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허리가 뻣뻣해져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몸을 돌릴 때는 꽤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맞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구승훈의 눈빛은 아주 어두웠다. 조금 전 열정이 넘치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듯이 안팎으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어떡하긴, 병원에 가야지.”강하리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두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구승훈은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강하리, 우리가 정한 룰은 기억하지?”강하리는 몸을 흠칫 떨었다.‘그래... 룰... 우리 사이는 애초에 게임일 뿐이었어. 대표님이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강하리는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반대로 구승훈은 구씨 가문의 장손이자, SH그룹의 후계자이다.강하리가 구승훈과 만나게 된 것은 100% 우연이었다.3년 전, 어머니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강하리는 급하게 돈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친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빌리려고 했다.하지만 화려한 별장 밖에 꼬박 하루 무릎 꿇고 있다가 기절까지 했는데도, 땡전 한 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구승훈이 길고양이 줍듯이 그녀를 주운 것이었다.병원에서 눈을 뜬 그녀에게 구승훈은 ‘게임’을 제안했다. 마음 없이 몸만 쓰는 그런 게임 말이다.그때 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보수는 있어요?”구승훈은 그녀의 속물 같은 모습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피식 웃으며 오히려 칭찬했었다.“똑똑하네.”그렇게 두 사람은 게임을 시작했다.강하리는 꽤 일찍 룰을 파괴했다.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녀는 게임 파트너를 짝사랑했다.가슴 속에서 퍼져가는 아픔을 애써 무시하고 강하리는 미소를 짜냈다.“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구승훈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강 부장은 똑똑해서 참 좋아.”강하리는 꾸벅 인사하고 그가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대표이사실을 벗어났다. 부하직원 안예서는 벌써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릇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으면서 여자는 더욱 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힐끗 보기만 하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강하리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기만 할 뿐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동생 구승재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구승훈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강 부장도 술 마시러 왔어요?”“네, 안 대표님과 계약을 성사한 기념으로요.”강하리는 그들 속에 끼어들지 않고 구석 자리를 골라 앉았다.“왜 그렇게 멀리 앉았어요? 가까이 와 봐요!”구승재는 겁도 없이 강하리를 부추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구승훈과 그녀의 관계를 알았기 때문이다.구승훈은 누가 봐도 곁에 있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강하리가 들어온 후로부터 그 여자를 대하는 태도도 더욱 차가워졌다.강하리는 아주 예쁘게 생겼다. 분명히 청순한 인상이지만 묘하게 매혹적인 것이, 고리타분한 정장에 비즈니스적인 미소만 지어도 사람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역시 우리 형님 안목이란.’강하리와 같은 여자가 연예계에 진출한다면 거물들과 술자리 몇 번 가지는 것으로 톱스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강하리는 구승재의 말을 듣고서도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룸 안의 사람들 속에 섞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구승훈 곁에는 다른 여자가 있으니, 그녀가 다가갈 필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안현우는 어느샌가 술 한잔 들고 강하리의 곁에 가서 물었다.“강 부장, 한잔할까요?”“아뇨, 저는 몸이 불편해서 물로 대신할게요.”술잔을 받지 않는 강하리에 안현우는 기분이 상했다. 힘들게 만든 자리에서 그녀가 술 한 잔 마셔주지 않으니 말이다.안현우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가 취한 틈을 타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크하게 한 모금도 마셔주지 않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 대표님, 우리 강 부장 참 시크하죠? 이런 자리에서도 술 한 잔 안 마셔주네요.”구승훈은 천
강하리는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구승훈의 뜻은 명확했다. 만약 그녀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그는 절대 말리지 않을 것이다.‘이제는 내가 떠나도 상관없구나.’강하리는 안현우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단호한 말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이제는 변할 때가 되었다. 배 속에 아이도 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이용해 구승훈을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는 애초부터 게임일 뿐이었으니, 책임을 운운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승훈은 그녀가 협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이번에 생긴 아이는 병원에 가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처음이 있으면 다음도 있기 마련이기에 문제였다.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구승훈은 평소에 꽤 신중하게 피임했다. 번마다 꼭 콘돔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하도 거칠게 한 탓에 콘돔이 찢어진 적이 있었다. 비록 제때 피임약을 먹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지킬 수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도 소중한 청춘과 건강을 이렇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정서원의 병원비라면 이미 꽤 모였다. 구승훈의 냉정함에도 실망할 대로 실망했다.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결심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더욱 명확해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되물었다.“저 진짜 떠나도 돼요?”“그렇게 묻는다는 건 너도 안 대표의 제안에 관심 있다는 건가?”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강하리는 피식 웃으면서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했다.“안 대표님의 조건을 들어보고 생각해 볼 의향은 있어요.”쨍그랑!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술잔은 구승훈의 다리에 걸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룸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휩싸였다.구승훈의
겁먹은 여자는 이제야 슬슬 뒤로 물러났다.“죄, 죄송합니다.”여자가 떠난 다음 룸에 있던 다른 여자들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구승재는 조금 전 장난이 지나쳤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예전에 같은 장난을 쳤을 때 강하리가 하도 잘 받아줘서 방심한 탓이었다.예전의 그녀는 떠나기는커녕 SH그룹에 뼈까지 묻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달라져 있었다.“형, 강 부장을 다시 데려와서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는 게 낫지 않아? 강 부장 일 잘하잖아. 갑자기 사직한다는 게 말이 돼? 오늘도 야근한 모양인데, 너무 피곤해서 말이 헛나왔을 거야.”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회사에 부장 자리 하나 대신할 사람이 없을까 봐? 간다는 사람을 잡아서 뭐 하게.”안현우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쯤이면 그도 구승훈과 강하리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냈다.“저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어요. 구 대표님 직원을 제가 어떻게 함부로 데려가겠어요.”안현우의 말에도 구승훈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래,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릴 어리석은 인간은 없겠지. 하지만 그 여자 마음이 떠난걸, 남이 뭐 어쩌겠어?’... 클럽에서 나간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3년 전, 정서원이 입원한 후로 처음 돌아가는 것이었다.그녀의 계부 강찬수는 성격이 더러운 데다가 술까지 좋아했다. 그래서 쩍하면 모녀에게 손을 대고는 했다.그녀는 수도 없이 정서원을 설득해서 두 사람을 이혼시키려고 했었다. 하지만 마음이 약한 정서원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만취 상태인 강찬수를 데리러 간 어느 날 밤 길가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정서원이 입원한 다음 강찬수는 술을 점점 더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대부분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온다고 해도 제정신인 적이 없었다.강하리는 오늘 밤도 집이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도착해보니, 그가 집에 있었을 뿐
욕을 내뱉자 손연지는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그제야 가장 중요한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애는 지울 거지? 내일 검사 끝나고 바로 시술 예약해 줘?”강하리는 아랫배를 만지작대다가 욱신대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고 짧게 대답했다.“응.”대답을 마친 동시에 눈물 한 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환영받지 못한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그녀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평범한 여자이다. 아이는 태어나봤자 평생 아빠 없이 손가락질만 받고 살 것이다. 그리고 구승훈은 아이에게 마땅한 명분도,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사랑, 결혼, 아이... 구승훈에게서는 절대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강하리는 눈을 꼭 감더니 눈물을 단호하게 닦아냈다....저녁에 강하리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어느 순간,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어린 시절 강하리는 어머니 정서원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보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강가의 어촌 마을이었다. 그 자그마한 마을은 그녀가 구승훈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어린 구승훈은 지금처럼 음침하지 않았다. 태생부터 잘생겼던 그는 마치 곱게 빚은 도자기 인형과 같았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한적한 마을에서 요양 중이었다.요양 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는지 그는 강가에서 혼자 눈물을 훔치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강하리는 그를 발견할 때마다 사탕 한 알을 들고 가서 위로해 주곤 했다.처음에 그는 강하리를 보는 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친해진 다음에는 종종 대문 앞에 찾아와서 “하양아!”하고 큰 소리로 불러주고는 했다.얼마 후 그의 병이 다 나았는지 한 무리의 사람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는 무조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강하리와 약속을 나눴다.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10년 후의 재회는 거의 사고와 마찬가지였다. 강하
강하리는 당연히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차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걸어오면서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제까지 성가시게 굴래?”강하리의 앞에 멈춰 선 구승훈은 차갑고도 오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제가 언제 성가시게 굴었다는 거죠?”“그럼 진짜 안 대표를 따라가겠다는 건가? 둘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지?”“오해하셨어요. 이번에는 제가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거지,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이유는?”강하리는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결혼하고 싶어서요.”“정말이야?”“그럼요, 저도 이제 27살이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눈동자에는 위험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결혼할 상대는 있고?”“...아뇨. 하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마당에 그게 그렇게 중요하나요?”“돈은?”구승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질문에 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애초에 그녀는 돈을 위해 구승훈과 만난 것이었다. 이는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구승훈은 번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약점을 건드렸다.젖 먹던 힘까지 짜내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른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대답했다.“돈과 결혼 중에서, 저는 결혼을 선택하기로 했어요.”“그러면... 나는?”“의미 없는 질문이네요. 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요. 대표님이 그걸 해줄 수 있겠어요?”강하리는 구승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속으로는 혹시라도 그가 머리를 끄덕여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냥 성의 없는 대답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 평생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그에게만 묶여서 살 것이다.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차가워지는 안색이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는 뒤로 두 발짝 물러서더니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대답했다.“난 네가
병원에서 나온 다음 강하리의 핸드폰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자 안예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보스 아버님이 또 회사에 왔어요! 빨리 와보세요! 대표님한테 들키면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강하리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부랴부랴 회사로 향하기 시작했다.SH그룹의 로비에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강찬수가 한눈에 보였다.“담배 꺼요, 당장.”강하리는 새파란 안색으로 말했다. 그러자 강찬수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래, 딸이 하는 말은 들어야지.”“나가서 얘기해요.”강하리는 그를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회사 근처의 카페로 데리고 갔다.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강찬수는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말했다.“우리 딸 출세했네. 이렇게 고급스러운 곳에도 들어올 수 있고 말이야!”“왜 또 왔어요? 이젠 구 대표님이 무섭지도 않은 거예요?”“하! 내가 내 딸을 보러 온다는데, 그 자식이 무슨 자격으로 간섭해?”“더 크게 말해요. 그러면 알 수 있겠네요, 대표님이 간섭할지 안 할지. 대표님 앞에서는 정신병자라고 해도 다르지 않아요.”정서원은 강찬수가 지나가는 차도에 밀치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강하리는 줄곧 그를 감옥에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심신미약으로 법률의 구멍을 파고들었다.강찬수가 얼마나 더러운 사람인지 강하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반대로 강하리가 한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강찬수는 약간 멈칫하다가 본론을 꺼냈다.“돈 줘. 돈만 주면 다시는 안 올게!”“돈 없어요.”강하리는 단칼에 거절했다. 요즘 도박에 빠진 강찬수는 하루가 멀다 하게 돈 달라는 말을 한다.강하리도 그냥 안 주는 것이 아닌, 진짜 돈이 없어서 못 주는 것이었다. 그녀의 돈은 정서원의 병원비에 전부 들어갔다.“구라치지 마! 이런 데서 일하면서 돈 없다는 게 말이 돼?!”강찬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은 힐끗힐끗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
강하리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아마도 18살 되던 해부터일 것이다. 강찬수는 시도 때도 없이 다가와서 그녀의 몸을 지분거렸다. 정서원과 수도 없이 싸우면서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녀는 대학에 붙으면서 집을 떠난 다음에야 강찬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물론 이는 절대 구승훈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짧게 대답했다.“아뇨.”“이런 일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구승훈은 여전히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이런 일’이란 다름 아닌 강찬수가 회사에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는 일을 가리켰다.“다음은 없을 거예요. 저 사직하기로 했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었다.“홧김에 한 말이 아닌가 보네.”“네.”“하하... 그래, 그럼 나도 시간을 뺏지 않을게.”구승훈의 웃음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그런데도 강하리는 영혼 없이 대답하기만 했다.“네.”마지막으로 강하리를 힐끗 본 구승훈은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의 곁에는 함께 온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도발적이고 비웃음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구승훈이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낸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옷보다도 여자를 더 빨리 바꾸는 사람이 구승훈이었다.구승훈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면서도 그녀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랫배를 쓰다듬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가슴은 자꾸만 욱신거렸다.‘괜찮아, 난 이제 떠날 거니까. 떠나면 분명히 잊을 수 있을 거야.’회사 정문에 도착한 그녀는 심호흡하면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번에는 또 누가 퍼뜨렸는지, 회사 단톡방에는 벌써 그녀가 사직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강하리가 용감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구승훈이 냉정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주제를 모른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강하리는 단톡방을 힐끗 보기만 하고 나왔다. 회사 단톡방은 언제나 이 모양이다. 그저 오늘은
강하리가 연정이를 데리러 왔을 때 구승훈은 연정이를 데리고 길거리 디저트 가게에서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연정이의 머리에는 작은 사슴 머리핀이 있었는데 살짝 곱슬곱슬한 머리를 구승훈이 두 갈래로 묶어주었다.원래 입었던 옷도 갈아입은 채 작은 케이크를 들고 신나게 베어 물고 있었다.하도 급하게 먹어 콧등에도 크림이 묻었다.강하리가 오자 연정이는 들떠서 방방 뛰었다.“엄마, 엄마.”구승훈은 유리창 너머로 밖에서 그들 부녀를 바라보는 강하리를 보았다.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유난히 짙었고 두 사람의 귀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강하리는 문득 씁쓸함이 밀려왔다.두 사람이 만나는 동안 구승훈도, 그녀도 한 번도 제대로 된 생일을 보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연정이마저 온전한 생일 한번 쇠어준 적이 없었다.구승훈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강하리에게 고정된 시선이 떠나질 않았다.하지만 강하리의 시선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뒤돌아 디저트 가게로 들어갔다.연정이의 코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고 연정이의 손과 얼굴까지 다 닦고 나서 그녀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아빠한테 인사해.”디저트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는 구승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연정이도 이별이라는 걸 알았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짝 웃고 있었지만 어느새 코끝이 붉어지기 시작했다.그래도 꿋꿋이 구승훈을 향해 손을 흔든 아이는 강하리의 품에 안겨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강하리도 연정이의 서글픈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한때는 연정이에게 온전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려고 애썼던 그녀였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녀에게 희망 고문만 남겨둔 채 매정하게 외면했다.강하리는 가슴 속 울분을 억누르고 연정이를 안은 채 뒤돌아 문을 나섰다.구승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강하리.”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췄다.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물었다.“왜?”자리에서 일어난 구승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연정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며칠 후면 연정이 생
강하리가 역겹다는 단어까지 뱉을 정도로 독하게 말해도 옆에 있던 남자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그녀는 구승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제가 역겨워요?”구승훈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였다.“본인이 더 잘 알 텐데요.”임희주는 이를 악물었다.“구승훈 씨,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무시한 채 연정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바보, 아빠 보고 싶었어?”“아빠, 보고 싶어.”구승훈의 마음이 녹아내리며 며칠 동안 굳어있던 얼굴에 마침내 미소가 드리웠다.임희주는 그런 다정한 모습을 볼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씨, 내가 그날 밤에 말한 조건 받아들일 건가요?”마침내 구승훈의 걸음이 멈추며 차갑게 웃고는 고개를 돌려 임희주를 바라보았다.“임희주 씨, 아직도 주제 파악이 덜 됐습니까? 그쪽이 여초연과 연락이 닿는 게 아니라면 나한테 그런 수작을 부려놓고 지금껏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어요?”임희주는 숨이 막히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수작을 부리다니요? 처음엔 치료를 이용해 그 쪽에게 손을 쓰려고 했던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것도 여초연이 몰아붙여서 어쩔 수가 없었던 거고, 그쪽도 결국엔 다 거절했잖아요.”설명을 마친 그녀는 그저 구승훈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날 밤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걸 구승훈이 알아낼 리 없다.구승훈의 약을 건드린 사람 역시 제때 처리했기 때문에 증거가 남을 리 없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구승훈에게 그렇게 과감하게 거래를 제안하지도 못했을 거다.하지만 구승훈이 말하기도 전에 구승재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이미 오래전부터 임희주가 못마땅했던 그는 송유라만큼이나 그녀가 혐오스러웠다.그녀를 이용해 여초연을 끌어내는 것만 아니면 진작 그의 선에서 처리했을 거다.주제도 모르고 감히 본인을 형수님과 비교하다니.“임 선생은 본인 말고 다른 사람은 다 바보로 생각하나 봐요? 그쪽 말고 우리 형의 병과 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게 아니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연정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하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잠시 망설이다가 침대 머리맡 서랍을 열었다.서랍 안에는 반지 두 개가 담긴 벨벳 상자가 있었는데 그다지 화려하지 않고 심지어 조금은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이는 그녀가 차근차근 천아름에게 배워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전부 직접 한 것이었다.원래는 구승훈에게 생일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이젠 서랍 속에 넣어둔 채 열어보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한 물건이 되어버렸다.손가락으로 반지를 쓰다듬으며 강하리의 시선이 텅 빈 약지로 향했다.잠시 후, 그녀는 다시 상자를 닫아 서랍에 넣어두었다.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 연정이가 강하리의 손을 잡고 놔주려 하지 않자 옆에 있던 가정부가 한숨을 쉬었다.“애들은 가끔 특별할 때가 있어요. 아마 연정이도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는 걸 느끼고 더 매달리는 거예요. 그날 밤에 계속 울면서 아빠를 찾는 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세수하던 강하리가 멈칫하며 옆에서 세면대에 엎드려 홀로 물을 떠서 세수하는 연정이를 보았다. 마음속에 가득 찬 죄책감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엄마가 오늘 하루 종일 연정이랑 같이 있어 줄까?”연정이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강하리를 바라보며 작은 입을 삐죽거렸다.“아빠.”강하리는 울컥하는 마음을 참으며 연정이의 얼굴을 꼬집었다.“그래, 엄마랑 같이 아빠 보러 가자.”연정이의 작은 얼굴에 금세 미소가 번졌다.연정이를 씻긴 뒤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임희주가 받을 줄이야.강하리는 조용히 시간을 확인했다.아침 7시.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썼다.“구승훈 씨한테 할 말 있어요. 휴대폰 넘겨주세요.”임희주의 목소리에 능글맞은 웃음이 묻어났다.“승훈 씨 샤워 중이니까 할 말 있으면 저한테 해요. 제가 전달할게요.”휴대폰을 쥔 강하리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며 그녀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쪽 형 어디 있어요?”강하리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임희주는 정신과 의사로서 타인에게 발끈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열등감 때문에 그만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당신이 뭘 알아요? 강하리 씨, 지금 그 남자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나만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어요. 알아들어요? 나만 도와줄 수 있다고!”강하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그러니까 그쪽이 여초연 사람이라는 거죠?”임희주가 멈칫하며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강하리가 덧붙였다.“애초에 그 사람을 해치려고 온 거예요? 여초연이 주사한 약물은 뭐죠? 이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쪽도 치료할 방법이 없는 거죠? 그 남자는 지금 당신을 이용해 여초연을 찾으려는 거예요. 그렇죠?”강하리가 말하며 한 걸음씩 다가오자 임희주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 몸이 벽에 심하게 부딪혔을 때쯤 정신을 차렸다.“강하리 씨, 미쳤어요?”강하리는 비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택시를 향해 걸어갔다.임희주는 그런 강하리의 등 뒤에서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강하리 씨, 이런 식으로 구승훈에게 매달리면서 이혼하지 않는 게 재밌어요? 그 남자는 이제 당신에게 관심도 없어요.”강하리는 걸음을 멈출 생각도 없이 무심하게 대꾸했다.“나랑 그 사람 일에 그쪽이 끼어들 자격은 없어요.”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는 택시에 올라타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이 시간에도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도시는 여전히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잠시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노 선생님, 구승훈 씨 약 아직 연구개발 중인가요?”노민준은 예상치 못한 강하리의 질문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숨길 생각은 없었다.“네.”“어디까지 진행되었죠?”“아직 멀었어요.”강하리는 심호흡했다.“해외에 있는 몇몇 의학 전문가에게 연락해 협조하라고 할게요.”노민준은 당황했다.“잘됐네요. 승훈이가 다 얘기했어요? 두 사람 화해한 거예요?”강
바의 조명은 여전히 화려하게 빛났고 무대 위의 폴댄스는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고 음악과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공간을 가득 채웠다.천아름은 바 카운터에 홀로 앉아 마치 세상과 단절된 사람처럼 조용한 표정이었지만 강하리가 방에서 나오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어떻게 됐어?”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의 눈가에 아직 남아 있는 눈물을 발견했다.“잘 안된 거야? 구승훈이 뭐라고 했는데?”강하리는 입술을 살짝 올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 마음만 헛고생하게 만든 것 같아.”천아름은 술잔을 내려놓고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분명, 둘이 오해를 풀기만 하면 다시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낼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너무 단순했던 모양이다.“네가 화해하기 싫었던 거야? 아니면 구승훈이 화해하려 하지 않은 거야?”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 연정이 데리러 가야 돼. 먼저 갈게.”천아름은 다시 한번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강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어쨌든, 사랑 문제는 내가 더 이상 참견할 일이 아니야.’강하리는 바에서 나와 문 앞에 멈춰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복잡한 감정을 가라앉혔다.사실 오늘 이런 결과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노력해 보고 싶었다.매번 그 남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약해졌다.아무리 단단히 결심해도 막상 마주하면 마음속에 남는 건 결국 그리움뿐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떤 관계는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이어질 수 없는 법이다.그녀는 더 이상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더 이상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구승훈에게 사정이 있다는 걸 알지만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방을 나서며 그녀가 남긴 말처럼 여전히 그를 도울 것이고 그가 원한다면, 연정이를 위해서라도 언제든지 기꺼이 나설 것이다.그가 연정이의 아버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때 그
아쉽게도 구승훈이 방에서 나올 때 표정이 좋지 않았고, 화장실 문 앞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그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강하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가 이렇게 변해버린 건지.오늘 최하영에게 들은 여초연에 관한 이야기와 방금 천아름에게 받은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이어졌다.여초연이 품은 증오심이 얼마나 깊은지는 그녀가 연정이를 납치했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었다.그런 여자가 복수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단순히 구승훈을 잠 못 이루게 할 정도로 가벼운 방식으로 끝냈을까?아니, 그럴 리 없었다.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인정하기 싫어도 상관없어. 난 지금 당신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어. 당신, 아직도 나와 연정이를 원해?”그가 원한다는 말한 한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그러나 구승훈은 갑자기 웃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목을 감싸듯 쓸어내렸다.움직임은 부드러웠고 천천히 강하리를 진정시키려는 것 같았지만 그의 말은 차가웠다.“네 상상력은 여전히 풍부하구나.”강하리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그래? 내가 너무 나를 과대평가했나 봐.”그녀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구승훈의 넥타이를 단숨에 잡아당겼다.둘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지금이라면 누구든 살짝만 움직여도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수 있을 정도였다.구승훈의 숨이 잠시 멎는 듯했지만 그는 여전히 냉정을 유지했다.그는 중간에서 포기할 수 없었다.여초연과의 싸움은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문제였고 무엇보다 강하리와 연정이가 그 분쟁에 휘말리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뭐 하는 거야? 이러면 나중에 임희주 씨에게 어떻게 설명하라고...”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갑자기 입을 맞췄다.항상 구승훈이 주도하던 키스였다.하지만 오늘,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
강하리는 구승훈을 보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하지만 곧, 최하영의 말이 떠올랐다.“모두가 구씨 집안이 대단하다고 하고 모두가 구승훈 씨를 부러워해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잖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꿈일까요? 하지만 구씨 집안 같은 곳은 사람을 삼키고 뼈 한 조각도 남기지 않는 곳이에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도 몰라요. 어쨌든, 저는 그가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그 말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여초연이 복수를 견디며 그가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강하리의 마음속에 다시금 연민을 불러일으켰다.하지만 지금, 그 연민은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실감이 나지 않는다기보다, 차라리 무뎌졌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그런데도 구승훈을 바라보는 순간, 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 역시도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이라는 것을.오늘 이 자리는 전적으로 천아름이 강요한 것이었다.구승훈은 갑작스럽게 굳어버렸고 강하리는 여전히 문 앞에 선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그걸 본 천아름이 성큼 다가와 그녀를 홱 잡아당겼다.“뭐 해? 왜 안 들어와? 설마, 두 사람 마주치는 게 어색해서 이러는 거야?”그녀는 강하리를 억지로 끌어 구승훈 옆자리에 앉혔다.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묵묵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방 안은 숨이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그때, 강하리의 휴대폰이 진동했다.천아름이었다.[구승훈 몸이 안 좋았대. 구승재 말로는 지금 치료도 불가능하대. 너랑 연정이를 위해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니까 두 사람 얘기 좀 해봐. 이 문제, 어쩌면 함께 해결할 수도 있을지 몰라.”강하리는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천아름은 이미 방을 나간 뒤였고 남겨진 공간에는 오직 그녀와 구승훈 둘뿐이었다.긴 침묵을 깨고 구승훈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일은 잘돼?”강하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둘 사이의 거리는 거의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웠지만 더
“여씨 집안은 30년 전까지만 해도 연성시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어요. 특히 미인들이 많았죠. 시어머니도 직접 보셨을 테고요. 그런데 옛말에 ‘미인은 화를 부른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아요. 여씨 집안도 결국 시어머니 때문에 몰락했으니까요.”강하리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구승훈이 여초연이 자신에게 약을 주입했다고 고백했을 때, 그녀는 여씨 집안과 여초연을 조사했었다.하지만 찾은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기에 결국 최하영에게 직접 묻기로 했던 것이다.강하리의 놀란 표정을 본 최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구씨 집안에서는 처음부터 여초연 씨를 며느리로 들이기로 했어요. 그런데 대학 시절, 여초연 씨가 같은 학교 학생을 좋아하게 된 거죠. 그때 이미 여씨 집안은 기울어가고 있었고 구씨 집안과의 혼인만이 생존 방법이었어요. 그러니 파혼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죠.”“하지만 강제로 막는다고 마음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결국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도망쳤어요. 무려 2년 동안요. 그리고 그 사이 여씨 집안은 완전히 무너졌어요. 구씨 집안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여초연 씨의 부모님은 연이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형제들은 경제 사범으로 감옥에 갔죠. 형은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동생은 건강이 악화됐어요. 그리고 여초연 씨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이미 만삭의 몸이었어요. 배 속에는 그 남자의 아이가 있었고요.”“구씨 집안의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아시잖아요. 그녀를 곧장 병원으로 데려가 강제로 유산시켰어요. 아이를 잃고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구씨 집안은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했죠. 처음에는 누구도 가까이 못 오게 막았지만 결국 함께 도망쳤던 남자가 협박 수단이 되었어요.”“그 협박이 통했어요. 두 달 뒤, 여초연 씨는 임신했고 그렇게 낳은 아이가 하리 씨 남편이에요.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바로 그날, 여초연 씨의 연인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마지막 인사도 못 한 채, 그녀는 모든 게 구씨 집안의 짓이라고
강하리는 최하영과 작은 사찰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식당 문 앞에서, 강하리은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바로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요? 추억에 잠기기라도 한 거예요?”강하리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아니요.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식당에는 정자와 누각, 고풍스러운 회랑과 기둥이 어우러진 독특한 건축 양식을 자랑하고 있었다.구승훈과 함께 이곳에 왔던 기억이 떠오르며 그녀의 시선이 한동안 허공을 맴돌았다.이곳 분위기가 좋다는 강하리의 말에 구승훈은 환한 표정으로 앞으로 함께 자주 오자는 말을 했었다.문연진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테이블 위에 놓인 달콤한 요리를 바라보며 그녀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왜 우리는 함께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걸까?’구승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심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녀가 더 이상 버틸 힘조차 앗아가고 있었다.천아름은 이혼을 잠시 미뤄보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알고 있었다.미루든, 미루지 않든 결과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최하영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불러냈다.강하리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맛있어요.”최하영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말했다.“제 정보가 틀린 줄 알았네요.”강하리는 그가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묻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최 대표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최하영은 공용 젓가락으로 그녀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말했다.“안현우 일이죠? 기명제약 뒤에서 손 쓴 사람, 그 녀석 맞아요. 이제 어떻게 도와줄까요?”강하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가슴 한구석이 더욱 답답해졌다.공항까지 마중을 나간 것도, 시킨 음식이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인 것도, 그리고 지금 안현우가 뒤에서 손을 쓰고 있는 것도.최하영이 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