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밖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운전석 유리가 산산조각 났고 곧이어 안현우의 손에서 피가 튀더니 비명이 터져 나왔다.제어력을 잃은 차량은 그대로 고가도로 방호벽을 향해 돌진했고 안현우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었다.차량은 그대로 뒤집혀 강하리는 정신이 아득해지며 머릿속이 핑 돌았다.곧이어 안현우가 그녀를 강제로 차 밖으로 끌어내 칼을 목에 들이댔다.피범벅이 된 채 절뚝이며 강하리를 끌고 고가도로 난간 쪽으로 향했다.차에서 내린 구승훈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 옷조차 제대로 걸치지 못한 강하리의 모습을 목격했다.그녀는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이 고가도로는 누군가가 일부러 막아둔 듯 넓은 도로 위엔 몇 대의 차량만이 멈춰 있었고 주변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구승훈은 여전히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맹렬한 바람이 불었지만 그 바람조차도 오히려 그를 더 차갑고 냉정하게 보이게 했다.강하리는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졌다.구승훈은 그녀와 평생 함께 걸어왔던 남자였다.그녀가 오랫동안 밤낮으로 생각해 오며 미워하면서도 지우지 못했던 남자였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강하리는 문득 깨달았다. 어떤 사람은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것을.“풀어줘.”차가운 날씨처럼 냉정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강하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그 짧은 시선 속에서 구승훈의 가슴은 이유 모를 답답함으로 무거워졌다.착각일까?그녀의 눈에서 아무런 빛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하리야...”남자의 목소리는 쉰 듯 메마르게 그녀를 불렀지만 강하리는 그를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안현우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구승훈, 우리 게임 한 번 해볼까?”그가 말을 마치자 맞은편 도로에 차량이 멈춰 섰다.곧이어 한 남자가 임희주를 끌고 나타나 고가도로 반대편에 섰다.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그는 고개를 돌려 구승재를 향해 물었다.“노진우한테서 답장 왔어?”구승재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
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정확히 말하자면 그 영상을 본 순간부터 모든 감정이 사라졌고 그 이후의 행동은 모두 단지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었다.그동안 생긴 온갖 상처조차 그녀에겐 아무 느낌조차 없었다. 찬 바람이 휘몰아쳐도, 그녀의 마음속엔 단 하나, 구승훈의 얼굴을 끝까지 눈에 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아마도 단 한 순간의 망설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가 그녀에겐 긴 세월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리고 그 순간, 강하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내가 구승훈의 인생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구나.’그래서 결심은 오히려 단순했다. 그가 망설이는 대신, 자신이 선택하면 될 일이었다.고가 아래 도로는 이미 봉쇄된 상태였지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차들이 있어 안전 매트는 아직 완전히 깔리지 않은 상태였다.그 시각, 조시욱과 주해찬은 차량을 통제하며 진입을 막고 있었고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밤하늘을 가르며 붉은 드레스가 아래로 떨어졌다고 꽃잎처럼 아름다웠고 동시에 피처럼 잔혹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고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다.강하리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받아졌는지, 그대로 지면에 부딪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떨어지던 순간, 단 하나 기억나는 것은 구승훈의 창백한 얼굴과, 붉게 물든 그의 두 눈이었다.고통은 어쩌면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통증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심장에서 시작해 온몸의 관절, 근육, 뼛속까지 천천히 퍼져가는 고통이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눈을 감기 전 눈가에 살짝 맺힌 온기를 느꼈고 그 뒤로는 완전한 어둠뿐이었다.구승훈은 짐승처럼 날뛰며 안현우의 목을 움켜잡았다.안현우는 강하리가 그렇게 스스로 뛰어내릴 줄은 상상도 못 했고 그저 형식적으로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댔을 뿐이었다.강하리가 떨어지는 순간, 그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미친 듯이 웃어댔다.‘그년이 죽었다면 이 짓도 해볼 만했네.’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짓던 바로
“지금 뭐 하려는 거야? 너 진짜 또 뭘 하려고 하는데!”주해찬은 온몸의 힘을 다해 구승훈을 붙잡았다.그제야 구승훈도 마치 정신이 번쩍 든 듯 돌아서더니 주해찬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주해찬이 그대로 반격하려는 순간, 조시욱이 급히 그를 막아섰다.구승훈의 시선은, 방금 막 차에 실린 사람에게 고정돼 있었다.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의 손은 총을 들기조차 힘들 정도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차 문이 쾅 닫히고 의료진은 단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를 병원으로 이송했다.수술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다.심준호는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도착했고 그 뒤엔 거의 정신을 못 차리는 백아영이 따라왔다.손연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술실에서 걸어 나왔고 천아름이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상태 어때요?”손연지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아직 수술 중이에요. 안에 더는 못 있겠더라고요.”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렸다.“하리는... 하리는...”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의 손에 들린 한 장의 병세 위급 통지서가 마지막 희망을 무너뜨렸다.백아영은 평생 숱한 풍파를 겪어온 사람이었지만 그 순간 눈앞이 하얘지며 그대로 실신해 버렸고 수술실 앞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졌다.강하리는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 강가의 작은 어촌 마을로. 리시안셔스 꽃이 들판 가득 피어 있었고 붉은 노을 속에서 어머니의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하지만 그 자리에, 더는 구승훈은 없었다. 그 봄날, 벽 너머에서 조심스레 그녀를 부르던 소년도 없었고 고요한 여름날, 폭우 속에서 사탕을 들고 뛰어오던 그 사람도 없었다.그 가을엔 이별도 없었고 그 후의 긴 시간, 끝없는 그리움도 존재하지 않았다.그녀는 생각했다.‘이대로라면 좋겠다. 정말... 좋다. 그런데 왜 이토록 가슴이 아픈 걸까?’창백한 얼굴과 붉게 물든 눈,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승훈 씨... 슬퍼하지 마. 당신이
하얀 병실. 귓가엔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가 아른거렸다.강하리는 천천히, 힘겹게 눈을 떴고 가장 먼저 마주친 건 백아영의 걱정 어린 눈빛이었다.“할머니.”쉰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부르자, 손을 뻗어 닿아보려 했지만 손끝조차 들어 올릴 힘이 없었다.백아영은 잠시 멍하더니 이내 눈에 반짝이는 기쁨이 스쳤다.“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급히 두 번을 외치자, 저쪽에서 손연지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의사가 고개를 돌렸다.강하리가 눈을 떴다는 걸 본 의사는 곧장 다가와 진료에 들어갔다. 손연지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이놈의 계집애... 그래도 깨어날 줄은 알았네.’의사가 전신을 점검하고 별다른 문제 없다는 말을 남긴 뒤 병실을 나섰다.손연지가 백아영 곁으로 다가갔다.“할머니 이제 좀 쉬세요. 제가 하리 곁에 있을게요.”백아영은 쉽게 떨어지지 못했지만 마침 그녀 담당 주치의가 찾아왔다.백아영은 아쉬운 듯 손을 뻗어 강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편히 쉬고 있어. 할머니 검사 좀 받고 다시 올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연지한테 말해. 집에 전화하게 할 테니까.”강하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백아영을 배웅했다.병실엔 조용히 둘만 남았고 손연지는 말없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강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침묵 끝에,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화났어?”손연지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내가 뭘 화나. 네 목숨이 내 것도 아닌데. 다친 것도, 수술받은 것도, 병원에서 몇 번씩이나 위독 통보 받은 것도 전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말을 이어가다, 어느 순간 그녀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예전에도 그녀는 무너진 적 있었다.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병을 얻었을 때도 흔들렸지만 그날 밤, 위급 통지서가 몇 장이나 연이어 나왔을 때만큼은 아니었다.그때만큼, 무섭고 혼란스러운 순간은 없었다.“너 정말 못됐다.”손연지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렇게 뛰어내리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다른
“우리 층에 누가 임신했나 봐요!”“어떻게 알았어요?”“화장실 쓰레기통에 글쎄 임신 테스트기가 있더라니까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동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수군대는 두 명의 인턴을 바라봤다.그녀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인턴들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곧장 일하러 갔다. 그래서 그녀도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핸드폰은 오늘따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벌써 퍼지고 있었다. 회사는 이런 가십거리가 가장 환영받는 곳이기 때문이다.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것을 보고 강하리는 머리가 찌릿찌릿 아팠다.‘내가 소홀했어. 적어도 종이에 잘 싸서 버려야 하는 건데. 만약 구승훈 대표님이 알게 된다면...’끔찍한 상상에 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때 구승훈의 비서가 사무실에 노크하고 들어왔다.“부장님, 대표님께서 찾으세요.”강하리는 책상 아래에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강 부장님?”“네, 들었어요.”...대표이사실 앞에 멈춰 서서 강하리는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담 비서 신도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대표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하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대표이사실에는 우드 향 향초를 태우고 있었다. 점심부터 협력사 임원과 술 한 잔 마신 듯한 구승훈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반듯한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유난히 방탕해 보였다. 지그시 감은 눈도, 여유롭게 힘 풀린 몸도, 마치 정성껏 만든 조각상과 같았다.강하리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이러니까 주변에 여자가 끊기지 않지. 어느 여자가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거절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몸매도, 능력도... 적어도 겉으로는 흠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오직 강하리만 그
강하리는 허리가 뻣뻣해져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몸을 돌릴 때는 꽤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맞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구승훈의 눈빛은 아주 어두웠다. 조금 전 열정이 넘치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듯이 안팎으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어떡하긴, 병원에 가야지.”강하리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두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구승훈은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강하리, 우리가 정한 룰은 기억하지?”강하리는 몸을 흠칫 떨었다.‘그래... 룰... 우리 사이는 애초에 게임일 뿐이었어. 대표님이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강하리는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반대로 구승훈은 구씨 가문의 장손이자, SH그룹의 후계자이다.강하리가 구승훈과 만나게 된 것은 100% 우연이었다.3년 전, 어머니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강하리는 급하게 돈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친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빌리려고 했다.하지만 화려한 별장 밖에 꼬박 하루 무릎 꿇고 있다가 기절까지 했는데도, 땡전 한 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구승훈이 길고양이 줍듯이 그녀를 주운 것이었다.병원에서 눈을 뜬 그녀에게 구승훈은 ‘게임’을 제안했다. 마음 없이 몸만 쓰는 그런 게임 말이다.그때 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보수는 있어요?”구승훈은 그녀의 속물 같은 모습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피식 웃으며 오히려 칭찬했었다.“똑똑하네.”그렇게 두 사람은 게임을 시작했다.강하리는 꽤 일찍 룰을 파괴했다.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녀는 게임 파트너를 짝사랑했다.가슴 속에서 퍼져가는 아픔을 애써 무시하고 강하리는 미소를 짜냈다.“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구승훈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강 부장은 똑똑해서 참 좋아.”강하리는 꾸벅 인사하고 그가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대표이사실을 벗어났다. 부하직원 안예서는 벌써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릇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으면서 여자는 더욱 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힐끗 보기만 하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강하리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기만 할 뿐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동생 구승재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구승훈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강 부장도 술 마시러 왔어요?”“네, 안 대표님과 계약을 성사한 기념으로요.”강하리는 그들 속에 끼어들지 않고 구석 자리를 골라 앉았다.“왜 그렇게 멀리 앉았어요? 가까이 와 봐요!”구승재는 겁도 없이 강하리를 부추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구승훈과 그녀의 관계를 알았기 때문이다.구승훈은 누가 봐도 곁에 있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강하리가 들어온 후로부터 그 여자를 대하는 태도도 더욱 차가워졌다.강하리는 아주 예쁘게 생겼다. 분명히 청순한 인상이지만 묘하게 매혹적인 것이, 고리타분한 정장에 비즈니스적인 미소만 지어도 사람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역시 우리 형님 안목이란.’강하리와 같은 여자가 연예계에 진출한다면 거물들과 술자리 몇 번 가지는 것으로 톱스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강하리는 구승재의 말을 듣고서도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룸 안의 사람들 속에 섞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구승훈 곁에는 다른 여자가 있으니, 그녀가 다가갈 필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안현우는 어느샌가 술 한잔 들고 강하리의 곁에 가서 물었다.“강 부장, 한잔할까요?”“아뇨, 저는 몸이 불편해서 물로 대신할게요.”술잔을 받지 않는 강하리에 안현우는 기분이 상했다. 힘들게 만든 자리에서 그녀가 술 한 잔 마셔주지 않으니 말이다.안현우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가 취한 틈을 타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크하게 한 모금도 마셔주지 않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 대표님, 우리 강 부장 참 시크하죠? 이런 자리에서도 술 한 잔 안 마셔주네요.”구승훈은 천
강하리는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구승훈의 뜻은 명확했다. 만약 그녀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그는 절대 말리지 않을 것이다.‘이제는 내가 떠나도 상관없구나.’강하리는 안현우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단호한 말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이제는 변할 때가 되었다. 배 속에 아이도 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이용해 구승훈을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는 애초부터 게임일 뿐이었으니, 책임을 운운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승훈은 그녀가 협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이번에 생긴 아이는 병원에 가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처음이 있으면 다음도 있기 마련이기에 문제였다.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구승훈은 평소에 꽤 신중하게 피임했다. 번마다 꼭 콘돔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하도 거칠게 한 탓에 콘돔이 찢어진 적이 있었다. 비록 제때 피임약을 먹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지킬 수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도 소중한 청춘과 건강을 이렇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정서원의 병원비라면 이미 꽤 모였다. 구승훈의 냉정함에도 실망할 대로 실망했다.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결심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더욱 명확해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되물었다.“저 진짜 떠나도 돼요?”“그렇게 묻는다는 건 너도 안 대표의 제안에 관심 있다는 건가?”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강하리는 피식 웃으면서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했다.“안 대표님의 조건을 들어보고 생각해 볼 의향은 있어요.”쨍그랑!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술잔은 구승훈의 다리에 걸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룸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휩싸였다.구승훈의
하얀 병실. 귓가엔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가 아른거렸다.강하리는 천천히, 힘겹게 눈을 떴고 가장 먼저 마주친 건 백아영의 걱정 어린 눈빛이었다.“할머니.”쉰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부르자, 손을 뻗어 닿아보려 했지만 손끝조차 들어 올릴 힘이 없었다.백아영은 잠시 멍하더니 이내 눈에 반짝이는 기쁨이 스쳤다.“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급히 두 번을 외치자, 저쪽에서 손연지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의사가 고개를 돌렸다.강하리가 눈을 떴다는 걸 본 의사는 곧장 다가와 진료에 들어갔다. 손연지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이놈의 계집애... 그래도 깨어날 줄은 알았네.’의사가 전신을 점검하고 별다른 문제 없다는 말을 남긴 뒤 병실을 나섰다.손연지가 백아영 곁으로 다가갔다.“할머니 이제 좀 쉬세요. 제가 하리 곁에 있을게요.”백아영은 쉽게 떨어지지 못했지만 마침 그녀 담당 주치의가 찾아왔다.백아영은 아쉬운 듯 손을 뻗어 강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편히 쉬고 있어. 할머니 검사 좀 받고 다시 올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연지한테 말해. 집에 전화하게 할 테니까.”강하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백아영을 배웅했다.병실엔 조용히 둘만 남았고 손연지는 말없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강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침묵 끝에,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화났어?”손연지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내가 뭘 화나. 네 목숨이 내 것도 아닌데. 다친 것도, 수술받은 것도, 병원에서 몇 번씩이나 위독 통보 받은 것도 전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말을 이어가다, 어느 순간 그녀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예전에도 그녀는 무너진 적 있었다.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병을 얻었을 때도 흔들렸지만 그날 밤, 위급 통지서가 몇 장이나 연이어 나왔을 때만큼은 아니었다.그때만큼, 무섭고 혼란스러운 순간은 없었다.“너 정말 못됐다.”손연지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렇게 뛰어내리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다른
“지금 뭐 하려는 거야? 너 진짜 또 뭘 하려고 하는데!”주해찬은 온몸의 힘을 다해 구승훈을 붙잡았다.그제야 구승훈도 마치 정신이 번쩍 든 듯 돌아서더니 주해찬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주해찬이 그대로 반격하려는 순간, 조시욱이 급히 그를 막아섰다.구승훈의 시선은, 방금 막 차에 실린 사람에게 고정돼 있었다.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의 손은 총을 들기조차 힘들 정도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차 문이 쾅 닫히고 의료진은 단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를 병원으로 이송했다.수술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다.심준호는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도착했고 그 뒤엔 거의 정신을 못 차리는 백아영이 따라왔다.손연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술실에서 걸어 나왔고 천아름이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상태 어때요?”손연지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아직 수술 중이에요. 안에 더는 못 있겠더라고요.”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렸다.“하리는... 하리는...”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의 손에 들린 한 장의 병세 위급 통지서가 마지막 희망을 무너뜨렸다.백아영은 평생 숱한 풍파를 겪어온 사람이었지만 그 순간 눈앞이 하얘지며 그대로 실신해 버렸고 수술실 앞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졌다.강하리는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 강가의 작은 어촌 마을로. 리시안셔스 꽃이 들판 가득 피어 있었고 붉은 노을 속에서 어머니의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하지만 그 자리에, 더는 구승훈은 없었다. 그 봄날, 벽 너머에서 조심스레 그녀를 부르던 소년도 없었고 고요한 여름날, 폭우 속에서 사탕을 들고 뛰어오던 그 사람도 없었다.그 가을엔 이별도 없었고 그 후의 긴 시간, 끝없는 그리움도 존재하지 않았다.그녀는 생각했다.‘이대로라면 좋겠다. 정말... 좋다. 그런데 왜 이토록 가슴이 아픈 걸까?’창백한 얼굴과 붉게 물든 눈,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승훈 씨... 슬퍼하지 마. 당신이
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정확히 말하자면 그 영상을 본 순간부터 모든 감정이 사라졌고 그 이후의 행동은 모두 단지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었다.그동안 생긴 온갖 상처조차 그녀에겐 아무 느낌조차 없었다. 찬 바람이 휘몰아쳐도, 그녀의 마음속엔 단 하나, 구승훈의 얼굴을 끝까지 눈에 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아마도 단 한 순간의 망설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가 그녀에겐 긴 세월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리고 그 순간, 강하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내가 구승훈의 인생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구나.’그래서 결심은 오히려 단순했다. 그가 망설이는 대신, 자신이 선택하면 될 일이었다.고가 아래 도로는 이미 봉쇄된 상태였지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차들이 있어 안전 매트는 아직 완전히 깔리지 않은 상태였다.그 시각, 조시욱과 주해찬은 차량을 통제하며 진입을 막고 있었고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밤하늘을 가르며 붉은 드레스가 아래로 떨어졌다고 꽃잎처럼 아름다웠고 동시에 피처럼 잔혹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고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다.강하리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받아졌는지, 그대로 지면에 부딪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떨어지던 순간, 단 하나 기억나는 것은 구승훈의 창백한 얼굴과, 붉게 물든 그의 두 눈이었다.고통은 어쩌면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통증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심장에서 시작해 온몸의 관절, 근육, 뼛속까지 천천히 퍼져가는 고통이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눈을 감기 전 눈가에 살짝 맺힌 온기를 느꼈고 그 뒤로는 완전한 어둠뿐이었다.구승훈은 짐승처럼 날뛰며 안현우의 목을 움켜잡았다.안현우는 강하리가 그렇게 스스로 뛰어내릴 줄은 상상도 못 했고 그저 형식적으로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댔을 뿐이었다.강하리가 떨어지는 순간, 그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미친 듯이 웃어댔다.‘그년이 죽었다면 이 짓도 해볼 만했네.’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짓던 바로
그때, 밖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운전석 유리가 산산조각 났고 곧이어 안현우의 손에서 피가 튀더니 비명이 터져 나왔다.제어력을 잃은 차량은 그대로 고가도로 방호벽을 향해 돌진했고 안현우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었다.차량은 그대로 뒤집혀 강하리는 정신이 아득해지며 머릿속이 핑 돌았다.곧이어 안현우가 그녀를 강제로 차 밖으로 끌어내 칼을 목에 들이댔다.피범벅이 된 채 절뚝이며 강하리를 끌고 고가도로 난간 쪽으로 향했다.차에서 내린 구승훈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 옷조차 제대로 걸치지 못한 강하리의 모습을 목격했다.그녀는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이 고가도로는 누군가가 일부러 막아둔 듯 넓은 도로 위엔 몇 대의 차량만이 멈춰 있었고 주변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구승훈은 여전히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맹렬한 바람이 불었지만 그 바람조차도 오히려 그를 더 차갑고 냉정하게 보이게 했다.강하리는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졌다.구승훈은 그녀와 평생 함께 걸어왔던 남자였다.그녀가 오랫동안 밤낮으로 생각해 오며 미워하면서도 지우지 못했던 남자였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강하리는 문득 깨달았다. 어떤 사람은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것을.“풀어줘.”차가운 날씨처럼 냉정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강하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그 짧은 시선 속에서 구승훈의 가슴은 이유 모를 답답함으로 무거워졌다.착각일까?그녀의 눈에서 아무런 빛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하리야...”남자의 목소리는 쉰 듯 메마르게 그녀를 불렀지만 강하리는 그를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안현우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구승훈, 우리 게임 한 번 해볼까?”그가 말을 마치자 맞은편 도로에 차량이 멈춰 섰다.곧이어 한 남자가 임희주를 끌고 나타나 고가도로 반대편에 섰다.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그는 고개를 돌려 구승재를 향해 물었다.“노진우한테서 답장 왔어?”구승재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
강하리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어떤 여자와 부딪쳤고 목덜미에 느껴진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그리고 눈을 떴을 때, 온몸은 욱신거렸고 정신은 흐릿했다.손은 꽁꽁 묶여 있었고,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다.얼굴을 돌려보니 자신이 차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게다가 좌석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그 순간, 질주하는 차 안에서 낮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망할 놈,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온 거야? 됐어. 전에 약속한 장소로 가. 내 일 망치기만 해 봐, 죽여버릴 거야.”전화를 끊자마자 강하리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안현우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운전석에서 돌아본 안현우의 눈빛엔 광기와 탐욕이 엉켜 있었다.그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깨어났네?”강하리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앞좌석을 노려보았다.“날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요?”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보다 강하리 씨, 영상 하나 보여줄까요?”그는 휴대폰을 꺼내 재생 버튼을 눌렀다.곧 차 안엔 낯 뜨거운 신음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강하리는 화면을 제대로 보지 않아도 어떤 영상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진짜... 미쳤네요. 지금 당신 완전 변태 같아.”그녀의 조롱 섞인 말에 안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하지만 곧 비웃듯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 영상 끝까지 보고 나면 날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요.”그는 휴대폰을 안전벨트 위에 툭 던졌고 화면은 강하리의 시야에 정확히 들어왔다.그 고통스러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등골을 타고 식은 기운이 흘러내렸다.그때, 휴대폰 화면이 강하리의 눈에 정확히 들어왔다.거의 동시에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덮쳤다.이미 지쳐 있던 몸이 수천 개의 화살에 찔린 듯 깊은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영상 속 인물들은 모두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여자는 최근 구승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창문으로 로프를 던지고 손을 털며 화장실을 빠져나왔다.호텔 뒤편 검은색 세단 뒷좌석에서 안현우는 옆에 누워 있는 강하리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강하리... 날 공격할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살아 있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게 어떤 건지 똑똑히 보여줄게.”그는 천천히 강하리의 턱을 잡아당기고 몸을 숙여 입술을 가까이 댔다.그러나 입을 맞추기 직전에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무슨 일이야!”안현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고 전화기 너머엔 낮고 정제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대표님, 부탁하신 일 완료됐습니다. 제 일도 잊지 마세요.”“걱정하지 마. 안 잊어.”그는 급히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게요. 안 대표님은 이미 들켰을지도 몰라요.”이 말만 남기고 여자는 곧장 전화를 끊었고 안현우의 눈빛이 순간 매섭게 번뜩였다.역시나 누군가가 이미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그는 이를 악물고 재빨리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겨 시동을 걸고는 급히 차도를 달리기 시작했다.같은 시간, 호텔 방 안에서 임명우는 창밖을 바라보며 잔을 가볍게 기울이고 있었다.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와.”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작전 완료됐습니다. 안현우를 도와 여자를 빼냈고 구승재에게도 신호를 보냈습니다.”임명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모든 게 그의 예상대로였다.“다음은 어떻게 할까요?”여자가 참지 못하고 묻자 임명우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웃었다.“이제 우리가 영웅처럼 구출하러 가볼까? 그러면 강하리도 나에 대한 태도가 좀 달라지려나?”여자는 잠시 말을 잃었고 임명우는 가볍게 웃으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막 튀어나온 안현우의 차 앞으로 반대편에서 한 차량이 돌진해 왔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안현우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틀어 피했다.하지만 그 차는 마치 그의 반
조시욱은 재빨리 창문 쪽으로 달려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그는 유령처럼 가볍게 벽을 타고 옆에 있는 하얀 배수관에 매달렸다.뒤이어 준봉도 주저 없이 따라 올라갔고 두 사람은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노진우는 곧장 비상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달렸다.조시욱은 몇 번의 손짓 만으로 옥상에 도착했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그 어디에도 강하리는 없었다.준봉은 손목을 돌려 풀며 배수관을 타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는 정확히 여자 화장실이 있는 층에 도착해 창문 유리를 발로 깨뜨리고 창틀을 잡아 몸을 안으로 던졌다.여자 화장실 안에서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비명이 터졌고 겁에 질린 여자들이 구석으로 몰려들어 준봉을 경계하며 바라보았다.그는 화장실 안을 빠르게 훑은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혹시, 빨간 드레스를 입고 유난히 예쁜 여자 보신 분 있나요?”여자들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고 준봉은 하나씩 칸막이 문을 두드렸다.두 칸에선 사람이 있었지만 그 안의 목소리는 강하리가 아니었다.여자 화장실이라는 특성상 더 강하게 문을 부술 수도 없었기에 그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히 사과하고 조용히 돌아섰다.그때, 남자 화장실 쪽에서 조시욱이 나왔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쳤고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얼굴엔 무겁고 침착한 긴장감이 깔려 있었다.강하리는 아마도 위층 화장실에서 누군가에게 끌려간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위로 올라갔거나 아래로 끌려갔을 것이다.하지만 위에도 아래에도 그녀는 없었고 준봉은 휴대폰을 꺼내 급히 노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없어.”노진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CCTV 확인하고 있어.”조시욱은 통화를 마친 뒤, 준봉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대표님한테 연락하세요. 호텔 전체는 이미 봉쇄했으니까 인원 투입해서 바로 수색 들어가라고 전해요.”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구승훈의 휴대폰은 연결되지 않았다.그는 곧장 구승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했고 둘은 함께
강하리는 심호흡을 한 뒤 무언가 말하려 하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조시욱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하리야, 무슨 일 있어?”그는 곧장 준봉과 노진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무슨 일 있었어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화장실 좀 다녀오려던 참이었어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뒤돌아서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갔고 그 뒤를 따라 준봉과 노진우, 그리고 조시욱까지 함께 움직였다.복도 중간에 이르자, 준봉과 노진우가 거의 동시에 조시욱 앞을 막아섰다.“죄송합니다. 사모님께서 화장실로 가는 길이라 더 이상 따라오시면 곤란합니다.”조시욱은 잠시 입꼬리를 올리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하리의 안전을 위해 따라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선 넘는 행동을 할 일은 절대 없으니까요.”조시욱은 강인한 인상의 얼굴에 단단한 신념이 서려 있었다.그는 분명 정중했지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준봉과 노진우 역시 완강했다. 두 사람 모두 단단히 길을 막고 그를 절대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조시욱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뭐가 그렇게 걱정돼서 그래요? 제가 당신들 대표님 여자를 빼앗기라도 할까 봐 그래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빼앗지 못해요.”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무겁고도 담담했다.그녀가 아직도 전 남편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걸 조시욱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그래서 그는 빼앗을 수 없었고 빼앗을 생각도 없었다.만약 강하리가 그 사람과 다시 잘 된다면 그는 오히려 기꺼이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어차피, 아이가 있는 부부라면 가장 좋은 건 함께 있는 것이니까.하지만 지금은 그저 친구로서 그녀의 안전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셋은 복도에서 잠시 팽팽하게 대치했고 그사이 강하리는 이미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조시욱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곧장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고 준봉과 노진우도 서둘러 그 뒤를 따라붙었다.사람들이
강하리는 주해찬과 구승훈이 나중에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지 못했지만 구승훈이 떠날 때 얼굴에 떠오른 그 기분 나쁜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이유는 모르지만 가슴속 어딘가에서 불안감이 조용히 피어올랐다.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고 돌아섰고 그때 주해찬이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다들 인사했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했어요.”주해찬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이끌어 테이블에 앉혔다.동창회장은 한껏 활기찬 분위기였고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웃음소리로 가득했다.지금 강하리는 신분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유엔 산하 번역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가 되었고 덕분에 번역학과 출신들은 그녀에게 다가와 인맥을 쌓으려 애썼다.게다가 그녀가 아직 싱글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결혼하지 않은 이들은 슬쩍 다른 기대도 품기 시작했다.식사 자리에서 강하리는 유난히 술을 많이 마셨고 주해찬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시선이 어딘가 다른 데로 가 있는 듯한 걸 놓치지 않았다.“무슨 생각해?”주해찬이 물었고 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표정을 숨겼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줄게.”주해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강하리는 그의 어깨를 조용히 눌렀다.“선배,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그 말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하지만 주해찬은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싫다면 조시욱한테 연락할게. 그 친구가 경호 기술이 뛰어나거든. 같이 다니면...”“선배.”강하리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고마워요.”강하리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말했다.“제가 새로 시작할 수 있게 챙겨줘서 정말 고마워요. 선배 마음, 저도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괜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주해찬은 어이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구승훈이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강하리는 입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