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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작가: 십일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08-27 14:06:34
점심을 먹고 난 후, 수민은 동물 공연 티켓 두 장을 사서 소정은과 함께 돌고래 쇼를 보러 가자고 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곳을 지나 두 사람은 남서쪽에 있는 동물 공연장에 도착했다.

공연장 안에는 에어컨이 켜져 있어 밖의 뜨거운 열기와는 전혀 다른 천국 같은 분위기였다. 정은은 동물 공연에 크게 흥미가 없었지만, 수민이 돌고래를 매우 좋아했기에 관객들과의 호응시간에 수민이 정은에게 카메라를 맡기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수민의 밝은 미소에 감염된 정은도 미소를 지었다.

30분 후, 공연이 끝나자 정은은 가방을 수민에게 건네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이윽고 모퉁이를 돌자,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고 있는 서연희가 보였다.

정은은 연희를 발견한 후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연희를 지나쳐 그대로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볼일을 마치고 나왔을 때, 연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보아하니, 정은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은은 그런 연희를 무시한 채 손을 씻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흐르는 가운데, 주변은 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분위기는 점점 긴장감이 더해졌다.

잠시 후, 정은이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연희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러나 곧바로 시선을 돌려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무심하게 행동했다. 그러자 연희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은 언니, 정말 우연이네요.”

정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연희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요즘 잘 지내세요?”

정은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응.”

연희는 정은의 차분한 태도가 진짜인지, 아니면 꾸며낸 것인지 알아내려는 듯 정은을 자세히 관찰했다. 몇 초 후, 연희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요? 빌라에서 나와 사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그러자 정은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사실 제가 정은 언니에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진심으로 말이에요.”

연희는 말하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순수하고 어린 얼굴에 눈물이 고이니 정말 청순하고 연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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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들어가셔도 돼요.” 직원 뒤에는 양옆으로 나뉘어 열리는 커튼이 있었고, 안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커튼 사이로 어둠이 깔린 통로가 보였다. 간간이 비명이 들려오자, 조수민은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키고는 소정은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정은은 그런 수민을 거의 끌어당기듯이 데려갔고, 수민의 겁먹은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우리 그냥 가지 말까?” “안 돼! 여기까지 왔잖아!” 왔으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태도가 한 사람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었다.수민은 무섭다고 하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용감한 척하며 정은을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갑자기 한 공포 인형이 튀어나오자 수민은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아아아! 정은아, 살려줘!” 그때, 강도겸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방금 누군가 정은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봐도 그 익숙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도겸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한편, 서연희는 도겸이 잠시 멍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겁먹은 표정으로 도겸의 팔을 꼭 끼고 말했다. “오빠, 나 무서워요. 오빠가 나 지켜줄 거죠, 그렇죠?” 도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래.” 앞은 너무 어두워, 간간이 깜빡이는 붉은 불빛만 보였다. 연희는 도겸의 팔을 꽉 붙잡고, 두려움에 몸을 더욱더 도겸 쪽으로 기울였고, 스스로 나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느 순간, 얼굴의 반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묻은 여자 귀신 분장을 한 실물 NPC가 나타나자, 연희는 소리를 지르며 더욱더 도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흑흑. 너무 무서워, 오빠, 귀신 나갔어요?”연희는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굴을 도겸의 가슴에 묻었다. 도겸은 대충 연희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응, 없어졌어.”조잡한 분장과 더러운 여자 귀신 복장은 도겸에게는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은이라면 이렇게 무서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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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2화

    곧 이 작은 공간에 소정은 혼자만 남게 되었다. 다행히 경보가 울린 후 조명이 이전보다 밝아졌고, 두 걸음 정도 앞으로 나아가자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두 번째 구역을 무사히 통과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은은 그쪽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는데, 아마 출구 쪽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막힌 것 같았다. 그래서 그쪽으로 가야 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을 때, 뒤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정은은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정은을 벽 쪽으로 밀쳤고, 누군가는 정은의 발을 밟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은은 울퉁불퉁한 벽에 몸이 밀착된 채, 가슴이 압박되어 고통에 숨이 턱 막혔다. 그 순간,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고 있음을 느낀 정은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강도겸은 이 처참한 모습의 정은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정은이었다. 방금 들린 정은아라는 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그러나 곧바로 정은이 귀신의 집을 탐험할 기분이었다는 사실에, 이별 후에도 꽤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오빠?” 연희는 도겸의 팔을 흔들며 긴장한 눈빛으로 정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은은 눈을 내리깔며, 이 두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 듯 군중 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군중 속에서, 동굴 안의 조명이 희미하게 깜빡이던 중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고, 잠시 후, 공중에 매달린 나무 칼이 흔들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나무 칼이 떨어지는 바로 그 아래에는 다름 아닌 정은이 있었다.“조심해!” 도겸은 본능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연희를 밀어내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재빨리 정은을 안전한 곳으로 끌어당겼다. 쾅! 나무 칼이 땅에 떨어지면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그제야 그 칼이 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만 나무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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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3화

    마침 그때, 출구 쪽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출구에서 질서 있게 대기하신 후 나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이 생기자, 현장의 혼란도 금방 진정되었다. 소정은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도겸도 팔을 빼내고 정은을 따라갔다. 그 모습에 연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도겸 오빠, 저도 같이 가요.” 검표소에서 조수민은 이미 밖에 나와 있었다. 내부에서 경로 문제로 인해 화재가 발생할 뻔했다는 말을 듣고, 정은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걱정이 되어 하마터면 뛰어 들어갈 뻔했다. 다행히도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정은은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수민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 “다치지 않았지? 방금 경보 소리를 듣고 너무 놀랐어.” “나 여기 멀쩡히 있으니까, 이제 가자, 집에 가자.” 하루 종일 놀다 보니 정말 피곤했다. 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우리, 어? 저거 도겸 아니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겸이 연희와 함께 뒤따라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놀러 나와서 이런 재수 없는 걸 마주치다니.” 그러자 정은은 한 번 쳐다본 후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그냥 우연히 만난 거니까, 가자.” 돌아가는 길에, 수민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는지 핸들을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정은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집에 안 가?” “결정했어, 지금은 안 갈래. 남자가 뭐 별거야? 80억의 절반이 남자고 널린게 남자야. 오늘 내가 널 새로운 세상에 데려다줄게.”정은은 의문스러웠다....밤 8시, 밤생활이 이제 막 시작할 때였다. 정은은 마치 인형처럼 수민에게 이끌려 시끄러운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독한 담배 냄새와 향수 냄새가 섞인 공기, 불빛은 빨갛고 초록색으로 번갈아 가며 반짝이고, 주변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캐주얼한 옷차림의 정은은 이곳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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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4화

    강도겸은 서연희와 함께 양식당에서 촛불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도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연희는 도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도겸은 속으로 화를 억누르며 대답하지 않았다. 도겸은 그저 핸드폰으로 빠르게 타자하며 답장을 보냈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현빈은 채팅창을 보며 미소를 지었고, 다소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번엔 진짜로 정은 씨랑 끝난 거네?] 도겸은 어이없다는 듯 이를 악물었지만, 현빈은 그저 무심하게 보낸 문자에 불과했다.[응, 왜? 불만 있어?] 현빈은 웃으며 항복을 의미하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며 말했다. [아니, 내가 뭐라고 불만을 가지겠어?] 그리고는 덧붙였다. [그럼 다른 사람이 정은에게 관심을 가져도 신경 안 쓰는 거지?]이때, 고동건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뭐야, 너 혹시 정은 씨 좋아해?]현빈은 조금 진지하게 응답하면서 이모티콘을 보냈다. [응, 응. (이모티콘)] 그러자 전선우가 웃으며 반응했다. [하하하!]동건도 덧붙였다. [너 진짜 대단하네.] 그러나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겸도 이모티콘에 신경 쓰지 않고 타자하며 대답했다. [좋아, 그러면 한번 해봐.] 목적을 달성한 현빈은 핸드폰을 치웠다. 그러나 도겸이 나중에 후회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다....“자기야, 오늘 생일을 이렇게 즐겁게 보내줘서 고마워요.” 저녁 9시, 도겸은 연희를 기숙사 앞에 데려다주었다. 연희는 도겸의 손을 잡고 아쉬운 듯이 말했다. “오빠랑 곧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서운해요.” 연희는 웃으며 작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도겸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입을 삐죽거렸다. “오빠는 왜 이렇게 평온해요? 하나도 아쉽지 않아요?” 연희는 맑고 깨끗한 눈으로 달콤하게 웃으며, 더욱 애교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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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5화

    현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방금 막 따온 부르고뉴 와인이야, 한잔할래?” 현빈은 잔에 반을 따라 강도겸에게 건넸다. 도겸은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괜찮네.” 도겸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아까 정은이도 여기 있다더니, 왜 안 보이지?”현빈은 와인잔을 흔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정은 씨 보러 일부러 온 건 아니지?” 도겸은 약간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 그냥 술이나 마시려고 들른 것뿐이야. 우연히 마주치면 물어볼 수도 있지, 그게 뭐라고.”현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어. 그냥 술 한잔하러 온 것 같은데, 아마 지금쯤 돌아갔을걸?” 도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한결 풀어진 듯했다. ‘역시 정은은 이런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구나.’그러자 도겸도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먼저 가볼게. 오늘 술값은 내 앞으로 해둬.” 현빈은 도겸의 뒷모습을 보며, 눈빛이 약간 깊어졌다. 그러고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하다, 친구야.”...조수민과 소정은은 개인실에서 한 시간도 채 머물지 않았지만, 수민은 술 반병을 마시고는 정신을 잃고 잠들어버렸다. 정은도 술을 마셔 운전할 수 없었기에, 결국 대리운전을 불러 수민을 아파트에 데려다주고, 본인은 택시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갑자기 큰 비가 내렸고, 너무 늦은 시간이라 택시는 골목 입구에 정은을 내려주었다. 정은은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 그칠지 모를 비를 맞으면서라도 집에 달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은아!” 뒤에서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가 정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뒤돌아보니 조재석이 우산을 들고 빗속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비 맞으면서 갈 생각이었어?” 오늘 재석은 셔츠 대신 조금 더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 평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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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6화

    공부하는 일상은 지루하고 단조로웠지만, 소정은은 의외로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오늘도 하루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정은은 어깨를 주무르며 일찍 쉬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 오미선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오미선 교수는 먼저 정은에게 공부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보자 정은은 간단히 진도를 보고드렸다. 오미선 교수는 더 이상 세부적으로 묻지 않았는데 정은을 무척이나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은은 미소를 띤 채, 오미선 교수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일 아침 일찍, 집에 한 번 들러.]그러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늦으면 정은이 거절할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말이다.다음 날, 정은은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데 30분을 보냈다. 물론, 옆집의 조재석을 위해 한 끼 더 준비했다. 어젯밤 잠들 때까지도 옆집에서 문 여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재석은 아마 실험실에서 밤을 새웠을 것이다.이윽고 문이 열렸다. 예상대로 방금 막 돌아온 사람 같아 보였다. 비 내리던 밤 이후로 벌써 2주가 지났지만, 아마 실험실에서 돌아온 직후였기 때문인지, 항상 깔끔했던 재석의 소매는 구겨져 있었고, 미간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은은 지난번에 들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재석이 실험실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정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젯밤부터 약한 불에 천천히 끓여서 아침까지 준비했어요. 밤새신 분들은 속이 좋지 않을 테니, 따뜻한 죽을 먹으면 속이 좀 나아질 거예요.” 재석은 몇 날 며칠 밤을 새워도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했었지만, 이번 며칠간은 불규칙한 식사 때문인지 속이 약간 아팠다. 그래서 정은이 가져온 죽이 지금 재석의 상황에 딱 맞는 음식이었다. “고마워.” “그날 밤 집에 데려다주신 건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죠.” 정은은 미소 지었다. 그러자 재석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말했다. “우린 이웃사촌이잖아.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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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7화

    “네가 기억력이 좋잖아.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 시리즈 중에 유전자 테스트에 대해 다루는 책이 있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 정은은 무언가를 한 번 보면 절대 잊지 않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에 대한 인상은 깊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오미선 교수가 말한 그 책은 며칠 전에 도서관에서 막 뒤적여 본 책이었다. 그래서 정은은 곧장 책장 쪽으로 시선을 돌려 훑어보다가, 이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교수님, 혹시 찾으시는 게 이 책인가요?” 오미선 교수는 표지를 한 번 보더니 말했다.“맞아, 바로 이 책이야! 넌 시력도 좋구나. 한참을 뒤졌는데 바로 눈앞에 있는 걸 못 봤네.”“성준아, 이 책에다가 이 논문 자료들까지 참고하면 충분할 거야. 일단 가져가고, 나중에 내가 다른 것도 찾아볼게.” “감사합니다, 교수님.” 성준은 손을 뻗어 책을 받았다. 요즘 대학원 졸업 논문을 준비하던 중, 필요한 자료가 부족하였는데 오미선 교수에게 원본 자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침 일찍 찾아온 것이었다. 이윽고 오미선 교수는 그제야 두 사람을 소개할 생각이 나셨다. “정은이도 내가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이야. 그리고 곧 다시 내 제자가 될 예정이지.” 성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오미선 교수에게 물었다.“교수님의 대학원생으로 지원하는 겁니까?”그러자 오미선 교수가 곧바로 웃으며 정은에게 말했다. “얘는 하성준이라고 해. 올해 석사 2년 차고, 박사과정을 준비 중이야. 마침 너도 요즘 복습 중이니, 둘이 함께 공부해도 좋겠네.” 그 말을 들은 정은이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소정은이라고 합니다.” 정은도 오미선 교수의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성준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정은과 카톡 아이디를 교환했다. “아, 정말 좋네. 도서관도 같이 갈 수 있고, 전문적인 문제도 서로 논의할 수 있겠어.” 두어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성준은 수업이 있어서 먼저 떠났다. 정은은 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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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8화

    비록 아침 7시에 맞춰 알람을 설정해 두었지만, 연희가 계속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늦을까 봐 허둥지둥 뛰어왔다. “몇 층 가?” 정은은 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2층이요.” 침착한 정은과 달리, 헐레벌떡 뛰느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연희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연희와 정은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순간, 연희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정은의 손에 들린 대학원 시험 준비 자료를 보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정은 언니, 혹시 도서관에 복습하러 온 거예요? 설마 대학원 시험 준비하려는 건 아니죠?” 정은은 말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그러자 연희가 계속 중얼거리며 말했다.“대학생들도 대학원 입학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은데, 졸업한 지 몇 년 된 언니가 정말 합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자 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혹시 그 떨어지는 사람중에 너도 포함인건 아니지?” 연희는 그 말을 듣고 하마터면 화를 참지 못할 뻔했다. 연희는 올해 3학년이다. 취업 생각은 없었기에 막 대학원 입학 준비를 시작한 상태였다. 또한, 어차피 1년 더 남았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같은 기숙사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계획을 세웠지만, 연희는 대학 몇 년 동안 공부를 대충 해왔고, 시험에 합격하면 좋고, 안 되면 강도겸이 뒷받침해 줄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 정은의 말은 연희를 찔리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나 다 언니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나한텐 시험에 합격하는 게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도겸 오빠가 말했거든요.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내 앞에 가져다줄 거라고요.” 그러자 정은은 더 이상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자신감 있길 바랄게.” 말을 마친 정은은 이미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린 하성준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한편, 연희의 룸메이트는 정은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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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57화

    정은은 문을 열고 나가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큰 오빠?”남자는 고개를 돌리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정은아?”‘정말 인훈 오빠였어!’소진우와 박나영의 외아들 소인훈.인훈은 우산을 챙기지 않아 티셔츠는 이미 반쯤 젖었고, 머리에서도 물이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정은은 재빨리 휴지를 꺼내 건네주었다.“좀 닦아, 여름이지만 머리카락이 젖으면 감기에 걸리기 쉬워.”“고마워.” 인훈은 닦으면서 감탄했다.“넌 여전히 어렸을 때와 똑같구나. 세심하고 다정하고.”서점과 옆의 백화점은 연결되어 있었다. 기왕 만난 이상, 밖에 비가 내리고 있으니 남매는 같이 밥을 먹으려 했다.정은은 이미숙에게 전화로 오늘 점심에 돌아가서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이미숙은 몇 마디 물었지만 뭐라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레스토랑 안.경쾌한 음악은 흐리고 궂은 날씨를 밝게 만들었다.두 사람은 창가에 자리를 잡았고, 커다란 유리는 빗소리를 차단하며 오직 빗방울이 떨어지는 풍경만 남겼다.정은은 종업원의 추천으로 몇 가지 간판 요리를 골랐다.음식을 기다리는 사이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행인이 매우 적었지만 차가 엄청 많았다.눈빛을 돌리자, 뜻밖에도 인훈과 눈을 마주쳤다. 정은은 멈칫하더니 수줍게 웃었다.사실 어렸을 때 그녀는 인훈과 사이가 아주 좋았다. 두 사람은 세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 자주 함께 놀았다.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도 남매는 자주 연락했다.인훈은 매번 정은을 찾아올 때마다 맛있는 것을 가져다주었다.정은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때로는 과일빵, 때로는 과자, 때로는 아이스크림.그것은 무미건조한 시간들 중,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대학 다닐 때부터, 정은은 학업과 연애 때문에 바쁘기 시작했고, 인훈은 일을 하느라 바쁘게 돌아쳤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다.대학을 졸업하자, 정은은 도겸 만을 바라보면서 그와 함께 고생하고 회사를 차리며, 그의 일상을 돌보았다. 그리고 인훈은 회사에서 나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56화

    경쾌하면서도 깔끔한 소리였다.“집에 있을 때,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말을 잘 듣고,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가면 안 된다고 했어 안 했어? 넌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거야?! 빨리 돌려주지 못해?! 넌 감옥에 가서 콩밥을 먹고 싶은 거야! 말 안 듣는 녀석...”소순자는 동작이 아주 빨라서 때리고 난 다음 바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아이는 어리둥절해졌고, 여자와 남자도 어안이 벙벙했다.정은조차도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엉엉, 할머니가 나 때려요! 흑흑흑!”웅이는 반응한 다음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이번에는 진심으로 우는 것이었다.“나 안 훔쳤어요! 나도 그게 어디 있는지 몰라요!”“다시 한번 말해봐? 확 때려죽여버린다?!” 소순자는 화가 나면서도 두려움을 느꼈다.“말하기 싫어요! 메롱!”“계속 말 안 들을 거야! 물건 가져오라고! 빨리 내놔!” 소순자는 정말 심하게 때렸는데, 아이의 엉덩이가 빨개졌다.이때 남자와 여자는 가서 소순자를 말리고 잡아당겼지만 아무 소용없었다.“할망구! 왜 날 때리는 거예요? 할망구나 가서 죽어요?!”소순자는 이 말을 듣고 하마터면 화가 나서 쓰러질 뻔했다.결국 경찰이 나서서야 겨우 손을 멈추었다.그러나 웅이도 실컷 얻어맞아 울먹이며 소파 밑에서 자료 한 뭉치를 꺼냈다.“학생, 한번 검사해 보지 그래?”정은은 그것이 자료인 것을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제 보고서가 맞아요.”“그럼 됐어.”정은은 서류를 받고 생각하다 웅이의 부모님을 바라보았다.“제 방은 문이 잠겨 있었어요. 웅이는 창문을 통해 들어왔고요. 2층이라고 해도 엄청 높지 않은 가요? 이렇게 어린 아이가 추락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두 분은 잘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그때 되면 자료가 아니라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요!”남자와 여자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웅이는 가슴이 찔려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그날 밤, 소순자네 가족은 짐을 정리하고 시골로 돌아갔다.한밤중이라서 소진헌은 여기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55화

    “정말 가져갔어도 뭐가 어때서? 쓸데없는 종이 같은 거 아냐? 때릴 거야 아니면 죽일 거야?! 돈도 많은 사람들이 몇 살짜리 애랑 뭘 따지는 거냐고?”“이것 좀 봐, 웅이를 이렇게 놀라게 하다니! 내 아들은 몸이 좋지 않단 말이야. 앞으로 대학에 갈 건데, 울어서 눈이 망가지면, 네가 배상할 거야?!”정은은 여자의 생쇼를 지켜보며 냉소를 지었다.“제가 언제 웅이가 종이를 가져갔다고 말했죠?”여자는 경직해졌다.그러나 소진헌과 이미숙은 다급해졌다.“정은이 방에 있는 그 물건들은 결코 쓸데없는 종이가 아니에요. 모두 매우 중요한 자료란 말이에요! 게다가 우리 정은은 여태껏 남을 모함한 적이 없어요. 지금 웅이가 가져갔다고 말했으니, 틀림없이 증거가 있을 거예요. 얼른 웅이더러 돌려주라고 해요. 그럼 이 일은 그냥 넘어갈게요.”여자는 전혀 듣지 않았다.“정은이가 무슨 왕이야? 하는 말 전부 다 믿게? 오늘 정말 속이 터져서 가만히 있고 싶지 않네! 우리 웅이가 그 물건을 가져갔든 안 가져갔든 절대 돌려주지 않을 거야. 날 어쩌겠어?”정은도 말을 하기 귀찮아 직접 그들의 면전에서 경찰에 신고했다.여자는 이 상황을 보고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내가 법을 모를 것 같아? 종이 몇 장일 뿐, 무슨 값어치 있는 물건도 아니고, 경찰들이 신경 쓸 것 같아?’그러나 30분 후, 경찰들이 정말 찾아왔다.그것도 네 명이 왔다.“신고를 받았는데, 누가 물건을 훔쳤다고요? 그것도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렸다고. 소정은 씨가 누구시죠?”여자는 이 상황을 보자 먼저 입을 열었다.“그냥 아이가 소란을 피우다가 종이 몇 장을 잃어버렸을 뿐인데, 굳이 이렇게 찾아오실 필요가 어딨겠어요?”“제가 나중에 이 사람들 잘 교육시킬게요. 호들갑은 정말! 너희들 경찰의 귀중한 시간을 지체한 거 몰라...”“제가 신고했어요.”정은이 나서서 직접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건 제가 방금 방에 돌아가서 찾아낸 감시 카메라 화면이에요. 그 안에는 이 사람의 아이가 제 자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54화

    정은은 즉시 컴퓨터를 켰다.그녀의 방에는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기에 바로 오늘의 영상 화면을 찾을 수 있었다.화면을 확대하자, 정은은 단번에 소순자의 귀염둥이 손자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정은은 즉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소순자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웅이의 부모님은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으면서 각자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웅이는 소진헌이 이미 맞춘 다른 한 퍼즐을 가져가려 했다.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웅이가 퍼즐을 잡은 순간, 정은은 덥석 가져왔다.“너 내 방에 들어왔었지? 탁자 위의 자료는 어디로 가져간 거야? 지금 늦지 않았으니까 얼른 내 물건 돌려줘.”정은의 표정은 엄숙했고 목소리는 차가웠다.웅이는 여섯 살짜리 아이였기에 눈치를 살필 줄 알았다.정은이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그는 일이 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눈알을 빙빙 굴리더니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어머! 멀쩡한 우리 웅이가 왜 우는 거야? 울지 마, 울지 마, 무슨 일 있으면 엄마한테 말해.”“아빠도 있으니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핸드폰을 가지고 놀던 남녀는 울음소리를 듣고 얼른 다가왔다.하나는 애틋하게 아이를 품에 안았고, 다른 하나는 모자의 곁을 지키며 주먹을 불끈 쥐더니 수시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사실 두 사람은 정은이 입을 열었을 때부터 이쪽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제때에 나서서 사건의 경과를 묻거나 자신의 아이를 훈계하지 않고 계속 핸드폰을 놀았다. 그리고 아이가 울고 나서야 이렇게 뛰쳐나왔다.“정은아, 촌수를 따지면 우리 웅이는 네 삼촌이야! 넌 웅이보다 나이도 많은데 어떻게 아이를 괴롭힐 수 있어?” 여자는 가슴 아파하며 정은을 보는 눈빛은 원망을 품고 있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은이 웅이를 어떻게 한 줄로 오해할 것이다.“그냥 내 물건을 돌려주라고 했을 뿐이에요.”정은은 평온하게 말했다.“만약 이게 괴롭힘이라면, 두 분 평소에도 남들을 적지 않게 괴롭혔겠죠?”“얘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53화

    주덕순은 먼저 별장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웃으며 친척들의 안부를 물었다.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이미숙의 앞으로 다가갔다.“동서, 집이 너무 어지러운 것 같은데, 왜 치우지도 않는 거니?”이미숙은 전에 치웠지만, 매번 3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집이 전보다 더 더러워졌던 것이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동서가 게으름뱅이인 줄 알겠어. 이 바닥 좀 봐, 심지어 흙이 있네. 탁자 위의 그 쓰레기 더미에서 악취가 진동하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어머, 이 수건은 이렇게 까맣게 되었는데도 버리지 않는 거야? 왜, 변기라도 닦으려고?”이때 소순자가 다가와서 수건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내 얼굴 닦는 수건을 왜 가져간 거야?”주덕순은 소름이 돋았다.“어, 어차피 내일은 어머님 팔순잔치니까, 우리야 뭐 집안이 좀 어지럽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이 보게 된다면 창피를 당하는 사람은 동서야, 그러니까 신경 좀 써!”말하면서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이미숙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소진호는 주덕순의 옷을 잡아당기며 그만 좀 하라고 표시했다.주덕순은 불만스럽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왜 날 말리는 건데? 나 아직 말 다 안 했어!’이미숙은 갑자기 웃었다.“사람이 많으면 집안도 당연히 어지러워지겠죠? 그나저나, 형님은 저희에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희가 나서지 않았다면, 형님의 집이 이렇게 더럽고 어지러워졌을 테니까.”주덕순은 말문이 막혔다.이미숙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이득을 본 이상 조용히 있어요. 괜히 호들갑 떨지 말라고요.”“너...”“형님 만약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시면, 집안을 좀 치워주시는 건 어때요? 우리 소씨 가문을 망신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말을 마치자, 이미숙은 빗자루를 가지러 갔다.주덕순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나, 나 갑자기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갈게!”그러고는 소진호를 끌고 얼른 줄행랑을 쳤다....다행히 다음 날이 바로 팔순잔치였다.친척들은 호텔에서 식사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52화

    “너도 핑계 같은 거 대지 마. 난 도시 사람이 아니니, 바깥에서 파는 것들을 먹고 싶지 않구나. 그대도 난 어쨌든 어른인데, 아침밥을 좀 해 달라고 하면 뭐가 어때서? 싫으면 내가 네 시어머니 찾아가서 잘 좀 이야기해야겠구나!”말하면서 소순자는 소리를 지르며 화가 나서 머리가 아프다니, 또 배가 고프다니 하며 난리를 피웠다.다른 사람들은 이를 듣고 이미숙을 비난하기 시작했다.이미숙은 이 징그러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마 평소에 적지 않게 뭉쳐서 남을 많이 괴롭혔을 것이다.“고모 할머니, 집에서 만든 아침을 드시고 싶은 거예요? 그래요, 제가 정은이 아버지한테 만들라고 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아니! 내 말을 못 알아들겠어? 너보고 하라는 거지. 진헌이를 시키라는 게 아니잖아! 남자가 돈을 벌고, 여자가 내조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다 알겠는데요...”이미숙은 살짝 웃었다.“저희 집에선 제가 정은이 아버지보다 더 많이 벌거든요. 이 별장조차도 다 제 돈으로 샀어요. 할머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라면, 그이가 요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네요.”“뻥치고 있네, 네가 이렇게 큰 별장을 샀다고?!”소순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미숙은 담담하게 말했다.“맞아요.”옆에 있던 나정혜는 소순자의 어깨를 힘껏 부딪치더니 목소리를 억누르며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어제 진헌에게 물어봤는데, 이 별장은 확실히 정은이 엄마가 산 거예요...”소순자는 멍해졌다.이미숙은 더 이상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서재로 돌아섰다.‘아니...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가 있지? 이렇게 큰 별장까지 샀다고?!’소순자는 이미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나정혜는 입을 삐죽거렸다.“제가 이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저도 밥을 하지 않고 남자가 다 해 주기를 기다릴 거예요. 돈이 있는 이상, 누가 주방에 가서 일하고 싶겠어요? 어르신이라면 그렇고 싶으시겠어요?”소순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 돈이 있다면 누가 집구석에 박혀 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51화

    텔레비전 액정이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깨졌다.어른들은 천천히 나타나서 아이들을 호되게 꾸짖은 후 또 소진헌에게 사과했다.꽤 그럴 듯 해 보였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좀 이상했다.“진헌아, 정말 미안해. 하지만 너도 이제 부자이니 텔레비전 하나 정도 사는 건 부담이 없잖아?”“그래, 아이들은 철이 없어서 자주 물건을 던지고 부수겠지. 진헌이가 어떻게 어린 아이들과 다투겠어?”“그럼! 네 말이 맞아!”정말 남에게 배상하라고 할 수 없었기에 이 일은 결국 이대로 넘어갔다.하지만 소진헌은 깨진 텔레비전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백만 원 주고 새로 산 건데...’“자, 이제 우리도 자러 가야지.”...이튿날 아침, 정은은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깨어났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6시조차 안 됐다.다음 순간, 그녀는 뭔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확실히 아래층에서 들려온 소리였다.‘그런데 텔레비전은 이미 망가졌잖아?’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중년 여자들이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손에 핸드폰을 들고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그 소리도 무척 컸다.정은은 입을 열어 그들을 제지하려 했다. 이미숙은 아침에 글을 썼고, 서재는 바로 1층에 있었다.이렇게 시끄러운 환경에서 이미숙은 글을 쓸 방법이 없었다.그러나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숙이 방에서 뛰쳐나왔다.모녀는 이렇게 딱 마주쳤다.이미숙은 정은을 본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가 화가 점차 가라앉았다.“시끄러워서 깼어?” 이미숙은 정은의 얼굴을 만지며 마음이 무척 아팠다.정은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저 아침 사러 갈게요.”집안이 너무 시끄러우니 차라리 밖에 나가는 게 더 나았다.“그래.”떠나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이미숙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그리고 또 쓰레기장처럼 더러운 거실을 보자, 그녀는 아예 서재로 돌아갔다.‘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지 뭐.’그러나 소순자가 웃으면서 자신을 향해 걸어올 줄이야.“정은 엄마, 이미 7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50화

    정은은 특별히 나가서 대문을 확인했는데, 확실히 자신의 집이었다.옅은 회색의 바닥에는 신발 자국과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사람들은 한담을 하면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껍질이며 과일 씨며 포장이며 전부 땅에 던졌다.원래 깨끗했던 벽도 어느 아이가 밟았는지 시커먼 발자국 두 개를 남겼다.윙윙거리는 말소리까지 섞이니 현장은 마치 꿀벌의 모임과 같았다.정은은 고개를 돌려 이미숙을 보았다.이미숙은 씁쓸하게 웃으며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래, 네가 본 그대로야.’정은은 이런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았다.물론 그럴 순 없었다. 친척들은 정은을 발견하고 즉시 웃으며 다가왔기 때문이다.“이야! 이 아이가 바로 진헌이 딸이니? 너무 예쁘게 컸네! 지금은 서비대학교의 대학원생이라며? 출세했네!”“정말 우리 정은이잖아! 키도 참 많이 컸네. 결혼했어? 왜 아직도 공부를 하고 있는 거야? 넌 그동안 줄곧 학교 다닌 것 같은데? 그러다 늙은 처녀가 될지도 몰라!”“오느라 수고했어, 자, 얼른 과일 좀 먹어!”한 무리의 사람들은 마치 신기한 동물이라도 본 것처럼 정은을 중간에 에워싸고 끊임없이 재잘거렸다.정은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또 대충 대답한 다음 화장실에 간다며 마침내 빠져나왔다.그녀는 서둘러 위층의 방으로 돌아갔다.그러나 방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정은은 눈썹을 찌푸리며 한 바퀴 검사했지만, 다행히 잃어버린 물건을 없었다.그녀는 숨을 가볍게 쉬고 서둘러 문을 닫으며 소란스러운 소리를 전부 차단했다.저녁은 이미숙이 책임졌다.이미숙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사람들을 하루 종일 모시느라 고생한 소진헌이 요리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서 직접 레스토랑의 배달을 시켰다.십여 명의 사람들은 무척 만족스러웠다.그러나 설거지와 치우는 일은 여전히 소진헌이 해야 했다.소순자는 그가 앞치마를 매는 것을 보고 직접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진헌아, 너 뭐하는 거야?”“주방 좀 치우려고요.“사내가 주방에 가면 못 써! 네 마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49화

    오직 셋째 소진헌만이 그들에 비하면 많이 못살았다.‘명문대를 졸업한 다음 선생님이 되었다고 했나? 좋긴 좋지만 돈을 못 벌잖아!’소순자는 집에 있을 때 줄곧 비아냥거렸다.‘진말숙의 자식들도 다 돈이 있는 건 아니구나!’그러나 지금은 소진헌까지 부자로 됐다니.‘진말숙은 팔자도 참 좋구나...’소순자는 생각할수록 속상해서 손자에게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온 김에 제대로 먹어야지!’소순자와 여덟 식구 말고도 '숙모'라고 불리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도 온 집안식구를 데리고 왔다.숙모 나정혜는 집에 들어온 후, 소순자와 약속이나 한 듯 감탄을 금치 못했다.“진헌아, 너 로또라도 당첨된 거야?”“지금 선생님은 돈을 이렇게 많이 벌 수 있는 건가?”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이 안에 뭐 있지? 돈 건질 수 있는 방법 말이야.”소진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흔들었다.“절대 없어요! 저는 국공립학교의 선생님이라 매달 고정된 월급만 받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돈을 건질 수 있겠어요?”“너도 참, 이 숙모를 남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런 적이 없다면 어떻게 이렇게 크고 예쁜 별장을 살 수 있겠어? 장난해?”소진헌은 머리를 긁적였다.“저는 확실히 아무런 돈도 벌지 못했어요. 그러나 제 아내와 딸은 돈을 많이 벌거든요. 이 별장도 다 집사람과 정은이 산 거지, 저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저는 아무런 능력도 없어서 그저 운이 좀 좋았을 뿐이에요. 이렇게 좋은 아내를 얻고 또 효자 딸을 낳았으니까요.”나정혜는 어이가 없었다.‘지금 돈을 어떻게 벌었냐고 묻고 있는데, 왜 엉뚱한 대답만 하는 거야? 네가 행복하든 말든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사람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이 선생님은 무슨!’나정혜는 난간을 만지다가 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시선은 방금 소순자가 탐냈던 그 꽃병에 떨어졌다.“진헌아, 이거 정말 예쁘네. 엄청 비싸지?”소진헌은 나정혜의 성격을 그런대로 잘 알고 있었다. ‘이 꽃병이 마음에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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