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가 끝나고 유월영은 고객사 직원들을 한 명씩 차에 태워 보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길가 가로등에 등을 기댔다. 이미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듯이 아팠다.립스틱은 이미 지워진지 오래고 파리한 입술에는 핏기 한 점 없었다.그녀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연재준의 운전기사가 다급히 다가오며 그녀에게 말했다.“유 비서님, 먼저 차에 타실래요?”유월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힘겹게 뒷좌석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 문이 열리더니 밖에 연재준과 여자애가 서 있었다. 같이 타려고 했는데 유월영이 먼저 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연재준이 그녀를 보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여자는 다급히 달려가서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대표님, 제가 앞에 탈게요.”연재준은 짜증스럽게 문을 쾅 닫고 차에 오르며 말했다.“유진이 먼저 데려다줘.”유월영은 고통스럽게 두 눈을 감았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유산하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술을 마시니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차는 한 낡은 아파트 구역으로 들어섰다. 유월영이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데 연재준이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골목이 어두워서 위험해. 유 비서가 유진이 집까지 좀 데려다줘.”백유진이 흑수정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했다.“괜찮아요, 대표님. 언니도 피곤할 텐데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조금만 더 걸으면 도착해요. 혼자 올라갈게요.”차에서 내린 그녀는 뒷좌석 차창에 대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대표님은 월영 언니 바래다줘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좋은 꿈 꿔요.”차갑기만 하던 연재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그래, 좋은 꿈 꿔.”유월영은 차에 오르고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운전기사는 유월영을 집에 데려다주는 대신, 연재준의 동해안 별장으로 차를 돌렸다. 그는 연재준의 가까운 심복 중 한 명으로써 눈빛 하나로도 연재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집 안으로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 소리가 남녀의 신음소리를 덮었다.연재준에 이끌려 욕조에 던져진 유월영은 갑자기 3년 전 그와의 첫만남이 떠올랐다.그날도 비가 오는 날이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작은 슈퍼를 운영했다. 부유하진 않지만 궁핍하지는 않았고 다섯 식구가 서로 이해하고 도우면서 오붓하게 살았다.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사기꾼의 꼬임에 들어 10억이라는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들은 슈퍼와 집을 팔고 집안의 팔 수 있는 건 다 팔았지만 그래도 6억이나 부족했다.막다른 길에 다달았을 때, 사기군은 유월영을 데려다가 빚을 갚게 하겠다고 꼬드겼다.그리고 그녀의 부모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녀는 비 오는 밤에 살기 위해 집에서 도망쳤다. 뒤에는 오토바이 소리가 그녀를 쫓고 있었다. 맹수에게 쫓기는 이 가여운 먹잇감은 도망치는 길에 신발까지 잃어버리고 머리는 산발이 된 채로 어두운 대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달리다 지친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자, 오토바이를 탄 폭주족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녀가 모든 게 끝이 났다고 절망하던 순간에 차량 한 대가 골목으로 들어섰다.차 문이 열리고 반짝이는 구두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약간 들자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검은 우산을 들고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와서 그녀의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주었다.그리고 조폭들에게 자기 사람이라고 당장 꺼지라고 말했다.처음 만났을 때 그는 꿈에서 나타난 구원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모습은 그대로 그녀의 마음속에 깊게 각인되어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대략 30분이 지나 유월영은 젖은 채로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흑설탕을 따뜻한 물에 풀어 마시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연재준은 아직 욕실에서 씻고 있었다.그녀는 유산한 사실을 그에게 알려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하지만 결국 비밀에 부치는 걸로 결론이 났다.3년 전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준 남자는 그의 곁에 남는 대가로 더 이상 귀찮은 일을
유월영이 물었다.“뭘 해명하라는 건가요?”“유진이 왜 해고했어?”유월영은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한아의 계약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소수점을 잘못 찍어 단가가 크게 차이 나는 실수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한아 쪽 관계자는 우리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 해프닝으로 넘어갔지만, 회사 이익에 큰 손해를 끼친 신입은 바로 퇴사 처리하는 게 우리 방침이잖아요. 책임을 안 물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그 말을 들은 백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제가 원래 덜렁거리는 습관이 좀 있어요. 죄송합니다….”연재준은 그런 그녀에게 위안의 눈빛을 보내고는 다시 싸늘한 눈빛으로 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서류 가져와.”유월영은 가지고 온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연재준은 맨 마지막 장을 확인하더니 서류를 도로 책상에 던지며 말했다.“날짜를 보니 유 비서가 무단결근 한 날짜에 벌어졌네. 유 비서가 무단결근만 안 했어도 이 계약서는 유 비서가 처리해야 할 서류였어. 신입인 백유진이 아니라.”유월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그래서 제가 이걸 책임져야 한다는 말씀인가요?”“비서실 수석 비서로써 부하 직원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는 건 유 비서도 잘 알 텐데?”연재준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명백했다. 백유진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라는 것!유월영은 치미는 화를 꾹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유진 씨가 입사한 날에 저는 휴가를 내고 회사에 없었고요. 그리고 모르겠으면 다른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냥 방치해 둬도 되는 서류였어요. 혼자 의욕에 넘쳐 처리한다고 했다가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히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죠. 해운 비서실은 원래 전문 학과를 나온 탑클래스만 들어올 수 있는 자리 아니었나요? 아니면 경험이 풍부하거나 전 회사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웠으면 모를까, 예술을 전공한 학생이 들어올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연재준이 물었다.“내가 꼭 유진이를 비서실에 둬야겠다면?”유월영은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비서실은 지금
유월영은 월셋방으로 돌아가서 짐을 정리했다.“이제 돌아온 거야? 오늘도 안 돌아오면 시내에 있는 병원 다 뒤져서라도 찾아가보려고 했는데!”“이제 괜찮아.”유월영의 룸메이트 조서희는 그녀의 대학 동창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교 때부터 같은 월셋방에서 동고동락하며 지내왔다.입원해 있는 동안에 그녀를 걱정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월영은 친구에게조차 사실을 말하지 않고 그냥 감기로 입원해 있다며 병문안을 거절했다.실내화로 갈아신은 조서희는 월영의 방 문 앞에서 짐 정리를 하는 친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또 출장이야? 퇴원한지 며칠이나 됐다고. 연재준 그 인간 너무 직원을 부려먹는 거 아니야?”조서희는 연재준과 월영의 관계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친구를 부려먹는 악덕 상사를 줄곧 못마땅하게 생각했다.유월영은 이번에 떠나면 또 언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기에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았다.“나 지방 발령 났어. 안성 지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됐는데 언제 끝날지는 몰라. 3개월이 지나도 나 안 돌아오면 새로운 룸메이트를 찾는 게 좋을 거야. 그때 가서 미리 나한테 연락 주면 와서 남은 짐을 가져갈게.”조서희가 순간 당황하며 물었다.“이렇게 갑자기?”“누구나 직장에서 일하다 보면 발령 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뭐.”다른 사람이었다면 흔히 있는 일이라고 넘어갔겠지만 연재준과 월영의 사이를 아는 조서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너 연재준이랑 싸웠어?”월영은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말없이 일어섰다. 그러다가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조서희는 발 빠르게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병원 진료 기록이었다.조서희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친구를 바라보았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그녀가 집을 비운 날짜와 맞물렸다.“유산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거야? 아이는 당연히 연재준 아이일 테고. 그 인간이 유산하라고 강요했어? 아니면 이제 너 필요 없으니까 멀리 꺼지래?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
그 직장 동료는 진심으로 유월영을 걱정해 주었다.“월영 씨, 고용 계약서가 한 달 뒤에 만기라면서요? 본사로 못 돌아오면 재계약이 힘들 것 같은데 계약이 끝나면 회사를 나가야 하잖아요. 물론 월영 씨야 유능해서 어딜 가도 환영 받겠지만 해운에 계속 남으려면 본사로 한 번 돌아와서 대표님이랑 잘 얘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재계약이 안 돼서 퇴사했다는 꼬리표가 붙는 건 재취직에도 불리하니까요.”물론 유월영은 이런 문제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와 얘기를 나눌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다.연재준이 안성 지사로 오는 날, 그녀는 공 들여 화장을 하고 하얀색 정장 원피스로 차려입고 아침 일찍 회사로 나가 대기했다.10분 뒤, 정문 입구로 세 대의 승용차가 들어왔다.차 문이 열리고 연재준이 차에서 내렸다. 유월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리려던 찰나, 뒤에서 내리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얼어버렸다.백유진.어딜 가도 데리고 다닌다더니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가서 공손히 인사했다.“대표님.”연재준은 덤덤한 시선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말없이 그녀를 스쳐지나 지사 사장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유월영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늘 입던 브랜드의 검은색 정장에 위트 있는 넥타이까지 여전히 가슴 떨리게 매력적인 모습이었다.백유진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언니, 오랜만이에요.”순진한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유월영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프로젝트 담당자로서 오늘 회의의 업무 진행 보고를 맡았다.해외 고객사 임원도 참석한 자리였기에 유월영은 유창한 영어로 재치 있는 농담까지 섞어가며 회의를 주도해 나갔다. 자리에서 듣고 있던 임원들도 그녀의 센스 있는 표현에 웃음을 터뜨렸다.40분이나 진행된 업무 보고였지만 아무도 따분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를 마치고 내려오자 회의실 안에 뜨거운 박수가 터졌다.연재준도 박수를 치고
그 뒤로 회의실 문은 한 시간 동안 안에서 잠겨 있었다. 격렬한 몸부림이 지나간 뒤, 유월영은 휴대하고 다니던 티슈를 꺼내 책상을 깨끗이 닦았다.청소를 끝낸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연재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옷매무시를 정돈하고 거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셔츠가 살짝 구겨졌을 뿐, 다른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유월영은 바닥에 떨어진 넥타이를 집어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연재준은 평소처럼 턱을 치켜들고 그녀가 넥타이를 매줄 때까지 기다렸다. 유월영은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저 본사로 돌아가고 싶어요.”연재준은 여자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프로젝트 진행하는 동안만 지방에 있으라고. 이제 프로젝트도 무사히 끝났으니 돌아가고 말고는 유 비서가 결정하면 돼.”그렇게 되어 연재준의 지사 탐방이 끝나고 돌아가는 차량에는 한 사람이 더 늘게 되었다.백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연재준에게 물었다.“대표님, 언니도 이번에 저희랑 같이 돌아가는 거예요?”연재준은 서류에서 눈길도 떼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유진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월영에게 말했다.“정말 잘됐어요, 언니! 안 그래도 언니가 출장 가 있는 사이 많이 외로웠거든요!”유월영은 오렌지 계열의 볼터치를 곱게 바르고 자연스러운 아이라인을 그린 소녀 느낌이 충만한 여자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화장 잘 됐네.”남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한듯 안 한듯한 투명 메이크업이었다.백유진은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그들을 태운 차가 신주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때가 넘은 시각이었다. 백유진을 먼저 집에 데려다주라는 연재준의 지시에 운전기사는 번화가로 방향을 꺾었다.유월영이 잠시 야경에 한눈을 파는 사이 차는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회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호화 빌라 단지였다.자연스럽게 차에서 내린 백유진이 차 창 너머로 인사를 건넸다.“대
그 한마디에 유월영은 달은 몸에 찬물을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그 대화를 끝으로 연재준은 밤새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녀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혼전 순결이라!백유진과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건가?유월영은 여전히 연재준 비서의 신분으로 본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수석 비서가 아닌 일반 비서로 직위가 강등되었다.구석진 곳에 위치한 그녀의 자리는 오래 사람 손이 가지 않아 책상 위에는 잡동사니와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그녀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돌아온 터라 아직 지원팀에서 청소를 하지 않은 듯했다.당황할 법도 하지만 유월영은 담담히 다가가서 스스로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사무실에 도착한 백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다급히 달려왔다.“언니, 미안해요. 아침에 일찍 와서 청소를 해놓으려고 했는데 차가 좀 막히는 바람에 늦었네요. 언니 자리는 원래 제가 있던 자리니까 그 자리로 옮길래요?”유월영은 젖은 물수건으로 책상을 닦으며 덤덤히 말했다.“사무실에 원래 내 자리가 어디 있어? 대표님이 거기가 이제 네 자리라고 하셨으면 거긴 이제 네 자리인 거야. 신경 쓰지 마.”백유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정리 도와드릴게요.”유월영이 말이 없자 백유진은 잡동사니를 담은 박스를 창고로 옮긴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돌아오는 길에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가려는데 여직원들이 안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유 비서님 돌아오신 거 들었어?”“알아. 어제 대표님 차를 타고 왔다면서. 오늘 아마 출근하셨을걸?”“역시 대표님은 유 비서님을 놓지 못하셨나 봐.”안으로 들어가려던 백유진은 걸음을 멈추었다.“솔직히 능력으로 따지면 유 비서님은 누구랑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분이지. 하지만 그건 일적인 부분이고. 대표님 요즘 백유진 씨랑 만난다 하지 않았어?”다른 동료가 급하게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다대며 말했다.“쉿! 마케팅 부서에서 입 잘못 놀렸다가 잘려나간 직원 얘기 못 들었어?”그 여직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유월영은 긴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겨 근처 약국으로 향했다.계산하고 약국을 나오려는데 연재준 모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월영이니? 요즘 어떻게 지내? 왜 요즘은 집에도 안 와?”유월영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사모님, 저는 잘 지내요. 최근 회사 일이 좀 많아서 연락도 못 드렸네요. 바쁜 일은 다 해결했으니까 주말에 집에 한번 방문할게요.”“바쁜 일 해결했으면 주말까지 기다리지 말고 오늘 저녁에 재준이랑 집으로 와. 내가 맛있는 밥상 차려놓고 기다릴게.”유월영은 웃으며 말했다.“네. 대표님께 한번 말씀드려 볼게요.”윤미숙이 타이르는 말투로 말했다.“대표님이 뭐야, 대표님이. 너희가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몇 달 전에 재준 아빠랑 너희 결혼 언제 시켜주냐고 의논했는데 너희도 이제 슬슬 결혼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가 오지 않았어?”그 말에 당황한 유월영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삐끗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결혼식? 우리가?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유월영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윤미숙은 연재준의 계모였다.고용인들이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들은데 따르면 해운 오너 일가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고 했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연재준은 가족들과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고 거의 연락을 안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들의 소식이 궁금했던 연 회장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유월영에게 안부를 묻고는 했는데 그렇게 자주 연락하다 보니 정이 들게 되었다.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의 가족들이 며느리감으로 자신을 대한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단지 그녀의 능력을 높게 사서 다른 직원들보다 조금 더 예뻐한다고 생각했는데….유월영은 당황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사모님, 저 지금 고객사 미팅 가는 중이에요. 저녁에 대… 재준 씨랑 같이 저택으로 갈게요.”“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전화를 끊고 유월영은 한참 정신을 차릴 시간을 가진 뒤에야 택시를 잡아타고 미팅 장소로 향했다.그녀가 멍 때리고 있는 사이 길가에 세워진 차에서 한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쓰는 것도 이상해 보여 이승연은 마스크를 벗으려 했다.하지만 이혁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못 벗게 막았고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중에 문이 열렸다.이혁재가 고개를 돌리자 마중 나온 사람은 오성민이 아니라 가정부였다.“두 분은...”이혁재가 침착하게 말했다.“오 변호사의 사무실 동료입니다. 오 변이 많이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아이고, 아니, 걱정돼서 병문안 왔습니다. ”가정부가 말했다.“오 변호사님 이제 여기 안 계세요.”“여기 안 계신다고요?”오성민은 비록 지병이 있다는 핑계로 보석 신청했지만 신주시를 떠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그럼 지금 어디에 계시죠?”“그건...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오 변호사님은 한동안 집에 안 들어오셨어요.”이혁재가 더 물어보려 했지만 이승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하고 차로 돌아갔다.이혁재는 짧게 자른 머리를 만지며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어디 갔는지도 모르고...못 만나면 할 수 없지. 돌아가자.”그는 이승연이 오성민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매우 만족했다.이승연은 아무 말이 없었고 이혁재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차를 몰았다.가는 길에 이혁재는 이승연을 흘깃 훔쳐보았다. 그녀는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그러다가 길목에서 이승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로데오거리로 가.”“거긴 왜?”이승연이 대답이 없었지만 이혁재는 순간 그곳이 어딘지를 떠올렸다.“로데오 거리? 거기 누나 졸업 후에 찾은 첫 직장이잖아?”문제는 그곳은 오성민의 첫 직장이기도 했고 게다가 두 사람은 그 근처의 오피스텔에서 같이 동거를 했었다.“그럼 오성민이 거기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이승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혁재는 숨이 턱 막혔다.“안 가!”아내를 전 남자 친구와 동거했던 곳에 데려가 전 남자 친구를 만나게 하다니,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녀의 말대로 할 리 없었다.이승연은 덤덤하게 말했다.“차를 세워. 나 혼자 택시 타고 갈게.”이혁재는 길가에 차를
“나쁜 놈에겐 당연히 그에 맞는 방법을 써야지. 내가 월영 씨를 도와 해성 그룹을 약화하는 건 결국 오성민의 힘을 약화하는 거야. 난 오성민이 망하고 망연자실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야.”이혁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이승연이 말했다.“해성 그룹은 연 대표의 것이기도 해. 해성에서 계속 문제가 발생하면 해운 그룹의 주식에도 영향이 갈 텐데.”이혁재가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재준이는 신경 쓰지 않을 거야.”이승연이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찡그리자 이혁재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가 반 그릇 정도 밥을 먹은 걸 보고 더욱 싱글벙글해졌다.‘오늘 반찬 맛있나 보네. 흠, 이야기를 들려주니 누나 식욕도 좋아진 것 같고, 내일도 더 노력해야지.’이혁재가 말없이 부드러운 계란찜을 떠주자 이승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너는 왜 안 먹어?”“누나가 먹고 남은 걸 먹을 거야.”그는 참 많이 변했다.재벌 집 귀공자가 남은 음식을 먹겠다니.이승연은 배가 부르자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다시 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내 메이크업을 고친 뒤 일어나 문밖으로 향했다.이혁재가 급히 뒤돌아 물었다.“여보, 어디 가?”이승연이 대답이 없자 이혁재는 밥을 두 입 떠먹고 서둘러 따라가며 물었다.“어디 가는 건데? 내가 데려다줄게. 나는 지금 누나 운전기사잖아.”차에 탄 후 안전벨트를 매고서야 이승연이 입을 열었다.“오성민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혁재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오성민 그 자식을 만나러 간다고? 안 돼, 난 반대야.”그는 예전부터 오성민에게 더 이상 이승연의 얼굴을 보여줄 생각이 절대 없다고 말했다. 오성민은 그녀를 만날 자격도 없고 이승연도 더 이상 눈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이승연이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아니라 네가 만나러 가는 거야.”“내가 그놈을 왜 만나?”“지금 같은 회사에 있으니까, 사회적으로는 동료이자 파트너야. 그가 이런 큰 사건을 겪었으니 네가 총괄 책임자로서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이승연은 이혁재가 가져온 반찬과 국을 보고 잠시 침묵했다. 그냥 요리사에게 맡기면 되는데 그가 한 시간 넘게 이 일에 매달리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그녀는 물었다.“이젠 백수인 거야?”이혁재가 당당하게 말했다.“그래, 그래서 할 일도 없어. 누나가 나를 먹여 살려야 해. 만약 날 집에서 내쫓으면 나는 길에서 굶어 죽을 거야.”그는 그릇을 들고 뽀얗게 우러난 곰국을 푸기 시작했다.“여보, 따뜻할 때 먹어.”이승연은 아까 보고 있던 해성 그룹 관련 서류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이 서류는 최근 3년간 오성민이 담당한 업무 내용을 담고 있어 꼭 봐야 했다.하지만 글로 적힌 것보다 사건 당사자가 직접 설명해 주는 게 더 정확하다 생각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3년 전 네가 집안이랑 갈등이 있고 난 뒤로부터 해성 그룹에 들어가서 총괄 책임을 맡았지...”이혁재가 눈을 살짝 흘기며 말했다.“아니, 우리 집안이랑 갈등을 빚은 후가 아니라 누나가 식물인간 판정을 받고 깨기 어렵다고 했을 때였어. 지욱이는 내가 망가질까 봐 걱정돼서 할 일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고 그래서 해성으로 갔던 거야.”집안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녀 때문이었다.그는 이처럼 계속 틈틈이 이승연에게 그녀가 없으면 그는 살아갈 수 없음을 알리고 있었다.이승연이 말이 없자 이혁재가 이어 말했다.“이것도 사실 월영 씨가 나에게 해준 제안이었어.”이승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월영이가?”이혁재는 밥을 먹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밥 먹으면서 들어.”이승연은 잠시 멈췄다가 숟가락을 들어 국을 한 모금 맛보았다.3년 전부터 그가 요리할 줄 안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의 요리 실력은 더욱 발전한 것 같았다.보아하니 이 3년 회사와 집에만 있고 노는 데는 그닥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활기 넘치는 20대 남자가 술집이나 클럽에 있는 대신 긴 시간을 주방에서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연의 마음속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이혁재는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알아차
이혁재는 정말 그녀가 그리웠다.이 3년 동안 그는 점점 말수가 적어졌고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오직 집에 돌아와 이승연의 침대 옆에 앉았을 때만이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그는 아침에 뭘 먹었는지, 출근길에 뭘 봤는지 그리고 고객이 얼마나 멍청하고 오성민은 얼마나 역겨운지, 집에 돌아올 때 유리창에 떨어지던 빗방울이 와이퍼에 의해 깨끗하게 닦여지는 모습이 얼마나 치유되는지까지 세세하게 이야기했다.그는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고 그녀가 대답해 주길 바랐다.이혁재의 손이 이승연의 허리에 닿았고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그녀의 허리 위를 쓰다듬었다.이승연은 허리 쪽에서 무언가에 닿는 느낌이 나자 본능적으로 잡으려 했고 그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깨닫고 몸이 굳어져 그를 밀어냈다!그리고 반사적으로 한 발짝 물러나며 세면대를 잡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이혁재의 입술은 붉게 물들었고 눈빛도 더욱 짙어졌다.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이제, 느낌이 좀 오지 않아?”“...아니!”이승연은 축축해진 입가를 닦아냈다.“괜찮아, 몇 번 더 하면 느낌이 올 거야. 어차피 난 누나한테 반응하고 있으니까.”이혁재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아내에게 감정을 느끼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만족스러워했다.“봐봐, 내가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몸이 이렇겠어?”“...알 게 뭐야!”이승연은 더 이상 그와 이 주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나가, 방해하지 말고.”“양치하려는 거야?”“당연하지.”“나도 해야 하는데, 여기 세면대는 원래 2인용이니까 각자 한 쪽씩 사용하면 서로 방해 안 될 거야.”이승연은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이혁재는 그녀 옆에 머물며 따라다니고 싶어 했다.그녀가 어디로 가든, 그는 그곳으로 따라갔다.그녀가 외출하려 하면 그는 운전기사를 자처해 회사까지 데려다주었고, 그녀가 오성민의 사건 파일을 보고 있으면 옆에서 차를 가져다주었
이혁재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누나와 결혼한 이유가 반드시 뭔가를 얻기 위해서여야 해? 그냥 누나를 좋아해서 결혼할 수는 없는 거야?”이승연이 무표정하게 되물었다.“나를 좋아한다고?”“왜? 누나를 좋아하면 안 돼?”이혁재는 다시 물으며 눈에는 거침없는 야성이 서려 있었다.“누나 스스로가 못생기고 몸매가 별로라고 생각해? 아니면 남자한테 매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내가 가출했을 때 머물 곳이 없을 만큼 친구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학교 다닐 때 집 나간 적 있잖아. 그때도 친구들 집에서 잠깐이라도 머물 수 있는데 굳이 누나 집에 와서 있었겠냐고!”이승연은 그의 쏟아지는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무슨 뜻이야?”이혁재가 갑자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좁은 욕실에서 이혁재의 존재감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는 완전히 이승연을 그의 그림자 안에 가둬 버렸고 그녀의 시야는 온통 그로 가득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야.”이혁재는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으며 말했다,“내가 아직 미성년일 때부터 누나를 좋아했고 누나를 원했어. 누나와 키스하고 누나랑 자고 싶었다는 뜻이야.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돼?”“...”이승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그래도 못 믿겠으면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게...처음 누나를 본 건 내가 16살 때였어. 누나가 대학에 합격하고 우리 부모님이 누나네를 우리 집으로 초대했지. 누나는 엄마와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어. 그날 민트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손을 뒤로 하고 걷고 있었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렸고 누나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지.”이혁재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눈빛도 어두워졌다.“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그런 꿈을 꿨어.”이승연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의사는 누나가 식물인간 상태지만 외부 자극에 반응이 있다고 했어. 이 3년 동안 매일 내가 ‘사랑해’라고 말했는데, 들었어?”“...”이승연은 자
이혁재는 이승연이 여전히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핸드폰을 꺼내 보니 비서의 전화였다.“이번 시즌 보너스를 가질 생각이 없는 거야?”“아, 아니에요!”이혁재는 아픈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그럼 이렇게 아침 일찍 전화하는 건 죽고 싶어서 그런 거야?”비서는 울먹이며 말했다.“그게 아니라 대표님. 어제 오성민이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이런 건 바로 알고 싶어하실 것 같아 연락드렸습니다.”이혁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고 원래 피곤했던 눈이 한순간에 날카로워졌다.“뭐라고?”“오성민이 구치소에서 나왔습니다. 지병이 있다는 핑계로 보석을 신청해 허가받았어요.”“어제 일을 지금 알려주면 어떡하자는 거야? 너 정말 보너스 가질 생각이 없는 게 맞구나?”“저, 저희도 이제 막 들은 소식이에요...이제 어떻게 할까요?”“유 대표한테 물어본 후에 결정하지.”전화를 끊고 나서 이혁재는 바로 유월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서가 아침 일찍 잠을 깨운다고 뭐라 하던 그는 이내 다른 사람이 깨든 말든 따질 때가 아니었다.유월영도 결국 이혁재의 전화에 잠에서 깼다.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되어 이제 막 잠들었을 때였다.그녀는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이 대표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죠?”“오성민 그 자식 왜 아직도 살아 있죠?”“그렇게 쉽게 쓰러지면 오성민이 아니죠.”이혁재는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누군가 그의 핸드폰을 잡아갔다.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려 보자 이미 깨어난 이승연이었다.이승연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핸드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그가 법의 빈틈을 이용해 나올 수 있다면 나도 법을 이용해 그를 다시 집어넣을 수 있어.”유월영은 원래 이혁재에게 자신이 엘리자베스 부인에게서 오성민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아냈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승연의 말을 듣고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말했다.“그럼 좋지, 이번엔 언니한테 맡길게.”유월영은 오성민의 일이 이승연이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자극이 되길 바랬고 기꺼이
“아니. 난 안 꺼져.”이혁재는 나가기는커녕 침대에 올라가 이승연을 이불째 안아 품에 안았다.그녀는 많이 말랐다.지난 3년 동안 이혁재는 갖은 방법을 다해 이승연의 건강을 최대한 지키려 했지만, 영양제로만 살을 찌우는 건 불가능했고 이승연은 몸무게가 10킬로 빠진 상태였다.그녀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로, 영양사가 일일 식단을 짜주어 회복을 돕고 있었지만 아직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지금은 봄이라 긴팔과 외투를 입고 있지만 여름에 반소매만 입으면 이승연은 뼈만 보일 게 뻔했다.이혁재는 그녀의 가녀린 팔을 만질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살을 잘라 그녀에게 주고 싶을 정도였다.“누나랑 떨어지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랐는데 난 어디도 가지 않아.”이승연은 계속 그를 밀어냈다. 그저 가볍게 밀어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거부하며 몸을 빼내려 했다.하지만 그녀는 힘이 없었고 이혁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 맞추며 조용히 달래듯 말했다.“또 악몽을 꾼 거야? 법정에서의 그 일은 이미 3년 전 일이야. 이젠 다 지나갔고 그때 당신을 때린 그 나쁜 놈도 법의 심판을 받았어...”이혁재는 약간 볼멘소리로 말했다.“난 그놈한테 손도 대지 않았어. 잘 참아서 법의 심판을 받게 내버려두었어. 누나 말을 듣고 법을 준수하는 모범 시민이 된 거야. 그런데 누나는 칭찬 한마디도 안 해 줘.”이승연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다 지쳐 눈을 감았다.이혁재가 계속 말했다.“배후에 있던 주범, 그 악의 근원인 오성민도 이제 잡혔어. 모든 게 다 끝났으니까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 없어.”이승연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보낸 이혼 서류 못 받았어?”“못 받았어.”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이메일로 보냈는데.”“내 이메일은 오래전에 정지됐어...그리고 누나가 보내도 내가 회사를 가지 않으니까 받지 못해. 그리고 직접 줘도 소용없어. 절대로 열어보지 않을 거니까.”그는 끝까지 발뺌할 생각이었다.이승연은
이승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 장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고씨 가문의 미해결 사건이자 유씨 가문의 목숨으로 지켜진 장부였다. 유월영은 이승연이 두 가문을 위해 정의를 되찾아 줄 수 있기를 바랐고 그녀를 그렇게 믿고 있었다...이승연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유월영에게 약속할 수 없었다.법정에 서는 것도 두려워하는 변호사로서 자신조차 구할 수 없는 자신이 어떻게 유월영을 위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식사를 마친 후, 이승연은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조서희는 이승연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월영아, 승연 언니 다시 괜찮아질 수 있을까? 나는 예전의 엄격하지만 갑자기 웃긴 말을 불쑥불쑥 내뱉던 그 쿨한 언니가 더 좋아.”유월영이 고개를 저었다.“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누구도 진정으로 상대방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으니까.이승연은 6개월이나 품었던 아이를 잃었고 그녀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변호사라는 직업이 파괴되었다.유월영은 바로 이혁재에게 전화를 걸어 이승연의 현재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고, 마지막으로 당부했다.“되도록 승연 언니한테서 눈길을 떼지 마세요. 지금 언니의 모습이 예전 나와 아주 비슷해서 걱정이에요.”이승연이 삶에 대한 의지를 잃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예민하게 감지한 이유는 바로 유월영 자신도 한때 그랬기 때문이었고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다...이혁재는 전화를 끊고 담배를 하나 꺼내 피웠다.한 모금 피우자마자 이승연이 담배 냄새를 싫어한다는 생각이 들어 담뱃불을 끄고 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그는 이승연의 집 아래에서 서성거리다가 집 안의 불이 꺼지는 걸 확인하고 또 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위층으로 올라갔다.이승연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이혁재는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그녀를 살폈다.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다정했다.이승연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그는 소파에 누웠다.그는 아침 6시에 맞춰 진동만 울리도록
유월영과 조서희는 순간 놀라 이승연을 바라봤다.이승연은 음료의 빨대를 잡고 가볍게 휘젓다 입을 열었다.“나는 아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것 같아.”“걷기 시작한 후 다시 로펌에 돌아갔어. 예전처럼 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이혼 소송 하나를 맡았지. 그런데 막상 법정에 서니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고 한마디도 할 수 없더라.”이승연이 웃으며 말했다.“다행히 그 사건은 단지 절차상 개정만 있었고 별도의 변호가 필요 없었어.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변호사 업계의 얼굴에 먹칠을 할 뻔했지.”유월영은 침묵했다.이승연은 한때 법조계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었다. 그녀가 맡은 사건은 거의 패소한 적이 없었고 전설로 여겨질 정도였다. 오성민 조차도 그녀와 비교할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스스로 변호사 망신을 시켰다고 자조하고 있었다.세상이 완전히 뒤바뀐 듯했다.유월영은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심리상담은 받아 봤어?”“받아 봤지.”이승연이 말했다.“몇 가지 약을 처방해 주더라고. 그리고 내 상태가 좋지 않으니 당분간 변호사 관련 일을 접고 치료에 전념하라고 했어.”두 친구의 걱정 어린 시선을 느낀 이승연은 오히려 미소 지었다.그녀는 원래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거의 10년 가까이 변호사로 일했는데 사실 지쳤었어. 이번 기회에 은퇴하고 서류 작업만 하고 법정에는 더 이상 서지 않으려 해. 그게 오히려 좋을 것 같아.”그녀는 두 사람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내가 돈이 많잖아. 직업 하나 잃었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이제는 오히려 개인 시간이 많아져서 여행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음, 한 번쯤 땅끝마을 같은데 운전해서 여행 가고 싶어. 캠핑카에 텐트를 실어서 가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가 있으면 캠핑도 하고, 얼마나 자유롭겠어.”이승연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그러나 유월영은 그녀를 꿰뚫어 보았다.“언니는 10년 전에도 이미 부자였어. 변호사 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