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내키지 않았지만 천아름과 손연지의 권유로 결국 그 드레스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선명한 붉은색 드레스는 어깨에서 허리까지 깊게 파여 등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아래로 이어진 반짝이는 스커트는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자연스럽게 밀착되며 늘어졌다.하얀 피부는 붉은 드레스 덕분에 더욱 도드라졌고 머리카락 사이로 은근히 드러난 날개뼈는 도발적이기까지 했다.구승훈을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었다.처음으로 그 은밀한 아름다움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천아름은 위아래로 훑어보며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더니 가방에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발찌를 꺼내 강하리의 하얀 발목에 조심스럽게 채워주었다.강하리는 처음으로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게 되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거울 속 자신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됐어. 오늘은 남자 하나 낚아오는 거야, 알았지?”천아름이 장난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툭 쳤고 강하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희 진짜 나 소개팅하러 가는 거 아니야.”천아름은 어깨를 으쓱였다.“동창회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냐? 말만 동창회지 결국 소개팅이나 다름없지.”강하리는 작게 웃었다. 남자 친구라는 건 원한다고 바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직 구승훈을 완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휴대폰을 내려다보자 사진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그 사진은 마음 깊은 곳에 가시처럼 박혀 불쑥 떠오를 때마다 찌르듯이 아팠다.동창회는 보경 대학교 근처의 초특급 호텔에서 열렸다.저녁 무렵, 주해찬의 차는 인월동 입구에 도착했다.강하리의 모습에 운전석에 앉은 주해찬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도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오늘만큼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천아름이 그녀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끌어낸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오늘, 진짜 아름답네.”강하리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가요.”차가 호텔을 향해 움직이자 멀찍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벤틀리 안에서 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앞에 선 구승훈을 밀어내려 손을 들었지만 그보다 빠르게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이미 가까웠던 거리에서 그의 몸은 더욱 바싹 다가가 붙었다.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모두가 동창들이고 게다가 정안 그룹의 직원들도 꽤 눈에 띄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행동에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강하리는 주변을 의식하며 손을 들어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구승훈, 이런 자리에서까지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그 순간, 구승훈이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고 따뜻한 숨결과 짧은 통증, 그리고 가슴안에 알 수 없는 신맛이 번져갔다.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임희주한테도 이렇게 했어?”그 말에 구승훈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어 가볍게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는 아무 설명도 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현우를 조심해.”그 말을 남기고 그는 그녀의 귓불을 한번 부드럽게 문지른 뒤 돌아섰다.강하리는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곧이어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하필 그런 말을 꺼낸 걸까?’그가 대답해 주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해버린 것이다.“하리야, 괜찮아?”주해찬이 조용한 목소리로 묻자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네. 괜찮아요.”“정말 괜찮아? 방금 들은 말인데, 정안 그룹에서도 오늘 연말 회식 여기서 한다더라. 불편하면 지금 나가도 돼.”강하리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다시 평온해져 있었다.“정말 괜찮아요. 가요.”주해찬은 여전히 걱정스러워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두 사람은 함께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고 연회장에 들어서자 누군가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에 주해찬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조시욱, 너도 와 있었어?”정장을 입은 남자는 주해찬과 반갑게 포옹을 나누며 말했다.“마침 여기서 식사 중이었어. 넌?”“우린 동창회 참석하러 왔어.”주해찬은 웃으며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소개하려 했지
비명 사이로 나무 막대기 같은 걸로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곧 임희주의 비명이 끊겼는데 아마 고통에 기절한 모양이었다.잠시 후, 남자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도련님, 와서 이야기 좀 합시다.”구승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목소리,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여초연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 분명했다.“도련님께선 한 시간 안에 오셔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도련님은 이 여자를 다시 보지 못할 겁니다.”구승훈은 갑자기 코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 여자가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지?”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 여자가 죽든 신경 안 쓰시겠죠. 하지만 도련님 본인의 목숨은 신경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태가 약의 마지막 효과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구승훈의 시선이 짙게 가라앉았다.“주소 보내.”전화기 너머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역시 도련님은 똑똑하시네요. 혼자 오셔야 합니다. 신고하면 임희주만 죽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하십시오.”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위치 정보와 함께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사진 속 임희주는 온몸에 피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형, 어떡할 거야?”구승재가 묻자 구승훈은 말없이 위층 홀에 남아 있는 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곤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수님 잘 지켜.”그 말과 함께 그는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돌아섰다.구승재가 재빨리 따라붙으며 물었다.“형, 정말 혼자 갈 거야?”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하지만 그는 갈 수밖에 없었다.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그는 그 불구덩이에 들어가야만 했다.“걱정하지 마. 여초연은 내가 죽는 걸 원치 않아. 이 정도 괴롭힘은 아무것도 아니야.”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준봉도 여기 오라고 해. 그리고 형수님은 잘 부탁한다.”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아래층 연회
강하리는 주해찬과 구승훈이 나중에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지 못했지만 구승훈이 떠날 때 얼굴에 떠오른 그 기분 나쁜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이유는 모르지만 가슴속 어딘가에서 불안감이 조용히 피어올랐다.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고 돌아섰고 그때 주해찬이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다들 인사했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했어요.”주해찬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이끌어 테이블에 앉혔다.동창회장은 한껏 활기찬 분위기였고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웃음소리로 가득했다.지금 강하리는 신분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유엔 산하 번역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가 되었고 덕분에 번역학과 출신들은 그녀에게 다가와 인맥을 쌓으려 애썼다.게다가 그녀가 아직 싱글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결혼하지 않은 이들은 슬쩍 다른 기대도 품기 시작했다.식사 자리에서 강하리는 유난히 술을 많이 마셨고 주해찬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시선이 어딘가 다른 데로 가 있는 듯한 걸 놓치지 않았다.“무슨 생각해?”주해찬이 물었고 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표정을 숨겼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줄게.”주해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강하리는 그의 어깨를 조용히 눌렀다.“선배,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그 말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하지만 주해찬은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싫다면 조시욱한테 연락할게. 그 친구가 경호 기술이 뛰어나거든. 같이 다니면...”“선배.”강하리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고마워요.”강하리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말했다.“제가 새로 시작할 수 있게 챙겨줘서 정말 고마워요. 선배 마음, 저도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괜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주해찬은 어이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구승훈이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강하리는 입술
강하리는 심호흡을 한 뒤 무언가 말하려 하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조시욱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하리야, 무슨 일 있어?”그는 곧장 준봉과 노진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무슨 일 있었어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화장실 좀 다녀오려던 참이었어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뒤돌아서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갔고 그 뒤를 따라 준봉과 노진우, 그리고 조시욱까지 함께 움직였다.복도 중간에 이르자, 준봉과 노진우가 거의 동시에 조시욱 앞을 막아섰다.“죄송합니다. 사모님께서 화장실로 가는 길이라 더 이상 따라오시면 곤란합니다.”조시욱은 잠시 입꼬리를 올리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하리의 안전을 위해 따라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선 넘는 행동을 할 일은 절대 없으니까요.”조시욱은 강인한 인상의 얼굴에 단단한 신념이 서려 있었다.그는 분명 정중했지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준봉과 노진우 역시 완강했다. 두 사람 모두 단단히 길을 막고 그를 절대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조시욱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뭐가 그렇게 걱정돼서 그래요? 제가 당신들 대표님 여자를 빼앗기라도 할까 봐 그래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빼앗지 못해요.”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무겁고도 담담했다.그녀가 아직도 전 남편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걸 조시욱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그래서 그는 빼앗을 수 없었고 빼앗을 생각도 없었다.만약 강하리가 그 사람과 다시 잘 된다면 그는 오히려 기꺼이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어차피, 아이가 있는 부부라면 가장 좋은 건 함께 있는 것이니까.하지만 지금은 그저 친구로서 그녀의 안전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셋은 복도에서 잠시 팽팽하게 대치했고 그사이 강하리는 이미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조시욱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곧장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고 준봉과 노진우도 서둘러 그 뒤를 따라붙었다.사람들이
조시욱은 재빨리 창문 쪽으로 달려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그는 유령처럼 가볍게 벽을 타고 옆에 있는 하얀 배수관에 매달렸다.뒤이어 준봉도 주저 없이 따라 올라갔고 두 사람은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노진우는 곧장 비상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달렸다.조시욱은 몇 번의 손짓 만으로 옥상에 도착했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그 어디에도 강하리는 없었다.준봉은 손목을 돌려 풀며 배수관을 타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는 정확히 여자 화장실이 있는 층에 도착해 창문 유리를 발로 깨뜨리고 창틀을 잡아 몸을 안으로 던졌다.여자 화장실 안에서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비명이 터졌고 겁에 질린 여자들이 구석으로 몰려들어 준봉을 경계하며 바라보았다.그는 화장실 안을 빠르게 훑은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혹시, 빨간 드레스를 입고 유난히 예쁜 여자 보신 분 있나요?”여자들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고 준봉은 하나씩 칸막이 문을 두드렸다.두 칸에선 사람이 있었지만 그 안의 목소리는 강하리가 아니었다.여자 화장실이라는 특성상 더 강하게 문을 부술 수도 없었기에 그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히 사과하고 조용히 돌아섰다.그때, 남자 화장실 쪽에서 조시욱이 나왔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쳤고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얼굴엔 무겁고 침착한 긴장감이 깔려 있었다.강하리는 아마도 위층 화장실에서 누군가에게 끌려간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위로 올라갔거나 아래로 끌려갔을 것이다.하지만 위에도 아래에도 그녀는 없었고 준봉은 휴대폰을 꺼내 급히 노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없어.”노진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CCTV 확인하고 있어.”조시욱은 통화를 마친 뒤, 준봉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대표님한테 연락하세요. 호텔 전체는 이미 봉쇄했으니까 인원 투입해서 바로 수색 들어가라고 전해요.”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구승훈의 휴대폰은 연결되지 않았다.그는 곧장 구승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했고 둘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창문으로 로프를 던지고 손을 털며 화장실을 빠져나왔다.호텔 뒤편 검은색 세단 뒷좌석에서 안현우는 옆에 누워 있는 강하리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강하리... 날 공격할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살아 있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게 어떤 건지 똑똑히 보여줄게.”그는 천천히 강하리의 턱을 잡아당기고 몸을 숙여 입술을 가까이 댔다.그러나 입을 맞추기 직전에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무슨 일이야!”안현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고 전화기 너머엔 낮고 정제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대표님, 부탁하신 일 완료됐습니다. 제 일도 잊지 마세요.”“걱정하지 마. 안 잊어.”그는 급히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게요. 안 대표님은 이미 들켰을지도 몰라요.”이 말만 남기고 여자는 곧장 전화를 끊었고 안현우의 눈빛이 순간 매섭게 번뜩였다.역시나 누군가가 이미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그는 이를 악물고 재빨리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겨 시동을 걸고는 급히 차도를 달리기 시작했다.같은 시간, 호텔 방 안에서 임명우는 창밖을 바라보며 잔을 가볍게 기울이고 있었다.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와.”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작전 완료됐습니다. 안현우를 도와 여자를 빼냈고 구승재에게도 신호를 보냈습니다.”임명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모든 게 그의 예상대로였다.“다음은 어떻게 할까요?”여자가 참지 못하고 묻자 임명우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웃었다.“이제 우리가 영웅처럼 구출하러 가볼까? 그러면 강하리도 나에 대한 태도가 좀 달라지려나?”여자는 잠시 말을 잃었고 임명우는 가볍게 웃으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막 튀어나온 안현우의 차 앞으로 반대편에서 한 차량이 돌진해 왔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안현우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틀어 피했다.하지만 그 차는 마치 그의 반
강하리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어떤 여자와 부딪쳤고 목덜미에 느껴진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그리고 눈을 떴을 때, 온몸은 욱신거렸고 정신은 흐릿했다.손은 꽁꽁 묶여 있었고,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다.얼굴을 돌려보니 자신이 차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게다가 좌석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그 순간, 질주하는 차 안에서 낮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망할 놈,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온 거야? 됐어. 전에 약속한 장소로 가. 내 일 망치기만 해 봐, 죽여버릴 거야.”전화를 끊자마자 강하리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안현우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운전석에서 돌아본 안현우의 눈빛엔 광기와 탐욕이 엉켜 있었다.그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깨어났네?”강하리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앞좌석을 노려보았다.“날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요?”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보다 강하리 씨, 영상 하나 보여줄까요?”그는 휴대폰을 꺼내 재생 버튼을 눌렀다.곧 차 안엔 낯 뜨거운 신음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강하리는 화면을 제대로 보지 않아도 어떤 영상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진짜... 미쳤네요. 지금 당신 완전 변태 같아.”그녀의 조롱 섞인 말에 안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하지만 곧 비웃듯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 영상 끝까지 보고 나면 날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요.”그는 휴대폰을 안전벨트 위에 툭 던졌고 화면은 강하리의 시야에 정확히 들어왔다.그 고통스러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등골을 타고 식은 기운이 흘러내렸다.그때, 휴대폰 화면이 강하리의 눈에 정확히 들어왔다.거의 동시에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덮쳤다.이미 지쳐 있던 몸이 수천 개의 화살에 찔린 듯 깊은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영상 속 인물들은 모두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여자는 최근 구승
강하리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어떤 여자와 부딪쳤고 목덜미에 느껴진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그리고 눈을 떴을 때, 온몸은 욱신거렸고 정신은 흐릿했다.손은 꽁꽁 묶여 있었고,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다.얼굴을 돌려보니 자신이 차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게다가 좌석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그 순간, 질주하는 차 안에서 낮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망할 놈,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온 거야? 됐어. 전에 약속한 장소로 가. 내 일 망치기만 해 봐, 죽여버릴 거야.”전화를 끊자마자 강하리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안현우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운전석에서 돌아본 안현우의 눈빛엔 광기와 탐욕이 엉켜 있었다.그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깨어났네?”강하리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앞좌석을 노려보았다.“날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요?”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보다 강하리 씨, 영상 하나 보여줄까요?”그는 휴대폰을 꺼내 재생 버튼을 눌렀다.곧 차 안엔 낯 뜨거운 신음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강하리는 화면을 제대로 보지 않아도 어떤 영상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진짜... 미쳤네요. 지금 당신 완전 변태 같아.”그녀의 조롱 섞인 말에 안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하지만 곧 비웃듯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 영상 끝까지 보고 나면 날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요.”그는 휴대폰을 안전벨트 위에 툭 던졌고 화면은 강하리의 시야에 정확히 들어왔다.그 고통스러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등골을 타고 식은 기운이 흘러내렸다.그때, 휴대폰 화면이 강하리의 눈에 정확히 들어왔다.거의 동시에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덮쳤다.이미 지쳐 있던 몸이 수천 개의 화살에 찔린 듯 깊은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영상 속 인물들은 모두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여자는 최근 구승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창문으로 로프를 던지고 손을 털며 화장실을 빠져나왔다.호텔 뒤편 검은색 세단 뒷좌석에서 안현우는 옆에 누워 있는 강하리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강하리... 날 공격할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살아 있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게 어떤 건지 똑똑히 보여줄게.”그는 천천히 강하리의 턱을 잡아당기고 몸을 숙여 입술을 가까이 댔다.그러나 입을 맞추기 직전에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무슨 일이야!”안현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고 전화기 너머엔 낮고 정제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대표님, 부탁하신 일 완료됐습니다. 제 일도 잊지 마세요.”“걱정하지 마. 안 잊어.”그는 급히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게요. 안 대표님은 이미 들켰을지도 몰라요.”이 말만 남기고 여자는 곧장 전화를 끊었고 안현우의 눈빛이 순간 매섭게 번뜩였다.역시나 누군가가 이미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그는 이를 악물고 재빨리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겨 시동을 걸고는 급히 차도를 달리기 시작했다.같은 시간, 호텔 방 안에서 임명우는 창밖을 바라보며 잔을 가볍게 기울이고 있었다.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와.”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작전 완료됐습니다. 안현우를 도와 여자를 빼냈고 구승재에게도 신호를 보냈습니다.”임명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모든 게 그의 예상대로였다.“다음은 어떻게 할까요?”여자가 참지 못하고 묻자 임명우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웃었다.“이제 우리가 영웅처럼 구출하러 가볼까? 그러면 강하리도 나에 대한 태도가 좀 달라지려나?”여자는 잠시 말을 잃었고 임명우는 가볍게 웃으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막 튀어나온 안현우의 차 앞으로 반대편에서 한 차량이 돌진해 왔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안현우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틀어 피했다.하지만 그 차는 마치 그의 반
조시욱은 재빨리 창문 쪽으로 달려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그는 유령처럼 가볍게 벽을 타고 옆에 있는 하얀 배수관에 매달렸다.뒤이어 준봉도 주저 없이 따라 올라갔고 두 사람은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노진우는 곧장 비상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달렸다.조시욱은 몇 번의 손짓 만으로 옥상에 도착했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그 어디에도 강하리는 없었다.준봉은 손목을 돌려 풀며 배수관을 타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는 정확히 여자 화장실이 있는 층에 도착해 창문 유리를 발로 깨뜨리고 창틀을 잡아 몸을 안으로 던졌다.여자 화장실 안에서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비명이 터졌고 겁에 질린 여자들이 구석으로 몰려들어 준봉을 경계하며 바라보았다.그는 화장실 안을 빠르게 훑은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혹시, 빨간 드레스를 입고 유난히 예쁜 여자 보신 분 있나요?”여자들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고 준봉은 하나씩 칸막이 문을 두드렸다.두 칸에선 사람이 있었지만 그 안의 목소리는 강하리가 아니었다.여자 화장실이라는 특성상 더 강하게 문을 부술 수도 없었기에 그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히 사과하고 조용히 돌아섰다.그때, 남자 화장실 쪽에서 조시욱이 나왔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쳤고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얼굴엔 무겁고 침착한 긴장감이 깔려 있었다.강하리는 아마도 위층 화장실에서 누군가에게 끌려간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위로 올라갔거나 아래로 끌려갔을 것이다.하지만 위에도 아래에도 그녀는 없었고 준봉은 휴대폰을 꺼내 급히 노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없어.”노진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CCTV 확인하고 있어.”조시욱은 통화를 마친 뒤, 준봉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대표님한테 연락하세요. 호텔 전체는 이미 봉쇄했으니까 인원 투입해서 바로 수색 들어가라고 전해요.”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구승훈의 휴대폰은 연결되지 않았다.그는 곧장 구승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했고 둘은 함께
강하리는 심호흡을 한 뒤 무언가 말하려 하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조시욱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하리야, 무슨 일 있어?”그는 곧장 준봉과 노진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무슨 일 있었어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화장실 좀 다녀오려던 참이었어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뒤돌아서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갔고 그 뒤를 따라 준봉과 노진우, 그리고 조시욱까지 함께 움직였다.복도 중간에 이르자, 준봉과 노진우가 거의 동시에 조시욱 앞을 막아섰다.“죄송합니다. 사모님께서 화장실로 가는 길이라 더 이상 따라오시면 곤란합니다.”조시욱은 잠시 입꼬리를 올리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하리의 안전을 위해 따라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선 넘는 행동을 할 일은 절대 없으니까요.”조시욱은 강인한 인상의 얼굴에 단단한 신념이 서려 있었다.그는 분명 정중했지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준봉과 노진우 역시 완강했다. 두 사람 모두 단단히 길을 막고 그를 절대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조시욱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뭐가 그렇게 걱정돼서 그래요? 제가 당신들 대표님 여자를 빼앗기라도 할까 봐 그래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빼앗지 못해요.”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무겁고도 담담했다.그녀가 아직도 전 남편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걸 조시욱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그래서 그는 빼앗을 수 없었고 빼앗을 생각도 없었다.만약 강하리가 그 사람과 다시 잘 된다면 그는 오히려 기꺼이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어차피, 아이가 있는 부부라면 가장 좋은 건 함께 있는 것이니까.하지만 지금은 그저 친구로서 그녀의 안전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셋은 복도에서 잠시 팽팽하게 대치했고 그사이 강하리는 이미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조시욱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곧장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고 준봉과 노진우도 서둘러 그 뒤를 따라붙었다.사람들이
강하리는 주해찬과 구승훈이 나중에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지 못했지만 구승훈이 떠날 때 얼굴에 떠오른 그 기분 나쁜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이유는 모르지만 가슴속 어딘가에서 불안감이 조용히 피어올랐다.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고 돌아섰고 그때 주해찬이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다들 인사했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했어요.”주해찬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이끌어 테이블에 앉혔다.동창회장은 한껏 활기찬 분위기였고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웃음소리로 가득했다.지금 강하리는 신분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유엔 산하 번역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가 되었고 덕분에 번역학과 출신들은 그녀에게 다가와 인맥을 쌓으려 애썼다.게다가 그녀가 아직 싱글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결혼하지 않은 이들은 슬쩍 다른 기대도 품기 시작했다.식사 자리에서 강하리는 유난히 술을 많이 마셨고 주해찬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시선이 어딘가 다른 데로 가 있는 듯한 걸 놓치지 않았다.“무슨 생각해?”주해찬이 물었고 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표정을 숨겼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줄게.”주해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강하리는 그의 어깨를 조용히 눌렀다.“선배,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그 말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하지만 주해찬은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싫다면 조시욱한테 연락할게. 그 친구가 경호 기술이 뛰어나거든. 같이 다니면...”“선배.”강하리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고마워요.”강하리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말했다.“제가 새로 시작할 수 있게 챙겨줘서 정말 고마워요. 선배 마음, 저도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괜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주해찬은 어이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구승훈이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강하리는 입술
비명 사이로 나무 막대기 같은 걸로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곧 임희주의 비명이 끊겼는데 아마 고통에 기절한 모양이었다.잠시 후, 남자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도련님, 와서 이야기 좀 합시다.”구승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목소리,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여초연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 분명했다.“도련님께선 한 시간 안에 오셔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도련님은 이 여자를 다시 보지 못할 겁니다.”구승훈은 갑자기 코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 여자가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지?”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 여자가 죽든 신경 안 쓰시겠죠. 하지만 도련님 본인의 목숨은 신경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태가 약의 마지막 효과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구승훈의 시선이 짙게 가라앉았다.“주소 보내.”전화기 너머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역시 도련님은 똑똑하시네요. 혼자 오셔야 합니다. 신고하면 임희주만 죽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하십시오.”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위치 정보와 함께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사진 속 임희주는 온몸에 피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형, 어떡할 거야?”구승재가 묻자 구승훈은 말없이 위층 홀에 남아 있는 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곤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수님 잘 지켜.”그 말과 함께 그는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돌아섰다.구승재가 재빨리 따라붙으며 물었다.“형, 정말 혼자 갈 거야?”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하지만 그는 갈 수밖에 없었다.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그는 그 불구덩이에 들어가야만 했다.“걱정하지 마. 여초연은 내가 죽는 걸 원치 않아. 이 정도 괴롭힘은 아무것도 아니야.”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준봉도 여기 오라고 해. 그리고 형수님은 잘 부탁한다.”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아래층 연회
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앞에 선 구승훈을 밀어내려 손을 들었지만 그보다 빠르게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이미 가까웠던 거리에서 그의 몸은 더욱 바싹 다가가 붙었다.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모두가 동창들이고 게다가 정안 그룹의 직원들도 꽤 눈에 띄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행동에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강하리는 주변을 의식하며 손을 들어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구승훈, 이런 자리에서까지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그 순간, 구승훈이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고 따뜻한 숨결과 짧은 통증, 그리고 가슴안에 알 수 없는 신맛이 번져갔다.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임희주한테도 이렇게 했어?”그 말에 구승훈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어 가볍게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는 아무 설명도 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현우를 조심해.”그 말을 남기고 그는 그녀의 귓불을 한번 부드럽게 문지른 뒤 돌아섰다.강하리는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곧이어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하필 그런 말을 꺼낸 걸까?’그가 대답해 주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해버린 것이다.“하리야, 괜찮아?”주해찬이 조용한 목소리로 묻자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네. 괜찮아요.”“정말 괜찮아? 방금 들은 말인데, 정안 그룹에서도 오늘 연말 회식 여기서 한다더라. 불편하면 지금 나가도 돼.”강하리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다시 평온해져 있었다.“정말 괜찮아요. 가요.”주해찬은 여전히 걱정스러워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두 사람은 함께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고 연회장에 들어서자 누군가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에 주해찬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조시욱, 너도 와 있었어?”정장을 입은 남자는 주해찬과 반갑게 포옹을 나누며 말했다.“마침 여기서 식사 중이었어. 넌?”“우린 동창회 참석하러 왔어.”주해찬은 웃으며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소개하려 했지
강하리는 내키지 않았지만 천아름과 손연지의 권유로 결국 그 드레스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선명한 붉은색 드레스는 어깨에서 허리까지 깊게 파여 등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아래로 이어진 반짝이는 스커트는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자연스럽게 밀착되며 늘어졌다.하얀 피부는 붉은 드레스 덕분에 더욱 도드라졌고 머리카락 사이로 은근히 드러난 날개뼈는 도발적이기까지 했다.구승훈을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었다.처음으로 그 은밀한 아름다움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천아름은 위아래로 훑어보며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더니 가방에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발찌를 꺼내 강하리의 하얀 발목에 조심스럽게 채워주었다.강하리는 처음으로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게 되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거울 속 자신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됐어. 오늘은 남자 하나 낚아오는 거야, 알았지?”천아름이 장난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툭 쳤고 강하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희 진짜 나 소개팅하러 가는 거 아니야.”천아름은 어깨를 으쓱였다.“동창회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냐? 말만 동창회지 결국 소개팅이나 다름없지.”강하리는 작게 웃었다. 남자 친구라는 건 원한다고 바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직 구승훈을 완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휴대폰을 내려다보자 사진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그 사진은 마음 깊은 곳에 가시처럼 박혀 불쑥 떠오를 때마다 찌르듯이 아팠다.동창회는 보경 대학교 근처의 초특급 호텔에서 열렸다.저녁 무렵, 주해찬의 차는 인월동 입구에 도착했다.강하리의 모습에 운전석에 앉은 주해찬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도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오늘만큼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천아름이 그녀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끌어낸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오늘, 진짜 아름답네.”강하리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가요.”차가 호텔을 향해 움직이자 멀찍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벤틀리 안에서 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손연지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너 왜 이렇게 바보처럼 굴어?”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으며 말했다.“바보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야. 앞으로 그 사람은 나랑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찾아야 할 사람은 다 찾았고 풀어야 할 감정도 다 풀었다.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멀리서 그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손연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 하자 강하리는 먼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괜찮아. 걱정하지 마. 오늘 밤 동창회에서 새로운 사랑을 찾을지도 모르잖아?”손연지는 그녀를 노려보듯 바라보며 말했다.“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솔직히 이제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어.”강하리는 미소만 지었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시각, 안현우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시청에서 발표한 도시계획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 거기엔 자신이 낙찰받은 동쪽 부지가 공원용지로 표시되어 있었다.그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 모든 게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짜인 함정이라는 걸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동쪽 땅을 낙찰받았다며 호언장담했고 그 땅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었다.심지어 최하영을 이겼다는 기쁨에 축하 파티까지 열었었다.그런데 오늘 아침 모든 것이 뒤바뀌었고 안현우는 끝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탁자 위의 재떨이를 집어 TV 화면에 던졌다.“이 망할 년!”그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보경시로 가는 비행기표 예약해. 당장! 지금 당장!”같은 시각, 임희주는 TV를 끄고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안 대표님, 우리 다시 한번 손잡는 건 어때요?”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안현우의 목소리는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임 선생, 아직도 해결 못 했어? 진짜 쓸모없는 년이네.”임희주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이미 구승훈과 일종의 계약을 맺고 있었고 그를 위해 여초연을 꾀어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