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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Penulis: 십일
가까이 다가가니, 도겸은 정은의 예쁜 웨이브 머리가 곧게 펴지고, 그토록 좋아했던 그녀의 머리색이 검은색으로 염색된 것을 발견했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하이힐 대신 단순한 하얀 티셔츠 하나만 걸친 채 아주 캐주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예전보다 더 빛나 보였다. 이별의 어두운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이게 연기라면, 도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은이 연기를 정말 잘한다고. 너무 잘해서, 자신을 화나게 한다고. 정은은 도겸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표정은 도겸이 화를 내기 직전의 전조였다.

“히하!”

도겸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네 안목은 별로인 것 같아. 내 옆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보는 눈이 좀 더 높아야 하지 않겠어? 아무나 데리고 다니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

“체면?”

정은은 슬픔이 살짝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도겸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정은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더욱 화가 났다. 이 감정이 점점 그의 영역 의식으로 다가왔다. 정은은 이미 그의 영역 안에 속한 사람이었고, 지금은 필요 없다 해도, 다른 사람의 침범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난 할 일이 있어서 가야 해.”

정은은 도겸이 계속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가? 어디로 갈 건데? 조수민의 아파트? 그게 네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이번에는 각종 증서들이랑 신분증도 챙겨갔던데. 좋아, 한번 해보자는 거지?”

정은은 마음이 아팠다. 도겸의 성격이 나쁘다는 것, 심지어 폭력적이라는 것을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였지만, 이런 말을 직접 들으면 여전히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겸은 그녀의 행동을 단순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은은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스르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먼저, 저분은 내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만난 것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더러운 관계가 아니야.”

“그리고,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네 문제야.”

이때, 정은이 불러둔 택시가 도착했고 정은은 차 문을 열고 택시에 올라탔다.

“기사님, 출발해 주세요.”

도겸은 정은이 정말로 점점 대담해지고 있다는 것에 비웃었다. 3개월 전 그들의 싸움에서도 정은은 이런 식으로 도겸을 위협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예 외간 남자를 데려와 그 앞에서 시위했다.

‘어떻게 감히 내 앞에서 저럴 수 있지?’

이때 갑자기, 부드러운 손이 도겸의 팔을 감쌌다. 스리슬쩍 방청아는 도겸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도겸 씨, 왜 가려고 해요? 사람을 기다리지도 않고...”

짙은 향수 냄새가 나자, 도겸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여자를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허리를 감쌌다.

“왜요? 나랑 같이 가고 싶어요?”

정은이 남자를 찾을 수 있다면, 자신도 여자를 찾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

차 안에서.

정은은 백미러를 통해 남녀가 친밀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서연희 말고도 다른 여자가 있었구나.’

6년 동안 모든 것이 헛된 것 같았다. 택시는 점점 멀어졌고, 도겸은 표정을 바꾸고는 차갑게 청아의 손을 떼어냈다. 청아는 도겸이 왜 그러는지 몰라 다시 붙잡으려 했지만, 도겸은 무정하게 청아를 밀어내고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아니, 도겸 씨! 강도겸! 거기 서!”

청아는 화가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도겸은 차에 올라 시동을 걸며 서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오빠 선보는 중 아니었어?]

도겸은 이를 악물었다.

“오늘 르 프리미어에서 내가 선본다는 걸 정은에게 말한 게 너야?”

[오빠 좀 똑똑하게 행동할 수 없어? 아무 말이나 다 타인에게 하냐고?]

“엄마가 나보고 선보라고 한 거 도와주지도 않고, 정은에게 정보를 누설해 고의로 남자 데리고 와서 날 화나게 했어.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서정은 도겸의 갑작스러운 고함에 깜짝 놀랐다.

[아니, 오빠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이해할 수 없는 말에다가 갑자기 전화가 끊기니 당황스러워졌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서정이 화를 내기 전에 주창성 집사가 선물 목록을 들고 왔다.

“아가씨, 이 선물들로 충분한가요?”

강서정은 리스트를 훑어본 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선물들은 오미선 교수님께 드리는 거예요. 그러니 준비할 때 신경 써야 해요.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되고요. 알겠어요?”

“네.”

...

“아가씨, 이 집은 서비대학교 근처에서 가장 좋은 매물이에요. 채광도 좋고 주변 환경도 좋아서 많은 분들이 빨리 계약하려고 하고 있어요. 더 고민하시면 다른 분이 먼저 계약할 수도 있어요.”

부동산 직원이 열정적으로 소개하며, 정은은 집을 둘러보았다. 집은 크지 않았고, 방 두 개와 거실 하나였다. 10년이 넘은 구축에 비교적 올드한 인테리어였다. 오래되어 낡은 데다가 작았다. 더군다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전통적인 계단식 빌라였다.

그러나 장점도 분명했다. 서비대학교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도서관도 근처에 있다. 교통도 편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채광과 주변 환경이 확실히 좋다는 것이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면, 이집은 정말 좋은 선택이다.

“좋아요, 계약할게요.”

정은은 1년 계약서를 맺었다. 수민이 돌아와 보니, 방바닥에는 캐리어가 펼쳐져 있었다.

“이사 가려고?”

정은은 옷을 정리하며 말했다.

“응, 월세방을 찾았어.”

그러자 수민은 놀란 듯 물었다.

“그 사람이 널 찾으러 왔어? 이번에는 적어도 일주일은 버텼구나. 그 사람 좀 놔둬야 코가 납작해지지. 정말로 자기만 대단한 줄 아나 봐.”

정은은 하던 일을 멈추고 수민과 눈을 마주쳤다.

“수민아, 이번에는 진짜로 강도겸과 끝났어.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수민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6년 동안, 수민은 정은이 점점 도겸을 위해 자신을 숙이고, 빛이 점점 사라지며,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만을 보았다.

아니, 가정주부였고 혼인 신고만 안 했을 뿐 이미 본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정은은 그저 도겸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강도겸 그 녀석이 정말로 정은을 망쳐 놓았다.

“잘했어! 세상에 좋은 남자가 많아. 강도겸 하나뿐인 건 아니야!”

“응응!”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정말 마음먹고 헤어진 거지? 며칠 뒤에 또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은은 시장에 들렀다. 집이 낡아서 벽지가 많이 벗겨져 있었다. 가구들도 세월이 묻어있는 골동품처럼 보였다. 그녀는 우선 친환경 페인트를 사서 집을 다시 칠하기로 했다.

“기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운전기사는 페인트통을 하나씩 트렁크에서 꺼냈고 정은은 감사 인사를 했다.

정은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7층이네. 어쩔 수 없지. 그냥 운동한다고 생각하자.’

벽을 새로 칠하려면, 가구를 모두 옮겨야 했기에 집안을 다시 정리할 좋은 기회였다. 정은은 문을 열어놓고 페인트 통을 하나씩 옮겨왔다. 페인트 통은 무거웠기에, 정은은 두 층을 오르고 쉬고, 두 층을 오르고 또 쉬며, 겨우겨우 모두 옮겼다.

다 옮기고 나자 숨이 가빠져 몇 분간 휴식을 취하고,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고 나니, 체력이 서서히 회복되었다. 정은은 페인트 도구를 들고 벽에 대보고는 소매를 걷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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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은 다음에 먹자. 나 좀 일이 있어서. 나중에 다시 보자.”정은은 선우와의 관계가 꽤 좋아서, 거절할 때도 미소를 지으며 체면을 세워주었다. 선우는 정은의 손에 하이엔드 주얼리 보석함이 들려 있는 것을 보고, 정말로 바쁘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저 핑계가 아님을 알았다. 선우는 한마디 대답을 하며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정은은 이미 도겸을 지나쳐 곧장 떠났다. 또한 단 한 번도 도겸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자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싸늘해졌고, 선우는 몰래 도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는 억지로 분위기를 풀려고 시도했다. “저기 도겸이 형, 정은 누나가 형을 못 봤나 봐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선우가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선우의 말이 끝나자 도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머쓱한 선우는 헛기침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으나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번엔 정말 단단히 화가 났구나, 정은 누나.’“손님, 구매하시겠습니까?” 도겸은 차갑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구매하죠. 왜 안 사겠어요? 제일 비싼 걸로 줘요.” 정은이 관심 없더라도, 다른 누군가는 분명히 좋아할 테니까!...파티 장소는 운계로에 있는 한 단독 주택이었다. 정은이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몇몇이 정은을 알아보자, 눈빛이 복잡해졌다. 예전에는 도겸과 함께 자주 이런 자리에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정은은 친숙한 얼굴이 되었다. 사람들은 정은의 본명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고 그저 도겸의 여자친구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려는 참새 같았다.하지만 최근 그들 사이에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오늘 정은이 혼자 이 파티에 나타난 것을 보니, 그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빛이 더욱 미묘해졌다. 곧 봉황으로 변할 것 같았던 작은 참새가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일까? 6년 동안 애쓴 보람도 없이 결국 버림받은 여자가 된 걸까? 이것이야말로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아니겠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5화

    유민규 비서가 정은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정은은 차에서 내려 감사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옆에 있는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20분 후, 정은이 양손 가득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저 멀리서 재석이 저녁 햇살을 받으며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하늘은 이미 조금 어두워졌지만, 재석의 몸은 주황빛 노을에 감싸여 있었고, 원래도 긴 그림자가 더 길어 보였다. 재석은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고, 마치 어떤 일에 집중한 것처럼 걸어오고 있었다.“오, 또 만나네요.” 정은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재석은 고개를 들어 안경을 살짝 밀며 대답했다. “그러네, 또 만났네.”“저녁 먹었어요? 제가 장을 좀 많이 봤는데, 같이 먹을래요?”재석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 했지만, 정은의 요리 솜씨를 떠올리며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은의 집은 재석이 처음 방문하는 곳이었다. 앞쪽 발코니에는 튤립이 활짝 피어 있었고, 뒤쪽에는 네모난 어항 안에서 두 마리의 붉은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흰색 커튼은 저녁 햇살 속에서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고, 체리 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는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 온화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웠다.유리 테이블 위에는 대학원 시험 문제지와 책이 펼쳐져 있었는데, 재석은 한눈에 문제지에 적힌 답이 거의 모두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뭐 마실래요?”“물만 줘.”정은은 재석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고마워.”“오늘 장을 좀 많이 봐서요. 샤부샤부 해 먹기 딱 좋은 재료들이에요.”정은은 장바구니를 열어 다양한 채소와 한 덩이의 소고기, 그리고 손수 만든 미트볼을 꺼냈다. 그리고 집에는 지난번 남겨둔 소고기 뼈가 있었기에, 담백한 소고기 샤부샤부를 만들기에 딱 맞았다.“선택 문제 하나 틀렸어.”재석이 갑자기 말하자 정은의 시선이 재석의 시선을 따라가 오늘 아침에 푼 시험지로 향했다. 그리고 재석이 말하는 문제가 어떤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 문제는 생물학과 물리학의 교차 학문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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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8화

    웨이터에게 물어본 후에야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다.그러나 다가오자마자 송정후가 쫓아오더니, 더러운 손으로 정은을 잡으려 하는 것을 볼 줄이야. 재석은 다급해지는 바람에 바로 입을 뗐다.송정후는 몸이 굳어졌다.정은은 멍하니 있다가 웃으며 재석을 향해 걸어갔다.“교수님.”재석은 정은이 다치지 않았단 것을 여러 번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돌렸다.“왜 나왔어? 밖은 춥지도 않니?”지금 재석의 말투가 너무 부드러워서, 방금 송정후를 호통친 모습과 그야말로 극과극이었다.“안이 좀 답답해서 바람 좀 쐬러 나왔는데, 뜻밖에도 미친 개를 만날 줄은 몰랐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말걸 그랬어요.”정은은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지금 그녀는 송정후의 코를 가리키며 ‘네가 바로 그 개’라고 말할 뻔했다.송정후는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이때 갑자기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또 누구의 학생이 이렇게 날뛰는지 했는데, 알고 보니 조 교수의 학생이었구나? 어쩐지.”“한동안 못 봤는데, 조 교수는 언제 이렇게 예쁜 여학생을 제자로 삼은 거지? 가르칠 때 몸이, 아니지, 마음이 엄청 편하겠지? 말하자면, 네 곁에는 항상 예쁜 여자가 많았지. 정말 부럽네 부러워.”송정후는 갑자기 비아냥거리더니 재석을 모함했다.올해 초, 두 사람은 같은 국가급 프로젝트를 경쟁했는데, 송정후는 재석에게 졌기에 두 사람 사이가 이미 틀어졌다.그후 또 ‘가장 뛰어난 청년 연구원’ 선정에서 재석과 다투었는데, 송정후는 재차 실패를 거두었다.두 사람은 지금 라이벌과 다름이 없었다.송정후는 H시에 있고, 재석은 J시에 있는데, 두 사람은 일년 내내 몇 번 만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송정후가 수를 써서 체면을 되찾으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지금 기회가 이렇게 찾아왔으니 당연히 잘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송정후는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나는 또 조 교수가 정말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지. 그런데 그저 눈이 좀 높았던 것뿐이었네?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만 손을 대다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7화

    “얘기 좀 해도 되지?”정은은 마음속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되지만, 전 교수님과 같은 분야를 전공하지 않아서요.”“어제 포럼에서 발언할 때, 과학 연구의 매력의 절반은 교차 학문 연구 간의 협력에서 온다고 했잖아? 내가 잘못 기억한 건 아니겠지?”“네.”“하하...”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말 잘하네, 그래서 인상이 정말 깊었어.”정은은 남자의 일부러 웃는 소리에 좀 불편했다.‘선배님이 이런 웃음을 지을 때는 그렇게 듣기 좋았는데...’“에헴! 죄송하지만, 송 교수님. 전 잠깐 나온 것일 뿐이라, 교수님께서 저를 찾으실 거예요.”말을 마치자마자 정은은 떠날 준비를 했다.그러나 송정후는 그녀를 불렀다.“정은아.” 그리고 다시 물었다.“네 교수님은 누구시지? 고경학? 유개훈? 아니면... 조재석?”송정후가 언급한 ‘고경학’과 ‘유개훈’은 모두 오미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정은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죠?”송정후는 미소를 띠며 답했다.“나 다 봤어. 어젯밤 그 섬에서 아주 재밌게 잘 놀던데?”그의 말투는 일부러 무언가를 암시한 것 같았고, 징그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아주 재밌게 잘 놀았다’는 말에 고의로 힘을 주었기에, 아무리 봐도 정은은 불쾌함을 느꼈다.정은은 냉정하게 말했다.“송 교수님, 말씀 조심하세요.”송정후는 웃음을 멈추더니 비아냥거리는 듯 말을 이었다.“하하, 시치미를 떼는군. 오늘 여기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분들 덕분이잖아? 예상도 하지 못했어, 그분들이 널 공유할 줄은.”송정후는 정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그래, 넌 젊고 예뻐서, 학계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라 할 수 있지. 독차지할 수 없는 이상, 차라리 대범하게 나서는 게 좋지 않겠어? 너한테도 이득일 텐데.”송정후의 비웃음이 짙어졌다.“그래, 이 방법이 얼마나 좋아!”정은은 송정후의 웃음을 다시 듣고서야 그 소리가 왜 불편했는지를 알아차렸다. 그 이유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6화

    이 어르신들은 재석이라는 이 인기 있는 인물을 자신의 ‘사위’로 삼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척에게 소개하고 싶었고, 또 어떤 교수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인연을 맺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며, 수많은 시도 속에서 재석의 답변은 언제나 그 한마디뿐이었다.“당분간 그럴 생각이 없어요.”원래 임 교수도 이번에는 말을 꺼내지 않으려 했고, 어차피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오혜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국제 물리 교류회가 벌써 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혜정은 여전히 재석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모든 교수들에게 각자의 ‘정은’이 있었다. 임 교수도 자기 학생들을 위해서 한 번 더 기회를 쟁취하고 싶었다."거절하면 거절했지 뭐, 허허. 거절 안 당한 것도 아니지만, 만약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잖아?"임 교수는 ‘당분간 그럴 생각이 없어요’라는 말을 들을 준비를 했지만, 뜻밖에도...“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너무 놀란 임 교수는 재석이 떠났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누구를 좋아하는 거지?’...한편, 정은은 오미선을 따라 몇몇 교수들과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서 있었다.오미선은 정은이 지루해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했다.“배고프지? 가서 뭐 좀 먹어.”“네.”교수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는 없었지만, 전공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야기하다가 결국 화제는 집안 이야기로 흘러갔다.‘역시, 노부인들이 모이면 이런 얘기는 피할 수 없지.’정은은 곧장 그 자리를 떠났다.‘이런 얘기는 내가 듣기엔 좀 너무 과하잖아.’술장과 디저트 코너를 한 바퀴 돌면서, 정은은 따뜻한 음료를 한 잔 마시며 과자도 몇 개 먹었다.‘음, 이제야 배부르네.’오미선이 옛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정은은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연회장 뒷문으로 향했다.밖에는 작은 화원이 있었는데, 밤바람이 서서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5화

    밤은 깊어졌고, 달빛이 휘영청 밝았다. 만찬은 호텔의 가장 큰 연회장에서 열리며, 참석자들은 잠시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 후 바로 올 수 있게 했다. 레드카펫도, 꽃도, 고급 차도 없고, 열어놓은 술장과 음식 코너만으로 만찬의 분위기가 조금 느껴진다. 대부분 남성들은 양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간단한 셔츠를 입고 이번 만찬에 참석했다. 상대적으로, 만찬에 참석한 여성들은 좀 더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머리는 깨끗이 감은 데다가 옷차림도 단정했다. 캐주얼한 정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한복을 입은 사람도 있으며, 일부 교수들은 새로운 한복을 곁들은 패션을 선호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남자 교수는 여자 교수보다 훨씬 더 많았다. 물론 젊은 사람들도 많았다. 대부분은 자신이 따르는 교수나 연구원을 따라 참석한 이들로, 이번 만찬을 통해 학문적 시야를 넓히고 싶어했다. 정은은 초대장을 들고 재석과 함께 연회장에 들어섰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수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오미선은 먼저 도착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재석은 여전히 양복을 입었고, 너무 격식을 차린 느낌보다는 약간 캐주얼한 디자인이 가미되어 있어 좀 더 자유롭고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 정은은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을 위해 립스틱을 발랐고, 카멜색 외투에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단순했지만, 엄청나게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 오히려 돋보였다. 너무 젊어서 이런 만찬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믿는 이가 대부분이었고, 또한 정은이 학문과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도 드물었다. 재석은 살짝 기침을 하며 담담한 눈빛을 던졌다. 그 시선에 압박감을 느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정은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오미선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긴장돼?” “조금이요.” “걱정 마, 이따가 내가 사람 소개해줄게.” “좋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4화

    “이건 뭐죠?”정은은 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감정을 억누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스태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정은 씨, 오늘 저녁 학술 만찬에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정말 뛰어난 연구자시네요.”그 말을 끝으로 스태프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정은은 손에 든 초대장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지더니, 놀람과 당황이 스치고 지나간 끝에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매년 열리는 정상희의가 끝나면 ‘학술 만찬’가 열리는데, 포럼 기간 동안 뛰어난 성과를 보인 연구자들이 초청된다.그 만찬의 입장권이 바로 이 붉은 초대장이었다.오미선과 재석처럼 뛰어난 학자들은 포럼 첫날에 이미 초대장을 받았다.예년처럼 초대장 한 장으로 본인 외의 다른 한 사람만 초대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았다.오미선은 정은과 미리 약속해두었다.“포럼 마지막 날 밤, 너 나랑 같이 가자.”정은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그런데 다음 날, 재석이 또 찾아와 물었다.“나랑 같이 갈래?”‘앗!’정은은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교수님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요.”“그렇겠지.”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오 교수님이 초대장을 받으셨는데 널 안 데려가실 리 없지.”사실 정은도 의아했다.애초에 재석은 수지를 데리고 포럼에 참석했으니, 당연히 그녀와 함께 만찬에 갈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자신에게 물어보다니.‘만약 내가 동의한다면, 이수지 선배는...’‘어휴, 생각만 해도 괜히 민망해지네.’그런데 이번엔 정은이 자신의 성과로 초대장을 받았다.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들뜨지 않을 수도 없었다.비록 초대장은 별거 아니지만, 정은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이건 ‘소정은’이라는 이름 자체가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뜻이고, 단순히 ‘오미선의 제자’라는 이유로 인정받은 게 아니란 것이다....하지만 수지는 운이 그리 좋지 않았다.포럼 내내 존재감 없이 지냈으니 당연히 단독 초대장을 받을 리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재석이 초대장을 가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3화

    정은은 정말 조개를 주웠다.무슨 조개인지 모르지만, 보랏빛에 주황색이 섞여 있어서 정말 예뻤다.그녀는 기뻐해하며 재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선배님! 이리 와서 봐요!”마치 보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당장이라도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재석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정은의 곁으로 다가갔다.정은이 손바닥을 펼치자, 조개 하나가 드러났다.“예쁘죠?”재석은 정은의 들뜬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네.”“그럼... 신발 벗고 같이 놀아볼래요?”남자는 순간 놀란 듯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니. 다음에.”정은은 억지로 설득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봐, 정은이도 다음에 나와 같이 바다에 올 거라 생각하고 있잖아.'두 사람은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닷물이 때때로 정은의 종아리까지 차올랐다.재석은 해변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선배님, 계속 걸어가면... 끝은 어디일까요?”정은은 뒤로 걸으며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고개를 돌려 물었다.여유롭고 편안한 자세였다.재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해변의 끝은 모래사장이고, 모래사장의 끝은 바다겠지.”정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정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웃음을 터뜨렸다.“난 또 선배님이 정색하면서, ‘해안선은 해양과 육지의 경계선이고, 대조평균고조면을 기준으로 정의돼. 조석이나 풍랑에 따라 달라지는 고정되지 않은 선이 아니라, 띠처럼 형성되는 공간적 개념이지. 물리적으로 접근하면 말이지...’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요.”그녀는 재석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진짜 베테랑 학자처럼 그럴듯한 모습을 보였다.재석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이미 답을 다 생각해놓고, 나한테 왜 묻는 거야? 그래도 듣고 싶다면 물리학적으로도 설명해줄 수 있어.”정은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바닷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몇 가닥이 뺨을 스쳤다.“아니에요. 난 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2화

    무엇보다 생명과학 분야는 오미선의 대표적인 인맥 기반이었다.누구나 정은이라는 젊은 후배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선보이기 마련인데, 그것도 다 같은 전공에서 이어져온 인연 덕분이었다.우수한 학생을 싫어할 선생님이 어디 있겠는가?비록 정은이 직속 제자는 아니더라도, 생명과학계에서 보기 드문 유망주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그다음은 물리학 분야였다. 다른 요소를 다 떠나서, 재석의 신뢰와 명성만으로도 정은은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이 친구는 소정은이라고, 오미선 교수님의 제자예요...”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지인들에게 소개했다.말하는 도중, 자연스레 두 사람의 관계가 언급되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 어떤 악의도 없었다.“난 재석이 누굴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는 거 처음 보네. 오늘 제대로 구경을 좀 하는구나, 하하하!”재석은 차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전에 오 교수님 밑에서 공부했거든요. 정은이랑은 사실 선후배 사이고요. 그게 뭐 문제 될 거라도 있나요?”“아니! 전혀. 네가 좋다면야 뭐든 좋은 거지.”재석은 어이가 없었다.수지는 기회를 엿보며 조심스레 다가가려 했지만, 재석의 소개도, 옹호도 없이 혼자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조롱거리 같았다.국제 영화제에 자비로 입장해 레드카펫에 슬쩍 올라가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플래시가 아무리 번쩍여도, 그것은 수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오전의 네트워킹 세션이 끝나고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었다.오후에는 참석자 전원이 버스를 타고 한 어촌 마을로 이동했다.이곳은 M시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어촌’으로 불린다.10여 년간의 보호 및 개발 정책을 통해 전통 어업 기반에서 관광 및 체험형 마을로 점진적인 전환에 성공했지만, 가능한 한 어촌 고유의 생활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이처럼 수준 높은 포럼이 열릴 때면, 지역 지자체에서는 인문학적 탐방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곤 한다.일종의 힐링이자, 참가자들에게 새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1화

    복도에서, 오미선은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재석은 팔에 걸쳐 있던 정은의 숄을 건네주며 말했다.“괜찮아?”정은은 재석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숄을 받으며 웃었다.“걱정 마요. 나 안 취했어요.”“그럼 다행이네.”“선배님, 오늘 오전에 고마웠어요.”재석은 웃으며 말했다.“나한테 고맙다고? 내가 너에게 질문을 부탁한 거잖아.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 사람은 나지.”“질문은 어렵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도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날 불러줘서 내가 대답할 수 있었던 거예요.”“내가 기회를 준 건 맞지만, 그걸 잡은 건 너야. 그러니까 나보다 너 자신에게 고마워해야지.”정은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나 자신에게요?”“그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평소에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집중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 모든 시간에 감사하면 돼. 정은아,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는 거야.”“네, 맞아요.”“이제 들어가. 오늘 일찍 쉬고, 내일 하루 더 남았으니까.”“네.”재석은 정은이 들어가는 걸 지켜본 뒤, 그녀가 문을 꼭 닫은 걸 확인하고서야 룸카드를 꺼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수지는 문구멍을 통해 이 모든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재석이 정은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굴던 모습,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준 차가운 태도가 겹쳐지자, 수지는 입술을 거의 깨물 뻔할 정도로 질투를 느꼈다.그때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수지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잽싸게 집어 들었지만, 화면에 뜬 이름은 ‘손태민’이었다.그녀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핸드폰을 침대에 내던졌다.“왜 또 쟤야? 정말 짜증나 죽겠네!”“하루 종일 연락을 하다니, 지치지도 않나 봐!”수지는 차갑게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계속 울리는 진동음을 그대로 두었다. 결국 화면은 꺼졌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고는 눈을 감았다.그 전에,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래, 이제 실컷 울려봐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0화

    “하하... 그래! 당연하겠지!”“어머, 말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군. 미선아, 서 있지 말고 얼른 앉아!”“정은이도 함께 앉아야지...”정은은 이런 학계의 비공식적인 자리엔 처음이었고, 평소 근엄하기만 했던 교수나 학자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친구들끼리 주고받는 유쾌한 농담, 어쩌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오가고, 흥분하면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고, 기쁘면 호탕하게 웃는 모습들이 그저 재밌을 뿐이었다.연회가 이어지는 중, 오미선은 보기 드물게 먼저 잔을 들었다.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건 정은을 위한 행동이란 것을.정은도 그걸 알았기에, 몇 잔은 기꺼이 받아 마셨다.술잔이 세 바퀴쯤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한 베테랑 교수가 정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둘은 전공 이야기에서 시작해, 꿈에 대한 이야기, 논문, 실험 이야기도 나누며 점점 대화를 깊이 이어갔다.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교수의 눈빛에는 감탄과 호의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하하하... 역시 젊은 세대는 다르다니까. 새로운 머리가 참 잘 돌아가네! 내 제자 중엔 왜 이런 애가 하나도 없는 거야? 아이고, 사람은 비교하면 안 된다더니, 진짜 열받네!”그러더니 오미선을 바라보며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오 교수, 이런 학생을 어디서 발굴한 거야? 왜 좋은 인재는 전부 너한테만 가는 거지?”“정말 우리에겐 숨통도 안 틔워주는구나.”오미선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글쎄... 아마 내가 보는 눈이 좀 있는 모양이겠지? 한눈에 알아봤으니까? 어쩔 수 없어. 나도 이렇게 귀한 인재는 딱 보면 알겠더라고.”농담인 줄 알면서도 그 교수는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였다.“내가 네 제자 데려갈 것도 아닌데, 누가 보는 눈이 없다는 거야?”옆에 앉아 있던 다른 교수가 못 참고 끼어들었다.“고 교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지난번엔 누가 자긴 눈도 안 좋고 나이도 많다고, 제가 2년간 아껴둔 와인을 억지로 가져가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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