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이 연재준을 열렬히 사랑했을 때 그에게 그녀는 이용해 먹기 좋은 도구에 불과했다.그녀가 목숨을 잃을 뻔했던 상황에서도 그는 관심 한번 주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사랑을 그만두기로 했다.연재준은 매사에 차분하고 이성적인 그녀가 싫었다. 자고로 여자란 남자에게 기댈 줄도 알고 약한 모습도 보여줘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녀에게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눈을 반짝이며 웃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하지만 그 미소가 향한 곳은 그가 아니었다.그녀가 결혼하던 날, 대기실에 그가 찾아왔다. 그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하얀 발에 유리구두를 신겨주며 애원하듯 말했다.“이 결혼 무효야. 나랑 여길 떠나자. 분명 우리가 먼저 만났고 사랑했잖아….”
View More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쓰는 것도 이상해 보여 이승연은 마스크를 벗으려 했다.하지만 이혁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못 벗게 막았고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중에 문이 열렸다.이혁재가 고개를 돌리자 마중 나온 사람은 오성민이 아니라 가정부였다.“두 분은...”이혁재가 침착하게 말했다.“오 변호사의 사무실 동료입니다. 오 변이 많이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아이고, 아니, 걱정돼서 병문안 왔습니다. ”가정부가 말했다.“오 변호사님 이제 여기 안 계세요.”“여기 안 계신다고요?”오성민은 비록 지병이 있다는 핑계로 보석 신청했지만 신주시를 떠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그럼 지금 어디에 계시죠?”“그건...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오 변호사님은 한동안 집에 안 들어오셨어요.”이혁재가 더 물어보려 했지만 이승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하고 차로 돌아갔다.이혁재는 짧게 자른 머리를 만지며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어디 갔는지도 모르고...못 만나면 할 수 없지. 돌아가자.”그는 이승연이 오성민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매우 만족했다.이승연은 아무 말이 없었고 이혁재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차를 몰았다.가는 길에 이혁재는 이승연을 흘깃 훔쳐보았다. 그녀는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그러다가 길목에서 이승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로데오거리로 가.”“거긴 왜?”이승연이 대답이 없었지만 이혁재는 순간 그곳이 어딘지를 떠올렸다.“로데오 거리? 거기 누나 졸업 후에 찾은 첫 직장이잖아?”문제는 그곳은 오성민의 첫 직장이기도 했고 게다가 두 사람은 그 근처의 오피스텔에서 같이 동거를 했었다.“그럼 오성민이 거기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이승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혁재는 숨이 턱 막혔다.“안 가!”아내를 전 남자 친구와 동거했던 곳에 데려가 전 남자 친구를 만나게 하다니,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녀의 말대로 할 리 없었다.이승연은 덤덤하게 말했다.“차를 세워. 나 혼자 택시 타고 갈게.”이혁재는 길가에 차를
“나쁜 놈에겐 당연히 그에 맞는 방법을 써야지. 내가 월영 씨를 도와 해성 그룹을 약화하는 건 결국 오성민의 힘을 약화하는 거야. 난 오성민이 망하고 망연자실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야.”이혁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이승연이 말했다.“해성 그룹은 연 대표의 것이기도 해. 해성에서 계속 문제가 발생하면 해운 그룹의 주식에도 영향이 갈 텐데.”이혁재가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재준이는 신경 쓰지 않을 거야.”이승연이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찡그리자 이혁재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가 반 그릇 정도 밥을 먹은 걸 보고 더욱 싱글벙글해졌다.‘오늘 반찬 맛있나 보네. 흠, 이야기를 들려주니 누나 식욕도 좋아진 것 같고, 내일도 더 노력해야지.’이혁재가 말없이 부드러운 계란찜을 떠주자 이승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너는 왜 안 먹어?”“누나가 먹고 남은 걸 먹을 거야.”그는 참 많이 변했다.재벌 집 귀공자가 남은 음식을 먹겠다니.이승연은 배가 부르자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다시 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내 메이크업을 고친 뒤 일어나 문밖으로 향했다.이혁재가 급히 뒤돌아 물었다.“여보, 어디 가?”이승연이 대답이 없자 이혁재는 밥을 두 입 떠먹고 서둘러 따라가며 물었다.“어디 가는 건데? 내가 데려다줄게. 나는 지금 누나 운전기사잖아.”차에 탄 후 안전벨트를 매고서야 이승연이 입을 열었다.“오성민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혁재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오성민 그 자식을 만나러 간다고? 안 돼, 난 반대야.”그는 예전부터 오성민에게 더 이상 이승연의 얼굴을 보여줄 생각이 절대 없다고 말했다. 오성민은 그녀를 만날 자격도 없고 이승연도 더 이상 눈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이승연이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아니라 네가 만나러 가는 거야.”“내가 그놈을 왜 만나?”“지금 같은 회사에 있으니까, 사회적으로는 동료이자 파트너야. 그가 이런 큰 사건을 겪었으니 네가 총괄 책임자로서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이승연은 이혁재가 가져온 반찬과 국을 보고 잠시 침묵했다. 그냥 요리사에게 맡기면 되는데 그가 한 시간 넘게 이 일에 매달리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그녀는 물었다.“이젠 백수인 거야?”이혁재가 당당하게 말했다.“그래, 그래서 할 일도 없어. 누나가 나를 먹여 살려야 해. 만약 날 집에서 내쫓으면 나는 길에서 굶어 죽을 거야.”그는 그릇을 들고 뽀얗게 우러난 곰국을 푸기 시작했다.“여보, 따뜻할 때 먹어.”이승연은 아까 보고 있던 해성 그룹 관련 서류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이 서류는 최근 3년간 오성민이 담당한 업무 내용을 담고 있어 꼭 봐야 했다.하지만 글로 적힌 것보다 사건 당사자가 직접 설명해 주는 게 더 정확하다 생각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3년 전 네가 집안이랑 갈등이 있고 난 뒤로부터 해성 그룹에 들어가서 총괄 책임을 맡았지...”이혁재가 눈을 살짝 흘기며 말했다.“아니, 우리 집안이랑 갈등을 빚은 후가 아니라 누나가 식물인간 판정을 받고 깨기 어렵다고 했을 때였어. 지욱이는 내가 망가질까 봐 걱정돼서 할 일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고 그래서 해성으로 갔던 거야.”집안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녀 때문이었다.그는 이처럼 계속 틈틈이 이승연에게 그녀가 없으면 그는 살아갈 수 없음을 알리고 있었다.이승연이 말이 없자 이혁재가 이어 말했다.“이것도 사실 월영 씨가 나에게 해준 제안이었어.”이승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월영이가?”이혁재는 밥을 먹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밥 먹으면서 들어.”이승연은 잠시 멈췄다가 숟가락을 들어 국을 한 모금 맛보았다.3년 전부터 그가 요리할 줄 안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의 요리 실력은 더욱 발전한 것 같았다.보아하니 이 3년 회사와 집에만 있고 노는 데는 그닥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활기 넘치는 20대 남자가 술집이나 클럽에 있는 대신 긴 시간을 주방에서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연의 마음속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이혁재는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알아차
이혁재는 정말 그녀가 그리웠다.이 3년 동안 그는 점점 말수가 적어졌고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오직 집에 돌아와 이승연의 침대 옆에 앉았을 때만이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그는 아침에 뭘 먹었는지, 출근길에 뭘 봤는지 그리고 고객이 얼마나 멍청하고 오성민은 얼마나 역겨운지, 집에 돌아올 때 유리창에 떨어지던 빗방울이 와이퍼에 의해 깨끗하게 닦여지는 모습이 얼마나 치유되는지까지 세세하게 이야기했다.그는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고 그녀가 대답해 주길 바랐다.이혁재의 손이 이승연의 허리에 닿았고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그녀의 허리 위를 쓰다듬었다.이승연은 허리 쪽에서 무언가에 닿는 느낌이 나자 본능적으로 잡으려 했고 그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깨닫고 몸이 굳어져 그를 밀어냈다!그리고 반사적으로 한 발짝 물러나며 세면대를 잡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이혁재의 입술은 붉게 물들었고 눈빛도 더욱 짙어졌다.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이제, 느낌이 좀 오지 않아?”“...아니!”이승연은 축축해진 입가를 닦아냈다.“괜찮아, 몇 번 더 하면 느낌이 올 거야. 어차피 난 누나한테 반응하고 있으니까.”이혁재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아내에게 감정을 느끼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만족스러워했다.“봐봐, 내가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몸이 이렇겠어?”“...알 게 뭐야!”이승연은 더 이상 그와 이 주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나가, 방해하지 말고.”“양치하려는 거야?”“당연하지.”“나도 해야 하는데, 여기 세면대는 원래 2인용이니까 각자 한 쪽씩 사용하면 서로 방해 안 될 거야.”이승연은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이혁재는 그녀 옆에 머물며 따라다니고 싶어 했다.그녀가 어디로 가든, 그는 그곳으로 따라갔다.그녀가 외출하려 하면 그는 운전기사를 자처해 회사까지 데려다주었고, 그녀가 오성민의 사건 파일을 보고 있으면 옆에서 차를 가져다주었
이혁재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누나와 결혼한 이유가 반드시 뭔가를 얻기 위해서여야 해? 그냥 누나를 좋아해서 결혼할 수는 없는 거야?”이승연이 무표정하게 되물었다.“나를 좋아한다고?”“왜? 누나를 좋아하면 안 돼?”이혁재는 다시 물으며 눈에는 거침없는 야성이 서려 있었다.“누나 스스로가 못생기고 몸매가 별로라고 생각해? 아니면 남자한테 매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내가 가출했을 때 머물 곳이 없을 만큼 친구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학교 다닐 때 집 나간 적 있잖아. 그때도 친구들 집에서 잠깐이라도 머물 수 있는데 굳이 누나 집에 와서 있었겠냐고!”이승연은 그의 쏟아지는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무슨 뜻이야?”이혁재가 갑자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좁은 욕실에서 이혁재의 존재감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는 완전히 이승연을 그의 그림자 안에 가둬 버렸고 그녀의 시야는 온통 그로 가득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야.”이혁재는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으며 말했다,“내가 아직 미성년일 때부터 누나를 좋아했고 누나를 원했어. 누나와 키스하고 누나랑 자고 싶었다는 뜻이야.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돼?”“...”이승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그래도 못 믿겠으면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게...처음 누나를 본 건 내가 16살 때였어. 누나가 대학에 합격하고 우리 부모님이 누나네를 우리 집으로 초대했지. 누나는 엄마와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어. 그날 민트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손을 뒤로 하고 걷고 있었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렸고 누나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지.”이혁재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눈빛도 어두워졌다.“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그런 꿈을 꿨어.”이승연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의사는 누나가 식물인간 상태지만 외부 자극에 반응이 있다고 했어. 이 3년 동안 매일 내가 ‘사랑해’라고 말했는데, 들었어?”“...”이승연은 자
이혁재는 이승연이 여전히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핸드폰을 꺼내 보니 비서의 전화였다.“이번 시즌 보너스를 가질 생각이 없는 거야?”“아, 아니에요!”이혁재는 아픈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그럼 이렇게 아침 일찍 전화하는 건 죽고 싶어서 그런 거야?”비서는 울먹이며 말했다.“그게 아니라 대표님. 어제 오성민이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이런 건 바로 알고 싶어하실 것 같아 연락드렸습니다.”이혁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고 원래 피곤했던 눈이 한순간에 날카로워졌다.“뭐라고?”“오성민이 구치소에서 나왔습니다. 지병이 있다는 핑계로 보석을 신청해 허가받았어요.”“어제 일을 지금 알려주면 어떡하자는 거야? 너 정말 보너스 가질 생각이 없는 게 맞구나?”“저, 저희도 이제 막 들은 소식이에요...이제 어떻게 할까요?”“유 대표한테 물어본 후에 결정하지.”전화를 끊고 나서 이혁재는 바로 유월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서가 아침 일찍 잠을 깨운다고 뭐라 하던 그는 이내 다른 사람이 깨든 말든 따질 때가 아니었다.유월영도 결국 이혁재의 전화에 잠에서 깼다.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되어 이제 막 잠들었을 때였다.그녀는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이 대표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죠?”“오성민 그 자식 왜 아직도 살아 있죠?”“그렇게 쉽게 쓰러지면 오성민이 아니죠.”이혁재는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누군가 그의 핸드폰을 잡아갔다.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려 보자 이미 깨어난 이승연이었다.이승연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핸드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그가 법의 빈틈을 이용해 나올 수 있다면 나도 법을 이용해 그를 다시 집어넣을 수 있어.”유월영은 원래 이혁재에게 자신이 엘리자베스 부인에게서 오성민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아냈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승연의 말을 듣고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말했다.“그럼 좋지, 이번엔 언니한테 맡길게.”유월영은 오성민의 일이 이승연이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자극이 되길 바랬고 기꺼이
“아니. 난 안 꺼져.”이혁재는 나가기는커녕 침대에 올라가 이승연을 이불째 안아 품에 안았다.그녀는 많이 말랐다.지난 3년 동안 이혁재는 갖은 방법을 다해 이승연의 건강을 최대한 지키려 했지만, 영양제로만 살을 찌우는 건 불가능했고 이승연은 몸무게가 10킬로 빠진 상태였다.그녀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로, 영양사가 일일 식단을 짜주어 회복을 돕고 있었지만 아직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지금은 봄이라 긴팔과 외투를 입고 있지만 여름에 반소매만 입으면 이승연은 뼈만 보일 게 뻔했다.이혁재는 그녀의 가녀린 팔을 만질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살을 잘라 그녀에게 주고 싶을 정도였다.“누나랑 떨어지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랐는데 난 어디도 가지 않아.”이승연은 계속 그를 밀어냈다. 그저 가볍게 밀어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거부하며 몸을 빼내려 했다.하지만 그녀는 힘이 없었고 이혁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 맞추며 조용히 달래듯 말했다.“또 악몽을 꾼 거야? 법정에서의 그 일은 이미 3년 전 일이야. 이젠 다 지나갔고 그때 당신을 때린 그 나쁜 놈도 법의 심판을 받았어...”이혁재는 약간 볼멘소리로 말했다.“난 그놈한테 손도 대지 않았어. 잘 참아서 법의 심판을 받게 내버려두었어. 누나 말을 듣고 법을 준수하는 모범 시민이 된 거야. 그런데 누나는 칭찬 한마디도 안 해 줘.”이승연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다 지쳐 눈을 감았다.이혁재가 계속 말했다.“배후에 있던 주범, 그 악의 근원인 오성민도 이제 잡혔어. 모든 게 다 끝났으니까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 없어.”이승연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보낸 이혼 서류 못 받았어?”“못 받았어.”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이메일로 보냈는데.”“내 이메일은 오래전에 정지됐어...그리고 누나가 보내도 내가 회사를 가지 않으니까 받지 못해. 그리고 직접 줘도 소용없어. 절대로 열어보지 않을 거니까.”그는 끝까지 발뺌할 생각이었다.이승연은
이승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 장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고씨 가문의 미해결 사건이자 유씨 가문의 목숨으로 지켜진 장부였다. 유월영은 이승연이 두 가문을 위해 정의를 되찾아 줄 수 있기를 바랐고 그녀를 그렇게 믿고 있었다...이승연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유월영에게 약속할 수 없었다.법정에 서는 것도 두려워하는 변호사로서 자신조차 구할 수 없는 자신이 어떻게 유월영을 위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식사를 마친 후, 이승연은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조서희는 이승연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월영아, 승연 언니 다시 괜찮아질 수 있을까? 나는 예전의 엄격하지만 갑자기 웃긴 말을 불쑥불쑥 내뱉던 그 쿨한 언니가 더 좋아.”유월영이 고개를 저었다.“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누구도 진정으로 상대방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으니까.이승연은 6개월이나 품었던 아이를 잃었고 그녀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변호사라는 직업이 파괴되었다.유월영은 바로 이혁재에게 전화를 걸어 이승연의 현재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고, 마지막으로 당부했다.“되도록 승연 언니한테서 눈길을 떼지 마세요. 지금 언니의 모습이 예전 나와 아주 비슷해서 걱정이에요.”이승연이 삶에 대한 의지를 잃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예민하게 감지한 이유는 바로 유월영 자신도 한때 그랬기 때문이었고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다...이혁재는 전화를 끊고 담배를 하나 꺼내 피웠다.한 모금 피우자마자 이승연이 담배 냄새를 싫어한다는 생각이 들어 담뱃불을 끄고 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그는 이승연의 집 아래에서 서성거리다가 집 안의 불이 꺼지는 걸 확인하고 또 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위층으로 올라갔다.이승연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이혁재는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그녀를 살폈다.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다정했다.이승연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그는 소파에 누웠다.그는 아침 6시에 맞춰 진동만 울리도록
유월영과 조서희는 순간 놀라 이승연을 바라봤다.이승연은 음료의 빨대를 잡고 가볍게 휘젓다 입을 열었다.“나는 아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것 같아.”“걷기 시작한 후 다시 로펌에 돌아갔어. 예전처럼 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이혼 소송 하나를 맡았지. 그런데 막상 법정에 서니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고 한마디도 할 수 없더라.”이승연이 웃으며 말했다.“다행히 그 사건은 단지 절차상 개정만 있었고 별도의 변호가 필요 없었어.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변호사 업계의 얼굴에 먹칠을 할 뻔했지.”유월영은 침묵했다.이승연은 한때 법조계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었다. 그녀가 맡은 사건은 거의 패소한 적이 없었고 전설로 여겨질 정도였다. 오성민 조차도 그녀와 비교할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스스로 변호사 망신을 시켰다고 자조하고 있었다.세상이 완전히 뒤바뀐 듯했다.유월영은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심리상담은 받아 봤어?”“받아 봤지.”이승연이 말했다.“몇 가지 약을 처방해 주더라고. 그리고 내 상태가 좋지 않으니 당분간 변호사 관련 일을 접고 치료에 전념하라고 했어.”두 친구의 걱정 어린 시선을 느낀 이승연은 오히려 미소 지었다.그녀는 원래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거의 10년 가까이 변호사로 일했는데 사실 지쳤었어. 이번 기회에 은퇴하고 서류 작업만 하고 법정에는 더 이상 서지 않으려 해. 그게 오히려 좋을 것 같아.”그녀는 두 사람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내가 돈이 많잖아. 직업 하나 잃었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이제는 오히려 개인 시간이 많아져서 여행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음, 한 번쯤 땅끝마을 같은데 운전해서 여행 가고 싶어. 캠핑카에 텐트를 실어서 가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가 있으면 캠핑도 하고, 얼마나 자유롭겠어.”이승연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그러나 유월영은 그녀를 꿰뚫어 보았다.“언니는 10년 전에도 이미 부자였어. 변호사 일을
수술이 끝나 병실로 옮겨질 때까지도 유월영은 자신이 유산으로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그녀를 병실로 데려간 간호사는 인적 사항을 등록하기 위해 그녀에게 물었다.“유월영 환자분, 가족들은 어디 계신가요?”유월영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천장만 올려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간호사가 재차 물었다.“유월영 씨, 가족들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이때, 약품을 정리하던 다른 간호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한테 줘. 그거 내가 입력할게. 환자가 구급차에 실려올 때 신분증이랑 카드 나한테 줬었어. 바로 등록하고 비용 결제하면 된다고. 아마 이 환자는….”유월영은 그제야 입술을 달싹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저는 가족이 없어요.”진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점점 더 진실되게 다가왔다.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깊은 절망감이 찾아왔다.수술을 마친 유월영은 홀로 병원에서 사흘간 입원해 있었다.그 동안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나흘 째 되던 날, 드디어 연재준에게서 전화가 왔다.“유 비서, 무단 결근 3일이면 충분히 휴식하지 않았어? 지금 옷 입고 서덕궁으로 와.”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배경 음악과 여자들의 웃음소리까지 같이 전해져 왔다. 유월영은 지금 입원 중이라고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유 비서.”낮게 깔린 중저음 목소리가 재차 전해졌다.화가 많이 났다는 증거였다.유월영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고 그대로 병원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부랴부랴 서덕궁으로 향했다. 그녀는 가는 길에 차 안에서 화장을 했다.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녀는 대충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카운터로 직행했다.“해운그룹 연 대표님이 계신 방이 어디죠?”고개를 든 어린 남직원은 눈앞의 미모의 연인을 보고 수줍게 웃으며 다급히 길을 안내했다.“연 대표님은 1번 룸에 계십니다. 제가 안내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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