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무슨 일이에요?”선우는 술을 홀짝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도겸을 보곤 슬그머니 동건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도겸의 어두운 얼굴에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원래 활기찼던 이곳의 공기도 잠잠해졌다.“누구한테 차단당해서 그런 거겠지.”동건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을 던졌다. 도겸의 얼굴은 그 말에 더욱 어두워졌다.쾅! 도겸은 술잔을 유리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의 눈에 폭력적인 기운이 어른거렸다.“다시는 걔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을 못 알아들어?”동건은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노래하던 사람도 입을 다물었고, 주변 사람들도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선우는 목구멍에 걸린 술을 삼키며, 정은 누나가 정말로 결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빈은 술에 약간 취해 정신을 차리며 선우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은이 돌아왔어?”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할 용기가 없어 두루뭉술하게 말했다.“모르겠어요.”현빈은 선우의 말을 듣고 정은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짐작했다.바텐더가 다섯 병의 술을 가져오자, 누군가가 용감하게 제안했다.“진실 게임 할래요?”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다.“좋아, 나 그거 제일 좋아해.”이때 한 여자가 막 들어왔다. “안나 이쪽으로 와, 마침 형 옆에 자리가 비었어.”안나는 자연스럽게 도겸 옆에 앉았다. 그녀는 이 클럽의 에이스였고, 도겸과도 익숙한 사이였다.“강 대표님.”도겸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너희끼리 놀아, 난 먼저 간다.”남겨진 사람들은 당황했고, 오늘 밤의 분위기를 깨뜨린 듯한 안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술집을 나온 도겸에게 운전기사가 어디로 갈지 물었다. 브랜디 두 잔을 마신 후, 도겸은 어지러움을 느꼈고 텅 빈 집을 떠올렸다.“회사로 가죠.”“강 대표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
“당시의 충동적이고 불합리했던 행동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해야 해. 그건 내가 교수님에게 빚진 거야.”수민은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이 떨렸다. 정은의 말이 목에 걸려 숨이 막힐 듯 두 번이나 기침을 했다. 도망치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제발 나 좀 살려줘, 정은아.”정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너도 알잖아. 나 대학 때 유일하게 재수강한 과목이 오미선 교수님의 수업이었어. 교수님 앞에서는 난 늘 작아지기만 했고, 그분이 무서워서 도망치고만 싶었어.”수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게다가, 나는 교수님 눈에도 띄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어. 교수님은 나를 기억도 못 하실 거야. 미안하지만,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정은은 수민의 마음을 이해한 듯,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수민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주 적절한 사람이 있어.”정은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응? 누구?”“너 내 사촌 오빠인 조재석, 기억나지?”정은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하지.”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물론 기억하지. 국내 최연소 물리학과 교수, 그리고 ‘네이쳐’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 과학자 10인 중 1위였잖아. 오미선 교수님 밑에서 생명과학을 공부하며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생물학계에서 천재로 주목받았던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전과해 물리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큰 화제였고. 결국, 사람은 무엇을 하든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 법이야.”현재 재석은 국제 물리학계에서 권위자가 되었다. 정은은 재석과 같은 학교 출신이지만, 다른 시기에 입학한 후배였다. 입학하자마자 재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나중에 수민을 통해 재석이 수민의 사촌 오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석은 몇 년 동안 해외 물리학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3개월 전에 귀국했다.수민은 자랑스럽다는 듯
가까이 다가가니, 도겸은 정은의 예쁜 웨이브 머리가 곧게 펴지고, 그토록 좋아했던 그녀의 머리색이 검은색으로 염색된 것을 발견했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하이힐 대신 단순한 하얀 티셔츠 하나만 걸친 채 아주 캐주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예전보다 더 빛나 보였다. 이별의 어두운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만약 이게 연기라면, 도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은이 연기를 정말 잘한다고. 너무 잘해서, 자신을 화나게 한다고. 정은은 도겸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표정은 도겸이 화를 내기 직전의 전조였다.“히하!” 도겸은 비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 안목은 별로인 것 같아. 내 옆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보는 눈이 좀 더 높아야 하지 않겠어? 아무나 데리고 다니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체면?” 정은은 슬픔이 살짝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도겸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정은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더욱 화가 났다. 이 감정이 점점 그의 영역 의식으로 다가왔다. 정은은 이미 그의 영역 안에 속한 사람이었고, 지금은 필요 없다 해도, 다른 사람의 침범은 용납할 수 없었다.“난 할 일이 있어서 가야 해.” 정은은 도겸이 계속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가? 어디로 갈 건데? 조수민의 아파트? 그게 네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이번에는 각종 증서들이랑 신분증도 챙겨갔던데. 좋아, 한번 해보자는 거지?”정은은 마음이 아팠다. 도겸의 성격이 나쁘다는 것, 심지어 폭력적이라는 것을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였지만, 이런 말을 직접 들으면 여전히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겸은 그녀의 행동을 단순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은은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스르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먼저, 저분은 내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만난 것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더러운 관계가 아니야.”“그리고,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네 문제야.”이때, 정은이 불러
정은은 오랜만에 손수 무언가를 해보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도겸과 함께했던 지난 몇 년 동안, 옷이나 식사는 스스로 해결했지만, 이런 육체적인 노동은 거의 하지 않았었다. 몇 년 전 도겸이 창업을 시작할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집안 청소만큼은 언제나 청소 아주머니에게 맡겼었다. 페인트 한 통을 다 칠하고 나서 정은은 아픈 허리를 부여잡았다. 몇 년 동안 편안하게 지내왔던 그녀에게는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페인트를 더 가져오기 위해 복도로 나가려던 순간, 정은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발로 페인트 통을 차버렸다. 서둘러 페인트를 닦아내기 시작했지만, 이웃집 문 앞에 조금 쏟아져 버렸다. 걸레를 가져와 닦으려던 찰나, 문이 갑자기 열리며 정은은 깜짝 놀라 사과를 하려고 했다. 뜻밖에도 문 앞에는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너도 여기 사는구나?”“어떻게 여기에 계세요?”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조재석은 바닥을 한번 훑어보고, 정은의 뒤편을 살폈다.“그래서 오늘 이사 온 사람이 너였구나?”정은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네, 오늘부터 우리 이웃이에요.”정은의 말에 재석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가 이곳에 사는 이유는 실험실과 학교와 가까워서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은이 여기서 산다고? 이곳은 여자 혼자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이곳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곳이었다. 재석이 움직이지 않자, 정은은 그가 페인트로 복도를 더럽힌 것을 신경 쓰는 줄로만 알았다.“죄송해요. 조금 흘렸어요. 곧 다 치워요.”정은은 서둘러 페인트를 닦아냈다. 내려갈 때, 재석이 들고 있는 쓰레기를 보고 정은이 말했다.“마침 내려가는 길인데, 제가 대신 버려드릴까요?”재석은 거절하지 않았고, 대신 집에서 접이식 사다리를 가져왔다.“벽을 칠할 거면, 이걸 쓰는 게 편할 거야.”“고마워요.”사다리가 있으니 벽 칠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정은은 오전 내내 집안의 낡은 벽을 모두 칠했다. 집은 금세 깔끔
재석은 한 걸음 뒤에서 정은을 따르고 있었다. 어젯밤의 불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차분함을 되찾은 것 같았다. 차를 몰고 온 재석이 문을 열어주자, 정은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과일 가게를 지나칠 때, 정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잠깐만 멈춰 줄 수 있을까요? 2분만요. 과일 좀 사려구요.”“과일?”“네, 교수님 드리려고요.”재석은 핸들을 잡고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정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선배님은 손님을 방문할 때 항상 빈손으로 가시나요?”재석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고 정은은 조용히 엄지를 세우며 감탄했다. ‘역시 대단한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봐?’하지만 이내 재석은 차를 길가에 세웠다....오미선 교수의 집은 서비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환산로에 위치한 작은 양옥집이었다. 서양식과 동양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 집은 단풍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어, 고요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6년 만에 찾아온 이곳에서, 정은은 안절부절 못하며 발밑의 과일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용기가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정은의 마음을 읽은 듯, 재석이 물었다.“내리지 않을 거야?”정은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렸다가요.”재석은 긴장해 하는 정은을 몇 초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먼저 들어갈게.”정은은 재석이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두 번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이맘때쯤이면 백화가 만발해 있었다. 작은 정원에 들어서자 부드러운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정은의 코끝에 스며들었다. 난간 옆에는 주인이 돌보지 못한 듯 시들어 버린 채소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집에 들어가기 전, 정은은 오미선 교수의 목소리를 들었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재석을 따라 걸었다.“교수님.”오미선 교
재석은 여전히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음식은 그저 배를 채우는 수단일 뿐, 맛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없었다.“다 씻었어.”정은이 손질한 홍고추와 청경채를 바라보며, 그것들이 마치 강박증 환자의 손길을 거친 것처럼 가지런히 정리된 모습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왜 웃어?” 재석이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묻자, 정은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먼저 나가 계세요.”“알았어.” 재석은 물기를 닦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은은 상을 가득 채울 만큼의 음식을 만들었다. 맛은 담백한 것을 중심으로, 대부분 오미선 교수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오미선 교수는 감탄하며 식사를 마쳤다. 정은은 자발적으로 설거지를 시작했고, 재석도 주방으로 들어와 도왔다. 따뜻한 불빛 아래 서 있는 재석의 모습이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보였다.정은의 시선에서 보면, 재석의 옆모습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인물 조각상처럼 날카로운 윤곽을 띠고 있었다. 그때 오미선 교수가 문틀 옆에 서서 물었다.“정은아, 너랑 재석이는 어떻게 알게 됐니?”재석은 오미선 교수의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였고, 정은은 오미선 교수가 가장 아끼는 학생이었다. 오미선 교수는 오래전부터 두 사람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먼저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교수님, 손님이 오셨어요!”그 소리에 오미선 교수는 거실로 돌아가자 한 여자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미소 지었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강서정입니다. 전에 병원에서 뵙고, 올해 대학원 티오에 대해 여쭤봤던 사람입니다.”오미선 교수는 알아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요. 일단 앉아요.”서정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교수님께서 요양 중이시라고 들어서, 특별히 보약을 좀 가져왔습니다.”오미선 교수는 티테이블 위에 놓인 선물 상자들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인삼, 녹용, 홍삼 등등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오미선 교수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서정은 계속
말을 마치고, 도겸은 바로 차에 올라타더니 액셀을 밟고 떠났다. 그 모습을 본 수민은 그 자리에서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사람 정말 뭐야?! 쓰레기 같은 놈! 개자식! 진짜 미치겠네!” “내가 말했잖아!” 수민은 옆에 있던 남자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정은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절대!” 남자는 화를 내는 수민을 겨우겨우 달랬다. “그래, 그래, 진정해.” 하지만, 가능할까? 도겸이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니, 이미 계획을 다 세워놓은 게 분명했다. 남자는 수민을 몰래 한 번 쳐다봤다. 수민도 정은처럼 자신에게 그렇게 충실했으면 좋았을 텐데... ‘잠깐! 그건 안 되지!’ 남자는 그런 생각조차 감히 할 수 없었다. ... 차 안에서, 도겸은 전화를 받았다. 기분이 목소리도 차가웠다. “무슨 일이야?” [자기야, 최근에 발견한 맛집이 있는데, 게가 엄청 통통해요.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우리 가서 먹어요, 응?] 서연희의 맑고 밝은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연희는 도겸이 해산물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어서 도겸의 취향을 맞추려 했다. 게다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둘이 연락하지 않아 연희는 마음속으로 불안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런 불안함이 연희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 먼저 전화를 걸었다. 이전에는 대부분 도겸이 먼저 데이트를 계획했고, 연희는 단지 부끄러워하며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승낙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달라졌다. 도겸이 먼저 연락을 하는 횟수가 줄었고, 메시지도 간결해졌으며, 때로는 답장조차 없었다. 물어보면, 바쁘다고 했다. 예를 들면 지금도 그렇다. “토요일? 바빠서 안 돼.” [토요일에 일이 있다면, 일요일도 괜찮아요.] 연희는 핸드폰을 꼭 쥐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바쁘다니까, 이만 끊자.” 말을 마치고, 도겸은 전화를 끊었다. 연희는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마음속의 불안함이 다시 연희를 휘감았다. ‘안 돼
“싫어요.”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얼굴이 붉어지더니 발끝을 세웠다. “오빠랑 조금 더 있고 싶어요.”하지만 연희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도겸은 오히려 연희를 끌어안고 강하게 입을 맞췄다.“헉!” 구경하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환호를 질렀다.“와우, 대박!” “대체 얼마나 사랑하는 거야?”정은은 이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손에 쥔 책을 힘주어 쥐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마음이 아픈 건 여전했지만 표정은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거의 무감각할 정도로.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금연도 금단 증상이 있듯이, 6년을 사랑한 사람을 잊는 것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정은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정은에게는 아직 공부할 책이 남아 있었다.도겸은 인파 속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를 돌려 바라봤고 익숙한 듯한 실루엣이 도겸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바로, 연희의 부드러운 손이 도겸의 손바닥을 파고들며 친근하게 손가락을 엮었다.“뭘 보고 있었어요?”연희의 질문에 도겸은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연희를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주고, 도겸은 떠나려 했으나 연희는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아직 시간도 이른데, 나랑 좀 더 있으면 안 돼요?”도겸은 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지, 주말에 데리러 올게.”가로등 아래, 도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더욱 이목구비가 선명해 보였다. 연희의 눈에 한 줄기 순수한 매력이 흘러들었다. “오빠, 오늘 나랑 같이 집에 가면 안 돼요?”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른이라멘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도겸은 잠시 멈칫하며, 눈 속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넌 아직 어려. 조금만 더 지나서.”연희는 약간 놀랐지만, 마음속으로는 희미한 기쁨이 지나갔다. 도겸이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었다. 눈앞의 즐거움에 급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다.“알겠어. 나 일이
재석이 걸어 나왔다.화장실 문은 마침 옷걸이 맞은편에 있어서 두 사람은 이렇게 딱 마주쳤다.남자는 갈아입은 옷을 품에 안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축축해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렇게 입고 있던 티셔츠는 어느새 젖었다. 목과 얼굴도 축축해서 물 같기도 하고 땀 같기도 했다.정은을 본 순간, 재석의 머리는 새하얘졌다.여자아이는 검은색 탱크톱을 입고 있었다. 타이트한 옷은 포만하고 아름다운 상반신 곡선을 그려냈다.탱크톱 끈이 좀 짧아서 허리가 살짝 드러났고 작은 배꼽이 똑똑히 보였다.가늘고 긴 팔, 뚜렷한 쇄골, 검은색에 비쳐 하얗게 빛나고 있는 피부.꿈속의 ‘정은’과 똑같았다.정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손에 티셔츠를 들고 있단 것도 깜빡 잊고 멍을 때렸다.“선, 선배님...”재석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즉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될수록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미안, 결국 네 화장실 좀 썼어.”그러나 오직 재석 자신만이 잘 알고 있었다. 이 짧디 짧은 말 한마디 하려고 목이 얼마나 탔는지, 호흡이 또 얼마나 거칠었는지를.“두근두근.”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는데, 마치 가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재석은 확실히 집에 돌아가서 샤워를 하려 했다.깨끗한 옷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니, 수리기사들이 안에서 토론을 하고 있었다.구식 건물은 고정된 에어컨 실외기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에어컨 실외기는 일반적으로 바깥의 벽에 걸려 있었다.마침 재석네 실외기는 화장실 밖의 벽에 걸려 있었기에, 수리기사는 이미 안전줄을 타고 화장실 창문에 매달려 실외기를 수리하고 있었다.샤워는커녕, 지금 화장실을 제대로 쓸 수조차 없었다.그래서 재석은 정은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원래 정은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침실 앞까지 걸어간 그는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정은이를 방해하는 거 아니야? 지금 자고 있을 수도 있잖아? 어차피 빨리 씻으면 몇 분밖에 안 걸리니 공교롭게 마주칠 일은 없겠지?’그러나 두 사람은 뜻밖에도 이렇게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고마워.”문에 들어서자마자 냉기가 밀려왔는데, 재석의 집과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처음 온 것도 아니었기에, 재석은 능숙하게 슬리퍼로 갈아입었다.정은은 주방으로 들어가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지금 이미 오후 4시였다. 재석이 이미 식사를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은은 여전히 친절하게 물었다.“선배님, 점심 먹었어요?”“응, 먹었어.”“그럼... 과일 좀 먹을래요? 방금 깎은 건데.”말하면서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올 때, 정은은 손에 과일 쟁반을 들고 있었다.“고마워.”정은도 소파에 앉아 이쑤시개로 멜론 한 조각을 먹으면서 물었다.“언제 다 고칠 수 있는 거예요?”“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교체할 부품이 하나 있는데, 지금 가방에 없다고 하셨어. 그냥 근처의 수리점에게 보내달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 다 수리하려면 2~3시간 더 걸릴 거야.”“그래도 빠른 셈이네요. 조급해하지 말고 일단 여기서 쉬고 있어요. 다 수리되면 다시 돌아가요. 이런 날에 에어컨이 없으면 너무 괴롭죠...”“고마워. 넌 할 일 하러 가. 날 상관할 필요 없으니까.”“좋아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침실에 들어가기 전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재석을 바라보며 갑자기 입을 열었다.“선배님, 샤워하고 싶으면 저쪽에 가서 씻으면 돼요.”그녀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재석의 셔츠는 거의 다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고, 심지어 어깨와 등의 근육까지 은은하게 그려냈다. 차가운 실내로 들어오니 옷은 바로 차갑게 변했다.더웠다 추웠다 하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쉽게 감기에 걸릴 것이다.“에헴!”이 말이 나오자, 재석은 사레가 들렸다. 멜론 반조각이 아직 입에 있어 삼킬 수도 토할 수도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니야, 돌아가서 씻을게. 씻고 다시 돌아오면 되지.”“그래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돼요. 만약 머리가 어지럽거나 재채기, 콧물
“왜 그래... 왜 갑자기 계약을 끝내는 건데? 무슨 일 있으면 그냥 상의하면 되잖아!”수민은 차갑게 웃었다.“네 말이 그 뜻 아니었어?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바로 협력을 끝낼 것 같았는데? 나는 남에게 강요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갑자기 이런저런 조건을 추가하는 것을 더욱 싫어해. 애초에 약속했는데, 지금 네가 조항을 추가하자면 추가해야 하는 거야? 난 성격이 엄청 까칠하거든. 믿을 수 없는 협력 대상과는 일찌감치 헤어지고,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어?”동건은 바로 똑바로 앉았다.“내가 왜 믿을 수 없는 건데?!”수민은 직접 물었다.“그럼 새로운 계약서를 만들어야 할까?”“아, 아니.”그는 다시 주눅이 들었다.‘자존심이 뭐라고? 이건 중요하지 않아!’“흥! 진작에 그랬어야지.”동건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난 밥도 먹지 않고 이렇게 찾아왔는데.”“뭐라고? 남자가 왜 말을 이렇게 작게 하는 거야? 크게 하면 죽어?”“배고프다고!”수민은 멈칫했다. 동건이 몰래 자신을 욕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우리 도련님도 밥을 먹을 돈이 없는 거야?”동건은 순식간에 화가 났다.“난 네 집 앞에서 꼬박 한 시간 동안이나 기다렸으니 어디로 가서 밥을 먹으란 거야?! 개밥 먹으라고?”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기다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기가 멍청하면서 남 탓을 하긴...”동건은 머리가 아팠다.결국 수민은 동건에게 라면을 끓여 주었다.동건은 먹으면서 투덜댔다.“좀 좋은 걸로 날 접대할 순 없는 거야?”수민은 소파 반대편에 앉아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먹기 싫으면 그냥 꺼져.”‘됐어, 그냥 라면이나 먹자.’동건은 국물까지 깨끗이 마셨다.“꺽!”수민은 시기해하며 동건을 흘겨보았다.“밥도 다 먹었으니 언제 가려고?”동건은 소파에 기대어 편안하게 배를 두드렸다.“뭐 마실 거 없어? 차가운 걸로 줘.”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날 이모님으로 착각한 거야?”“화내지 마, 넌
그러니 비밀번호를 바꾸는 건 상식이었다.“넌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다 이러는 거야?”“모두는 아니지. 비밀번호를 바꿀 때마다 우리 엄마와 정은이에는 꼭 문자로 새 비밀번호를 알려줬거든. 엄마와 정은이 찾아와도 난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을 것이고. 그런데 이걸 왜 물어봐?”“그럼 왜 내가 알았다고 바로 바꾼 거야?”수민은 어이가 없었다.“넌 누군데? 내가 왜 바꾸면 안 되는 거지? 우리 친한 사이냐?”“그럼 다른 남자가 만약 네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면...”“당장 바꿔야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동건은 한동안 기뻐해야 할지 탄식해야 할지 몰랐다.기쁜 것은 이 여자가 너무 멍청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른 남자랑 자도 여전히 그들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방비할 줄 알았던 것이다.탄식하는 이유는 자신이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동건도 경계가 필요한 리스트에 올라갔다.“나한테 볼일 있어?”수민이 물었다.동건은 실내를 힐끗 쳐다보았다.“밖은 아주 더운데.”“그래서?”“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돼?”수민은 손을 내려놓더니 옆으로 비키며 길을 양보했다.남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익숙하게 슬리퍼를 갈아신은 다음 곧장 거실로 갔다. 그리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곳이 자기 집인 줄 알겠어.’수민은 눈을 부라렸다.“할 말 있으면 빨리 해. 나 엄청 바쁘거든.”동건은 냉소를 지었다.“뭐가 바빠? 사람을 집으로 불러서 같이 지루한 여름을 보내는 거? 아니면 나른한 오후를 함께 감상하는 거?”“미친.”수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말할 거면 제대로 말해. 왜 내가 올린 SNS를 언급하는 건데?”그것도 큰 소리로 외우니 무척 어색했다.“올릴 때 아주 신이 난 것 같은데, 내가 말해도 안 되냐? 너만 보낼 수 있고, 난 읽으면 안 되는 거냐고?”“아니... 너 오후에 내가 보낸 SNS를 읽어주려고 우리 집에 왔어? 넌 할 일이 없어서 발광을 하고 있는 거야?”“그
수민은 확실히 듣지 못했다.그녀는 새 핸드폰으로 베란다를 찍었는데, 거꾸로 늘어진 와인잔에 초점을 맞춘 다음, 배경을 전부 모호하게 만들었다.그리고 이런 글을 더했다.[지루한 여름, 나른한 오후.]그 다음, SNS에 올렸다.수민은 핸드폰을 소파에 던진 다음 일어나더니 맨발로 침실에 들어갔다.‘일단 낮잠부터 자자.’냉기로 가득한 방은 확실히 편했다. ‘그래서 정은이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거였어. 나도 나가기 싫어졌네.’...동건은 오늘 실내 서핑을 하러 갔다.이 코치는 기술이 좋아서 예약을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원래 동건은 오늘 외출할 생각이 없었지만, 이 기회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결국 찾아왔다.그러나 예약하기 어려운 것도 다 일리가 있었다.코치를 따라 몇 번 연습하니, 기술이 많이 늘었다. 동건은 지금 자신이 엄청 강하다고 느꼈다.잠시 쉬고 혼자 연습하려던 동건은 앉자마자 SNS를 보았다. 그러나 수민의 포스터를 볼 줄은 몰랐다.[지루한 여름, 나른한 오후.]그리고 사진을 확인하니 더할 나위 없이 흔한 게시물이었다.사진도 정상이고, 글도 괜찮았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심심한 게 바쁜 것보다 낫겠지’라는 댓글을 달 뿐이었다.하지만 동건은 일반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여자를 많이 놀아본 카사노바였다.지루한 여름? 키워드는 ‘지루하다’였는데, 그 말은 즉, ‘나에게 돈도 있고 시간도 있지만 할 일이 없으니 같이 놀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이었다.나른한 오후? 키워드는 ‘나른하다’였다.즉 ‘난 이미 누웠으니 누가 나와 함께 누울래?’라는 뜻이었다사진을 보면 중간에 와인잔이 있었다.‘다른 남자와 술을 마시고 싶은 게 분명해! 지금 누구한테 암시를 하고 있는 거지?’동건은 단번에 알아차렸다.“조수민, 너!”그는 즉시 목욕 가운을 입더니 샤워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코치는 멀리서 그를 보며 물었다.“도련님, 더 연습하시지 않을래요?”“안 해요!”“급한 일 있으세
“아이고, 정말 아깝네.”“괜찮아.” 수민은 살짝 웃었다.“핸드폰이 고장 나면 바꿀 수 있고, 전화카드가 없어졌으면 가서 다시 만들면 되지. 어차피 번호가 그대로이니, 연락이 안 될 정도는 아니야.”‘대부분 그 연하남들이 먼저 나에게 연락했으니까.’수민이 주동적으로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새로운 남자를 만날 수 있었기에 옛 남자들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동건은 이를 갈았다.수민은 고장난 핸드폰을 가져왔다.“앞으로 또 내 물건을 건드리면, 네 손을 부러뜨릴 거야. 알았어?”말을 마치고 성큼성큼 거실을 나섰다.그녀는 이미 사람 시켜 자신의 차를 몰고 오게 했으니, 남이 데려다줄 필요 없이 그냥 가면 된다.동건이 쫓아갔다.‘아니... 네 그 전화번호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아. 8이 너무 많잖아, 우리 다른 걸로 바꾸자? 내가 널 위해서 좋은 번호 하나 찾아줄게! 어때?”“8이 안 좋다고?” 수민은 눈을 부라리며 진심으로 동건이 정신 나갔다고 느꼈다.“돌팔이라는 말이 있잖아?”“입 닥쳐! 날 귀찮게 하지 마!”말을 마치자 수민은 차에 시동을 걸며 동건의 앞에서 사라졌다.동건은 제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조수민! 너 정말 양심도 없어! 난 여태껏 남에게 좋은 번호를 양보한 적이 없단 말이야?!”애석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아무리 커도 수민은 듣지 못했다.들었다고 해도 그저 차갑게 웃어줄 뿐이었다.2층에서, 송보미와 가정부는 베란다에 서서 방긋 웃으며 아래층을 주시했다.가정부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아가씨는 도련님을 별로 상대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그래야죠.”송보미는 팔짱을 꼈다. 방금 관리를 받은 그녀의 피부는 반짝이면서 혈색이 아주 좋아보였다. 온몸에서 귀부인의 느낌이 물씬 했다.“남자들은 쉽게 넘어오는 여자에게 더욱 신경을 쓰지 않은 법이니까요. 여자들이 꼭 자신에게 덤벼들 것 같다고 생각하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니깐요, 도도하고 차갑게 대해야 홀딱 반하게 될 거예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운 것 같다.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교실, 실험실, 도서관에 에어컨이 빵빵했다.주말에도 무척 행복했는데, 집에 에어컨을 틀고 시원한 수박을 먹으니 너무 행복했다.‘냉기가 가득한 방에서 수박을 먹으면서 논문을 보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조수민이 전화를 했다.[오늘 토요일인데, 수업할 필요가 없잖아. 정말 나와서 놀지 않을 거야?]“수민아, 나 좀 살려줘. 이 온도라면, 나가자마자 바로 타버릴 것 같아.”[넌 쇼핑을 하고 싶지 않은 거야? 자신에게 예쁜 옷을 좀 사주고 싶지 않은 거냐고?!]“그건 인터넷에서 사면 되지.”[스킨케어는? 이런 건 항상 매장에 가서 써 봐야 좋은지 안 좋은지 알 수 있잖아?!]“그럴 필요 없어. 난 고정된 브랜드만 사용하니까.”[맛있는 거 먹고, 마트에 가서 장도 보고,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사려면 당연히 외출해야 하지 않겠어?!]수민의 말투는 점차 욱해졌다.정은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사실, 배달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정은이 물었다.“너 요즘 일이 바쁘지 않아서 심심한 거야?”수민은 길게 탄식을 했다. ‘역시, 날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우리 정은이밖에 없어!’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럴 리가 없는데. 네 주소록에 있는 Keven, David, 그리고 그 연하남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전의 수민은 아무리 심심해도 한여름에 뜨거운 태양을 무릅쓰고 그녀와 쇼핑하러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그녀는 정은보다 햇볕을 더 무서워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오늘 수민이 입을 열자마자 정은은 이상하다고 느꼈다.[말도 마...]수민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그 일을 생각만 해도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고동건 그 미친 놈 말이야, 내 핸드폰 비밀번호를 물어본 다음 뜻밖에도 내 핸드폰으로 야동을 본 거 있지! 그래서 내 핸드폰에 바이러스가 걸려서 아예 망가진 거야.]동건은 고칠 수 있다고 맹세했다. 수민은 그의 말을 믿고 또 다른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그 결과, 수민
‘조재석도 오미선의 학생이라고 할 수 있잖아?’이 순간, 송지혜는 창피함을 느꼈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오미선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은 줄지어 회의실을 떠났다.진호 일행은 재빨리 달아나더니, 허리를 구부리며 최대한 구석에서 걸었다.너무 창피했던 것이다.그것도 학생들 앞에서가 아니라, 학장과 전교 사생들 앞에서.“정은 언니, 방금 너무 멋있었어요!”정은을 바라보는 민지의 눈에서 하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서준은 턱을 들어올렸다.“이제 누가 감히 우리 팀을 무시할 수 있겠어?”“그러게! 다음에 신진호랑 서지예 그 얄미운 사람들 만나면, 난 거들먹거리면서 그들의 앞을 지나갈 거야. 콧구멍으로 그들을 봐야지, 헤헤...”민지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지금 아빠 대신 월세를 받을 때보다 더 행복한 것 같아!’“정은 언니, 앞으로 자주 이런 서프라이즈 해주면 안 돼요?”“이게 무슨 게임인 줄 알아?” 서준은 눈을 부라렸다.“맞고 싶어!”‘농담도 모르는 늙은이!’...서정은 학교에서 나와 직접 집에 돌아갔다. 현관에 들어설 때, 그녀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서정아.”서영숙은 그릇을 들고 수정과를 먹으면서 거실로 걸어갔다. 그러나 서정과 이렇게 부딪칠 줄이야.하마터면 그릇을 엎을 뻔했다.수정과를 쏟아도 상관없지만, 문제는 서영숙의 옷이 더러워질 것이다.“서정아, 너 어떻게 된 거야? 넋을 잃었네... 맞다, 내일 오후 서호 레스토랑에 가. 내가 이미 약속을 잡아놨어. 나준이랑 잘 얘기하고, 서로에 대해 많이 알아봐. 내가 다 알아봤는데, 나준이는 스탠포드의 우등생이야. 빈둥빈둥 놀기 좋아하는 그런 재벌 2세가 아니라고. 진정한 연구원이라잖아! SCI급에 논문을 한가득 보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든 최고의 학술지까지 논문을 보낸 거 있지? 그 사이언인지 뭔지 하는 학술지만 빼고...” 서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소정은이 학술지 에 논
이 말이 나오자 모두들 안색이 변했다.오직 정은만이 가볍게 웃었다.그녀는 지예를 직시했다.“그럼 어떤 부정한 방법을 말하는 거지?”지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아주 많지. 돈으로 매수하거나, 학술지의 사람을 찾아가거나. 사람을 찾아 논문을 쓰는 것도 가능하지.”정은은 자신의 목소리가 작은 것 같아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민지는 즉시 친절하게 첫 줄로 달려가 웃으며 마이크를 가져다주었다.‘정은 언니, 이 사람들에게 본때 좀 보여줘요! 아주 매섭게 짓밟아줘야죠! 너무 좋아!’정은은 마이크를 들고 간단하게 테스트를 했다.‘음, 아주 크고 우렁차네.’“서지예라고 했지? 우선 날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한 것 같은데, 나는 남을 매수할 돈도, 그럴 인맥도 없거든. 그러니 학술지의 편집부가 세계 반대편에 있는 한 무리의 베테랑 연구원들에게 평범한 대학생인 내 논문을 통과시키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돼.”“그리고 사람을 찾아 대신 논문을 쓰는 건 확실히 좋은 방법이지만, 학술지에 논문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왜 날 대신해서 논문을 써줘야 하는 거지? 그럴 실력이 있다면 당연히 스스로 성과를 내야 하지 않겠어? 넌 오히려 이런 일들에 익숙한 것 같은데, 그럼 네가 좀 알려줄래?”지예는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바로 화를 냈다.“너,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사람을 찾아서 논문을 냈다는 거야?! 말만 하지 말고 증거를 꺼내!”정은은 영문을 몰랐다.“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굳이 그렇게 다급하게 변명할 필요가 있을까? 네 반응을 보니까 마음이 엄청 찔린 모양이네?”“나, 난...”지예는 말문이 막혔다.정은은 가볍게 웃었다.“나에게 증거를 내놓으라고 했지?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너도 내가 부정한 방법으로 학술지에 논문을 올렸다는 증거를 내놓았으면 좋겠어.”이제 지예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앉을 수밖에 없었다.정은은 그녀의 반응을 눈여겨보며 눈빛은 자기도 모르게 어두워졌다.진호는 입술을 움직여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