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직장 동료는 진심으로 유월영을 걱정해 주었다.“월영 씨, 고용 계약서가 한 달 뒤에 만기라면서요? 본사로 못 돌아오면 재계약이 힘들 것 같은데 계약이 끝나면 회사를 나가야 하잖아요. 물론 월영 씨야 유능해서 어딜 가도 환영 받겠지만 해운에 계속 남으려면 본사로 한 번 돌아와서 대표님이랑 잘 얘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재계약이 안 돼서 퇴사했다는 꼬리표가 붙는 건 재취직에도 불리하니까요.”물론 유월영은 이런 문제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와 얘기를 나눌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다.연재준이 안성 지사로 오는 날, 그녀는 공 들여 화장을 하고 하얀색 정장 원피스로 차려입고 아침 일찍 회사로 나가 대기했다.10분 뒤, 정문 입구로 세 대의 승용차가 들어왔다.차 문이 열리고 연재준이 차에서 내렸다. 유월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리려던 찰나, 뒤에서 내리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얼어버렸다.백유진.어딜 가도 데리고 다닌다더니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가서 공손히 인사했다.“대표님.”연재준은 덤덤한 시선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말없이 그녀를 스쳐지나 지사 사장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유월영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늘 입던 브랜드의 검은색 정장에 위트 있는 넥타이까지 여전히 가슴 떨리게 매력적인 모습이었다.백유진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언니, 오랜만이에요.”순진한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유월영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프로젝트 담당자로서 오늘 회의의 업무 진행 보고를 맡았다.해외 고객사 임원도 참석한 자리였기에 유월영은 유창한 영어로 재치 있는 농담까지 섞어가며 회의를 주도해 나갔다. 자리에서 듣고 있던 임원들도 그녀의 센스 있는 표현에 웃음을 터뜨렸다.40분이나 진행된 업무 보고였지만 아무도 따분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를 마치고 내려오자 회의실 안에 뜨거운 박수가 터졌다.연재준도 박수를 치고
그 뒤로 회의실 문은 한 시간 동안 안에서 잠겨 있었다. 격렬한 몸부림이 지나간 뒤, 유월영은 휴대하고 다니던 티슈를 꺼내 책상을 깨끗이 닦았다.청소를 끝낸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연재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옷매무시를 정돈하고 거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셔츠가 살짝 구겨졌을 뿐, 다른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유월영은 바닥에 떨어진 넥타이를 집어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연재준은 평소처럼 턱을 치켜들고 그녀가 넥타이를 매줄 때까지 기다렸다. 유월영은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저 본사로 돌아가고 싶어요.”연재준은 여자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프로젝트 진행하는 동안만 지방에 있으라고. 이제 프로젝트도 무사히 끝났으니 돌아가고 말고는 유 비서가 결정하면 돼.”그렇게 되어 연재준의 지사 탐방이 끝나고 돌아가는 차량에는 한 사람이 더 늘게 되었다.백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연재준에게 물었다.“대표님, 언니도 이번에 저희랑 같이 돌아가는 거예요?”연재준은 서류에서 눈길도 떼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유진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월영에게 말했다.“정말 잘됐어요, 언니! 안 그래도 언니가 출장 가 있는 사이 많이 외로웠거든요!”유월영은 오렌지 계열의 볼터치를 곱게 바르고 자연스러운 아이라인을 그린 소녀 느낌이 충만한 여자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화장 잘 됐네.”남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한듯 안 한듯한 투명 메이크업이었다.백유진은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그들을 태운 차가 신주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때가 넘은 시각이었다. 백유진을 먼저 집에 데려다주라는 연재준의 지시에 운전기사는 번화가로 방향을 꺾었다.유월영이 잠시 야경에 한눈을 파는 사이 차는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회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호화 빌라 단지였다.자연스럽게 차에서 내린 백유진이 차 창 너머로 인사를 건넸다.“대
그 한마디에 유월영은 달은 몸에 찬물을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그 대화를 끝으로 연재준은 밤새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녀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혼전 순결이라!백유진과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건가?유월영은 여전히 연재준 비서의 신분으로 본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수석 비서가 아닌 일반 비서로 직위가 강등되었다.구석진 곳에 위치한 그녀의 자리는 오래 사람 손이 가지 않아 책상 위에는 잡동사니와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그녀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돌아온 터라 아직 지원팀에서 청소를 하지 않은 듯했다.당황할 법도 하지만 유월영은 담담히 다가가서 스스로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사무실에 도착한 백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다급히 달려왔다.“언니, 미안해요. 아침에 일찍 와서 청소를 해놓으려고 했는데 차가 좀 막히는 바람에 늦었네요. 언니 자리는 원래 제가 있던 자리니까 그 자리로 옮길래요?”유월영은 젖은 물수건으로 책상을 닦으며 덤덤히 말했다.“사무실에 원래 내 자리가 어디 있어? 대표님이 거기가 이제 네 자리라고 하셨으면 거긴 이제 네 자리인 거야. 신경 쓰지 마.”백유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정리 도와드릴게요.”유월영이 말이 없자 백유진은 잡동사니를 담은 박스를 창고로 옮긴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돌아오는 길에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가려는데 여직원들이 안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유 비서님 돌아오신 거 들었어?”“알아. 어제 대표님 차를 타고 왔다면서. 오늘 아마 출근하셨을걸?”“역시 대표님은 유 비서님을 놓지 못하셨나 봐.”안으로 들어가려던 백유진은 걸음을 멈추었다.“솔직히 능력으로 따지면 유 비서님은 누구랑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분이지. 하지만 그건 일적인 부분이고. 대표님 요즘 백유진 씨랑 만난다 하지 않았어?”다른 동료가 급하게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다대며 말했다.“쉿! 마케팅 부서에서 입 잘못 놀렸다가 잘려나간 직원 얘기 못 들었어?”그 여직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유월영은 긴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겨 근처 약국으로 향했다.계산하고 약국을 나오려는데 연재준 모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월영이니? 요즘 어떻게 지내? 왜 요즘은 집에도 안 와?”유월영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사모님, 저는 잘 지내요. 최근 회사 일이 좀 많아서 연락도 못 드렸네요. 바쁜 일은 다 해결했으니까 주말에 집에 한번 방문할게요.”“바쁜 일 해결했으면 주말까지 기다리지 말고 오늘 저녁에 재준이랑 집으로 와. 내가 맛있는 밥상 차려놓고 기다릴게.”유월영은 웃으며 말했다.“네. 대표님께 한번 말씀드려 볼게요.”윤미숙이 타이르는 말투로 말했다.“대표님이 뭐야, 대표님이. 너희가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몇 달 전에 재준 아빠랑 너희 결혼 언제 시켜주냐고 의논했는데 너희도 이제 슬슬 결혼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가 오지 않았어?”그 말에 당황한 유월영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삐끗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결혼식? 우리가?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유월영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윤미숙은 연재준의 계모였다.고용인들이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들은데 따르면 해운 오너 일가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고 했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연재준은 가족들과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고 거의 연락을 안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들의 소식이 궁금했던 연 회장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유월영에게 안부를 묻고는 했는데 그렇게 자주 연락하다 보니 정이 들게 되었다.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의 가족들이 며느리감으로 자신을 대한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단지 그녀의 능력을 높게 사서 다른 직원들보다 조금 더 예뻐한다고 생각했는데….유월영은 당황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사모님, 저 지금 고객사 미팅 가는 중이에요. 저녁에 대… 재준 씨랑 같이 저택으로 갈게요.”“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전화를 끊고 유월영은 한참 정신을 차릴 시간을 가진 뒤에야 택시를 잡아타고 미팅 장소로 향했다.그녀가 멍 때리고 있는 사이 길가에 세워진 차에서 한
퇴근할 때가 되어 유월영은 연재준의 사무실로 찾아갔다.“사모님께서 점심에 연락이 오셨어요. 저녁에 본가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본가에 안 간지 벌써 6개월도 더 되지 않았나요?”연재준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평소에도 우리 가족들이랑 자주 연락해?”“아니요. 매번 사모님께서 먼저 연락을 주시면 받았어요.”유월영의 대답에 연재준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차키를 그녀에게 던지며 말했다.“운전은 유 비서가 해. 운전기사는 유진이 집까지 데려다줘야 하니까.”유월영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에게 절실히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녀는 그의 답이 어떨지 대충 알고 있었고 그 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유재준의 본가.윤미숙은 부지런히 유월영의 접시에 맛있는 반찬을 담아주었다.“왜 이렇게 말랐어? 안색도 이제 보니 안 좋고. 혹시 어디 아파?”연재준은 집에 온 뒤로 시종일관 싸늘한 표정을 유지했다. 들어올 때 유 회장에게 인사를 건넨 것 말고는 그는 여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아프기는요. 새로 산 립스틱을 발랐는데 색상이 제 피부색과 안 어울리나 봐요. 돌아가서 버려야겠어요.”해운 그룹 비서실의 에이스, 못하는 게 없고 뛰어난 화술까지 겸비하여 모두의 사랑을 받는 존재. 그녀는 그의 부모님에게도 아주 많이 사랑 받고 있었다.연재준은 갑자기 오전에 백유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다 유월영을 좋아한다는 말. 동료들은 물론이고 고객사 직원들, 심지어 나이 드신 어르신들까지 그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녀는 그에게 온 뒤로 그의 일과 생활 모든 것에 개입했다. 그리고 일이면 일, 인간관계 모든 걸 훌륭하게 처리했다. 그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둘이 언제 결혼하냐고 재촉할 정도였다.연재준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아니나 다를까, 윤미숙은 또 결혼 얘기를 꺼냈다.유월영은 여기 오기 전까
유월영은 차를 세운 뒤 조용히 그에게로 다가갔다.“대표님.”길이 어두컴컴해서 남자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들었음에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유월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멀지 않은 곳에 24시간 슈퍼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슈퍼에서 김밥 한 줄을 구매한 뒤, 레인지에 가열해서 연재준에게로 가져왔다.“저녁에 얼마 드시지도 않았잖아요. 자꾸 그러시면 속 버려요.”연재준은 말없이 그녀에게서 김밥을 받았다.유월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리 회장님 말씀이 과했다지만 좀 참지 그랬어요. 회장님 고혈압 도지면 위험한 거 아시잖아요. 작년에도 병원에 한 달이나 입원해 계셨는데….”연재준은 갑자기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김밥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녀를 끌고 차로 들어갔다.모든 동작이 그렇듯 당연하고 거침이 없었다. 유월영은 하늘이 빙 도는 느낌이 들더니 정신을 파는 사이 어느새 남자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왔다.당황한 그녀가 그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대표님!”비록 좁은 골목이라고는 하지만 길가는 행인들도 있었고 이런 장소에서는 싫었다.“이러지 마세요, 대표님! 여기서는 싫어요.”연재준은 그녀의 두 손을 꽉 잡아 머리 위로 고정한 채,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유 비서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추느라 거절도 못하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남자의 거친 숨결이 그녀의 민감한 귓가를 자극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꾹 참고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모두가 저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요. 대표님은 저 싫어하시잖아요. 대표님은 백유진 씨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백유진 씨랑은 진심이세요? 아니면 그냥 잠깐의 호기심인가요?”그녀는 줄곧 연재준이 백유진에게 흥미를 가지는 정도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날 그가 했던 말은 그녀의 모든 예상을 뒤엎었다.혼전 순결을 지켜
다음 날, 유월영은 연재준과 함께 스미스를 대동하고 신주에 있는 카누 공장으로 갔다.투자를 주 항목으로 하는 해운그룹은 국내 최고의 투자 회사 중 하나였다. 해외에도 많은 지사를 두고 공격적인 투자를 진행하면서 투자 업계에서 그들이 가지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회사의 이미지를 위해 그들은 종종 국가에서 지원하는 산업에 투자하기도 했다.스포츠 종목으 그 중 한 가지였고 카누 제작 사업에 대한 투자도 그러한 이유에서 시작했다.유월영은 어제의 상실감을 잊고 회사의 주요 책임자로서 연재준의 옆을 지키며 완벽한 비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스미스의 곤란한 질문에 대답하는 쪽은 주로 그녀의 담당이었고 필요하지 않은 말은 아꼈다.거대한 공장 내부에는 이미 제작이 완료된 각양각색의 카누가 진열되어 있었다. 공장장의 설명을 들은 스미스는 연신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공장장이 자신 있게 말했다.“길이가 18미터 되는 작은 카누도 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긴 카누를 제작 중에 있습니다. 제작이 완료되면 101미터가 될 겁니다. 우린 이 카누로 기니스 세계기록에 도전해서 세계에 신주 카누 산업을 알릴 생각입니다.”스미스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101미터나 되는 카누요? 그건 웬만한 건물 하나의 높이잖아요. 그런 거대한 배가 바다에 뜨면 정말 가관이겠는데요? 제가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봐도 되겠습니까?”공장장이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 사실 우리의 머리 위쪽에 있습니다.”고개를 들자 허공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선박이 보였다.공장장이 말했다.“공간을 너무 차지해서 공간을 절약한다고 밧줄로 고정해서 허공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아직은 기본 골조만 완성된 상태이고 아직 갈 길이 멉니다.”사람들이 거대 카누에 정신이 팔린 사이, 유월영은 어딘가에서 불편한 시선을 느꼈다.주변을 둘러보니 구석진 곳에서 모자를 쓴 한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그들이 있는 곳을 촬영하고 있었다.유월영은 바로 인상을 쓰며 공장장에게 물었다.“공장장님, 저 사람은 누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형 사고였다.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부상이 없는 사람들은 현장을 정리하고 부상자는 병원으로 옮겨졌다.다행히 선박은 골조만 완성된 상태라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기에 유월영도 골절상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완성된 선박이었다면 그 결과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이 사고로 크게 다친 사람은 하필 스미스였다. 그는 현장에서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누군가는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다.공장장은 부상자를 병원으로 이송한 뒤, 사건의 자초지종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골조를 지탱하고 있던 4번 끈이 풀리면서 평형을 잃고 추락했다는 결론이 나왔다.그런데 끈이 왜 갑자기 풀린 걸까?병실로 찾아온 공장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결과를 보고했다.“4번 끈이 갑자기 풀려서 일어난 사고입니다. 하지만 공장 내부에는 CCTV가 없어서 끈이 풀린 이유는 밝혀내기 어려울 것 같아요. 기억을 되짚어 보면 사고 직전에 그 위치에 머무른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연재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었지만 화가 많이 난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게 누굽니까.”공장장은 시선을 회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그게….”병상에 있던 유월영이 입을 열었다.“저예요.”연재준의 시선이 유월영에게 쏠렸다.조금 전 사고로 그녀는 머리가 흐트러지고 옷도 먼지투성이가 되었으며 가녀린 종아리에는 두터운 붕대를 감고 있어 조금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연재준은 갑자기 어젯밤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던 그녀의 모습도 지금처럼 안쓰러웠었다.그는 숨을 고르고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거기 서서 뭐 했어?”유월영은 자초지종을 사실대로 말했다.“백유진 씨가 이 사업 회사에 금전적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그 질문에 대답했죠.”공장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돈이 되고 안 되고가 어딨겠습니까. 카누 제작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쉽지 않아요. 물에 뜰 수 있는 자재
“아니.”현시우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남자들끼리의 문제일 뿐이야.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월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별거 아니긴 개뿔!”현시우는 예상밖의 반응에 잠시 멍해졌다.유월영이 이렇게 거친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비록 심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그랬다는 사실에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월영아, 욕은 하지 마.”“할 거야! 너도 싸움질을 했으면서 내가 욕하는 걸 뭐라고 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유월영은 그의 상처를 가까이서 살펴보며 점점 더 화가 났다.“도대체 너랑 싸운 사람이 누구야? 왜 싸운 건데?”현시우는 말하고 싶지 않아 아픈 팔다리를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월영아, 와서 안아줘.”“꿈 깨!”옆방에서 의무실 선생이 연재준의 얼굴에 멍이 든 곳에 약을 바르려고 했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이를 피하며 말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나가세요.”의무실 선생은 잠시 망설였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료 상자를 챙겨 방을 나갔다.두 소년의 부상은 비슷했다. 뼈나 근육에는 이상이 없었고 학교 보안요원이 빠르게 싸움을 말려 모두 표면적인 상처에 불과했다.방문이 닫히지 않았기 때문에 옆방에서 들리는 대화가 연재준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유월영이 현시우를 걱정하며 하는 말들이 하나하나 그의 귀에 들어왔다.연재준은 그 말을 들으며 살을 도려내는 고통이 있다면 이와 같을 거라고 느꼈다.학교는 싸움에 대해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고 다만 두 학생의 부모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연민철은 이미 아들 연재준을 신경 쓰지 않았고 반면 현시우의 가족은 이 소식에 크게 놀랐다.현시우는 어릴 때부터 감정 기복이 별로 없고 차분한 성격으로 한 번도 싸움을 하거나 심지어 다툰 적도 없었다.그런 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것도 학교 안에서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인 건지 현씨 가문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당시, 현시우의 어머니인 연회 부인은 현씨 가문에서 사모님으로 은둔하며 지냈다.하지
현시우가 유월영을 집까지 데려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내일 내가 대신 병가를 낼 테니까 너는 집에서 푹 쉬어. 책도 보지 말고 문제도 풀지 마.”유월영은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괜찮아. 나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의사 말 못 들었어? 네가 과로로 쓰러진 거라고. 시간이 부족하면 중요하지 않은 일부터 줄여야 해. 월영아, 모든 걸 다 해내려고 하지 마. 그리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하려고도 하지 마.”현시우는 그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유월영은 항상 모든 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집착과 강박은 결국 그녀를 지치게 만들고 말았다.사람의 몸은 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유월영은 신중히 고민한 끝에 어머니에게 댄스 수업을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학교의 댄스 동아리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춤은 그녀에게 단순한 취미였지만 이제는 정상적인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었기에 잠시 내려놓는 것이 맞았다. 대학에 가거나 졸업 후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주말과 월요일까지 3일이 지나고 유월영은 학교로 돌아왔다. 몸 상태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감기도 거의 나아 약간의 콧물만 남아 있었다.유월영이 등교한 날, 연재준은 유월영의 교실 앞을 지나쳤다.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그녀의 얼굴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병원에서 그는 원래 깨어난 유월영에게 잃어버린 옥불을 따질 계획이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온 전화로 인해 급히 돌아가야 했다. 부모님의 이혼 문제 논의에 꼭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그리고 익명의 영웅이 될 생각이 없었던 그는 방과 후 그녀를 찾아갈 계획이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의 반으로 향하던 중, 현시우와 마주쳤다. 연재준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려 했지만 현시우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그날 월영이를 병원으로 데려다줘서 고마워.”연재준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고맙다면 네가 아니라 본인이 와서 말해야지. 넌 대리인이야?”현시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담담히
운전기사는 연재준의 상태를 걱정하며 우산을 들어주었지만 연재준은 비에 젖은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고 병실에 도착했을 때 유월영은 링거를 다 맞고도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연재준은 침대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한참을 서 있던 그는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유월영, 이제 너는 나한테 빚졌어.”그녀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그녀가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었다.얼마 후, 유월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침대 앞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와 함께 현시우가 앉아 있었다.“...”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병원이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쉬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목 아파? 편도선염이야. 당분간 말하지 마.”현시우는 탁자에 있던 따뜻한 물을 들고 한 팔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을 한 모금씩 먹이며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했다.“너 열이 나서 길에서 쓰러졌어. 다행히 누군가 널 병원으로 데려왔어.”“기절했다고?”유월영은 놀란 눈으로 현시우를 바라봤다. 폭우 속에서 길을 헤매던 기억은 있었지만 쓰러졌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따뜻한 물이 목을 적시니 조금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목이 아팠다.유월영이 억지로 몇 마디를 이어갔다.“누가...날 병원에 데려왔어?”현시우는 물컵을 내려놓고 그녀가 좀 더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베개를 정리했다.“간호사 말로는 너랑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는데 이름을 남기지 않았대.”“시험 끝나고 널 찾으러 갔는데 네 짝꿍이 네가 집에 갔다고 했어. 근데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돼서 네 집으로 갔거든. 근데 네가 없더라.”유월영의 가족조차 그녀가 어디 갔는지 몰랐고 현시우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가족들과 함께 학교에서 집까지의 길을 수색했다. 그러다 편
연재준의 화난 표정은 유월영을 바라보며 점점 누그러졌다.그녀는 너무 말랐고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으며 온몸이 빗물로 흥건해져 안쓰럽기 그지없었다.게다가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드문 일이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건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과 목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부드러운 피부에 손이 닿자 순간적으로 손을 홱 뒤로 뺐다.소년의 얼굴에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귓불은 점점 붉어졌다.연재준은 숨을 멈추고 다시 유월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그는 그제야 살짝 안도했다.그녀가 자신을 기회를 노리는 이상한 변태라고 생각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연재준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다.지난 18년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던 자신이 왜 교내 축제에서 춤추는 그녀를 보고 이렇게 빠져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유월영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너 그렇게 예쁘지도 않아. 사람 보는 눈도 별로고.”“왜 하필 현시우 같은 놈을 좋아하는 거야? 사람들은 항상 나랑 현시우를 비교하잖아. 그러니 너도 내 이름을 들어봤을 텐데...내가 너 대신 농구공도 막아줬고 도서관에서 햇빛도 가려줬잖아. 다 잊은 거야?”그는 자신의 기억을 곱씹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우리 함께 변태 선생을 잡은 적도 있잖아.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거지...왜 한 번도 날 찾지 않았어?”“내가 너 앞을 그렇게 여러 번 지나갔는데 넌 왜 나한테 아는 척도 안 했어? 현시우가 나랑 친해지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야? 너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아이였어?”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나도 나름 괜찮게 생겼잖아. 남자 친구를 바꿔보는 게 어때? 내가 현시우보다 너한테 더 잘해줄 자신 있는데. 유월영, 내 말 들려?”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는 이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유월영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연재준은 그녀가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
유월영은 줄곧 모범생이었다. 지각이나 조퇴는커녕 항상 성적도 우수했기에 선생님들은 항상 그녀를 신뢰했다. 그래서 그녀가 조퇴를 요청하자 선생님은 별다른 질문 없이 허락해 주었다.다만 유월영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선생님은 부모님께 연락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유월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그녀는 어머니가 자전거를 탈 줄 모르고 아버지는 성격이 급했기에 아버지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게다가 선생님은 그녀와 현시우가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사적인 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이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발언권이 크지 않았다.선생님은 현시우가 차량을 보내줄 것이라고 짐작하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퇴 허가서를 작성해 주었다.“비가 많이 올 수도 있으니 밖에 오래 머물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렴. 내일도 몸이 안 좋으면 꼭 병가를 내고 쉬어.”“감사합니다, 선생님.”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렸지만 유월영은 현시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그녀는 어젯밤 이미 그가 오늘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고작 20분 거리인데 그를 찾는다 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비가 온다고 해도 우산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 여겼다.그러나 유월영은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갑작스러운 폭우가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쏟아졌고 강풍과 빗물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유월영은 허둥지둥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지만 강한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고 순식간에 옷이 젖어버렸다.앞이 점점 보이지 않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였다.그때 멀리서 날카로운 경적이 들렸다.빠르게 달려오는 트럭을 발견한 유월영이 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발밑에서 미끄러운 무언가를 밟아 넘어질 뻔했다.그 순간 강한 손길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그 사람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유월영은 그의 가슴에 부딪히며 싸한 솔잎 향이 풍겨왔다.본능적으로 그의
“준비는 다 끝난 거예요? 거주지, 의사, 그리고 돌봐줄 사람까지.”연재준이 물었다.“그래. 신 씨 아저씨가 다 준비해 주셨어.”어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요.”신씨 아저씨라...연재준의 어머니는 내심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묶어놓은 족쇄에서 벗어나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됐다.하지만 아들은 비록 성숙하고 독립적으로 보이더라도 아직 고등학생일 뿐이었고 과연 그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재준아, 걱정하지 마. 너희 아빠랑 이혼 합의서에 분명히 명시했어. 그가 재혼하더라도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연씨 가문과 해운 그룹은 앞으로 반드시 네 것이 될 거야.”이것이 그녀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연재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는 지금 가문과 해운 그룹에 큰 미련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필요하다면 아버지가 열 명, 스무 명의 자식을 더 낳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가 굳이 애쓸 필요는 없었다.그는 마지막으로 허리를 굽혀 어머니를 안아주며 말했다.“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몸 잘 돌보세요. 방학 때 시간이 나면 찾아갈게요.”어머니는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상자를 꺼냈다.“이걸 네게 주려고 가져왔어.”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투명하고 맑은 옥불이 들어 있었다.연재준은 그것을 알아보았다.“외할머니께서 남기신 거잖아요.”“그래. 외할머니께서 법사에게 받은 거라 아주 영험하다고 하셨어. 평안을 빌어주는 거야.”연재준은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어머니가 갖고 계세요.”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가지고 다니면 내가 마음이 놓일 것 같아.”결국 연재준은 옥불을 꺼내 목에 걸고 어머니를 배웅했다.차가 떠난 후, 그는 옥불을 교복 안쪽에 넣어 피부에 닿도록 하고 학교로 들어갔다.평소에도 말수가 적던 그는 오늘따라 더욱 차갑고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다.쉬는 시간에 평소 그와 친했던 몇몇 친구
아침 6시 45분.유월영은 학교로 걸어가던 중 그녀의 짝꿍을 만나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하지만 오늘 유월영의 상태는 조금 축 처져 보였고 짝꿍도 이를 알아차렸다.“너 어디 아픈 거야? 어젯밤 또 늦게까지 문제집 풀었어?”“아니야, 어젯밤은 꽤 일찍 잤는데 그냥 좀 어지러워. 왜 그런지 모르겠어.”짝꿍이 그녀의 이마를 만져봤지만 열은 없었다.“나 페퍼민트 오일 가져왔는데, 발라줄까?”“좋아, 고마워.”“뭘 이런 걸로.”유월영은 월반으로 들어온 학생이라 반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고 짝꿍보다도 두 살 어리니 마치 어린 여동생 같았다.페퍼민트 오일을 바른 후 짝꿍에게 돌려줄 때, 짝꿍의 시선은 먼 곳에 가 있었다.“저기 차 옆에서 누군가랑 얘기하고 있는 남학생이 연재준 아니야. 주변에 경호원들도 지키고 있네.”유월영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짝꿍이 아는 사람을 본 줄 알고 물었다.“그럼 가서 인사라도 할래?”짝꿍은 과장되게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누가 감히 그래!”아무도 연재준에게 괜히 인사하러 가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짝꿍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빨리 가자, 빨리!”하지만 유월영은 달리자 머리가 더 아픈 느낌이 들었다.연재준은 고개를 돌리다 우연히 소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치마가 바람에 살짝 펴지며 만들어낸 곡선을 본 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재준아.”차 안에서 여자가 그를 불렀다.연재준은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차 안을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두 분이 합쳐서 일흔 살이나 되셨는데 아직도 스스로 내린 결정에 책임질 수 없다면 그동안 헛산 거예요.”여자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내가 정말 참을 만큼 참아왔어. 하지만 요즘 네 아빠가 자기 비서랑 동거를 시작했어. 더는 못 견디겠어, 미칠 것 같아. 나 정말 이혼해야겠어.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내가 진짜로 미쳐버릴 거야.”연재준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몸 안에서 느껴지는 그 애매한 아픔을 완화하려 했다.이 여자는 그의 친어
연재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고 현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이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도 알 텐데, 유월영은 내 여자 친구야.”연재준은 그제야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나랑 무슨 상관인데.”그리고는 그들을 지나쳐 곧장 걸어갔다.현시우의 친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시우야, 쟤네 너희 집이랑 관계 좋은 거 아니었어?”현시우가 미묘하게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거든. 그래서 더 마음에 안 들어.”그 감정은 꼭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마음에 들지 않고 타고난 기운이 맞지 않아 본능적으로 싫어지기도 한다.친구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그런데 걔가 유월영을 좋아한다니 좀 의외네. 전에 누가 춤 동아리에서 걔 봤다고 해서 그냥 지나가다가 본 줄 알았는데, 사실 월영이를 보러 간 거였나 봐.”현시우가 드물게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월영이는 걔가 감히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점심시간유월영은 짝꿍과 함께 식당으로 가며 점심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학교의 급식은 맛있기로 유명해서 매일 ‘어떤 메뉴를 선택할까’라는 행복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두 여학생은 진지하게 메뉴를 논의하느라 뒤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채지 못했다.“저 여자애 현시우 여자 친구 아니야?”옆에 있던 친구의 말에 연재준이 무심하게 대답했다.“걔가 네 귀에 대고 말하던? 유월영이 자기 여자 친구라고?”“그건 아니고. 현시우가 방과 후마다 월영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월영이도 자주 현시우 보러 반에 오잖아. 지난 주말에는 놀이공원에서 둘이 같이 있는 걸 본 사람도 있다던데. 이게 여자 친구 아니면 뭐겠어? 남매겠냐?”연재준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학생 때 연애하면 좋을 게 없어.”친구는 말문이 막혔다.“너랑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하긴 너랑 연애할 용기 있는 사람도 없잖아.”“...”연재준은 그를 무시하고 성큼성
“어쩔 수 없지.”현시우는 처음부터 그녀와 다툴 생각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절대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특히, 유월영의 기분이 나빠지기라도 하면 그는 바로 달래기 바빴다.현시우가 텀블러 뚜껑을 열어 건네며 말했다.“마셔. 내가 직접 탄 거야. 그러니 꼭 다 마셔야 해.”유월영은 평소 물을 잘 마시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현시우는 매일 아침 그녀에게 물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마치 풋풋한 남자 친구가 도시락을 준비하듯이.유월영이 마지못해 텀블러를 받아서 들며 물었다.“이게 무슨 물이야?”“귤이랑 레몬을 넣어 우린 거야. 네가 좋아하는 새콤달콤한 맛이지. 맛있어.”그녀가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따뜻하네?”현시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찬물은 몸에 안 좋아.”유월영이 투덜댔다.“넌 왜 우리 아빠보다 더 아빠 같아? 내 잠자는 거, 물 마시는 거, 심지어 찬 거 먹는 것까지 간섭하잖아.”현시우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레 말했다.“어제는 오빠라고 부르라고 해도 안 부르더니, 오늘은 Daddy라고 부르고 싶어?”유월영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Father와 Daddy가 미묘하게 다른 뜻을 가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개방적인 사람이 아니었기에 현시우의 농담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이내 그를 쫓아가며 때리기 시작했다.현시우는 웃으며 그녀의 두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올렸다. 둘이 장난을 치고 있던 그 순간, 교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유월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갈색 농구공이 바닥을 굴러 책상에 부딪혔다.“...이게 뭐야?”현시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누군가 농구를 하고 있네.”“복도에서?”유월영이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현시우가 짤막하게 대답했다.“날이 어두워졌으니 집에 데려다줄게.”유월영은 문득 중요한 걸 떠올렸다.“먼저 이 문제 푸는 거 가르쳐줘.”현시우는 펜을 쥔 채 투덜댔다.“가끔 진심으로 의심스러워. 너 나를 공짜 가정교사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