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민은 정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가자! 오기 전에 내가 계획을 다 세웠어. 오늘 한 번 제대로 놀아보자!” “아아! 누가 살려줘!”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5분 동안 귀에서 멈추지 않았다. 정은은 귀가 멍해져서 손으로 문질렀다. 그리고는 방금 토하고 나서 창백해진 얼굴의 수민을 보고 웃음이 나오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에 수민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 좀 나아졌어?” “나, 웩.” 수민이 다시 쓰레기통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토할 것 같다. 정은은 재빨리 휴지를 꺼내고 물병을 열어 수민이 토하고 나자마자 물을 건네주었다. 이윽고 수민이 입을 헹구고 더 이상 토하지 않자, 정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기 롤러코스터가 악마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제 알겠어. 정말 지옥 같았어. 너무 무서워.” 수민은 힘없이 말하며 입을 닦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정은이 말했다. “누가 익스트림을 하겠다고 했더라? 네가 자초한 일이야.” 수민은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다. 그런데도 이런 놀이기구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니, 그저 겁이 많으면서도 놀기를 좋아하는 거였다. “흑흑, 지금 와서 후회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제 안 할래.” 수민은 정은의 어깨에 기대어 겨우 숨을 골랐다. 잠시 쉬고 난 수민은 그제야 기력을 회복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정은은 먼저 식사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수민과 정은은 길을 걸으며,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하늘을 보며 흥분해서 사진 찍는 모습에 덩달아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풍선이 엄청 많네. 이게 무슨 개장 기념 이벤트인가?” “요즘 상인들 왜 이렇게 경쟁이 치열해? 저렇게 많은 풍선을 불려면 몇 시간은 걸렸을 텐데?” 정은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푸른 하늘에 거대한 풍선들이 떠다니며, 마치 거대한 푸른 바다를 연상케 했다. 풍선에 묶인 컬러 리본이 자연스럽게 내려오면서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마치 나비들이 춤추는 것 같았다. 관광
점심을 먹고 난 후, 수민은 동물 공연 티켓 두 장을 사서 소정은과 함께 돌고래 쇼를 보러 가자고 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곳을 지나 두 사람은 남서쪽에 있는 동물 공연장에 도착했다.공연장 안에는 에어컨이 켜져 있어 밖의 뜨거운 열기와는 전혀 다른 천국 같은 분위기였다. 정은은 동물 공연에 크게 흥미가 없었지만, 수민이 돌고래를 매우 좋아했기에 관객들과의 호응시간에 수민이 정은에게 카메라를 맡기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수민의 밝은 미소에 감염된 정은도 미소를 지었다.30분 후, 공연이 끝나자 정은은 가방을 수민에게 건네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이윽고 모퉁이를 돌자,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고 있는 서연희가 보였다.정은은 연희를 발견한 후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연희를 지나쳐 그대로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볼일을 마치고 나왔을 때, 연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보아하니, 정은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정은은 그런 연희를 무시한 채 손을 씻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흐르는 가운데, 주변은 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분위기는 점점 긴장감이 더해졌다. 잠시 후, 정은이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연희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러나 곧바로 시선을 돌려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무심하게 행동했다. 그러자 연희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 정말 우연이네요.”정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연희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요즘 잘 지내세요?”정은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응.”연희는 정은의 차분한 태도가 진짜인지, 아니면 꾸며낸 것인지 알아내려는 듯 정은을 자세히 관찰했다. 몇 초 후, 연희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정말로요? 빌라에서 나와 사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그러자 정은이 단호하게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사실 제가 정은 언니에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진심으로 말이에요.” 연희는 말하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순수하고 어린 얼굴에 눈물이 고이니 정말 청순하고 연약해
“이제 들어가셔도 돼요.” 직원 뒤에는 양옆으로 나뉘어 열리는 커튼이 있었고, 안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커튼 사이로 어둠이 깔린 통로가 보였다. 간간이 비명이 들려오자, 조수민은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키고는 소정은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정은은 그런 수민을 거의 끌어당기듯이 데려갔고, 수민의 겁먹은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우리 그냥 가지 말까?” “안 돼! 여기까지 왔잖아!” 왔으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태도가 한 사람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었다.수민은 무섭다고 하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용감한 척하며 정은을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갑자기 한 공포 인형이 튀어나오자 수민은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아아아! 정은아, 살려줘!” 그때, 강도겸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방금 누군가 정은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봐도 그 익숙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도겸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한편, 서연희는 도겸이 잠시 멍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겁먹은 표정으로 도겸의 팔을 꼭 끼고 말했다. “오빠, 나 무서워요. 오빠가 나 지켜줄 거죠, 그렇죠?” 도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래.” 앞은 너무 어두워, 간간이 깜빡이는 붉은 불빛만 보였다. 연희는 도겸의 팔을 꽉 붙잡고, 두려움에 몸을 더욱더 도겸 쪽으로 기울였고, 스스로 나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느 순간, 얼굴의 반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묻은 여자 귀신 분장을 한 실물 NPC가 나타나자, 연희는 소리를 지르며 더욱더 도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흑흑. 너무 무서워, 오빠, 귀신 나갔어요?”연희는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굴을 도겸의 가슴에 묻었다. 도겸은 대충 연희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응, 없어졌어.”조잡한 분장과 더러운 여자 귀신 복장은 도겸에게는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은이라면 이렇게 무서워하지
곧 이 작은 공간에 소정은 혼자만 남게 되었다. 다행히 경보가 울린 후 조명이 이전보다 밝아졌고, 두 걸음 정도 앞으로 나아가자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두 번째 구역을 무사히 통과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은은 그쪽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는데, 아마 출구 쪽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막힌 것 같았다. 그래서 그쪽으로 가야 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을 때, 뒤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정은은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정은을 벽 쪽으로 밀쳤고, 누군가는 정은의 발을 밟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은은 울퉁불퉁한 벽에 몸이 밀착된 채, 가슴이 압박되어 고통에 숨이 턱 막혔다. 그 순간,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고 있음을 느낀 정은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강도겸은 이 처참한 모습의 정은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정은이었다. 방금 들린 정은아라는 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그러나 곧바로 정은이 귀신의 집을 탐험할 기분이었다는 사실에, 이별 후에도 꽤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오빠?” 연희는 도겸의 팔을 흔들며 긴장한 눈빛으로 정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은은 눈을 내리깔며, 이 두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 듯 군중 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군중 속에서, 동굴 안의 조명이 희미하게 깜빡이던 중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고, 잠시 후, 공중에 매달린 나무 칼이 흔들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나무 칼이 떨어지는 바로 그 아래에는 다름 아닌 정은이 있었다.“조심해!” 도겸은 본능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연희를 밀어내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재빨리 정은을 안전한 곳으로 끌어당겼다. 쾅! 나무 칼이 땅에 떨어지면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그제야 그 칼이 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만 나무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을 뿐
마침 그때, 출구 쪽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출구에서 질서 있게 대기하신 후 나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이 생기자, 현장의 혼란도 금방 진정되었다. 소정은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도겸도 팔을 빼내고 정은을 따라갔다. 그 모습에 연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도겸 오빠, 저도 같이 가요.” 검표소에서 조수민은 이미 밖에 나와 있었다. 내부에서 경로 문제로 인해 화재가 발생할 뻔했다는 말을 듣고, 정은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걱정이 되어 하마터면 뛰어 들어갈 뻔했다. 다행히도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정은은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수민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 “다치지 않았지? 방금 경보 소리를 듣고 너무 놀랐어.” “나 여기 멀쩡히 있으니까, 이제 가자, 집에 가자.” 하루 종일 놀다 보니 정말 피곤했다. 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우리, 어? 저거 도겸 아니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겸이 연희와 함께 뒤따라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놀러 나와서 이런 재수 없는 걸 마주치다니.” 그러자 정은은 한 번 쳐다본 후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그냥 우연히 만난 거니까, 가자.” 돌아가는 길에, 수민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는지 핸들을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정은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집에 안 가?” “결정했어, 지금은 안 갈래. 남자가 뭐 별거야? 80억의 절반이 남자고 널린게 남자야. 오늘 내가 널 새로운 세상에 데려다줄게.”정은은 의문스러웠다....밤 8시, 밤생활이 이제 막 시작할 때였다. 정은은 마치 인형처럼 수민에게 이끌려 시끄러운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독한 담배 냄새와 향수 냄새가 섞인 공기, 불빛은 빨갛고 초록색으로 번갈아 가며 반짝이고, 주변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캐주얼한 옷차림의 정은은 이곳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강도겸은 서연희와 함께 양식당에서 촛불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도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연희는 도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도겸은 속으로 화를 억누르며 대답하지 않았다. 도겸은 그저 핸드폰으로 빠르게 타자하며 답장을 보냈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현빈은 채팅창을 보며 미소를 지었고, 다소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번엔 진짜로 정은 씨랑 끝난 거네?] 도겸은 어이없다는 듯 이를 악물었지만, 현빈은 그저 무심하게 보낸 문자에 불과했다.[응, 왜? 불만 있어?] 현빈은 웃으며 항복을 의미하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며 말했다. [아니, 내가 뭐라고 불만을 가지겠어?] 그리고는 덧붙였다. [그럼 다른 사람이 정은에게 관심을 가져도 신경 안 쓰는 거지?]이때, 고동건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뭐야, 너 혹시 정은 씨 좋아해?]현빈은 조금 진지하게 응답하면서 이모티콘을 보냈다. [응, 응. (이모티콘)] 그러자 전선우가 웃으며 반응했다. [하하하!]동건도 덧붙였다. [너 진짜 대단하네.] 그러나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겸도 이모티콘에 신경 쓰지 않고 타자하며 대답했다. [좋아, 그러면 한번 해봐.] 목적을 달성한 현빈은 핸드폰을 치웠다. 그러나 도겸이 나중에 후회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다....“자기야, 오늘 생일을 이렇게 즐겁게 보내줘서 고마워요.” 저녁 9시, 도겸은 연희를 기숙사 앞에 데려다주었다. 연희는 도겸의 손을 잡고 아쉬운 듯이 말했다. “오빠랑 곧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서운해요.” 연희는 웃으며 작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도겸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입을 삐죽거렸다. “오빠는 왜 이렇게 평온해요? 하나도 아쉽지 않아요?” 연희는 맑고 깨끗한 눈으로 달콤하게 웃으며, 더욱 애교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현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방금 막 따온 부르고뉴 와인이야, 한잔할래?” 현빈은 잔에 반을 따라 강도겸에게 건넸다. 도겸은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괜찮네.” 도겸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아까 정은이도 여기 있다더니, 왜 안 보이지?”현빈은 와인잔을 흔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정은 씨 보러 일부러 온 건 아니지?” 도겸은 약간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 그냥 술이나 마시려고 들른 것뿐이야. 우연히 마주치면 물어볼 수도 있지, 그게 뭐라고.”현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어. 그냥 술 한잔하러 온 것 같은데, 아마 지금쯤 돌아갔을걸?” 도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한결 풀어진 듯했다. ‘역시 정은은 이런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구나.’그러자 도겸도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먼저 가볼게. 오늘 술값은 내 앞으로 해둬.” 현빈은 도겸의 뒷모습을 보며, 눈빛이 약간 깊어졌다. 그러고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하다, 친구야.”...조수민과 소정은은 개인실에서 한 시간도 채 머물지 않았지만, 수민은 술 반병을 마시고는 정신을 잃고 잠들어버렸다. 정은도 술을 마셔 운전할 수 없었기에, 결국 대리운전을 불러 수민을 아파트에 데려다주고, 본인은 택시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갑자기 큰 비가 내렸고, 너무 늦은 시간이라 택시는 골목 입구에 정은을 내려주었다. 정은은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 그칠지 모를 비를 맞으면서라도 집에 달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은아!” 뒤에서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가 정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뒤돌아보니 조재석이 우산을 들고 빗속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비 맞으면서 갈 생각이었어?” 오늘 재석은 셔츠 대신 조금 더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 평소보다
공부하는 일상은 지루하고 단조로웠지만, 소정은은 의외로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오늘도 하루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정은은 어깨를 주무르며 일찍 쉬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 오미선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오미선 교수는 먼저 정은에게 공부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보자 정은은 간단히 진도를 보고드렸다. 오미선 교수는 더 이상 세부적으로 묻지 않았는데 정은을 무척이나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은은 미소를 띤 채, 오미선 교수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일 아침 일찍, 집에 한 번 들러.]그러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늦으면 정은이 거절할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말이다.다음 날, 정은은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데 30분을 보냈다. 물론, 옆집의 조재석을 위해 한 끼 더 준비했다. 어젯밤 잠들 때까지도 옆집에서 문 여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재석은 아마 실험실에서 밤을 새웠을 것이다.이윽고 문이 열렸다. 예상대로 방금 막 돌아온 사람 같아 보였다. 비 내리던 밤 이후로 벌써 2주가 지났지만, 아마 실험실에서 돌아온 직후였기 때문인지, 항상 깔끔했던 재석의 소매는 구겨져 있었고, 미간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은은 지난번에 들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재석이 실험실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정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젯밤부터 약한 불에 천천히 끓여서 아침까지 준비했어요. 밤새신 분들은 속이 좋지 않을 테니, 따뜻한 죽을 먹으면 속이 좀 나아질 거예요.” 재석은 몇 날 며칠 밤을 새워도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했었지만, 이번 며칠간은 불규칙한 식사 때문인지 속이 약간 아팠다. 그래서 정은이 가져온 죽이 지금 재석의 상황에 딱 맞는 음식이었다. “고마워.” “그날 밤 집에 데려다주신 건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죠.” 정은은 미소 지었다. 그러자 재석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말했다. “우린 이웃사촌이잖아. 그저
오직 셋째 소진헌만이 그들에 비하면 많이 못살았다.‘명문대를 졸업한 다음 선생님이 되었다고 했나? 좋긴 좋지만 돈을 못 벌잖아!’소순자는 집에 있을 때 줄곧 비아냥거렸다.‘진말숙의 자식들도 다 돈이 있는 건 아니구나!’그러나 지금은 소진헌까지 부자로 됐다니.‘진말숙은 팔자도 참 좋구나...’소순자는 생각할수록 속상해서 손자에게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온 김에 제대로 먹어야지!’소순자와 여덟 식구 말고도 '숙모'라고 불리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도 온 집안식구를 데리고 왔다.숙모 나정혜는 집에 들어온 후, 소순자와 약속이나 한 듯 감탄을 금치 못했다.“진헌아, 너 로또라도 당첨된 거야?”“지금 선생님은 돈을 이렇게 많이 벌 수 있는 건가?”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이 안에 뭐 있지? 돈 건질 수 있는 방법 말이야.”소진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흔들었다.“절대 없어요! 저는 국공립학교의 선생님이라 매달 고정된 월급만 받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돈을 건질 수 있겠어요?”“너도 참, 이 숙모를 남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런 적이 없다면 어떻게 이렇게 크고 예쁜 별장을 살 수 있겠어? 장난해?”소진헌은 머리를 긁적였다.“저는 확실히 아무런 돈도 벌지 못했어요. 그러나 제 아내와 딸은 돈을 많이 벌거든요. 이 별장도 다 집사람과 정은이 산 거지, 저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저는 아무런 능력도 없어서 그저 운이 좀 좋았을 뿐이에요. 이렇게 좋은 아내를 얻고 또 효자 딸을 낳았으니까요.”나정혜는 어이가 없었다.‘지금 돈을 어떻게 벌었냐고 묻고 있는데, 왜 엉뚱한 대답만 하는 거야? 네가 행복하든 말든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사람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이 선생님은 무슨!’나정혜는 난간을 만지다가 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시선은 방금 소순자가 탐냈던 그 꽃병에 떨어졌다.“진헌아, 이거 정말 예쁘네. 엄청 비싸지?”소진헌은 나정혜의 성격을 그런대로 잘 알고 있었다. ‘이 꽃병이 마음에 들었는데,
주덕순은 웃으며 계속 말했다.“서방님과 동서가 지금 큰 별장에 살고 있지 않나요? 시골 친척들을 모두 서방님의 집으로 데려가면 되잖아요! 방도 많고 인테리어도 호화롭고, 난방이며 에어컨도 다 갖추어져 있으니 바닥에서 자도 괜찮은 것 같은데!”“십여 명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많은 사람들이 와도 될 것 같은데! 레이크 다이아 별장의 후문이 그 호텔과 아주 가깝잖아요. 걸어서 몇 분이면 도착하니 데려다줄 필요도 없고요!”주덕순은 말을 하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나 자신의 집도 그 근처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소진헌은 이때 마침내 입을 열 수 있었다.전에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했는데, 끼어들지 못하거나 입을 열자마자 바로 말 할 기회를 빼앗겼다.“저도 원래 그렇게 생각했어요. 큰형과 둘째 형이 불편하신 이상, 저와 집사람이 상의해서 친척들을 모두 저희 집으로 모시고 갈게요.”‘어차피 3일만 같이 지내면 되니까.’진말숙이 이렇게까지 말한 데다가, 주덕순은 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으니 이미숙은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시골 사람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최근에 새 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미 나석천에게 줄거리를 보냈는데 아직 좀 수정해야 했다. 이미숙은 조용한 창작 환경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님, 안심하세요. 저희가 친척분들을 잘 대접할 거예요.”...이미숙은 운전을 하면서 말했다.“지금 친척들이 모두 우리 집에서 지내고 있어. 네 아빠는 손님을 접대하느라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거든. 그래서 내가 널 데리러 올 수밖에 없었어.”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평소에 엄마가 운전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지만, 실력이 꽤 좋네요.”이때 정은은 아직 ‘위험’을 의식하지 못했다.이미숙은 턱을 들더니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럼! 나 천재잖아!”...레이크 다이아 별장에서.“진헌아, 이거 네 집이야?! 어머, 정말
“그러나 제가 부끄러워도 상관이 없지만, 그 친척들이 물어볼까 봐 두려워서 그래요. 이렇게 좋은 아파트에 사는데 왜 세탁기도 없냐고 물어보시면 어떡해요? 그럼 저는 또 뭐라고 대답하겠어요.”“돈이 없다, 제 부모님은 집 살 돈을 줬으니 이미 남은 돈이 없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저희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나중에 이 친척들이 시골에 돌아가서 안 좋은 소문이라도 퍼뜨리면 어떡해요?”“저와 시율이는 상관이 없죠. 어차피 저희도 시골에 돌아갈 일이 별로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의 체면은요? 물론 어머님께서 이런 일 신경 쓰지 않으신다면, 저야 당연히 대환영이죠. 저는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니까요!”주덕순은 웃으며 말을 마쳤고, 진말숙이 말하기를 기다렸다.사실 마음속으로 그녀는 이미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웃기고 있네. 새로 이사간 새 집에 나 자신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는데, 그 촌놈들을 들여보내라고? 누가 좋다고 하겠어!’진말숙은 눈빛이 어두워졌다.“너도 이제 겨우 이사를 간 데다가 가구도 다 사지 않았으니 그럼 됐어. 내 생일에 친척들이 세탁기도 없는 집에서 살게 할 수는 없잖아?”“그럼요.” 주덕순은 한숨을 쉬었지만 입가의 미소는 점점 짙어졌다.“만약 부모님께서 돈을 좀만 더 주셨다면 저희도 이렇게 빠듯하게 살지 않았을 텐데... 어머, 어머님,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지금 제 부모님을 말하는 거지, 어머님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진말숙은 원래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주덕순이 이렇게 말하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진말숙은 시종 주덕순에게 새 집에 보탤 돈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주덕순은 은근히 입을 삐죽거렸다.‘정말 인색하시다니깐!’그러나 주덕순은 확실히 말을 잘 했다.적어도 진말숙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소진우는 중간에 앉아 줄곧 입을 열지 않았다.그는 매우 바빴는데, 만약 스케줄이 임시로 변동되지 않았다면 지금 이미 회사에 있었을 것이다.그의 아내 박나영이
왜냐하면 지금 정은은 이미 L시로 돌아가는 고속열차에 탔기 때문이다.소씨 가문의 3형제는 할머니 진말숙의 팔순잔치를 근사하게 치르기로 결정했다.그래서 정은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날짜는 아주 일찍 정해졌는데, 연속 3일이었다. 그러나 휴일이 아니라서 정은은 휴가를 낼 수밖에 없었다.오미선은 지금 외국의 세미나에 참가했기에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시차 때문에 정은은 전화를 하지 않고 미리 이메일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오미선은 정은이 집에 돌아가는 것을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축복까지 전해 달라고 했다.오후 2시, 고속열차는 역에 도착했다.이미숙은 차를 몰고 정은을 데리러 왔다.“아빠는요?” 정은은 차에 타자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소진헌이 없는 것을 보며 그녀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이미숙은 면허가 있었지만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에 이런 ‘막일’은 모두 소진헌이 했다.‘오늘은 왜...’이미숙은 고개를 흔들었다.“네 아빠는 시간이 없거든.”“오늘은 일요일이니 수업이 없으시잖아요.”‘그럼 뭐가 바쁘신 거지?’여기까지 말하자, 이미숙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정은은 더욱 영문을 몰랐다.“이 일은 말하자면 길어...”팔순잔치인 데다가 진말숙이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비록 잔치는 모레이지만, 고향의 친척들은 모두 이틀 앞당겨 올라왔다.십여 명이 어디서 지낼지가 가장 큰 문제로 되었다.소남진과 진말숙은 지금 첫째 소진우를 따라 별장에서 지내고 있지만, 그 별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위에 2층, 지하 1층에 잠을 잘 수 있는 방이 4개 뿐이었다.게다가 소진우는 가끔 집에서 접대를 해야 했으니, 시골 친척들이 집에 드나드는 것은 너무 말이 안 됐다.진말숙이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보거라. 어차피 진우네 집은 안 된다!”가정모임에서 진말숙은 무덤덤하게 말했다.말이 끝나자, 한 쌍의 늙은 눈은 소진호와 소진헌을 바라보았다.첫째는 안 되니, 지금은 당연히 둘째와 셋째가 나서야 했다.소수정
“그래야만 그 여자는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근심 따윈 완전히 버리고 네 품에 안길 수 있다고! 알았어?”재석은 그의 말에 아주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그중 하나는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일부러 넘어져서 키스하는 거랑 그냥 사람을 품에 안고 뜨겁게 키스하는 거... 하나는 너무 가식적이고 위험하고, 다른 하나는 건달과 다를 게 없고.’재석은 이것이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것은 여성을 무시하는 짓이었다.‘그래, 그건 정은이를 무시하는 거야!’그러나 꿈속의 재석은 오히려 정은을 제대로 ‘무시’했다.심지어 귀신에 홀린 것처럼 꿈속의 정은에게 물었다.“자기야, 좋아?”재석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괴로움에 머리를 움켜주었다.한참 지나서야 감정이 가라앉은 재석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옷장 앞으로 가서 깨끗한 속옷을 꺼내 갈아입었다.‘다 나은 거 아니었어? 왜 또 이러는 거지?’...이튿날 아침, 전진욱은 일찍 실험실에 도착했다.어제 그는 실험 결과가 나오기 전에 가버렸는데, 오늘 특별히 일찍 와서 보충하려 했다.‘만약 재석이 이 일을 알았다면 또 끝없이 잔소리를 할 거야.’그래서 진욱은 알람시계 세 개나 맞추었고,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차를 몰고 실험실로 달려갔다.“야! 넌 언제 온 거야?! 오늘 일요일이잖아?! 이번 주에 이틀 쉬기로 했는데, 넌 뭐 하러 왔어?!”진욱은 무척 흥분했다. 그래서 재석은 단번에 그가 도둑이 제 발 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재석은 실험대 앞에 서서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어제 데이터를 정리하지 않은 거야?”‘이런, 망했네!’“아니... 넌 집에서 쉬지 않고 왜 실험실에 온 거야?! 재석아, 넌 정말 너무 열심히 일을 하는 거 아니니? 남에게 숨 쉴 틈 좀 주라!”재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난 이미 너 대신 데이터 두 조를 계산했는데, 지금 보니 그럴 필요가 없는 건가?”진욱은 멈칫하더니 즉시 웃음을
재석이 대답했다.“아직은 아니야.”“아! 알겠네! 아직 썸을 타고 있는 거구나?”그는 말을 하지 않았고, 몇몇 남자아이들은 재석이 인정했다고 생각했다.“알고 지낸 지 얼마 됐어?”재석은 잠시 생각했다.“1년 좀 넘었어.”“야, 1년이나 넘었는데도 아직 성공을 하지 못한 거야? 이건 말이 안 되지. 훤칠하고 잘생긴 사람이 왜 이렇게 굼뜬 거야!”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야, 내가 제대로 가르쳐 줄게. 이건 99%의 여자도 당해낼 수 없을 거야...”재석은 처음에 개의치 않았지만, 상대방이 본론으로 들어가자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돌아가는 길에 정은이 물었다.“선배님, 그 슛 정말 너무 멋있었어요... 그리고 그 자세도...”그녀는 걸으면서 슛을 하는 시늉을 했다.재석은 옆에서 가끔 대답을 했는데, 줄곧 미소를 짓고 있었다.약국을 지나다가 남자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깐만 기다려.”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나올 때, 재석의 손에는 소독약 한 병이 있었다.재석은 정은의 이마를 가리켰다.“여전히 좀 빨간 것 같아. 내일 멍이 들 수도 있으니까 약 좀 바르면 빨리 나아질 거야.”정은은 재석이 약국에 들어가서 자신을 위해 약을 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리 큰 상처도 아니니 내일이면 다 나을 거예요. 이렇게 번거롭게 약을 사줄 필요가 없는데.”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얼굴에 멍 들면 보기 안 좋을 텐데. 너희 여자애들은 모두 예쁜 것을 좋아하지 않니?”“너희 여자애들?” 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응, 수민이도 그렇거든.”“그럼 고맙게 받을게요.”말하면서 소독약을 받으려 했다.재석은 오히려 건네주지 않고 조용히 의료용 면봉을 꺼냈다.“지금 혼자 약 바를 수 없으니 내가 도와줄게.이것 때문에 재석은 심지어 약국에서 손을 씻고 소독수로 소독을 한 다음 그제야 약을 들고 나왔다.정은은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남자는 이미 면봉에 소독약을 묻힌 다음, 한 손으로 그녀의 이마 앞의 잔머리를 가볍
“응.”“그럼 오늘 밤에 달리기 하러 나갈 거예요?”“응. 같이 뛸래?”“좋아요.”두 사람은 각자의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만난 다음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달렸다.해가 이미 졌기에 하늘은 서서히 어둡기 시작했고, 대지는 점차 어둠에 휩싸였다.두 사람이 한 바퀴 뛰었을 때, 달빛이 점점 밝아지더니 별도 깜빡이기 시작했다.세 바퀴째 다릴 때, 정은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선... 선배님 먼저 뛰어요. 난 좀 쉴게요.”재석도 따라서 멈추었다.“괜찮아?”정은은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힘들진 않지만 너무 더워서 그래요.”그녀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었고, 땀방울이 볼에서 굴러 떨어져 티셔츠 속에 스며들었다.“그럼 나도 쉴게. 같이 걸을까?”정은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머쓱해했다.두 사람은 가로수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비대학교의 교문 앞에 도착했다. 재석은 편의점에 가서 생수 2병을 샀고, 한 병을 연 다음 정은에게 건네주었다.“고마워요.”앞문을 지나 또 반 바퀴를 돈 다음, 두 사람은 뒷문으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면 개방된 농구장이 하나 있었다.두 사람이 지나갈 때, 농구공 하나가 마침 정은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그녀는 이를 알아차리고 피하려 했다.그러나 재석의 반응이 더욱 빨랐다. 그는 정은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감싼 후, 다른 한 손으로 정확하게 슛을 했다.농구장에서 바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야! 기술이 아주 좋구나!”재석은 오늘 하얀 농구복을 입었는데 언뜻 보면 정말 대학생 같았다.“우리 딱 한 사람 부족한데, 한 판 할래?”재석은 그러고 싶었지만 먼저 정은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물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가요, 건배님. 난 관중석에 응원석에 앉아서 지켜볼게요.”‘선배님이 농구를 할 줄 알았다니...’자리에 앉자, 정은은 멈칫했다.‘방금 선배님은 왜 날 바라본 거지? 이런 일로 나에게 먼저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재
두 사람은 이미 여러 번 호흡을 맞추었기에 무척 능숙했다.재석은 채소를 씻고 다듬으며 정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정은은 채소를 썰고 볶는 것을 책임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 3개와 국 하나가 식탁에 놓였다.두 사람은 각자 맞은편에 앉았다. 재석은 밥 한 그릇을 담아 먼저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정은은 받으면서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분위기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고, 전의 어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밥을 다 먹은 후, 재석은 예전처럼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를 도왔다.정은은 그가 건네준 접시를 받아 수건으로 닦고 옆에 놓았다.두 사람은 호흡이 잘 맞아 일사불란하게 일했다.하지만 쓰레기를 정리할 때, 정은과 재석은 동시에 허리를 굽혀 쓰레기봉투를 묶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머리를 부딪혔다.“아...”정은은 이마를 가리고 일어서더니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미안, 정말 미안해, 주의하지 않았어...”재석은 사과하며 즉시 앞으로 다가갔다.“많이 아프지?”말하면서 정은의 손을 살짝 떼어냈다.손톱만한 부위가 빨갛게 되었지만 다행히 붓지 않았다.“미안, 난 쓰레기를 들고 싶었는데, 너와 부딪힐 줄은 몰랐어.”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이제 안 아파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녀의 눈에 여전히 눈물이 좀 고였다. 눈시울이 빨갛게 달아오르니 무슨 괴롭힘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재석은 더욱 미안해했다.“저... 선배님, 일단 나 좀 놓아주면 안 돼요?”남자는 그제야 자신의 손이 아직도 여자의 손목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미안!”그는 뜨거운 것에 데인 것처럼 손을 거두어들였고 심지어 뒤로 물러섰다.정은은 처음에 어색했지만, 재석의 과장된 반응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었다.재석도 따라서 입술을 구부렸다.“그렇게 웃겨?”“네!”그는 한숨을 쉬었다.“그럼 됐어.”말하면서 다시 허리를 굽히고 쓰레기봉투를 묶었다....재석의 에어컨은 마침내 수리되었는데 수리기사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교수님, 와서
재석이 걸어 나왔다.화장실 문은 마침 옷걸이 맞은편에 있어서 두 사람은 이렇게 딱 마주쳤다.남자는 갈아입은 옷을 품에 안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축축해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렇게 입고 있던 티셔츠는 어느새 젖었다. 목과 얼굴도 축축해서 물 같기도 하고 땀 같기도 했다.정은을 본 순간, 재석의 머리는 새하얘졌다.여자아이는 검은색 탱크톱을 입고 있었다. 타이트한 옷은 포만하고 아름다운 상반신 곡선을 그려냈다.탱크톱 끈이 좀 짧아서 허리가 살짝 드러났고 작은 배꼽이 똑똑히 보였다.가늘고 긴 팔, 뚜렷한 쇄골, 검은색에 비쳐 하얗게 빛나고 있는 피부.꿈속의 ‘정은’과 똑같았다.정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손에 티셔츠를 들고 있단 것도 깜빡 잊고 멍을 때렸다.“선, 선배님...”재석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즉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될수록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미안, 결국 네 화장실 좀 썼어.”그러나 오직 재석 자신만이 잘 알고 있었다. 이 짧디 짧은 말 한마디 하려고 목이 얼마나 탔는지, 호흡이 또 얼마나 거칠었는지를.“두근두근.”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는데, 마치 가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재석은 확실히 집에 돌아가서 샤워를 하려 했다.깨끗한 옷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니, 수리기사들이 안에서 토론을 하고 있었다.구식 건물은 고정된 에어컨 실외기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에어컨 실외기는 일반적으로 바깥의 벽에 걸려 있었다.마침 재석네 실외기는 화장실 밖의 벽에 걸려 있었기에, 수리기사는 이미 안전줄을 타고 화장실 창문에 매달려 실외기를 수리하고 있었다.샤워는커녕, 지금 화장실을 제대로 쓸 수조차 없었다.그래서 재석은 정은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원래 정은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침실 앞까지 걸어간 그는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정은이를 방해하는 거 아니야? 지금 자고 있을 수도 있잖아? 어차피 빨리 씻으면 몇 분밖에 안 걸리니 공교롭게 마주칠 일은 없겠지?’그러나 두 사람은 뜻밖에도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