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7화

Author: 십일
“네가 기억력이 좋잖아.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 시리즈 중에 유전자 테스트에 대해 다루는 책이 있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

정은은 무언가를 한 번 보면 절대 잊지 않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에 대한 인상은 깊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오미선 교수가 말한 그 책은 며칠 전에 도서관에서 막 뒤적여 본 책이었다. 그래서 정은은 곧장 책장 쪽으로 시선을 돌려 훑어보다가, 이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교수님, 혹시 찾으시는 게 이 책인가요?”

오미선 교수는 표지를 한 번 보더니 말했다.

“맞아, 바로 이 책이야! 넌 시력도 좋구나. 한참을 뒤졌는데 바로 눈앞에 있는 걸 못 봤네.”

“성준아, 이 책에다가 이 논문 자료들까지 참고하면 충분할 거야. 일단 가져가고, 나중에 내가 다른 것도 찾아볼게.”

“감사합니다, 교수님.”

성준은 손을 뻗어 책을 받았다. 요즘 대학원 졸업 논문을 준비하던 중, 필요한 자료가 부족하였는데 오미선 교수에게 원본 자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침 일찍 찾아온 것이었다.

이윽고 오미선 교수는 그제야 두 사람을 소개할 생각이 나셨다.

“정은이도 내가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이야. 그리고 곧 다시 내 제자가 될 예정이지.”

성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오미선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의 대학원생으로 지원하는 겁니까?”

그러자 오미선 교수가 곧바로 웃으며 정은에게 말했다.

“얘는 하성준이라고 해. 올해 석사 2년 차고, 박사과정을 준비 중이야. 마침 너도 요즘 복습 중이니, 둘이 함께 공부해도 좋겠네.”

그 말을 들은 정은이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소정은이라고 합니다.”

정은도 오미선 교수의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성준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정은과 카톡 아이디를 교환했다.

“아, 정말 좋네. 도서관도 같이 갈 수 있고, 전문적인 문제도 서로 논의할 수 있겠어.”

두어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성준은 수업이 있어서 먼저 떠났다.

정은은 테이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8화

    비록 아침 7시에 맞춰 알람을 설정해 두었지만, 연희가 계속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늦을까 봐 허둥지둥 뛰어왔다. “몇 층 가?” 정은은 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2층이요.” 침착한 정은과 달리, 헐레벌떡 뛰느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연희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연희와 정은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순간, 연희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정은의 손에 들린 대학원 시험 준비 자료를 보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정은 언니, 혹시 도서관에 복습하러 온 거예요? 설마 대학원 시험 준비하려는 건 아니죠?” 정은은 말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그러자 연희가 계속 중얼거리며 말했다.“대학생들도 대학원 입학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은데, 졸업한 지 몇 년 된 언니가 정말 합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자 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혹시 그 떨어지는 사람중에 너도 포함인건 아니지?” 연희는 그 말을 듣고 하마터면 화를 참지 못할 뻔했다. 연희는 올해 3학년이다. 취업 생각은 없었기에 막 대학원 입학 준비를 시작한 상태였다. 또한, 어차피 1년 더 남았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같은 기숙사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계획을 세웠지만, 연희는 대학 몇 년 동안 공부를 대충 해왔고, 시험에 합격하면 좋고, 안 되면 강도겸이 뒷받침해 줄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 정은의 말은 연희를 찔리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나 다 언니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나한텐 시험에 합격하는 게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도겸 오빠가 말했거든요.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내 앞에 가져다줄 거라고요.” 그러자 정은은 더 이상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자신감 있길 바랄게.” 말을 마친 정은은 이미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린 하성준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한편, 연희의 룸메이트는 정은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9화

    연희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연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도겸의 뒤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이 별장이 매우 크고, 넓고, 밝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연희가 이렇게 직접 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미국식 인테리어 스타일로, 회색과 갈색, 흑백이 주요 색상으로 사용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절제된 느낌이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은근히 드러나는 고급스러움이 있었다. 또한, 대학교 2학년 때 예술 감상을 선택 과목으로 들었던 연희는 벽에 걸린 그림이 치바이석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주변에 놓인 물건들은 하나같이 값비싼 것들이었고,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쓰레기통에도 명품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거실을 지나면 정성스럽게 가꾼 실내 정원이 나타났고, 그 옆에는 별도로 마련된 미디어룸과 헬스장이 있었으며, 구석에는 골프채 세트도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별장 단지에는 골프장도 함께 있다고 들었다. 연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도겸을 만나기 전까지 연희가 본 것 중 가장 사치스러운 물건은 동급생이 메고 다니던 에르메스 버킨백 켈리백 악어가죽 25였다. 그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한정판으로, 중고 시장에서도 5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5억 원이면 연희의 고향에서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이 별장 안에는 고급스러운 H 로고가 도처에 있었다. 열쇠고리, 카드게임, 라이터까지. 만약 연희가 도겸의 곁에 계속 머물고, 도겸과 결혼해 도겸의 아이를 낳는다면, 자신이 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큰 별장, 명품 가방, 운전사가 따라붙고, 집안일은 집사들이 해주는 그런 삶.그러나 도겸은 연희의 생각이 다른 데 가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죽은 매우 걸쭉하게 끓여졌지만, 도겸은 한 입만 먹고는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 도겸의 모습에 연희는 눈을 깜빡이며 의아해했다. “왜 안 먹어요? 맛없어요?”그러자 도겸이 대답했다. “방금 퇴근하면서 이미 먹었어. 지금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0화

    “응?” 강도겸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오빠, 제 지문을 여기 잠금장치에 등록해 줄 수 있어요?” 서연희는 대문에 있는 잠금장치를 가리키며, 눈살을 찌푸리고는 마치 비 쫄딱 맞은 강아지처럼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 여기서 몇 번이나 오빠를 기다렸잖아요. 보세요, 손이며 다리에 이렇게 모기한테 물린 자국이 몇 개나 돼요.”“오빠, 다음에도 이렇게 물린 채로 기다리게 할 거예요?” 그러자 도겸이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지.” “야호!” 연희는 기뻐하며 뛰어올랐다. “사실, 일부러 그런 거예요. 제 지문을 등록해서 이제부터는 마음 놓고 오빠를 찾아오고 싶었어요.” 그러자 도겸이 웃으며 말했다. “어쩜, 아직도 어린아이 같네.” 이윽고 도겸은 연희의 지문을 잠금장치에 등록해 주었다. 오늘 연희가 특별히 준비해 온 죽과 연희의 손과 다리에 난 모기 자국을 생각하며, 도겸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이건 내 가족카드야. 월 한도는 2000만 원이니까, 좋아하는 거 사.” 연희는 당황해하며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아니에요, 저, 제가 어떻게 오빠 돈을 써요?” “여자가 남자 돈을 쓰는 건 당연한 거야.” “정말요?” “받아,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럼, 알겠어요.” 연희는 환하게 웃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그럼 내일 다시 죽 가져올게요!” 도겸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연희가 끓인 죽은 도겸이 원하는 맛이 아니었기 때문에, 몇 번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한편, 하루 종일 공부를 한 소정은은 도서관 밖에서 하성준과 헤어졌다. 성준은 대학원 입시 때 1차, 2차 모두 1등을 차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대학원 입시에 대한 노하우가 많았고, 중요한 부분을 정은에게 표시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 정은은 원래 성준에게 저녁을 사주고 싶었지만, 성준이 갑작스러운 룸메이트의 전화로 다음 날 계속 공부하기로 하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1화

    성준을 본보기로 삼은 정은은 효율이 많이 제고되었다. 오전에 시험지를 두 세트를 풀었다.성준은 채점할 때, 놀랍게도 모두의 정확률이 95%에 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정은은 졸업한 지 3년이나 지났고, 최근에야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강할 줄이야! 오미선 교수님이 정은을 그렇게 중시하신 것도 다 이유가 있구나.’정은은 성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몰랐고, 화장실에 가겠다고 말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다른 한쪽에 있던 연희도 얼른 따라갔다.“잠깐만요.”정은은 고개를 돌렸는데, 갑자기 나타난 연희 때문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무슨 일 있어?”“어젯밤에 제가 별장에 가서 도겸 오빠에게 죽을 가져다줬어요. 오빠가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릇을 싹 비웠거든요.”연희는 미소를 지으며 작은 보조개 두 개를 드러냈다.“뿐만 아니라, 도겸 오빠가 별장에서 밤을 보내라고 했어요. 저도 처음으로 알았어요. 도겸 오빠에게 거칠면서도 섹시한 면이 있다는 거. 밤새 잠을 잘 못 잤다니까요.”그녀는 일부러 그럴듯하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고, 속눈썹까지 가볍게 떨며 첫날밤을 보낸 새색시처럼 수줍어했다.정은은 가슴이 따끔해지더니 숨이 막혀왔다.“부럽죠?” 연희는 정은의 귓가에 다가가서 말했다.“후회하죠? 아쉽게도 언니는 이제 기회가 없어요.”이때, 정은은 미소를 지으며 연희에게 또박또박 말했다.“강도겸이 너에게만 그럴 것 같아?”연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정은은 계속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넌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러니 너도 강도겸의 마지막 여자가 아니겠지.”말을 마친 다음, 연희의 표정이 어떻든 정은은 신경 쓰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마지막 문제를 채점한 후에야 성준은 옆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려 했지만, 마침 정은이 돌아왔다.성준은 고개를 살짝 돌리자, 정은의 약간 창백한 얼굴을 보았고, 걱정을 금치 못했다.“괜찮아? 어디 불편한 거야?”정은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2화

    남자의 손은 뼈마디가 뚜렷했고, 길쭉하면서도 예뻤다. 한쪽으로 눈을 드리우자, 정은은 그 사람의 카트에 인스턴트식품과 밀키트로 가득 찬 것을 발견했다. 시선을 위로 옮기니, 예쁜 손의 주인도 마침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저녁에 설마 이런 것만 먹는 건 아니겠죠?”“에헴! 가끔 집에 늦게 돌아올 때가 있는데, 배달시키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간단하게 먹으면 되거든.”조재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계산해 봤는데, 이 음식들은 사람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단백질과 비타민, 그리고 탄수화물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어.”정은은 재석이 진지하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우리 조 교수님은 이미 과학적인 계산과 정확한 추산을 통해 모든 방면을 고려한 것 같네요. 하지만 따끈따끈한 밥과 이 밀키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선배님은 무엇을 선택할 건가요?”재석은 침묵했고, 그 대답 역시 아주 뻔했다. 누가 따뜻한 밥을 놔두고 인스턴트 푸드를 먹으려 하겠는가?정은은 교활하게 웃었다.“그러니까요. 저녁은 내가 할 테니까, 보답으로 선배님은 딱 한 가지 일만 도와주시면 돼요.”...30분 후, 재석은 도마 위에 있는 물고기를 바라보았다.“이건 손질하기가 좀 어려운 것 같아.”정은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사실 평소에 마트에는 회를 썰어주는 아저씨가 있는데, 오늘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저 간단하게 처리해줬을 뿐이에요. 선배님 만약...”재석은 소매를 걷어 올리며 안경을 벗었다.“한 번 해볼게.”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광어회로 만든 매운탕이 더 얼큰하고 맛있었는데, 물고기를 손질하는 것은 너무 번거로웠기에 정은은 이 일을 남에게 맡기고 싶었다.그러나 재석이 주방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정은은 또 조금 미안하다고 느꼈다. ‘물리학자에게 회를 썰라고 하다니, 인재를 너무 낭비하는 것 같은데?’5분 후, 정은은 도톰하고 크기가 비슷한 회를 보면서 방금 한 말을 거두기로 했다.‘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3화

    그중에는 또 정은이 찍은 수미의 사진이 있었다. 그때의 수미는 마침 금방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왔고, 그야말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처럼 넋을 잃었다. 그 사진을 보기만 해도 정은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마지막까지 훑어보니, 정은의 단독 사진뿐이었다. 핸드폰을 끄려던 참에, 그녀는 배경의 행인 중 익숙한 두 사람을 발견했다.정은은 입술을 깨물었다.‘실수로 서연희와 강도겸을 찍은 것 같군.’사진 속의 주인공은 정은이었고, 뒤에 있는 사람은 단지 지나가는 배경일 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있으니, 오히려 그녀가 그 두 커플을 방해한 것 같았다....“이모님, 이모님!”도겸은 배를 안고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이른 아침, 도겸은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 간간이 쥐어짜는 위통에 그는 온몸이 차가웠고, 구역질이 났지만 또 아무것도 토하지 못했다.이런 통증은 도겸에게 있어 무척 익숙했다. 위병이 도진 것이었다. ‘집에 위장약이 있는 것 같은데,’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지 케이스 하나만 남았을 뿐, 안의 약은 이미 떨어졌다.도겸은 고통을 참으며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장약 사서 별장으로 들고 와.”비서는 1초도 감히 꾸물거리지 못하고 즉시 약국에 가서 약을 샀다.차를 몰고 별장에 도착했을 때, 비서는 도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대표님, 얼른 약 드시죠.”도겸은 그가 건네준 알약과 따뜻한 물을 받아 그대로 삼켰다.“뭐 좀 드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도겸은 손을 흔들었다,“먼저 가봐.”비서는 한숨을 돌리며 조용히 떠났다. 그러나 한 시간도 안 되어 도겸의 전화가 또다시 걸려왔다.[넌 대체 무슨 위장약을 산 거야?! 먹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하지 못하다니. 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거야 아니면 눈이 아예 보이지 않는 거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4화

    맞은편의 정은은 멈칫했다. 머릿속에 도겸이 연희와 손을 잡고 웃는 모습이 떠오르자,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아프면 병원에 가. 난 의사가 아니니까.]그리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 말투는 마치 정말 도겸을 낯선 사람으로 여긴 것 같았다.도겸은 화가 나서 이를 꽉 깨물었고,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더니 직접 핸드폰을 벽에 던지며 부숴버렸다.한쪽에 있던 왕순자는 말문이 막혔다.‘그건 내 핸드폰인데!!’정은의 말에 분노가 솟구친 도겸은 위가 더욱 아픈 것 같았다. 그래도 자존심 때문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직접 위층으로 돌아가 자신을 방에 가두었다.‘내가 정말 자기 없으면 못 산다고 생각하나 봐?! 웃기네!’왕순자는 자신의 망가진 핸드폰을 보면서 머리를 흔들며 탄식했다.‘도련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정은 아가씨가 얼마나 좋은데, 가차없이 쫓아내시다니...’오후에 왕순자는 청소를 마치고 떠나기 전에 침실 문을 두드렸다.“도련님?”대답이 없자, 그녀는 도겸이 아직도 화난 줄 알고 먼저 떠났다.오후, 강서정은 차를 몰고 별장에 도착했고, 익숙하게 지문으로 문을 연 다음, 안으로 들어왔다.“오빠, 내가 엄마 대신 말 전하러 왔어. 이번에는 진씨 가문의 아가씨인데, 컬럼비아대학의 박사야... 오빠? 집에 없나?”서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도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은 바로 귓가에서 울렸다.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볼 수 있었다.‘핸드폰이 집에 있으니 외출하진 않았을 텐데.’생각하다 서정은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오빠? 안에 있어? 엄마가 진씨 가문의 사람들과 함께 밥 먹으라고 하셨어. 들었어?”한참 노크를 했지만, 안에는 줄곧 대답이 없었다.‘뭐야? 왜 인기척이 하나도 없는 거지?’서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왕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도련님은 줄곧 집에 계셨는데. 안색이 안 좋으신 걸 보니, 아마도 위장병이 도졌나 봅니다. 대답이 없으시다고요? 설마 기절하신 건 아니겠죠?]서정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5화

    이 말이 나오자, 방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서정도 의혹을 느꼈다. ‘예전 같으면, 오빠가 입원한 그 순간부터 정은 언니는 이미 침대 앞에 앉아 눈물을 글썽이며 시중을 들어줬을 텐데. 이번에는 왜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은 거야?’도겸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하지 않았고, 선우와 동건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것도 현빈이 먼저 담담하게 입을 연 것이었다.“두 사람 이미 헤어졌는데, 모르셨어요?”서영숙은 눈살을 찌푸렸다.“아직도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거야? 이게 벌써 며칠째야? 성질은 있어가지고!”이 말을 듣고, 도겸은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아주머니, 이번에는 아마 그렇게 쉽게 화해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현빈은 서영숙을 힐끗 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야? 소정은이 지금 거드름이라도 피우고 있다 이거야?!”“어머니.” 도겸은 차갑게 입을 열며 그녀의 말을 끊었고, 표정은 더욱 차가웠다.“이번에는 정말 헤어졌어요. 그것도 제가 먼저 제기했고요.”“뭐라고?” 서영숙은 흠칫 놀랐고, 서정도 충격을 받은 받은 모양이었다.‘하긴, 이번에 정은 언니도 확실히 좀 오래 삐졌지...’서영숙은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즉시 정은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된 순간, 정은이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냉소를 지었다.“소정은, 네가 뭔데 이렇게 버릇없이 구는 거야? 넌 그때 내 아들이 너한테 반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돼! 그동안 우리 도겸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데, 넌 또 어떻게 보답했니? 양심도 없는 것, 길가의 개도 너보다 낫겠어!”서영숙은 이를 악물었다.“내 아들 지금 아파서 입원했어. 빨리 와!”맞은편의 정은은 심지어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이때 차분하게 대답했다.[죄송해요, 이제 강도겸은 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거든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바로 서영숙을 차단했고, 또 톡까지 삭제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정은은 길게 숨을 내쉬며 여태껏 느껴본 적이 없

Latest chapter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8화

    웨이터에게 물어본 후에야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다.그러나 다가오자마자 송정후가 쫓아오더니, 더러운 손으로 정은을 잡으려 하는 것을 볼 줄이야. 재석은 다급해지는 바람에 바로 입을 뗐다.송정후는 몸이 굳어졌다.정은은 멍하니 있다가 웃으며 재석을 향해 걸어갔다.“교수님.”재석은 정은이 다치지 않았단 것을 여러 번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돌렸다.“왜 나왔어? 밖은 춥지도 않니?”지금 재석의 말투가 너무 부드러워서, 방금 송정후를 호통친 모습과 그야말로 극과극이었다.“안이 좀 답답해서 바람 좀 쐬러 나왔는데, 뜻밖에도 미친 개를 만날 줄은 몰랐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말걸 그랬어요.”정은은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지금 그녀는 송정후의 코를 가리키며 ‘네가 바로 그 개’라고 말할 뻔했다.송정후는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이때 갑자기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또 누구의 학생이 이렇게 날뛰는지 했는데, 알고 보니 조 교수의 학생이었구나? 어쩐지.”“한동안 못 봤는데, 조 교수는 언제 이렇게 예쁜 여학생을 제자로 삼은 거지? 가르칠 때 몸이, 아니지, 마음이 엄청 편하겠지? 말하자면, 네 곁에는 항상 예쁜 여자가 많았지. 정말 부럽네 부러워.”송정후는 갑자기 비아냥거리더니 재석을 모함했다.올해 초, 두 사람은 같은 국가급 프로젝트를 경쟁했는데, 송정후는 재석에게 졌기에 두 사람 사이가 이미 틀어졌다.그후 또 ‘가장 뛰어난 청년 연구원’ 선정에서 재석과 다투었는데, 송정후는 재차 실패를 거두었다.두 사람은 지금 라이벌과 다름이 없었다.송정후는 H시에 있고, 재석은 J시에 있는데, 두 사람은 일년 내내 몇 번 만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송정후가 수를 써서 체면을 되찾으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지금 기회가 이렇게 찾아왔으니 당연히 잘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송정후는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나는 또 조 교수가 정말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지. 그런데 그저 눈이 좀 높았던 것뿐이었네?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만 손을 대다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7화

    “얘기 좀 해도 되지?”정은은 마음속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되지만, 전 교수님과 같은 분야를 전공하지 않아서요.”“어제 포럼에서 발언할 때, 과학 연구의 매력의 절반은 교차 학문 연구 간의 협력에서 온다고 했잖아? 내가 잘못 기억한 건 아니겠지?”“네.”“하하...”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말 잘하네, 그래서 인상이 정말 깊었어.”정은은 남자의 일부러 웃는 소리에 좀 불편했다.‘선배님이 이런 웃음을 지을 때는 그렇게 듣기 좋았는데...’“에헴! 죄송하지만, 송 교수님. 전 잠깐 나온 것일 뿐이라, 교수님께서 저를 찾으실 거예요.”말을 마치자마자 정은은 떠날 준비를 했다.그러나 송정후는 그녀를 불렀다.“정은아.” 그리고 다시 물었다.“네 교수님은 누구시지? 고경학? 유개훈? 아니면... 조재석?”송정후가 언급한 ‘고경학’과 ‘유개훈’은 모두 오미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정은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죠?”송정후는 미소를 띠며 답했다.“나 다 봤어. 어젯밤 그 섬에서 아주 재밌게 잘 놀던데?”그의 말투는 일부러 무언가를 암시한 것 같았고, 징그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아주 재밌게 잘 놀았다’는 말에 고의로 힘을 주었기에, 아무리 봐도 정은은 불쾌함을 느꼈다.정은은 냉정하게 말했다.“송 교수님, 말씀 조심하세요.”송정후는 웃음을 멈추더니 비아냥거리는 듯 말을 이었다.“하하, 시치미를 떼는군. 오늘 여기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분들 덕분이잖아? 예상도 하지 못했어, 그분들이 널 공유할 줄은.”송정후는 정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그래, 넌 젊고 예뻐서, 학계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라 할 수 있지. 독차지할 수 없는 이상, 차라리 대범하게 나서는 게 좋지 않겠어? 너한테도 이득일 텐데.”송정후의 비웃음이 짙어졌다.“그래, 이 방법이 얼마나 좋아!”정은은 송정후의 웃음을 다시 듣고서야 그 소리가 왜 불편했는지를 알아차렸다. 그 이유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6화

    이 어르신들은 재석이라는 이 인기 있는 인물을 자신의 ‘사위’로 삼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척에게 소개하고 싶었고, 또 어떤 교수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인연을 맺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며, 수많은 시도 속에서 재석의 답변은 언제나 그 한마디뿐이었다.“당분간 그럴 생각이 없어요.”원래 임 교수도 이번에는 말을 꺼내지 않으려 했고, 어차피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오혜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국제 물리 교류회가 벌써 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혜정은 여전히 재석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모든 교수들에게 각자의 ‘정은’이 있었다. 임 교수도 자기 학생들을 위해서 한 번 더 기회를 쟁취하고 싶었다."거절하면 거절했지 뭐, 허허. 거절 안 당한 것도 아니지만, 만약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잖아?"임 교수는 ‘당분간 그럴 생각이 없어요’라는 말을 들을 준비를 했지만, 뜻밖에도...“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너무 놀란 임 교수는 재석이 떠났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누구를 좋아하는 거지?’...한편, 정은은 오미선을 따라 몇몇 교수들과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서 있었다.오미선은 정은이 지루해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했다.“배고프지? 가서 뭐 좀 먹어.”“네.”교수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는 없었지만, 전공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야기하다가 결국 화제는 집안 이야기로 흘러갔다.‘역시, 노부인들이 모이면 이런 얘기는 피할 수 없지.’정은은 곧장 그 자리를 떠났다.‘이런 얘기는 내가 듣기엔 좀 너무 과하잖아.’술장과 디저트 코너를 한 바퀴 돌면서, 정은은 따뜻한 음료를 한 잔 마시며 과자도 몇 개 먹었다.‘음, 이제야 배부르네.’오미선이 옛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정은은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연회장 뒷문으로 향했다.밖에는 작은 화원이 있었는데, 밤바람이 서서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5화

    밤은 깊어졌고, 달빛이 휘영청 밝았다. 만찬은 호텔의 가장 큰 연회장에서 열리며, 참석자들은 잠시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 후 바로 올 수 있게 했다. 레드카펫도, 꽃도, 고급 차도 없고, 열어놓은 술장과 음식 코너만으로 만찬의 분위기가 조금 느껴진다. 대부분 남성들은 양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간단한 셔츠를 입고 이번 만찬에 참석했다. 상대적으로, 만찬에 참석한 여성들은 좀 더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머리는 깨끗이 감은 데다가 옷차림도 단정했다. 캐주얼한 정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한복을 입은 사람도 있으며, 일부 교수들은 새로운 한복을 곁들은 패션을 선호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남자 교수는 여자 교수보다 훨씬 더 많았다. 물론 젊은 사람들도 많았다. 대부분은 자신이 따르는 교수나 연구원을 따라 참석한 이들로, 이번 만찬을 통해 학문적 시야를 넓히고 싶어했다. 정은은 초대장을 들고 재석과 함께 연회장에 들어섰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수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오미선은 먼저 도착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재석은 여전히 양복을 입었고, 너무 격식을 차린 느낌보다는 약간 캐주얼한 디자인이 가미되어 있어 좀 더 자유롭고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 정은은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을 위해 립스틱을 발랐고, 카멜색 외투에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단순했지만, 엄청나게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 오히려 돋보였다. 너무 젊어서 이런 만찬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믿는 이가 대부분이었고, 또한 정은이 학문과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도 드물었다. 재석은 살짝 기침을 하며 담담한 눈빛을 던졌다. 그 시선에 압박감을 느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정은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오미선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긴장돼?” “조금이요.” “걱정 마, 이따가 내가 사람 소개해줄게.” “좋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4화

    “이건 뭐죠?”정은은 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감정을 억누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스태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정은 씨, 오늘 저녁 학술 만찬에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정말 뛰어난 연구자시네요.”그 말을 끝으로 스태프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정은은 손에 든 초대장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지더니, 놀람과 당황이 스치고 지나간 끝에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매년 열리는 정상희의가 끝나면 ‘학술 만찬’가 열리는데, 포럼 기간 동안 뛰어난 성과를 보인 연구자들이 초청된다.그 만찬의 입장권이 바로 이 붉은 초대장이었다.오미선과 재석처럼 뛰어난 학자들은 포럼 첫날에 이미 초대장을 받았다.예년처럼 초대장 한 장으로 본인 외의 다른 한 사람만 초대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았다.오미선은 정은과 미리 약속해두었다.“포럼 마지막 날 밤, 너 나랑 같이 가자.”정은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그런데 다음 날, 재석이 또 찾아와 물었다.“나랑 같이 갈래?”‘앗!’정은은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교수님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요.”“그렇겠지.”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오 교수님이 초대장을 받으셨는데 널 안 데려가실 리 없지.”사실 정은도 의아했다.애초에 재석은 수지를 데리고 포럼에 참석했으니, 당연히 그녀와 함께 만찬에 갈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자신에게 물어보다니.‘만약 내가 동의한다면, 이수지 선배는...’‘어휴, 생각만 해도 괜히 민망해지네.’그런데 이번엔 정은이 자신의 성과로 초대장을 받았다.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들뜨지 않을 수도 없었다.비록 초대장은 별거 아니지만, 정은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이건 ‘소정은’이라는 이름 자체가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뜻이고, 단순히 ‘오미선의 제자’라는 이유로 인정받은 게 아니란 것이다....하지만 수지는 운이 그리 좋지 않았다.포럼 내내 존재감 없이 지냈으니 당연히 단독 초대장을 받을 리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재석이 초대장을 가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3화

    정은은 정말 조개를 주웠다.무슨 조개인지 모르지만, 보랏빛에 주황색이 섞여 있어서 정말 예뻤다.그녀는 기뻐해하며 재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선배님! 이리 와서 봐요!”마치 보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당장이라도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재석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정은의 곁으로 다가갔다.정은이 손바닥을 펼치자, 조개 하나가 드러났다.“예쁘죠?”재석은 정은의 들뜬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네.”“그럼... 신발 벗고 같이 놀아볼래요?”남자는 순간 놀란 듯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니. 다음에.”정은은 억지로 설득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봐, 정은이도 다음에 나와 같이 바다에 올 거라 생각하고 있잖아.'두 사람은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닷물이 때때로 정은의 종아리까지 차올랐다.재석은 해변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선배님, 계속 걸어가면... 끝은 어디일까요?”정은은 뒤로 걸으며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고개를 돌려 물었다.여유롭고 편안한 자세였다.재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해변의 끝은 모래사장이고, 모래사장의 끝은 바다겠지.”정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정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웃음을 터뜨렸다.“난 또 선배님이 정색하면서, ‘해안선은 해양과 육지의 경계선이고, 대조평균고조면을 기준으로 정의돼. 조석이나 풍랑에 따라 달라지는 고정되지 않은 선이 아니라, 띠처럼 형성되는 공간적 개념이지. 물리적으로 접근하면 말이지...’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요.”그녀는 재석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진짜 베테랑 학자처럼 그럴듯한 모습을 보였다.재석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이미 답을 다 생각해놓고, 나한테 왜 묻는 거야? 그래도 듣고 싶다면 물리학적으로도 설명해줄 수 있어.”정은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바닷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몇 가닥이 뺨을 스쳤다.“아니에요. 난 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2화

    무엇보다 생명과학 분야는 오미선의 대표적인 인맥 기반이었다.누구나 정은이라는 젊은 후배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선보이기 마련인데, 그것도 다 같은 전공에서 이어져온 인연 덕분이었다.우수한 학생을 싫어할 선생님이 어디 있겠는가?비록 정은이 직속 제자는 아니더라도, 생명과학계에서 보기 드문 유망주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그다음은 물리학 분야였다. 다른 요소를 다 떠나서, 재석의 신뢰와 명성만으로도 정은은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이 친구는 소정은이라고, 오미선 교수님의 제자예요...”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지인들에게 소개했다.말하는 도중, 자연스레 두 사람의 관계가 언급되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 어떤 악의도 없었다.“난 재석이 누굴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는 거 처음 보네. 오늘 제대로 구경을 좀 하는구나, 하하하!”재석은 차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전에 오 교수님 밑에서 공부했거든요. 정은이랑은 사실 선후배 사이고요. 그게 뭐 문제 될 거라도 있나요?”“아니! 전혀. 네가 좋다면야 뭐든 좋은 거지.”재석은 어이가 없었다.수지는 기회를 엿보며 조심스레 다가가려 했지만, 재석의 소개도, 옹호도 없이 혼자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조롱거리 같았다.국제 영화제에 자비로 입장해 레드카펫에 슬쩍 올라가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플래시가 아무리 번쩍여도, 그것은 수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오전의 네트워킹 세션이 끝나고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었다.오후에는 참석자 전원이 버스를 타고 한 어촌 마을로 이동했다.이곳은 M시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어촌’으로 불린다.10여 년간의 보호 및 개발 정책을 통해 전통 어업 기반에서 관광 및 체험형 마을로 점진적인 전환에 성공했지만, 가능한 한 어촌 고유의 생활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이처럼 수준 높은 포럼이 열릴 때면, 지역 지자체에서는 인문학적 탐방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곤 한다.일종의 힐링이자, 참가자들에게 새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1화

    복도에서, 오미선은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재석은 팔에 걸쳐 있던 정은의 숄을 건네주며 말했다.“괜찮아?”정은은 재석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숄을 받으며 웃었다.“걱정 마요. 나 안 취했어요.”“그럼 다행이네.”“선배님, 오늘 오전에 고마웠어요.”재석은 웃으며 말했다.“나한테 고맙다고? 내가 너에게 질문을 부탁한 거잖아.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 사람은 나지.”“질문은 어렵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도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날 불러줘서 내가 대답할 수 있었던 거예요.”“내가 기회를 준 건 맞지만, 그걸 잡은 건 너야. 그러니까 나보다 너 자신에게 고마워해야지.”정은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나 자신에게요?”“그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평소에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집중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 모든 시간에 감사하면 돼. 정은아,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는 거야.”“네, 맞아요.”“이제 들어가. 오늘 일찍 쉬고, 내일 하루 더 남았으니까.”“네.”재석은 정은이 들어가는 걸 지켜본 뒤, 그녀가 문을 꼭 닫은 걸 확인하고서야 룸카드를 꺼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수지는 문구멍을 통해 이 모든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재석이 정은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굴던 모습,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준 차가운 태도가 겹쳐지자, 수지는 입술을 거의 깨물 뻔할 정도로 질투를 느꼈다.그때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수지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잽싸게 집어 들었지만, 화면에 뜬 이름은 ‘손태민’이었다.그녀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핸드폰을 침대에 내던졌다.“왜 또 쟤야? 정말 짜증나 죽겠네!”“하루 종일 연락을 하다니, 지치지도 않나 봐!”수지는 차갑게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계속 울리는 진동음을 그대로 두었다. 결국 화면은 꺼졌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고는 눈을 감았다.그 전에,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래, 이제 실컷 울려봐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0화

    “하하... 그래! 당연하겠지!”“어머, 말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군. 미선아, 서 있지 말고 얼른 앉아!”“정은이도 함께 앉아야지...”정은은 이런 학계의 비공식적인 자리엔 처음이었고, 평소 근엄하기만 했던 교수나 학자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친구들끼리 주고받는 유쾌한 농담, 어쩌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오가고, 흥분하면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고, 기쁘면 호탕하게 웃는 모습들이 그저 재밌을 뿐이었다.연회가 이어지는 중, 오미선은 보기 드물게 먼저 잔을 들었다.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건 정은을 위한 행동이란 것을.정은도 그걸 알았기에, 몇 잔은 기꺼이 받아 마셨다.술잔이 세 바퀴쯤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한 베테랑 교수가 정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둘은 전공 이야기에서 시작해, 꿈에 대한 이야기, 논문, 실험 이야기도 나누며 점점 대화를 깊이 이어갔다.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교수의 눈빛에는 감탄과 호의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하하하... 역시 젊은 세대는 다르다니까. 새로운 머리가 참 잘 돌아가네! 내 제자 중엔 왜 이런 애가 하나도 없는 거야? 아이고, 사람은 비교하면 안 된다더니, 진짜 열받네!”그러더니 오미선을 바라보며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오 교수, 이런 학생을 어디서 발굴한 거야? 왜 좋은 인재는 전부 너한테만 가는 거지?”“정말 우리에겐 숨통도 안 틔워주는구나.”오미선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글쎄... 아마 내가 보는 눈이 좀 있는 모양이겠지? 한눈에 알아봤으니까? 어쩔 수 없어. 나도 이렇게 귀한 인재는 딱 보면 알겠더라고.”농담인 줄 알면서도 그 교수는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였다.“내가 네 제자 데려갈 것도 아닌데, 누가 보는 눈이 없다는 거야?”옆에 앉아 있던 다른 교수가 못 참고 끼어들었다.“고 교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지난번엔 누가 자긴 눈도 안 좋고 나이도 많다고, 제가 2년간 아껴둔 와인을 억지로 가져가신 거죠?”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