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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작가: 십일
“자리 찾기 힘든가? 내가 나가서 도와줄까요? 음?”

도겸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챈 선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 형, 누나... 아직 안 돌아왔어요?”

이미 3시간이 넘었고 도겸은 두 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뭘 돌아와? 이별이 장난이야?”

그 말을 마치고 도겸은 선우를 지나 소파에 앉았고, 선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헤어진 거야?’

하지만 곧 선우는 머리를 흔들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겸이라면 이별을 말한 뒤 다시는 붙잡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정은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 모든 여자가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어도, 정은은 그렇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도겸아, 왜 혼자야?”

고동건이 재미있는 듯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기한 3시간은 이미 지났고, 하루가 다 갔어.”

그러자 도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기에서 졌으니 벌칙을 받아야지. 벌칙은 뭐야?”

진심으로 하는 말에 동건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다른 거 해보자. 술 마시는 거 말고.”

“뭔데?”

“정은이한테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를 하는 거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라고.”

동건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고 선우는 도겸의 전화로 정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차단된 건가?’

도겸은 잠시 멍해졌다.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선우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 아마도 진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걸 거예요. 정은 누나가 형을 차단할 리가 없잖아요.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선우는 말하며 자신도 민망해졌고 동건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어쩌면 정은이 이번에는 진짜일지도 몰라.”

그러자 도겸은 코웃음을 쳤다.

“이별이 진짜지 그럼 가짜야? 이별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이런 내기 다시는 하지 말자. 앞으로 누가 소정은에 대한 말을 꺼내면, 친구로 지낼 수 없을 거야.”

동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너만 후회하지 않으면 돼.”

도겸은 입꼬리를 올리며 신경 쓰지 않는 듯이 보였다. 도겸은 한 번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심현빈은 그 상황을 보고 급히 분위기를 풀려고 말했다.

“이렇게 심각하게 굴지 말자, 하하... 다 절친들인데.”

...

아침 7시.

수민이 조깅을 마치고 돌아와 문을 열자마자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났다. 하얗고 곧은 다리를 드러낸 하운드투스 원피스를 입은 정은이 뜨거운 국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도 아름다웠다.

“빨리 샤워하고 와. 아침 먹어.”

“어? 머리 스타일 바꿨네? 검은 생머리에 높은 포니테일? 예쁘게 차려입고 돌아갈 준비하는 거야? 강도겸이 데리러 왔어?”

“하하, 말 좀 좋게 해줄래?”

“강도겸이 직접 데리러 온다는 거 좋은 말 아니야?”

수민은 식탁으로 다가가 푸짐한 아침 식사를 발견했다.

“샤워해.”

정은은 수민이 뻗은 손을 툭툭 쳐냈다.

“더럽다니까.”

“내로남불이야! 강도겸이 그럴 때는 안 그러더니 왜 나만 때려?”

“응,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때릴게.”

“쳇, 퍽이나 네가 그러겠다.”

수민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정은은 이미 보온병을 들고 나가고 없었다.

“어휴, 벌써 자기 남자한테 아침을 못 챙겨줘서 안달이구만. 친구는 안중에도 없지!”

서광병원, VIP 병실.

“미선아, 오늘 기분은 어때?”

오미선은 손에 들고 있던 논문을 내려놓고, 안경을 제대로 고쳐 썼다.

“신명철? 너 여긴 왜 온 거야?!”

“안 일어나도 돼.”

신명철은 급히 오미선의 등 뒤에 베개를 넣었다.

“상처가 아직 다 안 아물었잖아.”

“충수염, 작은 수술이야. 나이 때문에 회복이 늦어져서 의사가 이렇게 오래 잡아둔 거야. 맞다, 올해 학교 석사 모집 정원은 결정됐나 모르겠네?”

“결정됐어. 너는 3명, 나는 4명.”

“3명이라니…”

오미선이 중얼거렸다.

“왜? 올해도 2명만 받을 거야?”

“응, 나이 들어서 2명밖에 못 데리고 있겠어.”

그 티오 하나는 특별히 남겨둔 거면서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 오미선의 모습에 신명철은 입을 삐죽였다.

“오미선 교수님! 어? 신명철 교수님도 계시네요?”

하성준이 후배 두 명과 함께 들어와 과일과 꽃을 내려놓았다.

“교수님, 병문안 왔어요.”

잡담 중에 한 학생이 말했다.

“올해 1학년 신입생 중에 아주 대단한 학생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바로 우리 단과대학 학·석·박사 통합 연계 과정에 합격했대요.”

서비대학교 생명과학대학에서 지난 10년간 학·석·박사 통합 연계 과정을 밟은 학생은 3명을 넘지 않았다.

“작년에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랑 소프트웨어 경진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하더라고요.”

“금메달 2개? 나쁘지 않네요. 예전에 오미선 교수님의 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학부 입학 때 금메달 4개로 특례입학한 학생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수학, 물리, 화학, 컴퓨터 모든 분야에서 금메달을 따냈다고 들었는데, 이름이 뭐였지? 소 무슨 은이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신명철이 제때 말을 꺼냈다.

“다들 이만 학교로 돌아가 보세요.”

“아, 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병실을 나서며, 한 학생은 풀이 죽어 성준에게 물었다.

“선배, 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오미선 교수님이랑 신명철 교수님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지셨죠?”

성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

병실 안에서

“학생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

오미선은 손을 저었지만, 입술이 떨렸다. 결국 고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천재가 왜... 왜 본인의 재능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걸까?”

“흥분하지 마.”

“명철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걔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사랑이 필요하다더라. 하하, 사랑이 필요하다고? 걔는 내 마음을 산산조각 냈어.”

정은은 병실 문 앞에 서서 보온병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렸다.

‘죄송해요. 교수님.’

결국 정은은 들어갈 용기가 없어, 보온병을 간호사실에 놓았다.

“이거 오미선 교수님께 전달 좀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어? 누구신지 아직 못 적었는데! 어디 가세요?”

정은은 병동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지만, 죄책감에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은 언니?”

큰 키의 세련된 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디올 레이디 마이크로백을 들고 다가왔다. 세미 정장과 일자 치마,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자는 굉장히 지적으로 보였다.

강서정, 강도겸의 친여동생이었다.

“정말 언니네요? 언니가 여기 병원에는 무슨 일이에요?”

서정은 앞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입원 병동이었고 산부인과는 아니었기에 서정은 자신의 엄마를 대신해 안도했다. 정은이 정말 임신해서 결혼하게 된다면, 서영숙 여사는 기절할 것이다.

“서정아.”

정은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눈이 왜 이렇게 빨개요? 울었어요?”

정은은 말이 없었다.

“또 우리 오빠랑 싸운 거예요?”

“아니야.”

서정은 정은이 말을 하지 않자, 동정의 눈빛을 보였다. 사실 서정은 정은을 꽤 좋아했다. 외모도 좋고, 성격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강씨 집안의 기준에 못 미쳤다. 특히 서영숙은 학벌을 매우 중시해서, 명문대 출신의 고학력자만을 며느리로 삼길 원했다.

“저희 오빠랑 지내는 거 힘들죠? 오빠 성격이 안 좋아서 많이 힘들 거예요.”

“사실 우리 헤어...”

“저기, 저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말을 마치고 시간을 확인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서정은 오미선 교수를 방문하러 왔다. 똑똑하고 예의 바른 학생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오늘 특별히 차려입었다. 박사 특례입학 티오는 이번 병문안에 달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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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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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석은 여전히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음식은 그저 배를 채우는 수단일 뿐, 맛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없었다.“다 씻었어.”정은이 손질한 홍고추와 청경채를 바라보며, 그것들이 마치 강박증 환자의 손길을 거친 것처럼 가지런히 정리된 모습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왜 웃어?” 재석이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묻자, 정은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먼저 나가 계세요.”“알았어.” 재석은 물기를 닦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은은 상을 가득 채울 만큼의 음식을 만들었다. 맛은 담백한 것을 중심으로, 대부분 오미선 교수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오미선 교수는 감탄하며 식사를 마쳤다. 정은은 자발적으로 설거지를 시작했고, 재석도 주방으로 들어와 도왔다. 따뜻한 불빛 아래 서 있는 재석의 모습이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보였다.정은의 시선에서 보면, 재석의 옆모습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인물 조각상처럼 날카로운 윤곽을 띠고 있었다. 그때 오미선 교수가 문틀 옆에 서서 물었다.“정은아, 너랑 재석이는 어떻게 알게 됐니?”재석은 오미선 교수의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였고, 정은은 오미선 교수가 가장 아끼는 학생이었다. 오미선 교수는 오래전부터 두 사람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먼저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교수님, 손님이 오셨어요!”그 소리에 오미선 교수는 거실로 돌아가자 한 여자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미소 지었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강서정입니다. 전에 병원에서 뵙고, 올해 대학원 티오에 대해 여쭤봤던 사람입니다.”오미선 교수는 알아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요. 일단 앉아요.”서정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교수님께서 요양 중이시라고 들어서, 특별히 보약을 좀 가져왔습니다.”오미선 교수는 티테이블 위에 놓인 선물 상자들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인삼, 녹용, 홍삼 등등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오미선 교수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서정은 계속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1화

    말을 마치고, 도겸은 바로 차에 올라타더니 액셀을 밟고 떠났다. 그 모습을 본 수민은 그 자리에서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사람 정말 뭐야?! 쓰레기 같은 놈! 개자식! 진짜 미치겠네!” “내가 말했잖아!” 수민은 옆에 있던 남자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정은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절대!” 남자는 화를 내는 수민을 겨우겨우 달랬다. “그래, 그래, 진정해.” 하지만, 가능할까? 도겸이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니, 이미 계획을 다 세워놓은 게 분명했다. 남자는 수민을 몰래 한 번 쳐다봤다. 수민도 정은처럼 자신에게 그렇게 충실했으면 좋았을 텐데... ‘잠깐! 그건 안 되지!’ 남자는 그런 생각조차 감히 할 수 없었다. ... 차 안에서, 도겸은 전화를 받았다. 기분이 목소리도 차가웠다. “무슨 일이야?” [자기야, 최근에 발견한 맛집이 있는데, 게가 엄청 통통해요.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우리 가서 먹어요, 응?] 서연희의 맑고 밝은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연희는 도겸이 해산물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어서 도겸의 취향을 맞추려 했다. 게다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둘이 연락하지 않아 연희는 마음속으로 불안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런 불안함이 연희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 먼저 전화를 걸었다. 이전에는 대부분 도겸이 먼저 데이트를 계획했고, 연희는 단지 부끄러워하며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승낙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달라졌다. 도겸이 먼저 연락을 하는 횟수가 줄었고, 메시지도 간결해졌으며, 때로는 답장조차 없었다. 물어보면, 바쁘다고 했다. 예를 들면 지금도 그렇다. “토요일? 바빠서 안 돼.” [토요일에 일이 있다면, 일요일도 괜찮아요.] 연희는 핸드폰을 꼭 쥐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바쁘다니까, 이만 끊자.” 말을 마치고, 도겸은 전화를 끊었다. 연희는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마음속의 불안함이 다시 연희를 휘감았다. ‘안 돼

최신 챕터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4화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3화

    [진짜 안 따라 나오는 거야? 손태민, 너 나한테 진심이긴 해? 마음 있긴 해?!]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태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디야?”[정문 앞 카페. 시간 줄게, 5분 안에 와.]“그래.”태민은 짧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태민이 카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통화한 지 15분이 지나 있었다.수아는 두 팔을 꼬며 차갑게 말했다.“뭐야, 이게? 5분이랬잖아. 내가 기다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잖아.” “미안...태민은 고개를 숙였다. 눈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사과했다.그런 태민의 모습에 수아는 괜히 짜증이 났다. ‘조재석이랑 비교하면... 능력도, 집안도, 얼굴도, 도대체 뭐 하나 나은 게 없어.’하지만 그녀는 아직 태민이 필요했다. 그 생각에 억지로 화를 눌러가며, 입꼬리를 올려 웃는 척했다.“너... 교수님한테 한 번만 말해줄 수 있어? 이번 해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좀 부탁해 줘.” 그 말에, 태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예전엔 본 적 없는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봤다.‘저 눈빛은... 뭐야...?’수아는 이유 모를 불안감에 딱 2초 만에 시선을 피했다.“도와줄 거야, 말 거야? 싫으면 됐어. 그냥 안 해도 돼.”예전 같았으면, 수아가 이렇게 말만 해도 태민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엔... 침묵이 조금 길었다.“그래...”드디어 태민이 대답했다. 수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곧이어 태민이 덧붙인 말이 그녀를 멈칫하게 했다.“근데, 조건이 있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조 교수님이 너를 그렇게까지 내친 이유...”“그건... 지금 꼭 해야 하는 말이 아니잖아...”“나는 꼭 들어야겠어.”수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상하게 낯선 태민의 태도에 그녀는 자신이 제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손태민, 지금 뭐 하는 거야? 날 협박하는 거야?”“진짜 날 사랑하긴 해? 그 정도 일도 못 해줘?”그 비난과 몰아붙임 속에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2화

    수아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곧장 재석 앞까지 걸어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눈은 흔들림 없이 그를 향해 있었다.“조 교수님, 왜 절 해고하신 거예요?” “일주일 병가 낸 게 문제였어요? 아니면 프로젝트에서 뭐 잘못된 거라도 있었나요?”재석은 조용히 수아를 응시하다가, 문득 작게 웃었다.“이수아 선생님, 경찰이 못 밝혀낸다고 해서,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봐요? 자세히 얘기해줘요? 모두 들을 수 있게?”그 말에, 수아 마음속 마지막 희망 하나가 차갑게 꺼져버렸다.‘알고 있었어...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야.’‘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무 말 안 하다가, 오늘...’그녀는 마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속에 쌓여 있던 분노는 어디로 갔는지, 기운 빠진 사람처럼 그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미진은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하지만 재석의 깊고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스치자, 그제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아...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구나.’ 순간,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곱씹던 미진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추측 하나가 떠올랐다.그리고 미진의 시선은, 동정에서 충격으로 바뀌었다.진욱은 이미 눈치챘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오직 태민만이 아직 그 정답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수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수아야...”“꺼져! 건들지 마!!”수아는 그대로 태민의 손을 뿌리치고, 실험실을 박차고 나갔다. 허둥지둥, 마치 도망치듯.‘왜... 왜 조미진랑 전진욱이... 그런 눈으로 날 본 거야...?’ ‘설마... 그 사람들도... 눈치챈 건가?’모든 사람에게서 밀려난 채, 홀로 남겨진 태민은 허공을 향한 두 손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왜, 다들 나만 빼고 알고 있는 거야...’재석은 말없이 돌아서며 실험대로 향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1화

    결국, 실험실에서 재석이 누군가를 내보내는 데는 한마디면 충분했다.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 누군가가 이런 방식으로 떠나게 될 줄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미진은 잠시 멍해졌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갑자기‘계약 종료’라는 통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수아가 병가 중이긴 한데... 설마 그 병이 심각해진 건가?’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수아 상태가 안 좋아진 건가요?”하지만 그렇다 해도 ‘계약 종료’는 너무 가혹했다. 재석은 단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사람을 냉정하게 잘라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진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혹시 자세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재석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수아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는 태민이 인계할 거야. 오늘 중으로 인수인계 마무리해.” 이름이 불리는 순간, 태민은 마치 누가 뒤통수를 내리친 듯 멍해졌다. ‘뭐...? 내가?’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귀도 막힌 것처럼 주위 소음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온 신경이 ‘수아가 잘렸다’는 그 사실에 꽂혀 있었다.그때, 옆에 앉아 있던 미진이 책상 아래로 태민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태민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멍하니 재석을 바라봤다. “교수님, 왜죠?”재석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또 그 눈빛이었다. 무표정하면서도 단호하고, 어떤 설명도 허락하지 않는.그리고 결국, 재석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회의실엔 놀람과 당혹, 멍한 표정들이 뒤섞인 채로 몇 초간 정적만 흘렀다.오전 내내 실험실 분위기는 무겁기 짝이 없었다. 태민은 여러 번 핸드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수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만약 모른다면...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재석은 끝내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태민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교수님이 저런 결정을 내릴 정도라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0화

    그날 아침, 별다른 것 없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잠에서 깨자마자, 태민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확인했다. 혹시 수아에게서 연락이 와 있진 않을까...부재중 전화, 메시지 알림은 있었지만... 전부 다른 사람이었다.‘오늘도 아니야.’실망감이 스르르 밀려왔다. 태민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씻고, 옷을 챙겨 입고,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막 실험실에 도착하자, 태민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떴다.수아에서 온 전화였다.“수아야?! 드디어... 너 왜 그동안 연락 안 했어? 나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나...”[손태민, 진짜 왜 이렇게 집착하냐?!]단 한 마디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태민의 정신이 멍해졌다.[계속 전화하고, 계속 메시지 보내는 게 그렇게 재밌어? 내가 안 받고, 안 보는 거면 알아서 눈치껏 그만해야지! 왜 자꾸 연락하는데?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할 건데? 진짜 짜증 나!]“수아야...”태민은 당황해 목소리가 떨렸다.“나는 그냥... 네가 너무 연락이 없으니까,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돼서 그랬어...”[걱정?]전화기 너머로, 조소 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내가 뭘 어쨌다고 걱정을 해? 너 진짜... 왜 그렇게 남 일에 다 끼어들고 싶어 하는 거야? 다 간섭하고, 다 챙기고.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태민은 눈앞이 흐려졌다.‘난 그냥 좋아하니까... 그게 다였는데.’“난 그냥, 너한테 잘해주고 싶었어...”[됐어, 잘하고 못하고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제발, 더 이상 전화도 하지 말고, 메시지도 보내지 마. 지금은... 그냥 혼자 있고 싶어.]뚝-태민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태민아? 앞 좀 보고 다녀!”실험실 입구. 미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태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쓰레기통을 걷어찰 뻔했다.“아, 죄송해요...”그는 황급히 쓰레기통을 세워놓고 어색하게 웃었다.“자, 가자.”미진이 그를 불렀다.“어디를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29화

    예전 같았으면, 수아는 또 한동안 우울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상하리만큼... 숨이 트였다.‘피한 거야. 벗어났어. 그 사람에게서도, 그 일에서도.’집에 돌아오자, 부모님이 이번 융합연구 포럼은 어땠냐고 물으셨다. 수아는 짧게 대답하고 얼버무렸다.“뭐... 그냥 그랬어요. 피곤하네요. 먼저 방에 들어갈게요.”간신히 표정을 숨긴 채 방으로 들어온 수아는, 여행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터져버렸다. 눈물이 쏟아졌지만, 입술을 꽉 깨물어 단 한 마디 소리도 내지 않았다.‘들키면 안 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다음 날, 수아는 ‘아프다’는 이유로 재석에게 병가 메일을 보낸 후, 일주일 가까이 실험실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수아가 아프다고?”조미진과 전진욱은 당황했다.“무슨 병인데요? 심각한 거예요?”재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나도 모르겠어.”그 말만 남기고는 다시 실험에 집중했다.재석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더 날카로웠고, 그 차가운 실루엣은 말없이 거리를 그었다.‘뭔가 이상한데...’진욱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 시간 일해온 사람인지라 느낄 수 있었다.지금 재석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하지만 실험실 맴버의 개인 사정에 대해선, 그도 쉽게 묻거나 개입할 수 없었다.결국 진욱은 마음속 의심을 눌러가며 다시 업무로 돌아갔다.단, 평소처럼 농담 따먹기를 하진 않았고, 표정마저 진지한 모습이었다. 반면, 미진은 그 정도로는 촉이 빠르지 않았다.지금 상황만 보면, 미진은 정말로 수아가 큰 병이라도 앓고 있는 줄로 믿고 있었다.재석에게서 도무지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자, 미진은 결국 손태민을 조용히 붙잡았다.“우리... 과일이라도 사서 수아를 찾아가 볼까? 같이 일한 지 몇 년째인데,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잖아.” 그 말에 태민은 멍하니 되물었다.“수아가 아프다고요? 어떤 병인데요? 입원했어요?”그 순간, 태민의 표정은 굳어버렸다.‘아프다고...? 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28화

    사건 진행 상황을 묻자, 경찰은 현재 재석 관련 건이 조사 단계에 있으며, 정식으로 입건될지는 아직 미정이라고 답했다.‘역시... 예상한 대로...’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재석도, 정은도 실망한 기색은 없었다.병원에서 받은 진단서와 입원 기록, 진료 확인서까지 전부 수사 담당자에게 제출한 후, 두 사람은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J시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밤 8시가 넘어서였다.택시를 타고 익숙한 단지 앞으로 돌아온 둘은, 단지 입구 쪽에 있는 단골 포장마차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다.“확실히 우리 동네 음식이 제일 맛있네요.”정은이 그렇게 말하며 웃자, 재석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두 사람의 마음도 편안해졌다.밥을 먹고 나서, 둘은 나란히 아파트로 올라갔다.정은은 집 앞에 도착해 열쇠를 꺼냈다. 잠깐 멈칫한 그녀는, 옆집 문을 열고 있는 재석을 돌아봤다.“지금은 어때요? 불편한 데는 없고요?”“응, 완전 멀쩡해. 컨디션 좋아.”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당부했다.“그래도 약은 꼭 챙겨 드세요. 의사 선생님이 말하길, 3일은 꾸준히 먹는 게 좋다 했어요.”“알겠어. 꼭 먹을게.”서로 인사하고, 각자의 문을 닫았다....정은은 샤워를 마치고 편안한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논문 두 편을 읽은 뒤, 평소처럼 불을 끄고 누웠다.‘그래, 오늘은 꽤 길고도 복잡한 하루였지...’그녀는 금세 잠에 들었다.한편, 옆집.재석도 짐을 정리하고 샤워까지 마친 후, 이불 속에 누웠다. ‘약은... 아, 까먹을 뻔했네.’정은의 당부가 떠올라,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다시 일어났다. 거실에서 약을 챙겨 먹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그런데 아무리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너무 자서 그런가... 아니면 이 약 때문인가...’자꾸만 정은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웃는 얼굴, 당황한 얼굴, 화내는 얼굴...‘대체 왜... 이렇게까지 또렷하게 떠오르는 거야.’결국 재석은 새벽 세 시가 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27화

    “이 서류들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거예요.”“신경 써줘서 고마워.”“두 번째네요.”“응?”“깨어나서 저한테 고맙다고 말한 거, 두 번째예요.”“아...”재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보기 드문 허당미가 드러난 순간이었다.“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정은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럴 땐 이렇게 말하면 돼요.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좋아, 샤부샤부 사줄게, 어때?”‘어떻게 알았지? 나, 오늘 아침에 샤부샤부 생각했는데?!’ ‘설마... 내 배고픈 마음마저 읽힌 거야?’하지만 정은은 곧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근데 의사 선생님이 맵고 자극적인 음식은 피하라고 하셨잖아요.”“우리 반반탕 시키면 되잖아. 맑은 국물도 있으니까.”“좋아요!”정은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수액은 다 맞은 건 점심 무렵이었다.두 사람은 퇴원 수속을 밟으러 이동했다. 정은은 약국으로 약을 가지러 갔고, 재석은 병실 담당 의사를 찾아가 필요한 기타 서류를 요청하려 했다.그런데 의사가 재석을 보자, 안경을 살짝 내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왜 그러시죠?”재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목은 괜찮아요?”“네?”“목소리요. 쉬었다거나, 건조하다거나... 그런 증상은 없어요?” 재석은 고개를 저었다.“없는데요?”“다행이네요. 어젯밤에 부르짖는 거 보고, 혹시 성대가 붓는 건 아닌지 걱정했거든요.” “제가... 어젯밤에... 그렇게 소리 질렀어요?”“크게는 아니었어요.”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그냥... 계속 불렀죠. 끊임없이.”재석의 숨이 순간 멈췄다.“제가 누굴 불렀는데요?”의사는 재석을 한 번 훑어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긴장할 거 없어요. 이상한 말은 아니고, 그냥 아주... 정상적인 말이었죠.” ‘그 말이 더 무서운데요...?’재석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정은... 정은아... 정은...’ 아주 다양한 어조와 감정으로 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26화

    정은은 벌떡 일어나 재석에게 달려갔다.남자의 눈은 꼭 감긴 채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소리는 거칠기 그지없었다.“선배님? 선배님... 제 말 들리세요?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재석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좀처럼 뜨이지 않았다.“선배님! 제발 깨어나세요!”간절한 외침 끝에, 재석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정은아?”“하...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어요...”정은이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찰나, 갑자기 재석의 손이 뻗쳐 나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거센 힘으로 당기더니 그녀는 고스란히 재석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너무 순식간이었다.“꺅...!”‘지금... 뭐야 이게?!’“정은아...”남자의 숨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거칠게 들려왔다.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둘이 몸이 너무 가까워서, 마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서로를 녹일 것만 같았다. “읏...”재석이 저도 모르게 신음하듯 소리를 내뱉었다.정은의 온몸이 굳어버렸다.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정신이 흐려진 듯한 재석의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설마, 약 때문에 이런 상태가 된 거야?’정신을 다잡은 정은은 바로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재석을 밀어 침대 쪽으로 눕힌 후, 온몸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그러고는 한 손으로 이마에 손을 얹었다.“앗!!!”뜨거운 열기에 놀란 정은이 입을 틀어막았다.‘이건... 단순한 열이 아니야. 열기가 심하게 오르고 있어...’“선배님! 제 말 들려요? 정신 좀 차려봐요! 선배님!”하지만 재석은 계속해서 중얼댔다.“정은아... 정은...”단지 이름을 부를 뿐인데, 묘하게 끈적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그 숨소리와 어우러지니, 괜히 귀가 달아오르는 듯했다.‘하... 미치겠네. 이 분위기 뭐야...’정은은 괜히 고개를 숙였지만, 시야에 들어온 건, 벌어진 가운 틈 사이로 드러난 재석의 단단한 상체.잘 정리된 근육, 그리고 땀으로 촉촉이 젖은 피부.‘어?!’‘눈을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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