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쪽.“왜 죽이 없죠?”“보양식 죽 말이죠?”“보양식 죽?”“네, 정은 아가씨가 자주 끓여준, 찹쌀과 표고버섯, 황태, 대추를 함께 끓인 그 죽 말씀하시는 거죠?”“아이고, 그거 준비하려면 표고버섯, 황태랑 대추만이라 해도 전날에 준비를 해놔야 해요.”“그리고 불 조절이 특히 중요해요. 저는 정은 아가씨처럼 인내심이 없어서 계속 불을 볼 수 없어요. 제대로 끓여내지 못해요.”“그럼 고기 소스 좀 가져다줘요.”“그래요. 도련님.”“맛이 이상한데요?” 도겸은 병을 훑어보았다. “포장도 다르네요.”“도련님이 자주 먹던 그건 이미 다 먹어서 이제는 이거밖에 없어요.”“나중에 마트 가서 두 병 사다 놔요.”“못 구해요.”왕순자는 약간 난처하게 웃었다. “그것도 정은 아가씨가 직접 만든 거라서, 저는 못 해요.”쿵! 도겸은 깜짝 놀랐다.“음? 도련님, 식사 안 하세요?”“네.”왕순자는 도겸이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갑자기 왜 화를 내시는 거지?’...“게으름뱅이! 일어나!”정은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뜨지 않았다. “시끄러워, 조금만 더 잘래.”조수민은 화장을 마치고 가방을 고르고 있었다. “곧 8시야, 너 강도겸한테 아침 안 해줘도 돼?”예전에도 정은은 가끔 외박하곤 했지만, 새벽에는 돌아갔다. 도겸의 속을 위해 보양식 죽을 끓이기 위해서였다. 수민은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겸이 다친 것도 아니고, 휴대폰으로 배달을 시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정말 사람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쓸데없는 습관이었다.수민이 계속해서 부르자 정은은 잠결에 손을 흔들었다. “안 해줘도 돼, 헤어졌어.”“오, 이번에는 며칠 동안 헤어지려고?”수민의 말에 정은은 할 말을 잃었다.“그래, 그럼 더 자. 아침 식사는 탁자 위에 있어. 나는 일하러 간다. 그리고 나 저녁 약속이 있어서 저녁은 준비하지 마.”“됐다. 너 어차피 다시 돌아갈 거지? 그럼 나갈 때 베란다 창문 좀 닫아줘.”정은
“자리 찾기 힘든가? 내가 나가서 도와줄까요? 음?”도겸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챈 선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 형, 누나... 아직 안 돌아왔어요?” 이미 3시간이 넘었고 도겸은 두 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뭘 돌아와? 이별이 장난이야?” 그 말을 마치고 도겸은 선우를 지나 소파에 앉았고, 선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헤어진 거야?’하지만 곧 선우는 머리를 흔들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겸이라면 이별을 말한 뒤 다시는 붙잡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정은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 모든 여자가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어도, 정은은 그렇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도겸아, 왜 혼자야?” 고동건이 재미있는 듯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기한 3시간은 이미 지났고, 하루가 다 갔어.”그러자 도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기에서 졌으니 벌칙을 받아야지. 벌칙은 뭐야?”진심으로 하는 말에 동건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다른 거 해보자. 술 마시는 거 말고.”“뭔데?”“정은이한테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를 하는 거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라고.”동건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고 선우는 도겸의 전화로 정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차단된 건가?’ 도겸은 잠시 멍해졌다.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선우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 아마도 진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걸 거예요. 정은 누나가 형을 차단할 리가 없잖아요.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선우는 말하며 자신도 민망해졌고 동건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어쩌면 정은이 이번에는 진짜일지도 몰라.”그러자 도겸은 코웃음을 쳤다. “이별이 진짜지 그럼 가짜야? 이별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이런 내기 다시는 하지 말자. 앞으로 누가 소정은에 대한 말을 꺼내면, 친구로 지낼 수 없을
어젯밤엔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새벽이 되자 선우가 또 한잔하자고 했고, 강도겸은 운전기사가 이끌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에 쓰러져 바로 잠에 빠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정신을 차려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이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구나.’몽롱한 상태에서 도겸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눈을 뜨자, 위에서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으으...” 도겸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속 쓰려! 소정은!”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도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은은 참 대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버텼던 그녀였다.‘좋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 근데… 약은 어디에 뒀지?’도겸은 거실로 나가 약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서랍을 뒤져보았지만, 약상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왕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장약을 찾으시는 건가요? 약상자에 넣어둔 걸로 알고 있어요.]도겸은 이마에 핏줄이 뛰는 것을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약상자가 어디에 있죠?”[옷장 서랍 안에 있어요. 정은 아가씨가 도련님이 술을 마신 후 아침이면 위가 아플 걸 알고 쉽게 찾을 수 있게 두었다고 하더라고요. 여보세요? 도련님? 아직 듣고 계시죠? 전화 끊으신 건 아니죠?]도겸은 옷장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자주 먹던 위장약이 다섯 통이나 들어 있었다. 약을 삼키고 나니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서랍을 닫으려는 순간, 도겸은 갑자기 멈춰 섰다. 서랍 속에 보석과 명품 가방은 여전히 있었지만, 정은의 모든 신분증, 여권, 학위증, 졸업증 등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구석에 쌓여 있던 캐리어 중 하나도 사라져 있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좋아, 좋네, 좋아...”도겸은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너무 자유롭게 둬도 안 돼. 자유를 줄수록 더 고집을 부리니까.’
“형, 무슨 일이에요?”선우는 술을 홀짝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도겸을 보곤 슬그머니 동건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도겸의 어두운 얼굴에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원래 활기찼던 이곳의 공기도 잠잠해졌다.“누구한테 차단당해서 그런 거겠지.”동건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을 던졌다. 도겸의 얼굴은 그 말에 더욱 어두워졌다.쾅! 도겸은 술잔을 유리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의 눈에 폭력적인 기운이 어른거렸다.“다시는 걔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을 못 알아들어?”동건은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노래하던 사람도 입을 다물었고, 주변 사람들도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선우는 목구멍에 걸린 술을 삼키며, 정은 누나가 정말로 결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빈은 술에 약간 취해 정신을 차리며 선우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은이 돌아왔어?”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할 용기가 없어 두루뭉술하게 말했다.“모르겠어요.”현빈은 선우의 말을 듣고 정은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짐작했다.바텐더가 다섯 병의 술을 가져오자, 누군가가 용감하게 제안했다.“진실 게임 할래요?”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다.“좋아, 나 그거 제일 좋아해.”이때 한 여자가 막 들어왔다. “안나 이쪽으로 와, 마침 형 옆에 자리가 비었어.”안나는 자연스럽게 도겸 옆에 앉았다. 그녀는 이 클럽의 에이스였고, 도겸과도 익숙한 사이였다.“강 대표님.”도겸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너희끼리 놀아, 난 먼저 간다.”남겨진 사람들은 당황했고, 오늘 밤의 분위기를 깨뜨린 듯한 안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술집을 나온 도겸에게 운전기사가 어디로 갈지 물었다. 브랜디 두 잔을 마신 후, 도겸은 어지러움을 느꼈고 텅 빈 집을 떠올렸다.“회사로 가죠.”“강 대표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
“당시의 충동적이고 불합리했던 행동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해야 해. 그건 내가 교수님에게 빚진 거야.”수민은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이 떨렸다. 정은의 말이 목에 걸려 숨이 막힐 듯 두 번이나 기침을 했다. 도망치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제발 나 좀 살려줘, 정은아.”정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너도 알잖아. 나 대학 때 유일하게 재수강한 과목이 오미선 교수님의 수업이었어. 교수님 앞에서는 난 늘 작아지기만 했고, 그분이 무서워서 도망치고만 싶었어.”수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게다가, 나는 교수님 눈에도 띄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어. 교수님은 나를 기억도 못 하실 거야. 미안하지만,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정은은 수민의 마음을 이해한 듯,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수민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주 적절한 사람이 있어.”정은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응? 누구?”“너 내 사촌 오빠인 조재석, 기억나지?”정은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하지.”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물론 기억하지. 국내 최연소 물리학과 교수, 그리고 ‘네이쳐’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 과학자 10인 중 1위였잖아. 오미선 교수님 밑에서 생명과학을 공부하며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생물학계에서 천재로 주목받았던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전과해 물리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큰 화제였고. 결국, 사람은 무엇을 하든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 법이야.”현재 재석은 국제 물리학계에서 권위자가 되었다. 정은은 재석과 같은 학교 출신이지만, 다른 시기에 입학한 후배였다. 입학하자마자 재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나중에 수민을 통해 재석이 수민의 사촌 오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석은 몇 년 동안 해외 물리학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3개월 전에 귀국했다.수민은 자랑스럽다는 듯
가까이 다가가니, 도겸은 정은의 예쁜 웨이브 머리가 곧게 펴지고, 그토록 좋아했던 그녀의 머리색이 검은색으로 염색된 것을 발견했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하이힐 대신 단순한 하얀 티셔츠 하나만 걸친 채 아주 캐주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예전보다 더 빛나 보였다. 이별의 어두운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만약 이게 연기라면, 도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은이 연기를 정말 잘한다고. 너무 잘해서, 자신을 화나게 한다고. 정은은 도겸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표정은 도겸이 화를 내기 직전의 전조였다.“히하!” 도겸은 비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 안목은 별로인 것 같아. 내 옆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보는 눈이 좀 더 높아야 하지 않겠어? 아무나 데리고 다니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체면?” 정은은 슬픔이 살짝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도겸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정은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더욱 화가 났다. 이 감정이 점점 그의 영역 의식으로 다가왔다. 정은은 이미 그의 영역 안에 속한 사람이었고, 지금은 필요 없다 해도, 다른 사람의 침범은 용납할 수 없었다.“난 할 일이 있어서 가야 해.” 정은은 도겸이 계속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가? 어디로 갈 건데? 조수민의 아파트? 그게 네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이번에는 각종 증서들이랑 신분증도 챙겨갔던데. 좋아, 한번 해보자는 거지?”정은은 마음이 아팠다. 도겸의 성격이 나쁘다는 것, 심지어 폭력적이라는 것을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였지만, 이런 말을 직접 들으면 여전히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겸은 그녀의 행동을 단순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은은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스르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먼저, 저분은 내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만난 것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더러운 관계가 아니야.”“그리고,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네 문제야.”이때, 정은이 불러
정은은 오랜만에 손수 무언가를 해보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도겸과 함께했던 지난 몇 년 동안, 옷이나 식사는 스스로 해결했지만, 이런 육체적인 노동은 거의 하지 않았었다. 몇 년 전 도겸이 창업을 시작할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집안 청소만큼은 언제나 청소 아주머니에게 맡겼었다. 페인트 한 통을 다 칠하고 나서 정은은 아픈 허리를 부여잡았다. 몇 년 동안 편안하게 지내왔던 그녀에게는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페인트를 더 가져오기 위해 복도로 나가려던 순간, 정은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발로 페인트 통을 차버렸다. 서둘러 페인트를 닦아내기 시작했지만, 이웃집 문 앞에 조금 쏟아져 버렸다. 걸레를 가져와 닦으려던 찰나, 문이 갑자기 열리며 정은은 깜짝 놀라 사과를 하려고 했다. 뜻밖에도 문 앞에는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너도 여기 사는구나?”“어떻게 여기에 계세요?”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조재석은 바닥을 한번 훑어보고, 정은의 뒤편을 살폈다.“그래서 오늘 이사 온 사람이 너였구나?”정은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네, 오늘부터 우리 이웃이에요.”정은의 말에 재석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가 이곳에 사는 이유는 실험실과 학교와 가까워서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은이 여기서 산다고? 이곳은 여자 혼자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이곳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곳이었다. 재석이 움직이지 않자, 정은은 그가 페인트로 복도를 더럽힌 것을 신경 쓰는 줄로만 알았다.“죄송해요. 조금 흘렸어요. 곧 다 치워요.”정은은 서둘러 페인트를 닦아냈다. 내려갈 때, 재석이 들고 있는 쓰레기를 보고 정은이 말했다.“마침 내려가는 길인데, 제가 대신 버려드릴까요?”재석은 거절하지 않았고, 대신 집에서 접이식 사다리를 가져왔다.“벽을 칠할 거면, 이걸 쓰는 게 편할 거야.”“고마워요.”사다리가 있으니 벽 칠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정은은 오전 내내 집안의 낡은 벽을 모두 칠했다. 집은 금세 깔끔
재석은 한 걸음 뒤에서 정은을 따르고 있었다. 어젯밤의 불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차분함을 되찾은 것 같았다. 차를 몰고 온 재석이 문을 열어주자, 정은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과일 가게를 지나칠 때, 정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잠깐만 멈춰 줄 수 있을까요? 2분만요. 과일 좀 사려구요.”“과일?”“네, 교수님 드리려고요.”재석은 핸들을 잡고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정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선배님은 손님을 방문할 때 항상 빈손으로 가시나요?”재석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고 정은은 조용히 엄지를 세우며 감탄했다. ‘역시 대단한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봐?’하지만 이내 재석은 차를 길가에 세웠다....오미선 교수의 집은 서비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환산로에 위치한 작은 양옥집이었다. 서양식과 동양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 집은 단풍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어, 고요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6년 만에 찾아온 이곳에서, 정은은 안절부절 못하며 발밑의 과일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용기가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정은의 마음을 읽은 듯, 재석이 물었다.“내리지 않을 거야?”정은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렸다가요.”재석은 긴장해 하는 정은을 몇 초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먼저 들어갈게.”정은은 재석이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두 번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이맘때쯤이면 백화가 만발해 있었다. 작은 정원에 들어서자 부드러운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정은의 코끝에 스며들었다. 난간 옆에는 주인이 돌보지 못한 듯 시들어 버린 채소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집에 들어가기 전, 정은은 오미선 교수의 목소리를 들었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재석을 따라 걸었다.“교수님.”오미선 교
“정은 누나가 이씨 가문의 손녀라니?” 선우는 다시 한번 경탄했다.‘정말 생각할수록 신기하네! 그런데 잠깐만...’“그럼 현빈이 형이랑 남매 사이인 거 아니에요?”이 발견에 선우는 깜짝 놀랐다.‘드라마야 뭐야, 애인이 결국 남매가 되다니?’선우의 첫 반응은 현빈이 미쳤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다 고개를 돌려 도겸을 바라보았다.그는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처음엔 멍해졌고, 후에는 의혹을 느꼈는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으며 마지막엔 광희와 격동이 뒤섞인 얼굴로 변했다.선우는 지금까지 한 사람의 얼굴에서 그렇게 많은 감정을 본 적이 없었다.감정은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다.“도겸이 형? 형?!”도겸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뭐라고?”“정은 누나랑 현빈이 형은 남매였어요...”“응, 남매였어. 그래서 가족사진에 정은이 있었던 거야...”‘어쩐지 심현빈과 함께 이씨 가문에 찾아갔더라니. 난 또 정은이 어르신들에게 인사하러 간 줄 알았지.’도겸은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형, 표정 관리 좀 해요.”“그렇게 할 순 없어.”‘어! 이건 또 뭐야!’“지금 고소하다고 느끼는 거예요?”도겸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심현빈의 고의적인 행동에 비해 난 매우 착한 거 아니야?”‘분명히 엉뚱한 생각을 했으면서.’...다른 한 구석에서 이미윤은 무표정하게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춘재가 무대에 올라 정식으로 이미숙과 소진헌 부부를 소개했고, 이어서 봉수진까지 무대에 올라 대중 앞에서 정은의 신분을 공개했다.그뿐만 아니라 정은이 이씨 가문의 ‘공주’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마지막엔 자신의 친아들까지 정은과 함께 무대에 세웠다.마치 ‘우리가 정은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온 세상에 알리려는 듯한 분위기였다.그 광경을 보던 이미윤은 처음엔 냉소를 지었고, 점점 질투가 일어나더니 끝내 마음 한켠이 영 달갑지 않았다.‘생일잔치에 딸 되찾은 것을 발표하다니!’“미윤아? 미윤아!”“응? 방금 뭐라고 했어?”
이춘재가 손을 내밀자, 모두들 그의 손을 따라 바라보았다.이미숙과 소진헌이 손을 맞잡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이춘재는 웃으며 말했다. “이 아이가 제 딸 이미숙이고, 옆에 있는 분은 제 사위 소진헌입니다.”“사실 저도 전에 이미 제 딸에 관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소문이 무엇인지 저도 어느 정도 들었습니다.”이 말을 하자, 무대 아래 사람들의 표정이 다소 불편해졌다. 그 소문이 터무니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자리의 사람들이 거짓 정보를 퍼뜨렸기 때문이다.이춘재는 계속해서 말했다. “소문이란 것이란 본래 사실과 다르게 퍼지기 때문에 쉽게 믿을 수 없는 법이지요. 모두들 이렇게 궁금해하시니, 저도 조금 더 설명드리겠습니다.”“제 딸의 본명은 이미숙이고, 현재 소설을 집필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운이 좋아 미스터리 소설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적도 있습니다.”모두들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운이 좋은 거라고요?”이춘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그는 다시 사위인 소진헌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 사위는 일반인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현재 고등학교에서 물리 교사로 재직 중이며, 성실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별히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이춘재의 설명이 끝나자, 봉수진이 무대에 올라와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 외에도 한 사람을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바로 저희 손녀입니다. 이씨 가문의 공주님이자, 저희 부부의 소중한 손녀, 소정은입니다.”말을 끝내자, 현빈이 정은을 데리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그 순간, 오빠라는 그의 신분이 온 세상에 발표되었다.현빈은 이미 이 순간을 예상했었다. 그동안 두 어르신은 이미숙을 그렇게 중시했으니 어떻게 대외적으로 발표하지 않겠는가?하지만 그 순간, 현빈은 여전히 말할 수 없는 씁쓸함과 허탈함을 느꼈다.‘이제부터, 남들 눈에 있어 우리는 남매일 뿐이야
“퉤! 재수 없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수민은 어이 없어 하며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내가 그 남자를 좋아한다고?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아니면 됐어, 헤헤.”동건은 수민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혼자 왔어?”“응.”“너희 집에서 널 대표로 파견한 거야?”“쳇, 나 오늘 우리 가문 대신 온 거 아니야.”동건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누구를 대신해서 온 거야? 우리 가문 대신일 리는 없잖아. 헤헤, 사실 생각해보면 안 되는 것도 아니지.”“결국 너는 지금 내 여자친구이니 우리 가문 예비 며느리잖아. 고씨 가문을 대표하는 것도 너무 적합하지 않아?”“흥! 꿈이나 깨! 난 남을 대표하러 온 게 아니야. 나 혼자 왔어.”“그게 무슨 뜻이야?”수민은 손에 든 초대장을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초대장은 모두 붉은색이었지만, 그녀의 것은 핑크색이었다.“봤지? 개인 초대장이야.”“네가?” 동건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안 돼?”개인 초대장은 일반적으로 주인집에서 가까운 친척이나 중요한 인물에게 보내는 초대장이었기에 특별하고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그런데 수민은 왜 갖고 있는 것일까?“너 이씨 가문과 아는 사이야?”‘아닌데, 수민이 이씨 가문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없는데. 설령 있다 하더라도 조씨 가문에게 줘야 하는 거 아니야?’수민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한 번 맞혀봐.”동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때, 선우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도겸이 형, 여기!”도겸은 그를 향해 걸어갔다.“형 안 오는 줄 알았어요.” 선우는 도겸에게 말했다.도겸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냥 얼굴 좀 내밀려고. 나중에 볼일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해.”“그렇게 바쁜 거예요?” 선우는 놀라며 물었다.“응, 오늘 저녁에 G시에 가야 해서. 지사 쪽에 문제가 생겼어.” 도겸은 담담하게 말했다.선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웨이터에게서 와인 한 잔을 가져왔다. “형, 마셔봐. 이 술 괜찮아.”도
봉수진은 이미숙의 손을 잡았다. “20여 년이 지난 오늘, 난 널 되찾을 줄은 정말 꿈에도 바라지 못했어. 다행히 하나님은 날 불쌍히 여겨 우리 가족 단란하게 모이게 했구나.”이춘재는 그녀가 눈시울을 붉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슬픈 분위기를 깨뜨렸다. “또 의사의 말을 잊은 거야? 오늘 이렇게 즐거운 날에는 더욱 웃어야 한다고.”이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 말이 맞아요. 엄마, 한번 웃어 보세요.”봉수진은 피식 하고 웃으며 말했다. “나이가 들면 울어도 못생기고, 웃으면 더 못생기는데, 참...”“어디가요? 분명히 세월이 흘러가면서 더욱 부드럽고 아름다워지셨는데.”한마디 말에 봉수진은 싱글벙글 웃었다.소진헌은 묵묵히 이미숙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정말 당신밖에 없다니깐!”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현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저예요.”이춘재는 가볍게 기침을 했다. “들어와.”현빈은 그제야 문을 밀고 들어섰는데, 한눈에 소진헌과 이미숙 사이에 서 있는 정은을 보았고, 눈에는 놀라움이 번쩍였지만 이내 그 감정을 숨겼다.“밖에 손님들이 거의 다 도착하셨으니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어요.”“그래.” 이춘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나가자. 손님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연회장은 지금 불빛이 찬란하고 매우 떠들썩했다. 이씨 가문의 초청을 받은 손님들이 적지 않은데, 각 업종과 관련되었다. 그러나 같이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많아 대부분 서로 아는 사이였다.“어? 나씨 가문도 왔네요? 그 집안은 요 몇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누가 좀 도와달라고 하면 거절하면서 조훈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더니, 어떻게 이번엔 시간을 낸 거예요?”선우는 샴페인을 들고 웃는 듯 마는 듯 구경을 했다.“그리고 주씨 가문의 그 감독도 얼마나 까다로운 분이신지. 내가 직접 찾아와서 광고를 찍으라고 해도 모두 거절을 한 거 있죠?”“또 밥을 사준다고 했는데, 뭐라고 대답한 줄 알아요? 너무 바빠서 접
“그럼 그게 무슨 말이야?”“헤헤... 내가 말하는 건 바로 이씨 가문 둘째 아가씨의 딸, 이씨 집안의 손녀란 말이야! 듣자 하니 예쁘고 몸매도 끝내준다던데?”“게다가 어르신들께도 사랑받고 있다지. 만약 그 손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10년은커녕 평생 편하게 살 수도 있을걸?”“푸하! 감히 이씨 가문의 손녀를 넘봐? 꿈이나 깨라, 초대장도 못 받은 주제에. 헛된 망상은 그만해.”“내가 안 되면, 넌 된다는 거냐?”“그래. 난 충분히 가능하지.”...선우는 마지막 한 모금의 와인을 음미하며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놓인 화려한 초대장을 바라보았다.“이씨 가문이라, 꽤 흥미롭군요. 내일 구경하러 가야겠네요.”이번 생일 연회에는 전씨 집안뿐만 아니라 강씨 가문과 고씨 가문도 초청을 받았다.선우와 도겸, 동건 모두 처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며칠간 이씨 가문에 대한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둘째 아가씨가 실종된 이유가 산골 마을에 팔려갔기 때문이라느니, 딸을 낳은 후 버려졌다느니, 또는 그녀가 절세미인이지만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둥,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기에, 오히려 사람들의 호기심만 더욱 자극되었다.선우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내일이면 진실이 밝혀지겠군요. 형들도 갈 거예요?”도겸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상황 봐서.”동건은 짧게 대답했다. “아직 정하지 않았어.”“아니, 왜 이렇게 재미없어요? 이제 즐길 거리도 포기한 거예요? 중이라도 된 거냐고요? 욕심도 없고, 재미도 없고.”동건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어쩔 수 없지. 나도 이제 여자친구가 있거든? 너희들과 같은 외로운 솔로들과 어울릴 시간은 없어.”“됐고, 카드 게임이나 해. 할 거야, 말 거야?”도겸은 다소 성가신 듯 선우를 재촉했다.그는 사실 정은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일 이씨 가문의 연회에 참석하더라도 단순히 형식적인 자리일 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선우는 즉시 자세
이미숙은 두 노인에게 당시의 진실을 모두 털어놓았기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춘재와 봉수진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고, 깊은 원망 또한 피할 수 없었다.다행히 충격으로 인해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이미숙은 마음이 놓였다.시간이 지나면서 두 노인은 조금씩 평정을 되찾았고, 이주 후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밝은 얼굴로 명절을 맞이했다.이미숙과 소진헌 부부도 L시로 돌아가지 않았다.둘은 상의 끝에 당분간 J시에 더 머물기로 했다.하나는 어르신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혹여나 진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이 감정에 휩쓸려 충동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특히, 그날 이를 악물고 눈빛을 번뜩이며 분노하던 노부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그때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았지만, 막상 한바탕 울분을 터뜨린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하지만 이미숙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나, 자꾸 뭔가 불안해요.”소진헌은 그녀가 너무 걱정이 많다며 웃어넘겼다.“당신, 생각이 너무 많은 거 아냐? 내가 보기엔 두 분 다 아무렇지도 않으셔. 하루 종일 웃으면서 지내시는데, 그게 속에 무언가를 품고 있는 사람 얼굴이야?”이미숙은 고개를 저었다.“당신은 몰라요.”“뭘 몰라?”“말로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냥... 계속 가슴 한구석이 불안해요.”그 느낌은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과도 같았다.겉으로 평온할수록,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더욱 거대한 폭풍일지도 모른다.왜냐하면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아무도 모르니까....이춘산의 팔순 잔치가 열린다는 소식은 전 도시에 전해졌다.이 가문은 원래부터 겸손함을 유지해 온 터라,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성대한 잔치를 연다고 하니, 초대장을 받아든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하지만 이 가문이 비록 조용히 지내왔다고 해도, 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명문 집안이라는 사실은
여태까지 이미숙이 실종되고 경찰의 수색이 성과 없이 끝났을 때, 봉수진은 이미윤을 의심하고 싶은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두 자매가 함께 외출했지만, 하필이면 이미숙만 납치되었던 것이다. 만약 범인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둘을 함께 납치해 돈을 더 달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납치범은 멍청이가 아니었으니까.만약 그 목적이 돈이 아니라 단지 몸을 탐냈던 것이라면? 그렇다면 더욱 둘 다 데려갔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이미윤 혼자 멀쩡히 돌아왔다.이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그 의심과 불편한 마음은 이미윤이 심정훈과 결혼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미숙이 사라지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일까?’너무나 많은 부분이 의심스러웠다.“증거가 없으니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었어. 하지만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확신했어. 이미윤이 범인이라고!”봉수진은 차갑게 속삭였다.“나는 살인자와 같은 지붕 아래 살 수 없었고, 더 이상 그 아이를 딸처럼 대할 수도 없었어요.”‘만약 나마저 진실을 외면한다면, 미숙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만약 내가 가해자를 용서한다면, 미숙이는 그 억울함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이런 생각이 봉수진을 짓눌렀다.그래서였다.봉수진은 의도적으로 이미윤과 거리를 두었고, 감정을 억누를 수 없을 때는 차가운 말과 행동으로 그녀를 밀어냈다.이미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절대 손에 넣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당신은 왜 이제서야 말하는 거야?”이춘재의 눈빛에는 깊은 고통이 스며들어 있었다.“내가 말하면 당신은 믿었을까요?”봉수진은 씁쓸하게 웃었다.“당신도 내가 일부러 이미윤을 멀리한다고 생각했겠죠. 내 성격이 변했다고. 그러니 내 말을 믿었을 리가 없잖아요.”이춘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미안해, 미숙아, 그리고 당신에게도 미안해...”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떨렸다.“아빠,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이미숙은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후회하고 슬퍼하시라고 한 게 아니에요.”그녀는 한 글
봉수진은 여태껏 본 적 없는 딸의 엄숙한 표정에 놀라 물었다.“아, 미숙아, 무슨 일이야?”“자, 두 분 여기 앉으세요.”이미숙의 말에 두 노인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여보, 정은아, 두 사람도 함께 들어봐.”부녀는 눈을 마주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정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전에 나는 대부분의 기억을 되찾았어요. 그리 똑똑하지 않아도 하나씩 떠올랐고, 잃어버린 조각들도 서서히 맞춰졌죠.”“하지만 실종되던 순간부터 어떻게 떠돌다가 강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아무리 해도 기억나지 않았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말이죠.”“어제?”이춘재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어제, 무슨 일 있었어?”이미숙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모든 걸 기억해냈어요.”“대체 누구야?”“이미윤이었어요.”그녀의 대답에 방 안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이제 와서 감추거나 애써 용서할 이유는 없었다.두 어르신은 20년 넘게 이미숙을 찾아 헤맸기에 그들에게는 모든 진실을 알 권리가 있었다.물론 이미숙도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그녀는 어젯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만약 두 분이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앓기라도 하신다면 어쩌지 심지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또 한편으로, 이미숙은 자신의 기억 외에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모두가 믿어줄까?’그러나 곧 그런 걱정들은 사라졌다.증거가 없더라도, 어르신들은 반드시 자신을 믿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쾅!이춘재가 탁자를 내려치자 찻잔이 덜컥거리며 흔들렸다.“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우리 가문이 언제 그 아이의 원한을 산 적이 있다고?! 도대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어?!”이춘재는 분노에 몸을 떨며, 얼굴의 살까지 떨렸다.한편, 봉수진은 말없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러나 그녀의 손은 소매 속에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정은은 그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었다.“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다고
경혜는 몸을 돌려 도겸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그는 그 기세를 몰아 경혜를 품으로 끌어안았다.“일어났어요?”경혜는 돌아서며 도겸을 발견하고는 다소 놀란 듯 물었다.기억에서 정신을 차린 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저기... 어젯밤에 택시를 잡지 못해서 결국 객실에서 잤어요. 도겸 씨 술 마셨으니까 아침에 속이 안 좋을 것 같아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아침을 준비했는데. 괜찮죠?”“괜찮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하룻밤 신세 졌으니까, 나도 당연히 보답해야죠! 금방 다 될 거예요!”도겸은 식탁으로 가서 의자를 당기고 앉았다.잠시 후, 경혜는 뜨끈한 죽과 노릇하게 부친 계란을 들고 왔고, 그의 앞에 내려놓은 뒤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놓아주었다.도겸은 원래부터 남의 시중을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그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경혜는 도겸의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에, 순간 입술을 깨물며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자신이 먼저 챙겨주겠다고 해놓고도, 막상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남자를 보니 그래도 서운했던 것이다.자신의 태도를 은근히 떠보는 경혜를 보며, 도겸은 처음부터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대신 도겸의 눈빛에 차가운 기운이 번쩍 스쳤다.여기에 남기로 한 것도, 아침을 준비한 것도 전부 경혜 스스로 결정한 일인 데다가, 도겸은 아무것도 요구한 적이 없었다.그렇다면 그 결과도 당연히 경혜 스스로가 감당해야 하는 법이었다.도겸은 앞에 놓인 죽을 바라보다가, 문득 눈빛이 부드러워졌다.한 숟갈 떠서 맛을 보니, 지난번보다 더 잘 만들었던 것이다.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그 모습을 본 경혜는 속으로 살짝 안도했다.‘그동안 연습한 보람이 있었네. 이 정도면, 마음에 든 거겠지?’“어때요?”경혜는 조심스레 물었다.도겸은 별다른 감정 없이 말했다.“너도 먹어. 다 먹으면 차 불러줄게.”“네...”같은 시각, 이원에서.정은은 아침에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이미 모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