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인상을 찌푸렸다.“누군지는 얘기했어?”안예서는 고개를 내저었다.“인제 어떡하죠?”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내가 가서 대표님 뵙고 올게.”구승훈의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와 통화 중인 듯싶었는데 목소리가 유달리 부드러웠다.강하리는 저도 몰래 심장이 쿡쿡 쑤셨다. 그래서 숨을 깊게 몰아쉬며 마음을 다잡고 노크했다.“들어와.”구승훈의 목소리가 안에서 전해졌다.강하리는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래, 나 지금 볼일 있어서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강하리를 쳐다봤다.“할 얘기 있어?”“신제품 출시 모델에 관해서요, 우리 기획안이 이미 통과됐는데 대표님이 왜 또 사람을 바꾸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구승훈이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강 부장은 더 물을 필요 없이 지시대로 움직이면 돼.”강하리의 안색이 살짝 일그러졌다.기획안은 그녀가 무려 반년이나 공들여 겨우 통과됐는데 이 남자 한 마디에 바로 캔슬 당하다니.“그럼 누구로 바꾸셨는지만 알려주세요. 저도 모니터링 해야 해서요.”“내 친구야.”구승훈이 무심한 척 대답했다. 그의 태도는 더없이 간결하고 단호했다. 강하리에게 이 결과를 바꿀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그녀도 구승훈의 태도에 바로 짐작했다. 그가 정한 일이니 더이상 의논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강하리는 잠시 침묵한 후 대답했다.“그럼 대표님 친구분더러 되도록 빨리 저한테 연락 주라고 하세요. 기획안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하거든요.”“원래 계획대로 하면 돼. 귀찮지도 않아? 기획안 다시 짜는 거.”“원래 기획안이 안 맞을 수도 있잖아요.”“맞든 말든 상관없어. 속은 좀 나아졌어?”구승훈은 수중의 계약서를 확인하며 그녀에게 물었다.강하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네, 많이 나아졌어요.”“그래. 몸을 차갑게 굴지 마.”“알겠습니다.”강하리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대표님, 신제품 모델을 다시 한번 고려해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친구
강하리는 손가락을 살짝 구부렸다.“아직도 위가 약간 불편해요.”“약 먹고 술은 적게 마셔. 샴페인은 별로 독하지 않아.”강하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더 말했다가는 오히려 들통날 것이다.사실 구승훈은 그녀에게 술을 강요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이런 면에서 항상 신사다웠다.하지만 오늘 그는 고집스러웠는데, 아직도 그녀가 임신했다고 의심하는지 일부러 떠보는 것 같았다.파티장에 도착하자 강하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구승훈의 팔짱을 낀 채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안현우를 발견했다.안현우는 제 자리에서 그녀를 향해 샴페인 잔을 들어 보였고, 구승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강 부장 매력이 대단한가 보네.”그러자 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구 대표님 안심하세요. 저는 돈에만 관심 있어요.”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말은 누구든지 돈만 주면 강 부장이랑 잘 수 있다는 거네?”강하리는 덤덤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구 대표님께서 더 많은 돈을 내놓으시면 되잖아요. 그럼 전 절대 다른 사람한테 가지 않을 겁니다.”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확 굳어졌고, 강하리는 더 말하지 않았다.구승훈에게 다가와서 샴페인을 권하는 사람은 많았다. 강하리는 예의 있게 그들을 맞이하고 샴페인을 살짝 입술에 대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샴페인을 마시지 않았다.“저 좀 쉬러 가도 될까요?”한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 강하리는 다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구승훈은 그녀를 보내주며 말했다.“가서 뭐 좀 먹어.”“네.”강하리는 접시를 들고 가서 케이크 두 조각을 챙긴 후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어느새 안현우가 그녀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안 대표님.”강하리는 정중하게 인사했다.안현우는 그녀에게 샴페인 잔을 건넸지만 그녀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그런데 이번에 안현우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구 대표랑 잘 지내요?”강하리가 대답했다.“그럭저럭 괜찮아요.”안현우가 웃으
구승훈은 강하리의 옆에 와서 앉고 큰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어? 나도 들어보자.”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안 대표님께서 대표님의 첫사랑이 곧 돌아오신다고 하셨어요.”구승훈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치더니 별다른 대답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그래서 강 부장이 그렇게 즐겁게 웃고 있었던 거야?”강하리는 가슴이 답답했다. 웃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를 붙잡고 울며불며 왜 첫사랑은 사랑하면서 자신은 사랑하지 않냐고 묻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그녀는 눈치 있는 사람이었다.“전 그저 구 대표님께는 좋은 일인 것 같아서 기뻤을 뿐입니다.”구승훈의 안색은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렇다면 강 부장의 관심에 고마워해야겠네.”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안현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구 대표님, 첫사랑분이 돌아오시면 저한테 알려주세요. 제가 강 부장을 데려갈게요. 이건 구 대표님의 사람을 빼앗는 거 아니죠?”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구승훈은 그 말을 듣고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왜요? 두 사람 벌써 협상했어요?”“아니요!”강하리는 바로 부정했다.안현우는 구승훈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강하리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저 조금 전에 이미 안 대표님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그러나 안현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강 부장, 그렇게 빨리 거절하지는 마요. 겪어보지 않으면 뭐가 진짜 자신한테 어울리는 것인지 몰라요.”안현우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강하리의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웠다. 그녀는 안현우가 일부러 자신한테 보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대표님, 저는 진짜 안 대표님한테 마음이 없어요.”구승훈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샴페인 잔을 흔들고 있었다.“강 부장은 돈만 있으면 되잖아. 왜 안 대표는 안 되는 거지?”강하리의 입술을 하얗게 질렸다
강하리는 마음이 씁쓸했다.“전 그저 예의상 웃었을 뿐이에요.”구승훈이 코웃음을 쳤다.“강 부장 매너 좋네.”강하리는 더 말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참았던 것을 분출하듯 그녀의 어깨에 키스하면서 가슴까지 내려왔다.몇억 되는 드레스는 한 번밖에 입지 못했는데 구승훈이 잡아당겨 찢어지는 바람에 다시는 못 입게 되었다.“대표님, 오늘 안 하면 안 돼요?”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물었다.“왜? 안현우 때문에 그래? 남겨 두었다가 걔랑 하려고?”강하리는 그제야 자신이 안현우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눈 것 때문에 구승훈이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 알아차렸다.어이없게도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미친 듯한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었다.남자들은 다 이런 걸까. 자신이 놀다 버린 장난감을 절대 다른 사람이 다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살살 하면 안 돼요?”구승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강 부장, 나한테 빌어봐.”차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자신을 향한 이 남자의 뜨거운 욕구를 견뎌내면서 조심스럽게 배를 가렸다.끝나고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집으로 올라갔다. 강하리는 구승훈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바로 욕실로 향했다. 그는 그녀를 씻긴 후 다시 안아서 침대 위에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주었다.강하리는 배가 불편한 것을 느꼈다. 그런데 구승훈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그를 밀어냈다. “대표님, 저 오늘 진짜 피곤해요.”그러나 구승훈은 무릎을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 놓고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막 욕구가 솟구칠 때 그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그는 관계가 진행될 때 방해받는 걸 제일 싫어했다.그는 짜증이 난 채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는데, 예상밖으로 화를 내지도 않고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 그저 갑자기 하던 일에 흥미를 잃었을 뿐이었다.구승훈은 일어나서 가운을 걸치고 핸드폰을 들고 나갔다.강하리는 침대
“자간전증이야.”손연지는 초음파 소견서를 들고 강하리에게 보여주었다.“이 개자식, 안 하면 죽는대?”강하리는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마음을 진정시켰다.손연지는 답답해서 말했다.“아니면 그냥 그 남자한테 말해.”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눈을 떴다. 그녀는 구승훈에게 말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는 조만간 구승훈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설령 말한다고 해도 아이를 지키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포기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구승훈에게 그 잔인한 일을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어떻게 말할지 생각해 볼게.”손연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결정한 거야?”강하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이렇게 끄는 건 해결책이 아니야.” 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빨리 결심하고 끝내. 다 끝나면 그 남자 차버리고 혼자 당당하고 멋지게 살면 돼!”강하리는 슬픔을 삼키고 말했다.“아직 엄마 병원비도 벌어야 하는데 어떻게 멋지게 살아?”손연지가 물었다.“요즘 어머님 상태는 어때? 좀 나아졌어?”강하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여전히 똑같아.”손연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외쳤다.“강하리!”강하리가 뒤를 돌아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찬수가 서 있었는데, 얼굴이 너무 부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양손은 두꺼운 거즈로 감싸고 있었다.“이년아, 네가 사람 시켜서 날 때렸지?”강찬수는 포효하며 강하리에게 달려들었다.강하리는 경멸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라면 당신을 죽이라고 했을 거야!”“이 년이...”“강찬수, 당신 뭐 하는 짓이에요!”손연지는 그 모습을 보고 강하리 앞에 황급히 막아섰다.“움직이면 당장 경비원을 부를 거예요!”강찬수는 차갑게 웃으며 강하리에게 말했다.“너 딱 기다려!”강찬수는 화를 내며 자리를 떴다.손연지는 눈살을 찌푸리고 강하리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야?”강하리가 강찬수가 찾아왔었던
그 의사는 말하다가 갑자기 멈칫했다.“그런데 송유라와 함께 온 남자는 꽤 잘 생겼을 뿐만 아니라 아우라가 너무 강했어요.”“맞아요. 남자 연예인보다 훨씬 더 잘생겼던데, 설마 송유라의 남자친구는 아니겠죠?”“맞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한밤중에 병원에 같이 왔겠어요?”두 의사가 이미 다른 화제로 넘어간 것을 본 손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아무렇지 않을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난 이만 돌아가야겠어.”손연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마음이 불편할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다른 사람들은 강하리와 송유라의 관계를 모르지만 손연지는 알고 있었다.송유라는 강하리의 이복동생이다. 강하리는 언니지만 사실 송유라보다 고작 30분 일찍 태어났다.같은 날 태어난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랐다.강하리의 어머니 정서원은 송동혁이 길가에서 발견하고 데려온 여자이다.송동혁이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엉망인 모습으로 자신의 이름이 정서원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 못 했다.정서원은 젊었을 때 매우 아름다웠고 아무 기억도 없었지만 몸에 두른 액세서리들은 전부 비싼 것들이었다.송동혁은 예쁜 여자를 보고 좋았는지 아니면 정서원의 몸에 있는 액세서리들 때문인지 그녀를 데리고 있기로 결정했다. 심지어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나중에 정서원이 임신을 했는데도 송동혁은 결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정서원이 참지 못하고 묻자 그제야 그는 본모습을 드러냈다.그때서야 모든 사람들은 송동혁이 정서원과만 만난 게 아니라, 제약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우연히도 그 제약 회사 사장의 딸도 임신했고 송동혁은 그녀와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는 정서원과 만난 것이 폭로될까 봐 두려워서 그녀에게 아기를 낙태하도록 강요했다.정서원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몰래 병원에서 도망쳤다.아이를 낳은 후 그녀는 거의 10년 동안 떠돌다가 연성시로 다시 돌아왔다. 강하리는 어머니를
강하리는 그들과 엮이기조차 싫었고, 송하양이라는 이름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그들이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강하리는 평생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3년 전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비가 절실히 필요했던 그녀는 송동혁 앞에서 구걸을 해야 했다.그때 그녀는 송동혁의 차가움을 완전히 알게 되었고, 그 후 그녀는 그의 가족과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다.단지 가끔 TV나 트위터에서 송유라의 이름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송유라는 4년 전 해외에서 데뷔했다.4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예뻤고 국민 첫사랑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으며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탔다.강하리는 집으로 돌아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그 해변으로 돌아왔다. 겨울의 해변은 찬바람이 강했다. 해변가 별장의 창문이 윙윙 거리며 날아갔다.송유라는 팔찌를 잃어버려서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며 가서 팔찌를 되찾아오라고 명령했다.강하리는 그 팔찌를 본 적이 있다. 다이아몬드가 아름답게 박혀 있는 팔찌에는 ‘하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송동혁이 송유라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송유라는 이 팔찌를 끼고 사진을 많이 찍었다.잃어버려서 정말 안타까웠지만, 강하리는 그녀가 그것을 찾도록 도와주지 않았다.어두운 밤, 그런 강풍이 부는 날에 외출하는 것은 죽으려는 것과 같았다.송유라의 포효가 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송동혁은 그녀를 서재로 불러와서 물었다.“네 엄마가 얼마 전에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며?”당시 강하리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아서 잘 몰랐지만, 그의 말에 담긴 위협을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오늘 여기 오라고 하신 이유가 정확히 뭐죠? 내 생일 때문인가요, 아니면 죽이려고 부른 건가요?”송동혁은 즉시 얼굴이 어두워졌다.강하리는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고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해변으로 향했다.강찬수가 하루 종일 술을 마셔대니 집안 살림은 모두 어머니에게 의존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때때로 장진영
그렇다면 구승훈은 어제 첫사랑의 전화를 받고 나간 것일까?강하리는 마음이 찌릿찌릿 아파왔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배를 만졌다. 그녀는 구승훈의 첫사랑이 정말 돌아왔다면, 자신이 떠나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떠나가서 배 속의 아이를 낳아도 되는 것인가?강하리는 자신의 배를 쳐다보았다.안예서는 또 뭐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보스?”강하리는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이제 일하자. 이런 건 그만 얘기하고, 대표님께서 들으시면 혼내실 수 있으니까 조심해.”안예서는 무안해서 혀를 내밀며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강하리도 일하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점심시간이 되자 안예서가 문을 두드렸다.“보스, 대표님께서 부르십니다.”...구승훈의 사무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안에서 새어 나오는 구승훈의 목소리를 들었다.아마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듯했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강하리는 심지어 그에게 이렇게 부드러운 모습이 있는 줄도 몰랐다.그때 전담 비서가 다가왔다.“강 부장님, 대표님께서 강 부장님께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셨습니다.”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피곤하면 좀 쉬어. 여기저기 다니지 말고. 그래, 난 일이 있어서 이만 먼저 끊을게.”구승훈은 전화를 끊은 후 넥타이를 살짝 풀고 강하리 쪽을 힐끗 쳐다봤다.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검은 눈동자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어젯밤에 전화했던데, 무슨 일 있었어?”그를 본 순간, 강하리를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는 구승훈에게 사실을 숨기기로 결심했다.그가 첫사랑과 잘 이어지면, 강하리는 떠나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몸이 좀 불편했어요.”구승훈은 코웃음을 쳤다.“난 또 내가 가서 아쉬워하는 줄 알았네.”강하리는 한참 아무 말도 없다가 입을 열었다.“그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내 물건이니 당연히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거죠. 정안이나 에비뉴가 아니라 온 세상을 이 여자에게 줘도 부족해요. 다들 자신 있으면 제 손에서 빼앗아 가세요. 그게 아니면 제 아내 회사에 찾아와서 괜히 공기나 더럽히지 마시고요.”구민성과 구민수를 제외한 다른 친척들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움츠렸고 구민성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구승훈이 두 눈을 부릅뜨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거기 서서 뭐 하고 있어! 얼른 이 사람들 내보내지 않고!”준봉은 그 말에 급히 경호원을 불러들여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구민성의 목소리가 꼭대기 층에 계속 울려 퍼졌다.“구승훈, 이거 놔. 난 네 삼촌이야. 구승훈, 두고 봐. 구씨 가문이 네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줄게!”구민성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구승훈은 구동근에게 전화를 걸었다.“시간 나면 B시에 오세요. 하리 어머니 산소에 가서 절이라도 하셔야 제가 결혼식을 올리죠.”구동근은 순식간에 발끈했다.“망할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구승훈은 웃었다.“못 알아들어요? 제가 다시 얘기할까요? 급하니까 일찍 오세요.”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빨리 강하리와 식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한 건 사실이었다.무슨 일이 있든 강하리를 명실상부 그의 아내로 만들어야 그가 이성을 잃어도, 구씨 가문에서 원하지 않더라도 강하리에게 준 재산을 빼앗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구승훈은 문득 자신이 무척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시간을 지체해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강하리가 자신을 포기할까 봐, 상황이 점점 악화하여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강하리를 포기해야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고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흔들릴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강하리가 회사로 달려갔을 때 그녀가 본 건 응접실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서 있는 구승훈의 뒷모습뿐이었다.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이 남자에게서 다시 한번 느껴져
노민우가 혀를 차며 해명하려던 찰나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렸다.휴대폰에 걸려 온 전화를 살피던 그는 손연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가 콧방귀를 뀌며 뒤돌아 위층으로 향하자 노민우는 황급히 그녀를 다시 끌어당겼다.“내가 한 밥 안 먹을 거야?”“너나 먹어!”손연지가 씩씩거리며 그를 발로 찼다.“꺼져! 누가 그딴 거 먹고 싶대?”“이미 다 했는데.”손연지는 이를 갈았다.“노민우, 난 널 남자로 생각 안 해.”노민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이렇게 오랜 시간 애까지 만들었는데 아직도 내가 남자라는 걸 증명하지 못한 거야?”손연지가 비웃었다.“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냥 인간이 아닌 것 같다. 기다려, 내가 결혼할 때 너한테 주례를 부탁할 테니까.”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노민우를 밀어냈고 상대는 더 말하고 싶었지만 손연지에게 연달아 발길질당했다.“손연지!” 노민우는 화가 났다.“너 누구랑 결혼하는데?”“누구랑 결혼하든 내 마음이지. 나 따라다니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아?”노민우가 눈을 부릅떴다.“진짜 결혼하려고?”손연지가 웃었다.“왜, 너는 약혼해도 되고 난 결혼하면 안 돼?”“난 엄마 달래려고 약혼한 거지 진짜로 결혼할 생각은 없어.”손연지는 그 말에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은 듯 차분하게 노민우를 바라보았다.그 말을 들었을 때 심장마저 한 박자 늦게 뛰었다는 건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내 그녀는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왜 흔들려? 뭘 망설여? 전에 당한 굴욕으로 충분하지 않아? 하리처럼 엄마가 목숨까지 잃어야겠어?’게다가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지금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는 굴복하지 않았을 거다.고작 한심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삶을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싶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두 사람은 또다시 불쾌하게 등을 돌렸고 노민우는 식탁에 앉아 검게 탄 밥을 바라보며 조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이미 해명을 다 했는데 왜 아직 화가 나 있는 걸까.노민우는 정신
기세등등하게 강하리를 찾아와 정안그룹과 에비뉴를 내놓으라고 따지려던 참인데 강하리가 그들을 만나러 오지도 않을 줄이야.그들이 오자마자 응접실로 안내하고 좋은 차와 물을 대접했지만 강하리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강하리가 전화를 끊자 손연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아? 정 안 되면 회사로 가. 걱정하지 마, 내가 죽이진 않을 테니까.”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일그러지며 고개를 돌려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노민우를 바라보았다.이번엔 접시를 깨고 그다음엔 그릇을 떨구자 강하리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구씨 가문 사람들보다 어젯밤 소파에서 잔 노민우가 복수심에 주방을 망쳐버릴까 봐서 걱정이었다.“그릇 하나만 더 깨뜨리면 경비 불러서 쫓아내게 할 거예요!”그릇을 들고 있던 노민우의 움직임이 갑자기 조심스러워졌고 가정부는 연정이를 안은 채 눈 뜨고 못 봐주겠다는 표정으로 부엌을 바라보았다.“사모님, 제가 하게 해주세요.”강하리는 한숨을 쉬었다.“됐어요. 고생 좀 하라고 해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가 연정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가정부는 손연지와 노민우를 번갈아 보았다.“저기, 일들 보세요. 난 좀 치우고 있을게요.”손연지는 사람들이 떠난 뒤에야 부엌으로 향했고 멈칫하던 노민우는 고개를 돌려 손연지를 바라보았다.“어젯밤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손연지는 부엌문 앞에 서서 심호흡하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돌아가, 노민우. 여기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노민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이게 어떻게 시간 낭비야? 손연지, 난 특별히 사과하러 온 거야. 화 풀고 나랑 같이 가. 내가 일자리도 다시 마련해 줄게, 응?”손연지가 갑자기 비웃었다.“시간 낭비가 아니면 뭔데? 노민우, 난 다른 사람 결혼 망칠 생각 없어. 예전엔 네가 싱글이라 기꺼이 만났지만 이젠 약혼녀도 있으면 그 사람이나 소중히 여겨.”노민우의 손에 들린 칼에 손가락을 베일 뻔하며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 여자를 소중히 여기라고?”손연지
어둡고 축축한 지하 감옥.구승훈은 철창에 갇힌 느낌뿐이었다.손목과 발목은 물론 목까지 무거운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그의 뒤에는 사나운 개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그는 몸부림을 치려 했지만 전혀 힘을 쓸 수 없어 울부짖으며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내가 잘못했어요.”“엄마, 꺼내줘요!”“엄마, 살려주세요...”그러나 그의 외침에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고 이빨을 드러낸 개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가 그에게 달려들었다.“엄마!”구승훈이 번뜩 눈을 떴고 조용한 치료실에는 진자 바늘이 똑딱거리는 소리만 들렸다.정신과 의사인 임희주가 옆에 있다가 그가 깨어나자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기분이 어떠세요?”구승훈은 미간을 누른 채 물을 건네받지 않았다.마음속에 억눌린 짜증은 진정되지 않았고 그는 여전히 같은 말만 했다.“내일도 이 시간에 뵙죠.”임희주가 입술을 달싹거렸다.“구승훈 씨, 천천히 해도 돼요. 너무 긴장한 상태라 여유가 필요해요.”“필요 없습니다.”말을 마친 구승훈은 치료실에 조금도 머물지 않고 떠났다.임희주는 문 앞에 서서 구승훈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이 눈가에 스쳤지만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휴대전화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차에 돌아온 구승훈이 넥타이를 끌어당기자 준봉은 백미러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대표님, 괜찮으세요?”구승훈은 입꼬리를 당기며 노진우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다.노진우는 몸이 좋아진 이후 구승훈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구승훈은 계속 연성에 남으라고 했다.구씨 가문 사람들을 감시하면서 여초연의 행방을 찾으려는 거다.여초연은 그때 떠난 이후 증발한 듯 사라졌고 구승훈은 그동안 많은 인력을 해외에 보냈지만 여초연에 대한 단서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너무 한가해 미칠 지경이던 노진우는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무척 들떴다.“대표님, 시키실 일 있으세요? 저 언제든 B시로 갈 수 있어요.”구승훈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가서 여씨 가문 조상 무덤 좀 파
노민우는 다른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 구승훈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입가에 차오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노민우가 떠난 후 구승훈은 한참 동안 서재에 홀로 서 있다가 마침내 뒤돌아보던 그는 갑자기 책상 위에 있던 재떨이를 집어 들어 부숴버렸다.분풀이인 동시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재떨이는 여기저기 산산조각이 났고 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생각 끝났습니다. 최면 치료 받을게요. 내일 가겠습니다.”전화기 너머 정신과 의사가 서둘러 답했다.“네, 준비할게요.”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그는 여전히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지금의 삶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기에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좋은 아내와 사랑스러운 딸이 있는데 어렵게 얻은 이 모든 걸 잃고 싶지 않았다.강하리는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연정이가 자고 있는지 확인하러 나오는 순간 마침 서재에서 걸어 나오는 구승훈을 봤는데 웬일인지 손가락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강하리가 걸음을 멈칫했다.“왜 그래?”구승훈은 손의 상처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재떨이가 깨져서 치우다가 실수로 베었어.”강하리는 급히 다가와 그를 아래층으로 끌어당긴 뒤 구급상자를 찾아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구승훈의 상처 치료를 도왔다.“괜찮아, 다 큰 남자가...”“마음이 아프다고!” 강하리는 구승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쏘아붙였고 말을 마친 그녀가 눈물을 머금은 채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구승훈, 몸에 상처가 너무 많아. 앞으로는 다치지 마.”팔의 흉터도, 복부의 흉터도, 허리 흉터까지 모두 자신을 구하다가 생긴 상처였다.그녀가 그동안 고통받긴 했어도 이 남자 역시 그녀를 위해 희생하고 있었다.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이내 웃는 얼굴로 그녀의 눈물을 말끔히 닦아주었다.“아내가 걱정해 주니까 그 어떤 상처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아.”강하리가 그를 노려보았다.“입 다물어.”말하며
노민우는 손연지가 갑자기 문을 닫을 줄은 몰랐기에 코가 부딪혔고 순간 고통이 머리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문을 닫은 손연지는 노민우의 비명을 들었지만 다시 문을 열지 않았다.개자식, 더 열을 받지 않게 꺼졌으면 좋겠다.구승훈이 뒤를 따라가 보니 노민우가 손연지의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쭈그리고 앉아 우는 게 무슨 소용이야? 난 무릎 꿇고 울었어.”노민우는 멈칫했다.“정말이야?”구승훈은 태연하게 피식 웃었다.“당연하지. 아니면 내 아내를 어떻게 얻었겠어?”“승훈아, 네 아내는 네가 하도 매달려서 돌아온 거잖아.”“웃겨, 내 진심에 감동한 거지.”구승훈의 말이 끝나자 강하리가 방문을 열었다.“오늘 연정이랑 같이 자.”구승훈은 깜짝 놀랐다.“그럼 넌?”“난 손연지랑 잘 거야.”강하리는 말을 마치고 손연지의 방으로 향했다.“...”노민우가 슬쩍 물었다.“강하리 씨, 나는요?”“나가서 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두 남자를 무시하고 뒤돌아 손연지의 방으로 들어갔다.복도에서 구승훈은 어두운 얼굴로 노민우를 바라보았고 노민우는 다소 억울하단 표정이었다.“나 때문은 아니잖아.”구승훈은 비웃으며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고 노민우가 서둘러 따라갔다.“승훈아, 우리 친구 맞아?”“아니.”구승훈은 망설임 없이 문을 닫았다.손연지는 여전히 화가 난 채로 씩씩거리며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대체 저 노민우 개자식이 뭐라고!일부러 그녀를 화나게 하려고 온 게 틀림없었다.강하리가 막 들어왔을 때 손연지가 노민우를 혼잣말로 욕하는 소리가 들려 잠시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얘기 잘했어?”손연지가 피식 웃었다.“잘했다고 봐야지. 내가 칼로 그 자식 몸을 잘라버리진 않았으니까.”말을 마친 손연지가 웃음을 터뜨렸다.“하리야, 내가 대체 왜 저런 놈을 좋아한 걸까?”그 말을 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고 강하리는 안쓰러운 마음에 서둘러 다가가 손연지를 안았다.손연지가
노민우가 약혼했을 때 손연지는 둘 사이에 조금의 희망도 남기고 싶지 않아 아이를 지우고 홀연히 돌아섰다.마음속에 노민우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확고했다.그런데 노민우의 약혼녀도, 노민우의 어머니도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줄이야.강하리가 한숨을 쉬며 다가가서 칼을 뺏으려는 순간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밖으로 끌고 갔다.“구승훈, 뭐 하는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멀리 해. 우리 부부 사이 방해하지 않게.”강하리는 다소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떼어내고 가정부에게서 연정이를 건네받았다.“두 사람 싸우지 않게 잘 지켜봐. 난 연정이 씻기고 올 테니까.”구승훈은 피식 웃었다.노민우가 정말 손연지와 싸울 생각이라면 굳이 살아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거실에서 노민우는 한동안 눈에 띄게 살이 빠진 손연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로 표현 못할 감정을 느꼈다.어머니가 손연지를 찾으러 갔고 노씨 가문으로 손연지를 데려와 모욕을 줬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손연지 어머니가 화가 나서 쓰러졌다는 것도.노민우는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손연지가 수술한 걸 알았을 때 왜 그녀에게 화를 냈을까.“미안해.”노민우는 이 세 글자를 끄집어내는 데 한참을 고민했다.“필요 없어.” 손연지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정말 미안하면 돈이나 줘. 그쪽 어머니 방법이 나쁘지 않아. 돈으로 해결하는 데 굳이 감정 낭비할 필요 없지. 애초에 날 먹여 살리겠다며? 한 달에 2억으로 계산해서 이따가 24억 줘. 그리고, 앞으로 네 약혼녀가 날 찾아올 때마다 2억씩 보상금을 받을 거야. 이자는 됐어.”“손연지, 우리 사이에 남은 게 돈밖에 없는 거야?”손연지는 마음이 씁쓸했다.“그게 아니면? 애초에 그냥 잠만 자는 사이였잖아.”아무리 거짓된 모습을 보이려고 해도 마음이 괴로웠다.“내가 아니라고 하면?”노민우가 갑자기 앞으로 다가왔고 손연지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내 그에게 허리를 잡혔다.“손 놔.”노
거실에서 구승훈은 잔뜩 어두운 눈빛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노민우를 바라보았다.노민우는 초라한 행색이었는데 머리는 다소 헝클어져 있었고 입고 있던 셔츠는 약간 구겨진 채로 마치 구걸하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우리 집에 왜 왔어?” 구승훈은 못마땅한 표정이었고 노민우는 다소 억울했다.“승훈아, 그래도 우리가 같이 자란 사이인데 그렇게 매정하게 굴면 안 되지. 내가 B시에 지낼 곳이 없어서 그러는데 며칠만 재워주면 안 돼?”“안 돼.” 구승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손연지는 강하리가 데려왔기에 뭐라 말하지 못하지만 절대 집안에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는 걸 허락할 수 없었다.“승훈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구승훈이 그를 바라보았다.“집도 못 사서 남의 집에서 살아야 해?”“못 사는 게 아니라 엄마가 카드 정지시켰어.”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승훈아, 난 그냥 강하리 씨한테 나 만나보지 않겠냐고 말한 것뿐이고 강하리 씨도 거절했잖아. 왜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야?”그렇게 말하던 노민우는 다시 2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손연지 여기 있어?”“응.”“손연지도 있는데 나는 왜 안 돼?”구승훈이 비웃었다.“모르겠어? 이 집에선 내가 결정할 수 없어.”“...”한편 강하리는 노민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손연지의 방으로 갔다.“정말 안 만날 거야?” 강하리가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그 자식 오기만 해봐, 죽여버릴 거야!”입꼬리가 움찔하던 강하리는 문득 손연지가 수술받고 난 뒤 노민우가 그녀를 찾아갔을 때 그가 손연지에게 함부로 한 건지, 손연지가 노민우를 혼내준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뭐가 됐든 그녀는 손연지의 선택을 존중했지만 방을 나서기 전 이렇게 덧붙였다.“연지야, 노민우가 찾아온 이상 그렇게 쉽게 떠나지 않을 거야. 난 그래도 얘기는 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해명이라도 듣게.”강하리는 말을 마친 후 손연지를 바라보았고 손연지는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저 사람 내쫓고 앞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요.”경비원은 서둘러 답했다.“네, 강 대표님.”새로운 주인 앞에서 경비원들은 그의 말을 어길 수 없었고 이정숙이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젊고 힘센 경비원 몇 명을 이길 수는 없었다.이정숙의 모습과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손연지는 입을 삐죽거렸다.“진 장관님께 어떻게 저런 엄마가 있을 수 있지?”강하리는 웃으며 “진 장관님은 어떻게 저런 엄마를 얻었어?”강하리가 웃으며 화내지 말라고 달래다가 손연지의 표정이 확 바뀌는 것을 보았다.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한 여자가 빙그레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노민우 곁을 따라다녔던 여자라 강하리는 순식간에 알아차렸다.이 여자가 바로 노민우가 약혼한 여자라는 것을.순간 강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노민우 개자식은 손연지에게 제대로 설명한다고 해놓고 며칠이 지나도 설명이 아니라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더니 이젠 약혼녀가 문 앞까지 찾아오게 했다.강하리가 손연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몇 걸음도 못 가 뒤에 있던 여자가 불렀다.“강 대표님, 손연지 씨와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강하리는 뒤를 돌아보며 뒤따라오는 여자를 흘끗 쳐다보았다.“제가 안 된다고 하면요?”여성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지만 곧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강 대표님, 뭐가 무서워요? 내가 손연지 씨를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혹시 강 대표님도 친구가 내연녀라고 생각해 마음이 불편한가요?”“말 가려서 해.”강하리의 얼굴이 싸늘해지고 여자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B시든 인터넷에서든 강하리의 명성은 자자했고 심씨 가문에서도 어젯밤 대부분 사업체를 강하리 명의로 이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거기에 정안그룹, 에비뉴, 그리고 강하리 본인이 세운 JM까지 있어 도저히 그녀에게 밉보일 수 없었기에 손연지를 돌아보았다.“손연지 씨, 시간 나면 나랑 얘기 좀 해요. 모든 일이 피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