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아마도 18살 되던 해부터일 것이다. 강찬수는 시도 때도 없이 다가와서 그녀의 몸을 지분거렸다. 정서원과 수도 없이 싸우면서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녀는 대학에 붙으면서 집을 떠난 다음에야 강찬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물론 이는 절대 구승훈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짧게 대답했다.“아뇨.”“이런 일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구승훈은 여전히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이런 일’이란 다름 아닌 강찬수가 회사에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는 일을 가리켰다.“다음은 없을 거예요. 저 사직하기로 했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었다.“홧김에 한 말이 아닌가 보네.”“네.”“하하... 그래, 그럼 나도 시간을 뺏지 않을게.”구승훈의 웃음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그런데도 강하리는 영혼 없이 대답하기만 했다.“네.”마지막으로 강하리를 힐끗 본 구승훈은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의 곁에는 함께 온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도발적이고 비웃음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구승훈이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낸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옷보다도 여자를 더 빨리 바꾸는 사람이 구승훈이었다.구승훈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면서도 그녀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랫배를 쓰다듬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가슴은 자꾸만 욱신거렸다.‘괜찮아, 난 이제 떠날 거니까. 떠나면 분명히 잊을 수 있을 거야.’회사 정문에 도착한 그녀는 심호흡하면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번에는 또 누가 퍼뜨렸는지, 회사 단톡방에는 벌써 그녀가 사직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강하리가 용감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구승훈이 냉정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주제를 모른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강하리는 단톡방을 힐끗 보기만 하고 나왔다. 회사 단톡방은 언제나 이 모양이다. 그저 오늘은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그리고 마침 안에서 나오던 강찬수와 마주쳤다.“아이고, 우리 딸이 또 엄마 만나러 왔나 보네.”“도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이를 악물었는데도 강찬수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몇 번을 말해. 나는 돈을 원한다고.”“당신 조만간 죗값을 치르게 될 거예요.”“너희 모녀를 만난 게 내 죗값을 치르는 거야.”말을 마친 강찬수는 강하리를 팍 밀치고 멀어져갔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그녀는 분노에 잠겨서 손을 벌벌 떨었다. 하필이면 이때 배가 아프기 시작해서 그녀는 곧바로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 갑자기 흥분해서 그럴 거야. 어디 조용한 데 앉아서 기분을 진정시켜. 그래도 계속 아프면 병원에 한 번 와봐.”전화를 끊고 난 강하리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라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 보려고 말이다.다행히 손연지의 말대로 하자 통증은 금방 가셨다. 배가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확신이 생긴 다음에야 그녀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강하리는 입원 병동 안으로 들어가서 정서원을 살폈다. 그리고 간병인에게 부탁을 하고 또 했다.“만약 강찬수가 다시 오면 꼭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간병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병원에서 떠난 다음 강하리는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사직서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딱히 낼 기분이 아니었다. 사직서를 서랍 안에 넣은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같은 시각, 강하리가 전화 온 것을 발견한 구승재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강 부장? 나한텐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저... 혹시 돈 좀 빌릴 수 있을까요?”구승훈의 사무실에 앉아 있던 구승재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그는 사람을 잡아두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천하의 강하리가 돈을 빌려달라면서 전화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승재는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미안한데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강 부장 일 때문에 형이 내 카드를
구승훈이 음침한 눈길로 말했다.“강 부장 그럼 최대한 빨리 진행해. 새로운 부장의 임명을 지체하지 말고.”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기획안을 구승훈 앞에 내려놓았다.“이건 신제품 기획안이에요. 대표님께서 더 보충할 거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구승훈은 더 말 없이 곧장 기획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그는 업무에 대해서 늘 진지한 태도였다. 아니, 까다롭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강하리에게 나가 보란 말을 안 했기에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그가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기획안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고 고작 열몇 페이지였다.하지만 구승훈은 무려 한 시간 남짓 확인했다.조목마다 빠짐없이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서명하고 강하리에게 돌려줬다.강하리는 기획안을 손에 넣고 잠시 머뭇거렸다.“또 용건 있어?”구승훈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봤다.강하리는 2초 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아니요, 없습니다.”“그래, 나갈 때 문 잘 잠가.”말을 마친 구승훈은 머리를 푹 숙이고 다른 업무를 처리했다.강하리는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방금 그녀는 하마터면 구승훈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할 뻔했다.아마도 진짜 강찬수 때문에 궁지에 몰린 듯싶다.이 남자가 돈을 빌려줄 리 있을까?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퇴근 후 그녀는 곧바로 그해 엄마의 소송을 도와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고 그녀는 상대에게 상황을 쭉 설명했다.“임 변호사님, 이런 상황은 공갈 협박죄에 해당하나요?”임정원이 잠시 침묵한 후 대답했다.“아직은 공갈 협박으로 고소할 수 없어요. 상대가 법률상에서 친아버지이고 하리 씨는 실질적인 부양 의무를 지니고 있어요. 만약 상대가 이걸 단지 부양비라고 고집한다면 하리 씨는 거의 승산이 없어요. 기껏해야 상대를 비판하고 교육하는 것뿐인데 나중에 다시 찾아와 보복할까 봐 걱정이네요.”강하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하리 씨 어
구승훈은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기분이 꽤 좋아 보였는데 그의 옆엔 어제 커피숍에서 본 그 여자가 앉아 있었다.여자의 치마가 너무 짧아 허벅지가 훤히 비칠 지경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다리를 바짝 들이댄 그녀를 보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한 듯싶었다.그 여자는 강하리가 들어온 순간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다만 구승훈이 옆에 있으니 딱히 내색하진 못했다.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강하리를 쳐다봤다.“강 부장, 용건 있어?”강하리는 그의 옆에 앉은 여자를 힐긋 쳐다봤다.“네.”구승훈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댔다.“퇴사에 관한 일이라면 바로 인사팀 찾아가면 돼.”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퇴사에 관한 일 아니에요.”구승훈이 가볍게 웃었다.“그럼 뭔데? 난 또 강 부장이 날 찾아올 이유가 퇴사밖에 없는 줄 알았지.”강하리는 애써 야유가 담긴 그의 말을 참으며 옆에 앉은 여자를 쳐다봤다.“대표님과 따로 얘기 나누고 싶어요.”구승훈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둘 사이에 따로 나눌 얘기가 더 있을까 심히 의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강하리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녀는 구승훈의 성격을 잘 안다.전에 클럽에서 그의 체면을 짓밟았고 퇴사에 관해서도 그토록 단호한 태도를 선보였으니, 구승훈은 분명 그녀를 호락호락하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그가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나랑 강 부장 사이에 따로 나눌 얘기가 더 있어?”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고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대표님, 저 퇴사하지 않겠습니다.”구승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그래서?”“앞으로의 급여에 대해 대표님과 상의하고 싶습니다.”구승훈이 두 팔을 껴안고 있다가 결국 옆에 앉은 여자에게 말했다.“양 부장, 미안한데 우리 업무는 다음에 다시 얘기해.”양 부장이 분노 어린 눈길로 강하리를 째려봤지만 끝내 활짝 웃으며 구승훈에게 말했다.“네, 대표님. 일단 강 부장님 일부터 처리하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강하리를 힐긋 노려보더니 씩
“강하리!”구승훈이 불쑥 그녀의 턱을 꽉 잡았다.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사실 구승훈은 화를 자주 내는 편이 아니다. 그는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로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가슴 깊이 제 감정을 숨긴 채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게 하는데, 지금은 두 눈이 활활 타오를 것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강하리는 덜컥 겁이 났다.“농담이에요.”그녀는 구승훈의 두 눈을 마주했다.“근데 대표님은 제가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세요?”구승훈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쏘아붙였다.“네가 그 가격을 요구했으니까, 가격에 맞게 표현 잘해야 할 거야.”말을 마친 구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퇴근하고 일찍 돌아가.”강하리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네.”퇴근 후 그녀는 곧바로 집에 돌아갔다.여기서 말한 집이란 바로 그녀와 구승훈이 함께했을 때 그가 선물로 준 아파트 한 채였다.여긴 바로 두 사람의 아지트이다.집안에 들어서자 구승훈이 어느새 소파에 앉아 있었다.“샤워해!”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이 한마디만 내던졌다.강하리는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그에게 대답했다.“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구승훈이 한창 통화 중이었다.그녀를 본 구승훈은 손을 쭉 내밀었고 이에 강하리도 그의 손을 잡았다.구승훈은 그녀를 아예 다리 위에 앉혔다.“강 부장, 내 옷 벗겨.”구승훈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강하리는 화들짝 놀라서 몸이 굳었다. 그는 아직 전화도 끊지 않은 상태였다.“얼른.”그녀가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구승훈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다그쳤다.강하리는 눈 딱 감고 그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구승훈의 몸매는 완벽 그 자체였다.단추가 하나씩 풀리자 가슴 근육부터 복근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강하리는 이 몸매를 3년이나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그럼 그렇게 정해요.”전화기 너머에서 뭐라 말했는지 구승훈이 건성으로 대답했다.대답을 마친 후 그는 불쑥 머리를 숙이고 날카로운 이빨로 그녀 목 옆의 여린 살을 깨물더니 가볍게
“왜 그래?”그가 음침한 목소리로 물으며 그녀의 아랫배에 시선이 꽂혔다.구승훈은 원래 예민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지금쯤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속이 좀 불편해서요.”구승훈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잡더니 강제로 고개 들어 그와 눈을 맞추게 했다.“진짜 단순히 속이 불편한 거야?”강하리는 감히 그의 눈길을 피할 엄두가 안 났다.“진짜예요. 강찬수랑 종일 소란을 피우다 보니 밥 먹을 기분도 안 났고, 원래 속이 좀 불편했는데 아까 너무 급하게 죽을 먹었더니 받아들이지 못했나 봐요.”구승훈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반신반의한 눈길로 머리를 끄덕였다.“내일 가서 검사받아.”강하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네.”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다가 끝내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대표님은 지금 제가 임신한 거로 의심되나요?”구승훈은 창가에 다가가 고개 숙여 담뱃불을 지폈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나서야 대답했다.“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강 부장도 이런 예외는 원치 않는 거 아니야?”강하리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말했다.“대표님 말이 맞아요.”그녀는 가볍게 웃은 후 일부러 무심한 척 물었다.“대표님은 아이를 엄청 싫어하시나 봐요?”구승훈이 어두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질문이 너무 많아!”강하리는 표정이 확 굳었다. 또 그의 기분을 언짢게 했나 보다.구승훈은 그녀가 자신에 관해 묻는 걸 줄곧 싫어하고 그의 사생활도 염탐하지 못하게 했다.무릇 그의 사생활과 관련된 일이라면 가차 없이 그녀에게 선을 긋는다.구승훈에게 강하리는 줄곧 외부인이다. 그러니 아이에 대해서도, 감정에 대해서도 묻지 말아야 한다.강하리의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씁쓸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다시 천천히 내뱉었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구승훈이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 다만 잠시 후 반듯하게 차려입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연지야, 나 좀 도와줘야겠어.”“뭔데? 말해봐.”“대표님이 내가 임신한 거 의심하기 시작했어. 내일 아마 비서를 시켜서 날 데리고 검사받으러 가게 할 거야. 너 가짜 임신 검사서 하나 만들어줘야 겠다.”손연지는 문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지야?”강하리가 미간을 구겼다.“구승훈 씨 애야?”뜬금없는 그녀의 물음에 강하리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바로 맞출 거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으니까.다만 손연지에게 딱히 숨길 필요도 없었으니 그녀는 아예 인정해버렸다.“맞아. 구승훈 씨 애야.”“X발, 진짜 그 인간이었어! 설마 너 관행 당한 거야? 개자식, 겉모습만 번지르르하지 인간도 아니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해!”강하리는 그녀의 연이은 험한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한참 후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관행 아니야.”손연지는 흠칫 놀라서 물었다.“그럼 네가 침대에 기어오른 거?”강하리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나 스폰받고 있어, 3년 전부터.”손연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쇼킹이지? 너무 실망이지?”강하리는 뭇사람들에게 성품과 학문을 겸비한 참한 여자였다.그래서 손연지도 가장 먼저 그녀가 관행 당한 거라고 의심했는데 스폰이라니...“에이, 그게 뭐라고. 각자 원하는 바를 얻는 거잖아. 나도 너 같은 미모를 지니면 돈 많은 남자를 찾아서 스폰받았을 거야. 잠자리도 갖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아.”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여기서 금기는 아이가 생기는 거지.”강하리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그랬다. 둘 사이엔 확실히 이 아이가 없어야 한다.만약 이 아이가 없으면 그녀는 구승훈과 아무렇게나 돼도 다 상관없다.헤어져도 좋고 함께여도 좋으니 딱히 큰 걱정거리가 없다.근데 하필 아이가 생겼고 아무런 준비 없이 불쑥 그녀를 찾아왔다.손연지도 덩달아 걱정됐다.만약 그 남자가 일반인이라면 강하리의 매력으로 충분히 그와 혼인신고하고 잘 살 텐데 하필이면 구승훈이라니.피라미드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남자라 일반인들이 넘볼만한 존재가
다음 날 아침, 신도윤이 강하리의 집 문을 두드렸다.그녀는 문 앞에 서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강 부장님, 대표님께서 부장님 모시고 검사받으러 가라고 하십니다.”“네, 금방 나올게요.”병원에 도착한 강하리는 피검사 받는 곳에 서 있는 손연지를 보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피를 다 뽑고 신도윤이 그녀를 데리고 가서 음식을 먹였다.“대표님께서 부장님은 오늘 하루 휴식하셔도 된다고 했습니다.”“네.”강하리도 볼일이 있어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신도윤과 헤어지고 그녀는 곧바로 임정원과 약속한 장소에 갔다.“뭐 마실래요?”강하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임정원이 물었다.“냉수로 할게요.”임정원은 그녀 앞으로 냉수 한 잔 시켰다.물 한 모금 마신 후 강하리는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전에 내 도움 필요하다는 거 무슨 일이에요?”그녀는 말하면서 가볍게 웃었다.“그땐 자세히 묻지 못했는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설마 나한테 다이아몬드 팔려는 건 아니죠?”임정원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진짜 용건이 있어서 그래요.”그는 서류 한 부 꺼내서 강하리 앞에 내려놓았다.“이 자료 좀 통역해줄 수 있나요?”강하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았는데 이탈리아어로 된 법조문이었다.“이건...”임정원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최근에 국제 경제 분쟁 사건을 하나 맡았는데 상대가 마침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더라고요. 전문 통역사를 어디서 구할지 고민하던 차에 마침 하리 씨가 전화 온 거예요.”강하리는 한참 침묵했다.“내가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임정원이 가볍게 웃었다.“전에 하리 씨 연설을 본 적이 있어요.”강하리는 한때 보경대학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10개 국어에 능통해 대학 시절부터 지도교수를 따라 다니며 동시통역을 해주었고 대학원생 땐 외교부에 합격했다.하지만 그녀는 결국 외교부를 포기하고 구승훈의 회사에 입사했다. 이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강하리는 살짝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내가
임희주의 입술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강하리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도와준다고?’임희주는 차갑게 비웃었다.“강하리 씨, 승훈 씨한테서 날 떼어놓으려는 건가요?”강하리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이미 그쪽이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요.”임희주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하지만 남에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 느낌이 무척 역겨웠다.“떠나고 싶은 건 맞는데 제가 왜 구승훈을 놔두고 그쪽을 믿겠어요?”강하리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믿지 않아도 돼요. 나도 강요할 생각 없으니까. 당신이랑 구승훈 사이도 딱히 관심 없어요. 하지만 날 건드리진 마요. 안 그럼 구승훈이 당신을 지켜줘도 난 여전히 당신을 이곳에서 발붙이지 못하게 할 수 있어요.”임희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강하리 씨, 구승훈 씨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당연히 알죠. 안 그럼 그쪽이 어떻게 구승훈 옆에 붙어 있겠어요? 하지만 임희주 씨, 생각 잘해요. 당신이 B시에서 멀쩡히 지낼 수 있는 건 단지 구승훈을 돕고 있다는 이유 하나뿐이에요. 그러니 얌전히 구승훈에게 협조해요. 안 그럼 여초연이나 구승훈이 움직이기 전에 나와 심씨 가문이 당신 절대 살아서 B시 못 나가게 할 테니까. 구승훈에게 순순히 협조하면 우리도 여초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도와줄게요. 생각 잘해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그제야 임희주는 강하리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내키지 않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강하리 씨,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모르겠어요? 지금 구승훈 씨 옆에 있는 사람은 저예요. 당신이 뭔데 사모님 행세를 하면서 날 협박해요?”강하리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가는데 뒤이어 임희주의 말이 들렸다.“나랑 구승훈 씨가 이미 잤다고 하면 믿겠어요?”강하리의 걸음이 우뚝 멈추고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애
강하리가 웃었다.“싱글인 여자에게 커리어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 근데 우리 천아름 디자이너님을 모시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단 말이지.”주얼리 업계에서 천아름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했다.게다가 그녀 본인의 브랜드도 있었기에 그런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자신이 데려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천아름은 잠시 침묵했다.“생각해 봐야겠어. 며칠 후에 대답해 줄게.”강하리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세 사람이 술집에서 나왔을 때는 자정이 가까워졌다.밖에는 여전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가정부가 휴대폰으로 보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케이크 앞에서 구승훈은 연정이를 안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그녀는 조용히 대화창을 끄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여초연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임희주는 여초연보다 강하리의 연락이 먼저 올 줄은 몰랐다.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결국엔 받았다.“강하리 씨, 무슨 일이죠?”임희주의 목소리는 병원 앞 카페에서 말할 때처럼 언제든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유로움으로 가득했다.“임 선생님, 나와서 얘기 좀 해요.”강하리의 목소리도 임희주와 비슷하게 들렸지만 다른 점이라면 그녀에겐 고고함이 배어 있었다.그녀야말로 대결에서 이긴 승자 같았다.임희주는 이를 살짝 갈았다.그녀는 심씨 가문 아가씨고 진태형의 유일한 딸이다.구승훈이 없어도 여전히 B시 전체가 부러워하는 공주님이다.임희주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질투, 원망 같은 것들. 왜 상대는 태생부터 타고났는데 그녀는 자유조차 바랄 수 없는 것인지.하지만 뭐라 해도 지금 구승훈은 그녀의 곁에 있지 않나.“강하리 씨,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신 거죠? 구승훈 씨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 “아니, 당신 얘기요.”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지만 길거리에는 여전히 커플들이 오가고 있다.강하리는 길가에 있는 커피숍에 앉아 우유 한 잔을 주문했다.따뜻한 우유를
구승훈은 바지에 크림을 잔뜩 묻혀놓은 꼬마 녀석을 내려다보며 마음이 녹아내렸다.허리를 숙여 연정이를 안아 든 그가 크림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뽀뽀를 해줬다.가정부가 나와서 이 모습을 보고 웃으며 연정이가 먹던 케이크를 가져가더니 아이의 손을 닦아주었다.“대표님, 옷 갈아입고 오세요. 저녁 준비 곧 끝나요.”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시선이 방 곳곳을 훑어보았다.보고 싶은 사람이 보이지 않자 형언할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왔다.가정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모님께선 저와 아가씨를 여기로 데려다주고 가셨어요. 아가씨랑 함께 생일 보내라고 말씀하셨어요.”구승훈이 입꼬리를 올리며 휴지로 연정이 얼굴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었다.“다른 말은 안 했나요?”가정부가 웃으며 답했다.“맛있는 음식 많이 하라고 하셨어요. 대표님 건강을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그래요?” 구승훈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그 사람 최근에... 주해찬과 자주 연락합니까?”가정부가 멈칫했다.“주해찬 씨는 해외로 가지 않았나요? 돌아왔어요?”구승훈의 입꼬리가 남몰래 올라갔다.서산 퍼스트 빌리지에 웬일로 사람 냄새가 났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저 멀리 별장의 불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자기야, 나와서 한잔해.”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리는 사실 나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돌아가면 잠을 못 이룰 것 같아서 그냥 나갔다.술을 마신다고 하지만 손연지는 손에 음료를 들고 있고, 평소 술에서 손을 떼지 않던 천아름도 오늘은 음료만 홀짝이니 강하리가 웃으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천아름은 눈썹을 치켜뜬 채 그녀를 바라보며 음료를 손에 쥐어줬다.“자, 취하기 전엔 집에 안 가.”강하리가 손연지와 잔을 부딪쳤다.“대단하신 천아름 디자이너님께서 무슨 일이지?”손연지는 고개를 저었다.“며칠째 이러고 있어. 넌 어때? 구승훈이랑 아직도 그래? 그 개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강하리는 시선을
상대가 피식 웃었다.“그럼 임 선생님,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임희주는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마스크를 옆으로 던져 버리고 옆에 있는 보관함에서 여성용 담배 한 갑을 꺼냈다.달칵. 라이터 불빛이 차 안을 비추자 모자가 벗겨지면서 웨이브 머리가 흘러내렸다.천아름은 목을 가다듬고 휴대전화를 들었다.“누나.” 저쪽에서 구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됐어? 다친 데는 없지?”천아름은 새빨간 입술을 끌어올렸다.“아가, 날 뭐로 보는 거야.”구승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괜찮으면 됐어. 오늘 일은 고마워.”천아름은 담배를 들이마시고 부드럽게 숨을 내쉬었다.사람을 홀릴듯한 목소리가 들렸다.“구승재, 말로만?”구승재는 멈칫하며 문득 그날 밤 맞댔던 말랑한 입술이 떠올랐다.그날 천아름은 별을 보러 가자고 했는데 B시 같은 곳에서 별이 보일 리가 없다.하지만 시원한 밤바람과 반짝이는 불빛을 보니 정말 별을 본 것 같았다.그동안의 우울했던 기분도 한결 풀려갈 때쯤...“예뻐?”당시 천아름이 그의 귓가에 이렇게 물었다. 정말 술에 취했었는지, 아니면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넋을 잃었는지 천아름의 손가락이 갑자기 그의 입술에 닿았을 때까지도 그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입술이 다가와 있었다.살짝 닿았다가 이내 멀어졌지만 그날 밤 심장이 요동쳐 잠들 때까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그 후 며칠 동안 그는 다시 만나면 어색할 거란 생각에 천아름을 피해 다녔는데, 정작 다시 마주쳤을 때 천아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구승재는 문득 천아름이 그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그래서 다시 예전처럼 그녀를 대했다.오늘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 했는데 천아름이 먼저 말을 꺼냈다.“형한테 밥 사라고 할게.”정신을 차린 구승재가 말하자 전화기 너머 천아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왜, 내가 또 너한테 키스할까 봐?”
강하리의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지고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구승훈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리지는 않았다.아무리 구석이라도 파티장이라 시끄러웠고 심준호가 몰래 녹음한 것이니 더더욱 그러했다.하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형...”구승재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형수님하고 화해하면 안 돼? 두 사람 이러지 마. 형수님은 형을 사랑하고 있어.”구승훈은 손가락으로 휴대폰 속 사진을 휙휙 넘겼다.하리의 웃는 얼굴, 연정이의 미소가 이젠 그에게 바랄 수 없는 사치가 되었다.“알아.” 그가 말했다.어떻게 강하리의 마음을 모를 수 있겠나.강하리는 그를 원망하지만 결국엔 너그럽게 감싸주었다.마음이 너무 여렸다.대체 왜 한심할 정도로 그렇게 여린 건지.그가 계속해서 상처를 주고 심지어 결혼식 때 그녀를 혼자 내버려두기까지 했어도 강하리는 여전히 그의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며 그를 안쓰럽게 여겼다.연성에서 돌아와 술집에 간 날, 그녀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받아들이기로.혼인 관계를 계속 이어갈지, 아니면 이혼을 선택할지 온전히 감당하려 했다.그래서 이기적이지만 그녀와 같은 호적에 남아있으려고 했다.그러면 모든 일이 해결되어도 강하리는 여전히 그녀의 아내이고 조금만 공을 들여 그녀를 달래기만 하면 다시 예전처럼 부부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강하리도 고통스러울 거라는 걸 간과했다.당연한 듯 그가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강하리는 그저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이 그녀에게 어떠한 고통인지 몰랐다.거듭 임희주와 함께 나타나는 그의 모습을 볼 때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까.결국 남자는 그녀를 놓아주었다.“계속 이기적으로 행동할 순 없어.”크리스마스, 그의 생일.구승훈은 차창을 내렸고, 드물게 찾아온 내면의 평화를 느끼며 한참 동안 바깥에 흩날리는 눈송이를 바라보았다.‘하리야, 자기야, 잘 지내.’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땅에 닿자마자
구승훈은 이미 어느새 그녀를 깊은 골목으로 인도하고 있었다.바깥 상가의 번잡함도, 파티 때문에 높아졌던 소음도 해일처럼 사라진 듯했다.조용한 골목에서 임희주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어디로 가는 거예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구승훈의 사슬 같은 손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숨 막힐 듯한 질식과 무력감, 공포가 동시에 그녀를 덮쳤다.구승훈의 검은 눈동자엔 감추지 못한 형형한 살기가 일렁거렸다.임희주는 심장이 철렁했다.‘구승훈이 발작을 일으키는 건가?’아니,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오늘 밤에 오기 전에 구승훈은 완화 약물을 주사했으니까.하지만 구승훈의 이 모습은 분명 발작이 맞았다.그녀가 구승훈에게 손을 놓으면 증상을 완화해 주겠다고 말하려는데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이 더더욱 조여와 더 이상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임희주는 그때 처음으로 죽음이 이렇듯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그때 갑자기 저쪽에서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곧바로 구승재가 준봉과 함께 이쪽으로 달려왔다.구승훈의 표정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구승재와 준봉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구승훈은 여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그녀에게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손을 짓밟았다.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구승재가 눈치를 주자 준봉은 그제야 구승훈을 말리며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반면 구승재는 몸을 굽혀 임희주를 일으켜 세웠다.임희주의 눈에 비친 공포가 여실히 드러났다.“임 선생님, 괜찮아요? 병원에 데려다줄까요?”임희주는 목이 너무 뜨겁고 아파서 말 한마디도 못 한 채 멍하니 구승재만 바라보았다.구승재가 미간을 찌푸렸다.“형 상태가 또 심각해진 거죠? 어휴, 언제쯤 증상이 완화될지 모르겠네요. 이대로 가다간 임 선생님이 우리 형 옆에 있으면 시시각각 목숨이 위태롭지 않겠어요?”구승재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말을 덧붙였다.“참, 시간 없으니까 병원 데려다줄 차 부를게요. 준봉이 혼자서 형 감당할 수 없을 테니 전 형한테 가볼게요.”말하며 구승재는 전화로 차를 부르고는 서둘러
파티장.강하리는 파티장 안으로 들어선 뒤 이내 파티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이곳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게 단조롭고 지루한 화면으로 보여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심씨 가문은 줄곧 비즈니스 협회 파티의 중심이었다.강하리와 심준호는 입장하자마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강하리는 내내 무심한 표정이었다.심준호가 간단히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조용한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포기 못 하겠으면 지금이라도 데려와. 네가 오라고 한마디만 하면 구승훈이 당장 달려올 거야.”강하리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아니요. 포기를 못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좀 불편해서요.”“고집부리긴. 좀 불편한 게 아니라 매우 불편해 보이는데? 그게 아니면 애초에 이혼 소송을 하겠다고 울지도 않았겠지.”강하리는 여전히 호텔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모르니까 이혼으로 끝내려고 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는 늘 비극이니까.”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러고 왜 소송 취하했어? 연성에서 구승훈이 또 뭐라고 했길래 넘어간 거야?”강하리는 한참 동안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냥 그 사람이 불쌍해서요. 삼촌, 저 한심하죠? 그 사람을 위해 내가 뭘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냥... 그 사람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밖에 못 해요.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그러자고 했고, 매일 임희주와 붙어 있어도 참았어요. 근데... 너무 괴로워요.”심준호의 눈빛에는 아픔이 가득했다.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방금까지 짓고 있던 상심한 표정을 훌훌 털어버리고 기운 차리는 모습을 보았다.“그래도 걱정 마요. 난 이대로 나약하게 무너지지 않아요. 구승훈에게 아무 짓도 안 한다고 해서 임희주에게 당하고만 있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만약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뒤에서 그 사람의 버팀목이 되어주면 그만이죠. 임희주도, 여초연도 마음 놓고 상대할 수 있게.”심준호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난
강하리는 오후에 사무실 대신 심씨 가문으로 갔다.그녀가 전화를 걸었던 탓인지 심씨 가문 사람들은 웬일로 모두 집에 와 있었다.연말이라 발붙일 틈도 없이 바쁜 진태형도 보이자 안으로 들어서던 강하리가 멈칫했다.“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심문석은 찡그린 얼굴로 불쾌함을 내비쳤고 백아영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심금천과 진태형도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심준호만 유일하게 웃으며 말했다.“다 끝났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다들 걱정하게 해서 죄송해요.”“그런 말 하지 마!”심문석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바보 같은 것, 우리는 그동안 구승훈이 찾아와서 제대로 설명하길 기다렸는데 너 그놈한테 얘기를 전달하긴 했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속상한 듯 말했다.“증조할아버지, 죄송해요.”심문석은 기가 막혔다.“내가 네 사과 듣자고 이러는 것 같더냐? 왜 이 지경이 됐는데도 구승훈 그 망할 놈을 싸고도냐는 말이다! 하리야, 넌 내 귀한 자식인데 왜 그런 서러움을 당하고만 살아.”꾹 참고 있던 강하리는 심문석의 말에 마침내 무너져 내렸고, 심준호는 한숨을 내쉬며 다가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그에게 안기는 순간 강하리는 목 놓아 울었다.“내가 구승훈 그 자식을 가만히 두나 봐라.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우리 하리가 뭐가 부족해서!”화가 난 심금천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밖으로 나가려 하자 강하리가 황급히 그를 불렀다.“할아버지, 가지 마세요.”심금천은 여전히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강하리가 다가가서 심금천의 팔을 끌어당겼다.“이제 다 끝났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심문석은 화가 난 얼굴로 강하리를 노려보았다.“그래, 끝났으면 올라가서 쉬어. 얼굴이 무슨 종잇장처럼 허옇게 질려선.”강하리는 웃으며 백아영 곁으로 달려갔다.“할머니, 저 배고파요.”백아영은 뭐라고 하려다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래, 조금만 기다려. 할머니가 밥해줄게.”강하리는 오후 내내 잠을 자다가 저녁때
말하면서도 강하리는 자신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미소는 몇 초도 유지하지 못한 채 굳어버렸고 그녀는 도망치듯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의 턱을 잡았다.“더 이상 날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남자의 손가락에 얇게 박힌 굳은살이 강하리의 턱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문득 모든 게 갑자기 우스꽝스러워졌다.‘울며불며 이혼하지 않겠다고 소란을 피워야 하나. 그렇게 애원해야만 이 이혼이 없었던 일이 될까.’그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애원하지 않았던가.몇 번이고 이 남자를 위해선 아무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힘든 건 그녀의 마음뿐이었다.“구승훈, 좋게 끝내자. 지금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구승훈의 눈동자가 검게 가라앉고 입꼬리가 움찔하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말했다.“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이혼도 했는데 저녁 한 끼 어때?”강하리는 그의 손가락을 떼어냈다.“됐어, 두 사람 데이트 방해하지 않을게.”강하리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구승훈은 어느새 법원 앞에 나타난 임희주를 발견했다.하지만 구승훈은 상대를 끌어당기며 놓아주지 않았다.“놔!”강하리의 얼굴이 다소 창백했다.어젯밤 임희주와 그런 통화를 나눈 후로 다시는 그런 괴로운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그러자 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임희주를 바라봤다.“임 선생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잘만 찾아오네.”임희주는 주먹을 꽉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승훈 씨, 오늘 드레스 사러 가자면서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강하리를 옆으로 끌어당겼다.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고 강하리도, 구승훈도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강하리의 휴대폰이 울렸다.시선을 내려 휴대폰을 확인하니 화면 위에 ‘선배’ 두 글자가 나타났다.“할 말 없으면 이만 가볼게.”하지만 구승훈이 단숨에 그녀를 붙잡았다. 이대로 놓치면 그녀가 자기 삶에서 영영 사라질까 봐 두려운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