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오랜만에 손수 무언가를 해보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도겸과 함께했던 지난 몇 년 동안, 옷이나 식사는 스스로 해결했지만, 이런 육체적인 노동은 거의 하지 않았었다. 몇 년 전 도겸이 창업을 시작할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집안 청소만큼은 언제나 청소 아주머니에게 맡겼었다. 페인트 한 통을 다 칠하고 나서 정은은 아픈 허리를 부여잡았다. 몇 년 동안 편안하게 지내왔던 그녀에게는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페인트를 더 가져오기 위해 복도로 나가려던 순간, 정은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발로 페인트 통을 차버렸다. 서둘러 페인트를 닦아내기 시작했지만, 이웃집 문 앞에 조금 쏟아져 버렸다. 걸레를 가져와 닦으려던 찰나, 문이 갑자기 열리며 정은은 깜짝 놀라 사과를 하려고 했다. 뜻밖에도 문 앞에는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너도 여기 사는구나?”“어떻게 여기에 계세요?”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조재석은 바닥을 한번 훑어보고, 정은의 뒤편을 살폈다.“그래서 오늘 이사 온 사람이 너였구나?”정은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네, 오늘부터 우리 이웃이에요.”정은의 말에 재석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가 이곳에 사는 이유는 실험실과 학교와 가까워서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은이 여기서 산다고? 이곳은 여자 혼자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이곳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곳이었다. 재석이 움직이지 않자, 정은은 그가 페인트로 복도를 더럽힌 것을 신경 쓰는 줄로만 알았다.“죄송해요. 조금 흘렸어요. 곧 다 치워요.”정은은 서둘러 페인트를 닦아냈다. 내려갈 때, 재석이 들고 있는 쓰레기를 보고 정은이 말했다.“마침 내려가는 길인데, 제가 대신 버려드릴까요?”재석은 거절하지 않았고, 대신 집에서 접이식 사다리를 가져왔다.“벽을 칠할 거면, 이걸 쓰는 게 편할 거야.”“고마워요.”사다리가 있으니 벽 칠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정은은 오전 내내 집안의 낡은 벽을 모두 칠했다. 집은 금세 깔끔
재석은 한 걸음 뒤에서 정은을 따르고 있었다. 어젯밤의 불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차분함을 되찾은 것 같았다. 차를 몰고 온 재석이 문을 열어주자, 정은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과일 가게를 지나칠 때, 정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잠깐만 멈춰 줄 수 있을까요? 2분만요. 과일 좀 사려구요.”“과일?”“네, 교수님 드리려고요.”재석은 핸들을 잡고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정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선배님은 손님을 방문할 때 항상 빈손으로 가시나요?”재석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고 정은은 조용히 엄지를 세우며 감탄했다. ‘역시 대단한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봐?’하지만 이내 재석은 차를 길가에 세웠다....오미선 교수의 집은 서비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환산로에 위치한 작은 양옥집이었다. 서양식과 동양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 집은 단풍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어, 고요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6년 만에 찾아온 이곳에서, 정은은 안절부절 못하며 발밑의 과일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용기가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정은의 마음을 읽은 듯, 재석이 물었다.“내리지 않을 거야?”정은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렸다가요.”재석은 긴장해 하는 정은을 몇 초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먼저 들어갈게.”정은은 재석이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두 번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이맘때쯤이면 백화가 만발해 있었다. 작은 정원에 들어서자 부드러운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정은의 코끝에 스며들었다. 난간 옆에는 주인이 돌보지 못한 듯 시들어 버린 채소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집에 들어가기 전, 정은은 오미선 교수의 목소리를 들었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재석을 따라 걸었다.“교수님.”오미선 교
재석은 여전히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음식은 그저 배를 채우는 수단일 뿐, 맛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없었다.“다 씻었어.”정은이 손질한 홍고추와 청경채를 바라보며, 그것들이 마치 강박증 환자의 손길을 거친 것처럼 가지런히 정리된 모습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왜 웃어?” 재석이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묻자, 정은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먼저 나가 계세요.”“알았어.” 재석은 물기를 닦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은은 상을 가득 채울 만큼의 음식을 만들었다. 맛은 담백한 것을 중심으로, 대부분 오미선 교수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오미선 교수는 감탄하며 식사를 마쳤다. 정은은 자발적으로 설거지를 시작했고, 재석도 주방으로 들어와 도왔다. 따뜻한 불빛 아래 서 있는 재석의 모습이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보였다.정은의 시선에서 보면, 재석의 옆모습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인물 조각상처럼 날카로운 윤곽을 띠고 있었다. 그때 오미선 교수가 문틀 옆에 서서 물었다.“정은아, 너랑 재석이는 어떻게 알게 됐니?”재석은 오미선 교수의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였고, 정은은 오미선 교수가 가장 아끼는 학생이었다. 오미선 교수는 오래전부터 두 사람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먼저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교수님, 손님이 오셨어요!”그 소리에 오미선 교수는 거실로 돌아가자 한 여자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미소 지었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강서정입니다. 전에 병원에서 뵙고, 올해 대학원 티오에 대해 여쭤봤던 사람입니다.”오미선 교수는 알아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요. 일단 앉아요.”서정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교수님께서 요양 중이시라고 들어서, 특별히 보약을 좀 가져왔습니다.”오미선 교수는 티테이블 위에 놓인 선물 상자들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인삼, 녹용, 홍삼 등등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오미선 교수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서정은 계속
말을 마치고, 도겸은 바로 차에 올라타더니 액셀을 밟고 떠났다. 그 모습을 본 수민은 그 자리에서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사람 정말 뭐야?! 쓰레기 같은 놈! 개자식! 진짜 미치겠네!” “내가 말했잖아!” 수민은 옆에 있던 남자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정은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절대!” 남자는 화를 내는 수민을 겨우겨우 달랬다. “그래, 그래, 진정해.” 하지만, 가능할까? 도겸이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니, 이미 계획을 다 세워놓은 게 분명했다. 남자는 수민을 몰래 한 번 쳐다봤다. 수민도 정은처럼 자신에게 그렇게 충실했으면 좋았을 텐데... ‘잠깐! 그건 안 되지!’ 남자는 그런 생각조차 감히 할 수 없었다. ... 차 안에서, 도겸은 전화를 받았다. 기분이 목소리도 차가웠다. “무슨 일이야?” [자기야, 최근에 발견한 맛집이 있는데, 게가 엄청 통통해요.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우리 가서 먹어요, 응?] 서연희의 맑고 밝은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연희는 도겸이 해산물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어서 도겸의 취향을 맞추려 했다. 게다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둘이 연락하지 않아 연희는 마음속으로 불안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런 불안함이 연희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 먼저 전화를 걸었다. 이전에는 대부분 도겸이 먼저 데이트를 계획했고, 연희는 단지 부끄러워하며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승낙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달라졌다. 도겸이 먼저 연락을 하는 횟수가 줄었고, 메시지도 간결해졌으며, 때로는 답장조차 없었다. 물어보면, 바쁘다고 했다. 예를 들면 지금도 그렇다. “토요일? 바빠서 안 돼.” [토요일에 일이 있다면, 일요일도 괜찮아요.] 연희는 핸드폰을 꼭 쥐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바쁘다니까, 이만 끊자.” 말을 마치고, 도겸은 전화를 끊었다. 연희는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마음속의 불안함이 다시 연희를 휘감았다. ‘안 돼
“싫어요.”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얼굴이 붉어지더니 발끝을 세웠다. “오빠랑 조금 더 있고 싶어요.”하지만 연희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도겸은 오히려 연희를 끌어안고 강하게 입을 맞췄다.“헉!” 구경하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환호를 질렀다.“와우, 대박!” “대체 얼마나 사랑하는 거야?”정은은 이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손에 쥔 책을 힘주어 쥐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마음이 아픈 건 여전했지만 표정은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거의 무감각할 정도로.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금연도 금단 증상이 있듯이, 6년을 사랑한 사람을 잊는 것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정은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정은에게는 아직 공부할 책이 남아 있었다.도겸은 인파 속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를 돌려 바라봤고 익숙한 듯한 실루엣이 도겸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바로, 연희의 부드러운 손이 도겸의 손바닥을 파고들며 친근하게 손가락을 엮었다.“뭘 보고 있었어요?”연희의 질문에 도겸은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연희를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주고, 도겸은 떠나려 했으나 연희는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아직 시간도 이른데, 나랑 좀 더 있으면 안 돼요?”도겸은 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지, 주말에 데리러 올게.”가로등 아래, 도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더욱 이목구비가 선명해 보였다. 연희의 눈에 한 줄기 순수한 매력이 흘러들었다. “오빠, 오늘 나랑 같이 집에 가면 안 돼요?”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른이라멘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도겸은 잠시 멈칫하며, 눈 속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넌 아직 어려. 조금만 더 지나서.”연희는 약간 놀랐지만, 마음속으로는 희미한 기쁨이 지나갔다. 도겸이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었다. 눈앞의 즐거움에 급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다.“알겠어. 나 일이
재벌의 정략결혼에서는 남자가 바깥에 두세 명의 여자를 두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집안의 본처만 흔들리지 않으면, 밖에서 누구와 어떻게 놀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서영숙 역시 엄마로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오늘 서영숙은 소정은에게 공식적으로 약속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은의 반응은 감사의 눈물이 아닌 차가운 비웃음이었다.“사모님, 그런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 주시죠. 저는 받을 자격이 없어요.”“그리고 저와 강도겸은 이미 헤어졌습니다. 앞으로 다시 만나도, 우리 그냥 남남으로 지내는 게 좋겠네요.”이전에는 정은이 도겸을 위해 서영숙의 비난을 무조건 참아왔다. 서영숙은 정은의 학력이 낮고, 유학 경력이 없으며, 졸업 후에도 직업이나 경력이 없어서 자신의 귀한 아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정은은 이 미래 시어머니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하려고 애썼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도겸조차도 필요 없게 된 마당에, 어머니 따위가 안중에 있을 리가 없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참, 제가 조언 하나 드리죠.”“뭐라고?”정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말을 그렇게 신랄하게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그리고, 원숭이가 옷을 입어도 결국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걸 기억하시길 바랄게요.”그 말을 남기고, 정은은 태연하게 돌아서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서영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눈동자가 흔들리며 충격에 빠졌다. “방금 뭐라고 했어? 감히 나한테 그렇게 말해? 그게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직도 우리 강씨 집안에 시집올 생각이 있는 거야?!”서정은 자기 엄마의 팔을 잡아 흔들며, 충격에서 깨어난 후 중얼거렸다. “엄마, 언니가 방금 오빠랑 헤어졌다고 했어요?”“흥, 그걸 믿니?”“사실 그렇죠. 오빠랑 몇 번이나 헤어졌다가도 다시 돌아왔잖아요.”결국,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정은은 도겸을 미치도록 사랑했고, 마치 주인에게 충성하는 개처럼 어떻게 내쳐도 떠나지 않았다
“밥은 다음에 먹자. 나 좀 일이 있어서. 나중에 다시 보자.”정은은 선우와의 관계가 꽤 좋아서, 거절할 때도 미소를 지으며 체면을 세워주었다. 선우는 정은의 손에 하이엔드 주얼리 보석함이 들려 있는 것을 보고, 정말로 바쁘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저 핑계가 아님을 알았다. 선우는 한마디 대답을 하며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정은은 이미 도겸을 지나쳐 곧장 떠났다. 또한 단 한 번도 도겸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자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싸늘해졌고, 선우는 몰래 도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는 억지로 분위기를 풀려고 시도했다. “저기 도겸이 형, 정은 누나가 형을 못 봤나 봐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선우가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선우의 말이 끝나자 도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머쓱한 선우는 헛기침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으나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번엔 정말 단단히 화가 났구나, 정은 누나.’“손님, 구매하시겠습니까?” 도겸은 차갑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구매하죠. 왜 안 사겠어요? 제일 비싼 걸로 줘요.” 정은이 관심 없더라도, 다른 누군가는 분명히 좋아할 테니까!...파티 장소는 운계로에 있는 한 단독 주택이었다. 정은이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몇몇이 정은을 알아보자, 눈빛이 복잡해졌다. 예전에는 도겸과 함께 자주 이런 자리에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정은은 친숙한 얼굴이 되었다. 사람들은 정은의 본명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고 그저 도겸의 여자친구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려는 참새 같았다.하지만 최근 그들 사이에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오늘 정은이 혼자 이 파티에 나타난 것을 보니, 그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빛이 더욱 미묘해졌다. 곧 봉황으로 변할 것 같았던 작은 참새가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일까? 6년 동안 애쓴 보람도 없이 결국 버림받은 여자가 된 걸까? 이것이야말로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아니겠는
유민규 비서가 정은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정은은 차에서 내려 감사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옆에 있는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20분 후, 정은이 양손 가득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저 멀리서 재석이 저녁 햇살을 받으며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하늘은 이미 조금 어두워졌지만, 재석의 몸은 주황빛 노을에 감싸여 있었고, 원래도 긴 그림자가 더 길어 보였다. 재석은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고, 마치 어떤 일에 집중한 것처럼 걸어오고 있었다.“오, 또 만나네요.” 정은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재석은 고개를 들어 안경을 살짝 밀며 대답했다. “그러네, 또 만났네.”“저녁 먹었어요? 제가 장을 좀 많이 봤는데, 같이 먹을래요?”재석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 했지만, 정은의 요리 솜씨를 떠올리며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은의 집은 재석이 처음 방문하는 곳이었다. 앞쪽 발코니에는 튤립이 활짝 피어 있었고, 뒤쪽에는 네모난 어항 안에서 두 마리의 붉은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흰색 커튼은 저녁 햇살 속에서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고, 체리 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는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 온화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웠다.유리 테이블 위에는 대학원 시험 문제지와 책이 펼쳐져 있었는데, 재석은 한눈에 문제지에 적힌 답이 거의 모두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뭐 마실래요?”“물만 줘.”정은은 재석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고마워.”“오늘 장을 좀 많이 봐서요. 샤부샤부 해 먹기 딱 좋은 재료들이에요.”정은은 장바구니를 열어 다양한 채소와 한 덩이의 소고기, 그리고 손수 만든 미트볼을 꺼냈다. 그리고 집에는 지난번 남겨둔 소고기 뼈가 있었기에, 담백한 소고기 샤부샤부를 만들기에 딱 맞았다.“선택 문제 하나 틀렸어.”재석이 갑자기 말하자 정은의 시선이 재석의 시선을 따라가 오늘 아침에 푼 시험지로 향했다. 그리고 재석이 말하는 문제가 어떤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 문제는 생물학과 물리학의 교차 학문에 관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았고, 지구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자전하고 있는데!’선우는 또 다른 한쪽을 바라보더니 참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도겸은 한 잔 한 잔 이어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카드놀이도 하지 않고 공도 치지 않았으며 여자가 다가오면 더욱 멀리 피했다.다른 사람들은 혀를 찼다.“우리 도겸이 형 지금 정말 침울해진 것 같아. 보는 내 마음이 다 아프네!”“꺼져, 오글거려 죽겠네! 말 좀 똑바로 할 수 없어? 우리 도겸이는 사랑을 위해 이렇게 된 것이니, 이건 일편단심이라고!”“그래도 여자는 다 똑같지 않아? 돈만 있으면 어떤 여자를 살 수 없겠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선우는 그들이 갈수록 말을 심하게 하는 것을 듣고 즉시 호통을 쳤다.“이제 그만 좀 해. 그딴 말 좀 적게 하고. 너희들은 뭐 이런 상황이 없을 줄 알아!”그들 중에는 심지어 ‘소정은'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선우는 가슴이 떨렸다.그것은 절대로 도겸 앞에서 언급하면 안 되는 이름이었고, 도겸은 듣자마자 미쳐버릴 수도 있었다. 그때 가서 소란을 피우면 정말 수습하기 어려웠다.동건은 연속 몇 판 지자, 카드를 던졌다.“재미없네. 너 무슨 속임수 썼지? 어떻게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거야?”“형은 운이 나쁜 데다가 머리도 좋지 않잖아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야! 전선우, 너 많이 컸다?”선우는 입을 삐죽거렸다.“칭찬으로 들을게요.”동건은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 놀아.”그가 가자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사람들도 자연히 흩어졌다.선우는 카드놀이를 놀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자 술을 마실 흥미도 없었다. 무대 아래는 분위기가 막 뜨거워졌기에, 춤을 춰도 재미가 없어 아예 소파 구석에 틀어박혀 핸드폰을 보았다.그렇게 선우는 현빈이 올린 사진을 보았다.“모임? 누구랑 가족 모임에 참가한 거야?” 선우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는 사진을 클릭하며 맛있는 것이 참 많다고 감탄하려 하다가, 갑자기 사
현빈은 미소가 굳어졌다.계속 사진을 뒤지니, 다음 사진이 바로 그가 방금 찍은 음식 사진이었다.그는 마음이 움직여 SNS를 클릭해 이 사진을 올렸다.[가족 모임.]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렀고, 일부 사람들은 댓글을 달며 소란을 피웠다.[집잔치야?][현빈이 형 또 새 애인 생겼어!][모처럼 SNS에 사진을 올렸는데, 드디어 금융 뉴스가 아니네.][우리 형님 몰래 큰일을 해냈네요][이야, 전에 같이 솔로로 지내기로 했는데, 어떻게 여자 친구 데리고 부모님을 만나러 간 거야?][쯧쯧, 이런 사진을 올리다니, 이제 결혼하려는 거야?]현빈은 사진을 클릭하며 쳐다보다가 갑자기 멈칫했다.그는 저도 모르게 사진을 확대한 뒤, 사진의 오른쪽 구석에서 정은의 반쪽 얼굴을 발견했다.비록 턱과 입술밖에 안 보이지만, 현빈의 친구들은 저마다 홈즈로 변신하여 이 실마리를 발견했다.현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설명하려 했고, 생각하다 또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아무튼 모두들 농담이었으니, 만약 특별히 해석한다면 오히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같았다.이때, 현빈은 갑자기 문자 한 통을 받았다.대학 동창인데 지난번에 그 샤브샤브 가게 사장님이었다.[축하한다, 친구야.][다음에 샤브샤브 먹으러 오면 무료야!]‘됐어, 답장하기 귀찮아.’...밤의 장막이 내리자, 등불이 켜졌다.전선우는 모이자며 동건과 도겸을 불렀다.동건은 처음에 퇴근한 수민을 데리러 가야 한다며 거절했다.그러나 5분 후에 동건은 다시 전화를 했다.[지금 시간 생겼어. 곧 도착할 거야.]선우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에요?”[아, 수민이가 임시로 야근을 해야 한다고 했거든.]그리고 잠시 후 다시 덧붙였다.[오늘 밤을 새워야 한데.]선우는 갑자기 어이가 없었다.‘수민, 수민, 그놈의 수민... 여자친구 생겼다고 자랑은? 진짜 여친도 아닌데.’“형 진짜 조수민에게 반한 거 아니지?”맞은편은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곧 버럭 했다.[꺼져! 내가 그
현빈이 말했다.“이렇게 푸짐한 밥상에, 정은이는 또 이원이 처음이니 같이 사진 한 장 찍을까요?”이 제안에 두 노인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아직 손녀와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이춘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확실히 기념할 만한 일이지.”“현빈아, 너 좀 잘 찍어. 나중에 프린트해서 앨범에 넣을 거야.”현빈은 미소를 지었다.“저 말고 이모님에게 찍어달라고 해야죠.”“허허, 나 좀 봐, 너도 들어와야 한단 걸 깜빡했네...”현빈은 가정부를 불었다.정은은 얌전하게 봉수진의 곁에 서서 웃으며 그녀의 팔을 껴안았고, 옆에는 현빈이 서 있었으며, 가장 왼쪽에는 이춘재였다.“준비되셨나요?” 가정부가 물었다.봉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찰칵.셔터를 누르면서 이 순간이 고정되었다.두 노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정은은 방긋 웃고 있었으며, 현빈도 담담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가정부는 잘 못 찍었을까 봐 몇 장 더 찍었다.두 노인은 사진을 보고 나서 아주 만족스러웠다.가정부는 핸드폰을 현빈한테 돌려줬다.봉수진은 사진을 꼭 프린트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안심하세요. 저도 다 기억하고 있어요.”봉수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현빈은 사진을 보며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이모님의 월급을 좀 올려도 될 것 같은데.’그리고 핸드폰으로 탁자 위의 음식을 몇 장 찍어서야 앉아서 밥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후, 정은은 봉수진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다.이춘재는 수십 년 된 이웃과 산책을 하러 나갔다.멀리서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래, 찾았어! L시에서, 이미 결혼을 했더군...”“무슨 일을 하고 있냐고? 아, 소설을 쓰는 작가야. 미스터리 소설... 참, 꼭 을 읽어봐. 내 딸이 쓴 거야... 들어봤다고? 그럼 잘 됐네! 꼭 봐야 돼!”“오늘 온 그 아이는 내 손녀인데 서비대학교의 대학원생이야. 학술 때문에 바빠서 아직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았어...”“하하... 그래, 하늘이
현빈은 정은에게 문을 열라고 표시했다.정은은 손을 들어 손잡이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그는 줄곧 현빈의 품위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온 모든 것은 여전히 정은의 상상을 초월했다.청아한 디퓨저 냄새가 전해져 왔는데, 정은이 좋아하는 박하향으로 신선하고 쾌적했다.방 배치는 전체적으로 연한 색깔이었다.벽은 베이지색이었고, 나무로 된 바닥에는 부드러운 긴 털 카펫이 깔려 있었다.밟으면 편하고 가뿐했다.아마도 자신이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벽쪽에 특별히 책장을 몇 개 더 추가했다. 책장 앞의 창문 옆에 의자 하나까지 있었다.부드러운 햇빛이 큰 창문을 비추며 책장에 떨어졌고, 생각만 해도 편안했다.뿐만 아니라 방에는 작은 탁자, 정교하고 나른한 작은 소파, 심지어 작은 다탁까지 있었다.커튼을 열면 바깥은 독립된 베란다였다. 멀리 바라보면 하늘, 산, 숲, 풀밭이 있어 마음이 탁 트이고 기분이 상쾌했다.“마음에 들어?”정은은 현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엄청 마음에 들어요.”말하면서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지금의 모든 것이 너무 환상적이네요. 마치...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 이야기처럼, 신데렐라는 공주가 되어 그녀만의 성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정은은 말투가 가벼웠고, 표정이 평온했다.그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놀라움을 느꼈지만, 결코 빠져들지 않았다.현빈은 고개를 돌려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는 신데렐라가 아니야.”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그가 계속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신데렐라는 영원히 연약하잖아. 왕자가 자신을 구하기를 기다리고 있고. 넌 아니야. 넌 자신을 그런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고, 주동적으로 어려움을 파헤치며 자신을 구할 거야.”현빈은 미소를 지었다.“너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겨울 왕국의 여왕 엘사야. 용감하고 지혜롭지.”정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오빠가 날 이렇게 높게 평가할 줄은 몰랐는데요? 눈에 콩깍지라도 씐 거예요?”남자는 웃음을
“좋아요. 방금 들어왔을 때 힐끗 보았을 뿐, 아직 자세히 보지 못했거든요.”봉수진은 허리가 좋지 않아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불편했기에, 정은은 원래 그녀를 모시고 정원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잘됐다 생각하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하늘은 흐렸고, 햇빛은 구름 뒤에 숨어 있다가 가끔 가느다란 빛을 비추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겨울의 J시에서 푸른 식물을 보기 어렵고, 대개 앙상한 가지들뿐이었다. 그러나 이원의 화원은 예외였다.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다양한 꽃과 식물들이 계절과 상관없이 만발했고, 겨울에 가장 선명한 색채를 이루고 있었다. 봉수진은 특별한 취미가 없어 그저 꽃과 식물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원래 이런 일에도 흥미가 없었지만, 이춘재가 봉수진이 점차 침울해진 모습을 보고는 주의를 좀 돌리라고 권한 것이었다. 처음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봉수진은 장갑을 끼고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작은 화원의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정은도 꽃가지를 다듬고 새 흙으로 덮어주는 것을 도왔다. 봉수진은 힐끗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능숙한 손놀림에 감탄했다. 식물의 습성을 잘 알고 있어, 어떤 식물은 물을 많이 주고, 어떤 식물은 적게 주어야 하는지, 어떤 식물은 아예 물을 주면 안 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딱 봐도 평소에 화초를 다듬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우리 정은이는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화초 가꾸는 솜씨도 대단하구나.” 봉수진은 웃으며 말했다.요즘 젊은이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화초를 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할머니께서 너무 잘 가꾸셔서 저는 그저 거들었을 뿐이에요.”정은은 발밑에 자란 말리꽃을 바라보았다. 작은 떨기로 자라난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더 무성하게 자랄 것이었다.봉수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넌 듣기 좋은 말로 나를 달래는구나.”“아니에요, 진짜예요. 이 장미도 정말 예쁘잖아요. 그런데 모양이 조금 이상한데, 마치 배추 같아요.”
“골치 아픈 아이라고요? 왜요?” 이미숙을 이렇게 평가하는 것을 처음 들은 정은은 호기심이 자자했다.“네 엄마는 지금 얌전하고 책 보기 좋아하지만, 어렸을 때 나무에 올라가 새를 잡거나 강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어.”정은은 깜짝 놀랐다.“정말이에요?”“이곳의 복도에 총 68 세트의 가드레일이 있어. 원래는 없었는데, 나중에야 추가한 거야.”“저희 엄마 때문에요?”이춘재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네 엄마가 연못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지 못하게.”정은은 말을 잇지 못했다“어때? 상상 안 가지?”정은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상상할 수가 없네요.”“하하... 이따가 네 엄마 어렸을 때 사진 보여줄게. 다 증거로 남아 있어.”“지금 갈까요?”정은은 두 눈에 빛이 났다.이춘재는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심지어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전화를 받고 돌아온 현빈은 거실에 사람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1층을 낱낱이 뒤졌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고, 주방으로 걸어갔다.“할머니, 할아버지와 정은이는요?”“방금까지 거실에 있었는데?”“지금은 거기에 아무도 없어요.”봉수진이 말했다.“그럼 분명히 다른 데에 놀러 갔을 거야. 그냥 내버려둬. 참, 너도 오늘 야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얼른 회사로 돌아가.”“저 안 가요. 하나도 안 바쁘단 말이에요.”‘아니, 방금 집사가 그러던데. 회사 전화가 집에까지 걸려왔다고.’현빈이 다시 찾기도 전에 이춘재는 이미 사진첩을 든 채로 정은과 함께 위층에서 내려왔다.마침 봉수진도 요리를 마치고 주방에서 나왔다.온 가족이 소파에 앉아 사진첩을 뒤적였다.“이건 네 엄마가 금방 태어났을 때야. 3kg넘는 하얗고 뚱뚱한 아기였지... 이것은 세 살 때 네 고모 할머니가 네 엄마에게 사준 생애 첫 하이힐이고... 이건...”두 노인은 딸을 아주 귀여워했는데, 이미숙이 태어날 때부터 실종될 때까지 수많은 사진을 남긴 뒤, 사진첩으로 만들어 기록했다.그
재석은 계속 입을 열었다. “이거... 옥수수 같은데요?”현빈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몇 번 먹어 봐서 딱 보면 알죠.”‘내가 언제 물어봤다고? 그냥 설명해 버리네. 정말 자기 자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재석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은이는 정말 세심하고 자상하죠. 모든 사람을 배려할 줄 아니까요.”현빈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다들 조 교수님이 과묵하다고 하던데, 말이 꽤 많으시네요?”“말 많고 적음은 상대에 따라 다르죠. 심 대표님도 평소에는 말수가 적은 편 아닌가요? 그런데 오늘은 꽤 말을 많이 하네요. 오고 가는 말이 있어야 예의 아니겠어요?”현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자, 이제 가요.” 정은은 남은 샌드위치를 냉장고에 넣고 찻잔까지 깨끗이 씻은 후 나왔다.고개를 들자 마침 재석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선배님, 오늘도 집에 있었어요?”“응.” 정은을 바라보는 재석의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심 대표님과 함께 외출하려고?”“네, 우리...”“얼른 가자.” 현빈은 자연스럽게 정은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골목에 차를 오랫동안 세우면 또 누가 뭐라고 할지도 모르잖아.”“아, 네! 선배님, 그럼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봐요.”재석은 ‘우리'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귀에 거슬렸다.그는 속으로 피어오르는 의심을 애써 누르며 대답했다. “그래.”가는 길에 정은이 물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언제 돌아오셨어요?”현빈은 앞을 똑바로 보며 짧게 대답했다. “저번 주 금요일.”“잠깐 마트에 들러서 과일 좀 살게요.”“누구에게 줄 건데?”“당연히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께 드리는 거죠.”“그럴 필요 없어. 남도 아닌 가족인데, 뭘 사? 빈손으로 가도 괜찮아.”“그래도 처음 찾아뵙는 건데 그냥 가면 좀 실례인 것 같아서요.”“그게 두 분께 더 거리감을 줄 수도 있어. 내 말 들어.”“알겠어요.”이씨 가문 본가는 유서 깊은 곳으로 호수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정은은 멍해졌다.남자는 잘 재단된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몸에 꼭 맞는 핏이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와 탄탄한 체형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하지만...얼굴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살짝 움푹 패여 두 눈은 더욱 깊고 가늠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자아냈다.현빈은 살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뜨거운 온기가 잔을 타고 손바닥에 전해졌다.“난 차 가리지 않아. 고마워.”“먼저 좀 앉아 있어요. 안에 가서 물건 좀 챙겨야 해서야. 그리고 바로 출발해요.”“알았어.”현빈은 정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맑은 차를 응시했다.예전에 현빈은 농담으로 정은에게 몇 번이나 위층에서 차 한 잔을 대접해 줄 수 있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예외 없이 거절당했다.그런데 지금은 버젓이 집 안에 들어와 정은이 직접 끓인 차를 받아들고 있다니. 손 닿을 거리에서 건네받은 이 상황은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현빈이 수없이 바라왔던 장면이 현실이 되었지만, 그 이유는 두 사람의 관계가 연인이 아니라... 남매처럼 변했기 때문이었다.‘참 아이러니하네.’혀끝에 감도는 씁쓸함을 삼키며 현빈은 시선을 돌렸다.오늘은 영하 3도. 정은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핑크색 패딩에 카키색 캐시미어 니트와 울 스커트를 매치했다. 스커트 길이와 패딩 길이가 비슷해 전체적인 실루엣이 단정하면서도 발랄했다.거기에 롱부츠까지 신으니 젊고 생기 넘치는 분위기가 한층 더해졌다.작은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어제 충분히 쉰 덕분인지 혈색도 좋아 보였다.“다 됐어요, 오빠. 가요.”정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현빈의 심장을 파고들어갔다.간지럽고 짜릿했다.“오빠?”현빈은 정신이 번쩍 들더니 다소 급하게 소파에서 일어섰다.“응, 가자.”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먼저 현관으로 향했다.몸을 돌리는 순간,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옆에 늘어진 손은 서서히 주먹으로 쥐어졌다.현빈은 감정을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정은은 그 뒤를 따르다가 식탁 위에
정은은 전화를 받으며 약간 멍해졌다.저쪽에서는 조용히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왜 그래? 나를 ‘오빠’라고 불렀으면서, 이제 와서 만나기 망설여지는 거야? 아니면...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된 걸 받아들이기 싫은 거야? 그때 했던 말들은 전부 거짓이었어?]“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 내려갈게요.” 정은은 단번에 대답했다.현빈의 말이 맞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됐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저쪽에서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야 현빈은 다시 입을 열었다.[할아버지랑 할머니가 L시에서 돌아오셨어. 네가 최근에 프로젝트를 끝냈으니 시간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 너 데리고 본가에 가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셨어.]이춘재와 봉수진은 L시에 머물면서 점점 그곳에 정이 들었고,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매일 딸을 볼 수 있는 데다 소진헌과 같은 자상하고 든든한 사위가 곁에서 돌봐주니 하루하루가 평온하고 만족스러웠다.그러다 이미숙은 출판사의 초청을 받아 G시에서 사인회를 열게 되었고, 이어서 S시로 날아가 독자와의 사인회에 참가해야 했다.물론 소진헌도 함께 가기로 했다. 출판사에서는 이미 이미숙 가족의 숙박, 식사, 항공권까지 전부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야말로 최상의 경험을 보장해 이미숙이 앞으로 더 많은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출판사는 이미숙을 행사에 초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작 두 어르신은 가고 싶어 하면서도 긴 여행에 노쇠한 몸이 무리일까 걱정했다. 결국 이민이 가장 먼저 반대했다.원래 이미숙은 혼자 G시로 가고 소진헌은 집에 남아 이춘재와 봉수진을 모시기로 했었다.소진헌은 상관없다고 했지만, 두 어르신은 그가 함께 가서 이미숙을 돌봐주길 원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엿보였다.소진헌은 꽤 흐뭇했다. 평생 강단에 서는 것 외에는 자신이 이렇게 중요하게 여겨진 적이 없었기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결국 이미숙도 두 어르신의 뜻을 꺾지 못했고, 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