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당연히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차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걸어오면서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제까지 성가시게 굴래?”강하리의 앞에 멈춰 선 구승훈은 차갑고도 오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제가 언제 성가시게 굴었다는 거죠?”“그럼 진짜 안 대표를 따라가겠다는 건가? 둘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지?”“오해하셨어요. 이번에는 제가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거지,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이유는?”강하리는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결혼하고 싶어서요.”“정말이야?”“그럼요, 저도 이제 27살이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눈동자에는 위험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결혼할 상대는 있고?”“...아뇨. 하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마당에 그게 그렇게 중요하나요?”“돈은?”구승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질문에 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애초에 그녀는 돈을 위해 구승훈과 만난 것이었다. 이는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구승훈은 번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약점을 건드렸다.젖 먹던 힘까지 짜내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른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대답했다.“돈과 결혼 중에서, 저는 결혼을 선택하기로 했어요.”“그러면... 나는?”“의미 없는 질문이네요. 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요. 대표님이 그걸 해줄 수 있겠어요?”강하리는 구승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속으로는 혹시라도 그가 머리를 끄덕여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냥 성의 없는 대답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 평생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그에게만 묶여서 살 것이다.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차가워지는 안색이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는 뒤로 두 발짝 물러서더니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대답했다.“난 네가
병원에서 나온 다음 강하리의 핸드폰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자 안예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보스 아버님이 또 회사에 왔어요! 빨리 와보세요! 대표님한테 들키면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강하리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부랴부랴 회사로 향하기 시작했다.SH그룹의 로비에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강찬수가 한눈에 보였다.“담배 꺼요, 당장.”강하리는 새파란 안색으로 말했다. 그러자 강찬수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래, 딸이 하는 말은 들어야지.”“나가서 얘기해요.”강하리는 그를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회사 근처의 카페로 데리고 갔다.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강찬수는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말했다.“우리 딸 출세했네. 이렇게 고급스러운 곳에도 들어올 수 있고 말이야!”“왜 또 왔어요? 이젠 구 대표님이 무섭지도 않은 거예요?”“하! 내가 내 딸을 보러 온다는데, 그 자식이 무슨 자격으로 간섭해?”“더 크게 말해요. 그러면 알 수 있겠네요, 대표님이 간섭할지 안 할지. 대표님 앞에서는 정신병자라고 해도 다르지 않아요.”정서원은 강찬수가 지나가는 차도에 밀치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강하리는 줄곧 그를 감옥에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심신미약으로 법률의 구멍을 파고들었다.강찬수가 얼마나 더러운 사람인지 강하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반대로 강하리가 한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강찬수는 약간 멈칫하다가 본론을 꺼냈다.“돈 줘. 돈만 주면 다시는 안 올게!”“돈 없어요.”강하리는 단칼에 거절했다. 요즘 도박에 빠진 강찬수는 하루가 멀다 하게 돈 달라는 말을 한다.강하리도 그냥 안 주는 것이 아닌, 진짜 돈이 없어서 못 주는 것이었다. 그녀의 돈은 정서원의 병원비에 전부 들어갔다.“구라치지 마! 이런 데서 일하면서 돈 없다는 게 말이 돼?!”강찬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은 힐끗힐끗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
강하리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아마도 18살 되던 해부터일 것이다. 강찬수는 시도 때도 없이 다가와서 그녀의 몸을 지분거렸다. 정서원과 수도 없이 싸우면서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녀는 대학에 붙으면서 집을 떠난 다음에야 강찬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물론 이는 절대 구승훈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짧게 대답했다.“아뇨.”“이런 일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구승훈은 여전히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이런 일’이란 다름 아닌 강찬수가 회사에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는 일을 가리켰다.“다음은 없을 거예요. 저 사직하기로 했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었다.“홧김에 한 말이 아닌가 보네.”“네.”“하하... 그래, 그럼 나도 시간을 뺏지 않을게.”구승훈의 웃음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그런데도 강하리는 영혼 없이 대답하기만 했다.“네.”마지막으로 강하리를 힐끗 본 구승훈은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의 곁에는 함께 온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도발적이고 비웃음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구승훈이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낸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옷보다도 여자를 더 빨리 바꾸는 사람이 구승훈이었다.구승훈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면서도 그녀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랫배를 쓰다듬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가슴은 자꾸만 욱신거렸다.‘괜찮아, 난 이제 떠날 거니까. 떠나면 분명히 잊을 수 있을 거야.’회사 정문에 도착한 그녀는 심호흡하면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번에는 또 누가 퍼뜨렸는지, 회사 단톡방에는 벌써 그녀가 사직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강하리가 용감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구승훈이 냉정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주제를 모른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강하리는 단톡방을 힐끗 보기만 하고 나왔다. 회사 단톡방은 언제나 이 모양이다. 그저 오늘은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그리고 마침 안에서 나오던 강찬수와 마주쳤다.“아이고, 우리 딸이 또 엄마 만나러 왔나 보네.”“도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이를 악물었는데도 강찬수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몇 번을 말해. 나는 돈을 원한다고.”“당신 조만간 죗값을 치르게 될 거예요.”“너희 모녀를 만난 게 내 죗값을 치르는 거야.”말을 마친 강찬수는 강하리를 팍 밀치고 멀어져갔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그녀는 분노에 잠겨서 손을 벌벌 떨었다. 하필이면 이때 배가 아프기 시작해서 그녀는 곧바로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 갑자기 흥분해서 그럴 거야. 어디 조용한 데 앉아서 기분을 진정시켜. 그래도 계속 아프면 병원에 한 번 와봐.”전화를 끊고 난 강하리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라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 보려고 말이다.다행히 손연지의 말대로 하자 통증은 금방 가셨다. 배가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확신이 생긴 다음에야 그녀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강하리는 입원 병동 안으로 들어가서 정서원을 살폈다. 그리고 간병인에게 부탁을 하고 또 했다.“만약 강찬수가 다시 오면 꼭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간병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병원에서 떠난 다음 강하리는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사직서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딱히 낼 기분이 아니었다. 사직서를 서랍 안에 넣은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같은 시각, 강하리가 전화 온 것을 발견한 구승재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강 부장? 나한텐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저... 혹시 돈 좀 빌릴 수 있을까요?”구승훈의 사무실에 앉아 있던 구승재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그는 사람을 잡아두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천하의 강하리가 돈을 빌려달라면서 전화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승재는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미안한데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강 부장 일 때문에 형이 내 카드를
구승훈이 음침한 눈길로 말했다.“강 부장 그럼 최대한 빨리 진행해. 새로운 부장의 임명을 지체하지 말고.”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기획안을 구승훈 앞에 내려놓았다.“이건 신제품 기획안이에요. 대표님께서 더 보충할 거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구승훈은 더 말 없이 곧장 기획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그는 업무에 대해서 늘 진지한 태도였다. 아니, 까다롭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강하리에게 나가 보란 말을 안 했기에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그가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기획안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고 고작 열몇 페이지였다.하지만 구승훈은 무려 한 시간 남짓 확인했다.조목마다 빠짐없이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서명하고 강하리에게 돌려줬다.강하리는 기획안을 손에 넣고 잠시 머뭇거렸다.“또 용건 있어?”구승훈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봤다.강하리는 2초 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아니요, 없습니다.”“그래, 나갈 때 문 잘 잠가.”말을 마친 구승훈은 머리를 푹 숙이고 다른 업무를 처리했다.강하리는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방금 그녀는 하마터면 구승훈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할 뻔했다.아마도 진짜 강찬수 때문에 궁지에 몰린 듯싶다.이 남자가 돈을 빌려줄 리 있을까?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퇴근 후 그녀는 곧바로 그해 엄마의 소송을 도와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고 그녀는 상대에게 상황을 쭉 설명했다.“임 변호사님, 이런 상황은 공갈 협박죄에 해당하나요?”임정원이 잠시 침묵한 후 대답했다.“아직은 공갈 협박으로 고소할 수 없어요. 상대가 법률상에서 친아버지이고 하리 씨는 실질적인 부양 의무를 지니고 있어요. 만약 상대가 이걸 단지 부양비라고 고집한다면 하리 씨는 거의 승산이 없어요. 기껏해야 상대를 비판하고 교육하는 것뿐인데 나중에 다시 찾아와 보복할까 봐 걱정이네요.”강하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하리 씨 어
구승훈은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기분이 꽤 좋아 보였는데 그의 옆엔 어제 커피숍에서 본 그 여자가 앉아 있었다.여자의 치마가 너무 짧아 허벅지가 훤히 비칠 지경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다리를 바짝 들이댄 그녀를 보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한 듯싶었다.그 여자는 강하리가 들어온 순간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다만 구승훈이 옆에 있으니 딱히 내색하진 못했다.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강하리를 쳐다봤다.“강 부장, 용건 있어?”강하리는 그의 옆에 앉은 여자를 힐긋 쳐다봤다.“네.”구승훈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댔다.“퇴사에 관한 일이라면 바로 인사팀 찾아가면 돼.”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퇴사에 관한 일 아니에요.”구승훈이 가볍게 웃었다.“그럼 뭔데? 난 또 강 부장이 날 찾아올 이유가 퇴사밖에 없는 줄 알았지.”강하리는 애써 야유가 담긴 그의 말을 참으며 옆에 앉은 여자를 쳐다봤다.“대표님과 따로 얘기 나누고 싶어요.”구승훈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둘 사이에 따로 나눌 얘기가 더 있을까 심히 의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강하리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녀는 구승훈의 성격을 잘 안다.전에 클럽에서 그의 체면을 짓밟았고 퇴사에 관해서도 그토록 단호한 태도를 선보였으니, 구승훈은 분명 그녀를 호락호락하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그가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나랑 강 부장 사이에 따로 나눌 얘기가 더 있어?”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고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대표님, 저 퇴사하지 않겠습니다.”구승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그래서?”“앞으로의 급여에 대해 대표님과 상의하고 싶습니다.”구승훈이 두 팔을 껴안고 있다가 결국 옆에 앉은 여자에게 말했다.“양 부장, 미안한데 우리 업무는 다음에 다시 얘기해.”양 부장이 분노 어린 눈길로 강하리를 째려봤지만 끝내 활짝 웃으며 구승훈에게 말했다.“네, 대표님. 일단 강 부장님 일부터 처리하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강하리를 힐긋 노려보더니 씩
“강하리!”구승훈이 불쑥 그녀의 턱을 꽉 잡았다.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사실 구승훈은 화를 자주 내는 편이 아니다. 그는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로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가슴 깊이 제 감정을 숨긴 채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게 하는데, 지금은 두 눈이 활활 타오를 것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강하리는 덜컥 겁이 났다.“농담이에요.”그녀는 구승훈의 두 눈을 마주했다.“근데 대표님은 제가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세요?”구승훈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쏘아붙였다.“네가 그 가격을 요구했으니까, 가격에 맞게 표현 잘해야 할 거야.”말을 마친 구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퇴근하고 일찍 돌아가.”강하리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네.”퇴근 후 그녀는 곧바로 집에 돌아갔다.여기서 말한 집이란 바로 그녀와 구승훈이 함께했을 때 그가 선물로 준 아파트 한 채였다.여긴 바로 두 사람의 아지트이다.집안에 들어서자 구승훈이 어느새 소파에 앉아 있었다.“샤워해!”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이 한마디만 내던졌다.강하리는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그에게 대답했다.“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구승훈이 한창 통화 중이었다.그녀를 본 구승훈은 손을 쭉 내밀었고 이에 강하리도 그의 손을 잡았다.구승훈은 그녀를 아예 다리 위에 앉혔다.“강 부장, 내 옷 벗겨.”구승훈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강하리는 화들짝 놀라서 몸이 굳었다. 그는 아직 전화도 끊지 않은 상태였다.“얼른.”그녀가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구승훈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다그쳤다.강하리는 눈 딱 감고 그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구승훈의 몸매는 완벽 그 자체였다.단추가 하나씩 풀리자 가슴 근육부터 복근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강하리는 이 몸매를 3년이나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그럼 그렇게 정해요.”전화기 너머에서 뭐라 말했는지 구승훈이 건성으로 대답했다.대답을 마친 후 그는 불쑥 머리를 숙이고 날카로운 이빨로 그녀 목 옆의 여린 살을 깨물더니 가볍게
“왜 그래?”그가 음침한 목소리로 물으며 그녀의 아랫배에 시선이 꽂혔다.구승훈은 원래 예민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지금쯤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속이 좀 불편해서요.”구승훈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잡더니 강제로 고개 들어 그와 눈을 맞추게 했다.“진짜 단순히 속이 불편한 거야?”강하리는 감히 그의 눈길을 피할 엄두가 안 났다.“진짜예요. 강찬수랑 종일 소란을 피우다 보니 밥 먹을 기분도 안 났고, 원래 속이 좀 불편했는데 아까 너무 급하게 죽을 먹었더니 받아들이지 못했나 봐요.”구승훈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반신반의한 눈길로 머리를 끄덕였다.“내일 가서 검사받아.”강하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네.”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다가 끝내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대표님은 지금 제가 임신한 거로 의심되나요?”구승훈은 창가에 다가가 고개 숙여 담뱃불을 지폈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나서야 대답했다.“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강 부장도 이런 예외는 원치 않는 거 아니야?”강하리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말했다.“대표님 말이 맞아요.”그녀는 가볍게 웃은 후 일부러 무심한 척 물었다.“대표님은 아이를 엄청 싫어하시나 봐요?”구승훈이 어두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질문이 너무 많아!”강하리는 표정이 확 굳었다. 또 그의 기분을 언짢게 했나 보다.구승훈은 그녀가 자신에 관해 묻는 걸 줄곧 싫어하고 그의 사생활도 염탐하지 못하게 했다.무릇 그의 사생활과 관련된 일이라면 가차 없이 그녀에게 선을 긋는다.구승훈에게 강하리는 줄곧 외부인이다. 그러니 아이에 대해서도, 감정에 대해서도 묻지 말아야 한다.강하리의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씁쓸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다시 천천히 내뱉었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구승훈이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 다만 잠시 후 반듯하게 차려입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
여초연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시커먼 총구가 그대로 그녀의 이마를 겨눴다.순간, 구승훈이 미소를 띠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차가운 바닷바람은 비릿한 바다 내음을 가득 실어 나르고 있었고 여초연의 머리카락도 바람에 휘날렸다.구승훈도 이렇게 초라한 여초연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언제나 고운 치마를 입고 마치 우아하고 오만한 백조처럼 머리를 높이 묶어 올리고 다니던 그녀였으니 말이다.구승훈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오랜만이네.”그 말들 들은 여초연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사랑하는 내 아들 승훈아, 약물에 조종당하는 기분은 어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기분은 또 어떻고? 맞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적 없지? 걱정 마. 머지않아 내가 꼭...”구승훈이 방아쇠를 당겼다.“내 사람한테 손 대면 가만 안 둘 거야.”여초연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녀의 눈동자는 증오로 가득 찼다.“왜? 너희 구씨 가문 놈들은 마음대로 날 짓밟아도 되고 난 안 된다고? 난 당해도 싸다는 거야?”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웃었다.“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당신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정말이야. 날 이용하면서도 항상 날 괴롭혔잖아. 난 그런 취급을 당해도 된다는 거야?”여초연은 허망한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나라고 너를 낳고 싶었을까?’“해독제가 갖고 싶어? 내가 줄 것 같아?”구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응. 당신은 항복하게 될 거거든.”여초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구승훈이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오기 직전에 삼촌한테 똑같은 약을 놔줬거든. 그것도 두 배 용량으로. 과연 삼촌 몸이 버텨줄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여초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말도 안 돼! 네가 어떻게 그런 짓을...”“당신은 몰랐겠지만 네 며느리이자 내 아내가 전문가들을 여러 명 붙여줬거든. 당신 손에 있는 그 약? 복제하는 데 몇 분도 안 걸렸어.”여초연은 멍하니 구승훈을 바라보았다
항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쳐도 항구의 활기는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조용히 항구에 발을 내디딘 여초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가자.”그녀의 뒤를 따르던 선원 복장의 남자 몇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에워쌌다.한 손으로 선글라스를 가볍게 올려 쓰고 막 걸음을 옮기려던 여초연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거의 동시에 그녀는 앞에 있던 경호원을 확 잡아당겨 자신의 방패로 삼았다.경호원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가슴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그의 앞을 지나던 남자가 갑자기 발길을 휘둘러 그의 가슴을 세게 걷어찼다.소매 속에서 날카로운 칼날 하나가 날아오더니 여초연의 앞을 막고 선 경호원을 지나쳐 곧장 그녀의 얼굴을 향해 돌진했다.그러나 칼이 여초연에게 닿기도 전에 곁에 있던 또 다른 경호원이 순식간에 반응했다.동시에 항구에서 화물을 나르던 선원들도 모두 이쪽으로 몰려오며 항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준봉은 몇몇 경호원들에게 막혀 여초연을 눈앞에서 놓쳐야만 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둘렀다.여초연은 이 혼란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숨기며 도망쳤고 몇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호위하며 후퇴했다.이번 귀국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덕분에 무사했다.만약 배에 있던 사람들로 위장하지 않았더라면 여초연은 지금쯤 이미 구승훈에게 붙잡혔을 것이다.항구에는 컨테이너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여초연은 경호원들의 호위하에 비틀거리며 한 컨테이너 안으로 몸을 숨겼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자신을 끝까지 지키던 남자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쓸모없는 놈.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구승훈의 부하들은 전부 공항에 있다며?”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마디 내뱉었다.“죄송합니다,사모님.”여초연이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 쪽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당장 날 구하러 오라고 해.”“네.”대답을 마친 경호원은 전화를 걸기 위해 급히 자리를 떴다.소란은 오래지 않아 조용히 가라앉았
준봉은 뭐라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구승훈이 먼저 입을 뗐다.“내가 준비하라고 했던 건 어떻게 됐어?”“준비 끝났습니다. 진 장관님 쪽에서도 사람을 보내놨고요. 비행기만 도착하면 됩니다.”준봉은 그렇게 말하며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대표님, 공항에 저 정도 인원만 배치해도 정말 괜찮을까요?”준봉은 원래 구승훈이 대부분의 인력을 공항에 집중시킬 거라 예상했다.M 국에서 여초연이 비행기로 귀국 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왔으니 말이다.하지만 의외로 구승훈은 공항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배치하지 않았다.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은 많았지만 임시로 고용된 게 대부분이었다.구승훈 쪽 사람들은 대부분 보경시 한 항구 근처에 흩어져서 배치되어 있었다....항구라서 그런지 바람은 훨씬 거셌다.구승훈은 항구 근처의 전망대에 서 있었고 속절없이 불어오는 찬 바람 때문에 그의 외투가 펄럭거리며 나부꼈다.멀리 바다 수평선 너머로 화물선 한 척이 항구로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구승훈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드디어 돌아왔구나.’한편, 화물선의 갑판 위.여초연은 숄을 두른 채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녀는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구승훈이 여초천을 데려간 이후로 그녀의 모든 계획은 철저히 엉망이 됐다.여초천은 항상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고 생각해 오던 그녀였으니 말이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손아귀에서 벗어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여초천이 고문당한 사진들을 떠올린 여초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을 괴롭히는 것으로 원한이 조금이나마 해소된다면 기어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데다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여초천의 모습이 상상되자 그 분노와 원한은 두 배로 커져 버렸다.여초연의 목적은 단순히 구승훈을 괴롭히는 게 아니었다.구승훈으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만들고 자기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존재로 만들려 했다. 그러면 구씨 가문의 모든 자산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하리 얼굴에 약간 어색함이 스쳤다. 하지만 백아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들어와 그녀의 옷을 갈아입혀 주며 넌지시 말할 뿐이었다.“너희 할아버지 말이야. 이렇게 즐거워하신 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역시 저 양반을 웃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시욱이 뿐인가봐.”강하리는 자연스럽게 백아영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할머니, 전 에비뉴 주얼리와 JM 그룹을 잘 운영하고 싶어요. 그리고 연정이도 잘 키우고 싶고요.”고요한 방 안이라서 그런지 강하리의 목소리는 유난히 담담하게 들렸다.창밖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봤을 때, 마음 한편이 여전히 아파져 오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그에게 어떤 이유가 있었든,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강하리는 그때와 같은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아래층 거실은 여전히 왁자지껄했고 설날이 다가오며 곳곳에 명절 분위기가 감돌았다.심씨 가문은 정말 오랜만에 모두 함께 모여서 화목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한편, 심준호는 팔짱을 끼고 별장 밖에 서서 그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난 네가 다시는 안 올 줄 알았어.”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그때 심준호가 갑자기 다가와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너 대체 뭐 하는 짓이야?”그동안 심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화를 꾹꾹 참고 있었다.구승훈을 믿고 강하리를 맡겼는데 돌아온 건 이런 결과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지금까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심준호도 그를 감싸주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그저 가만히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난 하리가 갑자기 뛰어내릴 줄 몰랐어.”그는 원래 조금만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노진우가 여초천을 손에 넣기만 하면 임희주가 죽든 말든 그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만약 노진우가 실패한다면
진태형은 병원에서 강하리 곁을 밤새 지켰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꽃다발을 안은 채 이쪽으로 걸어오는 임명우와 마주치게 되었다.임명우는 진태형을 보고 살짝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었다.“진 장관님, 오랜만입니다.”진태형은 눈빛을 가라앉힌 채 임명우를 바라봤다.“하리를 보러 온 건가요?”임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강 대표님과는 업무적으로 조금 얽힌 부분이 있어서요. 입원하셨다는 말 듣고 병문안 왔습니다.”진태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렇군요. 하지만 임 대표님, 하리한테 마음을 두진 마셨으면 좋겠어요.”임명우는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진 장관님,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랑 강 대표님은 정말 업무적인 관계예요. 그리고 시연 씨랑도 몇 년 전에 헤어졌고요. 제가 정말 강 대표님을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잖아요?”진태형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하리한테 마음 두지 마세요. 충고가 아니라 경고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하리한테 손을 대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미소를 짓고 있던 임명우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누구든 진태형 앞에서는 결국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장관님.”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임명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시연 씨 말이 맞았어요. 진 장관님은 시연 씨한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거 말이에요. 당신은 강하리 씨랑 비교도 안 되는 존재라는 거죠. 그러니까 저도 이제 시연 씨 따위 필요 없어요.]문자를 보낸 그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M 국에 있는 진시연은 그 문자를 보자마자 분노에 휩싸여 핸드폰을 그대로 던져버렸다.구승훈과 강하리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당장 귀국하려 했었다. 하지만 떠나기 직전에 여초연이 그녀의 길을 막았다.하지만 진시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임명우의 문자를 받고 당황한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