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이 음침한 눈길로 말했다.“강 부장 그럼 최대한 빨리 진행해. 새로운 부장의 임명을 지체하지 말고.”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기획안을 구승훈 앞에 내려놓았다.“이건 신제품 기획안이에요. 대표님께서 더 보충할 거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구승훈은 더 말 없이 곧장 기획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그는 업무에 대해서 늘 진지한 태도였다. 아니, 까다롭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강하리에게 나가 보란 말을 안 했기에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그가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기획안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고 고작 열몇 페이지였다.하지만 구승훈은 무려 한 시간 남짓 확인했다.조목마다 빠짐없이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서명하고 강하리에게 돌려줬다.강하리는 기획안을 손에 넣고 잠시 머뭇거렸다.“또 용건 있어?”구승훈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봤다.강하리는 2초 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아니요, 없습니다.”“그래, 나갈 때 문 잘 잠가.”말을 마친 구승훈은 머리를 푹 숙이고 다른 업무를 처리했다.강하리는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방금 그녀는 하마터면 구승훈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할 뻔했다.아마도 진짜 강찬수 때문에 궁지에 몰린 듯싶다.이 남자가 돈을 빌려줄 리 있을까?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퇴근 후 그녀는 곧바로 그해 엄마의 소송을 도와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고 그녀는 상대에게 상황을 쭉 설명했다.“임 변호사님, 이런 상황은 공갈 협박죄에 해당하나요?”임정원이 잠시 침묵한 후 대답했다.“아직은 공갈 협박으로 고소할 수 없어요. 상대가 법률상에서 친아버지이고 하리 씨는 실질적인 부양 의무를 지니고 있어요. 만약 상대가 이걸 단지 부양비라고 고집한다면 하리 씨는 거의 승산이 없어요. 기껏해야 상대를 비판하고 교육하는 것뿐인데 나중에 다시 찾아와 보복할까 봐 걱정이네요.”강하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하리 씨 어
구승훈은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기분이 꽤 좋아 보였는데 그의 옆엔 어제 커피숍에서 본 그 여자가 앉아 있었다.여자의 치마가 너무 짧아 허벅지가 훤히 비칠 지경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다리를 바짝 들이댄 그녀를 보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한 듯싶었다.그 여자는 강하리가 들어온 순간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다만 구승훈이 옆에 있으니 딱히 내색하진 못했다.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강하리를 쳐다봤다.“강 부장, 용건 있어?”강하리는 그의 옆에 앉은 여자를 힐긋 쳐다봤다.“네.”구승훈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댔다.“퇴사에 관한 일이라면 바로 인사팀 찾아가면 돼.”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퇴사에 관한 일 아니에요.”구승훈이 가볍게 웃었다.“그럼 뭔데? 난 또 강 부장이 날 찾아올 이유가 퇴사밖에 없는 줄 알았지.”강하리는 애써 야유가 담긴 그의 말을 참으며 옆에 앉은 여자를 쳐다봤다.“대표님과 따로 얘기 나누고 싶어요.”구승훈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둘 사이에 따로 나눌 얘기가 더 있을까 심히 의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강하리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녀는 구승훈의 성격을 잘 안다.전에 클럽에서 그의 체면을 짓밟았고 퇴사에 관해서도 그토록 단호한 태도를 선보였으니, 구승훈은 분명 그녀를 호락호락하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그가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나랑 강 부장 사이에 따로 나눌 얘기가 더 있어?”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고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대표님, 저 퇴사하지 않겠습니다.”구승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그래서?”“앞으로의 급여에 대해 대표님과 상의하고 싶습니다.”구승훈이 두 팔을 껴안고 있다가 결국 옆에 앉은 여자에게 말했다.“양 부장, 미안한데 우리 업무는 다음에 다시 얘기해.”양 부장이 분노 어린 눈길로 강하리를 째려봤지만 끝내 활짝 웃으며 구승훈에게 말했다.“네, 대표님. 일단 강 부장님 일부터 처리하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강하리를 힐긋 노려보더니 씩
“강하리!”구승훈이 불쑥 그녀의 턱을 꽉 잡았다.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사실 구승훈은 화를 자주 내는 편이 아니다. 그는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로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가슴 깊이 제 감정을 숨긴 채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게 하는데, 지금은 두 눈이 활활 타오를 것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강하리는 덜컥 겁이 났다.“농담이에요.”그녀는 구승훈의 두 눈을 마주했다.“근데 대표님은 제가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세요?”구승훈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쏘아붙였다.“네가 그 가격을 요구했으니까, 가격에 맞게 표현 잘해야 할 거야.”말을 마친 구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퇴근하고 일찍 돌아가.”강하리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네.”퇴근 후 그녀는 곧바로 집에 돌아갔다.여기서 말한 집이란 바로 그녀와 구승훈이 함께했을 때 그가 선물로 준 아파트 한 채였다.여긴 바로 두 사람의 아지트이다.집안에 들어서자 구승훈이 어느새 소파에 앉아 있었다.“샤워해!”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이 한마디만 내던졌다.강하리는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그에게 대답했다.“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구승훈이 한창 통화 중이었다.그녀를 본 구승훈은 손을 쭉 내밀었고 이에 강하리도 그의 손을 잡았다.구승훈은 그녀를 아예 다리 위에 앉혔다.“강 부장, 내 옷 벗겨.”구승훈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강하리는 화들짝 놀라서 몸이 굳었다. 그는 아직 전화도 끊지 않은 상태였다.“얼른.”그녀가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구승훈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다그쳤다.강하리는 눈 딱 감고 그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구승훈의 몸매는 완벽 그 자체였다.단추가 하나씩 풀리자 가슴 근육부터 복근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강하리는 이 몸매를 3년이나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그럼 그렇게 정해요.”전화기 너머에서 뭐라 말했는지 구승훈이 건성으로 대답했다.대답을 마친 후 그는 불쑥 머리를 숙이고 날카로운 이빨로 그녀 목 옆의 여린 살을 깨물더니 가볍게
“왜 그래?”그가 음침한 목소리로 물으며 그녀의 아랫배에 시선이 꽂혔다.구승훈은 원래 예민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지금쯤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속이 좀 불편해서요.”구승훈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잡더니 강제로 고개 들어 그와 눈을 맞추게 했다.“진짜 단순히 속이 불편한 거야?”강하리는 감히 그의 눈길을 피할 엄두가 안 났다.“진짜예요. 강찬수랑 종일 소란을 피우다 보니 밥 먹을 기분도 안 났고, 원래 속이 좀 불편했는데 아까 너무 급하게 죽을 먹었더니 받아들이지 못했나 봐요.”구승훈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반신반의한 눈길로 머리를 끄덕였다.“내일 가서 검사받아.”강하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네.”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다가 끝내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대표님은 지금 제가 임신한 거로 의심되나요?”구승훈은 창가에 다가가 고개 숙여 담뱃불을 지폈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나서야 대답했다.“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강 부장도 이런 예외는 원치 않는 거 아니야?”강하리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말했다.“대표님 말이 맞아요.”그녀는 가볍게 웃은 후 일부러 무심한 척 물었다.“대표님은 아이를 엄청 싫어하시나 봐요?”구승훈이 어두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질문이 너무 많아!”강하리는 표정이 확 굳었다. 또 그의 기분을 언짢게 했나 보다.구승훈은 그녀가 자신에 관해 묻는 걸 줄곧 싫어하고 그의 사생활도 염탐하지 못하게 했다.무릇 그의 사생활과 관련된 일이라면 가차 없이 그녀에게 선을 긋는다.구승훈에게 강하리는 줄곧 외부인이다. 그러니 아이에 대해서도, 감정에 대해서도 묻지 말아야 한다.강하리의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씁쓸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다시 천천히 내뱉었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구승훈이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 다만 잠시 후 반듯하게 차려입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연지야, 나 좀 도와줘야겠어.”“뭔데? 말해봐.”“대표님이 내가 임신한 거 의심하기 시작했어. 내일 아마 비서를 시켜서 날 데리고 검사받으러 가게 할 거야. 너 가짜 임신 검사서 하나 만들어줘야 겠다.”손연지는 문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지야?”강하리가 미간을 구겼다.“구승훈 씨 애야?”뜬금없는 그녀의 물음에 강하리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바로 맞출 거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으니까.다만 손연지에게 딱히 숨길 필요도 없었으니 그녀는 아예 인정해버렸다.“맞아. 구승훈 씨 애야.”“X발, 진짜 그 인간이었어! 설마 너 관행 당한 거야? 개자식, 겉모습만 번지르르하지 인간도 아니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해!”강하리는 그녀의 연이은 험한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한참 후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관행 아니야.”손연지는 흠칫 놀라서 물었다.“그럼 네가 침대에 기어오른 거?”강하리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나 스폰받고 있어, 3년 전부터.”손연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쇼킹이지? 너무 실망이지?”강하리는 뭇사람들에게 성품과 학문을 겸비한 참한 여자였다.그래서 손연지도 가장 먼저 그녀가 관행 당한 거라고 의심했는데 스폰이라니...“에이, 그게 뭐라고. 각자 원하는 바를 얻는 거잖아. 나도 너 같은 미모를 지니면 돈 많은 남자를 찾아서 스폰받았을 거야. 잠자리도 갖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아.”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여기서 금기는 아이가 생기는 거지.”강하리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그랬다. 둘 사이엔 확실히 이 아이가 없어야 한다.만약 이 아이가 없으면 그녀는 구승훈과 아무렇게나 돼도 다 상관없다.헤어져도 좋고 함께여도 좋으니 딱히 큰 걱정거리가 없다.근데 하필 아이가 생겼고 아무런 준비 없이 불쑥 그녀를 찾아왔다.손연지도 덩달아 걱정됐다.만약 그 남자가 일반인이라면 강하리의 매력으로 충분히 그와 혼인신고하고 잘 살 텐데 하필이면 구승훈이라니.피라미드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남자라 일반인들이 넘볼만한 존재가
다음 날 아침, 신도윤이 강하리의 집 문을 두드렸다.그녀는 문 앞에 서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강 부장님, 대표님께서 부장님 모시고 검사받으러 가라고 하십니다.”“네, 금방 나올게요.”병원에 도착한 강하리는 피검사 받는 곳에 서 있는 손연지를 보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피를 다 뽑고 신도윤이 그녀를 데리고 가서 음식을 먹였다.“대표님께서 부장님은 오늘 하루 휴식하셔도 된다고 했습니다.”“네.”강하리도 볼일이 있어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신도윤과 헤어지고 그녀는 곧바로 임정원과 약속한 장소에 갔다.“뭐 마실래요?”강하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임정원이 물었다.“냉수로 할게요.”임정원은 그녀 앞으로 냉수 한 잔 시켰다.물 한 모금 마신 후 강하리는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전에 내 도움 필요하다는 거 무슨 일이에요?”그녀는 말하면서 가볍게 웃었다.“그땐 자세히 묻지 못했는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설마 나한테 다이아몬드 팔려는 건 아니죠?”임정원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진짜 용건이 있어서 그래요.”그는 서류 한 부 꺼내서 강하리 앞에 내려놓았다.“이 자료 좀 통역해줄 수 있나요?”강하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았는데 이탈리아어로 된 법조문이었다.“이건...”임정원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최근에 국제 경제 분쟁 사건을 하나 맡았는데 상대가 마침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더라고요. 전문 통역사를 어디서 구할지 고민하던 차에 마침 하리 씨가 전화 온 거예요.”강하리는 한참 침묵했다.“내가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임정원이 가볍게 웃었다.“전에 하리 씨 연설을 본 적이 있어요.”강하리는 한때 보경대학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10개 국어에 능통해 대학 시절부터 지도교수를 따라 다니며 동시통역을 해주었고 대학원생 땐 외교부에 합격했다.하지만 그녀는 결국 외교부를 포기하고 구승훈의 회사에 입사했다. 이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강하리는 살짝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내가
‘아마도 대표님의 새로운 타깃이겠지. 관심 없는 여자에겐 가까이할 기회조차 안 주니까. 양 부장은 이번이 벌써 세 번째네.’강하리가 문 앞에서 꿈쩍하지 않자 임정원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왜 그래요?”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었다.“우리 그냥 딴 데 길까요?”임정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부장님도 이리로 식사하러 오셨네요?”양 부장이 유난을 떨며 강하리를 불렀다.강하리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고개 돌린 순간 구승훈과 눈이 마주쳤는데 짙은 눈빛에서 어떠한 감정도 보아낼 수 없었다.강하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그에게 인사했다.“대표님.”구승훈은 무덤덤하게 머리를 끄덕이곤 임정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임정원도 한창 그를 훑어보는 중이었다.구승훈은 출중한 재능에 거만함이 하늘을 찌른다.연성시에서 그에 관한 전설을 모르는 자가 거의 없을 지경이다.구승훈은 19살 때 아빠를 제치고 SH그룹의 오너 자리에 앉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지루해졌는지 SH그룹을 내팽개치고 독립하여 자기 회사를 세웠다.4년이 지난 지금 구승훈의 회사는 여전히 전성기에 처해 있고 그도 구씨 일가의 도련님이 아닌 연성시의 빅 보스로 거듭났다.아무도 감히 그와 겨룰 자가 없다.임정원도 줄곧 그를 만나고 싶었으나 기회가 좀처럼 차려지지 않았다.강하리가 구승훈의 회사에 다니는 걸 알고 있지만 그녀를 이용하고 싶진 않았다.그러던 중 오늘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안녕하세요, 구승훈 대표님.”임정원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깍듯이 인사했다.“저는 정인 로펌 파트너 변호사 임정원이에요. 하리 씨랑도 친구 사이고요.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구승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이곤 강하리를 쳐다봤다.“친구?”그는 비난 섞인 말투로 이 두 글자를 곱씹었다.“두 분 꽤 친한 사이인가 봐요?”강하리가 눈썹을 치키며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임정원이 덥석 가로챘다.“네, 아주 친해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그렇다면 임 변호사 우리랑 협
더없이 짤막한 네 글자에 강하리는 거절하려던 말을 꾹 집어삼켰다.그녀는 고개 돌려 임정원을 쳐다보면서 살짝 미안한 듯 웃었다.한편 임정원은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구승훈과 함께 식사할 수 있다니 그는 되레 뿌듯할 따름이었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양희수가 강하리의 팔을 툭툭 쳤다.“솔직히 말해봐요. 두 사람 데이트 중이었죠?”강하리는 무심코 구승훈을 쳐다봤는데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제야 대답했다.“양 부장님과는 무관한 일인 것 같은데요.”양희수는 화를 내기는커녕 원망 어린 눈길로 구승훈에게 말했다.“승훈 씨도 참, 직원들 데이트하는 것까지 간섭해야겠어요? 하리 씨랑 옆에 있는 이분 얼마나 잘 어울려요.”말을 마친 양희수가 강하리를 쳐다보며 윙크를 날렸다.“하리 씨, 대표님 무서워하지 말아요. 연애하는 게 뭐 어때서요? 데이트하면 안 되나요? 이 사람 상사이긴 해도 직원들 사생활까지 간섭하진 못해요.”강하리는 웃으며 맞받아쳤다.“희수 씨, 그만 얘기하고 스테이크나 드세요!”양희수는 순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하리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나 지금 하리 씨 도와주고 있잖아요.”“고맙지만 사양할게요.”강하리는 그녀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두 여자 사이에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구승훈은 아무것도 모른 척 느긋하게 스테이크를 썰었다.양희수가 수중의 포크로 식탁을 내리치자 임정원이 본능적으로 강하리를 감쌌다.그제야 구승훈도 시선을 올리고 강하리의 앞을 가로막은 양정원의 팔을 보면서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임 변호사 매너 좋으시네요.”임정원이 웃으며 말했다.“저는 대표님처럼 담담하지 못해서요. 하리 씨는 제 친구라 이런 장소에서 상처받게 내버려 둘 순 없네요.”강하리는 머리가 띵해졌다. 계속 이러다가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쓸 판이다.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죄송해요, 대표님. 제가 입맛이 없어서 양 부장님이랑 천천히 드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곧게 밖으로 나갔고 임정원도 뒤따라갔다.레스토랑 입구에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구승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가 겨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하리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소중한 보물이다.이미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그녀였기에 더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도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저 그녀가 밝게만 지내길 바랐다. 여초연도, 구동근도, 자신의 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자기야,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조금만 더 시간을 줘서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때 모든 걸 이 여자에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알았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은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속상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구승훈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이 점점 더 씁쓸해졌다.여초연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여초연의 인생을 망쳤으니 본인도 똑같게 망가뜨리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하지만 구승훈은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이대로 그녀의 손에 망가질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그를 낳은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시선을 내린 구승훈이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치료하는 데 협조할게.]노민준은 곧장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의 무기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잘 생각했어.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노민준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웬일로 구승훈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끊기 전 노민준이 갑자기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구승훈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힘들게 얻은 지금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겠지.”전화를 끊고 구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어도 기꺼이 노력해 보고 싶었다.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강하리의 말에 심문석은 한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번졌고 벌써 결혼식 장소까지 고심하고 있었다.“너희 둘이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땐 할아버지가 키우마.”강하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꾸하며 넘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구승훈을 보며 강하리가 물었다.“여기 안 있을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보내기 싫어?”입술을 달싹이며 빤히 상대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줄곧 그가 회피하던 답을 찾으려는 듯했다.비록 구승훈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빠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고 관계를 갖지 않아도 늘 그녀를 탐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요 며칠 그녀가 약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만 능글맞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연정이가 같이 가도 돼?”멈칫한 구승훈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더 원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응.”구승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강하리의 말이 다시 들렸다.“방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좀 무서워. 구승훈, 여기 남던지 내가 따라갈게.”강하리가 말을 마치며 허리를 감싸자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이걸 어떻게 거절하나.구승훈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가 이곳에 머물자 백아영은 연정이를 자신의 방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구승훈이 나가서 노민준에게 연락하고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샤워를 끝낸 뒤였다.얇은 잠옷만 입고 있는 몸에는 구승훈이 새긴 흔적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몸이 견딜 수 있겠어?”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화장대 거울로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