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겸은 서연희와 함께 양식당에서 촛불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도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연희는 도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도겸은 속으로 화를 억누르며 대답하지 않았다. 도겸은 그저 핸드폰으로 빠르게 타자하며 답장을 보냈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현빈은 채팅창을 보며 미소를 지었고, 다소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번엔 진짜로 정은 씨랑 끝난 거네?] 도겸은 어이없다는 듯 이를 악물었지만, 현빈은 그저 무심하게 보낸 문자에 불과했다.[응, 왜? 불만 있어?] 현빈은 웃으며 항복을 의미하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며 말했다. [아니, 내가 뭐라고 불만을 가지겠어?] 그리고는 덧붙였다. [그럼 다른 사람이 정은에게 관심을 가져도 신경 안 쓰는 거지?]이때, 고동건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뭐야, 너 혹시 정은 씨 좋아해?]현빈은 조금 진지하게 응답하면서 이모티콘을 보냈다. [응, 응. (이모티콘)] 그러자 전선우가 웃으며 반응했다. [하하하!]동건도 덧붙였다. [너 진짜 대단하네.] 그러나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겸도 이모티콘에 신경 쓰지 않고 타자하며 대답했다. [좋아, 그러면 한번 해봐.] 목적을 달성한 현빈은 핸드폰을 치웠다. 그러나 도겸이 나중에 후회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다....“자기야, 오늘 생일을 이렇게 즐겁게 보내줘서 고마워요.” 저녁 9시, 도겸은 연희를 기숙사 앞에 데려다주었다. 연희는 도겸의 손을 잡고 아쉬운 듯이 말했다. “오빠랑 곧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서운해요.” 연희는 웃으며 작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도겸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입을 삐죽거렸다. “오빠는 왜 이렇게 평온해요? 하나도 아쉽지 않아요?” 연희는 맑고 깨끗한 눈으로 달콤하게 웃으며, 더욱 애교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현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방금 막 따온 부르고뉴 와인이야, 한잔할래?” 현빈은 잔에 반을 따라 강도겸에게 건넸다. 도겸은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괜찮네.” 도겸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아까 정은이도 여기 있다더니, 왜 안 보이지?”현빈은 와인잔을 흔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정은 씨 보러 일부러 온 건 아니지?” 도겸은 약간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 그냥 술이나 마시려고 들른 것뿐이야. 우연히 마주치면 물어볼 수도 있지, 그게 뭐라고.”현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어. 그냥 술 한잔하러 온 것 같은데, 아마 지금쯤 돌아갔을걸?” 도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한결 풀어진 듯했다. ‘역시 정은은 이런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구나.’그러자 도겸도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먼저 가볼게. 오늘 술값은 내 앞으로 해둬.” 현빈은 도겸의 뒷모습을 보며, 눈빛이 약간 깊어졌다. 그러고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하다, 친구야.”...조수민과 소정은은 개인실에서 한 시간도 채 머물지 않았지만, 수민은 술 반병을 마시고는 정신을 잃고 잠들어버렸다. 정은도 술을 마셔 운전할 수 없었기에, 결국 대리운전을 불러 수민을 아파트에 데려다주고, 본인은 택시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갑자기 큰 비가 내렸고, 너무 늦은 시간이라 택시는 골목 입구에 정은을 내려주었다. 정은은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 그칠지 모를 비를 맞으면서라도 집에 달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은아!” 뒤에서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가 정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뒤돌아보니 조재석이 우산을 들고 빗속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비 맞으면서 갈 생각이었어?” 오늘 재석은 셔츠 대신 조금 더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 평소보다
공부하는 일상은 지루하고 단조로웠지만, 소정은은 의외로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오늘도 하루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정은은 어깨를 주무르며 일찍 쉬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 오미선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오미선 교수는 먼저 정은에게 공부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보자 정은은 간단히 진도를 보고드렸다. 오미선 교수는 더 이상 세부적으로 묻지 않았는데 정은을 무척이나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은은 미소를 띤 채, 오미선 교수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일 아침 일찍, 집에 한 번 들러.]그러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늦으면 정은이 거절할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말이다.다음 날, 정은은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데 30분을 보냈다. 물론, 옆집의 조재석을 위해 한 끼 더 준비했다. 어젯밤 잠들 때까지도 옆집에서 문 여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재석은 아마 실험실에서 밤을 새웠을 것이다.이윽고 문이 열렸다. 예상대로 방금 막 돌아온 사람 같아 보였다. 비 내리던 밤 이후로 벌써 2주가 지났지만, 아마 실험실에서 돌아온 직후였기 때문인지, 항상 깔끔했던 재석의 소매는 구겨져 있었고, 미간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은은 지난번에 들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재석이 실험실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정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젯밤부터 약한 불에 천천히 끓여서 아침까지 준비했어요. 밤새신 분들은 속이 좋지 않을 테니, 따뜻한 죽을 먹으면 속이 좀 나아질 거예요.” 재석은 몇 날 며칠 밤을 새워도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했었지만, 이번 며칠간은 불규칙한 식사 때문인지 속이 약간 아팠다. 그래서 정은이 가져온 죽이 지금 재석의 상황에 딱 맞는 음식이었다. “고마워.” “그날 밤 집에 데려다주신 건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죠.” 정은은 미소 지었다. 그러자 재석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말했다. “우린 이웃사촌이잖아. 그저
“네가 기억력이 좋잖아.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 시리즈 중에 유전자 테스트에 대해 다루는 책이 있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 정은은 무언가를 한 번 보면 절대 잊지 않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에 대한 인상은 깊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오미선 교수가 말한 그 책은 며칠 전에 도서관에서 막 뒤적여 본 책이었다. 그래서 정은은 곧장 책장 쪽으로 시선을 돌려 훑어보다가, 이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교수님, 혹시 찾으시는 게 이 책인가요?” 오미선 교수는 표지를 한 번 보더니 말했다.“맞아, 바로 이 책이야! 넌 시력도 좋구나. 한참을 뒤졌는데 바로 눈앞에 있는 걸 못 봤네.”“성준아, 이 책에다가 이 논문 자료들까지 참고하면 충분할 거야. 일단 가져가고, 나중에 내가 다른 것도 찾아볼게.” “감사합니다, 교수님.” 성준은 손을 뻗어 책을 받았다. 요즘 대학원 졸업 논문을 준비하던 중, 필요한 자료가 부족하였는데 오미선 교수에게 원본 자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침 일찍 찾아온 것이었다. 이윽고 오미선 교수는 그제야 두 사람을 소개할 생각이 나셨다. “정은이도 내가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이야. 그리고 곧 다시 내 제자가 될 예정이지.” 성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오미선 교수에게 물었다.“교수님의 대학원생으로 지원하는 겁니까?”그러자 오미선 교수가 곧바로 웃으며 정은에게 말했다. “얘는 하성준이라고 해. 올해 석사 2년 차고, 박사과정을 준비 중이야. 마침 너도 요즘 복습 중이니, 둘이 함께 공부해도 좋겠네.” 그 말을 들은 정은이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소정은이라고 합니다.” 정은도 오미선 교수의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성준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정은과 카톡 아이디를 교환했다. “아, 정말 좋네. 도서관도 같이 갈 수 있고, 전문적인 문제도 서로 논의할 수 있겠어.” 두어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성준은 수업이 있어서 먼저 떠났다. 정은은 테이
비록 아침 7시에 맞춰 알람을 설정해 두었지만, 연희가 계속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늦을까 봐 허둥지둥 뛰어왔다. “몇 층 가?” 정은은 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2층이요.” 침착한 정은과 달리, 헐레벌떡 뛰느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연희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연희와 정은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순간, 연희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정은의 손에 들린 대학원 시험 준비 자료를 보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정은 언니, 혹시 도서관에 복습하러 온 거예요? 설마 대학원 시험 준비하려는 건 아니죠?” 정은은 말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그러자 연희가 계속 중얼거리며 말했다.“대학생들도 대학원 입학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은데, 졸업한 지 몇 년 된 언니가 정말 합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자 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혹시 그 떨어지는 사람중에 너도 포함인건 아니지?” 연희는 그 말을 듣고 하마터면 화를 참지 못할 뻔했다. 연희는 올해 3학년이다. 취업 생각은 없었기에 막 대학원 입학 준비를 시작한 상태였다. 또한, 어차피 1년 더 남았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같은 기숙사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계획을 세웠지만, 연희는 대학 몇 년 동안 공부를 대충 해왔고, 시험에 합격하면 좋고, 안 되면 강도겸이 뒷받침해 줄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 정은의 말은 연희를 찔리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나 다 언니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나한텐 시험에 합격하는 게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도겸 오빠가 말했거든요.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내 앞에 가져다줄 거라고요.” 그러자 정은은 더 이상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자신감 있길 바랄게.” 말을 마친 정은은 이미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린 하성준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한편, 연희의 룸메이트는 정은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
연희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연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도겸의 뒤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이 별장이 매우 크고, 넓고, 밝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연희가 이렇게 직접 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미국식 인테리어 스타일로, 회색과 갈색, 흑백이 주요 색상으로 사용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절제된 느낌이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은근히 드러나는 고급스러움이 있었다. 또한, 대학교 2학년 때 예술 감상을 선택 과목으로 들었던 연희는 벽에 걸린 그림이 치바이석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주변에 놓인 물건들은 하나같이 값비싼 것들이었고,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쓰레기통에도 명품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거실을 지나면 정성스럽게 가꾼 실내 정원이 나타났고, 그 옆에는 별도로 마련된 미디어룸과 헬스장이 있었으며, 구석에는 골프채 세트도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별장 단지에는 골프장도 함께 있다고 들었다. 연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도겸을 만나기 전까지 연희가 본 것 중 가장 사치스러운 물건은 동급생이 메고 다니던 에르메스 버킨백 켈리백 악어가죽 25였다. 그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한정판으로, 중고 시장에서도 5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5억 원이면 연희의 고향에서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이 별장 안에는 고급스러운 H 로고가 도처에 있었다. 열쇠고리, 카드게임, 라이터까지. 만약 연희가 도겸의 곁에 계속 머물고, 도겸과 결혼해 도겸의 아이를 낳는다면, 자신이 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큰 별장, 명품 가방, 운전사가 따라붙고, 집안일은 집사들이 해주는 그런 삶.그러나 도겸은 연희의 생각이 다른 데 가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죽은 매우 걸쭉하게 끓여졌지만, 도겸은 한 입만 먹고는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 도겸의 모습에 연희는 눈을 깜빡이며 의아해했다. “왜 안 먹어요? 맛없어요?”그러자 도겸이 대답했다. “방금 퇴근하면서 이미 먹었어. 지금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으
“응?” 강도겸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오빠, 제 지문을 여기 잠금장치에 등록해 줄 수 있어요?” 서연희는 대문에 있는 잠금장치를 가리키며, 눈살을 찌푸리고는 마치 비 쫄딱 맞은 강아지처럼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 여기서 몇 번이나 오빠를 기다렸잖아요. 보세요, 손이며 다리에 이렇게 모기한테 물린 자국이 몇 개나 돼요.”“오빠, 다음에도 이렇게 물린 채로 기다리게 할 거예요?” 그러자 도겸이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지.” “야호!” 연희는 기뻐하며 뛰어올랐다. “사실, 일부러 그런 거예요. 제 지문을 등록해서 이제부터는 마음 놓고 오빠를 찾아오고 싶었어요.” 그러자 도겸이 웃으며 말했다. “어쩜, 아직도 어린아이 같네.” 이윽고 도겸은 연희의 지문을 잠금장치에 등록해 주었다. 오늘 연희가 특별히 준비해 온 죽과 연희의 손과 다리에 난 모기 자국을 생각하며, 도겸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이건 내 가족카드야. 월 한도는 2000만 원이니까, 좋아하는 거 사.” 연희는 당황해하며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아니에요, 저, 제가 어떻게 오빠 돈을 써요?” “여자가 남자 돈을 쓰는 건 당연한 거야.” “정말요?” “받아,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럼, 알겠어요.” 연희는 환하게 웃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그럼 내일 다시 죽 가져올게요!” 도겸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연희가 끓인 죽은 도겸이 원하는 맛이 아니었기 때문에, 몇 번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한편, 하루 종일 공부를 한 소정은은 도서관 밖에서 하성준과 헤어졌다. 성준은 대학원 입시 때 1차, 2차 모두 1등을 차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대학원 입시에 대한 노하우가 많았고, 중요한 부분을 정은에게 표시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 정은은 원래 성준에게 저녁을 사주고 싶었지만, 성준이 갑작스러운 룸메이트의 전화로 다음 날 계속 공부하기로 하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알만한 사람들은 소정은이 강도겸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은 자신의 생활도, 공간도 없이, 하루 24시간 강도겸을 중심으로 돌아갔다.매번 이별 후 사흘이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재회를 청했다. 누구나 이별이라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정은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도겸이 새로운 연인을 안고 들어올 때, 방안은 오묘한 정적이 5초간 흘렀다. 그러자 정은은 귤을 까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왜 다들 말이 없어? 나를 왜 봐?”“정은아.”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도겸은 아무렇지 않게 여자를 안고 소파에 앉았다. 노골적이고도 태연했다.“생일 축하해, 선우야.”정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일인 선우를 생각하며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화장실 좀 다녀올게.”문을 닫을 때, 정은은 안에서 이미 대화가 시작된 것을 들었다.“형, 정은이 여기 있잖아요. 미리 얘기했는데 왜 여자를 데려왔어요?”“맞아! 도겸아, 이번에는 너무했어.”“신경 쓰지 마.” 도겸은 여자의 허리를 매만지며 담배를 피웠다. 흰 연기 속에서 미소 짓는 모습이 마치 세상을 게임처럼 여기는 방탕한 사람 같았다. 남은 대화는 문이 닫혀서 정은은 듣지 못했다. 정은은 침착하게 화장실에서 나와 화장을 고치며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정말 비참하군.”비참한 삶. 정은은 깊이 심호흡하며 결심했지만, 방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정은은 참을 수 없이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도겸은 여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고, 타액이 두 사람 사이에서 티슈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웃으며 소란을 피웠다.“역시 도겸이네! 제대로 놀 줄 알아!”“분위기 끝내주네, 한 번 더!”정은의 문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렸다. 이 사람이 자신이 6년간 사랑한 남자라니. 지금, 이 순간 그저 헛웃음만이 났다.“야, 그만해.” 누군가가 작게 경고하며 문 쪽을 가리키자, 모두가 일제히 그쪽을 보았다.“정은, 돌아왔네? 이거 다 장난이야, 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