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야, 나 좀 도와줘야겠어.”“뭔데? 말해봐.”“대표님이 내가 임신한 거 의심하기 시작했어. 내일 아마 비서를 시켜서 날 데리고 검사받으러 가게 할 거야. 너 가짜 임신 검사서 하나 만들어줘야 겠다.”손연지는 문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지야?”강하리가 미간을 구겼다.“구승훈 씨 애야?”뜬금없는 그녀의 물음에 강하리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바로 맞출 거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으니까.다만 손연지에게 딱히 숨길 필요도 없었으니 그녀는 아예 인정해버렸다.“맞아. 구승훈 씨 애야.”“X발, 진짜 그 인간이었어! 설마 너 관행 당한 거야? 개자식, 겉모습만 번지르르하지 인간도 아니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해!”강하리는 그녀의 연이은 험한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한참 후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관행 아니야.”손연지는 흠칫 놀라서 물었다.“그럼 네가 침대에 기어오른 거?”강하리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나 스폰받고 있어, 3년 전부터.”손연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쇼킹이지? 너무 실망이지?”강하리는 뭇사람들에게 성품과 학문을 겸비한 참한 여자였다.그래서 손연지도 가장 먼저 그녀가 관행 당한 거라고 의심했는데 스폰이라니...“에이, 그게 뭐라고. 각자 원하는 바를 얻는 거잖아. 나도 너 같은 미모를 지니면 돈 많은 남자를 찾아서 스폰받았을 거야. 잠자리도 갖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아.”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여기서 금기는 아이가 생기는 거지.”강하리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그랬다. 둘 사이엔 확실히 이 아이가 없어야 한다.만약 이 아이가 없으면 그녀는 구승훈과 아무렇게나 돼도 다 상관없다.헤어져도 좋고 함께여도 좋으니 딱히 큰 걱정거리가 없다.근데 하필 아이가 생겼고 아무런 준비 없이 불쑥 그녀를 찾아왔다.손연지도 덩달아 걱정됐다.만약 그 남자가 일반인이라면 강하리의 매력으로 충분히 그와 혼인신고하고 잘 살 텐데 하필이면 구승훈이라니.피라미드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남자라 일반인들이 넘볼만한 존재가
다음 날 아침, 신도윤이 강하리의 집 문을 두드렸다.그녀는 문 앞에 서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강 부장님, 대표님께서 부장님 모시고 검사받으러 가라고 하십니다.”“네, 금방 나올게요.”병원에 도착한 강하리는 피검사 받는 곳에 서 있는 손연지를 보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피를 다 뽑고 신도윤이 그녀를 데리고 가서 음식을 먹였다.“대표님께서 부장님은 오늘 하루 휴식하셔도 된다고 했습니다.”“네.”강하리도 볼일이 있어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신도윤과 헤어지고 그녀는 곧바로 임정원과 약속한 장소에 갔다.“뭐 마실래요?”강하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임정원이 물었다.“냉수로 할게요.”임정원은 그녀 앞으로 냉수 한 잔 시켰다.물 한 모금 마신 후 강하리는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전에 내 도움 필요하다는 거 무슨 일이에요?”그녀는 말하면서 가볍게 웃었다.“그땐 자세히 묻지 못했는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설마 나한테 다이아몬드 팔려는 건 아니죠?”임정원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진짜 용건이 있어서 그래요.”그는 서류 한 부 꺼내서 강하리 앞에 내려놓았다.“이 자료 좀 통역해줄 수 있나요?”강하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았는데 이탈리아어로 된 법조문이었다.“이건...”임정원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최근에 국제 경제 분쟁 사건을 하나 맡았는데 상대가 마침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더라고요. 전문 통역사를 어디서 구할지 고민하던 차에 마침 하리 씨가 전화 온 거예요.”강하리는 한참 침묵했다.“내가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임정원이 가볍게 웃었다.“전에 하리 씨 연설을 본 적이 있어요.”강하리는 한때 보경대학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10개 국어에 능통해 대학 시절부터 지도교수를 따라 다니며 동시통역을 해주었고 대학원생 땐 외교부에 합격했다.하지만 그녀는 결국 외교부를 포기하고 구승훈의 회사에 입사했다. 이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강하리는 살짝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내가
‘아마도 대표님의 새로운 타깃이겠지. 관심 없는 여자에겐 가까이할 기회조차 안 주니까. 양 부장은 이번이 벌써 세 번째네.’강하리가 문 앞에서 꿈쩍하지 않자 임정원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왜 그래요?”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었다.“우리 그냥 딴 데 길까요?”임정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부장님도 이리로 식사하러 오셨네요?”양 부장이 유난을 떨며 강하리를 불렀다.강하리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고개 돌린 순간 구승훈과 눈이 마주쳤는데 짙은 눈빛에서 어떠한 감정도 보아낼 수 없었다.강하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그에게 인사했다.“대표님.”구승훈은 무덤덤하게 머리를 끄덕이곤 임정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임정원도 한창 그를 훑어보는 중이었다.구승훈은 출중한 재능에 거만함이 하늘을 찌른다.연성시에서 그에 관한 전설을 모르는 자가 거의 없을 지경이다.구승훈은 19살 때 아빠를 제치고 SH그룹의 오너 자리에 앉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지루해졌는지 SH그룹을 내팽개치고 독립하여 자기 회사를 세웠다.4년이 지난 지금 구승훈의 회사는 여전히 전성기에 처해 있고 그도 구씨 일가의 도련님이 아닌 연성시의 빅 보스로 거듭났다.아무도 감히 그와 겨룰 자가 없다.임정원도 줄곧 그를 만나고 싶었으나 기회가 좀처럼 차려지지 않았다.강하리가 구승훈의 회사에 다니는 걸 알고 있지만 그녀를 이용하고 싶진 않았다.그러던 중 오늘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안녕하세요, 구승훈 대표님.”임정원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깍듯이 인사했다.“저는 정인 로펌 파트너 변호사 임정원이에요. 하리 씨랑도 친구 사이고요.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구승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이곤 강하리를 쳐다봤다.“친구?”그는 비난 섞인 말투로 이 두 글자를 곱씹었다.“두 분 꽤 친한 사이인가 봐요?”강하리가 눈썹을 치키며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임정원이 덥석 가로챘다.“네, 아주 친해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그렇다면 임 변호사 우리랑 협
더없이 짤막한 네 글자에 강하리는 거절하려던 말을 꾹 집어삼켰다.그녀는 고개 돌려 임정원을 쳐다보면서 살짝 미안한 듯 웃었다.한편 임정원은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구승훈과 함께 식사할 수 있다니 그는 되레 뿌듯할 따름이었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양희수가 강하리의 팔을 툭툭 쳤다.“솔직히 말해봐요. 두 사람 데이트 중이었죠?”강하리는 무심코 구승훈을 쳐다봤는데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제야 대답했다.“양 부장님과는 무관한 일인 것 같은데요.”양희수는 화를 내기는커녕 원망 어린 눈길로 구승훈에게 말했다.“승훈 씨도 참, 직원들 데이트하는 것까지 간섭해야겠어요? 하리 씨랑 옆에 있는 이분 얼마나 잘 어울려요.”말을 마친 양희수가 강하리를 쳐다보며 윙크를 날렸다.“하리 씨, 대표님 무서워하지 말아요. 연애하는 게 뭐 어때서요? 데이트하면 안 되나요? 이 사람 상사이긴 해도 직원들 사생활까지 간섭하진 못해요.”강하리는 웃으며 맞받아쳤다.“희수 씨, 그만 얘기하고 스테이크나 드세요!”양희수는 순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하리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나 지금 하리 씨 도와주고 있잖아요.”“고맙지만 사양할게요.”강하리는 그녀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두 여자 사이에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구승훈은 아무것도 모른 척 느긋하게 스테이크를 썰었다.양희수가 수중의 포크로 식탁을 내리치자 임정원이 본능적으로 강하리를 감쌌다.그제야 구승훈도 시선을 올리고 강하리의 앞을 가로막은 양정원의 팔을 보면서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임 변호사 매너 좋으시네요.”임정원이 웃으며 말했다.“저는 대표님처럼 담담하지 못해서요. 하리 씨는 제 친구라 이런 장소에서 상처받게 내버려 둘 순 없네요.”강하리는 머리가 띵해졌다. 계속 이러다가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쓸 판이다.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죄송해요, 대표님. 제가 입맛이 없어서 양 부장님이랑 천천히 드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곧게 밖으로 나갔고 임정원도 뒤따라갔다.레스토랑 입구에
강하리는 택시를 안 잡고 그냥 길을 따라 목적 없이 걸어갔다.이때 익숙한 차가 그녀 앞에 멈춰 섰고 도어가 내려가더니 구승훈의 얼굴이 보란 듯이 나타났다.“타.”강하리는 잠시 침묵한 후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검사결과 언제 나와?”“오늘 오후 세 시에요.”구승훈은 무관심한 태도로 알겠다며 대답한 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이에 강하리가 먼저 해명했다.“아버지 때문에 임 변호사님한테 문의할 일이 있었어요.”구승훈이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그래서 함께 밥까지 먹어야 했어?”“신세 지고 싶지 않아서요.”“모든 신세는 돈으로 갚는 게 제일 간편해.”“전 돈이 없잖아요.”강하리가 대답했다.그녀는 구승훈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내가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면서.’구승훈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어제 준 2억을 그새 다 썼어? 강 부장 혹시 밖에서 슈가마미 놀이하는 건 아니지?”“아니에요, 그런 거!”강하리가 해명하려 들자 구승훈은 코웃음을 쳤다.그녀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집안 사정을 구승훈에게 너무 많이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구승훈도 딱히 관심 없을 것이다.강찬수가 처음 회사에 찾아왔을 때 구승훈이 그를 바라보는 짜증 섞인 눈빛을 그녀는 잊을 수 없다.다행히 구승훈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강하리는 몰래 한숨을 돌렸다.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후 구승훈은 바로 자리를 떠났고, 시동 걸기 전에 잊지 않고 그녀에게 당부했다.“강 부장, 우리 계약 잊지 마.”강하리와 구승훈 사이에 근로계약서 외에도 스폰 협의서가 하나 더 있다.그 협의서에는 구승훈이 갑이고 강하리가 내연녀이자 을이라고 명확히 적혀 있다.그리고 바로 그 협의서에 계약 기간 강하리는 이성과 그 어떤 관계도 유지할 수 없다고 보란 듯이 적혀 있다.강하리가 웃으며 대답했다.“기억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대표님.”구승훈은 그녀를 힐긋 바라보며 더 말하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오후 세 시를 넘
강하리는 인상을 찌푸렸다.“누군지는 얘기했어?”안예서는 고개를 내저었다.“인제 어떡하죠?”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내가 가서 대표님 뵙고 올게.”구승훈의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와 통화 중인 듯싶었는데 목소리가 유달리 부드러웠다.강하리는 저도 몰래 심장이 쿡쿡 쑤셨다. 그래서 숨을 깊게 몰아쉬며 마음을 다잡고 노크했다.“들어와.”구승훈의 목소리가 안에서 전해졌다.강하리는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래, 나 지금 볼일 있어서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강하리를 쳐다봤다.“할 얘기 있어?”“신제품 출시 모델에 관해서요, 우리 기획안이 이미 통과됐는데 대표님이 왜 또 사람을 바꾸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구승훈이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강 부장은 더 물을 필요 없이 지시대로 움직이면 돼.”강하리의 안색이 살짝 일그러졌다.기획안은 그녀가 무려 반년이나 공들여 겨우 통과됐는데 이 남자 한 마디에 바로 캔슬 당하다니.“그럼 누구로 바꾸셨는지만 알려주세요. 저도 모니터링 해야 해서요.”“내 친구야.”구승훈이 무심한 척 대답했다. 그의 태도는 더없이 간결하고 단호했다. 강하리에게 이 결과를 바꿀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그녀도 구승훈의 태도에 바로 짐작했다. 그가 정한 일이니 더이상 의논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강하리는 잠시 침묵한 후 대답했다.“그럼 대표님 친구분더러 되도록 빨리 저한테 연락 주라고 하세요. 기획안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하거든요.”“원래 계획대로 하면 돼. 귀찮지도 않아? 기획안 다시 짜는 거.”“원래 기획안이 안 맞을 수도 있잖아요.”“맞든 말든 상관없어. 속은 좀 나아졌어?”구승훈은 수중의 계약서를 확인하며 그녀에게 물었다.강하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네, 많이 나아졌어요.”“그래. 몸을 차갑게 굴지 마.”“알겠습니다.”강하리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대표님, 신제품 모델을 다시 한번 고려해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친구
강하리는 손가락을 살짝 구부렸다.“아직도 위가 약간 불편해요.”“약 먹고 술은 적게 마셔. 샴페인은 별로 독하지 않아.”강하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더 말했다가는 오히려 들통날 것이다.사실 구승훈은 그녀에게 술을 강요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이런 면에서 항상 신사다웠다.하지만 오늘 그는 고집스러웠는데, 아직도 그녀가 임신했다고 의심하는지 일부러 떠보는 것 같았다.파티장에 도착하자 강하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구승훈의 팔짱을 낀 채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안현우를 발견했다.안현우는 제 자리에서 그녀를 향해 샴페인 잔을 들어 보였고, 구승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강 부장 매력이 대단한가 보네.”그러자 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구 대표님 안심하세요. 저는 돈에만 관심 있어요.”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말은 누구든지 돈만 주면 강 부장이랑 잘 수 있다는 거네?”강하리는 덤덤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구 대표님께서 더 많은 돈을 내놓으시면 되잖아요. 그럼 전 절대 다른 사람한테 가지 않을 겁니다.”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확 굳어졌고, 강하리는 더 말하지 않았다.구승훈에게 다가와서 샴페인을 권하는 사람은 많았다. 강하리는 예의 있게 그들을 맞이하고 샴페인을 살짝 입술에 대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샴페인을 마시지 않았다.“저 좀 쉬러 가도 될까요?”한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 강하리는 다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구승훈은 그녀를 보내주며 말했다.“가서 뭐 좀 먹어.”“네.”강하리는 접시를 들고 가서 케이크 두 조각을 챙긴 후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어느새 안현우가 그녀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안 대표님.”강하리는 정중하게 인사했다.안현우는 그녀에게 샴페인 잔을 건넸지만 그녀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그런데 이번에 안현우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구 대표랑 잘 지내요?”강하리가 대답했다.“그럭저럭 괜찮아요.”안현우가 웃으
구승훈은 강하리의 옆에 와서 앉고 큰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어? 나도 들어보자.”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안 대표님께서 대표님의 첫사랑이 곧 돌아오신다고 하셨어요.”구승훈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치더니 별다른 대답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그래서 강 부장이 그렇게 즐겁게 웃고 있었던 거야?”강하리는 가슴이 답답했다. 웃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를 붙잡고 울며불며 왜 첫사랑은 사랑하면서 자신은 사랑하지 않냐고 묻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그녀는 눈치 있는 사람이었다.“전 그저 구 대표님께는 좋은 일인 것 같아서 기뻤을 뿐입니다.”구승훈의 안색은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렇다면 강 부장의 관심에 고마워해야겠네.”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안현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구 대표님, 첫사랑분이 돌아오시면 저한테 알려주세요. 제가 강 부장을 데려갈게요. 이건 구 대표님의 사람을 빼앗는 거 아니죠?”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구승훈은 그 말을 듣고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왜요? 두 사람 벌써 협상했어요?”“아니요!”강하리는 바로 부정했다.안현우는 구승훈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강하리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저 조금 전에 이미 안 대표님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그러나 안현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강 부장, 그렇게 빨리 거절하지는 마요. 겪어보지 않으면 뭐가 진짜 자신한테 어울리는 것인지 몰라요.”안현우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강하리의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웠다. 그녀는 안현우가 일부러 자신한테 보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대표님, 저는 진짜 안 대표님한테 마음이 없어요.”구승훈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샴페인 잔을 흔들고 있었다.“강 부장은 돈만 있으면 되잖아. 왜 안 대표는 안 되는 거지?”강하리의 입술을 하얗게 질렸다
강하리가 연정이를 데리러 왔을 때 구승훈은 연정이를 데리고 길거리 디저트 가게에서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연정이의 머리에는 작은 사슴 머리핀이 있었는데 살짝 곱슬곱슬한 머리를 구승훈이 두 갈래로 묶어주었다.원래 입었던 옷도 갈아입은 채 작은 케이크를 들고 신나게 베어 물고 있었다.하도 급하게 먹어 콧등에도 크림이 묻었다.강하리가 오자 연정이는 들떠서 방방 뛰었다.“엄마, 엄마.”구승훈은 유리창 너머로 밖에서 그들 부녀를 바라보는 강하리를 보았다.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유난히 짙었고 두 사람의 귀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강하리는 문득 씁쓸함이 밀려왔다.두 사람이 만나는 동안 구승훈도, 그녀도 한 번도 제대로 된 생일을 보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연정이마저 온전한 생일 한번 쇠어준 적이 없었다.구승훈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강하리에게 고정된 시선이 떠나질 않았다.하지만 강하리의 시선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뒤돌아 디저트 가게로 들어갔다.연정이의 코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고 연정이의 손과 얼굴까지 다 닦고 나서 그녀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아빠한테 인사해.”디저트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는 구승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연정이도 이별이라는 걸 알았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짝 웃고 있었지만 어느새 코끝이 붉어지기 시작했다.그래도 꿋꿋이 구승훈을 향해 손을 흔든 아이는 강하리의 품에 안겨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강하리도 연정이의 서글픈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한때는 연정이에게 온전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려고 애썼던 그녀였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녀에게 희망 고문만 남겨둔 채 매정하게 외면했다.강하리는 가슴 속 울분을 억누르고 연정이를 안은 채 뒤돌아 문을 나섰다.구승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강하리.”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췄다.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물었다.“왜?”자리에서 일어난 구승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연정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며칠 후면 연정이 생
강하리가 역겹다는 단어까지 뱉을 정도로 독하게 말해도 옆에 있던 남자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그녀는 구승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제가 역겨워요?”구승훈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였다.“본인이 더 잘 알 텐데요.”임희주는 이를 악물었다.“구승훈 씨,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무시한 채 연정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바보, 아빠 보고 싶었어?”“아빠, 보고 싶어.”구승훈의 마음이 녹아내리며 며칠 동안 굳어있던 얼굴에 마침내 미소가 드리웠다.임희주는 그런 다정한 모습을 볼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씨, 내가 그날 밤에 말한 조건 받아들일 건가요?”마침내 구승훈의 걸음이 멈추며 차갑게 웃고는 고개를 돌려 임희주를 바라보았다.“임희주 씨, 아직도 주제 파악이 덜 됐습니까? 그쪽이 여초연과 연락이 닿는 게 아니라면 나한테 그런 수작을 부려놓고 지금껏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어요?”임희주는 숨이 막히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수작을 부리다니요? 처음엔 치료를 이용해 그 쪽에게 손을 쓰려고 했던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것도 여초연이 몰아붙여서 어쩔 수가 없었던 거고, 그쪽도 결국엔 다 거절했잖아요.”설명을 마친 그녀는 그저 구승훈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날 밤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걸 구승훈이 알아낼 리 없다.구승훈의 약을 건드린 사람 역시 제때 처리했기 때문에 증거가 남을 리 없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구승훈에게 그렇게 과감하게 거래를 제안하지도 못했을 거다.하지만 구승훈이 말하기도 전에 구승재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이미 오래전부터 임희주가 못마땅했던 그는 송유라만큼이나 그녀가 혐오스러웠다.그녀를 이용해 여초연을 끌어내는 것만 아니면 진작 그의 선에서 처리했을 거다.주제도 모르고 감히 본인을 형수님과 비교하다니.“임 선생은 본인 말고 다른 사람은 다 바보로 생각하나 봐요? 그쪽 말고 우리 형의 병과 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게 아니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연정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하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잠시 망설이다가 침대 머리맡 서랍을 열었다.서랍 안에는 반지 두 개가 담긴 벨벳 상자가 있었는데 그다지 화려하지 않고 심지어 조금은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이는 그녀가 차근차근 천아름에게 배워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전부 직접 한 것이었다.원래는 구승훈에게 생일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이젠 서랍 속에 넣어둔 채 열어보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한 물건이 되어버렸다.손가락으로 반지를 쓰다듬으며 강하리의 시선이 텅 빈 약지로 향했다.잠시 후, 그녀는 다시 상자를 닫아 서랍에 넣어두었다.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 연정이가 강하리의 손을 잡고 놔주려 하지 않자 옆에 있던 가정부가 한숨을 쉬었다.“애들은 가끔 특별할 때가 있어요. 아마 연정이도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는 걸 느끼고 더 매달리는 거예요. 그날 밤에 계속 울면서 아빠를 찾는 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세수하던 강하리가 멈칫하며 옆에서 세면대에 엎드려 홀로 물을 떠서 세수하는 연정이를 보았다. 마음속에 가득 찬 죄책감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엄마가 오늘 하루 종일 연정이랑 같이 있어 줄까?”연정이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강하리를 바라보며 작은 입을 삐죽거렸다.“아빠.”강하리는 울컥하는 마음을 참으며 연정이의 얼굴을 꼬집었다.“그래, 엄마랑 같이 아빠 보러 가자.”연정이의 작은 얼굴에 금세 미소가 번졌다.연정이를 씻긴 뒤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임희주가 받을 줄이야.강하리는 조용히 시간을 확인했다.아침 7시.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썼다.“구승훈 씨한테 할 말 있어요. 휴대폰 넘겨주세요.”임희주의 목소리에 능글맞은 웃음이 묻어났다.“승훈 씨 샤워 중이니까 할 말 있으면 저한테 해요. 제가 전달할게요.”휴대폰을 쥔 강하리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며 그녀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쪽 형 어디 있어요?”강하리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임희주는 정신과 의사로서 타인에게 발끈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열등감 때문에 그만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당신이 뭘 알아요? 강하리 씨, 지금 그 남자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나만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어요. 알아들어요? 나만 도와줄 수 있다고!”강하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그러니까 그쪽이 여초연 사람이라는 거죠?”임희주가 멈칫하며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강하리가 덧붙였다.“애초에 그 사람을 해치려고 온 거예요? 여초연이 주사한 약물은 뭐죠? 이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쪽도 치료할 방법이 없는 거죠? 그 남자는 지금 당신을 이용해 여초연을 찾으려는 거예요. 그렇죠?”강하리가 말하며 한 걸음씩 다가오자 임희주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 몸이 벽에 심하게 부딪혔을 때쯤 정신을 차렸다.“강하리 씨, 미쳤어요?”강하리는 비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택시를 향해 걸어갔다.임희주는 그런 강하리의 등 뒤에서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강하리 씨, 이런 식으로 구승훈에게 매달리면서 이혼하지 않는 게 재밌어요? 그 남자는 이제 당신에게 관심도 없어요.”강하리는 걸음을 멈출 생각도 없이 무심하게 대꾸했다.“나랑 그 사람 일에 그쪽이 끼어들 자격은 없어요.”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는 택시에 올라타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이 시간에도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도시는 여전히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잠시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노 선생님, 구승훈 씨 약 아직 연구개발 중인가요?”노민준은 예상치 못한 강하리의 질문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숨길 생각은 없었다.“네.”“어디까지 진행되었죠?”“아직 멀었어요.”강하리는 심호흡했다.“해외에 있는 몇몇 의학 전문가에게 연락해 협조하라고 할게요.”노민준은 당황했다.“잘됐네요. 승훈이가 다 얘기했어요? 두 사람 화해한 거예요?”강
바의 조명은 여전히 화려하게 빛났고 무대 위의 폴댄스는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고 음악과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공간을 가득 채웠다.천아름은 바 카운터에 홀로 앉아 마치 세상과 단절된 사람처럼 조용한 표정이었지만 강하리가 방에서 나오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어떻게 됐어?”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의 눈가에 아직 남아 있는 눈물을 발견했다.“잘 안된 거야? 구승훈이 뭐라고 했는데?”강하리는 입술을 살짝 올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 마음만 헛고생하게 만든 것 같아.”천아름은 술잔을 내려놓고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분명, 둘이 오해를 풀기만 하면 다시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낼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너무 단순했던 모양이다.“네가 화해하기 싫었던 거야? 아니면 구승훈이 화해하려 하지 않은 거야?”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 연정이 데리러 가야 돼. 먼저 갈게.”천아름은 다시 한번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강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어쨌든, 사랑 문제는 내가 더 이상 참견할 일이 아니야.’강하리는 바에서 나와 문 앞에 멈춰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복잡한 감정을 가라앉혔다.사실 오늘 이런 결과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노력해 보고 싶었다.매번 그 남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약해졌다.아무리 단단히 결심해도 막상 마주하면 마음속에 남는 건 결국 그리움뿐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떤 관계는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이어질 수 없는 법이다.그녀는 더 이상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더 이상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구승훈에게 사정이 있다는 걸 알지만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방을 나서며 그녀가 남긴 말처럼 여전히 그를 도울 것이고 그가 원한다면, 연정이를 위해서라도 언제든지 기꺼이 나설 것이다.그가 연정이의 아버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때 그
아쉽게도 구승훈이 방에서 나올 때 표정이 좋지 않았고, 화장실 문 앞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그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강하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가 이렇게 변해버린 건지.오늘 최하영에게 들은 여초연에 관한 이야기와 방금 천아름에게 받은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이어졌다.여초연이 품은 증오심이 얼마나 깊은지는 그녀가 연정이를 납치했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었다.그런 여자가 복수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단순히 구승훈을 잠 못 이루게 할 정도로 가벼운 방식으로 끝냈을까?아니, 그럴 리 없었다.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인정하기 싫어도 상관없어. 난 지금 당신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어. 당신, 아직도 나와 연정이를 원해?”그가 원한다는 말한 한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그러나 구승훈은 갑자기 웃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목을 감싸듯 쓸어내렸다.움직임은 부드러웠고 천천히 강하리를 진정시키려는 것 같았지만 그의 말은 차가웠다.“네 상상력은 여전히 풍부하구나.”강하리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그래? 내가 너무 나를 과대평가했나 봐.”그녀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구승훈의 넥타이를 단숨에 잡아당겼다.둘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지금이라면 누구든 살짝만 움직여도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수 있을 정도였다.구승훈의 숨이 잠시 멎는 듯했지만 그는 여전히 냉정을 유지했다.그는 중간에서 포기할 수 없었다.여초연과의 싸움은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문제였고 무엇보다 강하리와 연정이가 그 분쟁에 휘말리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뭐 하는 거야? 이러면 나중에 임희주 씨에게 어떻게 설명하라고...”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갑자기 입을 맞췄다.항상 구승훈이 주도하던 키스였다.하지만 오늘,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
강하리는 구승훈을 보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하지만 곧, 최하영의 말이 떠올랐다.“모두가 구씨 집안이 대단하다고 하고 모두가 구승훈 씨를 부러워해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잖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꿈일까요? 하지만 구씨 집안 같은 곳은 사람을 삼키고 뼈 한 조각도 남기지 않는 곳이에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도 몰라요. 어쨌든, 저는 그가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그 말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여초연이 복수를 견디며 그가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강하리의 마음속에 다시금 연민을 불러일으켰다.하지만 지금, 그 연민은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실감이 나지 않는다기보다, 차라리 무뎌졌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그런데도 구승훈을 바라보는 순간, 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 역시도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이라는 것을.오늘 이 자리는 전적으로 천아름이 강요한 것이었다.구승훈은 갑작스럽게 굳어버렸고 강하리는 여전히 문 앞에 선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그걸 본 천아름이 성큼 다가와 그녀를 홱 잡아당겼다.“뭐 해? 왜 안 들어와? 설마, 두 사람 마주치는 게 어색해서 이러는 거야?”그녀는 강하리를 억지로 끌어 구승훈 옆자리에 앉혔다.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묵묵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방 안은 숨이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그때, 강하리의 휴대폰이 진동했다.천아름이었다.[구승훈 몸이 안 좋았대. 구승재 말로는 지금 치료도 불가능하대. 너랑 연정이를 위해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니까 두 사람 얘기 좀 해봐. 이 문제, 어쩌면 함께 해결할 수도 있을지 몰라.”강하리는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천아름은 이미 방을 나간 뒤였고 남겨진 공간에는 오직 그녀와 구승훈 둘뿐이었다.긴 침묵을 깨고 구승훈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일은 잘돼?”강하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둘 사이의 거리는 거의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웠지만 더
“여씨 집안은 30년 전까지만 해도 연성시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어요. 특히 미인들이 많았죠. 시어머니도 직접 보셨을 테고요. 그런데 옛말에 ‘미인은 화를 부른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아요. 여씨 집안도 결국 시어머니 때문에 몰락했으니까요.”강하리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구승훈이 여초연이 자신에게 약을 주입했다고 고백했을 때, 그녀는 여씨 집안과 여초연을 조사했었다.하지만 찾은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기에 결국 최하영에게 직접 묻기로 했던 것이다.강하리의 놀란 표정을 본 최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구씨 집안에서는 처음부터 여초연 씨를 며느리로 들이기로 했어요. 그런데 대학 시절, 여초연 씨가 같은 학교 학생을 좋아하게 된 거죠. 그때 이미 여씨 집안은 기울어가고 있었고 구씨 집안과의 혼인만이 생존 방법이었어요. 그러니 파혼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죠.”“하지만 강제로 막는다고 마음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결국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도망쳤어요. 무려 2년 동안요. 그리고 그 사이 여씨 집안은 완전히 무너졌어요. 구씨 집안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여초연 씨의 부모님은 연이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형제들은 경제 사범으로 감옥에 갔죠. 형은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동생은 건강이 악화됐어요. 그리고 여초연 씨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이미 만삭의 몸이었어요. 배 속에는 그 남자의 아이가 있었고요.”“구씨 집안의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아시잖아요. 그녀를 곧장 병원으로 데려가 강제로 유산시켰어요. 아이를 잃고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구씨 집안은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했죠. 처음에는 누구도 가까이 못 오게 막았지만 결국 함께 도망쳤던 남자가 협박 수단이 되었어요.”“그 협박이 통했어요. 두 달 뒤, 여초연 씨는 임신했고 그렇게 낳은 아이가 하리 씨 남편이에요.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바로 그날, 여초연 씨의 연인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마지막 인사도 못 한 채, 그녀는 모든 게 구씨 집안의 짓이라고
강하리는 최하영과 작은 사찰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식당 문 앞에서, 강하리은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바로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요? 추억에 잠기기라도 한 거예요?”강하리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아니요.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식당에는 정자와 누각, 고풍스러운 회랑과 기둥이 어우러진 독특한 건축 양식을 자랑하고 있었다.구승훈과 함께 이곳에 왔던 기억이 떠오르며 그녀의 시선이 한동안 허공을 맴돌았다.이곳 분위기가 좋다는 강하리의 말에 구승훈은 환한 표정으로 앞으로 함께 자주 오자는 말을 했었다.문연진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테이블 위에 놓인 달콤한 요리를 바라보며 그녀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왜 우리는 함께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걸까?’구승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심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녀가 더 이상 버틸 힘조차 앗아가고 있었다.천아름은 이혼을 잠시 미뤄보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알고 있었다.미루든, 미루지 않든 결과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최하영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불러냈다.강하리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맛있어요.”최하영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말했다.“제 정보가 틀린 줄 알았네요.”강하리는 그가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묻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최 대표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최하영은 공용 젓가락으로 그녀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말했다.“안현우 일이죠? 기명제약 뒤에서 손 쓴 사람, 그 녀석 맞아요. 이제 어떻게 도와줄까요?”강하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가슴 한구석이 더욱 답답해졌다.공항까지 마중을 나간 것도, 시킨 음식이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인 것도, 그리고 지금 안현우가 뒤에서 손을 쓰고 있는 것도.최하영이 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