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길에 구승훈은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형...”구승재는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형과 주해찬이 나누는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형수님에 대한 이야기임은 분명했다.“형수님...”구승재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문득 형이 극도로 피곤한 듯 뒤에서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순간 구승재는 입을 다물었다.잠든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차마 방해할 수 없었다.그동안 강하리와 헤어진 후 지금까지 형은 극도의 피로로 고통을 잊으려는 듯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구승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형수님, 방금 주해찬 씨가 우리 형을 괴롭혔어요.]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하리가 그 메시지를 보고는 미간을 꾹 누르며 주해찬에게 전화를 걸었다.주해찬은 휴대폰으로 걸려 온 전화를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통화버튼을 눌렀다.“하리야, 아직도 안 잤어?”강하리가 대답하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해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방금 나랑 구승훈이 너희 집 아래에서 싸운 것 때문에 그래?”강하리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두 사람 싸웠어요?”주해찬은 여전히 아픈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그 사람 못 이겨.”강하리는 문득 그래서는 안 되지만 주해찬의 말에 안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그녀는 구승훈의 몸에 있는 부상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날 응급실에서 본 구승훈의 몸 여러 군데에 상처가 가득했다.게다가 그날 아침 정안 건물에서 두 경호원이 업혀 나오던 것과 엉망진창인 구승훈의 모습을 봤을 때, 지금 몸에 남은 상처가 그날 응급실에서 본 것보다 절대 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선배, 미안해요.”주해찬이 웃었다.“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무턱대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으니까. 난 그냥 그 사람이 널 너무 괴롭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나선 거야. 하리야, 네가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강하리가 입술을
“우리 층에 누가 임신했나 봐요!”“어떻게 알았어요?”“화장실 쓰레기통에 글쎄 임신 테스트기가 있더라니까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동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수군대는 두 명의 인턴을 바라봤다.그녀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인턴들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곧장 일하러 갔다. 그래서 그녀도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핸드폰은 오늘따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벌써 퍼지고 있었다. 회사는 이런 가십거리가 가장 환영받는 곳이기 때문이다.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것을 보고 강하리는 머리가 찌릿찌릿 아팠다.‘내가 소홀했어. 적어도 종이에 잘 싸서 버려야 하는 건데. 만약 구승훈 대표님이 알게 된다면...’끔찍한 상상에 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때 구승훈의 비서가 사무실에 노크하고 들어왔다.“부장님, 대표님께서 찾으세요.”강하리는 책상 아래에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강 부장님?”“네, 들었어요.”...대표이사실 앞에 멈춰 서서 강하리는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담 비서 신도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대표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하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대표이사실에는 우드 향 향초를 태우고 있었다. 점심부터 협력사 임원과 술 한 잔 마신 듯한 구승훈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반듯한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유난히 방탕해 보였다. 지그시 감은 눈도, 여유롭게 힘 풀린 몸도, 마치 정성껏 만든 조각상과 같았다.강하리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이러니까 주변에 여자가 끊기지 않지. 어느 여자가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거절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몸매도, 능력도... 적어도 겉으로는 흠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오직 강하리만 그
강하리는 허리가 뻣뻣해져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몸을 돌릴 때는 꽤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맞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구승훈의 눈빛은 아주 어두웠다. 조금 전 열정이 넘치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듯이 안팎으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어떡하긴, 병원에 가야지.”강하리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두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구승훈은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강하리, 우리가 정한 룰은 기억하지?”강하리는 몸을 흠칫 떨었다.‘그래... 룰... 우리 사이는 애초에 게임일 뿐이었어. 대표님이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강하리는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반대로 구승훈은 구씨 가문의 장손이자, SH그룹의 후계자이다.강하리가 구승훈과 만나게 된 것은 100% 우연이었다.3년 전, 어머니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강하리는 급하게 돈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친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빌리려고 했다.하지만 화려한 별장 밖에 꼬박 하루 무릎 꿇고 있다가 기절까지 했는데도, 땡전 한 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구승훈이 길고양이 줍듯이 그녀를 주운 것이었다.병원에서 눈을 뜬 그녀에게 구승훈은 ‘게임’을 제안했다. 마음 없이 몸만 쓰는 그런 게임 말이다.그때 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보수는 있어요?”구승훈은 그녀의 속물 같은 모습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피식 웃으며 오히려 칭찬했었다.“똑똑하네.”그렇게 두 사람은 게임을 시작했다.강하리는 꽤 일찍 룰을 파괴했다.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녀는 게임 파트너를 짝사랑했다.가슴 속에서 퍼져가는 아픔을 애써 무시하고 강하리는 미소를 짜냈다.“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구승훈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강 부장은 똑똑해서 참 좋아.”강하리는 꾸벅 인사하고 그가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대표이사실을 벗어났다. 부하직원 안예서는 벌써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릇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으면서 여자는 더욱 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힐끗 보기만 하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강하리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기만 할 뿐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동생 구승재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구승훈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강 부장도 술 마시러 왔어요?”“네, 안 대표님과 계약을 성사한 기념으로요.”강하리는 그들 속에 끼어들지 않고 구석 자리를 골라 앉았다.“왜 그렇게 멀리 앉았어요? 가까이 와 봐요!”구승재는 겁도 없이 강하리를 부추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구승훈과 그녀의 관계를 알았기 때문이다.구승훈은 누가 봐도 곁에 있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강하리가 들어온 후로부터 그 여자를 대하는 태도도 더욱 차가워졌다.강하리는 아주 예쁘게 생겼다. 분명히 청순한 인상이지만 묘하게 매혹적인 것이, 고리타분한 정장에 비즈니스적인 미소만 지어도 사람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역시 우리 형님 안목이란.’강하리와 같은 여자가 연예계에 진출한다면 거물들과 술자리 몇 번 가지는 것으로 톱스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강하리는 구승재의 말을 듣고서도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룸 안의 사람들 속에 섞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구승훈 곁에는 다른 여자가 있으니, 그녀가 다가갈 필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안현우는 어느샌가 술 한잔 들고 강하리의 곁에 가서 물었다.“강 부장, 한잔할까요?”“아뇨, 저는 몸이 불편해서 물로 대신할게요.”술잔을 받지 않는 강하리에 안현우는 기분이 상했다. 힘들게 만든 자리에서 그녀가 술 한 잔 마셔주지 않으니 말이다.안현우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가 취한 틈을 타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크하게 한 모금도 마셔주지 않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 대표님, 우리 강 부장 참 시크하죠? 이런 자리에서도 술 한 잔 안 마셔주네요.”구승훈은 천
강하리는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구승훈의 뜻은 명확했다. 만약 그녀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그는 절대 말리지 않을 것이다.‘이제는 내가 떠나도 상관없구나.’강하리는 안현우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단호한 말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이제는 변할 때가 되었다. 배 속에 아이도 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이용해 구승훈을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는 애초부터 게임일 뿐이었으니, 책임을 운운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승훈은 그녀가 협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이번에 생긴 아이는 병원에 가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처음이 있으면 다음도 있기 마련이기에 문제였다.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구승훈은 평소에 꽤 신중하게 피임했다. 번마다 꼭 콘돔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하도 거칠게 한 탓에 콘돔이 찢어진 적이 있었다. 비록 제때 피임약을 먹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지킬 수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도 소중한 청춘과 건강을 이렇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정서원의 병원비라면 이미 꽤 모였다. 구승훈의 냉정함에도 실망할 대로 실망했다.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결심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더욱 명확해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되물었다.“저 진짜 떠나도 돼요?”“그렇게 묻는다는 건 너도 안 대표의 제안에 관심 있다는 건가?”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강하리는 피식 웃으면서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했다.“안 대표님의 조건을 들어보고 생각해 볼 의향은 있어요.”쨍그랑!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술잔은 구승훈의 다리에 걸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룸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휩싸였다.구승훈의
겁먹은 여자는 이제야 슬슬 뒤로 물러났다.“죄, 죄송합니다.”여자가 떠난 다음 룸에 있던 다른 여자들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구승재는 조금 전 장난이 지나쳤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예전에 같은 장난을 쳤을 때 강하리가 하도 잘 받아줘서 방심한 탓이었다.예전의 그녀는 떠나기는커녕 SH그룹에 뼈까지 묻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달라져 있었다.“형, 강 부장을 다시 데려와서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는 게 낫지 않아? 강 부장 일 잘하잖아. 갑자기 사직한다는 게 말이 돼? 오늘도 야근한 모양인데, 너무 피곤해서 말이 헛나왔을 거야.”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회사에 부장 자리 하나 대신할 사람이 없을까 봐? 간다는 사람을 잡아서 뭐 하게.”안현우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쯤이면 그도 구승훈과 강하리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냈다.“저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어요. 구 대표님 직원을 제가 어떻게 함부로 데려가겠어요.”안현우의 말에도 구승훈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래,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릴 어리석은 인간은 없겠지. 하지만 그 여자 마음이 떠난걸, 남이 뭐 어쩌겠어?’... 클럽에서 나간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3년 전, 정서원이 입원한 후로 처음 돌아가는 것이었다.그녀의 계부 강찬수는 성격이 더러운 데다가 술까지 좋아했다. 그래서 쩍하면 모녀에게 손을 대고는 했다.그녀는 수도 없이 정서원을 설득해서 두 사람을 이혼시키려고 했었다. 하지만 마음이 약한 정서원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만취 상태인 강찬수를 데리러 간 어느 날 밤 길가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정서원이 입원한 다음 강찬수는 술을 점점 더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대부분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온다고 해도 제정신인 적이 없었다.강하리는 오늘 밤도 집이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도착해보니, 그가 집에 있었을 뿐
욕을 내뱉자 손연지는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그제야 가장 중요한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애는 지울 거지? 내일 검사 끝나고 바로 시술 예약해 줘?”강하리는 아랫배를 만지작대다가 욱신대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고 짧게 대답했다.“응.”대답을 마친 동시에 눈물 한 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환영받지 못한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그녀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평범한 여자이다. 아이는 태어나봤자 평생 아빠 없이 손가락질만 받고 살 것이다. 그리고 구승훈은 아이에게 마땅한 명분도,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사랑, 결혼, 아이... 구승훈에게서는 절대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강하리는 눈을 꼭 감더니 눈물을 단호하게 닦아냈다....저녁에 강하리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어느 순간,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어린 시절 강하리는 어머니 정서원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보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강가의 어촌 마을이었다. 그 자그마한 마을은 그녀가 구승훈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어린 구승훈은 지금처럼 음침하지 않았다. 태생부터 잘생겼던 그는 마치 곱게 빚은 도자기 인형과 같았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한적한 마을에서 요양 중이었다.요양 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는지 그는 강가에서 혼자 눈물을 훔치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강하리는 그를 발견할 때마다 사탕 한 알을 들고 가서 위로해 주곤 했다.처음에 그는 강하리를 보는 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친해진 다음에는 종종 대문 앞에 찾아와서 “하양아!”하고 큰 소리로 불러주고는 했다.얼마 후 그의 병이 다 나았는지 한 무리의 사람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는 무조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강하리와 약속을 나눴다.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10년 후의 재회는 거의 사고와 마찬가지였다. 강하
강하리는 당연히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차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걸어오면서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제까지 성가시게 굴래?”강하리의 앞에 멈춰 선 구승훈은 차갑고도 오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제가 언제 성가시게 굴었다는 거죠?”“그럼 진짜 안 대표를 따라가겠다는 건가? 둘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지?”“오해하셨어요. 이번에는 제가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거지,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이유는?”강하리는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결혼하고 싶어서요.”“정말이야?”“그럼요, 저도 이제 27살이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눈동자에는 위험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결혼할 상대는 있고?”“...아뇨. 하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마당에 그게 그렇게 중요하나요?”“돈은?”구승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질문에 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애초에 그녀는 돈을 위해 구승훈과 만난 것이었다. 이는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구승훈은 번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약점을 건드렸다.젖 먹던 힘까지 짜내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른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대답했다.“돈과 결혼 중에서, 저는 결혼을 선택하기로 했어요.”“그러면... 나는?”“의미 없는 질문이네요. 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요. 대표님이 그걸 해줄 수 있겠어요?”강하리는 구승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속으로는 혹시라도 그가 머리를 끄덕여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냥 성의 없는 대답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 평생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그에게만 묶여서 살 것이다.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차가워지는 안색이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는 뒤로 두 발짝 물러서더니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대답했다.“난 네가
돌아가는 길에 구승훈은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형...”구승재는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형과 주해찬이 나누는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형수님에 대한 이야기임은 분명했다.“형수님...”구승재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문득 형이 극도로 피곤한 듯 뒤에서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순간 구승재는 입을 다물었다.잠든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차마 방해할 수 없었다.그동안 강하리와 헤어진 후 지금까지 형은 극도의 피로로 고통을 잊으려는 듯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구승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형수님, 방금 주해찬 씨가 우리 형을 괴롭혔어요.]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하리가 그 메시지를 보고는 미간을 꾹 누르며 주해찬에게 전화를 걸었다.주해찬은 휴대폰으로 걸려 온 전화를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통화버튼을 눌렀다.“하리야, 아직도 안 잤어?”강하리가 대답하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해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방금 나랑 구승훈이 너희 집 아래에서 싸운 것 때문에 그래?”강하리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두 사람 싸웠어요?”주해찬은 여전히 아픈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그 사람 못 이겨.”강하리는 문득 그래서는 안 되지만 주해찬의 말에 안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그녀는 구승훈의 몸에 있는 부상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날 응급실에서 본 구승훈의 몸 여러 군데에 상처가 가득했다.게다가 그날 아침 정안 건물에서 두 경호원이 업혀 나오던 것과 엉망진창인 구승훈의 모습을 봤을 때, 지금 몸에 남은 상처가 그날 응급실에서 본 것보다 절대 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선배, 미안해요.”주해찬이 웃었다.“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무턱대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으니까. 난 그냥 그 사람이 널 너무 괴롭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나선 거야. 하리야, 네가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강하리가 입술을
“한 대 피울래요?”구승훈이 대답하지 않자 주해찬은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켰다.구승훈도 마찬가지로 담배에 불을 붙였고 두 사람 사이에는 그렇게 정적이 흘렀다.“당신이 하리한테 잘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당신을 위해 모든 걸 제쳐둔 채 온 힘을 다해 애쓰는 걸 보면서 다시는 걔한테 상처 주지 않을 줄 알았어. 그래서 나도 마음 놓고 떠났던 거야.”그렇게 말한 뒤 주해찬은 또 한 번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결혼식장에서 하리를 혼자 내버려둬? 구승훈, 대체 이유가 뭐야? 왜 매번 그런 식으로 자꾸만 하리에게 상처를 주는 건데?”구승훈은 대답하지 않고 담배만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하리 사이에 벌어진 일에 주해찬 당신이 왜 끼어들어?”주해찬은 코웃음을 쳤다.“왜 끼어드냐고? 그러는 당신은 방금 아무 상관도 없는 날 왜 때렸는데?”주해찬은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구승훈, 난 가끔 정말 당신이 이해가 안 돼. 그렇게 하리에게 마음 쓰면서도 대체 왜 자꾸만 상처를 주는 거야?”구승훈은 엄지와 검지로 담배 끝을 잡고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자조적인 웃음을 드러냈다.“상처를 줄 생각이 없었다고 하면 믿을 건가?”주해찬은 말이 없었다.자신이 둘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던 때가 떠올랐다.그녀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엔 깊은 상처만 남기고 말았다.사랑이란 게 이럴 때 보면 참 모순적이다.“날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주해찬도 고개를 들어 꼭대기 층을 바라보았다.“난 포기했어. 이젠 그냥 좋은 선배가 되고 싶을 뿐이야. 하리 마음속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관계가 있더라고.”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한밤중에 선물이나 주려고?”“난 단지 오늘 파티에서 구 대표님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갔다는 걸 들어서, 하리가 걱정되는 마음에.”구승훈은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주해찬은 구승훈
주해찬은 이미 자리를 떠났지만 동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주차된 차가 눈에 들어왔다.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차다.사고가 났을 때 자신을 향해 돌진했던 차가 바로 지금 앞에 있던 차와 거의 똑같았다.그는 다가가 창문을 두드렸고 차창을 내리자 놀랍게도 거기엔 구승훈의 경호원이 있었다.준봉도 주해찬을 보고 살짝 놀랐다.노민우 말로는 강하리가 한밤중에 주해찬 마중을 나갔다던데 주해찬도 이 밤에 그녀를 찾아올 줄이야.“준봉 씨, 맞죠?”주해찬이 웃으며 묻자 준봉이 적대시하며 대꾸했다.“주해찬 씨, 무슨 일이죠?”주해찬이 뒷좌석을 슬쩍 들여다보자 구승훈은 보이지 않았다.“그쪽 대표님 올라가셨나요?”준봉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주해찬은 알 수 있었다.밑에서 기다렸을 때 구승훈이 올라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건 구승훈이 그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뜻이었다.그가 2시간 넘게 기다렸으니 구승훈은 아마 3시간은 더 위층에서 기다렸을 테다.보아하니 그도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게 분명했다.‘준봉이 떠나지 않았다는 건 구승훈도 아직 가지 않았다는 뜻이겠지.’그래서 그도 가다 말고 다시 돌아왔다.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다.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구 대표님, 오랜만이네.”구승재는 주해찬을 보는 순간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무의식적으로 형을 힐끗 쳐다보았다. ‘오늘 또 싸우는 건 아니겠지?’하지만 놀랍게도 구승훈은 침착하게 그를 향해 말했다.“차에 가서 기다려.”구승훈이 말을 마친 후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이자 구승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았다.“형, 아직 몸 회복되지 않았어.”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구승훈이 그를 돌아보았다. 구승재는 곧장 입을 다물고 맞은편에 서 있던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로 향했다.“주해찬 씨도 오랜만이네.”구승훈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담뱃재를 털었다.주해찬은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다가 갑자기 구승훈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슬쩍 본
그때 그의 기분이 어땠던가, 아마도 행복했던 것 같다.하지만 옆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마음은 여전히 공허했다.그렇게 어느새 술병이 바닥을 드러냈다.침실 문에 기대어 저쪽 주방에서 분주한 모습을 바라보는 구승훈은 이제야 마음이 꽉 찬 것 같았다.강하리는 부엌에 서서 계속 끓고 있는 냄비에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후 심호흡을 한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구승재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불을 끄고 국 한 그릇을 떠서 밖으로 나갔다.“마시면 가야 해?”“안 마시고 가도 돼.”국물을 손에 든 구승훈은 다시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샤워하게 욕실 좀 써도 될까?”강하리가 눈을 흘겼다.“선 넘지 마.”구승훈이 그릇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나 좀 먹여줄래?”“얼굴에 확 부어줄까?”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강하리는 그를 무시한 채 돌아서서 서재로 들어갔다.전에 최하영과 의논했던 대로 안현우에게 함정을 파도 빈 껍데기만 둘 수는 없었다.그녀의 손에서 기획서가 차츰 구색을 갖춰갔다.그런데 구승훈은 여전히 침실 문 앞에 서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강하리는 조용히 컴퓨터를 닫았지만 밖에 있는 사람과 약속이라도 한 듯 서재에서 나가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안팎으로 각자 떨어져 있었다.둘 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웃기게도 편안함이 느껴졌다.초인종이 울렸을 땐 새벽 세 시였다.그 소리에 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다가가려는데 서재 문이 열렸다.강하리는 그를 쳐다보더니 곧장 문으로 향했다.“아주 바쁘네.”등 뒤에서 들리는 구승훈의 목소리엔 짙은 질투가 배어 있었다.“이 시간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강하리는 술에 취한 사람이라고 치부하며 무시한 채 다가가 문을 열었다.“보지도 않고 문을 여는 건 자주 들락거리는 사람이란 뜻인데...”“형수님, 우리 형 어디 있어요?”구승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구승재를 향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넌 여기 왜 왔어?”‘나
익숙한 향기, 익숙한 체온, 익숙한 사람.강하리는 잠시 밀치는 것도 잊었다.구승훈은 그녀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조금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벌렸고, 구승훈은 그녀가 물러설 틈도 주지 않고 조급하게 파고들었다.강하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구승훈이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한 손으로 목뒤를 감싼 채 다른 한 손은 니트 안으로 집어넣은 뒤였다.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린 강하리는 순간적으로 몸부림을 쳤다.그런데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구승훈...”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 닿았고, 굳은살이 박인 손이 닿은 곳에서는 전율이 일었다.강하리의 몸이 순간 경직되고 구승훈은 그 틈에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남자는 그녀의 어깨 위로 얼굴을 파묻고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의 목덜미를 콱 물었다.강하리는 화를 내며 남자를 옆으로 밀쳐내고 일어나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구승훈, 미쳤어?”구승훈은 웃음을 터뜨렸다.“응.”그는 반박하지 않고 놀랍게도 그냥 인정했다.어쩌면 정말로 미쳐가고 있는지도 모른다.이혼 얘기를 꺼낼 때도 강하리 같은 여자에게 들이대는 남자가 있을 거란 생각은 했었다.하지만 막상 다른 남자와 웃고 떠들고 심지어 다른 남자의 선물까지 받는 그녀를 보며 그는 마음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강하리는 짧은 대답에 말문이 막혀 할 말을 잃었다.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늦었어. 이만 가.”그러고는 이내 한 마디를 덧붙였다.“앞으로는 여기 오지 마. 연정이 보고 싶으면 아주머니가 데리고 갈 거야.”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구승훈,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구승훈은 웃으며 일어나 강하리 앞에 섰다.“강하리, 임희주랑 나랑 있는 거 보면 조금도 질투 안 나?”강하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왜 질투하겠어?
주해찬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됐어, 들어가. 며칠 뒤 동창회에서 보자.”강하리는 주해찬이 떠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다가 뒤돌아 위층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현관에 연정이를 안고 서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연정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고, 구승훈은 불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연정이를 안고 있었다.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구승훈이 이 시간에 연정이를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그런데 구승훈은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방금 데이트하고 왔어?”그렇게 말하며 그의 시선이 강하리의 손에 들려 있는 가방으로 향했다.“내가 주는 선물은 안 받으면서 다른 사람이 주는 선물은 받네?”강하리는 구승훈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다가가 연정이를 안으려 했지만 구승훈이 피했다.“깨지 않게 내가 안고 들어갈게.”강하리가 그를 흘겨보았다.“굳이 한밤중에 데리고 올 필요는 없었어.”“아주머니가 요리하다 데어서 연정이를 돌보기 불편해.”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렸다.“많이 다치셨어?”“심각한 건 아니지만 며칠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연정이를 심씨 가문에 며칠만 맡겨두는 게 어때?”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구승훈이 들어오는 것을 꺼려하자 구승훈은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왜, 난 이제 강 대표님 집도 못 들어가나?”강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결국 문을 열었다.방 안의 불이 서서히 켜지고 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외투를 벗고 신발을 갈아 신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주해찬이 준 선물은 현관에 있는 캐비닛 위에 올려놓은 채.구승훈은 그것을 보고 손을 뻗어 가방을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강하리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현관에 서 있었다.“연정이 침대에 눕히고 그만 가.”하지만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슬리퍼 어디 있어?” 강하리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씩씩거리며 신발장에서 슬리퍼 한
임희주의 입술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강하리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도와준다고?’임희주는 차갑게 비웃었다.“강하리 씨, 승훈 씨한테서 날 떼어놓으려는 건가요?”강하리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이미 그쪽이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요.”임희주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하지만 남에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 느낌이 무척 역겨웠다.“떠나고 싶은 건 맞는데 제가 왜 구승훈을 놔두고 그쪽을 믿겠어요?”강하리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믿지 않아도 돼요. 나도 강요할 생각 없으니까. 당신이랑 구승훈 사이도 딱히 관심 없어요. 하지만 날 건드리진 마요. 안 그럼 구승훈이 당신을 지켜줘도 난 여전히 당신을 이곳에서 발붙이지 못하게 할 수 있어요.”임희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강하리 씨, 구승훈 씨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당연히 알죠. 안 그럼 그쪽이 어떻게 구승훈 옆에 붙어 있겠어요? 하지만 임희주 씨, 생각 잘해요. 당신이 B시에서 멀쩡히 지낼 수 있는 건 단지 구승훈을 돕고 있다는 이유 하나뿐이에요. 그러니 얌전히 구승훈에게 협조해요. 안 그럼 여초연이나 구승훈이 움직이기 전에 나와 심씨 가문이 당신 절대 살아서 B시 못 나가게 할 테니까. 구승훈에게 순순히 협조하면 우리도 여초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도와줄게요. 생각 잘해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그제야 임희주는 강하리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내키지 않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강하리 씨,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모르겠어요? 지금 구승훈 씨 옆에 있는 사람은 저예요. 당신이 뭔데 사모님 행세를 하면서 날 협박해요?”강하리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가는데 뒤이어 임희주의 말이 들렸다.“나랑 구승훈 씨가 이미 잤다고 하면 믿겠어요?”강하리의 걸음이 우뚝 멈추고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애
강하리가 웃었다.“싱글인 여자에게 커리어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 근데 우리 천아름 디자이너님을 모시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단 말이지.”주얼리 업계에서 천아름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했다.게다가 그녀 본인의 브랜드도 있었기에 그런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자신이 데려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천아름은 잠시 침묵했다.“생각해 봐야겠어. 며칠 후에 대답해 줄게.”강하리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세 사람이 술집에서 나왔을 때는 자정이 가까워졌다.밖에는 여전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가정부가 휴대폰으로 보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케이크 앞에서 구승훈은 연정이를 안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그녀는 조용히 대화창을 끄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여초연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임희주는 여초연보다 강하리의 연락이 먼저 올 줄은 몰랐다.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결국엔 받았다.“강하리 씨, 무슨 일이죠?”임희주의 목소리는 병원 앞 카페에서 말할 때처럼 언제든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유로움으로 가득했다.“임 선생님, 나와서 얘기 좀 해요.”강하리의 목소리도 임희주와 비슷하게 들렸지만 다른 점이라면 그녀에겐 고고함이 배어 있었다.그녀야말로 대결에서 이긴 승자 같았다.임희주는 이를 살짝 갈았다.그녀는 심씨 가문 아가씨고 진태형의 유일한 딸이다.구승훈이 없어도 여전히 B시 전체가 부러워하는 공주님이다.임희주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질투, 원망 같은 것들. 왜 상대는 태생부터 타고났는데 그녀는 자유조차 바랄 수 없는 것인지.하지만 뭐라 해도 지금 구승훈은 그녀의 곁에 있지 않나.“강하리 씨,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신 거죠? 구승훈 씨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 “아니, 당신 얘기요.”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지만 길거리에는 여전히 커플들이 오가고 있다.강하리는 길가에 있는 커피숍에 앉아 우유 한 잔을 주문했다.따뜻한 우유를
구승훈은 바지에 크림을 잔뜩 묻혀놓은 꼬마 녀석을 내려다보며 마음이 녹아내렸다.허리를 숙여 연정이를 안아 든 그가 크림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뽀뽀를 해줬다.가정부가 나와서 이 모습을 보고 웃으며 연정이가 먹던 케이크를 가져가더니 아이의 손을 닦아주었다.“대표님, 옷 갈아입고 오세요. 저녁 준비 곧 끝나요.”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시선이 방 곳곳을 훑어보았다.보고 싶은 사람이 보이지 않자 형언할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왔다.가정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모님께선 저와 아가씨를 여기로 데려다주고 가셨어요. 아가씨랑 함께 생일 보내라고 말씀하셨어요.”구승훈이 입꼬리를 올리며 휴지로 연정이 얼굴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었다.“다른 말은 안 했나요?”가정부가 웃으며 답했다.“맛있는 음식 많이 하라고 하셨어요. 대표님 건강을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그래요?” 구승훈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그 사람 최근에... 주해찬과 자주 연락합니까?”가정부가 멈칫했다.“주해찬 씨는 해외로 가지 않았나요? 돌아왔어요?”구승훈의 입꼬리가 남몰래 올라갔다.서산 퍼스트 빌리지에 웬일로 사람 냄새가 났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저 멀리 별장의 불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자기야, 나와서 한잔해.”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리는 사실 나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돌아가면 잠을 못 이룰 것 같아서 그냥 나갔다.술을 마신다고 하지만 손연지는 손에 음료를 들고 있고, 평소 술에서 손을 떼지 않던 천아름도 오늘은 음료만 홀짝이니 강하리가 웃으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천아름은 눈썹을 치켜뜬 채 그녀를 바라보며 음료를 손에 쥐어줬다.“자, 취하기 전엔 집에 안 가.”강하리가 손연지와 잔을 부딪쳤다.“대단하신 천아름 디자이너님께서 무슨 일이지?”손연지는 고개를 저었다.“며칠째 이러고 있어. 넌 어때? 구승훈이랑 아직도 그래? 그 개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강하리는 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