득 찬 가정에서 자랐기에 자신감이 넘쳤고 난관적이어서 종래로 몸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초등학교 때 뚱뚱해서 친구들한테 왕따를 당해도 하루 종일 웃으며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지금 다이어트를 하겠다니?[민지는 착하고 마음이 넓어서 이런 일을 신경 쓰지 않았어. 그러나 이제 마음을 모질게 먹고 살을 빼다니... 대체 얼마나 큰 일에 부딪힌 거야?’하정남은 가슴이 떨렸다.민지는 하정남이 이상한 생각이라도 할까 봐 서둘러 설명했다.[뉴스에서 그러던데, 적당한 다이어트는 몸에 좋다고 했어요. 나도 이렇게 계속 뚱뚱하게 지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해보고 싶었던 거예요...]하정남은 눈살을 세게 찌푸렸다.‘뉴스에서 들었다고? 이상해! 분명히 이상해!’그는 자신의 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장 큰 취미는 먹는 것이고, 그 다음은 실험실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것이었다.틱톡이 유행하는 요 몇 년 동안 민지는 영상 같은 것을 잘 보지 않았다.그런데 뉴스 하나 때문에 다이어트를 결심하다니.이때 하정남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너 연애라도 한 거냐?”민지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히 전화를 사이에 두고 있어 하정남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난 공부를 하러 온 것이지, 사랑을 하러 온 게 아니잖아요! 아이고, 아빠, 나 아직 수업이 있는데, 곧 늦을 것 같아요. 먼저 끊을게요, 다음에 다시 연락해요.]말을 마치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반응이 이렇게 큰데 아직도 발뺌을 하는 거야?! 흥! 우리 딸 아직 어리니, 어느 남자가 감히 지금 내 딸을 빼앗아간다면, 난 그 자식의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민지는 아침을 사서 곧장 교실로 갔다.오늘은 재석의 수업이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정은과 서준은 이
정은은 민지의 식사량을 떠올리며 또 그녀 앞에 놓인 몇 가지 음식을 훑어보았다.‘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간식에 불과해. 두 시간 뒤면 배고프다고 야단을 칠 텐데.’그러나 뜻밖에도 두 시간의 수업이 끝나자, 민지는 여전히 자리에 가만히 앉아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어머...’정은은 깜짝 놀랐다.‘진짜 배가 안 고픈 거야?’만약 민지가 이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울면서 반박했을 것이다. ‘배고파요, 곧 굶어 죽을 것 같아요. 어떻게 배가 고프지 않을 수 있겠어요?’그렇다, 지금 민지는 벌써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고, 눈앞이 침침하며,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감자칩, 과자, 케이크, 닭발, 호떡 등 음식을 생각하고 있었다.‘아아악! 먹고 싶어 죽겠어! 참아야 돼!’정은은 그런 괴로운 민지의 마음도 모른 채, 그저 그녀가 정말 배가 고프지 않은 줄 알았다.그러나 다음날 아침, 민지가 여전히 이렇게 조금밖에 먹지 않자, 정은은 그제야 깨달았다.“민지야, 너 지금 다이어트 하는 거니?”“네! 정은 언니, 이게 왜 이렇게 힘들까요? 분명히 언니랑 저랑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언니는 점심이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잖아요. 저는 30분도 버티지 못하고 배가 고픈 거 있죠. 힝, 너무 불공평해요...”“왜 갑자기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건데?”이것은 정은이 알던 민지가 아니었다.그녀가 아는 민지는 자신의 몸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다. 먹고 싶으면 먹고,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항상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냈다.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정은은 눈빛이 깊어졌다.“너, 지금 연애하는 거 아니야?”이 말에 앞에 앉아 있던 서준이 고개를 홱 돌렸고, 검은 눈동자는 횃불처럼 빛났다.“누구랑?”민지는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그런 거 아니야! 절대로!”정은이 물었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한 여자가 갑자기 외모에 신경을 쓰지 시작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좋아하는 사람이
현빈이 대답했다.“넌 네 여자친구랑 춤추고 있었잖아? 그런데도 우리한테 신경 쓸 여력이 있는 거야?”그는 팔짱을 끼며 웃는 듯 마는 듯했다.도겸이 말했다.“그렇게 떠들썩하니 못 본 척하기가 더 어려워.”현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다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야. 거절당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정은이의 성격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니야.”도겸은 무표정하게 어두컴컴한 가로등 아래 서 있었고, 반쪽 얼굴은 그늘에 잠겼다.“내가 말했지, 너한테 기회가 없을 거라고.”현빈은 웃음을 지었다.“난 오히려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하는데! 너도 알잖아, 넘기 어려운 은 산일수록 나한테 승부욕이 더 생긴다는 거. 한 번 실패했다고 매번 지는 것은 아니잖아. 언젠가 난 산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볼 거야.”도겸은 피식 웃었다.“산꼭대기에 오르기 전에 넌 이미 산 중턱에서 떨어져 죽었을 거야.”“그래도 괜찮아. 노력을 할 때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건 우습지도, 슬프지도 않아. 하지만 가장 슬픈 게 뭔지 알아?”도겸은 현빈이 무슨 듣기 좋은 말을 할 리가 없다고 직감했다.“가장 슬픈 것은 거절당할 기회도 없이 소탈한 척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거야. 아쉽게도 아무리 몰입해서 연기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거든.”말을 마치고 현빈은 차 키를 꺼내 운전석에 앉았다.떠나기 전에 그는 특별히 차창을 내려 웃으며 말했다.“여자친구를 기숙사로 데려다주는 거 잊지 마. 그리고 아쉬운 척 뽀뽀도 해주고 그래. 이렇게 연기를 하기 시작한 이상,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도겸은 멀어진 차가 점차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혜가 찾아왔다.“왜 나왔어요? 안 추워요?”“맑은 공기 좀 마시고 싶어서.”“오늘 활동 이미 끝났어요. 오늘 밤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응, 가자.”경혜는 멈칫했다.“가요, 어디로요?”“기숙사로 데려다줄게.”도겸은 말을 마치고 먼저 앞장섰다.경혜는 반응하더니 입가
태민은 은근히 놀랐다.“너도 그 가게의 단골이야?”“네! 거기 케이크가 꽤 괜찮거든요.”태민은 평소에 이런 키체인을 거의 달고 다니지 않았다.한편으로는 수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서른이 넘은 자신이 이런 키체인을 하고 있다면 너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키체인은 태민이 새 핸드폰을 살 때부터 줄곧 걸려 있었고, 눈에 띄지도 않았기에 이렇게 놔둔 것이었다. 그러나 눈 앞의 이 아가씨가 이것을 알아볼 줄이야.“몇 번 뽑았어요?”민지가 물었다.“앞뒤 합치면 아마... 세 번 정도?”민지는 이 말을 듣고 이가 깨질 뻔했다.‘왜 남들은 운이 이렇게 좋은데, 나만 재수가 없는 거지?’태민은 민지가 이를 가는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었다.“괜찮다면 주소 하나 남겨줘. 집에 다른 하나 히든 키체인이 있거든. 너한테 줄게.”민지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부드럽게 웃음을 머금은 태민의 눈빛을 마주했다. 태민의 모습은 마치 어렸을 때 그녀와 함께 놀아줬던 이웃집 오빠와 흡사했다.태민은 키가 1미터 78센티미터였고, 이목구비가 단정하며 온화하고 우아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웃을 때 눈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부드럽고 조금도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물처럼 세상 만물을 감쌀 수 있었다.민지는 멍하니 태민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열기가 솟구쳐 볼과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심지어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정, 정말... 정말 저한테 주는 거예요?”태민은 영문을 몰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말을 더듬기 시작한 거지?’태민은 이 아가씨가 아주 귀엽다고 생각하고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교수님, 행사가 곧 끝날 거예요. 현장에서 회수한 재료를 체크하신 다음 사인해 주세요!”“알았어, 바로 갈게.”이때 태민은 또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 돌아오더니 민지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위에 내 번호 있으니까 나한테 주소 보내
재석은 떠나자, 수아도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저 집에 갈게요.”말을 마치자 태민을 버리고 혼자 떠났다.태민은 영문을 몰랐는데, 입을 벌리고 쫓아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수아를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다.그러나 교수님 대표로서 오늘 밤 태민에게 다른 임무가 있었으니 그는 몸을 뺄 수가 없었다.수아는 가고 싶으면 갈 수 있었고,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태민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태민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분명히 두 사람은 이미 사귀는 사이였지만, 태민은 항상 수아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수아의 마음을 알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두 사람은 여태껏 사귀면서 손을 잡는 것 외에 키스조차 한 적이 없었다.그는 실의에 빠져 고개를 떨구었다.이때 누군가 갑자기 태민과 부딪쳤다.“죄송합니다! 어디 다친 데 없어요?” 민지는 한 손에 접시를 들고 있었고, 안에 과자 5개 정도 들어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 음료수를 들고 있었는데, 방금 태민과 부딪쳤기 때문에 좀 쏟아졌다.그녀는 빨리 사과했다.태민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괜찮아.”말하면서 휴지를 꺼내 건네주었다.“좀 닦아, 음료수가 다 쏟아졌네.”“앗! 감사합니다!” 민지는 얼른 받으려 했지만, 자신의 두 손에 모두 물건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갑자기 난감해했다.태민은 민지의 궁핍함을 알아차렸다.“아니면 내가 접시 들어줄까?”“어? 괜찮으세요?”“그럼.” 태민이 접시를 받았다.민지는 손을 닦았다.“방금 정말 죄송해요. 전 성격이 너무 털털해서...”“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방금 딴 생각을 한 데다가 또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길을 주의하지 않았어.”“제가 사과로 간식 하나 드릴게요.”태민은 그제야 접시에 망고 무스, 두리안 케이크, 나폴레옹 케이크 등 여러 가지 디저트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좋아.” 그도 사양하지 않고 웃으며 그 두리안 케이크를 골랐다.민지는 아쉬움을 드러냈다.“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