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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십일
“형, 무슨 일이에요?”

선우는 술을 홀짝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도겸을 보곤 슬그머니 동건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도겸의 어두운 얼굴에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원래 활기찼던 이곳의 공기도 잠잠해졌다.

“누구한테 차단당해서 그런 거겠지.”

동건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을 던졌다. 도겸의 얼굴은 그 말에 더욱 어두워졌다.

쾅!

도겸은 술잔을 유리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의 눈에 폭력적인 기운이 어른거렸다.

“다시는 걔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을 못 알아들어?”

동건은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노래하던 사람도 입을 다물었고, 주변 사람들도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

선우는 목구멍에 걸린 술을 삼키며, 정은 누나가 정말로 결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빈은 술에 약간 취해 정신을 차리며 선우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은이 돌아왔어?”

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할 용기가 없어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현빈은 선우의 말을 듣고 정은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짐작했다.

바텐더가 다섯 병의 술을 가져오자, 누군가가 용감하게 제안했다.

“진실 게임 할래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다.

“좋아, 나 그거 제일 좋아해.”

이때 한 여자가 막 들어왔다.

“안나 이쪽으로 와, 마침 형 옆에 자리가 비었어.”

안나는 자연스럽게 도겸 옆에 앉았다. 그녀는 이 클럽의 에이스였고, 도겸과도 익숙한 사이였다.

“강 대표님.”

도겸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끼리 놀아, 난 먼저 간다.”

남겨진 사람들은 당황했고, 오늘 밤의 분위기를 깨뜨린 듯한 안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

술집을 나온 도겸에게 운전기사가 어디로 갈지 물었다. 브랜디 두 잔을 마신 후, 도겸은 어지러움을 느꼈고 텅 빈 집을 떠올렸다.

“회사로 가죠.”

“강 대표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밤 10시, 비서가 퇴근 준비를 하던 중, 엘리베이터에서 도겸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비서의 놀란 표정이 도겸의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

평소 이 시간에 정은은 도겸의 건강을 걱정하며 일찍 자라고 권유하곤 했다. 도겸은 귀찮아하면서도 결국 그녀의 말을 따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퇴근하려던 건가요?”

“네, 지시하실 게 있으신가요?”

도겸은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오후에 식사를 거르고 술을 마신 탓에 위가 아파져 왔다. 얼굴이 창백해진 도겸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죽 좀 사 와줘요.”

또한 생각 끝에 말을 덧붙였다.

“제일 좋은 식당에서.”

비서는 신속하게 20분 만에 고급스럽게 포장된 죽을 가져왔으나, 뚜껑을 열자마자 도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해물 죽이죠?”

비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죽사랑의 가장 유명한 메뉴가 해산물 죽이라서요. 대표님이...”

“그만, 나가 봐요.”

도겸은 몇 입 먹고 나서 더 이상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해물 죽은 색도, 향도, 맛도 훌륭했지만, 정은이 해주던 죽이 떠올라 도겸의 마음은 텅 빈 듯했다.

“젠장!”

도겸은 자신이 미친 것 같다고 느꼈다.

...

병원에서 나온 정은은 아파트로 돌아왔다. 벽의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애매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켜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섹시한 슬립 드레스를 입은 조수민이 젊은 남자와 뜨거운 순간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둘은 소파 위에 있었고, 수민의 부드럽고 하얀 손이 남자의 옷 아래로 미끄러지며 복근을 드러냈다. 둘의 입술은 서로를 탐닉했고, 수민의 목에는 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현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뜨거웠다. 수민은 불빛에 눈이 잠시 멀어, 남자가 키스하려는 걸 멈추게 했다.

“어? 정은이 왔구나.”

“음, 너희 옷부터 입어.”

정은은 입꼬리를 올리며 돌아서서 둘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정은은 한숨을 쉬며, 수민의 집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각자의 사생활이 있는 법, 오래 함께 지내는 것은 서로에게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수민은 개의치 않고 미소를 지었다. 실크 드레스의 끈을 당겨 입고 외투를 걸치며, 남자의 옷을 던져주었다.

남자의 잘생긴 얼굴에는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의 눈은 약간 붉어져 있었다. 수민은 남자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자기야, 방에서 기다려.”

골든 리트리버와 같이 생긴 남자는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어깨에 키스 자국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정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누나, 좋은 밤이에요.”

정은은 무심코 대답했다.

“안녕, 케빈.”

남자는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수민은 와인 한 잔을 따라 한 모금 마셨다. 혀끝에 달콤함과 약간의 쓴맛이 퍼지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얘는 스티븐이야, 케빈 아니야.”

수민의 말에 정은은 할 말을 잃었다.

“어디 갔다 이제 왔어?”

수민은 정은의 붉어진 눈을 보고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울었어?”

수민이 묻자 정은은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마시며 말했다.

“오늘 병원에 오미선 교수님을 뵈러 갔어.”

둘은 대학 동기이자 오미선 교수의 제자였다. 수민은 아직도 대학 동창회 톡방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수민은 정은을 힐끗 보며 말했다.

“너...”

막 말을 꺼내려다 주저했다. 아무래도 정은은 오미선 교수의 가장 기대를 받던 학생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랐지만,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한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수민은 오미선 교수가 정은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특별 프로젝트를 주고, 논문까지 함께 쓴 것도 목격했었다. 정은이 학부생이었을 때, 오미선 교수는 그녀를 정식 지도학생으로 삼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오미선 교수는 정은에게 많은 학문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대로만 했다면 정은은 5년 이내에 국내 최연소 생명과학 박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민은 정은이 왜 학업을 포기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민은 오미선 교수의 편애를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쉽게 얻은 것은 소중히 여기기 힘든 법이고, 천재는 제멋대로 굴 권리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듣기로는 이번에 교수님이 꽤 심하게 편찮으셨다던데, 수술 후 회복은 어때?”

수민이 묻자, 정은은 고개를 저었다. 이에 수민은 웃으며 말했다.

“너 대체 병문안을 어떻게 간 거야? 교수님 상태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야?”

“들어가지 못했어.”

“너 그렇게 겁쟁이였어?”

정은의 표정을 보고는 수민은 참지 못 하고 말했다.

“넌 정말 왜 그러니!”

정은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말이 없었다. 수민은 정은의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고, 아침에 가져간 음식이 교수님께 드리려던 것임을 깨달았다.

“너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피할 생각이야?”

수민은 원래 용기 있고 결단력 있는 친구가 이렇게 주저하는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정은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교수님과는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야. 어떤 일은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수민아 나랑 같이 교수님 뵈러 가지 않을래?”

“뭘 어떻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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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싫어요.”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얼굴이 붉어지더니 발끝을 세웠다. “오빠랑 조금 더 있고 싶어요.”하지만 연희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도겸은 오히려 연희를 끌어안고 강하게 입을 맞췄다.“헉!” 구경하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환호를 질렀다.“와우, 대박!” “대체 얼마나 사랑하는 거야?”정은은 이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손에 쥔 책을 힘주어 쥐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마음이 아픈 건 여전했지만 표정은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거의 무감각할 정도로.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금연도 금단 증상이 있듯이, 6년을 사랑한 사람을 잊는 것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정은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정은에게는 아직 공부할 책이 남아 있었다.도겸은 인파 속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를 돌려 바라봤고 익숙한 듯한 실루엣이 도겸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바로, 연희의 부드러운 손이 도겸의 손바닥을 파고들며 친근하게 손가락을 엮었다.“뭘 보고 있었어요?”연희의 질문에 도겸은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연희를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주고, 도겸은 떠나려 했으나 연희는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아직 시간도 이른데, 나랑 좀 더 있으면 안 돼요?”도겸은 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지, 주말에 데리러 올게.”가로등 아래, 도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더욱 이목구비가 선명해 보였다. 연희의 눈에 한 줄기 순수한 매력이 흘러들었다. “오빠, 오늘 나랑 같이 집에 가면 안 돼요?”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른이라멘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도겸은 잠시 멈칫하며, 눈 속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넌 아직 어려. 조금만 더 지나서.”연희는 약간 놀랐지만, 마음속으로는 희미한 기쁨이 지나갔다. 도겸이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었다. 눈앞의 즐거움에 급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다.“알겠어. 나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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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의 정략결혼에서는 남자가 바깥에 두세 명의 여자를 두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집안의 본처만 흔들리지 않으면, 밖에서 누구와 어떻게 놀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서영숙 역시 엄마로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오늘 서영숙은 소정은에게 공식적으로 약속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은의 반응은 감사의 눈물이 아닌 차가운 비웃음이었다.“사모님, 그런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 주시죠. 저는 받을 자격이 없어요.”“그리고 저와 강도겸은 이미 헤어졌습니다. 앞으로 다시 만나도, 우리 그냥 남남으로 지내는 게 좋겠네요.”이전에는 정은이 도겸을 위해 서영숙의 비난을 무조건 참아왔다. 서영숙은 정은의 학력이 낮고, 유학 경력이 없으며, 졸업 후에도 직업이나 경력이 없어서 자신의 귀한 아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정은은 이 미래 시어머니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하려고 애썼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도겸조차도 필요 없게 된 마당에, 어머니 따위가 안중에 있을 리가 없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참, 제가 조언 하나 드리죠.”“뭐라고?”정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말을 그렇게 신랄하게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그리고, 원숭이가 옷을 입어도 결국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걸 기억하시길 바랄게요.”그 말을 남기고, 정은은 태연하게 돌아서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서영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눈동자가 흔들리며 충격에 빠졌다. “방금 뭐라고 했어? 감히 나한테 그렇게 말해? 그게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직도 우리 강씨 집안에 시집올 생각이 있는 거야?!”서정은 자기 엄마의 팔을 잡아 흔들며, 충격에서 깨어난 후 중얼거렸다. “엄마, 언니가 방금 오빠랑 헤어졌다고 했어요?”“흥, 그걸 믿니?”“사실 그렇죠. 오빠랑 몇 번이나 헤어졌다가도 다시 돌아왔잖아요.”결국,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정은은 도겸을 미치도록 사랑했고, 마치 주인에게 충성하는 개처럼 어떻게 내쳐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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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0화

    그날 아침, 별다른 것 없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잠에서 깨자마자, 태민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확인했다. 혹시 수아에게서 연락이 와 있진 않을까...부재중 전화, 메시지 알림은 있었지만... 전부 다른 사람이었다.‘오늘도 아니야.’실망감이 스르르 밀려왔다. 태민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씻고, 옷을 챙겨 입고,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막 실험실에 도착하자, 태민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떴다.수아에서 온 전화였다.“수아야?! 드디어... 너 왜 그동안 연락 안 했어? 나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나...”[손태민, 진짜 왜 이렇게 집착하냐?!]단 한 마디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태민의 정신이 멍해졌다.[계속 전화하고, 계속 메시지 보내는 게 그렇게 재밌어? 내가 안 받고, 안 보는 거면 알아서 눈치껏 그만해야지! 왜 자꾸 연락하는데?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할 건데? 진짜 짜증 나!]“수아야...”태민은 당황해 목소리가 떨렸다.“나는 그냥... 네가 너무 연락이 없으니까,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돼서 그랬어...”[걱정?]전화기 너머로, 조소 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내가 뭘 어쨌다고 걱정을 해? 너 진짜... 왜 그렇게 남 일에 다 끼어들고 싶어 하는 거야? 다 간섭하고, 다 챙기고.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태민은 눈앞이 흐려졌다.‘난 그냥 좋아하니까... 그게 다였는데.’“난 그냥, 너한테 잘해주고 싶었어...”[됐어, 잘하고 못하고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제발, 더 이상 전화도 하지 말고, 메시지도 보내지 마. 지금은... 그냥 혼자 있고 싶어.]뚝-태민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태민아? 앞 좀 보고 다녀!”실험실 입구. 미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태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쓰레기통을 걷어찰 뻔했다.“아, 죄송해요...”그는 황급히 쓰레기통을 세워놓고 어색하게 웃었다.“자, 가자.”미진이 그를 불렀다.“어디를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29화

    예전 같았으면, 수아는 또 한동안 우울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상하리만큼... 숨이 트였다.‘피한 거야. 벗어났어. 그 사람에게서도, 그 일에서도.’집에 돌아오자, 부모님이 이번 융합연구 포럼은 어땠냐고 물으셨다. 수아는 짧게 대답하고 얼버무렸다.“뭐... 그냥 그랬어요. 피곤하네요. 먼저 방에 들어갈게요.”간신히 표정을 숨긴 채 방으로 들어온 수아는, 여행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터져버렸다. 눈물이 쏟아졌지만, 입술을 꽉 깨물어 단 한 마디 소리도 내지 않았다.‘들키면 안 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다음 날, 수아는 ‘아프다’는 이유로 재석에게 병가 메일을 보낸 후, 일주일 가까이 실험실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수아가 아프다고?”조미진과 전진욱은 당황했다.“무슨 병인데요? 심각한 거예요?”재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나도 모르겠어.”그 말만 남기고는 다시 실험에 집중했다.재석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더 날카로웠고, 그 차가운 실루엣은 말없이 거리를 그었다.‘뭔가 이상한데...’진욱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 시간 일해온 사람인지라 느낄 수 있었다.지금 재석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하지만 실험실 맴버의 개인 사정에 대해선, 그도 쉽게 묻거나 개입할 수 없었다.결국 진욱은 마음속 의심을 눌러가며 다시 업무로 돌아갔다.단, 평소처럼 농담 따먹기를 하진 않았고, 표정마저 진지한 모습이었다. 반면, 미진은 그 정도로는 촉이 빠르지 않았다.지금 상황만 보면, 미진은 정말로 수아가 큰 병이라도 앓고 있는 줄로 믿고 있었다.재석에게서 도무지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자, 미진은 결국 손태민을 조용히 붙잡았다.“우리... 과일이라도 사서 수아를 찾아가 볼까? 같이 일한 지 몇 년째인데,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잖아.” 그 말에 태민은 멍하니 되물었다.“수아가 아프다고요? 어떤 병인데요? 입원했어요?”그 순간, 태민의 표정은 굳어버렸다.‘아프다고...? 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28화

    사건 진행 상황을 묻자, 경찰은 현재 재석 관련 건이 조사 단계에 있으며, 정식으로 입건될지는 아직 미정이라고 답했다.‘역시... 예상한 대로...’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재석도, 정은도 실망한 기색은 없었다.병원에서 받은 진단서와 입원 기록, 진료 확인서까지 전부 수사 담당자에게 제출한 후, 두 사람은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J시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밤 8시가 넘어서였다.택시를 타고 익숙한 단지 앞으로 돌아온 둘은, 단지 입구 쪽에 있는 단골 포장마차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다.“확실히 우리 동네 음식이 제일 맛있네요.”정은이 그렇게 말하며 웃자, 재석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두 사람의 마음도 편안해졌다.밥을 먹고 나서, 둘은 나란히 아파트로 올라갔다.정은은 집 앞에 도착해 열쇠를 꺼냈다. 잠깐 멈칫한 그녀는, 옆집 문을 열고 있는 재석을 돌아봤다.“지금은 어때요? 불편한 데는 없고요?”“응, 완전 멀쩡해. 컨디션 좋아.”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당부했다.“그래도 약은 꼭 챙겨 드세요. 의사 선생님이 말하길, 3일은 꾸준히 먹는 게 좋다 했어요.”“알겠어. 꼭 먹을게.”서로 인사하고, 각자의 문을 닫았다....정은은 샤워를 마치고 편안한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논문 두 편을 읽은 뒤, 평소처럼 불을 끄고 누웠다.‘그래, 오늘은 꽤 길고도 복잡한 하루였지...’그녀는 금세 잠에 들었다.한편, 옆집.재석도 짐을 정리하고 샤워까지 마친 후, 이불 속에 누웠다. ‘약은... 아, 까먹을 뻔했네.’정은의 당부가 떠올라,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다시 일어났다. 거실에서 약을 챙겨 먹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그런데 아무리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너무 자서 그런가... 아니면 이 약 때문인가...’자꾸만 정은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웃는 얼굴, 당황한 얼굴, 화내는 얼굴...‘대체 왜... 이렇게까지 또렷하게 떠오르는 거야.’결국 재석은 새벽 세 시가 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27화

    “이 서류들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거예요.”“신경 써줘서 고마워.”“두 번째네요.”“응?”“깨어나서 저한테 고맙다고 말한 거, 두 번째예요.”“아...”재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보기 드문 허당미가 드러난 순간이었다.“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정은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럴 땐 이렇게 말하면 돼요.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좋아, 샤부샤부 사줄게, 어때?”‘어떻게 알았지? 나, 오늘 아침에 샤부샤부 생각했는데?!’ ‘설마... 내 배고픈 마음마저 읽힌 거야?’하지만 정은은 곧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근데 의사 선생님이 맵고 자극적인 음식은 피하라고 하셨잖아요.”“우리 반반탕 시키면 되잖아. 맑은 국물도 있으니까.”“좋아요!”정은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수액은 다 맞은 건 점심 무렵이었다.두 사람은 퇴원 수속을 밟으러 이동했다. 정은은 약국으로 약을 가지러 갔고, 재석은 병실 담당 의사를 찾아가 필요한 기타 서류를 요청하려 했다.그런데 의사가 재석을 보자, 안경을 살짝 내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왜 그러시죠?”재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목은 괜찮아요?”“네?”“목소리요. 쉬었다거나, 건조하다거나... 그런 증상은 없어요?” 재석은 고개를 저었다.“없는데요?”“다행이네요. 어젯밤에 부르짖는 거 보고, 혹시 성대가 붓는 건 아닌지 걱정했거든요.” “제가... 어젯밤에... 그렇게 소리 질렀어요?”“크게는 아니었어요.”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그냥... 계속 불렀죠. 끊임없이.”재석의 숨이 순간 멈췄다.“제가 누굴 불렀는데요?”의사는 재석을 한 번 훑어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긴장할 거 없어요. 이상한 말은 아니고, 그냥 아주... 정상적인 말이었죠.” ‘그 말이 더 무서운데요...?’재석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정은... 정은아... 정은...’ 아주 다양한 어조와 감정으로 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26화

    정은은 벌떡 일어나 재석에게 달려갔다.남자의 눈은 꼭 감긴 채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소리는 거칠기 그지없었다.“선배님? 선배님... 제 말 들리세요?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재석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좀처럼 뜨이지 않았다.“선배님! 제발 깨어나세요!”간절한 외침 끝에, 재석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정은아?”“하...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어요...”정은이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찰나, 갑자기 재석의 손이 뻗쳐 나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거센 힘으로 당기더니 그녀는 고스란히 재석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너무 순식간이었다.“꺅...!”‘지금... 뭐야 이게?!’“정은아...”남자의 숨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거칠게 들려왔다.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둘이 몸이 너무 가까워서, 마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서로를 녹일 것만 같았다. “읏...”재석이 저도 모르게 신음하듯 소리를 내뱉었다.정은의 온몸이 굳어버렸다.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정신이 흐려진 듯한 재석의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설마, 약 때문에 이런 상태가 된 거야?’정신을 다잡은 정은은 바로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재석을 밀어 침대 쪽으로 눕힌 후, 온몸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그러고는 한 손으로 이마에 손을 얹었다.“앗!!!”뜨거운 열기에 놀란 정은이 입을 틀어막았다.‘이건... 단순한 열이 아니야. 열기가 심하게 오르고 있어...’“선배님! 제 말 들려요? 정신 좀 차려봐요! 선배님!”하지만 재석은 계속해서 중얼댔다.“정은아... 정은...”단지 이름을 부를 뿐인데, 묘하게 끈적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그 숨소리와 어우러지니, 괜히 귀가 달아오르는 듯했다.‘하... 미치겠네. 이 분위기 뭐야...’정은은 괜히 고개를 숙였지만, 시야에 들어온 건, 벌어진 가운 틈 사이로 드러난 재석의 단단한 상체.잘 정리된 근육, 그리고 땀으로 촉촉이 젖은 피부.‘어?!’‘눈을 어디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25화

    수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불안해졌다. 그녀는 마치 정신 잃은 파리처럼 방 안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의심하면 어때? 네가 입 다물고 있으면, 증거는 없어. 결국엔 풀어줄 수밖에 없어.]그 말을 듣자, 수아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진정하기 시작했다.“그 약... 도대체 뭐야? 순도가 높고 효과도 강하다고 했잖아. 근데 조재석은 멀쩡해 보이던데?”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쪽이 대답했다.[질문이 너무 많네.]수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한 가지만 분명히 해두자. 우린 협력 관계야. 말투 좀 조심하지 그래?”[하... 말투? 협력 관계라 했지? 좋아, 그럼 하나 묻자. 넌 뭘 했는데? 약은 내 거고, 약을 넣은 것도 내가 보낸 사람이야.][넌? 목욕하고, 옷 벗고 조재석이랑 자는 게 다였지? 웃기지 마. 날로 먹으려다 다 망쳐놓고, 지금 나한테 협력을 운운해? 네가 감히?]그 모욕적인 말에 수아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분노했다.“너... 대체 누구야? 뭘 원하는 건데? 피해자인 척하지 마. 너도 결국 나를 이용해서 조재석을 치려고 한 거잖아! 우리 둘 다 깨끗한 거 없어!”[쳇, 멍청한 것.]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수아는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야! 뭐?! 누가 멍청하다는 거야?! 말해봐! 여보세요?!”[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를 바랍니다.]‘없는 번호?’수아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췄다. ‘그 사람이 전화를 끊고 내가 다시 걸기까지는 고작 몇십 초...’ ‘그 사이에 유심을 빼고 번호를 없애버린 건가?’‘이 사람... 대체 정체가 뭐야?’ ‘그리고... 그 약은...?’...한편, 재석은 2층 방으로 가지 않고, 아직도 정은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그래도 내가 2층에 가는 게 낫겠지?”정은은 체온계를 내려놓고 말했다.“지금 선배님의 체온 몇 도인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24화

    경찰 쪽의 출동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호텔 측도 연락을 받자마자 즉시 직원을 보내 협조에 나섰다. 양쪽이 제일 먼저 한 건 재석이 머물던 객실을 출입 통제하고, 실내 공기 샘플을 채취하는 일이었다.이후 호텔 총지배인과 함께 보안실로 이동해 CCTV 영상을 직접 확인하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이런 소란이 벌어졌으니, 구경하러 몰려드는 투숙객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호텔 직원들의 빠르고 능숙한 대응 덕에 곧 정리되었다....그 와중에 재석 옆방, 수아의 방은 단 한 번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궁금해서라도 문 열고 한 번쯤 내다보지 않겠는가? 하물며 ‘잘 아는 조 교수’가 쓰러졌다면 더더욱.피하려는 티가 너무 나는 상황이었고, 오히려 그런 태도는 더 수상할 뿐이었다. 하지만 수아는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챌 겨를조차 없었다. 지금 그녀는 그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방 안을 종횡무진 오가며, 말 그대로 뜨거운 철판 위에 떨어진 개미처럼 불안과 초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등줄기는 땀으로 흥건했고, 입가는 경련이 난 듯 떨렸으며, 손의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정은과 얘기하고 나서 돌아온 뒤부터 수아의 가슴은 한시도 가라앉지 않았다. 몇십 분이 지났는데도, 옆방은 너무 조용했고, 마치 재석이 그 방 안에서 증발이라도 한 것 같았다.그리고 경찰이 도착했다.도어 스코프로 제복을 본 순간, 수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경, 경찰? 누가, 누가 신고를? 설마...’아무 일도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정은은 방에서 나온 재석이 경찰과 정식으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을 본 순간, 마지막 남은 한 줄기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진짜 신고했어... 조 교수가... 직접...’‘어떡해... 이러다 경찰이 나까지...’절망감에 휩싸인 수아는, 침대 위에 던져져 있던 핸드폰을 불현듯 바라보았다. ‘전화해야 해. 지금 이대로면 안 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23화

    “왜... 그러세요?” 정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남자의 손바닥은 너무 뜨거웠다. 마치 불에 달군 듯한 쇠가 손목을 감싸는 순간, 그 열기가 피부를 타고 전해져왔다. ‘이건... 단순한 열 아니야.’ “정은아, 너...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알아?” 재석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묘하게 짙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정은은 한 손에 든 해열 패치를 흔들며 말했다. “선배님의 이마에 해열패치를 붙이려고요. 이게 문제라도 되나요?”재석의 시선이 깊어졌다. “지금 넌, 약 먹은 남자를 곁에 두고 있는 거야.”“그래서요...?” 정은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위험할 수 있어.”“선배님, 날 위험하게 만들 거예요?” 정은의 반문에, 재석은 씁쓸하게 웃었다.“나... 생각보다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야. 이런 상태에선...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가 정은의 손목을 붙잡은 순간, 말랑하고 차분한 감촉이 손끝에 번졌다. 마치 고운 비단처럼 스치는 그 감촉은 도리어 더욱 강한 갈증을 불러왔다. ‘더... 갖고 싶어졌어. 손목만으로는 부족해. 그 이상을 원해.’하지만, 정은이 나직이 말했다. “아니에요.” 재석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뭐?” “선배님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에요. 정말로 선을 넘었을 거였다면, 아까 욕실에서 이미... 그렇게 됐겠죠.”재석은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정은은 아무 말 없이 해열 패치를 꺼내 남자의 이마에 붙였다.“좀 괜찮아졌어요?” “응, 약 먹었으니까 곧 나아질 거야.”“그, 그거 말고요.” 정은은 살짝 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열 말고... 그쪽 말이에요. 몸 상태는... 좀 가라앉았어요?”재석의 얼굴은 이미 붉었지만, 그 순간엔 귀까지 활활 타올랐다. “너... 그거, 들었어?” ‘설마... 그 소릴 들었단 말이야?’‘얼마나 들은 거지?’ ‘혹시 나를... 더럽다고 생각했다면...’재석의 입술이 움찔거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22화

    정은은 남자의 이런 반응이 처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지금 재석의 몸에서 느껴지는 변화가...그게 어떤 감정의 결과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설마...’“그렇게 오래 있었는데도, 아무 효과가 없었어요?” 그녀는 등을 돌리고 있는 재석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들려온 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고 힘없는 목소리였다. “응...” “그럼, 선배님... 난...” 정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쩐지 숨이 막히고, 입술이 덜덜 떨렸다. “정은아... 나가줄래?” 재석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잠시 뜸을 들인 후,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이런... 비참한 모습, 너한테 보이고 싶지 않아.”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부탁이야...”그 말에 정은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알겠어요.”조용히 욕실을 나서며, 문을 부드럽게 닫았다. 그 순간,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참자, 참아야 돼...’정은은 견딜 수 없었다. ‘저 남자... 지금 나한테 애원하고 있잖아.’ ‘자존심이라도 남기고 싶어서, 나한테 부탁하고 있잖아.’ 그래서, 정은은 뒤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욕실 안, 문이 닫히자마자 재석의 굳어 있던 등이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그대로 물 속으로 몸을 맡기며, 다시 깊숙이 침잠해 버렸다. 차가운 물이 사지를 감쌌지만, 몸 안에서 타오르는 열기는 전혀 식지 않았다. ‘아니야... 아까, 잠깐이었어. 정은이가 손을 댔을 때... 그때는 분명...’정은의 그 손길에서 전해졌던 미묘한 시원함, 재석은 그 순간만큼은 분명 조금 나아졌었다. 그걸 느꼈기에, 그는 오히려 더더욱 참기 힘들었다. 그게 얼마나 달콤했는지 알기에, 지금 이 고통은 배가 됐다. ‘이 상태로 정은이를 곁에 두면... 분명 난, 감당 못 할 거야.’ 재석은 다시 머리까지 물에 담갔다. 시야는 가려지고, 숨결은 끊겼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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