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쪽.“왜 죽이 없죠?”“보양식 죽 말이죠?”“보양식 죽?”“네, 정은 아가씨가 자주 끓여준, 찹쌀과 표고버섯, 황태, 대추를 함께 끓인 그 죽 말씀하시는 거죠?”“아이고, 그거 준비하려면 표고버섯, 황태랑 대추만이라 해도 전날에 준비를 해놔야 해요.”“그리고 불 조절이 특히 중요해요. 저는 정은 아가씨처럼 인내심이 없어서 계속 불을 볼 수 없어요. 제대로 끓여내지 못해요.”“그럼 고기 소스 좀 가져다줘요.”“그래요. 도련님.”“맛이 이상한데요?” 도겸은 병을 훑어보았다. “포장도 다르네요.”“도련님이 자주 먹던 그건 이미 다 먹어서 이제는 이거밖에 없어요.”“나중에 마트 가서 두 병 사다 놔요.”“못 구해요.”왕순자는 약간 난처하게 웃었다. “그것도 정은 아가씨가 직접 만든 거라서, 저는 못 해요.”쿵! 도겸은 깜짝 놀랐다.“음? 도련님, 식사 안 하세요?”“네.”왕순자는 도겸이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갑자기 왜 화를 내시는 거지?’...“게으름뱅이! 일어나!”정은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뜨지 않았다. “시끄러워, 조금만 더 잘래.”조수민은 화장을 마치고 가방을 고르고 있었다. “곧 8시야, 너 강도겸한테 아침 안 해줘도 돼?”예전에도 정은은 가끔 외박하곤 했지만, 새벽에는 돌아갔다. 도겸의 속을 위해 보양식 죽을 끓이기 위해서였다. 수민은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겸이 다친 것도 아니고, 휴대폰으로 배달을 시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정말 사람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쓸데없는 습관이었다.수민이 계속해서 부르자 정은은 잠결에 손을 흔들었다. “안 해줘도 돼, 헤어졌어.”“오, 이번에는 며칠 동안 헤어지려고?”수민의 말에 정은은 할 말을 잃었다.“그래, 그럼 더 자. 아침 식사는 탁자 위에 있어. 나는 일하러 간다. 그리고 나 저녁 약속이 있어서 저녁은 준비하지 마.”“됐다. 너 어차피 다시 돌아갈 거지? 그럼 나갈 때 베란다 창문 좀 닫아줘.”정은
“자리 찾기 힘든가? 내가 나가서 도와줄까요? 음?”도겸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챈 선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 형, 누나... 아직 안 돌아왔어요?” 이미 3시간이 넘었고 도겸은 두 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뭘 돌아와? 이별이 장난이야?” 그 말을 마치고 도겸은 선우를 지나 소파에 앉았고, 선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헤어진 거야?’하지만 곧 선우는 머리를 흔들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겸이라면 이별을 말한 뒤 다시는 붙잡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정은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 모든 여자가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어도, 정은은 그렇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도겸아, 왜 혼자야?” 고동건이 재미있는 듯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기한 3시간은 이미 지났고, 하루가 다 갔어.”그러자 도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기에서 졌으니 벌칙을 받아야지. 벌칙은 뭐야?”진심으로 하는 말에 동건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다른 거 해보자. 술 마시는 거 말고.”“뭔데?”“정은이한테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를 하는 거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라고.”동건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고 선우는 도겸의 전화로 정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차단된 건가?’ 도겸은 잠시 멍해졌다.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선우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 아마도 진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걸 거예요. 정은 누나가 형을 차단할 리가 없잖아요.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선우는 말하며 자신도 민망해졌고 동건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어쩌면 정은이 이번에는 진짜일지도 몰라.”그러자 도겸은 코웃음을 쳤다. “이별이 진짜지 그럼 가짜야? 이별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이런 내기 다시는 하지 말자. 앞으로 누가 소정은에 대한 말을 꺼내면, 친구로 지낼 수 없을
어젯밤엔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새벽이 되자 선우가 또 한잔하자고 했고, 강도겸은 운전기사가 이끌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에 쓰러져 바로 잠에 빠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정신을 차려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이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구나.’몽롱한 상태에서 도겸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눈을 뜨자, 위에서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으으...” 도겸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속 쓰려! 소정은!”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도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은은 참 대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버텼던 그녀였다.‘좋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 근데… 약은 어디에 뒀지?’도겸은 거실로 나가 약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서랍을 뒤져보았지만, 약상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왕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장약을 찾으시는 건가요? 약상자에 넣어둔 걸로 알고 있어요.]도겸은 이마에 핏줄이 뛰는 것을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약상자가 어디에 있죠?”[옷장 서랍 안에 있어요. 정은 아가씨가 도련님이 술을 마신 후 아침이면 위가 아플 걸 알고 쉽게 찾을 수 있게 두었다고 하더라고요. 여보세요? 도련님? 아직 듣고 계시죠? 전화 끊으신 건 아니죠?]도겸은 옷장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자주 먹던 위장약이 다섯 통이나 들어 있었다. 약을 삼키고 나니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서랍을 닫으려는 순간, 도겸은 갑자기 멈춰 섰다. 서랍 속에 보석과 명품 가방은 여전히 있었지만, 정은의 모든 신분증, 여권, 학위증, 졸업증 등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구석에 쌓여 있던 캐리어 중 하나도 사라져 있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좋아, 좋네, 좋아...”도겸은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너무 자유롭게 둬도 안 돼. 자유를 줄수록 더 고집을 부리니까.’
“형, 무슨 일이에요?”선우는 술을 홀짝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도겸을 보곤 슬그머니 동건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도겸의 어두운 얼굴에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원래 활기찼던 이곳의 공기도 잠잠해졌다.“누구한테 차단당해서 그런 거겠지.”동건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을 던졌다. 도겸의 얼굴은 그 말에 더욱 어두워졌다.쾅! 도겸은 술잔을 유리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의 눈에 폭력적인 기운이 어른거렸다.“다시는 걔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을 못 알아들어?”동건은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노래하던 사람도 입을 다물었고, 주변 사람들도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선우는 목구멍에 걸린 술을 삼키며, 정은 누나가 정말로 결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빈은 술에 약간 취해 정신을 차리며 선우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은이 돌아왔어?”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할 용기가 없어 두루뭉술하게 말했다.“모르겠어요.”현빈은 선우의 말을 듣고 정은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짐작했다.바텐더가 다섯 병의 술을 가져오자, 누군가가 용감하게 제안했다.“진실 게임 할래요?”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다.“좋아, 나 그거 제일 좋아해.”이때 한 여자가 막 들어왔다. “안나 이쪽으로 와, 마침 형 옆에 자리가 비었어.”안나는 자연스럽게 도겸 옆에 앉았다. 그녀는 이 클럽의 에이스였고, 도겸과도 익숙한 사이였다.“강 대표님.”도겸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너희끼리 놀아, 난 먼저 간다.”남겨진 사람들은 당황했고, 오늘 밤의 분위기를 깨뜨린 듯한 안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술집을 나온 도겸에게 운전기사가 어디로 갈지 물었다. 브랜디 두 잔을 마신 후, 도겸은 어지러움을 느꼈고 텅 빈 집을 떠올렸다.“회사로 가죠.”“강 대표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
“당시의 충동적이고 불합리했던 행동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해야 해. 그건 내가 교수님에게 빚진 거야.”수민은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이 떨렸다. 정은의 말이 목에 걸려 숨이 막힐 듯 두 번이나 기침을 했다. 도망치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제발 나 좀 살려줘, 정은아.”정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너도 알잖아. 나 대학 때 유일하게 재수강한 과목이 오미선 교수님의 수업이었어. 교수님 앞에서는 난 늘 작아지기만 했고, 그분이 무서워서 도망치고만 싶었어.”수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게다가, 나는 교수님 눈에도 띄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어. 교수님은 나를 기억도 못 하실 거야. 미안하지만,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정은은 수민의 마음을 이해한 듯,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수민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주 적절한 사람이 있어.”정은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응? 누구?”“너 내 사촌 오빠인 조재석, 기억나지?”정은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하지.”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물론 기억하지. 국내 최연소 물리학과 교수, 그리고 ‘네이쳐’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 과학자 10인 중 1위였잖아. 오미선 교수님 밑에서 생명과학을 공부하며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생물학계에서 천재로 주목받았던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전과해 물리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큰 화제였고. 결국, 사람은 무엇을 하든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 법이야.”현재 재석은 국제 물리학계에서 권위자가 되었다. 정은은 재석과 같은 학교 출신이지만, 다른 시기에 입학한 후배였다. 입학하자마자 재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나중에 수민을 통해 재석이 수민의 사촌 오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석은 몇 년 동안 해외 물리학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3개월 전에 귀국했다.수민은 자랑스럽다는 듯
가까이 다가가니, 도겸은 정은의 예쁜 웨이브 머리가 곧게 펴지고, 그토록 좋아했던 그녀의 머리색이 검은색으로 염색된 것을 발견했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하이힐 대신 단순한 하얀 티셔츠 하나만 걸친 채 아주 캐주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예전보다 더 빛나 보였다. 이별의 어두운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만약 이게 연기라면, 도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은이 연기를 정말 잘한다고. 너무 잘해서, 자신을 화나게 한다고. 정은은 도겸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표정은 도겸이 화를 내기 직전의 전조였다.“히하!” 도겸은 비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 안목은 별로인 것 같아. 내 옆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보는 눈이 좀 더 높아야 하지 않겠어? 아무나 데리고 다니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체면?” 정은은 슬픔이 살짝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도겸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정은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더욱 화가 났다. 이 감정이 점점 그의 영역 의식으로 다가왔다. 정은은 이미 그의 영역 안에 속한 사람이었고, 지금은 필요 없다 해도, 다른 사람의 침범은 용납할 수 없었다.“난 할 일이 있어서 가야 해.” 정은은 도겸이 계속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가? 어디로 갈 건데? 조수민의 아파트? 그게 네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이번에는 각종 증서들이랑 신분증도 챙겨갔던데. 좋아, 한번 해보자는 거지?”정은은 마음이 아팠다. 도겸의 성격이 나쁘다는 것, 심지어 폭력적이라는 것을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였지만, 이런 말을 직접 들으면 여전히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겸은 그녀의 행동을 단순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은은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스르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먼저, 저분은 내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만난 것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더러운 관계가 아니야.”“그리고,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네 문제야.”이때, 정은이 불러
정은은 오랜만에 손수 무언가를 해보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도겸과 함께했던 지난 몇 년 동안, 옷이나 식사는 스스로 해결했지만, 이런 육체적인 노동은 거의 하지 않았었다. 몇 년 전 도겸이 창업을 시작할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집안 청소만큼은 언제나 청소 아주머니에게 맡겼었다. 페인트 한 통을 다 칠하고 나서 정은은 아픈 허리를 부여잡았다. 몇 년 동안 편안하게 지내왔던 그녀에게는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페인트를 더 가져오기 위해 복도로 나가려던 순간, 정은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발로 페인트 통을 차버렸다. 서둘러 페인트를 닦아내기 시작했지만, 이웃집 문 앞에 조금 쏟아져 버렸다. 걸레를 가져와 닦으려던 찰나, 문이 갑자기 열리며 정은은 깜짝 놀라 사과를 하려고 했다. 뜻밖에도 문 앞에는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너도 여기 사는구나?”“어떻게 여기에 계세요?”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조재석은 바닥을 한번 훑어보고, 정은의 뒤편을 살폈다.“그래서 오늘 이사 온 사람이 너였구나?”정은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네, 오늘부터 우리 이웃이에요.”정은의 말에 재석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가 이곳에 사는 이유는 실험실과 학교와 가까워서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은이 여기서 산다고? 이곳은 여자 혼자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이곳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곳이었다. 재석이 움직이지 않자, 정은은 그가 페인트로 복도를 더럽힌 것을 신경 쓰는 줄로만 알았다.“죄송해요. 조금 흘렸어요. 곧 다 치워요.”정은은 서둘러 페인트를 닦아냈다. 내려갈 때, 재석이 들고 있는 쓰레기를 보고 정은이 말했다.“마침 내려가는 길인데, 제가 대신 버려드릴까요?”재석은 거절하지 않았고, 대신 집에서 접이식 사다리를 가져왔다.“벽을 칠할 거면, 이걸 쓰는 게 편할 거야.”“고마워요.”사다리가 있으니 벽 칠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정은은 오전 내내 집안의 낡은 벽을 모두 칠했다. 집은 금세 깔끔
재석은 한 걸음 뒤에서 정은을 따르고 있었다. 어젯밤의 불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차분함을 되찾은 것 같았다. 차를 몰고 온 재석이 문을 열어주자, 정은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과일 가게를 지나칠 때, 정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잠깐만 멈춰 줄 수 있을까요? 2분만요. 과일 좀 사려구요.”“과일?”“네, 교수님 드리려고요.”재석은 핸들을 잡고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정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선배님은 손님을 방문할 때 항상 빈손으로 가시나요?”재석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고 정은은 조용히 엄지를 세우며 감탄했다. ‘역시 대단한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봐?’하지만 이내 재석은 차를 길가에 세웠다....오미선 교수의 집은 서비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환산로에 위치한 작은 양옥집이었다. 서양식과 동양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 집은 단풍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어, 고요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6년 만에 찾아온 이곳에서, 정은은 안절부절 못하며 발밑의 과일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용기가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정은의 마음을 읽은 듯, 재석이 물었다.“내리지 않을 거야?”정은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렸다가요.”재석은 긴장해 하는 정은을 몇 초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먼저 들어갈게.”정은은 재석이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두 번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이맘때쯤이면 백화가 만발해 있었다. 작은 정원에 들어서자 부드러운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정은의 코끝에 스며들었다. 난간 옆에는 주인이 돌보지 못한 듯 시들어 버린 채소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집에 들어가기 전, 정은은 오미선 교수의 목소리를 들었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재석을 따라 걸었다.“교수님.”오미선 교
남자는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겼고, 수염이 덥수룩해서 마치 하룻밤 사이에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그는 심지어 먼저 밥을 먹기도 전에 서류 한 부를 내밀었다.“정은아, 이건 초보적인 스마트 실험실 건설 계획이야! 어젯밤 나에게 보낸 수요와 결합하여 이미 보충했어. 이 몇 군데는 더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이 밀폐된 문 말이야.”“그곳은 생물실험실이기 때문에 일부 유해미생물이나 위험한 세균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어. 대문 재질은 아래의 이 몇 가지를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해...”“나는 이미 다른 차원에 따라 그들을 비교하고 분석했는데, 종합적으로 볼 때 이 GFRT 신형 재질이 가장 좋은 것 같아. 밀봉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가소성도 매우 강하거든...”짧디짧은 하룻밤사이에 인훈은 실험실의 초기형태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디테일까지도 아주 완벽하게 보완했다.그리고 이렇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실험실 관련 건설 규범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했다.정은은 눈을 깜박였다.“오빠, 어젯밤에 보충 수업이라도 한 거야?”“크험...”인훈은 가볍게 기침했다.“임시로 공부 좀 했고, 또 이 방면의 전문가에게 가르침을 청했어.”그러나 이것은 가장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정말 정은을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내가 조사해 봤는데, 생물 실험실은 실험실에서 처리하는 미생물 및 그 독소의 위해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야 해.”“기존 국가 표준에 따르면 총 P1, P2, P3, P4 네 개의 등급이 있어. 정은아, 나에게 대담한 생각이 하나 있는데.”“뭔데?”“이 네 가지 등급은 각각 네 가지 방호 규범에 대응해. 스마트 실험실인 이상... 우리는 이 네 가지 다른 규범 표준에 대해 네 가지 심지어 더 많은 실험실 모델을 설정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이렇게 되면 하나의 실험실은 N개의 실험실과 같았다.지능형 통제로 전환하면, 심지어 인건비도 필요하지 않았다.정은의 두 눈에서 빛을 발했다.“이뤄질 수 있을까?”“가능성이 커.”
“그런데 정은아, 이걸 왜 물어보는 거야?”정은은 두 눈에서 빛을 발했다.“마침 나한테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오빠는 어떡해 생각해?!”인훈은 멍해졌다.“무, 무슨 프로젝트?”“스마트 실험실. 하지만 토지 건설까지 함께 해줘야 돼.”그렇다. 정은이 원하는 것은 전통적인 실험실이 아니라 고도로 지능화된 실험실이었다.두 사람은 아주 급하게 밥을 먹었다.인훈은 정은의 수요를 듣고, 지체없이 떠나 회사로 돌아가 기획안을 쓰려 했다.그리고 정은은 그가 간 후, 바로 다른 두 명의 ‘파트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민지와 서준은 자연히 두 손 들어 찬성했다.현재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그날 저녁, 정은은 집에 돌아와 더욱 상세한 요구를 이메일로 정리하여 인훈에게 보냈다.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이튿날 아침, 인훈에게서 전화가 왔다.[정은아, 아니다, 소 사장님, 이 프로젝트는 내가 맡을게! 지금부터 넌 나의 존귀한 고객이자 하나님이야!]“풉...”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오빠, 그 정도는 아니야, 왜 그래...”[아니야. 이것도 규정이야! 아무튼 앞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제기해. 날 오빠라 생각하지 말고, 단지 네 일을 처리해줄 을이라 생각해. 넌 갑이잖아.]정은은 더 크게 웃었다.그러나 인훈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공적인 일은 공정하게 처리하며, 그 어떠한 사적인 감정도 섞지 않았다.“오빠, 왜 예산이 얼만지 물어보지도 않고, 가격에 대해 얘기도 하지 않는 거야? 밑지는 장사면 어떡하려고?”인훈은 너무나도 성실하고 단순했다.인훈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왜?”[우선, 넌 분명히 나로 하여금 손해를 보게 하지 않을 거야. 둘째, 돈을 벌지 않더라도 널 도울 수 있고, 동시에 내 회사를 계속 경영하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오빠...”정은은 한숨을 쉬었다.“앞으로 너무 실속 있게 행동하지 마. 쉽게 손해 볼 수 있으니까.”‘오빠는 따지기
인훈도 대학을 나왔으니, 정상이라면 이런 기본상식을 모를 리가 없었다.특히 계약처럼 중요한 일은 더 그랬다.“요즘 너무 바쁜 데다가, 이건 또 새로운 프로젝트거든. 참고할 만한 계약 템플릿이 없어서 계약을 작성할 때 계약 위반 조항을 함께 넣는 것을 잊어버렸어.”인훈은 상대방에게 당한 후에도 여전히 반응하지 못했다.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계약정신이 없고, 남의 노동 성과를 존중하지 않는다’였다니. 이것은 매우 바보 같았다. 아니면, 무척 무던했다.아무튼 정은은 가장 먼저 배상금을 얼마 받을 수 있나에 대해 생각했다.“계약서 같은 것도 오빠가 직접 써야 돼?”인훈은 더욱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원래는 아닌데... 전에는 이것들 모두 동업자들이 관리하고 있었어. 난 공사장의 일만 책임졌고. 그러나 이주 전에, 그 사람은 회사에서 나가겠다고 했어...”인훈 이 어수룩한 사람은 만류해도 성과가 없어, 이를 악물고 회사의 가뜩이나 넉넉하지 못한 현금에서 대부분을 뽑아내어 당초에 투입한 돈을 그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경영 상황에 따라 손실을 계산하지 않은 거야?”“어? 손실을 계산해야 돼?”“그렇지 않으면?” 정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당초에 두 사람 함께 회사를 차렸으니, 돈을 벌면 두 사람 함께 나눠야 하지 않겠어?”“그럼!”“그럼 같은 도리로, 손실이 생기면 두 사람 공동으로 부담해야 하지 않겠어?”현재 회사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아 손실이 있는 게 뻔했으니, 어떻게 회사를 떠난 후에 자신이 낸 돈을 그대로 돌려주라는 요구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주식을 조금 샀다고 해도, 손해 볼 것은 손해 봐야 했다. 당장 팔아도 여전히 손해를 부담해야 했다.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다.“오빠, 그렇다면, 나도 오빠와 같이 일하고 싶어. 어차피 손해를 보지 않을 장사잖아.”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오빠는 이걸 계산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다만 돈 때문에 그 사람과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
정은은 이 말을 듣고 인훈을 위해 기뻐했다.“그래, 그럼 주문할게!”“응!”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은은 결국 채소 두 개에 국 하나만 시켰다.“이게 다야?”“응, 다야.”“안돼, 요리 두 개 더 추가해.”“아니야! 두 사람 그렇게 많이 못 먹어! 오빠, 오늘 돈 좀 쓰려고 결심한 거야?”‘자발적으로 바가지를 쓰다니.’인훈은 웃으며 말했다.“가끔 여동생이 바가지를 씌워도 나쁠 건 없지.”“정말 필요 없어, 낭비하지 마.”“좋아, 네 말 들을게.”인훈은 맥주 두 캔을 주문했다.곧 음식이 올라왔고, 남매는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요즘 학교는 좀 어때? 적응했어? 내 번호는 저장했고? 도움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전화해.”같은 타지에 있으면서 남매는 당연히 서로를 도와주며 보살펴줘야 했다.“그럭저럭이야. 비록 전에 문제가 좀 생겼지만 지금은 다 해결됐어.”“그럼 됐어, 자, 얼른 밥 먹어...”인훈은 웃으며 말했다.중간에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정은아, 너 먼저 먹어. 난 나가서 전화 좀 받을게.”“좋아.”5분 후, 인훈이 돌아왔고, 다시 맞은편에 앉았다.정은은 단번에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오빠, 오빠도 좀 먹어.”“어! 그래!”인훈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미 웃음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봐도 억지웃음이었다.정은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빠, 무슨 일이야?”이 말이 나오자, 키가 1미터 80센티미터 넘는 사나이는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혔다.“사실 나는 정말 이 사장님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니깐. 분명히 이미 얘기 끝낸 프로젝트에 계약까지 체결해면서 그렇게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였는데, 왜 갑자기 번복을 하는 거지?!”“그 사람들은 계약정신이 뭔지도 모르는 건가? 다른 사람의 노동 성과를 존중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아마도 나 자신의 문제겠지. 잔혹한 경쟁에 적응하지 못했고, 시장 파악도 잘 못했어...”처음에는 울분이 넘쳤지만, 마지막에는 낙담만 느꼈다.“상대가 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실험실은 건축회사의 자질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아서 일반 집을 짓는 것과 달라.”“게다가 실험실이 완공된 이후의 보안 시스템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건설 회사에 있어 아주 어려워.”세 사람은 커피숍에 모였다.정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자신이 장악한 소식을 다른 두 사람에게 공유했다.민지 앞에는 티라미수 2인분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열심히 먹고 있었고, 동시에 귀를 기울였다.“저희 아버지는 많은 청부업자 아저씨를 알고 있어요. J시 이쪽에 업무가 있는 분들도 있고요. 그러나 어제 제가 물어봤는데, 그들은 집만 지을 줄 알고 실험실을 지을 줄 모른데요.”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전문적인 일은 그래도 전문적인 사람에게 맡겨야 돼.”서준이 말했다.“그리고 건축회사와 소통하는 디자이너를 따로 청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쌍방의 요구가 잘못 전달되어 최종 효과가 떨어질 수 있어요.”그후 며칠간 세 사람은 모두 쉬지 않았다. 수업을 제외하고, 남은 시간은 기본적으로 밖에서 돌아다녔다.업계에서 괜찮은 건축회사 몇 곳을 자세히 알아보니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디자이너가 실험실 건설을 모르거나 예산이 터무니없이 높았다.“안 되겠어, 너무 힘들어. 좀만 쉬자...”두 건축 회사를 찾아간 민지는 기진맥진했다.서준 쪽도 별 소득이 없었다.정은은 더 비참했다.민지는 콜라 두 병을 마시자, 순식간에 힘이 났다.“이렇게 큰 도시에 실험실을 건설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전 안 믿어요!”“5시에 내가 다른 회사를 예약했는데, 그 회사는 자질이 모두 갖추어졌고, 평판도 꽤 좋아. 일단 먼저 가서 상황 좀 볼게.”정은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지금 4시 20분이니 택시 타고 가면 딱이었다.그러나 그녀가 택시를 타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정은아, 바빠? 난 인훈 오빠야.]“오빠?!”할머니 생신 잔치 이후로 두 사람은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게다가 전에도 통화를 한
“선배님, 선배님, 그렇게 빨리 가지 마요...”정은은 재빨리 쫓아갔다.가까스로 따라잡자, 재석은 몸을 돌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은을 보았다.“그렇게 재밌어?”정은은 즉시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네, 재미있어요!”‘정말 너무 재밌지!’재석은 한숨을 쉬었다.“그런데 네 장갑과 목도리가 다 젖었잖아.”“괜찮아요!” 정은은 바로 입을 열었다.“15분 전에 너도 그렇게 말했는데. 또 조금만 더 놀면 집에 가겠다고 했어.”‘어?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왜, 왜 기억이 안 나지??’정은은 멍해졌다.재석이 말했다.“가자, 놀고 싶어도 돌아가서 장갑과 목도리, 그리고 신발 갈아입고 다시 놀아.”고개를 숙이자, 정은은 그제야 자신의 부츠가 이미 젖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 자신조차도 느끼지 못했는데, 재석이 오히려 발견했다.“그래요.” 정은은 재석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틈을 타서 재석의 손에서 통을 가져왔다. 그 안에는 그녀의 눈놀이 도구가 들어 있었다.“선배님, 이건 내가 들면 돼요.”재석은 할말을 잃었다.정은은 애꿎은 표정으로 입을 뗐다.“몰래 놀고 싶은 게 아니에요.”말을 마치자, 정은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재석은 더욱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가 이따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는 듯, 정은이 집에 돌아와 옷을 싹 바꾼 뒤, 재석은 다시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다.“선배님?”“성설궁에 가서 눈 구경 할래?”“지금이요?”“음.”“그런데 오늘 입장권이 없는 것 같은데...”“나와 같이 가면, 입장권은 필요 없어.”“그럼 당연히 가야죠!”두 사람은 바로 출발했다.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피해 다른 한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들어가면 바로 궁전의 뒷마당이었다.앞으로 돌아가면 앞에 우물 하나, 살구꽃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다시 앞문으로 나가면 바로 넓은 광장이었다.다음 순간, 정은은 눈앞의 아름다운 경치에 어안이 벙벙해졌다.‘어쩐지 인터넷에서 그렇게
정은은 가장 빠른 속도로 정리한 다음, 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두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아이들이 이미 출동하여 각자 도구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올 겨울의 첫눈이라 사람들은 유난히 기뻤다.사람들 외에, 재석은 눈이 쌓인 나무 밑에 서서 웃음을 머금으며 정은을 보고 있었다.정은은 눈앞이 환해지더니 바로 달려갔다.가까이 가서야 정은은 재석의 발 옆에 둥근 통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에는 뜻밖에도 눈집게, 삽, 플라스틱 장난감 등이 있었다.그리고 눈집게는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모양이 있었다.“이, 이건...”정은은 침을 삼켰다.“너 놀라고.”“아, 선배님,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그러나 2분 후...정은은 흥분해하며 재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선배님! 이 오리 좀 봐요! 엄청 잘 만들었죠?!”“그리고 이 아기 공룡도 너무 귀여워요!”“선배님, 이 작은 삽으로 저쪽에서 깨끗한 눈 좀 퍼 주세요. 새하얀 거요. 흙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돼요.”“선배님...”“선배님!”정은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나가는 이웃들은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쩔 수 없었다. 정은이 자란 곳에는 겨울에 거의 눈이 내리지 않았다.오직 그녀 만이 이 큰 눈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있었다.정은은 아주 즐겁게 놀았다.재석은 정은이 노는 것을 지켜보며, 또 가끔 그녀의 지휘대로 움직였고, 심지어 꼬리처럼 바쁘게 정은을 따라다녔다. 그도 꽤 즐거운 모양이었다....진욱은 지금 실험실에서 머리를 잡고 있었다.“지금이 몇 시인데, 조 교수는 왜 아직도 안 온 거야? 어제 두 조의 데이터에 모두 문제가 생겨서 조 교수가 수정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태민은 은근히 놀랐다.“전 교수님, 조 교수님 기다리고 계셨어요?”“맞아, 왜 그래?”“그... 조 교수님 오늘 휴가 내셨어요.”“휴가?! 언제?! 난 왜 몰랐지?!”“교수님은 어젯밤 한밤중에 이메일로 통지를 보내셨어요. 그리고... 자신이 없는 동안
정은은 줄곧 재석이 향수를 쓰는지 안 쓰는지가 궁금했다.그러나 이 문제는 좀 예민해서 잠시 마음속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정은은 어색하게 웃었다.“고마워요, 선배님. 외출할 때 목도리 챙기는 것을 잊어버렸어요...”사실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귀찮았던 것이다.쓰레기를 버리고 바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이 정도면 목도리를 안 둘러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재석은 정말 정은의 속마음을 몰랐을까?다만 간파하지 않았을 뿐, 묵묵히 자신의 목도리를 그녀에게 주었다.“방금 임 교수님과 장 교수님이 왜 아이를 가지지 않으셨냐고 물었지? 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임 교수님의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래.”그 시대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사형을 선고받은 범인과 다름없었다.장 교수의 집안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 사람이 이혼하도록 강요했다.임 교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더 이상 매달리고 싶지 않아 스스로 악인이 되려고 이혼을 제기했다.그러나 장 교수는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다.“후에 장 교수님이 그 당시의 아내를 되찾기 위해서 집안과 관계를 끊고 임 교수님을 찾아가셨다고 들었어.”“아무튼 20년 동안 집안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가족들도 서서히 이 현실을 받아들였고,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거야. 하지만 사이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야.”임 교수는 본래 고아였다. 장 교수도 그녀를 위해 자신을 고아로 만들었다.이때부터 그들의 인생은 서로뿐이었다.정은은 이 말을 듣고 눈시울을 붉혔다.“그 시절은 정말 로맨틱한 것 같아요. 비록 발달하진 않지만, 일생동안 딱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그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재석은 그런 정은을 바라보았다.여자는 풍경을 보고 있었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풍경으로 되기도 했다.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은 흰 안개로 되어 마치 응결된 이슬과 같았다.그녀는 중얼거렸다.“올해 눈이 올지 모르겠네...”작년은 눈송이만 조금 날렸는데, 땅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물이 되어 전혀 쌓이지 않았다.재작
그릇은 두 사람이 함께 씻었고, 주방도 두 사람이 함께 치웠다.마지막으로 함께 외출을 하며 쓰레기를 버렸다.정은은 패딩을 입고 쓰레기를 들고 나갔다.재석도 집에 가서 두 포대의 쓰레기를 들고 나왔다.“선배님, 쓰레기를 안 버린 지 얼마나 됐어요?”“이주 정도?”“선배님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다행히도 모두 포장함, 비닐 봉지들이었고 남은 음식찌꺼기나 과일껍질 같은 것은 없었다.“가자.”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두 사람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미 쓰레기를 버리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그렇게 네 사람이 딱 마주쳤다.“조 교수랑 정은이 너도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거야?”“네.”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오늘 또 무슨 맛있는 걸 한 거야? 아래층에서도 아주 향기가 죽여주던데!”“버섯전골이요.”“어머! 조 교수가 어제 받은 그 버섯 맞지?”어제 재석이 택배를 받을 때, 마침 채소를 사서 돌아오는 할머니를 만났는데, 그녀에게 버섯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두 사람 하나는 식재료를 제공하고, 다른 하나는 음식을 책임지니 이웃이 된 것도 다 운명이지! 이렇게 친해졌으니 차라리 함께 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옛날 사람들은 시원시원하고 대담했다.정은은 처음에는 반응하지 못하다가, 재석의 기침소리를 듣고서야 갑자기 정신을 차리며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 지금 오해를...”할머니는 즉시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설명할 필요 없어, 그럴 필요 없어. 너희들이 좋으면 되지! 가자 영감, 집에 가야지!”“그래...” 할아버지는 웃으며 대답했다.“당신도 참, 늘 허튼소리를 하기 좋아한다니깐. 정은이 얼굴이 다 빨개졌잖아.”“내가 무슨 허튼소리를 했다는 거야? 그 당시에 우리도 하나는 위층, 하나는 아래층에서 살다가 알게 되었잖아? 그때 사회가 이렇게 개방되지 않아서, 우리는 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