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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십일
“형, 무슨 일이에요?”

선우는 술을 홀짝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도겸을 보곤 슬그머니 동건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도겸의 어두운 얼굴에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원래 활기찼던 이곳의 공기도 잠잠해졌다.

“누구한테 차단당해서 그런 거겠지.”

동건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을 던졌다. 도겸의 얼굴은 그 말에 더욱 어두워졌다.

쾅!

도겸은 술잔을 유리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의 눈에 폭력적인 기운이 어른거렸다.

“다시는 걔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을 못 알아들어?”

동건은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노래하던 사람도 입을 다물었고, 주변 사람들도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

선우는 목구멍에 걸린 술을 삼키며, 정은 누나가 정말로 결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빈은 술에 약간 취해 정신을 차리며 선우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은이 돌아왔어?”

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할 용기가 없어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현빈은 선우의 말을 듣고 정은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짐작했다.

바텐더가 다섯 병의 술을 가져오자, 누군가가 용감하게 제안했다.

“진실 게임 할래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다.

“좋아, 나 그거 제일 좋아해.”

이때 한 여자가 막 들어왔다.

“안나 이쪽으로 와, 마침 형 옆에 자리가 비었어.”

안나는 자연스럽게 도겸 옆에 앉았다. 그녀는 이 클럽의 에이스였고, 도겸과도 익숙한 사이였다.

“강 대표님.”

도겸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끼리 놀아, 난 먼저 간다.”

남겨진 사람들은 당황했고, 오늘 밤의 분위기를 깨뜨린 듯한 안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

술집을 나온 도겸에게 운전기사가 어디로 갈지 물었다. 브랜디 두 잔을 마신 후, 도겸은 어지러움을 느꼈고 텅 빈 집을 떠올렸다.

“회사로 가죠.”

“강 대표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밤 10시, 비서가 퇴근 준비를 하던 중, 엘리베이터에서 도겸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비서의 놀란 표정이 도겸의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

평소 이 시간에 정은은 도겸의 건강을 걱정하며 일찍 자라고 권유하곤 했다. 도겸은 귀찮아하면서도 결국 그녀의 말을 따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퇴근하려던 건가요?”

“네, 지시하실 게 있으신가요?”

도겸은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오후에 식사를 거르고 술을 마신 탓에 위가 아파져 왔다. 얼굴이 창백해진 도겸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죽 좀 사 와줘요.”

또한 생각 끝에 말을 덧붙였다.

“제일 좋은 식당에서.”

비서는 신속하게 20분 만에 고급스럽게 포장된 죽을 가져왔으나, 뚜껑을 열자마자 도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해물 죽이죠?”

비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죽사랑의 가장 유명한 메뉴가 해산물 죽이라서요. 대표님이...”

“그만, 나가 봐요.”

도겸은 몇 입 먹고 나서 더 이상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해물 죽은 색도, 향도, 맛도 훌륭했지만, 정은이 해주던 죽이 떠올라 도겸의 마음은 텅 빈 듯했다.

“젠장!”

도겸은 자신이 미친 것 같다고 느꼈다.

...

병원에서 나온 정은은 아파트로 돌아왔다. 벽의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애매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켜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섹시한 슬립 드레스를 입은 조수민이 젊은 남자와 뜨거운 순간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둘은 소파 위에 있었고, 수민의 부드럽고 하얀 손이 남자의 옷 아래로 미끄러지며 복근을 드러냈다. 둘의 입술은 서로를 탐닉했고, 수민의 목에는 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현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뜨거웠다. 수민은 불빛에 눈이 잠시 멀어, 남자가 키스하려는 걸 멈추게 했다.

“어? 정은이 왔구나.”

“음, 너희 옷부터 입어.”

정은은 입꼬리를 올리며 돌아서서 둘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정은은 한숨을 쉬며, 수민의 집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각자의 사생활이 있는 법, 오래 함께 지내는 것은 서로에게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수민은 개의치 않고 미소를 지었다. 실크 드레스의 끈을 당겨 입고 외투를 걸치며, 남자의 옷을 던져주었다.

남자의 잘생긴 얼굴에는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의 눈은 약간 붉어져 있었다. 수민은 남자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자기야, 방에서 기다려.”

골든 리트리버와 같이 생긴 남자는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어깨에 키스 자국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정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누나, 좋은 밤이에요.”

정은은 무심코 대답했다.

“안녕, 케빈.”

남자는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수민은 와인 한 잔을 따라 한 모금 마셨다. 혀끝에 달콤함과 약간의 쓴맛이 퍼지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얘는 스티븐이야, 케빈 아니야.”

수민의 말에 정은은 할 말을 잃었다.

“어디 갔다 이제 왔어?”

수민은 정은의 붉어진 눈을 보고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울었어?”

수민이 묻자 정은은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마시며 말했다.

“오늘 병원에 오미선 교수님을 뵈러 갔어.”

둘은 대학 동기이자 오미선 교수의 제자였다. 수민은 아직도 대학 동창회 톡방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수민은 정은을 힐끗 보며 말했다.

“너...”

막 말을 꺼내려다 주저했다. 아무래도 정은은 오미선 교수의 가장 기대를 받던 학생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랐지만,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한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수민은 오미선 교수가 정은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특별 프로젝트를 주고, 논문까지 함께 쓴 것도 목격했었다. 정은이 학부생이었을 때, 오미선 교수는 그녀를 정식 지도학생으로 삼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오미선 교수는 정은에게 많은 학문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대로만 했다면 정은은 5년 이내에 국내 최연소 생명과학 박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민은 정은이 왜 학업을 포기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민은 오미선 교수의 편애를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쉽게 얻은 것은 소중히 여기기 힘든 법이고, 천재는 제멋대로 굴 권리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듣기로는 이번에 교수님이 꽤 심하게 편찮으셨다던데, 수술 후 회복은 어때?”

수민이 묻자, 정은은 고개를 저었다. 이에 수민은 웃으며 말했다.

“너 대체 병문안을 어떻게 간 거야? 교수님 상태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야?”

“들어가지 못했어.”

“너 그렇게 겁쟁이였어?”

정은의 표정을 보고는 수민은 참지 못 하고 말했다.

“넌 정말 왜 그러니!”

정은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말이 없었다. 수민은 정은의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고, 아침에 가져간 음식이 교수님께 드리려던 것임을 깨달았다.

“너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피할 생각이야?”

수민은 원래 용기 있고 결단력 있는 친구가 이렇게 주저하는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정은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교수님과는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야. 어떤 일은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수민아 나랑 같이 교수님 뵈러 가지 않을래?”

“뭘 어떻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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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싫어요.”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얼굴이 붉어지더니 발끝을 세웠다. “오빠랑 조금 더 있고 싶어요.”하지만 연희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도겸은 오히려 연희를 끌어안고 강하게 입을 맞췄다.“헉!” 구경하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환호를 질렀다.“와우, 대박!” “대체 얼마나 사랑하는 거야?”정은은 이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손에 쥔 책을 힘주어 쥐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마음이 아픈 건 여전했지만 표정은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거의 무감각할 정도로.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금연도 금단 증상이 있듯이, 6년을 사랑한 사람을 잊는 것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정은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정은에게는 아직 공부할 책이 남아 있었다.도겸은 인파 속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를 돌려 바라봤고 익숙한 듯한 실루엣이 도겸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바로, 연희의 부드러운 손이 도겸의 손바닥을 파고들며 친근하게 손가락을 엮었다.“뭘 보고 있었어요?”연희의 질문에 도겸은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연희를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주고, 도겸은 떠나려 했으나 연희는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아직 시간도 이른데, 나랑 좀 더 있으면 안 돼요?”도겸은 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지, 주말에 데리러 올게.”가로등 아래, 도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더욱 이목구비가 선명해 보였다. 연희의 눈에 한 줄기 순수한 매력이 흘러들었다. “오빠, 오늘 나랑 같이 집에 가면 안 돼요?”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른이라멘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도겸은 잠시 멈칫하며, 눈 속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넌 아직 어려. 조금만 더 지나서.”연희는 약간 놀랐지만, 마음속으로는 희미한 기쁨이 지나갔다. 도겸이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었다. 눈앞의 즐거움에 급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다.“알겠어. 나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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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의 정략결혼에서는 남자가 바깥에 두세 명의 여자를 두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집안의 본처만 흔들리지 않으면, 밖에서 누구와 어떻게 놀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서영숙 역시 엄마로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오늘 서영숙은 소정은에게 공식적으로 약속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은의 반응은 감사의 눈물이 아닌 차가운 비웃음이었다.“사모님, 그런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 주시죠. 저는 받을 자격이 없어요.”“그리고 저와 강도겸은 이미 헤어졌습니다. 앞으로 다시 만나도, 우리 그냥 남남으로 지내는 게 좋겠네요.”이전에는 정은이 도겸을 위해 서영숙의 비난을 무조건 참아왔다. 서영숙은 정은의 학력이 낮고, 유학 경력이 없으며, 졸업 후에도 직업이나 경력이 없어서 자신의 귀한 아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정은은 이 미래 시어머니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하려고 애썼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도겸조차도 필요 없게 된 마당에, 어머니 따위가 안중에 있을 리가 없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참, 제가 조언 하나 드리죠.”“뭐라고?”정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말을 그렇게 신랄하게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그리고, 원숭이가 옷을 입어도 결국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걸 기억하시길 바랄게요.”그 말을 남기고, 정은은 태연하게 돌아서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서영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눈동자가 흔들리며 충격에 빠졌다. “방금 뭐라고 했어? 감히 나한테 그렇게 말해? 그게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직도 우리 강씨 집안에 시집올 생각이 있는 거야?!”서정은 자기 엄마의 팔을 잡아 흔들며, 충격에서 깨어난 후 중얼거렸다. “엄마, 언니가 방금 오빠랑 헤어졌다고 했어요?”“흥, 그걸 믿니?”“사실 그렇죠. 오빠랑 몇 번이나 헤어졌다가도 다시 돌아왔잖아요.”결국,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정은은 도겸을 미치도록 사랑했고, 마치 주인에게 충성하는 개처럼 어떻게 내쳐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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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61화

    ‘날 기다리고 있었어? 왜?’“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정은은 즉시 정색했다.“음. 너한텐 아마도 좋은 소식이겠지?”“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정은은 눈을 깜박였다.재석이 뜸을 들일수록 정은은 더욱 궁금해졌다.“그게...”재석은 어제 이웃 대학에 가서 오랜 친구를 만났고, 겸사겸사 작은 부탁을 했다.“마 교수는 이미 그들의 실험실 한 칸을 내주기로 했어. 내가 가서 한 번 봤는데, 너희들의 실험에 필요한 모든 설비는 다 갖추어져 있어. CPRT까지.”“진짜요?! 너무 잘됐네요!”정은은 기뻐서 펄쩍펄쩍 뛸 뻔했다.도움이 필요할 때, 누군가 마침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니.그녀는 실험실을 찾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재석이 이미 마땅한 곳을 찾아주었다.마치 다정한 집주인이 집에서 쫓겨난 불쌍한 아이들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정은은 참지 못하고 달려가서 재석의 소매를 덥석 쥐었다.“선배님, 어쩜 이렇게도 다정한 거예요!”여자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빛을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손은 자신의 팔꿈치에 떨어졌고, 옷을 사이에 두고도 재석은 정은의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눈이 마주 친 순간, 재석은 미소를 지었다.정은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한 것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는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선배님, 미안해요. 너무 흥분해서 그만.”급하게 사과하느라 정은은 남자의 눈빛에 실망이 스친 것을 보지 못했다.“괜찮아.”“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 이따가 와서 밥 먹어요. 절대로 거절하면 안 돼요!”정은은 말을 마친 후, 재빨리 집으로 달려갔다.어두워졌던 남자의 눈빛은 순식간에 밝아졌다....정은의 집에 들어서자, 재석은 외투를 벗고 소매를 걷어올리면서 주방으로 걸어갔다.그리고 채소를 씻고, 썰고, 마늘을 까기 시작했다.정은이 입을 열지 않아도 재석은 알아서 척척이었다.너무 익숙해서 마치 이곳이 재석 자신의 집인 것 같았다.두 사람은 한두 번 호흡을 맞춘 게 아니었기에 이젠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뭘 하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60화

    “이게 다 뭐야?!”...집에 돌아온 서정은 들어오자마자 소리를 쳤다.“이모님, 아이스팩 하나 좀 줘요!”서영숙이 물었다. “아이스팩은 왜? 이 추운 날에...”“엄마, 나 남한테 맞은 거 알아요?”“뭐?!” 서영숙은 이 말을 듣자 즉시 달려왔다. “누가 때렸어?! 누가 감히 내 딸을 때려?!”서정은 입을 삐죽거렸다.“소정은이요.”“그 아이는 이제 겁도 없는 거야?! 감히 사람을 때리다니?!”“나도 그냥 말 몇 마디 좀 했을 뿐인데, 직접 내 따귀를 때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흑흑...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봐요, 얼굴이 부었잖아요!”서영숙은 바로 마음이 아파서 서정의 얼굴을 살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갔다.“앗! 아파요!”“이 소정은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핸드폰, 내 핸드폰은?!”서영숙은 몸을 돌려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기다려... 내가 그 아이 제대로 욕할 거야...”이때 가정부가 앞으로 다가왔다. “사모님, 핸드폰은 여기에 있습니다.”서영숙은 얼른 가져오더니 정은의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이 천한 것이 감히...”[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서영숙은 그제야 정은이 이미 자신을 차단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서영숙은 가정부를 불렀다. “핸드폰 좀 줘요.”“네.”서영숙은 가정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는데, 이번에 마침내 연결되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확실히 정은의 목소리였다.서영숙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정은, 이 뻔뻔한 계집애야! 왜 내 딸을 때리... 여보세요? 여보세요?! 소정은, 네가 감히 내 전화를 끊어?!”서영숙은 화가 나서 숨이 넘어갈 뻔했다.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차가운 안내음이 또다시 울렸다.‘또 날 차단했다니!’“어떻게 이럴 수가?! 내 번호를 차단하다니?!”서정은 눈을 부라렸다.“지금 우리 오빠 여자친구도 아니고, 우리 집에 시집오고 싶지도 않으니 이게 뭐라고요.”서영숙은 멈칫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59화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실험실을 만들기 시작했다.물론 정은은 진일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아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모든 문제에 다 해결할 방법이 있겠죠. 언젠가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그럼 성공하길 바랄게.”말이 끝나자 진일은 몸을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선배님!” 정은이 갑자기 그를 불렀다.“사람은 때로 좀 이기적이고 자신을 위해 많이 계획해야 해요. 필경 평생 다른 사람의 밑에서 일할 수가 없지 않나요? 고개도 들 수 없고, 허리를 펼 수도 없고. 안 그래요?”진일은 웃었다.“일깨워 줘서 고마워. 나한테도 다 생각이 있어.”...“뭐? 열쇠를 못 받았다니?” 송지혜는 심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앞에 있는 서정을 바라보았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너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소정은은 열쇠를 이미 바쳤다고 했고, 또 학교의 규정까지 내세웠단 말이에요. 뭐 규정은 이러하니 저에게 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럼 전 또 뭘 할 수 있겠어요? 달려들어서 빼앗아올까요?!”서정은 이미 좀 짜증이 났다.송지혜의 질문하는 말투가 그녀를 매우 불쾌하게 했다.‘이게 내 탓이야? 원래 소정은을 찾아 열쇠를 달라고 하는 일 자체가 매우 불합리하잖아. 소정은이 그랬듯이, 우리가 뭔데? 왜 우리한테 줘야 하는 건데?’송지혜는 지금 서정이 엄청난 잘못을 한 것처럼 굴었는데, 서정은 비록 총명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었다.“교수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굳이 소정은의 열쇠를 가져가고 싶은 거죠? 그 낡은 실험실에 뭐가 있는데요?”“아, 아니다, 뭔가 있긴 하네요. 안에 CPRT가 한 대 더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희에게 이미 두 대가 있잖아요? 왜 이렇게 많은 기계를 원하시는 건데요?”서정의 말에, 송지혜는 마치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버럭했다.“넌 질문이 너무 많아! 만약 일을 처리할 때도 말주변이 이렇게 좋다면, 이렇게 사소한 일도 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닐 거야!”서정은 누구인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재벌 집 아가씨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58화

    정은은 재석이 반드시 자신의 편에 설 것이라고 확신했다.“너희들의 열쇠는 이미 넘겨주었잖아. 그러니 내 손에 있는 이 열쇠는 절대 그들에게 줄 수 없어.”“왜요?”“아이고, 열쇠를 다 주면, 나중에 우리 CPRT를 옮길 때 문을 어떻게 열 거야? 문을 부수고 들어올 거야?”민지는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이 CPRT를 옮겨도 되는 거예요?!”“물론이지. 우리 돈으로 샀으니 왜 안 되겠어?”“그럼요! 저희가 산 것이니 당연히 저희가 옮겨 가야죠.”“그래서 우리의 손에 열쇠가 하나 있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옮길 때 불편해.”서준은 미소를 지었다.“송지혜 교수가 갖은 방법을 다하여 저희를 쫓아낸 이유가 바로 이 기기 때문일 거예요. 이번에 그야말로 헛수고를 한 셈이죠.”세 사람은 물건을 옮기고 문을 닫고 떠났다.그리 많지도 않았는데, 한 사람마다 종이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민지의 박스가 제일 컸고, 안에 간식이 가득 차 있었다.감자칩, 견과, 사탕, 과자, 우유, 음료수...운동장 옆을 지날 때, 축구공 하나가 민지를 향해 날아왔고, 피하기 위해 그녀는 직접 상자를 던졌다.다행히 공은 마지막 순간에 그녀의 팔을 스치며 날아갔다.하지만 상자 안의 물건은 이미 쏟아져 나왔다.정은과 서준은 즉시 상자를 내려놓고 민지와 함께 주우려고 했다.그러나 누군가의 동작이 더 빨랐다.진일은 바닥에 있는 간식을 주워서 다시 상자에 넣은 다음, 상자를 안고 민지에게 건네주었다.“감사합니다.”민지는 좀 어리둥절해졌다.‘우린 친한 사이도 아닌데, 왜 갑자기 날 도와 물건을 주운 거지?’진일을 보며, 정은과 서준은 약속이나 한 듯이 시선을 마주쳤다.그녀는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고마워요, 선배님.”그는 웃으며 말했다.“날 그렇게 방비할 필요가 없어. 내가 이렇게 쫓아온 이유는 그들 때문이 아니니까.”정은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이유가 뭐죠?”진일은 잠시 침묵했다.“너희들이 믿든 안 믿든, 난 여전히 이렇게 말하고 싶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57화

    정은이 말했다.“싸움과 시비를 거는 것은 두 가지 개념이야. 우리는 확실히 널 때렸지만, 그 전제는 너희들이 먼저 도발했기 때문이야. 대학원 측은 송지혜 교수의 편을 들지도 모르지만, 학교 측은 아닐 거야.”“정상적인 조사 절차에 따라 원인을 조사해야 결과가 밝혀질 거야. 네가 교무처에 가서 네가 맞았다고 말하면, 교무처는 자연히 상대방이 왜 너를 때렸는지 물어볼 텐데.”“그때 넌 어떻게 대답할 거야? 너희들이 규정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고, 우리를 협박하고 욕설과 모함을 해서 맞았다고 말할 거야?”“아니면, 너희들이 일부러 찾아와서 우리를 비웃으러 왔다가, 너무 꼴보기 싫게 행동했기 때문에 얻어맞았다고 말할 거야?”“위의 이유로 너희들은 고의로 시비를 걸어 소동을 일으킨 것으로 처분을 받을 수 있어! 이왕 쫓겨날 바에 우리 다 같이 쫓겨나자. 모두들 물건을 정리하고 떠나면 더 재밌고 떠들썩하지 않겠어?”정은은 웃으며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아,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더 미친 것은, 정은이 무척 기뻐 보인다는 것이었다.민지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쫓겨나도 엄청 좋지. 난 집에 돌아가서 가업을 물려받아야지. 우리 아빠 대신 월세를 받으면 돼.”서준도 말했다.“쫓겨나면 난 공무원 시험을 보러 갈 거야.”그 두 사람은 정말 미쳤으니 서준도 어쩔 수 없이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진호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재민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진일을 보았다.그러나 그의 입가에 웃음이 나타날 줄이야.그는 자신이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깜박거리며 자세히 보았다. ‘헐! 형 지금 더 환하게 웃고 있어!’정은은 계속 부채질을 했다.“교무처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가자, 같이. 그렇지 않으면 교무처에서 또 통지를 하나하나 내려야 하잖아.”말하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민지와 서준은 정은의 뒤를 따라갔다.“어? 너희들 왜 안 와? 빨리 와, 이제 곧 점심 휴식 시간이란 말이야.”진호와 서정은 얻어맞은 채 서로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56화

    찰싹!정은의 눈빛이 차가웠다.따귀가 떨어지자, 현장은 매우 조용해졌다.서정마저 멍해졌다.“너, 방금 날 때렸어? 감히 날 때리다니?!”“왜 못 때리는 건데? 네가 먼저 도발했으니, 나도 단지 나 자신의 명예를 지켰을 뿐이야. 여기는 학교이지 네 집이 아니니까. 넌 재벌 집 아가씨라고 성질 좀 부려도 되지만, 난 그런 널 방임할 의무가 없어.”‘전에 내가 좀 잘해 주었다고 그것을 아부라 생각하는 거야? 정말 아이러니하네...’지예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설사 서정이 말을 듣기 싫게 했다 하더라도, 넌 사람을 때리면 안 되지! 학교 규정에 똑똑히 적혀 있잖아. 싸우거나 시비를 걸면 처분을 받을 거야.”진호는 바로 말을 받았다.“가자, 교무처에 가서 이 사람 고소하자! 우리 모두 증인이잖아!”탁재민은 이 말을 듣고 즉시 가운데로 돌진하여 그들을 말리려 했다.“모두 동창인데, 이렇게 나오면 섭섭하지. 이 일은 그냥 넘어가는 게 더 나아. 적보다 친구를 하나 더 사귀는 게 더...”“꺼져! 이 촌놈아!” 진호는 재민을 힘껏 잡아당겼다. “너는 도대체 누구 편이야? 방금 말참견을 해야 할 때는 옆에 서서 죽은 척하다가, 교무실에 가서 소정은을 고소하겠다고 하니 바로 뛰쳐나오면서 지껄이다니. 탁재민, 너 참 대단해. 전에 왜 네 말주변이 이렇게 좋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까?”“아니야... 그냥 다들 다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 일이 커지면 누구한테도 안 좋잖아...”그는 설명하고 싶었지만, 입만 열면 말을 더듬기 시작해서 제대로 말 할 수가 없었다.그는 시종 입을 열지 않은 진일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진일은 여러 사람들을 바라보더니, 마지막에 시선을 서정의 얼굴에 떨어뜨렸다.“소정은은 틀린 말을 하지 않았어. 여기는 학교이지 네 집이 아니야. 아무도 널 봐주지 않을 것이고, 네가 남을 욕 할 때, 이미 남에게 맞을 준비를 해야 했어.”“너...” 서정은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진호는 진일에게 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55화

    서지예도 맞을까 봐 두려워, 민지를 바라보는 눈빛에 공포가 들어있었다.‘이렇게 뚱뚱하면 힘도 세겠지?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그녀는 재빨리 진호를 밀어냈다.“여자 뒤에 숨다니, 너도 참 뻔뻔해!”강서정은 한쪽에 서서 두 손으로 가슴을 껴안았다.“됐어,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하러 왔는지 잊은 거야? 다들 가만히 좀 있어.”말을 마치고, 그녀는 정은을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깜끔하게 실험실 열쇠 내놔요. 어차피 열쇠를 갖고 있어도 소용없으니까.”정은은 미소를 지었다.“미안하지만, 열쇠는 정말 너에게 줄 수 없는데.”서정은 눈살을 세게 찌푸렸다.“지금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데, 지금은 주고 싶지 않아도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야 한다고요!”“실험실 정돈 개혁 규정에 따르면, 시정 중의 실험실은 사용을 허용하지 않으니, 학생들은 열쇠를 소지할 수 없어요. 반드시 교수님에게 맡겨 보관하거나 교무처에 넘겨야 한단 말이에요.”“학교 규정을 잘 배웠네.”서정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턱을 살짝 들었다.“규정이라는 것을 안 이상, 눈치 있게 열쇠부터 줘요.”정은은 웃으며 말했다.“난 확실히 열쇠를 바쳐야 하지만, 왜 너에게 줘야 하는 거지? 네가 뭔데? 내 교수님이야, 아니면 교무처의 선생님이야?”“아니...” 서정은 할 말을 잃었다.어제, 송지혜는 그녀를 사무실로 부른 다음, 반드시 정은의 열쇠를 가져와야 한다고 당부했다.처음에 서정은 그 이유를 잘 몰랐다.‘허름한 실험실일 뿐, 왜 빼앗으려는 거지?’그러나 그녀는 이 평범한 실험실에 수억 원짜리 CPRT가 놓여 있다는 것을 잊었다.기계는 무겁고, 설치와 해체할 때 모두 전문 기술 인원의 도움이 필요했으니, 정은 그들은 가져갈 수가 없었다.좋은 물건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민지는 참지 못하고 입을 삐죽거렸다.“어떤 사람들은 정말 욕심이 많네요! 거머리처럼 하루 종일 어떻게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실지를 생각하다니.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건지,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54화

    정은은 잠시 멈추었다.“예산을 초과한 부분은 내가 가능한 한 빨리 보충할 테니까, 오빠는 최선의 방안에 따라 진행하기만 하면 돼!”이쪽에서 인훈과 이야기를 마치고 겸사겸사 저녁을 해결한 정은은 즉시 민지와 서준에게 최신 소식을 알렸다.“정은 언니, 돈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빠한테 달라고 하면 되니까요...”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차를 마시고 있던 하정남은 계속 재채기를 했다.“에취! 에취!”“당신 감기 걸렸어요?'“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딸이 지금 내가 보고 싶은 모양이야!”정은은 민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자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승낙한 것을 알면 네 아빠는 화를 내시지 않을까?”민지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안심하세요, 우리 아빠는 그런 분 아니세요! 돈은 단지 숫자일 뿐이니, 그 정도 달라고 했다고, 공이 몇 개 빠지는 것도 아니거든요.”‘참 돈이 많은 집안이군.’그러나 정은은 여전히 민지를 거절했다.“예산을 초과한 부분은 내가 내면 돼.”“그런데...”“그런 건 없어, 그냥 내가 말한 대로 하자.”이렇게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서준이 가볍게 기침하자, 민지는 깜짝 놀랐다.“네가 소리를 내지 않으면, 나는 네가 아직 여기에 있다는 것을 잊을 뻔했어.”서준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미안해요. 자금 방면에 도움이 되지 못해서.”집안 상황 때문에 서준은 그렇게 많은 현금을 꺼낼 수가 없었다.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집안 어르신에게 설명하기 어려웠다.정은은 웃으며 말했다.“돈은 나와 민지가 해결하면 돼. 넌 다른 방면에서 도와줘...”“뭔데요?”“두 달 안으로 실험실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격증을 준비해. 모든 행정 절차를 마치는 동시에 트집을 잡으려는 사람이 조금의 잘못도 골라내지 못하게 해야 돼. 할 수 있겠어?”그녀가 괜한 걱정을 하는게 아니라 이것은 유비무환이었다.송지혜 팀이 그동안 한 일들은 그야말로 그들의 감탄을 자아냈으며, 정은도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가만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53화

    남자는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겼고, 수염이 덥수룩해서 마치 하룻밤 사이에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그는 심지어 먼저 밥을 먹기도 전에 서류 한 부를 내밀었다.“정은아, 이건 초보적인 스마트 실험실 건설 계획이야! 어젯밤 나에게 보낸 수요와 결합하여 이미 보충했어. 이 몇 군데는 더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이 밀폐된 문 말이야.”“그곳은 생물실험실이기 때문에 일부 유해미생물이나 위험한 세균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어. 대문 재질은 아래의 이 몇 가지를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해...”“나는 이미 다른 차원에 따라 그들을 비교하고 분석했는데, 종합적으로 볼 때 이 GFRT 신형 재질이 가장 좋은 것 같아. 밀봉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가소성도 매우 강하거든...”짧디짧은 하룻밤사이에 인훈은 실험실의 초기형태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디테일까지도 아주 완벽하게 보완했다.그리고 이렇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실험실 관련 건설 규범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했다.정은은 눈을 깜박였다.“오빠, 어젯밤에 보충 수업이라도 한 거야?”“크험...”인훈은 가볍게 기침했다.“임시로 공부 좀 했고, 또 이 방면의 전문가에게 가르침을 청했어.”그러나 이것은 가장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정말 정은을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내가 조사해 봤는데, 생물 실험실은 실험실에서 처리하는 미생물 및 그 독소의 위해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야 해.”“기존 국가 표준에 따르면 총 P1, P2, P3, P4 네 개의 등급이 있어. 정은아, 나에게 대담한 생각이 하나 있는데.”“뭔데?”“이 네 가지 등급은 각각 네 가지 방호 규범에 대응해. 스마트 실험실인 이상... 우리는 이 네 가지 다른 규범 표준에 대해 네 가지 심지어 더 많은 실험실 모델을 설정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이렇게 되면 하나의 실험실은 N개의 실험실과 같았다.지능형 통제로 전환하면, 심지어 인건비도 필요하지 않았다.정은의 두 눈에서 빛을 발했다.“이뤄질 수 있을까?”“가능성이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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