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엔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새벽이 되자 선우가 또 한잔하자고 했고, 강도겸은 운전기사가 이끌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에 쓰러져 바로 잠에 빠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정신을 차려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이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구나.’몽롱한 상태에서 도겸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눈을 뜨자, 위에서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으으...” 도겸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속 쓰려! 소정은!”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도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은은 참 대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버텼던 그녀였다.‘좋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 근데… 약은 어디에 뒀지?’도겸은 거실로 나가 약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서랍을 뒤져보았지만, 약상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왕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장약을 찾으시는 건가요? 약상자에 넣어둔 걸로 알고 있어요.]도겸은 이마에 핏줄이 뛰는 것을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약상자가 어디에 있죠?”[옷장 서랍 안에 있어요. 정은 아가씨가 도련님이 술을 마신 후 아침이면 위가 아플 걸 알고 쉽게 찾을 수 있게 두었다고 하더라고요. 여보세요? 도련님? 아직 듣고 계시죠? 전화 끊으신 건 아니죠?]도겸은 옷장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자주 먹던 위장약이 다섯 통이나 들어 있었다. 약을 삼키고 나니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서랍을 닫으려는 순간, 도겸은 갑자기 멈춰 섰다. 서랍 속에 보석과 명품 가방은 여전히 있었지만, 정은의 모든 신분증, 여권, 학위증, 졸업증 등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구석에 쌓여 있던 캐리어 중 하나도 사라져 있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좋아, 좋네, 좋아...”도겸은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너무 자유롭게 둬도 안 돼. 자유를 줄수록 더 고집을 부리니까.’
“형, 무슨 일이에요?”선우는 술을 홀짝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도겸을 보곤 슬그머니 동건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도겸의 어두운 얼굴에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원래 활기찼던 이곳의 공기도 잠잠해졌다.“누구한테 차단당해서 그런 거겠지.”동건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을 던졌다. 도겸의 얼굴은 그 말에 더욱 어두워졌다.쾅! 도겸은 술잔을 유리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의 눈에 폭력적인 기운이 어른거렸다.“다시는 걔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을 못 알아들어?”동건은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노래하던 사람도 입을 다물었고, 주변 사람들도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선우는 목구멍에 걸린 술을 삼키며, 정은 누나가 정말로 결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빈은 술에 약간 취해 정신을 차리며 선우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은이 돌아왔어?”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할 용기가 없어 두루뭉술하게 말했다.“모르겠어요.”현빈은 선우의 말을 듣고 정은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짐작했다.바텐더가 다섯 병의 술을 가져오자, 누군가가 용감하게 제안했다.“진실 게임 할래요?”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다.“좋아, 나 그거 제일 좋아해.”이때 한 여자가 막 들어왔다. “안나 이쪽으로 와, 마침 형 옆에 자리가 비었어.”안나는 자연스럽게 도겸 옆에 앉았다. 그녀는 이 클럽의 에이스였고, 도겸과도 익숙한 사이였다.“강 대표님.”도겸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너희끼리 놀아, 난 먼저 간다.”남겨진 사람들은 당황했고, 오늘 밤의 분위기를 깨뜨린 듯한 안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술집을 나온 도겸에게 운전기사가 어디로 갈지 물었다. 브랜디 두 잔을 마신 후, 도겸은 어지러움을 느꼈고 텅 빈 집을 떠올렸다.“회사로 가죠.”“강 대표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
“당시의 충동적이고 불합리했던 행동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해야 해. 그건 내가 교수님에게 빚진 거야.”수민은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이 떨렸다. 정은의 말이 목에 걸려 숨이 막힐 듯 두 번이나 기침을 했다. 도망치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제발 나 좀 살려줘, 정은아.”정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너도 알잖아. 나 대학 때 유일하게 재수강한 과목이 오미선 교수님의 수업이었어. 교수님 앞에서는 난 늘 작아지기만 했고, 그분이 무서워서 도망치고만 싶었어.”수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게다가, 나는 교수님 눈에도 띄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어. 교수님은 나를 기억도 못 하실 거야. 미안하지만,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정은은 수민의 마음을 이해한 듯,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수민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주 적절한 사람이 있어.”정은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응? 누구?”“너 내 사촌 오빠인 조재석, 기억나지?”정은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하지.”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물론 기억하지. 국내 최연소 물리학과 교수, 그리고 ‘네이쳐’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 과학자 10인 중 1위였잖아. 오미선 교수님 밑에서 생명과학을 공부하며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생물학계에서 천재로 주목받았던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전과해 물리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큰 화제였고. 결국, 사람은 무엇을 하든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 법이야.”현재 재석은 국제 물리학계에서 권위자가 되었다. 정은은 재석과 같은 학교 출신이지만, 다른 시기에 입학한 후배였다. 입학하자마자 재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나중에 수민을 통해 재석이 수민의 사촌 오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석은 몇 년 동안 해외 물리학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3개월 전에 귀국했다.수민은 자랑스럽다는 듯
가까이 다가가니, 도겸은 정은의 예쁜 웨이브 머리가 곧게 펴지고, 그토록 좋아했던 그녀의 머리색이 검은색으로 염색된 것을 발견했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하이힐 대신 단순한 하얀 티셔츠 하나만 걸친 채 아주 캐주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예전보다 더 빛나 보였다. 이별의 어두운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만약 이게 연기라면, 도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은이 연기를 정말 잘한다고. 너무 잘해서, 자신을 화나게 한다고. 정은은 도겸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표정은 도겸이 화를 내기 직전의 전조였다.“히하!” 도겸은 비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 안목은 별로인 것 같아. 내 옆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보는 눈이 좀 더 높아야 하지 않겠어? 아무나 데리고 다니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체면?” 정은은 슬픔이 살짝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도겸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정은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더욱 화가 났다. 이 감정이 점점 그의 영역 의식으로 다가왔다. 정은은 이미 그의 영역 안에 속한 사람이었고, 지금은 필요 없다 해도, 다른 사람의 침범은 용납할 수 없었다.“난 할 일이 있어서 가야 해.” 정은은 도겸이 계속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가? 어디로 갈 건데? 조수민의 아파트? 그게 네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이번에는 각종 증서들이랑 신분증도 챙겨갔던데. 좋아, 한번 해보자는 거지?”정은은 마음이 아팠다. 도겸의 성격이 나쁘다는 것, 심지어 폭력적이라는 것을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였지만, 이런 말을 직접 들으면 여전히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겸은 그녀의 행동을 단순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은은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스르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먼저, 저분은 내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만난 것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더러운 관계가 아니야.”“그리고,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네 문제야.”이때, 정은이 불러
정은은 오랜만에 손수 무언가를 해보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도겸과 함께했던 지난 몇 년 동안, 옷이나 식사는 스스로 해결했지만, 이런 육체적인 노동은 거의 하지 않았었다. 몇 년 전 도겸이 창업을 시작할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집안 청소만큼은 언제나 청소 아주머니에게 맡겼었다. 페인트 한 통을 다 칠하고 나서 정은은 아픈 허리를 부여잡았다. 몇 년 동안 편안하게 지내왔던 그녀에게는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페인트를 더 가져오기 위해 복도로 나가려던 순간, 정은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발로 페인트 통을 차버렸다. 서둘러 페인트를 닦아내기 시작했지만, 이웃집 문 앞에 조금 쏟아져 버렸다. 걸레를 가져와 닦으려던 찰나, 문이 갑자기 열리며 정은은 깜짝 놀라 사과를 하려고 했다. 뜻밖에도 문 앞에는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너도 여기 사는구나?”“어떻게 여기에 계세요?”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조재석은 바닥을 한번 훑어보고, 정은의 뒤편을 살폈다.“그래서 오늘 이사 온 사람이 너였구나?”정은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네, 오늘부터 우리 이웃이에요.”정은의 말에 재석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가 이곳에 사는 이유는 실험실과 학교와 가까워서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은이 여기서 산다고? 이곳은 여자 혼자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이곳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곳이었다. 재석이 움직이지 않자, 정은은 그가 페인트로 복도를 더럽힌 것을 신경 쓰는 줄로만 알았다.“죄송해요. 조금 흘렸어요. 곧 다 치워요.”정은은 서둘러 페인트를 닦아냈다. 내려갈 때, 재석이 들고 있는 쓰레기를 보고 정은이 말했다.“마침 내려가는 길인데, 제가 대신 버려드릴까요?”재석은 거절하지 않았고, 대신 집에서 접이식 사다리를 가져왔다.“벽을 칠할 거면, 이걸 쓰는 게 편할 거야.”“고마워요.”사다리가 있으니 벽 칠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정은은 오전 내내 집안의 낡은 벽을 모두 칠했다. 집은 금세 깔끔
재석은 한 걸음 뒤에서 정은을 따르고 있었다. 어젯밤의 불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차분함을 되찾은 것 같았다. 차를 몰고 온 재석이 문을 열어주자, 정은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과일 가게를 지나칠 때, 정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잠깐만 멈춰 줄 수 있을까요? 2분만요. 과일 좀 사려구요.”“과일?”“네, 교수님 드리려고요.”재석은 핸들을 잡고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정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선배님은 손님을 방문할 때 항상 빈손으로 가시나요?”재석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고 정은은 조용히 엄지를 세우며 감탄했다. ‘역시 대단한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봐?’하지만 이내 재석은 차를 길가에 세웠다....오미선 교수의 집은 서비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환산로에 위치한 작은 양옥집이었다. 서양식과 동양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 집은 단풍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어, 고요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6년 만에 찾아온 이곳에서, 정은은 안절부절 못하며 발밑의 과일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용기가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정은의 마음을 읽은 듯, 재석이 물었다.“내리지 않을 거야?”정은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렸다가요.”재석은 긴장해 하는 정은을 몇 초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먼저 들어갈게.”정은은 재석이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두 번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이맘때쯤이면 백화가 만발해 있었다. 작은 정원에 들어서자 부드러운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정은의 코끝에 스며들었다. 난간 옆에는 주인이 돌보지 못한 듯 시들어 버린 채소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집에 들어가기 전, 정은은 오미선 교수의 목소리를 들었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재석을 따라 걸었다.“교수님.”오미선 교
재석은 여전히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음식은 그저 배를 채우는 수단일 뿐, 맛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없었다.“다 씻었어.”정은이 손질한 홍고추와 청경채를 바라보며, 그것들이 마치 강박증 환자의 손길을 거친 것처럼 가지런히 정리된 모습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왜 웃어?” 재석이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묻자, 정은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먼저 나가 계세요.”“알았어.” 재석은 물기를 닦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은은 상을 가득 채울 만큼의 음식을 만들었다. 맛은 담백한 것을 중심으로, 대부분 오미선 교수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오미선 교수는 감탄하며 식사를 마쳤다. 정은은 자발적으로 설거지를 시작했고, 재석도 주방으로 들어와 도왔다. 따뜻한 불빛 아래 서 있는 재석의 모습이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보였다.정은의 시선에서 보면, 재석의 옆모습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인물 조각상처럼 날카로운 윤곽을 띠고 있었다. 그때 오미선 교수가 문틀 옆에 서서 물었다.“정은아, 너랑 재석이는 어떻게 알게 됐니?”재석은 오미선 교수의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였고, 정은은 오미선 교수가 가장 아끼는 학생이었다. 오미선 교수는 오래전부터 두 사람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먼저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교수님, 손님이 오셨어요!”그 소리에 오미선 교수는 거실로 돌아가자 한 여자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미소 지었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강서정입니다. 전에 병원에서 뵙고, 올해 대학원 티오에 대해 여쭤봤던 사람입니다.”오미선 교수는 알아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요. 일단 앉아요.”서정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교수님께서 요양 중이시라고 들어서, 특별히 보약을 좀 가져왔습니다.”오미선 교수는 티테이블 위에 놓인 선물 상자들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인삼, 녹용, 홍삼 등등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오미선 교수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서정은 계속
말을 마치고, 도겸은 바로 차에 올라타더니 액셀을 밟고 떠났다. 그 모습을 본 수민은 그 자리에서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사람 정말 뭐야?! 쓰레기 같은 놈! 개자식! 진짜 미치겠네!” “내가 말했잖아!” 수민은 옆에 있던 남자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정은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절대!” 남자는 화를 내는 수민을 겨우겨우 달랬다. “그래, 그래, 진정해.” 하지만, 가능할까? 도겸이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니, 이미 계획을 다 세워놓은 게 분명했다. 남자는 수민을 몰래 한 번 쳐다봤다. 수민도 정은처럼 자신에게 그렇게 충실했으면 좋았을 텐데... ‘잠깐! 그건 안 되지!’ 남자는 그런 생각조차 감히 할 수 없었다. ... 차 안에서, 도겸은 전화를 받았다. 기분이 목소리도 차가웠다. “무슨 일이야?” [자기야, 최근에 발견한 맛집이 있는데, 게가 엄청 통통해요.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우리 가서 먹어요, 응?] 서연희의 맑고 밝은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연희는 도겸이 해산물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어서 도겸의 취향을 맞추려 했다. 게다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둘이 연락하지 않아 연희는 마음속으로 불안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런 불안함이 연희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 먼저 전화를 걸었다. 이전에는 대부분 도겸이 먼저 데이트를 계획했고, 연희는 단지 부끄러워하며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승낙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달라졌다. 도겸이 먼저 연락을 하는 횟수가 줄었고, 메시지도 간결해졌으며, 때로는 답장조차 없었다. 물어보면, 바쁘다고 했다. 예를 들면 지금도 그렇다. “토요일? 바빠서 안 돼.” [토요일에 일이 있다면, 일요일도 괜찮아요.] 연희는 핸드폰을 꼭 쥐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바쁘다니까, 이만 끊자.” 말을 마치고, 도겸은 전화를 끊었다. 연희는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마음속의 불안함이 다시 연희를 휘감았다. ‘안 돼
“일상 연구와 학술 경기는 별개야. 더구나 올해 해외 교류 연구진을 확정했고, 지금도 긴박하게 경기 훈련을 진행하고 있지. 지금 임시로 선수를 교체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부총장은 한숨을 내쉬었다.“저도 다 알고 있지만,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저희 학교는 이미 5년 연속 외국 대학과의 경기에서 졌습니다. 올해 또 진다면...”국내 각 대학교 간의 경기가 아니라, 국내외의 싸움이었다.같은 나라 학생들에게 지는 것은 수치스럽지 않고 오히려 괜찮았다.하지만 외국인에게 진다면...국내외 대학 간의 우호적인 경기이니, 그들이 남보다 못하다면 당연히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그러나 이것은 국가의 명예, 과학연구수준, 민족 자신감과 관련된다.“총장님, 올해는 정말 질 수 없습니다.”송영한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소정은 팀이 출전하면 반드시 이기는 건 아니잖아? 그건 어떻게 확신하는 건데?”“확신할 수 없지만, 위기를 직면할 때, 기발한 계략을 써야 승리할 수 있죠!”...무한 실험실, 휴식 구역.“에취! 에취! 에취!”민지는 연속 재채기를 세번 하더니 코를 비비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틀림없이 누군가 뒤에서 내 험담을 하고 있는 거야...”서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건 아... 에취!”“봐봐!”민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서준을 가리켰다.“너도 시작했네!”서준은 쓰던 휴지를 뭉쳐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난 감기에 걸린 거야. 만약 정말 누군가가 험담을 했다면, 정은 누나는 왜 멀쩡한...”“에취!” 정은은 궁색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그게... 나도 왜 이렇게 공교로운지 모르겠지만, 난 확실히 감기에 걸리지 않았어...”서준은 말문이 막혔다.민지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헤헤, 나 정말 똑똑해.”그녀는 언제나 쉽게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서준은 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개학하자마자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러지’ 쪽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니. 지금은 이미 전 대학원에
대학원 측과 학교 측이 이렇게 긴장하는 것도 당연했다.왜냐하면 JCR(저널 인용 보고서)의 최신 글로벌 학술지 영향력 순위에 따르면, ‘네이처’는 인용지수 40.137로 10위를 기록한 반면, 그 하위 간행물인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는 41.677로 8위에 올랐기 때문이다.단순히 영향 인자만 놓고 보면, 하위 저널인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가 오히려 본지인 네이처를 앞지른 셈이다.그리고 1년 만에 정은 팀은 두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이게 무슨 뜻인가?아무리 천재라 해도 이건 무리였다.“이 아이들, 정말 대단하군...” 송영한은 한숨을 쉬었다. “원래 이 학술 성과는 우리 학교 이름으로 발표됐어야 했는데, 참...”말을 하던 그는 잠시 멈췄다.처음에 정은 세 사람이 스스로 실험실을 세운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송영한은 놀랐다. 하지만 곧 그게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실험실은 정말로 건설되었고, 학교 실험실보다 훨씬 더 나은 환경과 조건을 갖춘 실험실이었다. 게다가 많은 유명 인사들을 초청해 커팅식을 열었다.그때 송영한은 자신이 잘못 판단했음을 깨달았다.정은은 절대 간단한 학생이 아니었다.다행히도 그녀는 서비대학교 학생이었기에, 그 능력을 인정해도 안 될 게 없었고, 이건 대학원과 학교 전체에게 있어 엄청난 경사였다.하지만 오미선은 정은 팀의 연구 성과가 학교와 무관하다고 선언했는데, 논문 서명까지 하지 않겠다고 했다.그 순간, 마치 누군가 학교의 뺨을 내리친 것 같았다.서명하지 않겠다는 말은 곧 학교 측이 연구 성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송영한은 그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하지만, 학교의 총장인 그는 침착하게 감정을 추스르고, 아무런 실수 없이 대처했다.그렇지만 몇 일 후, 그는 부총장과 생명과학대학의 학장에게 크게 화를 냈다.왜 송지혜라는 장본인에게 직접 화를 내지 않았을까?그건 그녀가 아직 욕을 먹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생명과학대학의 학장은 그 후로 송지혜를 처리할 것이다.지위가
현빈은 자신이 어떻게 들킨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네가 한번 말해봐, 왜 우리 부자는 미숙이와 미숙이 딸이란 고비를 넘지 못한 걸까?”현빈은 잠시 말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설마 유전 때문인가? 하하, 그럼 정말 신기하군...” 심정훈은 술잔을 흔들며 담담하게 웃었다. “제기랄!”“왜 그러세요?” 현빈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심정훈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센 척 안 할 거야?”현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심정은 잠시 침묵한 후, 경험자로서 한 마디 덧붙였다.“내가 겪어본 사람으로서 말해주지, 네가 마음을 이미 많이 꺼내 놓았다면, 그걸 잡기엔 이미 늦었어.”“가능하면 지금 그만두고, 아직 마음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틈에 최대한 빨리 손을 떼야 해. 너무 깊이 빠져들면, 너 자신까지 망칠 수 있어.”“아버지 경험 얘기는 그만하세요. 그렇게 성공적인 사례도 아니잖아요.”심정훈은 그 말에 잠시 묵묵히 앉아있었다. 이번엔 그가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두 사람은 술에 취하지 않고, 술집에서 나와 각자 떠났다.“정말 집에 안 가실 거예요?” 현빈이 물었다.“응.” 심정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시간 나시면 비서더러 어머니에게 소식 전해주라고 하세요.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리면, 사회적으로도 좋은 영향이 없을 거예요.”“누구에게 좋은 영향이 없다는 거야?” 심정훈은 다시 물었다.“저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심씨 가문에도 모두 좋지 않아요.”심정훈은 손에 든 담배를 흔들며 대답했다.“싫어. 그럼 먼저 갈게.”현빈은 한숨을 쉬며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정은은 학교에 있으면서도 이씨 가문과 심씨 가문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이미 캠퍼스로 돌아온 그녀는 평소처럼 수업을 듣고 있었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실험실로 향해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다른 일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그녀가 속한 연구팀은
“응.” 심정훈은 담담하게 답했다.지금 이렇게 보면, 아버지와 아들은 정말 놀랍도록 닮았다.심정훈은 이미윤의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나갔다. 현빈의 옆을 지날 때, 그는 잠시 멈추어 아들의 어깨를 두드린 후 계속 걸음을 옮겼다.이미윤은 이 모든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평온한 두 부자를 보면서 그녀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현빈! 너 알고 있었지, 그렇지?!”이미윤은 달려가 현빈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너 다 알고 있었어?! 응?!”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언제부터?”“처음부터요.”“하하하...” 이미윤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알고 있었군... 나만 바보였어!”“좋아, 내 남편과 아들이 나를 바보로 만들었어!”“어머니, 잘못을 저지르신 이상, 그 대가를 치러야 하죠. 아버지께서 기회를 주셨지만...”“내가 자초했다는 거야?!”“그렇게 볼 수 있죠.”...심정훈은 이미윤의 처분에 대해 직접 이씨 가문을 방문하여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이춘재는 오랫동안 침묵하다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봉수진이 덧붙였다. “앞으로 우지영은 우지영이고, 현빈이는 우리의 손자야. 그 아이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도 없어.”“알겠습니다.” 예상된 대답이었다.하지만 심정훈은 묻고 싶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그러나 그는 끝내 입밖에 내지 못했다.떠날 때 봉수진이 문앞까지 배웅하며 말했다.“미숙이 없으니까 그만 둘러봐.”심정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봉수진은 잠시 동정을 느꼈다.“심 서방, 넌 좋은 아이야. 하지만 너와 미숙이는 앞으로 인연이 없을 거야. 세상일이란 그래...”“다행히 미숙이는 20년간 큰 고생을 안 했어. 소 서방이 잘 보살펴 줬지. 요즘 같이 지내보니, 소 서방도 참 좋은 사위더라고. 너도...” 봉수진은 말을 멈추었다.“이젠 내려놓아야 해. 집착과 사랑은 달라. 우리는 네가 과거에 갇히는 걸 원치 않아. 미숙이와
이미윤은 멍하니 서서 얼굴은 점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변해갔다.“당... 당신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손발이 차갑게 식으며 온몸을 떨었다.심정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호구로 보여? 남의 남자 자식이나 키워주는 호구 말이야. 천만에!”심씨 가문의 아이는 출생 후 신생아 검진과 동시에 친자 확인 검사를 기본으로 했다.그래서 심정훈은 현빈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란 것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이미윤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수작은 조금만 조사하면 바로 들통날 일이었다.이미윤은 20년 넘게 심씨 가문을 속였다고 흐뭇해했지만 알고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속고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왜... 왜 그런 거예요?” 이미윤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면서 왜 나한테 묻는 거예요?”“이런 심각한 일로 몰아붙이지 않으면, 당신은 덜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스스로 털어놓겠어?”방금 이미윤은 심정훈의 질문에 수많은 일을 폭로했다.“내가 이미숙을 해쳤다고 말해도 좋고, 처음부터 계획하고 당신과 결혼했다고 비난해도 좋아요. 하지만 현빈이의 신분을 의심하면 안 되죠!”앞의 두 대답이 바로 심정훈이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설마... 그 전에 비서가 가져온 이혼 서류도 다 당신의 연기였던 거예요?” 이미윤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심정훈은 냉소를 지었다. “나도 가문의 어르신들도 모두 상속자인 현빈이 무척 마음에 들거든. 내 후계자를 위해 이혼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이미윤은 마음이 잠시 놓였다.“대신 우리 사이에 다른 아이도 없을 거야.”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신은 영원히 심씨 가문의 사모님으로 남을 거야. 훌륭한 후계자를 낳아준 대가로.” 심정훈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야. 이 집에 난 다시 오지 않을 거고, 당신 전화도 받지 않을 거야. 매달 생활비는 계속 줄 수 있지만, 모든 모임은 금지야.”“집에는 당신을 감시할 집사가, 외출할 땐 따라다닐 기사가 붙을 거야. ‘사모님'이라는 이
이미윤은 이 말을 듣고 정신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내가 이미숙을 해쳤다고 말해도 좋고, 처음부터 계획하고 당신과 결혼했다고 비난해도 좋아요.”“하지만 현빈이의 신분을 의심하면 안 되죠! 이건 나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현빈이에게도 상처를 주는 짓이잖아요!”심정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처음부터 날 속였다는 건 인정하는 거야?”이미윤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래요. 내가 친구들에게 당신을 취하게 만들라고 했고, 나도 술에 취한 척 옷을 벗고 당신 침대에 누웠던 거예요.”“하지만 이미 눈치챘잖아요? 그날 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이미윤은 울면서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심정훈은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럼 한 달 뒤 나한테 임신했다고 알린 것도 거짓말이었어?”이미윤은 냉소를 지었다.“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날 아내로 맞아들였겠어요?”수년이 지났지만, 이미윤은 그날 아침 심정훈이 깨어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표정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잠시 당황한 뒤, 그는 금방 침착해졌다.두 사람이 정말 관계를 가졌는지 여러 번 확인했다.이미윤이 확신에 찬 대답을 하자, 심정훈은 옷을 입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경고했다.“진짜든 가짜든, 이 일은 입 밖으로 내뱉지 마.”사과 한마디 없었고, 오히려 그녀를 꽃뱀으로 취급하는 듯했다.아니, 꽃뱀보다도 못했다. 꽃뱀은 적어도 돈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한 달 후, 이미윤은 임신 검사 결과를 들고 이춘재와 봉수진을 찾아가 울며 하소연했다.하지만 두 사람의 분노는 오히려 그녀를 향했다.이미윤은 왜 피해자인 자신이 비난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결국 이춘재 부부는 심정훈을 찾아갔고, 다음날 심정훈은 결혼을 수락했다.“내가 왜 동의했는지 아니?”심정훈의 미소는 차갑기만 했다.“내가 임신했기 때문 아니었어요?”“아니.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 너와 이런 관계가 생겼으니 너랑 결혼하지 않아도 앞으로 미숙이와 인연이 없다고 하셨
‘아니... 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어.’이미윤은 평생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온갖 나쁜 짓을 저질러서야 심정훈과 결혼했다.이제 아이도 이렇게 컸고,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로서, 절대로 이 시점에서 버려질 수는 없었다.‘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헛된 노력을 한 것과 다름이 없잖아?’이미윤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눈물을 닦으며 위층으로 올라가 옅은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연회에서 문제가 생겼고, 심정훈이 이미숙을 위해 복수를 하려 한다면, 이미윤은 이미숙을 찾아가야 했다.‘만약 이미숙이 정훈 씨에게 떠나지 말라고 설득한다면, 그이도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하지만 환상은 완전히 무너졌다.“안 본다고?!” 이미윤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내가 왜 왔는지 제대로 말해줬어?”가정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말씀드렸어요.”“그럼 이혼에 대해서는...” 이미윤은 가정부에게 이혼 얘기를 전하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 시점에서 그리 많은 것을 따질 필요는 없었다.“이혼에 대해 말씀드렸어요.” 가정부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두 분 뭐라고 하셨는데?”“어르신께서는 안 보신다고 하셨고, 사모님께서도 돌아가라고 하셨어요. 이제 아가씨의 집안일은 어르신들과 무관하다고 하셨어요.”이미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좋아, 이렇게 말한 이상, 나도 뭐라 할 필요가 없겠군!” 말을 마친 이미윤은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그러나 두 걸음도 채 걷지 못한 그녀는 갑자기 멈추고 다시 돌아섰다.“이미숙은?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가정부는 망설이며 대답했다.지금 이씨 가문은 모두 두 어르신이 이미 이미윤과 관계를 끊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약 정보를 누설하여 심각한 결과라도 초래한다면 그것은 정말 큰일이었다.이미윤은 냉소를 지었다.“왜? 지금 뭐 좀 물어보니까 우물쭈물하기 시작하는 거야? 나 아직 죽지 않았어! 예전에 내가 집에 있을 때도 널 괜찮게 대하지 않았니? 너 정말 양심도 없구나!
연회장에서 한바탕 소란을 벌인 이미윤은, 끝내 가족들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심정훈 줄곧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들으니 해외로 출장을 다녀갔다고 한다.그 후 이틀 동안 이미윤은 남편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심정훈의 핸드폰은 꺼져 있거나 연결할 수 없었다.그녀는 화가 나서 핸드폰 두 대를 부쉈다.가정부들은 그런 이미윤 때문에 모두 전전긍긍하며 행여나 그녀의 화풀이로 될까 봐 두려웠다.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평범한 아침이 찾아왔다.이미윤은 아침을 먹고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심정훈의 비서가 갑자기 나타나 간단한 인사를 한 뒤, 그녀에게 서류 한 부를 건넸다.이미윤은 영문을 몰랐고, 다음 순간, ‘이혼 합의서'라는 다섯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이미윤의 머리는 새하얘졌다.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이미윤은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비서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이게 무슨 뜻이죠?”비서는 공손하게 대답했다.“회장님께서 사모님에게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가서 그이에게 말해요, 이혼을 하고 싶다면 스스로 와서 제기하라고! 이혼 협의서만 보내서 뭘 하려고요? 내가 사인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네, 회장장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비서는 상대방이 자신의 얼굴에 던진 합의서를 차분하게 주워서 돌아섰다.비서가 떠나자, 이미윤은 그제야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그녀는 즉시 현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너희 아버지가 나랑 이혼을 하려 하다니!”맞은편은 아주 조용했다. 이미윤이 말을 끝내고 나서야 현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알았어요.]이미윤은 말문이 막혔다.[또 다른 일 있으세요?]“심현빈! 너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는 거야?! 너희 아버지가 나와 이혼하려고 하잖아!”[알아요. 할아버지 생신잔치가 끝나는 대로 바로 이혼하실 줄 알았는데, 일주일이나 더 끌 줄은 몰랐어요.]“너, 너 지금 당장 돌아와! 그렇지 않으면, 날 엄마라 부르지도 마!”현빈은 결국 이 말 때문에 집으로 돌
설날에 찾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설날 보낸 후에도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해줬으니 이춘재와 봉수진은 이미 감동을 느끼며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이미숙과 소진헌이 하루만 떠났을 뿐인데, 갑자기 조용해진 집안을 보니 봉수진은 어색함을 느꼈다.‘예전에도 이렇게 지냈는데, 지금은 왜 이럴까...’검소함에서 사치로 넘어가는 것은 쉽지만,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딸과 사위가 곁에 있는 시간을 맛본 후, 어떻게 다시 쓸쓸한 시간을 견딜 수 있겠는가?“안 돼!” 봉수진은 벌떡 일어섰다. “나도 L시로 갈 거예요!”이춘재는 어쩔 수 없다는 눈빛으로 말했다.“소란 좀 피우지 마. 미숙이는 아직 다른 도시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당신 혼자 L시로 가서 뭐 하려고?”“소 서방을 찾으러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아니면 직접 미숙이 찾아가도 되잖아요! 어쨌든 더 이상 집에 못 있겠어요!”이춘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소 서방은 매일 아침 일찍 나가고 저녁 늦게 들어오는데, 이번 학기에도 담임을 한다고 들었어. 지금 소 서방을 찾아가면 방해만 될 뿐이야.”“나는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집에 있으면서 밥도 해 주고, 미숙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당신도 참, 나이를 먹었는데도 왜 자꾸 아이처럼 구는 거야? 아이들 없이는 못 사는 거야?”봉수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당신은 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이춘재는 말문이 막혔다.그렇다, 사실 그도 가고 싶었다.봉수진이 말했다.“산이 나에게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가야죠! 당신도 나랑 같이 갈 거죠?”다음날 아침, 봉수진은 일어나 아침을 먹고는 다시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이춘재는 침착하게 돋보기 안경을 쓰고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봉수진은 옆에 앉아 그가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도 않고, 그저 탁자 위의 과일을 보며 이미숙이 생각나서 괴로워했다.한순간, 그리움과 슬픔이 밀려왔다.이춘재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해 태블릿을 건네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