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녀 생활만 3년 차, 강하리는 결국 구승훈의 마음도 사랑도 얻지 못했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도망가려는데, 후회한 구승훈은 지독한 집착을 시작한다. “대표님, 때늦은 후회보다 멍청한 것은 없어요.” 강하리가 아무리 매몰차게 거절해도 구승훈은 절절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래, 난 멍청이야. 그러니 제발 날 떠나지 말아 줘.”
더 보기조시욱은 재빨리 창문 쪽으로 달려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그는 유령처럼 가볍게 벽을 타고 옆에 있는 하얀 배수관에 매달렸다.뒤이어 준봉도 주저 없이 따라 올라갔고 두 사람은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노진우는 곧장 비상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달렸다.조시욱은 몇 번의 손짓 만으로 옥상에 도착했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그 어디에도 강하리는 없었다.준봉은 손목을 돌려 풀며 배수관을 타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는 정확히 여자 화장실이 있는 층에 도착해 창문 유리를 발로 깨뜨리고 창틀을 잡아 몸을 안으로 던졌다.여자 화장실 안에서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비명이 터졌고 겁에 질린 여자들이 구석으로 몰려들어 준봉을 경계하며 바라보았다.그는 화장실 안을 빠르게 훑은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혹시, 빨간 드레스를 입고 유난히 예쁜 여자 보신 분 있나요?”여자들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고 준봉은 하나씩 칸막이 문을 두드렸다.두 칸에선 사람이 있었지만 그 안의 목소리는 강하리가 아니었다.여자 화장실이라는 특성상 더 강하게 문을 부술 수도 없었기에 그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히 사과하고 조용히 돌아섰다.그때, 남자 화장실 쪽에서 조시욱이 나왔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쳤고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얼굴엔 무겁고 침착한 긴장감이 깔려 있었다.강하리는 아마도 위층 화장실에서 누군가에게 끌려간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위로 올라갔거나 아래로 끌려갔을 것이다.하지만 위에도 아래에도 그녀는 없었고 준봉은 휴대폰을 꺼내 급히 노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없어.”노진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CCTV 확인하고 있어.”조시욱은 통화를 마친 뒤, 준봉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대표님한테 연락하세요. 호텔 전체는 이미 봉쇄했으니까 인원 투입해서 바로 수색 들어가라고 전해요.”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구승훈의 휴대폰은 연결되지 않았다.그는 곧장 구승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했고 둘은 함께
강하리는 심호흡을 한 뒤 무언가 말하려 하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조시욱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하리야, 무슨 일 있어?”그는 곧장 준봉과 노진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무슨 일 있었어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화장실 좀 다녀오려던 참이었어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뒤돌아서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갔고 그 뒤를 따라 준봉과 노진우, 그리고 조시욱까지 함께 움직였다.복도 중간에 이르자, 준봉과 노진우가 거의 동시에 조시욱 앞을 막아섰다.“죄송합니다. 사모님께서 화장실로 가는 길이라 더 이상 따라오시면 곤란합니다.”조시욱은 잠시 입꼬리를 올리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하리의 안전을 위해 따라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선 넘는 행동을 할 일은 절대 없으니까요.”조시욱은 강인한 인상의 얼굴에 단단한 신념이 서려 있었다.그는 분명 정중했지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준봉과 노진우 역시 완강했다. 두 사람 모두 단단히 길을 막고 그를 절대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조시욱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뭐가 그렇게 걱정돼서 그래요? 제가 당신들 대표님 여자를 빼앗기라도 할까 봐 그래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빼앗지 못해요.”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무겁고도 담담했다.그녀가 아직도 전 남편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걸 조시욱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그래서 그는 빼앗을 수 없었고 빼앗을 생각도 없었다.만약 강하리가 그 사람과 다시 잘 된다면 그는 오히려 기꺼이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어차피, 아이가 있는 부부라면 가장 좋은 건 함께 있는 것이니까.하지만 지금은 그저 친구로서 그녀의 안전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셋은 복도에서 잠시 팽팽하게 대치했고 그사이 강하리는 이미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조시욱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곧장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고 준봉과 노진우도 서둘러 그 뒤를 따라붙었다.사람들이
강하리는 주해찬과 구승훈이 나중에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지 못했지만 구승훈이 떠날 때 얼굴에 떠오른 그 기분 나쁜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이유는 모르지만 가슴속 어딘가에서 불안감이 조용히 피어올랐다.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고 돌아섰고 그때 주해찬이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다들 인사했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했어요.”주해찬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이끌어 테이블에 앉혔다.동창회장은 한껏 활기찬 분위기였고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웃음소리로 가득했다.지금 강하리는 신분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유엔 산하 번역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가 되었고 덕분에 번역학과 출신들은 그녀에게 다가와 인맥을 쌓으려 애썼다.게다가 그녀가 아직 싱글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결혼하지 않은 이들은 슬쩍 다른 기대도 품기 시작했다.식사 자리에서 강하리는 유난히 술을 많이 마셨고 주해찬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시선이 어딘가 다른 데로 가 있는 듯한 걸 놓치지 않았다.“무슨 생각해?”주해찬이 물었고 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표정을 숨겼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줄게.”주해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강하리는 그의 어깨를 조용히 눌렀다.“선배,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그 말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하지만 주해찬은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싫다면 조시욱한테 연락할게. 그 친구가 경호 기술이 뛰어나거든. 같이 다니면...”“선배.”강하리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고마워요.”강하리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말했다.“제가 새로 시작할 수 있게 챙겨줘서 정말 고마워요. 선배 마음, 저도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괜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주해찬은 어이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구승훈이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강하리는 입술
비명 사이로 나무 막대기 같은 걸로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곧 임희주의 비명이 끊겼는데 아마 고통에 기절한 모양이었다.잠시 후, 남자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도련님, 와서 이야기 좀 합시다.”구승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목소리,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여초연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 분명했다.“도련님께선 한 시간 안에 오셔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도련님은 이 여자를 다시 보지 못할 겁니다.”구승훈은 갑자기 코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 여자가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지?”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 여자가 죽든 신경 안 쓰시겠죠. 하지만 도련님 본인의 목숨은 신경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태가 약의 마지막 효과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구승훈의 시선이 짙게 가라앉았다.“주소 보내.”전화기 너머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역시 도련님은 똑똑하시네요. 혼자 오셔야 합니다. 신고하면 임희주만 죽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하십시오.”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위치 정보와 함께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사진 속 임희주는 온몸에 피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형, 어떡할 거야?”구승재가 묻자 구승훈은 말없이 위층 홀에 남아 있는 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곤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수님 잘 지켜.”그 말과 함께 그는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돌아섰다.구승재가 재빨리 따라붙으며 물었다.“형, 정말 혼자 갈 거야?”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하지만 그는 갈 수밖에 없었다.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그는 그 불구덩이에 들어가야만 했다.“걱정하지 마. 여초연은 내가 죽는 걸 원치 않아. 이 정도 괴롭힘은 아무것도 아니야.”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준봉도 여기 오라고 해. 그리고 형수님은 잘 부탁한다.”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아래층 연회
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앞에 선 구승훈을 밀어내려 손을 들었지만 그보다 빠르게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이미 가까웠던 거리에서 그의 몸은 더욱 바싹 다가가 붙었다.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모두가 동창들이고 게다가 정안 그룹의 직원들도 꽤 눈에 띄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행동에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강하리는 주변을 의식하며 손을 들어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구승훈, 이런 자리에서까지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그 순간, 구승훈이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고 따뜻한 숨결과 짧은 통증, 그리고 가슴안에 알 수 없는 신맛이 번져갔다.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임희주한테도 이렇게 했어?”그 말에 구승훈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어 가볍게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는 아무 설명도 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현우를 조심해.”그 말을 남기고 그는 그녀의 귓불을 한번 부드럽게 문지른 뒤 돌아섰다.강하리는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곧이어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하필 그런 말을 꺼낸 걸까?’그가 대답해 주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해버린 것이다.“하리야, 괜찮아?”주해찬이 조용한 목소리로 묻자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네. 괜찮아요.”“정말 괜찮아? 방금 들은 말인데, 정안 그룹에서도 오늘 연말 회식 여기서 한다더라. 불편하면 지금 나가도 돼.”강하리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다시 평온해져 있었다.“정말 괜찮아요. 가요.”주해찬은 여전히 걱정스러워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두 사람은 함께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고 연회장에 들어서자 누군가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에 주해찬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조시욱, 너도 와 있었어?”정장을 입은 남자는 주해찬과 반갑게 포옹을 나누며 말했다.“마침 여기서 식사 중이었어. 넌?”“우린 동창회 참석하러 왔어.”주해찬은 웃으며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소개하려 했지
강하리는 내키지 않았지만 천아름과 손연지의 권유로 결국 그 드레스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선명한 붉은색 드레스는 어깨에서 허리까지 깊게 파여 등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아래로 이어진 반짝이는 스커트는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자연스럽게 밀착되며 늘어졌다.하얀 피부는 붉은 드레스 덕분에 더욱 도드라졌고 머리카락 사이로 은근히 드러난 날개뼈는 도발적이기까지 했다.구승훈을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었다.처음으로 그 은밀한 아름다움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천아름은 위아래로 훑어보며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더니 가방에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발찌를 꺼내 강하리의 하얀 발목에 조심스럽게 채워주었다.강하리는 처음으로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게 되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거울 속 자신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됐어. 오늘은 남자 하나 낚아오는 거야, 알았지?”천아름이 장난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툭 쳤고 강하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희 진짜 나 소개팅하러 가는 거 아니야.”천아름은 어깨를 으쓱였다.“동창회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냐? 말만 동창회지 결국 소개팅이나 다름없지.”강하리는 작게 웃었다. 남자 친구라는 건 원한다고 바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직 구승훈을 완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휴대폰을 내려다보자 사진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그 사진은 마음 깊은 곳에 가시처럼 박혀 불쑥 떠오를 때마다 찌르듯이 아팠다.동창회는 보경 대학교 근처의 초특급 호텔에서 열렸다.저녁 무렵, 주해찬의 차는 인월동 입구에 도착했다.강하리의 모습에 운전석에 앉은 주해찬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도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오늘만큼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천아름이 그녀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끌어낸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오늘, 진짜 아름답네.”강하리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가요.”차가 호텔을 향해 움직이자 멀찍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벤틀리 안에서 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손연지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너 왜 이렇게 바보처럼 굴어?”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으며 말했다.“바보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야. 앞으로 그 사람은 나랑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찾아야 할 사람은 다 찾았고 풀어야 할 감정도 다 풀었다.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멀리서 그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손연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 하자 강하리는 먼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괜찮아. 걱정하지 마. 오늘 밤 동창회에서 새로운 사랑을 찾을지도 모르잖아?”손연지는 그녀를 노려보듯 바라보며 말했다.“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솔직히 이제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어.”강하리는 미소만 지었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시각, 안현우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시청에서 발표한 도시계획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 거기엔 자신이 낙찰받은 동쪽 부지가 공원용지로 표시되어 있었다.그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 모든 게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짜인 함정이라는 걸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동쪽 땅을 낙찰받았다며 호언장담했고 그 땅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었다.심지어 최하영을 이겼다는 기쁨에 축하 파티까지 열었었다.그런데 오늘 아침 모든 것이 뒤바뀌었고 안현우는 끝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탁자 위의 재떨이를 집어 TV 화면에 던졌다.“이 망할 년!”그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보경시로 가는 비행기표 예약해. 당장! 지금 당장!”같은 시각, 임희주는 TV를 끄고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안 대표님, 우리 다시 한번 손잡는 건 어때요?”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안현우의 목소리는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임 선생, 아직도 해결 못 했어? 진짜 쓸모없는 년이네.”임희주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이미 구승훈과 일종의 계약을 맺고 있었고 그를 위해 여초연을 꾀어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천아름은 그렇게 말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섰고 강하리는 의자에 앉아 어이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정말 장난도 정도껏이지.’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하지만 아침에 보았던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자신은 꽤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믿어왔고 이미 이혼했으니 구승훈이 임희주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게다가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대강은 알 것도 같았기에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타이르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이런 장면을 보면 항상 힘들고 슬펐다.그 순간,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고 강하리는 화면을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강 대표님, 안현우가 갖고 있던 기명 제약 주식을 저렴한 가격에 매입했습니다. 인수 건 다시 진행할까요?”강하리는 짧게 응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숨을 가볍게 내쉰 뒤, 최하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안현우 일, 마무리해 주세요.]잠시 뒤, 최하영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OK. 그런데 보수는 챙겨줘야죠.]강하리는 피식 웃고는 입술을 깨물며 휴대폰을 조용히 내려놓았다.사무실을 나서려던 그때,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에는 문자 메시지였는데 모르는 번호였고 그 안에는 몰래 찍힌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사진 속 호텔 방에서 임희주는 옷을 제대로 걸치지도 않은 채 구승훈의 품에 안겨 있었고 구승훈은 그런 임희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순간, 강하리는 이상하게도 그의 눈빛이 예전에 자신을 바라보던 눈과 똑같다고 느껴졌다.강하리는 손끝이 떨렸고 동시에 임희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저, 구승훈 씨랑 잤어요.”강하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천천히 감정을 추스르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잤다고 해서 나랑 무슨 상관이야?’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어느새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같이 술 마실래?”강하리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목소
양쪽 모두 몇 초간 말이 없었다.짧은 정적이 흐르는 사이 구승재는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왜 하필 형수님이 이런 장면을 보게 된 거야?’그는 무의식중에 임희주를 형에게서 떼어내려 손을 뻗었지만 강하리는 이미 먼저 아무 말 없이 회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구승재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구승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강하리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었다.“이거 놔요.”무심하게 뱉은 구승훈의 말에 임희주의 몸이 순간 굳어버렸다.그녀는 머쓱하게 팔을 풀고 조심스럽게 구승훈에게서 몸을 뗐다.그는 말없이 겉옷을 벗어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그 동작엔 숨길 수 없는 냉소와 혐오가 묻어 있었다.“저를 왜 찾았어요?”짧게 말을 던지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임희주는 쓰레기통에 처박힌 옷을 보며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구승훈 씨, 정말 더는 협력할 생각이 없는 거예요?”구승훈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는 말없이 문을 열고 이미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탔다.임희주는 순간 당황하며 급하게 차 문을 열고 올라타며 말했다.“구승훈 씨, 제가 잘못했어요. 계속 이렇게 피하지 말고 우리 얘기 좀 해요, 네?”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는 이내 조용히 시동을 걸고 도로 위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JM 빌딩 꼭대기 층 사무실에서 강하리는 창가에 서서 멀어져 가는 차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돌렸다.그 맞은편엔 천아름이 앉아 잡지를 넘기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높게 묶은 머리에 평소보다 차가운 눈빛이 느껴졌다. 늘 따뜻하던 표정이 오늘만큼은 더 날카로웠다.“오늘은 협업 얘기하려고 했는데, 지금 분위기 보니까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네. 어떻게 할까? 둘이서 무슨 짓 하는지 내려가서 직접 볼까?”강하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계속 얘기하자.내가 했던 제안, 어떻게 생각해?”천아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진짜 괜찮아?”강하리는
“우리 층에 누가 임신했나 봐요!”“어떻게 알았어요?”“화장실 쓰레기통에 글쎄 임신 테스트기가 있더라니까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동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수군대는 두 명의 인턴을 바라봤다.그녀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인턴들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곧장 일하러 갔다. 그래서 그녀도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핸드폰은 오늘따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벌써 퍼지고 있었다. 회사는 이런 가십거리가 가장 환영받는 곳이기 때문이다.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것을 보고 강하리는 머리가 찌릿찌릿 아팠다.‘내가 소홀했어. 적어도 종이에 잘 싸서 버려야 하는 건데. 만약 구승훈 대표님이 알게 된다면...’끔찍한 상상에 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때 구승훈의 비서가 사무실에 노크하고 들어왔다.“부장님, 대표님께서 찾으세요.”강하리는 책상 아래에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강 부장님?”“네, 들었어요.”...대표이사실 앞에 멈춰 서서 강하리는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담 비서 신도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대표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하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대표이사실에는 우드 향 향초를 태우고 있었다. 점심부터 협력사 임원과 술 한 잔 마신 듯한 구승훈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반듯한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유난히 방탕해 보였다. 지그시 감은 눈도, 여유롭게 힘 풀린 몸도, 마치 정성껏 만든 조각상과 같았다.강하리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이러니까 주변에 여자가 끊기지 않지. 어느 여자가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거절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몸매도, 능력도... 적어도 겉으로는 흠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오직 강하리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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