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구승훈의 뜻은 명확했다. 만약 그녀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그는 절대 말리지 않을 것이다.‘이제는 내가 떠나도 상관없구나.’강하리는 안현우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단호한 말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이제는 변할 때가 되었다. 배 속에 아이도 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이용해 구승훈을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는 애초부터 게임일 뿐이었으니, 책임을 운운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승훈은 그녀가 협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이번에 생긴 아이는 병원에 가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처음이 있으면 다음도 있기 마련이기에 문제였다.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구승훈은 평소에 꽤 신중하게 피임했다. 번마다 꼭 콘돔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하도 거칠게 한 탓에 콘돔이 찢어진 적이 있었다. 비록 제때 피임약을 먹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지킬 수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도 소중한 청춘과 건강을 이렇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정서원의 병원비라면 이미 꽤 모였다. 구승훈의 냉정함에도 실망할 대로 실망했다.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결심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더욱 명확해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되물었다.“저 진짜 떠나도 돼요?”“그렇게 묻는다는 건 너도 안 대표의 제안에 관심 있다는 건가?”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강하리는 피식 웃으면서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했다.“안 대표님의 조건을 들어보고 생각해 볼 의향은 있어요.”쨍그랑!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술잔은 구승훈의 다리에 걸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룸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휩싸였다.구승훈의
겁먹은 여자는 이제야 슬슬 뒤로 물러났다.“죄, 죄송합니다.”여자가 떠난 다음 룸에 있던 다른 여자들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구승재는 조금 전 장난이 지나쳤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예전에 같은 장난을 쳤을 때 강하리가 하도 잘 받아줘서 방심한 탓이었다.예전의 그녀는 떠나기는커녕 SH그룹에 뼈까지 묻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달라져 있었다.“형, 강 부장을 다시 데려와서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는 게 낫지 않아? 강 부장 일 잘하잖아. 갑자기 사직한다는 게 말이 돼? 오늘도 야근한 모양인데, 너무 피곤해서 말이 헛나왔을 거야.”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회사에 부장 자리 하나 대신할 사람이 없을까 봐? 간다는 사람을 잡아서 뭐 하게.”안현우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쯤이면 그도 구승훈과 강하리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냈다.“저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어요. 구 대표님 직원을 제가 어떻게 함부로 데려가겠어요.”안현우의 말에도 구승훈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래,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릴 어리석은 인간은 없겠지. 하지만 그 여자 마음이 떠난걸, 남이 뭐 어쩌겠어?’... 클럽에서 나간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3년 전, 정서원이 입원한 후로 처음 돌아가는 것이었다.그녀의 계부 강찬수는 성격이 더러운 데다가 술까지 좋아했다. 그래서 쩍하면 모녀에게 손을 대고는 했다.그녀는 수도 없이 정서원을 설득해서 두 사람을 이혼시키려고 했었다. 하지만 마음이 약한 정서원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만취 상태인 강찬수를 데리러 간 어느 날 밤 길가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정서원이 입원한 다음 강찬수는 술을 점점 더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대부분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온다고 해도 제정신인 적이 없었다.강하리는 오늘 밤도 집이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도착해보니, 그가 집에 있었을 뿐
욕을 내뱉자 손연지는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그제야 가장 중요한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애는 지울 거지? 내일 검사 끝나고 바로 시술 예약해 줘?”강하리는 아랫배를 만지작대다가 욱신대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고 짧게 대답했다.“응.”대답을 마친 동시에 눈물 한 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환영받지 못한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그녀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평범한 여자이다. 아이는 태어나봤자 평생 아빠 없이 손가락질만 받고 살 것이다. 그리고 구승훈은 아이에게 마땅한 명분도,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사랑, 결혼, 아이... 구승훈에게서는 절대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강하리는 눈을 꼭 감더니 눈물을 단호하게 닦아냈다....저녁에 강하리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어느 순간,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어린 시절 강하리는 어머니 정서원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보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강가의 어촌 마을이었다. 그 자그마한 마을은 그녀가 구승훈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어린 구승훈은 지금처럼 음침하지 않았다. 태생부터 잘생겼던 그는 마치 곱게 빚은 도자기 인형과 같았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한적한 마을에서 요양 중이었다.요양 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는지 그는 강가에서 혼자 눈물을 훔치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강하리는 그를 발견할 때마다 사탕 한 알을 들고 가서 위로해 주곤 했다.처음에 그는 강하리를 보는 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친해진 다음에는 종종 대문 앞에 찾아와서 “하양아!”하고 큰 소리로 불러주고는 했다.얼마 후 그의 병이 다 나았는지 한 무리의 사람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는 무조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강하리와 약속을 나눴다.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10년 후의 재회는 거의 사고와 마찬가지였다. 강하
강하리는 당연히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차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걸어오면서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제까지 성가시게 굴래?”강하리의 앞에 멈춰 선 구승훈은 차갑고도 오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제가 언제 성가시게 굴었다는 거죠?”“그럼 진짜 안 대표를 따라가겠다는 건가? 둘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지?”“오해하셨어요. 이번에는 제가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거지,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이유는?”강하리는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결혼하고 싶어서요.”“정말이야?”“그럼요, 저도 이제 27살이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눈동자에는 위험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결혼할 상대는 있고?”“...아뇨. 하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마당에 그게 그렇게 중요하나요?”“돈은?”구승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질문에 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애초에 그녀는 돈을 위해 구승훈과 만난 것이었다. 이는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구승훈은 번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약점을 건드렸다.젖 먹던 힘까지 짜내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른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대답했다.“돈과 결혼 중에서, 저는 결혼을 선택하기로 했어요.”“그러면... 나는?”“의미 없는 질문이네요. 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요. 대표님이 그걸 해줄 수 있겠어요?”강하리는 구승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속으로는 혹시라도 그가 머리를 끄덕여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냥 성의 없는 대답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 평생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그에게만 묶여서 살 것이다.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차가워지는 안색이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는 뒤로 두 발짝 물러서더니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대답했다.“난 네가
병원에서 나온 다음 강하리의 핸드폰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자 안예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보스 아버님이 또 회사에 왔어요! 빨리 와보세요! 대표님한테 들키면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강하리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부랴부랴 회사로 향하기 시작했다.SH그룹의 로비에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강찬수가 한눈에 보였다.“담배 꺼요, 당장.”강하리는 새파란 안색으로 말했다. 그러자 강찬수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래, 딸이 하는 말은 들어야지.”“나가서 얘기해요.”강하리는 그를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회사 근처의 카페로 데리고 갔다.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강찬수는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말했다.“우리 딸 출세했네. 이렇게 고급스러운 곳에도 들어올 수 있고 말이야!”“왜 또 왔어요? 이젠 구 대표님이 무섭지도 않은 거예요?”“하! 내가 내 딸을 보러 온다는데, 그 자식이 무슨 자격으로 간섭해?”“더 크게 말해요. 그러면 알 수 있겠네요, 대표님이 간섭할지 안 할지. 대표님 앞에서는 정신병자라고 해도 다르지 않아요.”정서원은 강찬수가 지나가는 차도에 밀치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강하리는 줄곧 그를 감옥에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심신미약으로 법률의 구멍을 파고들었다.강찬수가 얼마나 더러운 사람인지 강하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반대로 강하리가 한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강찬수는 약간 멈칫하다가 본론을 꺼냈다.“돈 줘. 돈만 주면 다시는 안 올게!”“돈 없어요.”강하리는 단칼에 거절했다. 요즘 도박에 빠진 강찬수는 하루가 멀다 하게 돈 달라는 말을 한다.강하리도 그냥 안 주는 것이 아닌, 진짜 돈이 없어서 못 주는 것이었다. 그녀의 돈은 정서원의 병원비에 전부 들어갔다.“구라치지 마! 이런 데서 일하면서 돈 없다는 게 말이 돼?!”강찬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은 힐끗힐끗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
강하리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아마도 18살 되던 해부터일 것이다. 강찬수는 시도 때도 없이 다가와서 그녀의 몸을 지분거렸다. 정서원과 수도 없이 싸우면서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녀는 대학에 붙으면서 집을 떠난 다음에야 강찬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물론 이는 절대 구승훈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짧게 대답했다.“아뇨.”“이런 일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구승훈은 여전히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이런 일’이란 다름 아닌 강찬수가 회사에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는 일을 가리켰다.“다음은 없을 거예요. 저 사직하기로 했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었다.“홧김에 한 말이 아닌가 보네.”“네.”“하하... 그래, 그럼 나도 시간을 뺏지 않을게.”구승훈의 웃음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그런데도 강하리는 영혼 없이 대답하기만 했다.“네.”마지막으로 강하리를 힐끗 본 구승훈은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의 곁에는 함께 온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도발적이고 비웃음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구승훈이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낸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옷보다도 여자를 더 빨리 바꾸는 사람이 구승훈이었다.구승훈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면서도 그녀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랫배를 쓰다듬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가슴은 자꾸만 욱신거렸다.‘괜찮아, 난 이제 떠날 거니까. 떠나면 분명히 잊을 수 있을 거야.’회사 정문에 도착한 그녀는 심호흡하면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번에는 또 누가 퍼뜨렸는지, 회사 단톡방에는 벌써 그녀가 사직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강하리가 용감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구승훈이 냉정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주제를 모른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강하리는 단톡방을 힐끗 보기만 하고 나왔다. 회사 단톡방은 언제나 이 모양이다. 그저 오늘은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그리고 마침 안에서 나오던 강찬수와 마주쳤다.“아이고, 우리 딸이 또 엄마 만나러 왔나 보네.”“도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이를 악물었는데도 강찬수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몇 번을 말해. 나는 돈을 원한다고.”“당신 조만간 죗값을 치르게 될 거예요.”“너희 모녀를 만난 게 내 죗값을 치르는 거야.”말을 마친 강찬수는 강하리를 팍 밀치고 멀어져갔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그녀는 분노에 잠겨서 손을 벌벌 떨었다. 하필이면 이때 배가 아프기 시작해서 그녀는 곧바로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 갑자기 흥분해서 그럴 거야. 어디 조용한 데 앉아서 기분을 진정시켜. 그래도 계속 아프면 병원에 한 번 와봐.”전화를 끊고 난 강하리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라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 보려고 말이다.다행히 손연지의 말대로 하자 통증은 금방 가셨다. 배가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확신이 생긴 다음에야 그녀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강하리는 입원 병동 안으로 들어가서 정서원을 살폈다. 그리고 간병인에게 부탁을 하고 또 했다.“만약 강찬수가 다시 오면 꼭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간병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병원에서 떠난 다음 강하리는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사직서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딱히 낼 기분이 아니었다. 사직서를 서랍 안에 넣은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같은 시각, 강하리가 전화 온 것을 발견한 구승재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강 부장? 나한텐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저... 혹시 돈 좀 빌릴 수 있을까요?”구승훈의 사무실에 앉아 있던 구승재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그는 사람을 잡아두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천하의 강하리가 돈을 빌려달라면서 전화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승재는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미안한데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강 부장 일 때문에 형이 내 카드를
구승훈이 음침한 눈길로 말했다.“강 부장 그럼 최대한 빨리 진행해. 새로운 부장의 임명을 지체하지 말고.”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기획안을 구승훈 앞에 내려놓았다.“이건 신제품 기획안이에요. 대표님께서 더 보충할 거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구승훈은 더 말 없이 곧장 기획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그는 업무에 대해서 늘 진지한 태도였다. 아니, 까다롭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강하리에게 나가 보란 말을 안 했기에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그가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기획안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고 고작 열몇 페이지였다.하지만 구승훈은 무려 한 시간 남짓 확인했다.조목마다 빠짐없이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서명하고 강하리에게 돌려줬다.강하리는 기획안을 손에 넣고 잠시 머뭇거렸다.“또 용건 있어?”구승훈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봤다.강하리는 2초 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아니요, 없습니다.”“그래, 나갈 때 문 잘 잠가.”말을 마친 구승훈은 머리를 푹 숙이고 다른 업무를 처리했다.강하리는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방금 그녀는 하마터면 구승훈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할 뻔했다.아마도 진짜 강찬수 때문에 궁지에 몰린 듯싶다.이 남자가 돈을 빌려줄 리 있을까?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퇴근 후 그녀는 곧바로 그해 엄마의 소송을 도와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고 그녀는 상대에게 상황을 쭉 설명했다.“임 변호사님, 이런 상황은 공갈 협박죄에 해당하나요?”임정원이 잠시 침묵한 후 대답했다.“아직은 공갈 협박으로 고소할 수 없어요. 상대가 법률상에서 친아버지이고 하리 씨는 실질적인 부양 의무를 지니고 있어요. 만약 상대가 이걸 단지 부양비라고 고집한다면 하리 씨는 거의 승산이 없어요. 기껏해야 상대를 비판하고 교육하는 것뿐인데 나중에 다시 찾아와 보복할까 봐 걱정이네요.”강하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하리 씨 어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구승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가 겨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하리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소중한 보물이다.이미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그녀였기에 더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도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저 그녀가 밝게만 지내길 바랐다. 여초연도, 구동근도, 자신의 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자기야,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조금만 더 시간을 줘서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때 모든 걸 이 여자에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알았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은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속상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구승훈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이 점점 더 씁쓸해졌다.여초연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여초연의 인생을 망쳤으니 본인도 똑같게 망가뜨리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하지만 구승훈은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이대로 그녀의 손에 망가질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그를 낳은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시선을 내린 구승훈이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치료하는 데 협조할게.]노민준은 곧장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의 무기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잘 생각했어.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노민준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웬일로 구승훈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끊기 전 노민준이 갑자기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구승훈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힘들게 얻은 지금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겠지.”전화를 끊고 구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어도 기꺼이 노력해 보고 싶었다.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강하리의 말에 심문석은 한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번졌고 벌써 결혼식 장소까지 고심하고 있었다.“너희 둘이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땐 할아버지가 키우마.”강하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꾸하며 넘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구승훈을 보며 강하리가 물었다.“여기 안 있을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보내기 싫어?”입술을 달싹이며 빤히 상대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줄곧 그가 회피하던 답을 찾으려는 듯했다.비록 구승훈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빠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고 관계를 갖지 않아도 늘 그녀를 탐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요 며칠 그녀가 약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만 능글맞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연정이가 같이 가도 돼?”멈칫한 구승훈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더 원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응.”구승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강하리의 말이 다시 들렸다.“방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좀 무서워. 구승훈, 여기 남던지 내가 따라갈게.”강하리가 말을 마치며 허리를 감싸자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이걸 어떻게 거절하나.구승훈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가 이곳에 머물자 백아영은 연정이를 자신의 방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구승훈이 나가서 노민준에게 연락하고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샤워를 끝낸 뒤였다.얇은 잠옷만 입고 있는 몸에는 구승훈이 새긴 흔적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몸이 견딜 수 있겠어?”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화장대 거울로 가서
구승훈은 걸음을 멈칫하며 뒤돌아 밖을 내다보았다.밖에서는 여전히 이정숙이 진시연의 눈물을 닦아주며 화가 잔뜩 난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승훈은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그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가상의 번호로 전송된 사진은 다름 아닌 강하리와 주해찬이 방에서 포옹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사진 한 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걸었다.“나문빈 씨, 가상 번호 위치 좀 확인해 줘요.”나문빈은 혀를 찼다.“둘이 날 노예처럼 부려 먹기로 작정한 겁니까?”얼마 전 임명우와의 계약 때문에 화가 난 강하리는 그를 남미로 발령 보내 시장 개척에 앞장서도록 했고 며칠 동안 그는 바빠서 피를 토할 지경인데 이젠 구승훈까지 못살게 굴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아내를 화나게 했습니까?”나문빈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임명우가 특별히 강하리와 만나야한다는 조건을 걸었으니 분명 딴마음이 있다는 건데 이걸 구승훈이 알게 되면 그에게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흠, 그 번호 보내요. 이런 작은 일은 구 대표님께서 직접 연락할 필요 없이 앞으로 비서 통해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그렇게 말한 뒤 나문빈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나문빈과의 통화를 마친 뒤 고개를 들어 진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마침 고개를 돌린 진시연의 두 눈엔 억울함이 가득 차 있었고 구승훈의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진시연이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얼굴에 남아있던 서글픈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누구나 소유욕이 있다.특히 구승훈 같은 남자는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껴안고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지금은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 일은 그의 마음속 가시로 박히게 될 것이고 진시연은 이 가시가 뿌리를 내리고 썩기만을 기다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씨 가문 생일 잔치에서 벌어진 소동은 B시 전역에 퍼졌다.심씨 가문 사람들도 자연
“여사님, 못 때린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아니면 지금쯤 구급차 부르셔야 했을 거예요. 제 주먹 맛보고 싶지는 않으시겠죠?”이정숙은 너무 화가 나서 눈이 뒤집혔다.“구승훈, 언제부터 네가 우리 진씨 가문 일에 참견했어?”구승훈은 혀를 차며 강하리의 손을 잡아당겨 이정숙 앞에 내밀었다.“보셨죠? 결혼반지. 강하리는 이제부터 제 약혼녀입니다.”구승훈의 말에 이정숙이 당황했고 옆에 있던 진시연은 우는 것도 잊은 채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이정숙은 구승훈에게 말이 통하지 않자 다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강하리, 난 네 할머니야!”강하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나한테 약이나 먹이는 할머니 따위 둔 적 없어요.”이정숙은 깜짝 놀라며 진시연을 흘끗 쳐다보았고 진시연이 달려와서 이정숙의 앞을 막았다.“하리 씨, 어떻게 할머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강하리가 비웃었다.“진시연 씨 대신 죄도 뒤집어쓰는데 나는 말도 한 마디 못 하나요?”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하리 씨, 지금 나 의심하는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피식 웃었다.“아빠도 날 의심하고 하리 씨도 날 의심하네요. 두 사람은 진짜 부녀 사이고 전 그저 사랑하고 돌봐줄 사람이 없는 고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냥 나를 진씨 가문에서 쫓아내고 싶은 거죠? 내가 나갈게요.”이정숙은 그 말에 서둘러 진시연을 껴안았다.“시연아, 그런 말 하지 마.”강하리는 눈꼴신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을 지나쳐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누구든 가만 안 둬요.”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시연을 돌아보았다.“그리고 진시연 씨, 앞으로 내 남자한테서 떨어져요. 매번 남의 약혼자한테 들러붙는데 내연녀라도 되고 싶은 거예요?”진시연의 얼굴이 창백했다.“하리 씨, 아니에요. 난 그저 F대륙에서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낸 사람이라 구승훈 씨한테 고마울 뿐이에요. 하리 씨는 이 정도 일도 이해 못 해주는 건가요?”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미안한데 난
경찰서에서 나온 강하리는 구승훈이 차 옆에 서서 통화하는 모습을 보았다.남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고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강하리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원래는 구승훈이 통화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가가려고 했는데 구승훈은 그녀의 시선을 감지한 듯 발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았다.남자의 몸에서 느껴지던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녹아내리는 듯했고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그는 상대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 전화를 끊은 뒤 이쪽으로 걸어왔다.“어떻게 됐어?”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남자의 질문에 입가에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별것 없었어. 일단 돌아가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직도 마음이 불편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정말 괜찮았다.이젠 더 이상 주해찬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이 사건 이후로 그에게 빚진 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사실 이건 좋은 일이었다.적어도 더 이상 구승훈에게 미안할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구승훈이 손가락으로 살며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그럼 앞으로 다른 남자 생각 그만해. 네 남편 질투해.”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앞으로 다른 여자 좀 그만 끌어들일래?”구승훈은 살짝 멈칫하다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질투해?”강하리는 손을 내밀어 문을 열고 차에 탔다.구승훈은 시선을 내린 채 웃다가 휴대폰의 통화 기록을 흘끗 훑어보고는 노민준의 이름을 삭제한 뒤 강하리를 따라 차에 탔다.그대로 차를 몰고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는데 들어가기 직전 누군가에 의해 앞이 가로막혔다.화려한 옷을 갈아입지 않은 이정숙이 굳어진 얼굴과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심씨 가문 입구에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진시연이 있었다.진시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이정숙은 눈물을 계속 닦아주었다.두 사람을 본 구승훈의 표정도 굳어지며 위로하듯 강하리의 손을 꽉 잡
사실 그동안 주해찬이 달라졌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온화하고 따뜻했던 남자가 근래 왠지 모르게 강압적인 집착을 보였다.구승훈을 좋아하지 말라던 말도, 자기가 낫지 않으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냐고 물었던 것도...다만 강하리는 그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리를 다쳐서 마음이 불안한 것이라고 여겼다.강하리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무슨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피식 웃은 구승훈이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나쁜 놈이란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그렇게 말한 후 그는 강하리를 밖으로 끌어당겼다.“어디 가?”“그 자식 만나러.”강하리가 걸음을 멈칫했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차에 태웠다.“가서 네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봐.”강하리는 심호흡하고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언젠간 주해찬을 만나러 가야 했으니까.가는 길에 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마음이 괴로웠다.고작 주해찬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할 가치가 있는 걸까.차가 경찰서 앞에 멈춰 선 뒤 구승훈이 갑자기 강하리를 끌어당기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이따가 꼭 왼손 보여줘.”“...”주해찬은 강하리만 기다린 것처럼 보였고 강하리는 유치장 문 앞에 서서 낮게 불렀다.“선배.”주해찬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하리야, 그래도 날 보러 와줘서 기쁘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주해찬을 바라보았고 가뜩이나 조용했던 공간에 적막이 감돌았다.문득 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손으로 향했다.구승훈의 말처럼 한심하게 일부러 왼손을 보여주려던 건 아니지만 손가락에 낀 반지는 여전히 주해찬의 눈에 들어왔다.그가 피식 웃었다.“그 사람이랑 결혼해?”강하리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왜 그랬어요?”주해찬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면서도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때 주해찬이 쓴웃음을 지으며 갑자기 입을 열
강하리는 조용히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 다시 물었다.“진심이야?”구승훈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몸을 숙이며 다가갔다.“이런 걸로 농담 안 해.”강하리의 눈은 촉촉했고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좋아.”구승훈은 몸을 숙여 강하리를 껴안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강하리와의 결혼...그가 얼마나 바라온 일인지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머리카락에 입맞춤했다.앞으로도 계속 멀쩡하게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강하리를 놓아줄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주해찬을 껴안고 있는 그녀를 봤을 때 얼마나 주해찬을 죽이고 싶었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자신이 죽더라도 다른 남자가 강하리를 건드리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그렇다면 차라리 함께 손을 잡고 헤쳐 나가리라.결과가 좋든 나쁘든 적어도 곁에 강하리가 있으니까.다다를 그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다시는 이 손 놓지 않을 거다.강하리와 구승훈이 위층에서 내려왔을 때 구승재는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다가 두 사람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휴대폰을 치웠다.“형, 하리 씨, 괜찮아요?”구승재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이내 자신의 걱정이 기우라는 것을 알았다.형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고 강하리의 희고 깨끗한 얼굴은 어렴풋이 홍조를 띠고 있었다.이런, 또 애정행각을 봐버렸다.“아직도 안 갔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고 구승재를 바라보았다.“... 알았어, 갈게.”떠나기 직전, 그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돌아봤다.“저기 하리 씨, 앞으로 계속 형수님이라고 불러도 돼요?”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세요.”구승재는 기쁜 마음으로 불렀다.“네, 형수님.”그러고는 힘찬 발걸음으로 떠나자 구승훈이 옆에서 혀를 찼다.“왜 나보다 쟤가 더 기뻐하는 것 같지?”강하리가 그를 흘겨봤다.“원래도 승재 씨가 당신보다 나한테 더 잘해줬어.”구승훈은 여자를
진태형은 뒤에 있는 저택을 돌아보았다.“내가 알아낼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하리 잘 부탁해.”눈을 뜬 강하리는 아직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몸을 살짝만 움직였는데도 곳곳에 불편함이 느껴졌다.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얼굴의 핏기도 사라졌다.일이 벌어지기 전의 상황이 머릿속에 번뜩이자 이불을 걷어 올린 강하리는 자기 몸의 흔적을 내려다보며 이불을 꽉 움켜잡았다.지금 자신이 구승훈의 저택에 있다는 건 알지만 누가 자기 몸에 흔적을 남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찢어질 것 같은 통증에 다시 주저앉았다.마음속 불안감은 점점 더 커졌다.설마 구승훈이 그녀를 이렇게 다치게 했을까.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이불을 걷어내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무심코 옷 한 벌을 몸에 걸친 뒤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구승훈이 막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창백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는 강하리가 보였다.“일어났어?” 웃음기 섞인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강하리는 온몸을 감싸고 있던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응, 일어났어. 어디 갔었어?”구승훈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일이 좀 있어서. 왜, 나 보고 싶었어?”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고 불안했던 마음을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물었다.“구승훈, 당신 짓이야?”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약에 취한 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괜스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기억하지 못해서 다행이었다.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발그레해진 눈가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내가 아니면 누구이길 바라는데?”강하리는 그의 어깨를 잡더니 갑자기 그의 턱을 콱 깨물었다.“미친 거야? 너무 아프잖아!”구승훈의 몸이 굳어졌다가 이윽고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널 안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많이 아파? 가자, 내가 확인해 볼게.”강하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줄곧 거실에 있던 구승재가 헛기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