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할 때가 되어 유월영은 연재준의 사무실로 찾아갔다.“사모님께서 점심에 연락이 오셨어요. 저녁에 본가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본가에 안 간지 벌써 6개월도 더 되지 않았나요?”연재준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평소에도 우리 가족들이랑 자주 연락해?”“아니요. 매번 사모님께서 먼저 연락을 주시면 받았어요.”유월영의 대답에 연재준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차키를 그녀에게 던지며 말했다.“운전은 유 비서가 해. 운전기사는 유진이 집까지 데려다줘야 하니까.”유월영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에게 절실히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녀는 그의 답이 어떨지 대충 알고 있었고 그 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유재준의 본가.윤미숙은 부지런히 유월영의 접시에 맛있는 반찬을 담아주었다.“왜 이렇게 말랐어? 안색도 이제 보니 안 좋고. 혹시 어디 아파?”연재준은 집에 온 뒤로 시종일관 싸늘한 표정을 유지했다. 들어올 때 유 회장에게 인사를 건넨 것 말고는 그는 여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아프기는요. 새로 산 립스틱을 발랐는데 색상이 제 피부색과 안 어울리나 봐요. 돌아가서 버려야겠어요.”해운 그룹 비서실의 에이스, 못하는 게 없고 뛰어난 화술까지 겸비하여 모두의 사랑을 받는 존재. 그녀는 그의 부모님에게도 아주 많이 사랑 받고 있었다.연재준은 갑자기 오전에 백유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다 유월영을 좋아한다는 말. 동료들은 물론이고 고객사 직원들, 심지어 나이 드신 어르신들까지 그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녀는 그에게 온 뒤로 그의 일과 생활 모든 것에 개입했다. 그리고 일이면 일, 인간관계 모든 걸 훌륭하게 처리했다. 그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둘이 언제 결혼하냐고 재촉할 정도였다.연재준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아니나 다를까, 윤미숙은 또 결혼 얘기를 꺼냈다.유월영은 여기 오기 전까
유월영은 차를 세운 뒤 조용히 그에게로 다가갔다.“대표님.”길이 어두컴컴해서 남자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들었음에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유월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멀지 않은 곳에 24시간 슈퍼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슈퍼에서 김밥 한 줄을 구매한 뒤, 레인지에 가열해서 연재준에게로 가져왔다.“저녁에 얼마 드시지도 않았잖아요. 자꾸 그러시면 속 버려요.”연재준은 말없이 그녀에게서 김밥을 받았다.유월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리 회장님 말씀이 과했다지만 좀 참지 그랬어요. 회장님 고혈압 도지면 위험한 거 아시잖아요. 작년에도 병원에 한 달이나 입원해 계셨는데….”연재준은 갑자기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김밥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녀를 끌고 차로 들어갔다.모든 동작이 그렇듯 당연하고 거침이 없었다. 유월영은 하늘이 빙 도는 느낌이 들더니 정신을 파는 사이 어느새 남자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왔다.당황한 그녀가 그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대표님!”비록 좁은 골목이라고는 하지만 길가는 행인들도 있었고 이런 장소에서는 싫었다.“이러지 마세요, 대표님! 여기서는 싫어요.”연재준은 그녀의 두 손을 꽉 잡아 머리 위로 고정한 채,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유 비서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추느라 거절도 못하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남자의 거친 숨결이 그녀의 민감한 귓가를 자극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꾹 참고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모두가 저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요. 대표님은 저 싫어하시잖아요. 대표님은 백유진 씨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백유진 씨랑은 진심이세요? 아니면 그냥 잠깐의 호기심인가요?”그녀는 줄곧 연재준이 백유진에게 흥미를 가지는 정도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날 그가 했던 말은 그녀의 모든 예상을 뒤엎었다.혼전 순결을 지켜
다음 날, 유월영은 연재준과 함께 스미스를 대동하고 신주에 있는 카누 공장으로 갔다.투자를 주 항목으로 하는 해운그룹은 국내 최고의 투자 회사 중 하나였다. 해외에도 많은 지사를 두고 공격적인 투자를 진행하면서 투자 업계에서 그들이 가지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회사의 이미지를 위해 그들은 종종 국가에서 지원하는 산업에 투자하기도 했다.스포츠 종목으 그 중 한 가지였고 카누 제작 사업에 대한 투자도 그러한 이유에서 시작했다.유월영은 어제의 상실감을 잊고 회사의 주요 책임자로서 연재준의 옆을 지키며 완벽한 비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스미스의 곤란한 질문에 대답하는 쪽은 주로 그녀의 담당이었고 필요하지 않은 말은 아꼈다.거대한 공장 내부에는 이미 제작이 완료된 각양각색의 카누가 진열되어 있었다. 공장장의 설명을 들은 스미스는 연신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공장장이 자신 있게 말했다.“길이가 18미터 되는 작은 카누도 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긴 카누를 제작 중에 있습니다. 제작이 완료되면 101미터가 될 겁니다. 우린 이 카누로 기니스 세계기록에 도전해서 세계에 신주 카누 산업을 알릴 생각입니다.”스미스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101미터나 되는 카누요? 그건 웬만한 건물 하나의 높이잖아요. 그런 거대한 배가 바다에 뜨면 정말 가관이겠는데요? 제가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봐도 되겠습니까?”공장장이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 사실 우리의 머리 위쪽에 있습니다.”고개를 들자 허공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선박이 보였다.공장장이 말했다.“공간을 너무 차지해서 공간을 절약한다고 밧줄로 고정해서 허공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아직은 기본 골조만 완성된 상태이고 아직 갈 길이 멉니다.”사람들이 거대 카누에 정신이 팔린 사이, 유월영은 어딘가에서 불편한 시선을 느꼈다.주변을 둘러보니 구석진 곳에서 모자를 쓴 한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그들이 있는 곳을 촬영하고 있었다.유월영은 바로 인상을 쓰며 공장장에게 물었다.“공장장님, 저 사람은 누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형 사고였다.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부상이 없는 사람들은 현장을 정리하고 부상자는 병원으로 옮겨졌다.다행히 선박은 골조만 완성된 상태라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기에 유월영도 골절상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완성된 선박이었다면 그 결과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이 사고로 크게 다친 사람은 하필 스미스였다. 그는 현장에서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누군가는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다.공장장은 부상자를 병원으로 이송한 뒤, 사건의 자초지종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골조를 지탱하고 있던 4번 끈이 풀리면서 평형을 잃고 추락했다는 결론이 나왔다.그런데 끈이 왜 갑자기 풀린 걸까?병실로 찾아온 공장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결과를 보고했다.“4번 끈이 갑자기 풀려서 일어난 사고입니다. 하지만 공장 내부에는 CCTV가 없어서 끈이 풀린 이유는 밝혀내기 어려울 것 같아요. 기억을 되짚어 보면 사고 직전에 그 위치에 머무른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연재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었지만 화가 많이 난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게 누굽니까.”공장장은 시선을 회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그게….”병상에 있던 유월영이 입을 열었다.“저예요.”연재준의 시선이 유월영에게 쏠렸다.조금 전 사고로 그녀는 머리가 흐트러지고 옷도 먼지투성이가 되었으며 가녀린 종아리에는 두터운 붕대를 감고 있어 조금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연재준은 갑자기 어젯밤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던 그녀의 모습도 지금처럼 안쓰러웠었다.그는 숨을 고르고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거기 서서 뭐 했어?”유월영은 자초지종을 사실대로 말했다.“백유진 씨가 이 사업 회사에 금전적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그 질문에 대답했죠.”공장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돈이 되고 안 되고가 어딨겠습니까. 카누 제작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쉽지 않아요. 물에 뜰 수 있는 자재
간호사가 다가와서 백유진의 손바닥에 소독약을 발라주었다. 다친 곳이 쓰렸는지 백유진은 얕은 신음을 토해냈다.그러자 연재준은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가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괜찮아?”“괜찮아요. 별로 심각한 상처도 아닌걸요.”백유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은 어깨 안 아파요? MRI 검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연재준의 어깨는 백유진을 감싸는 과정에서 모서리에 부딪혀 부상을 입었다.연재준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그는 백유진의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상처 다 아물기 전에는 물에 닿으면 안 되는 거 알지? 감염되면 흉터 남을 수도 있어. 이따가 집으로 가정부 한 명 보낼게.”“저 혼자 잘할 수 있어요. 대표님은 가끔 저를 너무 어린애로 보시는 것 같아요.”유월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알콩달콩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최근 들어 쌓인 피로와 실망감이 폭발하여 그녀의 이성을 잠식시켰다.그녀는 말없이 다친 다리를 끌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한걸음 움직이려 할 때마다 발바닥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졌다.이 사고로 가장 심각한 부상을 입은 쪽은 유월영이었다. 하지만 연재준은 그녀에게 그 어떤 관심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손바닥 조금 벗겨진 유월영을 걱정하며 가정부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끝장을 보자!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백유진, 아까 했던 말 끝까지 사실이라고 주장할 거지?”“언니, 저는 줄곧 언니를 동경해 왔어요. 저도 언니를 도와주고 싶지만 이렇게 심각한 사고가 났는데 언니를 위해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요….”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라.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고, 자신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유월영이 다시 물었다.“정말 내가 그 끈 건드리는 거 네 눈으로 봤어?”연재준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같은 질문
그런데 유월영의 대답은 예상밖이었다.“10분이면 돼.”백유진은 당황한 듯, 그녀를 바라봤고 연재준은 인상을 찌푸렸다.유월영은 다리 통증을 참으며 침대를 짚고 공장장에게 다가갔다.“공장장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공장장은 흔쾌히 대답했다.“말씀하세요.”유월영은 소리를 낮춰 말했다.“아까 공장을 촬영하던 그 인플루언서 좀 찾아주세요. 아마 부상자 명단에 있었으니 응급실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공장장은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감사해요. 부탁 좀 드릴게요.”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듣지 못했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재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유월영을 쏘아보고 있었고 반면 백유진의 표정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유월영이 일부러 연기하는 건지, 진짜 증거가 있어서 저러는 건지 분간이 잘 서지 않았다.잠시 후, 나갔던 공장장이 검은 가방을 들고 돌아왔다.그는 그 가방을 유월영에게 건네며 말했다.“그 친구는 사정을 듣고 이걸 전달해 달라고만 하더군요.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좀 불편하다면서요.”유월영은 가방을 받아 카메라를 꺼냈다.그랬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이 카메라였다.그 수상한 남자가 눈치가 이토록 빠를 줄은 몰랐는데 예상밖이었다.유월영은 더 고민할새도 없이 카메라를 열어 영상을 찾았다.공장 내에서 느꼈던 이상한 기시감은 딱 들어맞았다. 그 남자는 그녀를 찍고 있었다. 공장뿐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찍힌 사진도 수두룩했다.백유진이 물었다.“그 카메라는 뭐예요?”공장장이 대신 답해주었다.“오늘 공장에 한 인플루언서가 방문했는데 카누 제작 과정을 찍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거든요. 이건 그 청년이 당시 가지고 있던 카메라입니다. 유 비서님이 왜 갑자기 이걸 가져다달라고 했는지는 저도 모르겠군요.”백유진은 아무도 보지 못하게 주먹을 꽉 쥐었다.유월영은 사진첩을 뒤지다가 영상 하나를 찾아내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그리고 원했던 장면을 찾아 정지 버튼을 누르고는 카메라를 백유
그제야 유월영은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이건 저와 백유진 씨와의 약속이에요. 대표님을 포함해서 현장에 있던 모두가 증인이죠. 저는 약속을 이행했을 뿐이에요. 뭐가 문제 있나요? 또 제가 잘못했다고 하실 건가요?”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반격하는 그녀의 모습은 연재준이 평소 알던 유 비서가 아니었다.그녀의 모습이 연재준은 낯설었다.“쟤가 저를 모함하고 저를 사고 범인으로 몰아갔어요. 그 끈, 쟤가 당기고 저한테 뒤집어씌웠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대표님은 쟤 말만 믿고 같이 저를 범인으로 몰아갔죠. 아마 제가 사실을 밝혀내지 않았으면 억울해서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려도 죄책감을 못 이겨 자살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을 거예요. 제가 왜 이런 억울함을 혼자 감당해야 하죠? 저는 억울함을 당하기만 해야 하나요?”유월영은 연재준의 싸늘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에서 전에 없던 단호함이 보였다.“만약 스미스 씨가 이번 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당했더라면 저는 제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그분을 찾아가서 배상하고 사과해야 했나요? 귀뺨 한 대면 많이 봐준 거예요.”연재준은 한 번도 이런 모습의 유월영을 본 적 없었다.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은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욕심이 없었다.침대에 엎드려 울고 있던 백유진이 고개를 들더니 소리쳤다.“맞아요. 제가 언니를 모함했어요. 귀뺨 한 대 맞은 거?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죠!”“하지만 하필 그 시각에 사고가 있었고 마침 그 자리에 언니가 있어서 거짓말을 좀 보탰을 뿐이에요. 영상 어디에도 제가 줄을 잡아당기는 모습은 찍히지 않았어요. 그럼 언니도 지금 저를 모함한 거 아닌가요? 언니가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이 저랑 다를 게 뭐가 있어요!”유월영은 기가 차다는 듯이 상대를 노려보았다.이 새내기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바보는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정말 멍청했더라면 연재준의 마음을 잡지도 못했겠지만.백유진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계속해서 말했다.“대표님 옆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언니가 질투 났어요. 그래서
“뭐라고?!”“그 개 같은 연놈들, 잘 먹고 잘 살라 그래!”유월영은 그날로 사무실에 있던 개인 물건을 집으로 옮겼다. 그러다 보니 룸메이트인 조서희에게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계속되는 조서희의 질문 압박에 그녀는 결국 최근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자초지종을 들은 조서희는 불같이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던 그녀는 냉장고에서 찬 맥주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유월영에게 물었다.“그래서 이대로 퇴사한다고?”유월영은 다친 다리에 연고를 바르며 덤덤히 말했다.“연재준에게서 떨어지라고 매일같이 권고했던 사람이 너 아니었어? 퇴사했다니까 갑자기 너무 섣부른 판단 같아?”“당연히 그건 아니지. 친구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는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이야. 하지만 그 여우년만 득을 본 것 같아서 그게 좀 걸려.”한참을 씩씩거리던 조서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래서 너 퇴사한다니까 연재준 그 자식은 뭐래?”“내가 할 말만 하고 나왔는데 아무 말 없었어.”조서희가 물었다.“쫓아 나오지도 않았어?”“응.”그녀가 느린 걸음걸이로 힘겹게 병원 대문까지 나와 택시를 기다릴 때, 백유진을 태운 연재준이 병원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았다.조서희가 잔뜩 성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퇴사 결정을 한 건 당연히 잘한 일이지만 그 자식이 한 번도 안 잡았다는 건 좀 그러네.”친구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유월영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그녀도 3년이나 그를 위해 일하고 억울함만 잔뜩 안고 회사를 떠난다는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그의 모습에 실망을 많이 했다.어쩌면 그녀는 그가 후회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원했을지도 모른다.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연재준은 보통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하늘이 그에게 좋은 출신과 외모, 능력까지 줬기에 그의 주변에 인재는 넘쳐났다.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오히려 유월영이 조서희를 위로했다.“좋게 생각하자. 퇴사하기 전
사무실에서 유월영은 턱을 괴고 마우스를 움직이며 인터넷에 넘쳐나는 이혁재의 스캔들 뉴스를 보고 있었다.이혁재의 호텔 방에서 일어난 일을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렸고 이미 댓글들이 폭발하고 있었다.그녀는 웃으며 평가했다.“이 제목 누가 지었는지 정말 잘 지었네요. [해성 그룹 임원 이혁재 혼인 중 외도, 호텔에서 현장 발각]이라니. 혁재 씨의 신분에 회사 이름도 나오고, 제목까지 자극적으로 지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네요.”“게다가 지금 해성 그룹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상황이라 작은 움직임도 큰 주목을 받는데 뉴스 제목에 해성 그룹을 걸었으니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도 당연하겠죠.”한세인이 말했다.“저도 봤어요. 댓글에선 해성 그룹이 안팎으로 온갖 나쁜 일은 다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오성민은 이혁재 씨를 망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아요.”유월영이 마우스를 내려놓고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손을 배 위에 포개며 물었다.“부정적 여론의 최적 대응 시간이 얼마였죠?”“골든타임은 24시간이에요. 물론 빠를수록 좋습니다.”유월영이 미소를 지었다.“그럼 내보내요.”이혁재의 외도 스캔들은 오전 내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고 그는 순식간에 쓰레기 남편으로 전락했다.누리꾼들이 비난하는 와중에 점심시간 동안 갑자기 한 영상이 나타나 인터넷에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그 영상에는 이혁재가 정신을 잃은 채 두 명의 직원에게 방으로 옮겨지고 침대에 던져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직원들은 대화를 나누며 말했다.“여자 도착했어?”“도착했대.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는 중이야. 먼저 이 남자 옷을 벗기자.”동영상에서는 직원들은 합심해 이혁재의 옷을 모두 벗기고 있었다. 물론 노출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되었다.옷을 모두 벗기고 이불을 덮어준 후 방에는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바로 그 화영이였다.“다 됐어?”“술에 수면제를 넣었어. 해 뜨기 전까진 못 깨어날 거야.”“알겠어. 이제 나가 봐.”화영은
유월영이 멍해 있자 연재준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당신도 전에 나를 가지고 장난쳤잖아. 난 그러면 안 돼?”“...”유월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냉랭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연재준은 차가 도로로 들어서는 것을 바라보며 자기 손끝을 내려다보았다.손끝에는 그녀의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는 이유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닦아내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이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날 저녁, 이혁재는 배 사장을 데리고 온천 호텔에서 식사를 대접했고 배 사장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이곳 공기가 정말 좋군요. 자동차 배기가스나 공장 오염 같은 게 없는 것 같아요.”이혁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사장님께서 전원생활을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이 호텔을 고른 겁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여기 사람들이 말하길 아침 공기가 더 좋다고 하네요. 내일 아침 식사 후에 산속을 걸으면서 산림욕을 즐기시는 게 어떨까요?”배 사장의 눈이 반짝였다.“그거 정말 좋겠군요.”“그럼 지금 마사지하러 가실까요?”이혁재가 말했다.“여기 직원분들 모두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이시랍니다. 호텔 사장님이 약자를 돕고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장애인분들에게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하더군요.”배 사장이 감탄하며 말했다.“정말 훌륭한 분이시군요. 저는 이렇게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가를 좋아합니다. 그 사장님이 누구신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이혁재가 모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나중에 제가 알아보겠습니다.”“좋습니다.”그들은 함께 마사지실로 향했고 두 명의 청각장애인 마사지사가 자신을 소개하며 그들을 맞이했다.그들은 마사지를 받으며 계약 연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직원이 친절하게 디저트와 칵테일을 가져다주었다.칵테일 도수가 높지는 않았지만 마사지는 너무나도 편안한 탓인지 이혁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그리고 마사지사 두 명이 이내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이혁재가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연재준은 차를 몰고 유월영의 사무실로 갔다.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유월영의 차를 찾아낸 뒤 그녀 차 옆에 차를 세웠다.시간을 보니 12시 30분이었다. 유월영은 회사에 하루 종일 머무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주로 오전에 업무를 처리한 뒤 점심때 회사를 나서곤 했다.유월영이라면 굳이 매일 출근 도장을 찍을 필요가 없었고 시간은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쓰여야 했다.연재준은 참을성 있게 한 시간가량 기다렸고 그제야 그녀가 한세인과 함께 회사를 나서고 있었다.한세인은 차에서 내리는 연재준을 빠르게 발견하고 유월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유월영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유월영은 오늘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헤어밴드로 장식했다. 그리고 하얀색 쉬폰 블라우스에 고급스러운 블랙 스커트를 매치하여 전체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유월영은 그대로 연재준을 향해 걸어왔고 작은 굽의 힐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맑은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그녀가 우선 입을 열었다.“이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연 대표님 만나는 게 놀랍지도 않네요.”연재준의 시선이 유월영이 착용한 진주 귀걸이에 향했다. 광택이 도는 고급 진주는 그녀의 피부색과 잘 어울렸다.그는 뜬금없이 말했다.“해성 그룹에 꽤 큰 거래 파트너가 있어. 성은 배 씨인데 갑자기 반년 짜리 계약을 체결하겠다고 하더군.”유월영의 눈이 반짝였다.“그래요?”“혁재가 그를 접대하고 있어.”연재준이 물었다.“당신의 생각은 어때?”유월영이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정말 저를 끝까지 도우려는 건가요?”“...”옆에서 듣고 있던 한세인은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두 분이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건가?’‘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지?’해성 그룹이 고객을 접대하는 일을 연재준은 왜 유월영에게 말하는지, 이게 어떻게 그녀를 돕는 것인지 한세인은 알 수가 없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 끝까지 도우려고. 그러니까 나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연재준도 힐끗 이혁재의 핸드폰 화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이렇게 메시지를 많이 보냈는데도 이 변호사님이 널 차단하지 않은 걸 보면 그냥 널 방해 금지 모드로 설정한 것 같네.”이혁재는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한 놈은 아내가 옆에 없고, 다른 한 놈은 아내가 다른 사람의 옆에 있고. 이렇게 감정 불화가 있는 두 놈이 나 같은 화목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네.‘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라는 속담이 딱 맞아.”연재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서지욱을 향해 말했다.“이제 내가 법원에서 전해준 말을 믿겠지.”서지욱은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3년 동안 조용히 있길래 정말 욕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완전히 변태가 된 거였네.”이혁재는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시며 갑자기 뭔가를 떠올리듯 찡그렸다.“짜증 나네. 오늘 밤에 회식이 있다니.”그는 연재준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넌 아내도 없잖아. 그 회식 네가 대신 가.”연재준이 담담히 말했다.“널 찾아온 거지 날 찾아왔냐?”이혁재는 혀를 차며 말했다.“회사가 다 망해가고 있는데 아내와 알콩달콩하게 보낼 밤을 방해하다니 정말 죽여 마땅한 죄지.”연재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간 됐으니 준비하고 가. 배 사장이 신주시에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잘 접대해. 그럼 너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거야.”이혁재도 그 말에 동의하며 시간을 확인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그는 바로 접시를 들고 밥을 국에 말아 몇 분 만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휴지로 입을 닦으며 손을 흔들었다.“간다.”서지욱은 미간을 누른 채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여유롭게 식사를 마저 하고 있는 연재준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 기분 꽤 좋아 보인다?”연재준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래?”서지욱이 말했다.“마르세유에서 돌아온 이후로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아. 근데 내가 알기로는 아직 월영 씨랑 화해도 못 했고 월영 씨는 4월에 현시우랑 결혼 준비 중이라고 하던
유월영은 그의 말에 반박하기도 귀찮아 대꾸하지 않았다.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니 4시 44분이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정말 죽음을 숫자로군. 흥미로운데.”유월영이 말했다.“혁재 씨 그 말이 오성민을 자극했어요.”“전에 말했듯이 오성민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에요. 자존감이 높을수록 더 예민한 법이죠. 혁재 씨가 그의 치부를 그렇게 쑤셔댔으니 그의 표정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봤어요? 그는 지금 미쳐가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이 더 재밌어질 거예요.”연재준은 그녀가 이렇게 여유롭게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응.”...어느덧 늦은 밤이 되고, 집에 온 오성민은 계속해서 이승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며칠 전만 해도 그녀는 그의 전화를 받았지만 이제는 길고 긴 전화벨 소리만 울릴 뿐 받지도 끊지도 않았다.마치 예전처럼.예전의 오성민은 이승연이 전화를 받지 않아도 이렇게까지 괴롭지 않았었다. 그녀의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자신이 치유되는 것 같았으니까.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달콤한 맛을 본 그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며칠간 이승연과 그토록 바랬던 시간을 누렸던 그는 이제 다시 그녀를 “잃는” 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승연아, 제발 전화를 받아줘. 제발, 승연아!”전화벨 소리가 끊기자 오성민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힘껏 내던졌다!활짝 풀어헤친 셔츠 깃 사이로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하지만 그의 화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일어나 부하의 옷깃을 잡고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이혁재의 치부를 찾아보라고 했는데, 찾아냈어? 응?”이승연은 감정적으로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바람을 피웠을 때 그녀는 단칼에 관계를 끊었고 이혁재가 여자 모델과의 소문이 났을 때도 이혼을 생각했다.이승연은 그동안의 정이 남아 있어 관계를 끊지 못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녀는 한 번 결심하면 망설임 없이 관계를 끝냈다.그래서 그는 이혁재가
이혁재는 복도로 돌아와 이승연을 보자 표정을 풀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애기야.”이승연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예쁘고도 도도하게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마!”이혁재는 웃으며 달래듯 말했다.“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이승연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예전처럼 불러.”이혁재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뭐라고 불렀더라?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이승연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장난스러운 표정에 결국 몇 초 후 항복하며 말했다.“여보.”이혁재는 음료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다른 건 없어?”이승연은 작게 웅얼거리며 말했다.“자기.”이혁재가 바로 대답했다.“그래!”이승연이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들었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남자를 ‘여보’라고 부른다더라고. 누나도 나를 그렇게 불러도 돼. 나 괜찮아.”이승연은 그의 철면피에 정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화를 내기도 지쳐 고개를 돌려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이혁재는 바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며 말했다.“복숭아 맛이 꽤 달콤하네. 이제 집에 가자, 여보.”이승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걸어갔다.복도의 구석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그 옆에서 연재준이 그녀를 지켜보며 물었다.“왜 웃는 거야?”유월영은 기분이 좋았다. 요즘 사람들이 달콤한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연애는 역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는 게 더 재미있네.”그녀는 벽에 기대며 무심하게 말했다.“이혁재 씨가 연 대표님 지인들 중에서 연애를 가장 잘하는 것 같네요.”연재준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가 책임을 떠넘기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정반대에요. 그는 지금 자신과 승연 언니 사이의 관계를 예전처럼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라고요.” 유월영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느긋하게 걸었다.
이혁재가 벌린 온갖 난리를 겪고 나니 이승연은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날 어린애처럼 달래지 마.”이혁재가 능청스럽게 말했다.“여보와 누나 사이에서 이 변호사님은‘애기’라는 별명을 고른 거잖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제부터 당신을 애기라고 부를게.”이승연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정말 그렇게 부른다면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이혁재가 히죽거리며 그녀의 입가에 키스했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잠시만 앉아 있어. 내가 마실 거 사 올게.”그녀의 입술이 건조해져서 트고 있었다.“응.”자판기는 다른 복도에 있었고 이혁재는 복숭아 맛 음료 두 병을 골랐다.그때 갑자기 오성민이 나타나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넌 말장난으로 이승연을 속이고 있는 거야.”이혁재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판기에서 결제하며 무심히 말했다.“내가 내 아내랑 어떻게 지내는지는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야.”오성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그렇게 해서 마음속의 두려움을 극복한 게 아니야! 그건 그냥 눈 가리고 아웅, 본질을 피해 가는 것일 뿐이라고!”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이상하다 말이지. 왜 꼭 두려움을 극복해야 해?”자판기가 덜컹 소리를 내며 음료 두 병을 떨어뜨렸다.이혁재는 음료를 바로 꺼내지 않고 오성민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좌절이나 어려움들이 사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걸림돌인데도, 굳이 극복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지. 그냥 피해 가면 안 돼? 왜 굳이 쓸데없이 고통을 자처해야 하지?”오성민이 비웃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군!”이혁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서 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당신은 어때?”“들리는 얘기로는 당신 부모도 썩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온 가족이 형만 편애했다고 하던데. 이렇게 보니 우리 상황이 조금 비슷하네. ““내 아버지도 두 명의
이혁재가 뻔뻔하게 말했다.“나를 봐봐. 매일 당신한테 달라붙어서 뽀뽀해 달라고 안아 달라고 하고 1분이라도 못 보면 떼를 쓰잖아. 내가 꼭 애 같지 않아? 응? 어차피 내가 연하이기도 하잖아, 나를 아들로 봐도 아무 문제 없어.”이승연은 그의 헛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이혁재는 단도직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나 병 있어. 그리고 당신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그러니까 나를 떠나지 마. 누나가 원하는 건 뭐든 할게.”“...”이승연은 더는 대꾸할 힘이 없어 그를 밀쳤다. 다만 이번엔 아까처럼 혐오감에 의한 거부가 아니라 그의 엉뚱한 발언에 기가 차서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이혁재는 그녀를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이승연은 거의 기진맥진했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짓눌렀던 고통이 점차 사라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이혁재의 말을 되풀이했다.“당신 잘못 아니야...”이혁재가 대답했다.“그럼 당연히 내 잘못이 아니지. 나도 완전히 억울한 피해자야. 그러니까 나를 미워하면 안 돼.”그의 당당한 태도는 마치 모든 액운을 쓸어내는 빗자루 같았고 이승연의 마음속 어두운 생각들이 깨끗하게 지워졌다.이승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품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그녀는 매일 아침 이 향기 속에서 깨어났고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이혁재가 갑자기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 헤쳐 이승연의 눈을 가렸다.“법정을 설 용기가 없어도 상관없어. 안 보면 되지. 자, 눈을 가려줄게.”그는 넥타이를 그녀의 머리 뒤에서 묶으며 말했다.“눈을 가리고 법정에 서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식물인간으로 지냈던 3년 동안 어둠에 익숙해져서인지 눈앞이 깜깜해지자 이승연은 오히려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이혁재는 고개를 숙여 넥타이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눈 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눈을 가려도 참 예쁘네. 이렇게 예쁜 여자가 누구 아내지? 아, 내 아내네.”이승연은 그의 황당한 발언들을
이혁재는 순간 흠칫했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깨어난 뒤 왜 그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이승연은 그날 자신과 아이를 구해내지 못한 이혁재를 줄곧 마음속 깊이 원망하고 있었다.이혁재는 이승연의 힘에 밀려 몇 걸음 물러섰다.그러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그는 밀어낸 이승연의 손을 잡아채며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여보.”이혁재는 느낄 수 있었다. 이승연은 사랑싸움이 아닌 진심으로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이혁재의 팔을 꽉 잡은 그녀의 손톱이 그의 살에 파고들었다. 이승연은 그를 향해 울부짖었다.“이거 놔!”오성민도 뒤따라왔고 큰 소리로 외쳤다.“승연이한테서 손 떼!”오성민이 이승연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두 명의 경호원에게 가로막혔다.그 경호원들이 이혁재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여기는 법원이니 감히 손을 쓸 수 없었다.하지만 사실, 이 경호원들은 유월영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는 이승연의 첫 재판을 걱정해서 직접 법정에 와 있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연재준도 법정에 나타났고 그 순간, 복도 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시선이 마주쳤다.연재준은 손을 입가에 대며 말했다.“쉿.”“...”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유월영은 그에게 물었을 것이다.“그렇게 회사를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날 따라다녀도 돼요?”정말 그렇게 한가하다면 병원에나 가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이혁재는 주변 사람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픔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승연을 꼭 안고 말했다.“여보, 내 말 좀 들어봐...당신은 나를 벗어날 수 없어. 내가 하는 말 다 듣고 나서도 여전히 내가 싫다면 그땐 내가 떠날게.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이승연이 여전히 몸부림쳤지만 이혁재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빠르게 말했다.“3년 전 그 일은 내 잘못이 아니야.”그는 또렷하게 말했다.“그때 내 자리는 방청석이었고 내 앞에는 몇 줄의 좌석과 다른 방청객들이 있었어.사건이 터졌을 때 모두 놀라 도망치기 바빴고 내 앞을 막아섰어. 난 좌석을 지나 혼란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