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먹은 여자는 이제야 슬슬 뒤로 물러났다.“죄, 죄송합니다.”여자가 떠난 다음 룸에 있던 다른 여자들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구승재는 조금 전 장난이 지나쳤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예전에 같은 장난을 쳤을 때 강하리가 하도 잘 받아줘서 방심한 탓이었다.예전의 그녀는 떠나기는커녕 SH그룹에 뼈까지 묻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달라져 있었다.“형, 강 부장을 다시 데려와서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는 게 낫지 않아? 강 부장 일 잘하잖아. 갑자기 사직한다는 게 말이 돼? 오늘도 야근한 모양인데, 너무 피곤해서 말이 헛나왔을 거야.”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회사에 부장 자리 하나 대신할 사람이 없을까 봐? 간다는 사람을 잡아서 뭐 하게.”안현우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쯤이면 그도 구승훈과 강하리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냈다.“저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어요. 구 대표님 직원을 제가 어떻게 함부로 데려가겠어요.”안현우의 말에도 구승훈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래,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릴 어리석은 인간은 없겠지. 하지만 그 여자 마음이 떠난걸, 남이 뭐 어쩌겠어?’... 클럽에서 나간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3년 전, 정서원이 입원한 후로 처음 돌아가는 것이었다.그녀의 계부 강찬수는 성격이 더러운 데다가 술까지 좋아했다. 그래서 쩍하면 모녀에게 손을 대고는 했다.그녀는 수도 없이 정서원을 설득해서 두 사람을 이혼시키려고 했었다. 하지만 마음이 약한 정서원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만취 상태인 강찬수를 데리러 간 어느 날 밤 길가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정서원이 입원한 다음 강찬수는 술을 점점 더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대부분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온다고 해도 제정신인 적이 없었다.강하리는 오늘 밤도 집이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도착해보니, 그가 집에 있었을 뿐
욕을 내뱉자 손연지는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그제야 가장 중요한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애는 지울 거지? 내일 검사 끝나고 바로 시술 예약해 줘?”강하리는 아랫배를 만지작대다가 욱신대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고 짧게 대답했다.“응.”대답을 마친 동시에 눈물 한 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환영받지 못한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그녀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평범한 여자이다. 아이는 태어나봤자 평생 아빠 없이 손가락질만 받고 살 것이다. 그리고 구승훈은 아이에게 마땅한 명분도,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사랑, 결혼, 아이... 구승훈에게서는 절대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강하리는 눈을 꼭 감더니 눈물을 단호하게 닦아냈다....저녁에 강하리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어느 순간,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어린 시절 강하리는 어머니 정서원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보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강가의 어촌 마을이었다. 그 자그마한 마을은 그녀가 구승훈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어린 구승훈은 지금처럼 음침하지 않았다. 태생부터 잘생겼던 그는 마치 곱게 빚은 도자기 인형과 같았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한적한 마을에서 요양 중이었다.요양 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는지 그는 강가에서 혼자 눈물을 훔치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강하리는 그를 발견할 때마다 사탕 한 알을 들고 가서 위로해 주곤 했다.처음에 그는 강하리를 보는 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친해진 다음에는 종종 대문 앞에 찾아와서 “하양아!”하고 큰 소리로 불러주고는 했다.얼마 후 그의 병이 다 나았는지 한 무리의 사람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는 무조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강하리와 약속을 나눴다.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10년 후의 재회는 거의 사고와 마찬가지였다. 강하
강하리는 당연히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차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걸어오면서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제까지 성가시게 굴래?”강하리의 앞에 멈춰 선 구승훈은 차갑고도 오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제가 언제 성가시게 굴었다는 거죠?”“그럼 진짜 안 대표를 따라가겠다는 건가? 둘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지?”“오해하셨어요. 이번에는 제가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거지,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이유는?”강하리는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결혼하고 싶어서요.”“정말이야?”“그럼요, 저도 이제 27살이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눈동자에는 위험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결혼할 상대는 있고?”“...아뇨. 하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마당에 그게 그렇게 중요하나요?”“돈은?”구승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질문에 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애초에 그녀는 돈을 위해 구승훈과 만난 것이었다. 이는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구승훈은 번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약점을 건드렸다.젖 먹던 힘까지 짜내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른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대답했다.“돈과 결혼 중에서, 저는 결혼을 선택하기로 했어요.”“그러면... 나는?”“의미 없는 질문이네요. 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요. 대표님이 그걸 해줄 수 있겠어요?”강하리는 구승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속으로는 혹시라도 그가 머리를 끄덕여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냥 성의 없는 대답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 평생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그에게만 묶여서 살 것이다.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차가워지는 안색이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는 뒤로 두 발짝 물러서더니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대답했다.“난 네가
병원에서 나온 다음 강하리의 핸드폰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자 안예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보스 아버님이 또 회사에 왔어요! 빨리 와보세요! 대표님한테 들키면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강하리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부랴부랴 회사로 향하기 시작했다.SH그룹의 로비에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강찬수가 한눈에 보였다.“담배 꺼요, 당장.”강하리는 새파란 안색으로 말했다. 그러자 강찬수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래, 딸이 하는 말은 들어야지.”“나가서 얘기해요.”강하리는 그를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회사 근처의 카페로 데리고 갔다.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강찬수는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말했다.“우리 딸 출세했네. 이렇게 고급스러운 곳에도 들어올 수 있고 말이야!”“왜 또 왔어요? 이젠 구 대표님이 무섭지도 않은 거예요?”“하! 내가 내 딸을 보러 온다는데, 그 자식이 무슨 자격으로 간섭해?”“더 크게 말해요. 그러면 알 수 있겠네요, 대표님이 간섭할지 안 할지. 대표님 앞에서는 정신병자라고 해도 다르지 않아요.”정서원은 강찬수가 지나가는 차도에 밀치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강하리는 줄곧 그를 감옥에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심신미약으로 법률의 구멍을 파고들었다.강찬수가 얼마나 더러운 사람인지 강하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반대로 강하리가 한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강찬수는 약간 멈칫하다가 본론을 꺼냈다.“돈 줘. 돈만 주면 다시는 안 올게!”“돈 없어요.”강하리는 단칼에 거절했다. 요즘 도박에 빠진 강찬수는 하루가 멀다 하게 돈 달라는 말을 한다.강하리도 그냥 안 주는 것이 아닌, 진짜 돈이 없어서 못 주는 것이었다. 그녀의 돈은 정서원의 병원비에 전부 들어갔다.“구라치지 마! 이런 데서 일하면서 돈 없다는 게 말이 돼?!”강찬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은 힐끗힐끗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
강하리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아마도 18살 되던 해부터일 것이다. 강찬수는 시도 때도 없이 다가와서 그녀의 몸을 지분거렸다. 정서원과 수도 없이 싸우면서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녀는 대학에 붙으면서 집을 떠난 다음에야 강찬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물론 이는 절대 구승훈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짧게 대답했다.“아뇨.”“이런 일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구승훈은 여전히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이런 일’이란 다름 아닌 강찬수가 회사에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는 일을 가리켰다.“다음은 없을 거예요. 저 사직하기로 했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었다.“홧김에 한 말이 아닌가 보네.”“네.”“하하... 그래, 그럼 나도 시간을 뺏지 않을게.”구승훈의 웃음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그런데도 강하리는 영혼 없이 대답하기만 했다.“네.”마지막으로 강하리를 힐끗 본 구승훈은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의 곁에는 함께 온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도발적이고 비웃음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구승훈이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낸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옷보다도 여자를 더 빨리 바꾸는 사람이 구승훈이었다.구승훈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면서도 그녀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랫배를 쓰다듬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가슴은 자꾸만 욱신거렸다.‘괜찮아, 난 이제 떠날 거니까. 떠나면 분명히 잊을 수 있을 거야.’회사 정문에 도착한 그녀는 심호흡하면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번에는 또 누가 퍼뜨렸는지, 회사 단톡방에는 벌써 그녀가 사직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강하리가 용감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구승훈이 냉정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주제를 모른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강하리는 단톡방을 힐끗 보기만 하고 나왔다. 회사 단톡방은 언제나 이 모양이다. 그저 오늘은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그리고 마침 안에서 나오던 강찬수와 마주쳤다.“아이고, 우리 딸이 또 엄마 만나러 왔나 보네.”“도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이를 악물었는데도 강찬수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몇 번을 말해. 나는 돈을 원한다고.”“당신 조만간 죗값을 치르게 될 거예요.”“너희 모녀를 만난 게 내 죗값을 치르는 거야.”말을 마친 강찬수는 강하리를 팍 밀치고 멀어져갔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그녀는 분노에 잠겨서 손을 벌벌 떨었다. 하필이면 이때 배가 아프기 시작해서 그녀는 곧바로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 갑자기 흥분해서 그럴 거야. 어디 조용한 데 앉아서 기분을 진정시켜. 그래도 계속 아프면 병원에 한 번 와봐.”전화를 끊고 난 강하리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라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 보려고 말이다.다행히 손연지의 말대로 하자 통증은 금방 가셨다. 배가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확신이 생긴 다음에야 그녀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강하리는 입원 병동 안으로 들어가서 정서원을 살폈다. 그리고 간병인에게 부탁을 하고 또 했다.“만약 강찬수가 다시 오면 꼭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간병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병원에서 떠난 다음 강하리는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사직서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딱히 낼 기분이 아니었다. 사직서를 서랍 안에 넣은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같은 시각, 강하리가 전화 온 것을 발견한 구승재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강 부장? 나한텐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저... 혹시 돈 좀 빌릴 수 있을까요?”구승훈의 사무실에 앉아 있던 구승재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그는 사람을 잡아두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천하의 강하리가 돈을 빌려달라면서 전화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승재는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미안한데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강 부장 일 때문에 형이 내 카드를
구승훈이 음침한 눈길로 말했다.“강 부장 그럼 최대한 빨리 진행해. 새로운 부장의 임명을 지체하지 말고.”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기획안을 구승훈 앞에 내려놓았다.“이건 신제품 기획안이에요. 대표님께서 더 보충할 거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구승훈은 더 말 없이 곧장 기획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그는 업무에 대해서 늘 진지한 태도였다. 아니, 까다롭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강하리에게 나가 보란 말을 안 했기에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그가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기획안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고 고작 열몇 페이지였다.하지만 구승훈은 무려 한 시간 남짓 확인했다.조목마다 빠짐없이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서명하고 강하리에게 돌려줬다.강하리는 기획안을 손에 넣고 잠시 머뭇거렸다.“또 용건 있어?”구승훈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봤다.강하리는 2초 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아니요, 없습니다.”“그래, 나갈 때 문 잘 잠가.”말을 마친 구승훈은 머리를 푹 숙이고 다른 업무를 처리했다.강하리는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방금 그녀는 하마터면 구승훈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할 뻔했다.아마도 진짜 강찬수 때문에 궁지에 몰린 듯싶다.이 남자가 돈을 빌려줄 리 있을까?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퇴근 후 그녀는 곧바로 그해 엄마의 소송을 도와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고 그녀는 상대에게 상황을 쭉 설명했다.“임 변호사님, 이런 상황은 공갈 협박죄에 해당하나요?”임정원이 잠시 침묵한 후 대답했다.“아직은 공갈 협박으로 고소할 수 없어요. 상대가 법률상에서 친아버지이고 하리 씨는 실질적인 부양 의무를 지니고 있어요. 만약 상대가 이걸 단지 부양비라고 고집한다면 하리 씨는 거의 승산이 없어요. 기껏해야 상대를 비판하고 교육하는 것뿐인데 나중에 다시 찾아와 보복할까 봐 걱정이네요.”강하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하리 씨 어
구승훈은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기분이 꽤 좋아 보였는데 그의 옆엔 어제 커피숍에서 본 그 여자가 앉아 있었다.여자의 치마가 너무 짧아 허벅지가 훤히 비칠 지경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다리를 바짝 들이댄 그녀를 보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한 듯싶었다.그 여자는 강하리가 들어온 순간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다만 구승훈이 옆에 있으니 딱히 내색하진 못했다.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강하리를 쳐다봤다.“강 부장, 용건 있어?”강하리는 그의 옆에 앉은 여자를 힐긋 쳐다봤다.“네.”구승훈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댔다.“퇴사에 관한 일이라면 바로 인사팀 찾아가면 돼.”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퇴사에 관한 일 아니에요.”구승훈이 가볍게 웃었다.“그럼 뭔데? 난 또 강 부장이 날 찾아올 이유가 퇴사밖에 없는 줄 알았지.”강하리는 애써 야유가 담긴 그의 말을 참으며 옆에 앉은 여자를 쳐다봤다.“대표님과 따로 얘기 나누고 싶어요.”구승훈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둘 사이에 따로 나눌 얘기가 더 있을까 심히 의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강하리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녀는 구승훈의 성격을 잘 안다.전에 클럽에서 그의 체면을 짓밟았고 퇴사에 관해서도 그토록 단호한 태도를 선보였으니, 구승훈은 분명 그녀를 호락호락하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그가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나랑 강 부장 사이에 따로 나눌 얘기가 더 있어?”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고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대표님, 저 퇴사하지 않겠습니다.”구승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그래서?”“앞으로의 급여에 대해 대표님과 상의하고 싶습니다.”구승훈이 두 팔을 껴안고 있다가 결국 옆에 앉은 여자에게 말했다.“양 부장, 미안한데 우리 업무는 다음에 다시 얘기해.”양 부장이 분노 어린 눈길로 강하리를 째려봤지만 끝내 활짝 웃으며 구승훈에게 말했다.“네, 대표님. 일단 강 부장님 일부터 처리하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강하리를 힐긋 노려보더니 씩
강하리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어떤 여자와 부딪쳤고 목덜미에 느껴진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그리고 눈을 떴을 때, 온몸은 욱신거렸고 정신은 흐릿했다.손은 꽁꽁 묶여 있었고,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다.얼굴을 돌려보니 자신이 차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게다가 좌석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그 순간, 질주하는 차 안에서 낮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망할 놈,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온 거야? 됐어. 전에 약속한 장소로 가. 내 일 망치기만 해 봐, 죽여버릴 거야.”전화를 끊자마자 강하리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안현우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운전석에서 돌아본 안현우의 눈빛엔 광기와 탐욕이 엉켜 있었다.그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깨어났네?”강하리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앞좌석을 노려보았다.“날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요?”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보다 강하리 씨, 영상 하나 보여줄까요?”그는 휴대폰을 꺼내 재생 버튼을 눌렀다.곧 차 안엔 낯 뜨거운 신음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강하리는 화면을 제대로 보지 않아도 어떤 영상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진짜... 미쳤네요. 지금 당신 완전 변태 같아.”그녀의 조롱 섞인 말에 안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하지만 곧 비웃듯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 영상 끝까지 보고 나면 날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요.”그는 휴대폰을 안전벨트 위에 툭 던졌고 화면은 강하리의 시야에 정확히 들어왔다.그 고통스러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등골을 타고 식은 기운이 흘러내렸다.그때, 휴대폰 화면이 강하리의 눈에 정확히 들어왔다.거의 동시에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덮쳤다.이미 지쳐 있던 몸이 수천 개의 화살에 찔린 듯 깊은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영상 속 인물들은 모두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여자는 최근 구승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창문으로 로프를 던지고 손을 털며 화장실을 빠져나왔다.호텔 뒤편 검은색 세단 뒷좌석에서 안현우는 옆에 누워 있는 강하리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강하리... 날 공격할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살아 있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게 어떤 건지 똑똑히 보여줄게.”그는 천천히 강하리의 턱을 잡아당기고 몸을 숙여 입술을 가까이 댔다.그러나 입을 맞추기 직전에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무슨 일이야!”안현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고 전화기 너머엔 낮고 정제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대표님, 부탁하신 일 완료됐습니다. 제 일도 잊지 마세요.”“걱정하지 마. 안 잊어.”그는 급히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게요. 안 대표님은 이미 들켰을지도 몰라요.”이 말만 남기고 여자는 곧장 전화를 끊었고 안현우의 눈빛이 순간 매섭게 번뜩였다.역시나 누군가가 이미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그는 이를 악물고 재빨리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겨 시동을 걸고는 급히 차도를 달리기 시작했다.같은 시간, 호텔 방 안에서 임명우는 창밖을 바라보며 잔을 가볍게 기울이고 있었다.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와.”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작전 완료됐습니다. 안현우를 도와 여자를 빼냈고 구승재에게도 신호를 보냈습니다.”임명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모든 게 그의 예상대로였다.“다음은 어떻게 할까요?”여자가 참지 못하고 묻자 임명우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웃었다.“이제 우리가 영웅처럼 구출하러 가볼까? 그러면 강하리도 나에 대한 태도가 좀 달라지려나?”여자는 잠시 말을 잃었고 임명우는 가볍게 웃으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막 튀어나온 안현우의 차 앞으로 반대편에서 한 차량이 돌진해 왔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안현우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틀어 피했다.하지만 그 차는 마치 그의 반
조시욱은 재빨리 창문 쪽으로 달려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그는 유령처럼 가볍게 벽을 타고 옆에 있는 하얀 배수관에 매달렸다.뒤이어 준봉도 주저 없이 따라 올라갔고 두 사람은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노진우는 곧장 비상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달렸다.조시욱은 몇 번의 손짓 만으로 옥상에 도착했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그 어디에도 강하리는 없었다.준봉은 손목을 돌려 풀며 배수관을 타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는 정확히 여자 화장실이 있는 층에 도착해 창문 유리를 발로 깨뜨리고 창틀을 잡아 몸을 안으로 던졌다.여자 화장실 안에서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비명이 터졌고 겁에 질린 여자들이 구석으로 몰려들어 준봉을 경계하며 바라보았다.그는 화장실 안을 빠르게 훑은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혹시, 빨간 드레스를 입고 유난히 예쁜 여자 보신 분 있나요?”여자들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고 준봉은 하나씩 칸막이 문을 두드렸다.두 칸에선 사람이 있었지만 그 안의 목소리는 강하리가 아니었다.여자 화장실이라는 특성상 더 강하게 문을 부술 수도 없었기에 그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히 사과하고 조용히 돌아섰다.그때, 남자 화장실 쪽에서 조시욱이 나왔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쳤고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얼굴엔 무겁고 침착한 긴장감이 깔려 있었다.강하리는 아마도 위층 화장실에서 누군가에게 끌려간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위로 올라갔거나 아래로 끌려갔을 것이다.하지만 위에도 아래에도 그녀는 없었고 준봉은 휴대폰을 꺼내 급히 노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없어.”노진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CCTV 확인하고 있어.”조시욱은 통화를 마친 뒤, 준봉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대표님한테 연락하세요. 호텔 전체는 이미 봉쇄했으니까 인원 투입해서 바로 수색 들어가라고 전해요.”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구승훈의 휴대폰은 연결되지 않았다.그는 곧장 구승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했고 둘은 함께
강하리는 심호흡을 한 뒤 무언가 말하려 하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조시욱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하리야, 무슨 일 있어?”그는 곧장 준봉과 노진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무슨 일 있었어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화장실 좀 다녀오려던 참이었어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뒤돌아서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갔고 그 뒤를 따라 준봉과 노진우, 그리고 조시욱까지 함께 움직였다.복도 중간에 이르자, 준봉과 노진우가 거의 동시에 조시욱 앞을 막아섰다.“죄송합니다. 사모님께서 화장실로 가는 길이라 더 이상 따라오시면 곤란합니다.”조시욱은 잠시 입꼬리를 올리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하리의 안전을 위해 따라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선 넘는 행동을 할 일은 절대 없으니까요.”조시욱은 강인한 인상의 얼굴에 단단한 신념이 서려 있었다.그는 분명 정중했지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준봉과 노진우 역시 완강했다. 두 사람 모두 단단히 길을 막고 그를 절대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조시욱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뭐가 그렇게 걱정돼서 그래요? 제가 당신들 대표님 여자를 빼앗기라도 할까 봐 그래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빼앗지 못해요.”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무겁고도 담담했다.그녀가 아직도 전 남편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걸 조시욱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그래서 그는 빼앗을 수 없었고 빼앗을 생각도 없었다.만약 강하리가 그 사람과 다시 잘 된다면 그는 오히려 기꺼이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어차피, 아이가 있는 부부라면 가장 좋은 건 함께 있는 것이니까.하지만 지금은 그저 친구로서 그녀의 안전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셋은 복도에서 잠시 팽팽하게 대치했고 그사이 강하리는 이미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조시욱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곧장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고 준봉과 노진우도 서둘러 그 뒤를 따라붙었다.사람들이
강하리는 주해찬과 구승훈이 나중에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지 못했지만 구승훈이 떠날 때 얼굴에 떠오른 그 기분 나쁜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이유는 모르지만 가슴속 어딘가에서 불안감이 조용히 피어올랐다.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고 돌아섰고 그때 주해찬이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다들 인사했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했어요.”주해찬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이끌어 테이블에 앉혔다.동창회장은 한껏 활기찬 분위기였고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웃음소리로 가득했다.지금 강하리는 신분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유엔 산하 번역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가 되었고 덕분에 번역학과 출신들은 그녀에게 다가와 인맥을 쌓으려 애썼다.게다가 그녀가 아직 싱글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결혼하지 않은 이들은 슬쩍 다른 기대도 품기 시작했다.식사 자리에서 강하리는 유난히 술을 많이 마셨고 주해찬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시선이 어딘가 다른 데로 가 있는 듯한 걸 놓치지 않았다.“무슨 생각해?”주해찬이 물었고 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표정을 숨겼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줄게.”주해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강하리는 그의 어깨를 조용히 눌렀다.“선배,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그 말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하지만 주해찬은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싫다면 조시욱한테 연락할게. 그 친구가 경호 기술이 뛰어나거든. 같이 다니면...”“선배.”강하리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고마워요.”강하리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말했다.“제가 새로 시작할 수 있게 챙겨줘서 정말 고마워요. 선배 마음, 저도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괜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주해찬은 어이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구승훈이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강하리는 입술
비명 사이로 나무 막대기 같은 걸로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곧 임희주의 비명이 끊겼는데 아마 고통에 기절한 모양이었다.잠시 후, 남자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도련님, 와서 이야기 좀 합시다.”구승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목소리,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여초연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 분명했다.“도련님께선 한 시간 안에 오셔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도련님은 이 여자를 다시 보지 못할 겁니다.”구승훈은 갑자기 코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 여자가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지?”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 여자가 죽든 신경 안 쓰시겠죠. 하지만 도련님 본인의 목숨은 신경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태가 약의 마지막 효과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구승훈의 시선이 짙게 가라앉았다.“주소 보내.”전화기 너머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역시 도련님은 똑똑하시네요. 혼자 오셔야 합니다. 신고하면 임희주만 죽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하십시오.”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위치 정보와 함께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사진 속 임희주는 온몸에 피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형, 어떡할 거야?”구승재가 묻자 구승훈은 말없이 위층 홀에 남아 있는 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곤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수님 잘 지켜.”그 말과 함께 그는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돌아섰다.구승재가 재빨리 따라붙으며 물었다.“형, 정말 혼자 갈 거야?”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하지만 그는 갈 수밖에 없었다.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그는 그 불구덩이에 들어가야만 했다.“걱정하지 마. 여초연은 내가 죽는 걸 원치 않아. 이 정도 괴롭힘은 아무것도 아니야.”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준봉도 여기 오라고 해. 그리고 형수님은 잘 부탁한다.”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아래층 연회
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앞에 선 구승훈을 밀어내려 손을 들었지만 그보다 빠르게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이미 가까웠던 거리에서 그의 몸은 더욱 바싹 다가가 붙었다.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모두가 동창들이고 게다가 정안 그룹의 직원들도 꽤 눈에 띄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행동에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강하리는 주변을 의식하며 손을 들어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구승훈, 이런 자리에서까지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그 순간, 구승훈이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고 따뜻한 숨결과 짧은 통증, 그리고 가슴안에 알 수 없는 신맛이 번져갔다.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임희주한테도 이렇게 했어?”그 말에 구승훈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어 가볍게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는 아무 설명도 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현우를 조심해.”그 말을 남기고 그는 그녀의 귓불을 한번 부드럽게 문지른 뒤 돌아섰다.강하리는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곧이어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하필 그런 말을 꺼낸 걸까?’그가 대답해 주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해버린 것이다.“하리야, 괜찮아?”주해찬이 조용한 목소리로 묻자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네. 괜찮아요.”“정말 괜찮아? 방금 들은 말인데, 정안 그룹에서도 오늘 연말 회식 여기서 한다더라. 불편하면 지금 나가도 돼.”강하리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다시 평온해져 있었다.“정말 괜찮아요. 가요.”주해찬은 여전히 걱정스러워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두 사람은 함께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고 연회장에 들어서자 누군가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에 주해찬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조시욱, 너도 와 있었어?”정장을 입은 남자는 주해찬과 반갑게 포옹을 나누며 말했다.“마침 여기서 식사 중이었어. 넌?”“우린 동창회 참석하러 왔어.”주해찬은 웃으며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소개하려 했지
강하리는 내키지 않았지만 천아름과 손연지의 권유로 결국 그 드레스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선명한 붉은색 드레스는 어깨에서 허리까지 깊게 파여 등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아래로 이어진 반짝이는 스커트는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자연스럽게 밀착되며 늘어졌다.하얀 피부는 붉은 드레스 덕분에 더욱 도드라졌고 머리카락 사이로 은근히 드러난 날개뼈는 도발적이기까지 했다.구승훈을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었다.처음으로 그 은밀한 아름다움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천아름은 위아래로 훑어보며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더니 가방에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발찌를 꺼내 강하리의 하얀 발목에 조심스럽게 채워주었다.강하리는 처음으로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게 되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거울 속 자신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됐어. 오늘은 남자 하나 낚아오는 거야, 알았지?”천아름이 장난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툭 쳤고 강하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희 진짜 나 소개팅하러 가는 거 아니야.”천아름은 어깨를 으쓱였다.“동창회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냐? 말만 동창회지 결국 소개팅이나 다름없지.”강하리는 작게 웃었다. 남자 친구라는 건 원한다고 바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직 구승훈을 완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휴대폰을 내려다보자 사진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그 사진은 마음 깊은 곳에 가시처럼 박혀 불쑥 떠오를 때마다 찌르듯이 아팠다.동창회는 보경 대학교 근처의 초특급 호텔에서 열렸다.저녁 무렵, 주해찬의 차는 인월동 입구에 도착했다.강하리의 모습에 운전석에 앉은 주해찬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도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오늘만큼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천아름이 그녀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끌어낸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오늘, 진짜 아름답네.”강하리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가요.”차가 호텔을 향해 움직이자 멀찍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벤틀리 안에서 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손연지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너 왜 이렇게 바보처럼 굴어?”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으며 말했다.“바보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야. 앞으로 그 사람은 나랑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찾아야 할 사람은 다 찾았고 풀어야 할 감정도 다 풀었다.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멀리서 그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손연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 하자 강하리는 먼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괜찮아. 걱정하지 마. 오늘 밤 동창회에서 새로운 사랑을 찾을지도 모르잖아?”손연지는 그녀를 노려보듯 바라보며 말했다.“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솔직히 이제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어.”강하리는 미소만 지었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시각, 안현우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시청에서 발표한 도시계획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 거기엔 자신이 낙찰받은 동쪽 부지가 공원용지로 표시되어 있었다.그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 모든 게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짜인 함정이라는 걸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동쪽 땅을 낙찰받았다며 호언장담했고 그 땅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었다.심지어 최하영을 이겼다는 기쁨에 축하 파티까지 열었었다.그런데 오늘 아침 모든 것이 뒤바뀌었고 안현우는 끝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탁자 위의 재떨이를 집어 TV 화면에 던졌다.“이 망할 년!”그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보경시로 가는 비행기표 예약해. 당장! 지금 당장!”같은 시각, 임희주는 TV를 끄고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안 대표님, 우리 다시 한번 손잡는 건 어때요?”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안현우의 목소리는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임 선생, 아직도 해결 못 했어? 진짜 쓸모없는 년이네.”임희주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이미 구승훈과 일종의 계약을 맺고 있었고 그를 위해 여초연을 꾀어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