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녀 생활만 3년 차, 강하리는 결국 구승훈의 마음도 사랑도 얻지 못했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도망가려는데, 후회한 구승훈은 지독한 집착을 시작한다. “대표님, 때늦은 후회보다 멍청한 것은 없어요.” 강하리가 아무리 매몰차게 거절해도 구승훈은 절절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래, 난 멍청이야. 그러니 제발 날 떠나지 말아 줘.”
View More바의 조명은 여전히 화려하게 빛났고 무대 위의 폴댄스는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고 음악과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공간을 가득 채웠다.천아름은 바 카운터에 홀로 앉아 마치 세상과 단절된 사람처럼 조용한 표정이었지만 강하리가 방에서 나오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어떻게 됐어?”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의 눈가에 아직 남아 있는 눈물을 발견했다.“잘 안된 거야? 구승훈이 뭐라고 했는데?”강하리는 입술을 살짝 올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 마음만 헛고생하게 만든 것 같아.”천아름은 술잔을 내려놓고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분명, 둘이 오해를 풀기만 하면 다시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낼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너무 단순했던 모양이다.“네가 화해하기 싫었던 거야? 아니면 구승훈이 화해하려 하지 않은 거야?”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 연정이 데리러 가야 돼. 먼저 갈게.”천아름은 다시 한번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강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어쨌든, 사랑 문제는 내가 더 이상 참견할 일이 아니야.’강하리는 바에서 나와 문 앞에 멈춰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복잡한 감정을 가라앉혔다.사실 오늘 이런 결과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노력해 보고 싶었다.매번 그 남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약해졌다.아무리 단단히 결심해도 막상 마주하면 마음속에 남는 건 결국 그리움뿐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떤 관계는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이어질 수 없는 법이다.그녀는 더 이상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더 이상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구승훈에게 사정이 있다는 걸 알지만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방을 나서며 그녀가 남긴 말처럼 여전히 그를 도울 것이고 그가 원한다면, 연정이를 위해서라도 언제든지 기꺼이 나설 것이다.그가 연정이의 아버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때 그
아쉽게도 구승훈이 방에서 나올 때 표정이 좋지 않았고, 화장실 문 앞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그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강하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가 이렇게 변해버린 건지.오늘 최하영에게 들은 여초연에 관한 이야기와 방금 천아름에게 받은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이어졌다.여초연이 품은 증오심이 얼마나 깊은지는 그녀가 연정이를 납치했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었다.그런 여자가 복수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단순히 구승훈을 잠 못 이루게 할 정도로 가벼운 방식으로 끝냈을까?아니, 그럴 리 없었다.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인정하기 싫어도 상관없어. 난 지금 당신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어. 당신, 아직도 나와 연정이를 원해?”그가 원한다는 말한 한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그러나 구승훈은 갑자기 웃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목을 감싸듯 쓸어내렸다.움직임은 부드러웠고 천천히 강하리를 진정시키려는 것 같았지만 그의 말은 차가웠다.“네 상상력은 여전히 풍부하구나.”강하리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그래? 내가 너무 나를 과대평가했나 봐.”그녀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구승훈의 넥타이를 단숨에 잡아당겼다.둘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지금이라면 누구든 살짝만 움직여도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수 있을 정도였다.구승훈의 숨이 잠시 멎는 듯했지만 그는 여전히 냉정을 유지했다.그는 중간에서 포기할 수 없었다.여초연과의 싸움은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문제였고 무엇보다 강하리와 연정이가 그 분쟁에 휘말리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뭐 하는 거야? 이러면 나중에 임희주 씨에게 어떻게 설명하라고...”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갑자기 입을 맞췄다.항상 구승훈이 주도하던 키스였다.하지만 오늘,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
강하리는 구승훈을 보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하지만 곧, 최하영의 말이 떠올랐다.“모두가 구씨 집안이 대단하다고 하고 모두가 구승훈 씨를 부러워해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잖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꿈일까요? 하지만 구씨 집안 같은 곳은 사람을 삼키고 뼈 한 조각도 남기지 않는 곳이에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도 몰라요. 어쨌든, 저는 그가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그 말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여초연이 복수를 견디며 그가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강하리의 마음속에 다시금 연민을 불러일으켰다.하지만 지금, 그 연민은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실감이 나지 않는다기보다, 차라리 무뎌졌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그런데도 구승훈을 바라보는 순간, 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 역시도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이라는 것을.오늘 이 자리는 전적으로 천아름이 강요한 것이었다.구승훈은 갑작스럽게 굳어버렸고 강하리는 여전히 문 앞에 선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그걸 본 천아름이 성큼 다가와 그녀를 홱 잡아당겼다.“뭐 해? 왜 안 들어와? 설마, 두 사람 마주치는 게 어색해서 이러는 거야?”그녀는 강하리를 억지로 끌어 구승훈 옆자리에 앉혔다.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묵묵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방 안은 숨이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그때, 강하리의 휴대폰이 진동했다.천아름이었다.[구승훈 몸이 안 좋았대. 구승재 말로는 지금 치료도 불가능하대. 너랑 연정이를 위해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니까 두 사람 얘기 좀 해봐. 이 문제, 어쩌면 함께 해결할 수도 있을지 몰라.”강하리는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천아름은 이미 방을 나간 뒤였고 남겨진 공간에는 오직 그녀와 구승훈 둘뿐이었다.긴 침묵을 깨고 구승훈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일은 잘돼?”강하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둘 사이의 거리는 거의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웠지만 더
“여씨 집안은 30년 전까지만 해도 연성시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어요. 특히 미인들이 많았죠. 시어머니도 직접 보셨을 테고요. 그런데 옛말에 ‘미인은 화를 부른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아요. 여씨 집안도 결국 시어머니 때문에 몰락했으니까요.”강하리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구승훈이 여초연이 자신에게 약을 주입했다고 고백했을 때, 그녀는 여씨 집안과 여초연을 조사했었다.하지만 찾은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기에 결국 최하영에게 직접 묻기로 했던 것이다.강하리의 놀란 표정을 본 최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구씨 집안에서는 처음부터 여초연 씨를 며느리로 들이기로 했어요. 그런데 대학 시절, 여초연 씨가 같은 학교 학생을 좋아하게 된 거죠. 그때 이미 여씨 집안은 기울어가고 있었고 구씨 집안과의 혼인만이 생존 방법이었어요. 그러니 파혼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죠.”“하지만 강제로 막는다고 마음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결국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도망쳤어요. 무려 2년 동안요. 그리고 그 사이 여씨 집안은 완전히 무너졌어요. 구씨 집안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여초연 씨의 부모님은 연이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형제들은 경제 사범으로 감옥에 갔죠. 형은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동생은 건강이 악화됐어요. 그리고 여초연 씨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이미 만삭의 몸이었어요. 배 속에는 그 남자의 아이가 있었고요.”“구씨 집안의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아시잖아요. 그녀를 곧장 병원으로 데려가 강제로 유산시켰어요. 아이를 잃고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구씨 집안은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했죠. 처음에는 누구도 가까이 못 오게 막았지만 결국 함께 도망쳤던 남자가 협박 수단이 되었어요.”“그 협박이 통했어요. 두 달 뒤, 여초연 씨는 임신했고 그렇게 낳은 아이가 하리 씨 남편이에요.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바로 그날, 여초연 씨의 연인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마지막 인사도 못 한 채, 그녀는 모든 게 구씨 집안의 짓이라고
강하리는 최하영과 작은 사찰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식당 문 앞에서, 강하리은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바로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요? 추억에 잠기기라도 한 거예요?”강하리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아니요.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식당에는 정자와 누각, 고풍스러운 회랑과 기둥이 어우러진 독특한 건축 양식을 자랑하고 있었다.구승훈과 함께 이곳에 왔던 기억이 떠오르며 그녀의 시선이 한동안 허공을 맴돌았다.이곳 분위기가 좋다는 강하리의 말에 구승훈은 환한 표정으로 앞으로 함께 자주 오자는 말을 했었다.문연진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테이블 위에 놓인 달콤한 요리를 바라보며 그녀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왜 우리는 함께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걸까?’구승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심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녀가 더 이상 버틸 힘조차 앗아가고 있었다.천아름은 이혼을 잠시 미뤄보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알고 있었다.미루든, 미루지 않든 결과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최하영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불러냈다.강하리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맛있어요.”최하영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말했다.“제 정보가 틀린 줄 알았네요.”강하리는 그가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묻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최 대표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최하영은 공용 젓가락으로 그녀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말했다.“안현우 일이죠? 기명제약 뒤에서 손 쓴 사람, 그 녀석 맞아요. 이제 어떻게 도와줄까요?”강하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가슴 한구석이 더욱 답답해졌다.공항까지 마중을 나간 것도, 시킨 음식이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인 것도, 그리고 지금 안현우가 뒤에서 손을 쓰고 있는 것도.최하영이 그걸
“왜냐하면... 너무 가슴 아팠거든. 어쩌면 그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지. 하리를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하지만 하리의 감정은 생각해 봤을까?”천아름은 그렇게 말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만약 내가 하리라면,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텐데. 여자의 마음은 한 번 돌아서면 다시 붙잡기 어려워. 마음을 굳히면 정말 되돌아오지 않는 법이거든.”구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천아름의 얼굴에 스친 슬픔이 그를 멈춰 세웠지만 그녀는 그에게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고 곧장 감정을 추슬렀다.“네가 정말 형을 위하는 거라면 대체 무슨 일인지 말해 봐.”구승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형... 몸이 많이 안 좋아요. 형수님과 연정이한테 폐를 끼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천아름은 가늘고 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그래서 결혼식까지 취소한 거야? 무슨 병인데? 설마 불치병은 아니겠지?”구승재는 씁쓸하게 웃었다.“거의 그렇다고 봐야 해요. 어쨌든 지금은 치료가 불가능해요.”순간 할 말을 일은 천아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구승재의 얼굴에 드리운 슬픔이 묵직하게 다가왔다.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 가볍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별 보는 거 좋아해? 기분 좀 풀어. 누나랑 별 보러 가자.”그 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새벽녘에 강하리가 잠에서 깨고 휴대폰을 확인하자 천아름이 남긴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구승훈 일, 대충 알아냈어. 너 돌아오면 만나서 얘기하자. 그리고 이혼은 잠깐 미뤄둬.]강하리는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내려놓고 세수를 하고는 평소처럼 하루를 시작했다.그때, 기명제약 쪽에서 노민우가 그녀를 찾아왔다.“문제가 생겼어요.”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무슨 문제요?”“이번 인수 건 말이에요. 원래 반대하지 않던 주주 몇 명이 갑자기 협조를 거부하기 시작했어요. 이상한 게, 그 사람들 평소에는 회사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거
구승훈은 임희주의 답장을 보지도 않은 채 도우미에게 전화를 걸어 연정이를 심씨 가문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그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 놓은 뒤 2층 서재로 향했다.강하리와 함께 썼던 침실 앞을 지나던 순간,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 섰고 묘한 정적 속에서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한편, 임희주는 메시지를 보낸 뒤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계속해서 답장만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휴대폰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기다림이 길어지자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고 신호음조차 울리지 않자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마치 한순간에 모든 걸 무시당한 듯한 기분이었다.[구승훈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그래서 협력할 거예요?]처음 구승훈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느꼈던 설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녀는 자신이 유일하게 그를 도울 수 있는 존재라고 확신했기에 과감하게 요구를 내걸었던 것이다.그러나 구승훈은 아예 그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한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임희주는 갑자기 오늘 저지른 충동적인 행동이 후회되기 시작했다.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어야 했는데...어쩌면 그녀가 이혼을 요구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서 강하리가 먼저 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임희주는 불안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생각을 정리했다.어떤 상황이어도 그녀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한편, 바 카운터에서 천아름은 화려한 색깔의 칵테일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다.그녀의 앞에 앉은 구승재는 슬며시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름이 누나, 형수님은 어떻게 된 거예요?”천아름은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녀의 웃음은 이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특유의 매력을 발산했는데 구승재는 그녀의 살짝 올라간 눈꼬리를 보며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누나, 형수님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천아름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궁금해?”구승재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
임희주는 노진우를 노려보며 차에 올라탔다.그녀는 차 안에서 핸들을 세게 내리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서서히 가라앉는 분노를 삼키듯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이내 시동을 걸었다. .노진우는 임희주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구승훈에게 다가갔다.“대표님, 왜 동의하지 않으신 겁니까? 이렇게 계속 미루다가는 사모님이 정말로 이혼하실지도 모릅니다.”이혼이라는 단어는 가슴을 깊숙이 찌르는 칼날 같았고 구승훈은 발걸음을 멈추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아직 때가 아니야. 지금 임희주와 손을 잡으면 내가 조급해한다는 걸 눈치채고 나를 이용하려 들 거야. 내가 조급해하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는 조급해지겠지.”“하지만 사모님은요? 사모님이 정말로 이혼을 결정하시면 어쩌실 겁니까?”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렸다.“일이 끝나면 사과하고 잘못을 빌어야지.”노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귀걸이를 손에 꽉 쥐고 묵묵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노진우도 따라 들어가려 하자 구승훈이 문 앞에서 돌아서며 이만 가보다는 눈빛을 보냈다.노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오늘은 제가 같이 있겠습니다.”구승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덜 다쳤나 보네?”“하지만 갑자기 병이 도지기라고 하면 혼자서 더 위험합니다.”구승훈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괜찮아. 죽기까지 하겠어?”말을 마치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텅 빈 주택 안에서는 구승훈의 깊은 숨소리만 들렸다.그는 어딘가 공허한 눈빛으로 거실을 둘러보며 강하리와 연정이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그를 기다리던 모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히 떠올랐다.그는 소파 앞 러그에 걸터앉아 손끝으로 귀걸이를 매만졌다.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는 결국 담배에 불을 붙였다.그러나 막 한 모금 들이마시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고 화면 속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연정이의 얼굴이 있었다.“아빠... 아
심준호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깊은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며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리 오늘 나한테 전화해서 이혼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했어. 알아서 잘 처리해.”심준호는 옆에 있던 임희주를 흘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더러운 곳에서 너무 오래 굴러다니지 마. 아니면 나중에 아무도 너를 구해줄 수 없을 거야.”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심준호는 몸을 돌려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돌아서서 임희주를 바라보았다.어둑한 조명 아래, 그녀의 얇은 시폰 드레스는 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희미한 불빛에 속살이 아스라이 비쳤다.구승훈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의 눈에 스쳐 간 것은 혐오였다.“임 선생, 아직 볼 일 남았어요?”임희주는 추위에 몸을 떨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할 말이 있어서요.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소였다. 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임희주 씨, 계속 이러시면 담당 의사 바꾸는 수가 있어요.”임희주는 추위에 입술을 떨며 구승훈에게 달려들어 몸을 기대려던 순간, 구승훈에게 몸이 닿기도 전에 노진우가 그녀를 가로막았다.“임 선생님, 사회면에 오르고 싶으신가요?”그 말에 임희주는 이를 악물었다.그녀의 시선이 뜨겁게 불타올랐다.“구승훈 씨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구승훈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지더니 눈빛에 어둠이 스쳐 지나갔다.“임 선생 말을 제가 어떻게 믿죠?”임희주는 입술을 깨물더니 눈가에 금세 촉촉한 이슬이 맺혔다.“저를 그렇게도 못 믿으세요?”“우리 사이에 신뢰라는 게 있었나요?”그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노진우에게 시선을 돌렸다.“돌려보내.”노진우는 즉시 그녀에게 다가갔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점점 멀어져가는 구승훈의 뒷모습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여초연!”구승훈은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보았다.그의 눈빛에
“우리 층에 누가 임신했나 봐요!”“어떻게 알았어요?”“화장실 쓰레기통에 글쎄 임신 테스트기가 있더라니까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동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수군대는 두 명의 인턴을 바라봤다.그녀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인턴들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곧장 일하러 갔다. 그래서 그녀도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핸드폰은 오늘따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벌써 퍼지고 있었다. 회사는 이런 가십거리가 가장 환영받는 곳이기 때문이다.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것을 보고 강하리는 머리가 찌릿찌릿 아팠다.‘내가 소홀했어. 적어도 종이에 잘 싸서 버려야 하는 건데. 만약 구승훈 대표님이 알게 된다면...’끔찍한 상상에 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때 구승훈의 비서가 사무실에 노크하고 들어왔다.“부장님, 대표님께서 찾으세요.”강하리는 책상 아래에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강 부장님?”“네, 들었어요.”...대표이사실 앞에 멈춰 서서 강하리는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담 비서 신도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대표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하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대표이사실에는 우드 향 향초를 태우고 있었다. 점심부터 협력사 임원과 술 한 잔 마신 듯한 구승훈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반듯한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유난히 방탕해 보였다. 지그시 감은 눈도, 여유롭게 힘 풀린 몸도, 마치 정성껏 만든 조각상과 같았다.강하리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이러니까 주변에 여자가 끊기지 않지. 어느 여자가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거절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몸매도, 능력도... 적어도 겉으로는 흠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오직 강하리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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