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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어젯밤엔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새벽이 되자 선우가 또 한잔하자고 했고, 강도겸은 운전기사가 이끌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에 쓰러져 바로 잠에 빠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정신을 차려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

‘이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구나.’

몽롱한 상태에서 도겸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눈을 뜨자, 위에서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으으...”

도겸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속 쓰려! 소정은!”

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도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은은 참 대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버텼던 그녀였다.

‘좋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 근데… 약은 어디에 뒀지?’

도겸은 거실로 나가 약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서랍을 뒤져보았지만, 약상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왕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위장약을 찾으시는 건가요? 약상자에 넣어둔 걸로 알고 있어요.]

도겸은 이마에 핏줄이 뛰는 것을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약상자가 어디에 있죠?”

[옷장 서랍 안에 있어요. 정은 아가씨가 도련님이 술을 마신 후 아침이면 위가 아플 걸 알고 쉽게 찾을 수 있게 두었다고 하더라고요. 여보세요? 도련님? 아직 듣고 계시죠? 전화 끊으신 건 아니죠?]

도겸은 옷장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자주 먹던 위장약이 다섯 통이나 들어 있었다. 약을 삼키고 나니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서랍을 닫으려는 순간, 도겸은 갑자기 멈춰 섰다.

서랍 속에 보석과 명품 가방은 여전히 있었지만, 정은의 모든 신분증, 여권, 학위증, 졸업증 등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구석에 쌓여 있던 캐리어 중 하나도 사라져 있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좋네, 좋아...”

도겸은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무 자유롭게 둬도 안 돼. 자유를 줄수록 더 고집을 부리니까.’

그 순간, 아래층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계단을 내려갔다.

“어... 너였구나?”

신발을 갈아 신던 서정이 도겸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누구를 기대했길래 그래?”

도겸은 소파에 앉으며 무기력하게 말했다.

“왜 왔어? 무슨 일 있어?”

“왕순자 이모님이 오빠 위가 아프다고 해서 엄마 명령으로 오빠 돌봐주러 왔지.”

서정은 주방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나 아직 점심도 못 먹었는데, 온 김에 밥 좀 먹어야겠다.”

서정이 정은을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녀의 뛰어난 요리 실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30초 뒤, 서정의 볼멘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

“오빠! 여기 왜 이렇게 냉랭해?”

“정은 언니 어디 갔어? 오늘 집에 없어? 이상하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정은이 이미 요리를 해 두고 도겸이 내려와 먹을 준비를 했을 것이다. 서정은 운이 좋으면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소정은, 또 소정은...’

도겸은 이마를 짚었다. 서정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서정은 실망한 표정으로 주방에서 나왔다.

“어디 아픈가? 어제 병원에서 봤을 때도 얼굴이 안 좋아 보였는데...”

“병원에서 봤다고?”

도겸은 무심코 자세를 바로잡았다.

“응. 어제 서광병원에 교수님 뵈러 갔거든. 병원 앞에서 정은 언니 봤어. 오빠, 오미선 교수님이 나한테 티오 하나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도겸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병원에 있었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오빠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도겸은 말을 하지 않았다.

“언니가 아픈 게 아닐 수도 있어. 다른 사람을 보러 간 걸 수도 있지. 그런데 언니에게 친구가 있었던가? 언니 삶에는 오빠 말고 다른 사람이 없잖아.”

“말 다 끝났어?”

“어?”

“다 말했으면 빨리 나가, 나 아직 덜 잤어.”

도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정말 나가라고? 알았어, 갈게.”

서정은 신발을 신으며, 화가 난 듯 말했다.

“맞다, 오늘 온 이유가 있었지.”

도겸은 듣고 싶지 않아,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내일 오후 2시, 르 프리미어, 엄마가 잡아준 선 자리야. 늦지 마!”

“말이 많네”

서정은 도겸의 뒷모습에 대고 메롱 하며 떠났다. 이런 일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도겸이 정은과 만나는 걸 알면서도 집안에서는 적당한 결혼 상대를 찾았다. 요 몇 년 동안 도겸은 이런 자리에 많이 나갔었다. 대부분은 형식적인 자리였고, 부모님의 기대에 응하는 데 불과했다.

서정이 떠난 후, 도겸은 서재로 가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초기에 도겸은 집안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홀로 창업을 시작했다. 처음 3년은 정말 힘들었다. 집안의 도움을 거부했고, 그의 곁에는 정은뿐이었다.

최근 2년 동안에야 겨우 자리를 잡고 자신의 회사를 세워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꼬리표를 떼었다. 그즈음, 집안의 태도도 부드러워지며 도겸에게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점은 그들이 처음에는 정은과의 관계를 강하게 반대하다가, 이제는 눈감아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업무를 마치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창밖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도겸은 배고픔을 느꼈다. 도겸은 휴대폰을 꺼내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하고 있어?”

수업 종소리가 울리다가 곧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 미안해요, 나 수업 중이라 수업 끝나고 보러 갈게요.]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도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래, 그럼 끊을게.”

도겸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옆에 던졌다.

30초 뒤, 누군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지만, 도겸은 확인도 하지 않고 계속 업무를 했다. 위가 다시 통증을 일으킬 때까지, 도겸은 서재를 떠나지 않았다.

선우와 그 친구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 도겸은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문 앞에 앉아 있던 여자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깨끗하고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연희?”

“미안해요. 노크했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여기서 기다렸어요.”

서연희는 도겸의 팔에 걸쳐진 양복을 보며 말했다.

“나가는 거예요?”

도겸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기를 어떻게 찾았어?”

그러자 연희는 약간 주저하며 말했다.

“오빠 친구에게 물어봤어요.”

“전선우?”

“아니요, 고동건 오빠요.”

“일단 들어와.”

연희는 다시 웃으며 집으로 들어오며,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빠가 전화를 끊고 다시 받지 않아서, 걱정 많이 했어요.”

“너 수업 중 아니었어?”

“결석했어요. 남자 친구가 더 중요하잖아요.”

정은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처음 좋아했을 때, 정은은 대학 1학년이었고, 수업이 많았지만 결석하지 않았다. 나중에 두 사람이 사귀게 되고, 4학년이 되어 수업이 줄어들자 그제야 도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자기 아직 밥 안 먹었죠? 내가...”

“보양식 죽 끓일 수 있어?”

도겸은 갑자기 물었다.

“보양식 죽?”

“응.”

“할 줄 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

...

연희가 하룻밤 묵고 가고 싶다는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 후, 도겸은 연희가 가져온 배달 음식을 먹고,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그러고는 선우를 만나러 갔다.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도겸은 휴대폰을 보았다가 서정이 말한 병원에서 정은을 봤다는 말을 떠올렸다. 이미 헤어졌지만 오랜 시간 함께 했기에 정이 남아 있었다. 보통 친구라 해도 몇 마디는 해야 했기에 톡을 열었다.

[아파?]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프로필 사진과 상태 메시지,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을 보니 도겸은 그녀에게 차단당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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