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나온 다음 강하리의 핸드폰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자 안예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보스 아버님이 또 회사에 왔어요! 빨리 와보세요! 대표님한테 들키면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강하리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부랴부랴 회사로 향하기 시작했다.SH그룹의 로비에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강찬수가 한눈에 보였다.“담배 꺼요, 당장.”강하리는 새파란 안색으로 말했다. 그러자 강찬수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래, 딸이 하는 말은 들어야지.”“나가서 얘기해요.”강하리는 그를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회사 근처의 카페로 데리고 갔다.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강찬수는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말했다.“우리 딸 출세했네. 이렇게 고급스러운 곳에도 들어올 수 있고 말이야!”“왜 또 왔어요? 이젠 구 대표님이 무섭지도 않은 거예요?”“하! 내가 내 딸을 보러 온다는데, 그 자식이 무슨 자격으로 간섭해?”“더 크게 말해요. 그러면 알 수 있겠네요, 대표님이 간섭할지 안 할지. 대표님 앞에서는 정신병자라고 해도 다르지 않아요.”정서원은 강찬수가 지나가는 차도에 밀치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강하리는 줄곧 그를 감옥에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심신미약으로 법률의 구멍을 파고들었다.강찬수가 얼마나 더러운 사람인지 강하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반대로 강하리가 한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강찬수는 약간 멈칫하다가 본론을 꺼냈다.“돈 줘. 돈만 주면 다시는 안 올게!”“돈 없어요.”강하리는 단칼에 거절했다. 요즘 도박에 빠진 강찬수는 하루가 멀다 하게 돈 달라는 말을 한다.강하리도 그냥 안 주는 것이 아닌, 진짜 돈이 없어서 못 주는 것이었다. 그녀의 돈은 정서원의 병원비에 전부 들어갔다.“구라치지 마! 이런 데서 일하면서 돈 없다는 게 말이 돼?!”강찬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은 힐끗힐끗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
강하리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아마도 18살 되던 해부터일 것이다. 강찬수는 시도 때도 없이 다가와서 그녀의 몸을 지분거렸다. 정서원과 수도 없이 싸우면서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녀는 대학에 붙으면서 집을 떠난 다음에야 강찬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물론 이는 절대 구승훈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짧게 대답했다.“아뇨.”“이런 일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구승훈은 여전히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이런 일’이란 다름 아닌 강찬수가 회사에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는 일을 가리켰다.“다음은 없을 거예요. 저 사직하기로 했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었다.“홧김에 한 말이 아닌가 보네.”“네.”“하하... 그래, 그럼 나도 시간을 뺏지 않을게.”구승훈의 웃음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그런데도 강하리는 영혼 없이 대답하기만 했다.“네.”마지막으로 강하리를 힐끗 본 구승훈은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의 곁에는 함께 온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도발적이고 비웃음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구승훈이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낸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옷보다도 여자를 더 빨리 바꾸는 사람이 구승훈이었다.구승훈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면서도 그녀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랫배를 쓰다듬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가슴은 자꾸만 욱신거렸다.‘괜찮아, 난 이제 떠날 거니까. 떠나면 분명히 잊을 수 있을 거야.’회사 정문에 도착한 그녀는 심호흡하면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번에는 또 누가 퍼뜨렸는지, 회사 단톡방에는 벌써 그녀가 사직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강하리가 용감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구승훈이 냉정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주제를 모른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강하리는 단톡방을 힐끗 보기만 하고 나왔다. 회사 단톡방은 언제나 이 모양이다. 그저 오늘은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그리고 마침 안에서 나오던 강찬수와 마주쳤다.“아이고, 우리 딸이 또 엄마 만나러 왔나 보네.”“도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이를 악물었는데도 강찬수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몇 번을 말해. 나는 돈을 원한다고.”“당신 조만간 죗값을 치르게 될 거예요.”“너희 모녀를 만난 게 내 죗값을 치르는 거야.”말을 마친 강찬수는 강하리를 팍 밀치고 멀어져갔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그녀는 분노에 잠겨서 손을 벌벌 떨었다. 하필이면 이때 배가 아프기 시작해서 그녀는 곧바로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 갑자기 흥분해서 그럴 거야. 어디 조용한 데 앉아서 기분을 진정시켜. 그래도 계속 아프면 병원에 한 번 와봐.”전화를 끊고 난 강하리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라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 보려고 말이다.다행히 손연지의 말대로 하자 통증은 금방 가셨다. 배가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확신이 생긴 다음에야 그녀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강하리는 입원 병동 안으로 들어가서 정서원을 살폈다. 그리고 간병인에게 부탁을 하고 또 했다.“만약 강찬수가 다시 오면 꼭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간병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병원에서 떠난 다음 강하리는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사직서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딱히 낼 기분이 아니었다. 사직서를 서랍 안에 넣은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같은 시각, 강하리가 전화 온 것을 발견한 구승재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강 부장? 나한텐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저... 혹시 돈 좀 빌릴 수 있을까요?”구승훈의 사무실에 앉아 있던 구승재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그는 사람을 잡아두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천하의 강하리가 돈을 빌려달라면서 전화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승재는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미안한데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강 부장 일 때문에 형이 내 카드를
구승훈이 음침한 눈길로 말했다.“강 부장 그럼 최대한 빨리 진행해. 새로운 부장의 임명을 지체하지 말고.”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기획안을 구승훈 앞에 내려놓았다.“이건 신제품 기획안이에요. 대표님께서 더 보충할 거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구승훈은 더 말 없이 곧장 기획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그는 업무에 대해서 늘 진지한 태도였다. 아니, 까다롭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강하리에게 나가 보란 말을 안 했기에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그가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기획안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고 고작 열몇 페이지였다.하지만 구승훈은 무려 한 시간 남짓 확인했다.조목마다 빠짐없이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서명하고 강하리에게 돌려줬다.강하리는 기획안을 손에 넣고 잠시 머뭇거렸다.“또 용건 있어?”구승훈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봤다.강하리는 2초 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아니요, 없습니다.”“그래, 나갈 때 문 잘 잠가.”말을 마친 구승훈은 머리를 푹 숙이고 다른 업무를 처리했다.강하리는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방금 그녀는 하마터면 구승훈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할 뻔했다.아마도 진짜 강찬수 때문에 궁지에 몰린 듯싶다.이 남자가 돈을 빌려줄 리 있을까?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퇴근 후 그녀는 곧바로 그해 엄마의 소송을 도와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고 그녀는 상대에게 상황을 쭉 설명했다.“임 변호사님, 이런 상황은 공갈 협박죄에 해당하나요?”임정원이 잠시 침묵한 후 대답했다.“아직은 공갈 협박으로 고소할 수 없어요. 상대가 법률상에서 친아버지이고 하리 씨는 실질적인 부양 의무를 지니고 있어요. 만약 상대가 이걸 단지 부양비라고 고집한다면 하리 씨는 거의 승산이 없어요. 기껏해야 상대를 비판하고 교육하는 것뿐인데 나중에 다시 찾아와 보복할까 봐 걱정이네요.”강하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하리 씨 어
구승훈은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기분이 꽤 좋아 보였는데 그의 옆엔 어제 커피숍에서 본 그 여자가 앉아 있었다.여자의 치마가 너무 짧아 허벅지가 훤히 비칠 지경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다리를 바짝 들이댄 그녀를 보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한 듯싶었다.그 여자는 강하리가 들어온 순간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다만 구승훈이 옆에 있으니 딱히 내색하진 못했다.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강하리를 쳐다봤다.“강 부장, 용건 있어?”강하리는 그의 옆에 앉은 여자를 힐긋 쳐다봤다.“네.”구승훈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댔다.“퇴사에 관한 일이라면 바로 인사팀 찾아가면 돼.”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퇴사에 관한 일 아니에요.”구승훈이 가볍게 웃었다.“그럼 뭔데? 난 또 강 부장이 날 찾아올 이유가 퇴사밖에 없는 줄 알았지.”강하리는 애써 야유가 담긴 그의 말을 참으며 옆에 앉은 여자를 쳐다봤다.“대표님과 따로 얘기 나누고 싶어요.”구승훈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둘 사이에 따로 나눌 얘기가 더 있을까 심히 의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강하리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녀는 구승훈의 성격을 잘 안다.전에 클럽에서 그의 체면을 짓밟았고 퇴사에 관해서도 그토록 단호한 태도를 선보였으니, 구승훈은 분명 그녀를 호락호락하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그가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나랑 강 부장 사이에 따로 나눌 얘기가 더 있어?”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고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대표님, 저 퇴사하지 않겠습니다.”구승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그래서?”“앞으로의 급여에 대해 대표님과 상의하고 싶습니다.”구승훈이 두 팔을 껴안고 있다가 결국 옆에 앉은 여자에게 말했다.“양 부장, 미안한데 우리 업무는 다음에 다시 얘기해.”양 부장이 분노 어린 눈길로 강하리를 째려봤지만 끝내 활짝 웃으며 구승훈에게 말했다.“네, 대표님. 일단 강 부장님 일부터 처리하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강하리를 힐긋 노려보더니 씩
“강하리!”구승훈이 불쑥 그녀의 턱을 꽉 잡았다.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사실 구승훈은 화를 자주 내는 편이 아니다. 그는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로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가슴 깊이 제 감정을 숨긴 채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게 하는데, 지금은 두 눈이 활활 타오를 것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강하리는 덜컥 겁이 났다.“농담이에요.”그녀는 구승훈의 두 눈을 마주했다.“근데 대표님은 제가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세요?”구승훈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쏘아붙였다.“네가 그 가격을 요구했으니까, 가격에 맞게 표현 잘해야 할 거야.”말을 마친 구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퇴근하고 일찍 돌아가.”강하리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네.”퇴근 후 그녀는 곧바로 집에 돌아갔다.여기서 말한 집이란 바로 그녀와 구승훈이 함께했을 때 그가 선물로 준 아파트 한 채였다.여긴 바로 두 사람의 아지트이다.집안에 들어서자 구승훈이 어느새 소파에 앉아 있었다.“샤워해!”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이 한마디만 내던졌다.강하리는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그에게 대답했다.“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구승훈이 한창 통화 중이었다.그녀를 본 구승훈은 손을 쭉 내밀었고 이에 강하리도 그의 손을 잡았다.구승훈은 그녀를 아예 다리 위에 앉혔다.“강 부장, 내 옷 벗겨.”구승훈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강하리는 화들짝 놀라서 몸이 굳었다. 그는 아직 전화도 끊지 않은 상태였다.“얼른.”그녀가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구승훈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다그쳤다.강하리는 눈 딱 감고 그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구승훈의 몸매는 완벽 그 자체였다.단추가 하나씩 풀리자 가슴 근육부터 복근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강하리는 이 몸매를 3년이나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그럼 그렇게 정해요.”전화기 너머에서 뭐라 말했는지 구승훈이 건성으로 대답했다.대답을 마친 후 그는 불쑥 머리를 숙이고 날카로운 이빨로 그녀 목 옆의 여린 살을 깨물더니 가볍게
“왜 그래?”그가 음침한 목소리로 물으며 그녀의 아랫배에 시선이 꽂혔다.구승훈은 원래 예민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지금쯤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속이 좀 불편해서요.”구승훈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잡더니 강제로 고개 들어 그와 눈을 맞추게 했다.“진짜 단순히 속이 불편한 거야?”강하리는 감히 그의 눈길을 피할 엄두가 안 났다.“진짜예요. 강찬수랑 종일 소란을 피우다 보니 밥 먹을 기분도 안 났고, 원래 속이 좀 불편했는데 아까 너무 급하게 죽을 먹었더니 받아들이지 못했나 봐요.”구승훈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반신반의한 눈길로 머리를 끄덕였다.“내일 가서 검사받아.”강하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네.”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다가 끝내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대표님은 지금 제가 임신한 거로 의심되나요?”구승훈은 창가에 다가가 고개 숙여 담뱃불을 지폈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나서야 대답했다.“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강 부장도 이런 예외는 원치 않는 거 아니야?”강하리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말했다.“대표님 말이 맞아요.”그녀는 가볍게 웃은 후 일부러 무심한 척 물었다.“대표님은 아이를 엄청 싫어하시나 봐요?”구승훈이 어두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질문이 너무 많아!”강하리는 표정이 확 굳었다. 또 그의 기분을 언짢게 했나 보다.구승훈은 그녀가 자신에 관해 묻는 걸 줄곧 싫어하고 그의 사생활도 염탐하지 못하게 했다.무릇 그의 사생활과 관련된 일이라면 가차 없이 그녀에게 선을 긋는다.구승훈에게 강하리는 줄곧 외부인이다. 그러니 아이에 대해서도, 감정에 대해서도 묻지 말아야 한다.강하리의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씁쓸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다시 천천히 내뱉었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구승훈이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 다만 잠시 후 반듯하게 차려입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연지야, 나 좀 도와줘야겠어.”“뭔데? 말해봐.”“대표님이 내가 임신한 거 의심하기 시작했어. 내일 아마 비서를 시켜서 날 데리고 검사받으러 가게 할 거야. 너 가짜 임신 검사서 하나 만들어줘야 겠다.”손연지는 문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지야?”강하리가 미간을 구겼다.“구승훈 씨 애야?”뜬금없는 그녀의 물음에 강하리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바로 맞출 거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으니까.다만 손연지에게 딱히 숨길 필요도 없었으니 그녀는 아예 인정해버렸다.“맞아. 구승훈 씨 애야.”“X발, 진짜 그 인간이었어! 설마 너 관행 당한 거야? 개자식, 겉모습만 번지르르하지 인간도 아니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해!”강하리는 그녀의 연이은 험한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한참 후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관행 아니야.”손연지는 흠칫 놀라서 물었다.“그럼 네가 침대에 기어오른 거?”강하리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나 스폰받고 있어, 3년 전부터.”손연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쇼킹이지? 너무 실망이지?”강하리는 뭇사람들에게 성품과 학문을 겸비한 참한 여자였다.그래서 손연지도 가장 먼저 그녀가 관행 당한 거라고 의심했는데 스폰이라니...“에이, 그게 뭐라고. 각자 원하는 바를 얻는 거잖아. 나도 너 같은 미모를 지니면 돈 많은 남자를 찾아서 스폰받았을 거야. 잠자리도 갖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아.”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여기서 금기는 아이가 생기는 거지.”강하리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그랬다. 둘 사이엔 확실히 이 아이가 없어야 한다.만약 이 아이가 없으면 그녀는 구승훈과 아무렇게나 돼도 다 상관없다.헤어져도 좋고 함께여도 좋으니 딱히 큰 걱정거리가 없다.근데 하필 아이가 생겼고 아무런 준비 없이 불쑥 그녀를 찾아왔다.손연지도 덩달아 걱정됐다.만약 그 남자가 일반인이라면 강하리의 매력으로 충분히 그와 혼인신고하고 잘 살 텐데 하필이면 구승훈이라니.피라미드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남자라 일반인들이 넘볼만한 존재가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
B시 대양그룹.정양철이 사무실로 들어가니 이미 비서가 대기하고 있었다.“강하리 검색어는 어떻게 된 거야?”비서는 잠시 머뭇거렸다.“사모님께서 대양그룹 명의로 매수한 것인데 아마도 회장님을 시험하려는 의도 같습니다.”정 회장이 강하리를 아낀다면 이 일을 거론할 것이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하든 말든 넘어가겠지.정양철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고 그가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주현이 통해 강하리에게 연락해서 대양그룹이 JM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라고 해.”말을 마친 그가 멈칫했다.“집사람이 물어보면 강하리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고.”비서의 눈이 번뜩이더니 대답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정주현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지난번 구승훈과 함께 대양그룹 입찰을 뺏은 이후 정양철 측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정양철이 무슨 꿍꿍이로 합작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지금은 정양철을 상대로 놀아줄 기분이 아니었다.“정주현 씨, 대양그룹에서 마음만 먹으면 파트너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죠?”정주현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는 다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강하리 씨, 우리랑 같이 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강하리가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던 찰나, 정주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B시에 언제 와요? 얼굴 보고 얘기할까요? 협업 안 해도 오랜만에 얼굴 한번 봐요. 우리 안 본 지 오래됐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요, 그럼 가면 연락할게요.”정주현이 전화를 끊자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연미숙의 모습이 보였다.“엄마, 여기서 뭐 해?”연미숙이 웃었다.“우리가 강하리랑 같이 일해?”정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구씨 집안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밖으로 사업을 넓히려는 것 같아.”연미숙은 인상을 찌푸렸다. “꼭 강하리여야만 대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야?”정주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하리가 왜?”연미숙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두 사람이 차 안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리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화사한 아침 햇살 같은 그 미소가 구승훈은 왠지 모르게 눈에 거슬렸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구승훈의 차가 보였다.그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시선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강하리가 안으로 들어간 후 주해찬은 차에서 내려 구승훈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그가 창문을 살며시 두드리자 구승훈이 창문을 내렸다.“구 대표님 시간 있으세요? 얘기 좀 할까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주해찬 씨는 남의 연애에 참견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구승훈의 가시 돋친 말에도 주해찬은 계속 웃기만 했다.“구승훈 씨, 당신과 하리가 잘 지낸다면 나도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당신은 하리를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긴 한가요?”그의 말에 구승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신 후 말을 시작했다.“주해찬 씨, 행복하든 아니든 그건 다 나와 강하리 사이의 일이지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주해찬은 조롱 섞인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웃었다. “구승훈 씨, 내가 하리 데려간다고 했죠. 이번엔 말한 대로 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다시 차로 향했다.구승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완전히 사라진 채 떠나는 차를 바라보았다.그는 한참 동안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보면서 결국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그 자식이랑 떠날 거야?]강하리가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그냥 대화창을 닫아버렸다.구승훈은 전송된 메시지에 답장이 오지 않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입안의 쓴맛을 삼키고 휴대폰을 치우려던 찰나,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왔다.“형, 큰어머니가 그
“죽기 전엔 안 해.”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구승훈의 손가락이 한참을 굳어 있다가 말을 꺼냈다.“안 해.”하고 싶었지만 그게 그녀를 더 멀리 밀어낼까 봐 더 두려웠다.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 문제의 핵심은 아이였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아이 문제로 말을 돌렸다.“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 문연진이 어떻게 아이의 존재를 안 거야?”구승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구승재가 통화하는 걸 들었어.”심준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정말 문연진이 아니야?”구승훈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그 여자가 아니야.”문연진은 이미 연정이를 죽였다고 인정했는데 굳이 연정이를 차로 치어 산에서 떨어뜨렸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그녀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도중에 가정부가 연정이와 함께 차에서 내린 사실을 모른다는 것.“그럼 문연진 말고 또 아는 사람이 있어?”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여초연, 문연진 말로는 그날 밤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침 여초연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했어.”멈칫한 심준호의 눈에서 차가움이 번뜩였다.여초연이란 사람은 솔직히 줄곧 속내를 알 수 없었다.전에는 여러 번이나 구승훈을 죽이려고 했다가 지금은 무척 다정하게 굴었다.그 여자는 지금까지도 끔찍한 존재로 느껴졌다.“설마 그 사람이?”심준호는 문득 구승훈이 안타까웠다.정말 여초연이라면 구승훈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아직 확인하고 있어.”심준호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만 해.”구승훈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심준호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고 이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그도 떠났다.심준호를 배웅하고 차로 돌아온 구승훈의 휴대폰이 울렸다.“형, 어제 강하리 씨 인기 검색어가 대양그룹과 관련이 있어.”구승훈의 눈에 냉기가 감돌았다.“최근 정양철 측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어?”“아니, 이 검색어 말고는 그동안 잠잠했
강하리의 입꼬리가 굳어지며 다시 말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한 대의 자동차가 도로변에 멈춰 서는 것을 목격했다.주해찬이 차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왔다.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렇게 말했다.“직접 만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말을 마친 그는 강하리에게 눈썹을 치켜세웠고 강하리는 길 건너편에 주차된 너무나도 낯익은 차를 보았다.검은색 마이바흐 창문은 반쯤 내려져 있고 차에 탄 남자는 담배를 손에 쥐고 있었다. 멀리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구승훈이 이쪽을 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그쪽을 힐끗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그러면 나중에 메시지 보낼게요.”심준호는 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러면 그동안 잘 돌봐주세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이끌고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강하리의 손목이 잡혔다.어느 틈엔가 구승훈이 길을 건너 이쪽으로 걸어왔고 주해찬이 얼굴을 찡그리며 막으려는데 심준호가 옆에서 말렸다.강하리의 손가락이 살짝 조여졌다.“구승훈 씨, 이거 놔요.”구승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었다.“하리야, 이제 고맙다는 말도 안 할 거야?”강하리의 몸이 굳어지고 입꼬리가 몇 번 움직이다가 말을 꺼냈다.“고마워요.”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이제 놔줄래요?”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나한테 꼭 이래야겠어?”강하리가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씨,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요.”그가 원망스러웠다.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를 보면 연정이가 생각난다는 사실이었다.숨도 쉴 수 없을 것만 같은 고통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나도 놔주지 않겠다고 했잖아. 하리야, 얘기 좀 하자.”강하리의 눈이 빨개지며 입을 열자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강하리가 유치장 벤치에 기대어 홀로 앉아 있었다.머릿속에는 구승훈이 차를 막았을 때와 이곳을 떠날 때의 모습만이 가득했다.강하리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 모든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그 남자의 움직임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그가 이름을 불러줄 때, 그 다급하면서도 부드러운 어투가.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점점 더 가슴이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노민우의 말이 틀린 게 없다는 건 안다.구승훈의 의도는 좋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생각만 해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밤새 달려온 심준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여자가 벤치에 홀로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가녀린 어깨를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그는 부드럽게 한숨을 쉬며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심준호를 보았다.“심 변호사님.” 낮게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엔 어딘가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심준호는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겁내지 마요. 내가 아무 일도 없게 할 테니까.”강하리는 눈가에 맺힌 시큰한 감각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심준호는 손에 든 음식을 그녀에게 건넸다.“아직 밥 안 먹었죠?”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배 안 고파요.”심준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배 안 고프면 안 먹을 거예요?” 그는 곧바로 음식을 열고 숟가락을 그녀의 손에 밀어 넣었다.“마침 나도 안 먹었는데 같이 먹어요.”강하리는 거절하지 못했지만 그 음식들을 보자마자 그녀의 움직임은 멈췄고 자신도 모르게 숟가락을 꽉 움켜쥐었다.“왜요, 입맛에 안 맞아요?”심준호는 눈썹을 치켜뜬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강하리는 음식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 맞는 게 아니라 너무 입맛에 맞아서 문제다.그녀의 취향에 딱 맞는 요리를 주문했다.심준호가 웃었다.“좋아하면 많이 먹어요. 그동안 야윈 것 좀 봐요.”강하리가 그를 슬쩍 쳐다봤다.“구승훈 씨가 주문한 거예요?”심준호는 새우를 그녀의 그릇에 넣어주었다
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하리야...”손연지는 어쩔 줄 몰라 했다.하지만 막상 부르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노민우를 노려보았다.노민우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대략 알고 있었기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강하리 씨, 이번 일은 승훈이 잘못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 거예요. 승훈이도 아이를 지키기 위한 의도였어요. 아이의 상황이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까지 힘들게 버텨왔는데 그래도 하리 씨가 조금만 더 너그럽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됐어, 입 다물어!”손연지가 끼어들었다.“하리가 얼마나 더 너그럽게 봐줘야 해? 심지어... 아주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하리는 더 원망하지 않았어. 그 사람은 뭔데? 그래, 정말 아이를 지키려고 그랬을지 몰라도 하리를 고통스럽게 한 건 사실이잖아. 한번 또 한 번 하리가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알아? 하리는 이해해 줬는데 그 사람은 하리를 이해해 준 적 있어? 하리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고통까지 겪어야 해?”손연지의 이어지는 반박에 노민우는 할 말을 잃었다.“난 그냥 강하리 씨에게 좋은 말을 해주려고 그런 건데.”손연지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무슨 일이 있어도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남자든 아이든 너만큼 중요하지 않아, 알겠지?”강하리는 눈가에 담긴 씁쓸함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알아. 고마워, 연지야.”손연지가 부드럽게 토닥이며 주해찬에게 고개를 돌렸다.“더 달래봐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고 손연지는 노민우를 밖으로 끌어냈다.주해찬은 몸을 숙인 채 강하리를 같은 높이에서 바라봤고 강하리는 그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선배, 난 괜찮아요.”주해찬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거절당할 것을 생각하며 결국 참았다.그는 말을 하기 전까지 한참 동안 침묵했다.“하리야, 이번
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하리야, 브레이크가 고장 났고 넌 몸에 이상이 있었어. 문연진이 도망가려고 했던 거야, 알겠어? 알겠냐고?”강하리가 웃었다.“예전에 송유라도 이런 식으로 법의 심판을 받지 않게 도와준 거지?”구승훈은 말문이 막혔다.“하리야...”강하리가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구승훈, 이제부터 내 일에 신경 쓰지 마.”말을 마친 그녀가 안으로 들어갔고 구승훈의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강하리를 끌어당겼다.“내가 신경 끄면 누가 신경 쓰는데, 주해찬?”강하리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결국 밀어냈다.앞으로 그 사람이 누가 되든 구승훈은 아닐 것이다.주해찬은 손연지, 노민우와 함께 서둘러 달려왔고 세 사람이 도착했을 때 구승훈은 유치장 바깥을 지키고 있었고 강하리는 바깥을 등진 채 앉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마치 거대한 간극이 있는 것 같았다.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걸음을 멈칫했다.강하리를 구해주지 않는 구승훈 때문에 화가 났지만 강하리가 한 짓을 알고는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하리야.”강하리는 손연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뒤를 돌아보았다.그녀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거짓말해서 미안해.”손연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하리야, 너 바보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연지야, 내가 하지 않으면 평생 불안할 것 같았어.”“하리야...” 손연지의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팠다.“그럼 넌 이제 어떡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참 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난 이대로도 괜찮아.”정말 형을 선고받는다고 해도 원망할 건 없었다.“그런 말 하지 마! 하리야, 넌 아직 할 일도 많고 나이도 젊잖아. 아주머니 가족도 있고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살아 계시면서 네가 돌아오길 기다릴 수도 있잖아, 아니야? 이대로 널 포기하면 안 돼!”강하리는 눈가가 촉촉해진 채 한참이 지난 후 말했다.“나한테 가족이 있을까?”“있
구승훈의 눈동자가 움츠러들었다.거리가 너무 짧아서 피하고 싶어도 이미 너무 늦었다.“하리야!” 그가 차를 향해 소리쳤지만 강하리의 차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가속 페달을 밟았다.강하리가 구승훈을 노려보는 것 같아도 그녀의 시야는 진작 눈물로 흐려졌다.하지만 구승훈을 치기 직전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가 구승훈 바로 앞에서 멈췄다.구승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순간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강하리만 바라보았다.조금 전 강하리가 정말로 그를 차로 쳐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하리야.”구승훈이 낮게 부르며 그녀에게 가려는데 그가 막 차 앞을 벗어난 순간 강하리가 다시 액셀을 밟더니 그를 스쳐 지나며 달려갔다.당황한 구승훈이 저쪽을 향해 소리쳤다.“다들 비켜!”문연진을 지키고 있던 몇 명의 경찰이 문연진을 끌어당겨 옆으로 피했지만 문연진은 너무 느렸고 강하리는 지나치게 빨랐다.문연진은 몇 발짝도 뛰지 못하고 쾅 소리와 함께 그대로 부딪혔다.차에 앉아 핸들을 잡고 있던 강하리의 손이 덜덜 떨렸고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성큼성큼 차로 다가온 구승훈이 밖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하리야, 내려.”“하리야, 차 문 열어.”“하리야, 차에서 내려, 응?”반면 강하리는 들리지 않는 듯 혼자서 운전대에 엎드린 채 울기만 했다.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 구승훈조차도.아이의 복수는 그녀가 할 것이다.그 대가가 그녀 본인이라고 해도 말이다.밖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고 차에 부딪힌 문연진의 하체에서 선홍빛 액체가 흘러나왔다.류덕구는 서둘러 사람을 시켜 그녀를 병원으로 보냈고 구승훈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강하리를 달래고 있었다.하지만 강하리는 문을 열어주지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사고 현장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고 동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류덕구를 바라보았다.“저 영상 좀 처리 부탁드립니다.”류덕구가 인상을 찌푸렸다.“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