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그들과 엮이기조차 싫었고, 송하양이라는 이름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그들이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강하리는 평생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3년 전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비가 절실히 필요했던 그녀는 송동혁 앞에서 구걸을 해야 했다.그때 그녀는 송동혁의 차가움을 완전히 알게 되었고, 그 후 그녀는 그의 가족과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다.단지 가끔 TV나 트위터에서 송유라의 이름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송유라는 4년 전 해외에서 데뷔했다.4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예뻤고 국민 첫사랑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으며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탔다.강하리는 집으로 돌아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그 해변으로 돌아왔다. 겨울의 해변은 찬바람이 강했다. 해변가 별장의 창문이 윙윙 거리며 날아갔다.송유라는 팔찌를 잃어버려서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며 가서 팔찌를 되찾아오라고 명령했다.강하리는 그 팔찌를 본 적이 있다. 다이아몬드가 아름답게 박혀 있는 팔찌에는 ‘하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송동혁이 송유라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송유라는 이 팔찌를 끼고 사진을 많이 찍었다.잃어버려서 정말 안타까웠지만, 강하리는 그녀가 그것을 찾도록 도와주지 않았다.어두운 밤, 그런 강풍이 부는 날에 외출하는 것은 죽으려는 것과 같았다.송유라의 포효가 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송동혁은 그녀를 서재로 불러와서 물었다.“네 엄마가 얼마 전에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며?”당시 강하리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아서 잘 몰랐지만, 그의 말에 담긴 위협을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오늘 여기 오라고 하신 이유가 정확히 뭐죠? 내 생일 때문인가요, 아니면 죽이려고 부른 건가요?”송동혁은 즉시 얼굴이 어두워졌다.강하리는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고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해변으로 향했다.강찬수가 하루 종일 술을 마셔대니 집안 살림은 모두 어머니에게 의존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때때로 장진영
그렇다면 구승훈은 어제 첫사랑의 전화를 받고 나간 것일까?강하리는 마음이 찌릿찌릿 아파왔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배를 만졌다. 그녀는 구승훈의 첫사랑이 정말 돌아왔다면, 자신이 떠나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떠나가서 배 속의 아이를 낳아도 되는 것인가?강하리는 자신의 배를 쳐다보았다.안예서는 또 뭐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보스?”강하리는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이제 일하자. 이런 건 그만 얘기하고, 대표님께서 들으시면 혼내실 수 있으니까 조심해.”안예서는 무안해서 혀를 내밀며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강하리도 일하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점심시간이 되자 안예서가 문을 두드렸다.“보스, 대표님께서 부르십니다.”...구승훈의 사무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안에서 새어 나오는 구승훈의 목소리를 들었다.아마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듯했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강하리는 심지어 그에게 이렇게 부드러운 모습이 있는 줄도 몰랐다.그때 전담 비서가 다가왔다.“강 부장님, 대표님께서 강 부장님께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셨습니다.”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피곤하면 좀 쉬어. 여기저기 다니지 말고. 그래, 난 일이 있어서 이만 먼저 끊을게.”구승훈은 전화를 끊은 후 넥타이를 살짝 풀고 강하리 쪽을 힐끗 쳐다봤다.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검은 눈동자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어젯밤에 전화했던데, 무슨 일 있었어?”그를 본 순간, 강하리를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는 구승훈에게 사실을 숨기기로 결심했다.그가 첫사랑과 잘 이어지면, 강하리는 떠나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몸이 좀 불편했어요.”구승훈은 코웃음을 쳤다.“난 또 내가 가서 아쉬워하는 줄 알았네.”강하리는 한참 아무 말도 없다가 입을 열었다.“그
강하리는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은 절대 그녀에게 벗어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 번도 그녀의 감정을 신경 쓴 적이 없었다.이 몇 년 동안 그녀는 저항할 수 없다면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지시한 임무도 그렇고, 그가 준 아픔도 마찬가지였다.“알겠어요.”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점심 식사를 했다,구승훈은 천천히 우아하게 밥을 먹었는데, 그는 원래부터 식사 시간에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극도로 수양을 따지는 사람이었다.한편 강하리는 넋이 나가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오전에 들은 소문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그들이 식사를 마치자 구승훈의 핸드폰이 울렸다.강하리가 힐끔 쳐다보자 스크린에 ‘S’가 떠 있었다.구승훈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또 무슨 일이야? 먹었어... 응, 너도 잘 챙겨 먹어... 알았어, 끊어.”강하리는 이미 누가 전화를 한 건지 짐작이 갔다.그 첫사랑 말고는 아무도 구승훈을 이렇게 부드럽게 변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어젯밤 그렇게 급하게 나가시더니, 첫사랑이 돌아온 거였어요?”강하리는 무심한 듯 한 마디 물었다.구승훈은 옆에서 향초를 켜려고 하다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그건 내 개인적인 일이야. 강 부장이 신경 쓸 게 아니야.”강하리는 몇 초간 침묵했다.“전 그저 제가 잘릴까 봐 걱정돼서요.”구승훈은 향초에 불을 붙이려다가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강 부장, 혹시 다른 데로 가려고 그래?”강하리는 입꼬리를 올렸다.“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요.”구승훈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걱정 마. 강 부장 돈 못 벌게 하지는 않을 거야. 난 아직 여자를 바꿀 생각이 없거든.”강하리는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가슴이 찌릿찌릿 아파오다가 점점 무감각해졌다.그녀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감사합니다, 대표님.”구승훈은 다시 고개를
송유라는 갑자기 당황했다.“내가 언제 쫓아냈어요? 난 그저 자리를 비켜달라고 한 거라고요.”그녀는 억울한 듯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승훈 오빠, 설마 부장 따위로 나한테 화내는 건 아니죠?”송유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이 몇 년 동안 그녀는 해외에서 늘 구승훈이 먼저 자신에게 연락하기를 기다렸었다. 그런데 4년 동안 구승훈이 그녀에게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이 4년 동안 그녀는 몇 번이나 그를 만나러 돌아오려고 했다.하지만 송유라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당시 그녀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으니...구승훈은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하양이란 애칭을 부르기도 하고 필요할 때 제일 먼저 그녀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심지어 그녀를 위해 기꺼이 친한 친구들과 싸우기도 한다.하지만 그런 특별함에도 선이 있었다.그는 절대 그녀를 만지지 않았고 결혼 얘기를 꺼낸 적도 없었으며, 심지어 부모를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원래 송유라는 이 남자를 압박해서 위기감을 주고 당장 그녀와 결혼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그녀가 어떻게 구승훈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는 오직 그녀 본인만 알고 있다.이 결혼을 빨리 성사시키지 않으면 마음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그런데 구승훈이 헤어지자는 말에 바로 동의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홧김에 외국으로 나갔다. 가기 전에 그녀는 구승훈이 직접 와서 빌지 않는 이상,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었다.원래 송유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타협할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4년이 흘러갈 줄은 예상치 못했다.최근에서야 그녀는 구승훈과 강하리의 소문을 듣게 되고 더는 견딜 수가 없어 돌아온 것이었다.그녀는 강하리를 싫어했다. 강하리의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더할 나위 없이 그녀를 싫어했다.강하리는 송유라보다 예쁘고 품위가 있었으며 성적도 좋았다. 집안 환경을 빼고는 모든 것이 그녀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송유라는 강하리를 미친 듯이 싫어했다.만약 구승
송유라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구승훈의 팔짱을 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고 스튜디오 안으로 걸어갔다.그런데 입구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강 부장님.”송유라는 구승훈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꽁꽁 가린 탓에 강하리는 그녀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가 기뻐서 활짝 웃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조금 전에 차에서 내리라고 한 거, 미안했어요.”송유라는 사과한다는 핑계로 차에서 그녀를 쫓아낸 일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 스튜디오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그 말을 들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강하리에게로 향했다.강하리는 회사에서 꽤 오래 일한 직원이었고 제일 처음 회사가 설립되었을 때부터 구승훈의 옆에서 일을 도왔다. 그래서 구승훈은 늘 그녀를 믿고 있었다.비록 사직하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겪었었지만, 결국 떠나지 않고 회사에 남지 않았는가?회사에는 감히 그녀에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송유라만 그렇게 그녀를 대했다.송유라가 내뱉은 말은 사람들의 추측에 확신을 주는 듯했다. 그녀와 구승훈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추측 말이다.하지만 강하리는 송유라가 회사에서 밀던 사모님 이미지를 방해하는 요소였다.그 어느 사모님도 남편 옆에 자신보다 더 예쁘고 일 잘하는 직원이 있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모든 사람들이 굳은 표정으로 강하리를 쳐다보았다.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서로 엉켜 있는 두 사람의 팔을 보더니 다시 시선을 구승훈의 얼굴로 옮겼다. 그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있는 두 여자가 자신을 두고 기싸움을 벌이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강하리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고민했는지 몰랐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전 차에서 내려도 괜찮아요. 단지 상사의 명령을 따른 것뿐이지, 그쪽이랑 전혀 상관없거든요.”순간 송유라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강하리는 분명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게 면박을 주는 것이 틀
송유라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강하리, 네가 승훈 오빠 옆에 몇 년 있었다고 진짜 오빠 사람이 된 것 같아? 오빠는 이 몇 년 동안 대외적으로 항상 싱글이라고 알렸어. 아무것도 아닌 게 주제 파악도 안 되네!”강하리는 칼로 가슴을 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그녀라고 왜 모를까?다만 송유라 앞에서 약하게 물러서진 않았다.“대표님은 내 사람이 아니지만 네 사람은 더더욱 아니야!”송유라도 가슴이 쿡 찔려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강하리, 우쭐거리지 마. 오빠는 조만간 나랑 함께해. 나 이번에 오빠랑 결혼할 마음으로 다시 온 거야. 넌 언제까지 천하게 내연녀 행세나 할래? 네 엄마도 내연녀나 하더니 너도 이러네. 모녀가 쌍으로 역겹다 역겨워!”강하리는 순간 참지 못하고 송유라의 뺨을 후려쳤다.“강하리!”때리자마자 구승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강하리는 손이 움찔거리고 온몸이 얼어붙어 감히 고개 돌릴 엄두도 안 났다.“지금 뭐 하는 거야?”전례 없이 싸늘한 목소리였다.“뺨 때리잖아요. 안 보여요?”“그러니까 왜 뺨을 때리냐고!”강하리는 한없이 차가운 표정을 한 눈앞의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우리 엄마를 욕하는데 그럼 보고만 있을까요?”“아무 이유 없이 욕할 리 없잖아!”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그거야 송유라한테 물어야겠죠. 입이 너무 근질거려서 우리 엄마를 모욕하고 싶었는지.”구승훈은 차가운 시선으로 송유라를 쳐다봤다.송유라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아니에요 그런 거. 난 그저 강 부장님한테 사과하러 온 것뿐이에요. 저번에 차에서 내리게 한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려 사과하러 왔는데 제 마음을 받아주지도 못할망정 되레 저를 때리네요.”강하리는 송유라가 어떤 인간인지 진작 알고 있었지만 배우 뺨치는 연기에 여전히 소름이 끼쳤다.구승훈은 다시 강하리에게 시선을 옮겼다.강하리는 그를 마주 보며 쏘아붙였다.“대표님 지금 저 안 믿으시는 거예요?”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차갑고 싸늘한 표정이 모든 걸 설명해주었다.이
“공인이면 더더욱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죠, 안 그래요? 명확히 해둬야 아무도 유라 씨 비방 안 해요.”두 여자의 전쟁에서 승패를 가리는 건 이 사건의 진실이 아니었다. 오직 이 남자의 태도에 달렸다.현재 상황으로 봐선 강하리가 처참하게 졌다.그녀도 안다. 이렇게 추궁하는 게 결국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구승훈이 딱 잡아떼고 그녀를 죄인으로 인정하면 팩트가 눈앞에 놓여도 절대 승인하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에게 팩트를 알려주고 싶다.“더 돌려볼 거 없어요. 내가 안 따진다는데 대체 왜 이렇게 집요하게 굴어요 강 부장님?”송유라는 살짝 안달이 났다.강하리는 그녀를 쳐다보며 되물었다.“왜 그럴 필요 없죠? 송유라 씨 속상하게 그러면 안 되죠!”구승훈은 옆에 서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두 여자를 쳐다봤다.“강 부장, 이제 곧 촬영 들어가야 해. 언제까지 여기서 사람들 시간 지체할래?”저울이 기울어도 너무 기울었다.강하리는 순간 투지가 사라졌다.“미안해요.”이 한마디에 그녀는 온몸의 기운이 쫙 빠졌다.말을 마치자마자 강하리는 차갑게 식은 마음을 추스르며 자리를 떠났다.송유라와 신경전을 벌이는 것 같아도 실은 그녀 자신에게 달갑지 않았다. 3년 동안 옆에 함께 있어 줬는데 돌아오는 건 결국 이런 결과란 말인가?구승훈에게 송유라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이 남자가 과연 보고 싶어 하는지, 이 점을 소홀히 했다.어쩌면 그는 송유라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뿐이다.편애란 바로 이처럼 아무 이유도 따지지 않고 옳고 그름을 마음에 새겨두지 않는 거구나.강하리가 떠난 후에야 구승훈의 시선이 송유라를 향했다.송유라는 여전히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오빠, 너무 아파요.”구승훈은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병원 가자.”...시간을 지체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송유라가 얼굴을 다치는 바람에 결국 촬영이 중단됐다.송유라는 서러운 척하며 구승훈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가기 전 그녀는 조수더러 음료수를 사서 스튜디
그녀는 입가에 다다른 말을 꾹 참았다.구승훈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기에 이렇게까지 말한 건 오늘 반드시 그녀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강하리는 더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금방 갈게요.”전담 비서가 웃으며 대답했다.“서두르십시오.”집에 도착했을 때 구승훈은 막 샤워를 마치고 걸어 나왔다.널찍한 샤워 가운으로도 그의 완벽한 몸매를 가릴 순 없었다.구승훈은 소파에 앉아 담뱃불을 지피고 뽀얀 담배 연기 너머로 강하리를 쳐다봤다.잠시 후 그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우리 강 부장이 이렇게 강하게 나올 때도 있었어? 난 오늘 처음 알았네.”강하리는 제자리에 서서 꿈쩍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없었다.오늘 그녀가 스튜디오에서 송유라를 때린 일로 비꼬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안다.“나도 언제까지 괴롭힘을 당할 수만은 없잖아요. 그래서 대표님은 송유라 때문에 나한테 따져 물으려고 이러시는 거예요?”구승훈은 그녀를 쳐다보다가 한참 후 담뱃불을 껐다.“이리 와.”“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구승훈이 움직이지 않자 강하리는 마지못해 앞으로 다가갔다.그는 책상 위의 상자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마음에 드는지 한번 열어봐.”열어보니 안에는 목걸이가 하나 들어있었다.완벽하게 컷팅 된 다이아몬드가 불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났다.강하리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구승훈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선물해본 적이 없다.선물을 준다는 건 마음을 표한다는 뜻이기에 그녀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대표님이 선물을 줄 리가 있을까.돈은 줄 수 있어도 선물은 단 한 번도 안 줬다.전에는 강하리가 종종 그에게 옷, 신발, 넥타이 등을 선물해주었다.그녀는 돈이 없어 명품을 사주진 못했지만 의외로 대표님이 잘 입고 다녔다.다행히 이 남자가 잘생기고 몸매가 훤칠하여 보세 옷을 입어도 귀티가 났다.그래서인지 강하리도 자꾸만 더 옷을 사주고 싶었다.다만 구승훈은 그녀에게 선물을 준 적이 없다.생각나지 않아서? 또 혹은 아예 생각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강하리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커피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최근 증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치료를 받고 있나요?”임희주는 그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사실 지금은 증상이 뚜렷하지 않은데 유난히 조급하세요. 빨리 낫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사모님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아세요?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일상에서 누가 부담을 주고 있나요?”강하리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더니 커피잔을 잡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도 서서히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한참 동안 임희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지금 증상이 어떤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세요.”임희주는 잠시 침묵했다.“죄송하지만 대표님께서 말하지 않으셨다면 저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제가 아내인 데도요?”“죄송해요.”강하리가 웃었다.“임 선생님, 만약 구승훈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야 할 사람이 나란 건 알고 있죠?”임희주의 입꼬리가 움찔했지만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죄송해요.”강하리는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부담감을 느끼는 부분에 대해선 제가 나중에 물어볼게요.”임희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강하리가 떠난 뒤에야 임희주는 시선을 돌려 한숨을 내쉬며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사모님 상대하기 너무 힘드네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 아내를 만났습니까?”“네, 우연히 만났어요.”임희주가 커피를 살며시 저었다.“미안해요. 아직 대표님 상황에 대해 모르는 줄 모르고 서두르지 않게 설득해 달라던 참이었는데.”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속도 늦출 필요 없다고 했는데 제 말 못 알아들으세요?”“다른 뜻이 아니라 그냥...”“할 말 있으면 나한테 직접 얘기하고 다시는 내 아내한테 찾아가지 마세요.”구승훈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임희주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구승훈
노민우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났고 손연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아쉬워?”강하리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뒤에서 묻자 돌아보는 손연지의 눈에 머금은 눈물이 보였다.강하리는 깜짝 놀라 황급히 손연지를 토닥였다.“그렇게 아쉬우면 돌아오라고 해. 울긴 왜 울어?”하지만 손연지는 웃으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돌아오라고 하겠어. 하리야, 지금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그럼 넌?”강하리는 손연지의 다소 부은 눈을 바라보니 어젯밤에 운 게 분명했다.“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야지. 돈, 돈, 돈을 벌 거야. 난 돈 많은 사람이 될 거야!”손연지는 말을 마친 후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참, 나 몸조리 끝나면 이사 갈 거야. 계속 너희 집에서 애정행각이나 보면서 신세 질 수는 없어.”그녀가 구승훈을 흘끗 쳐다보며 말하자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손 선생님은 신세 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네요?”손연지는 그를 흘겨보며 강하리를 안았다.“아니면 하리야, 나랑 같이 나가서 살래?”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손 선생님은 B시에서도 쫓겨나고 싶은 건 아니죠?”손연지는 강하리에게 기대었다.“자기야, 나 B시에서 쫓아낼 거야?”강하리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얼른 출근이나 해.”구승훈은 다가와 손연지의 품에서 그녀를 떼어냈다.“일단 약부터 바르자.”강하리의 어깨는 사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물집이 더 커진 상태였다.구승훈은 이틀 정도 쉬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오늘 외교부 회의가 있어 출근해야 했다.약을 바르고 나니 손연지도 준비를 마친 뒤라 강하리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자리를 잡게 도와준 뒤 이렇게 덧붙였다.“연지야, 난 그래도 네가 나와 함께 좀 더 지냈으면 좋겠어.”노민우는 약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갔지만 이미 약혼한 이상 그렇게 쉽게 파혼할 리 만무했다.그 과정에서 분명 손연지도 끌어들일 텐
손연지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던 샴푸를 집어 들어 그에게 던졌다.“나가!”노민우는 샴푸를 피하며 순식간에 옷을 벗었다.“씻으면서 얘기하자.”“얘기하긴 뭘... 읍...”손연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민우가 그녀의 입을 막았고 몇 번이나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욕실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닿은 두 몸이 곧바로 욕망에 달아올랐다.노민우는 손연지의 입술을 깨물었다.“이젠 해도 돼?”손연지가 다리를 들어 가격하자 노민우는 중요 부위를 가린 채 뒤로 물러섰다.익숙한 행동에 괜히 안쓰러웠지만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난 손연지를 능글맞게 바라봤다.“농담이야. 아직 몸이 성치 않은데 못한다는 거 알아.”손연지가 타월을 꺼내 몸을 감싸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가자 노민우도 서둘러 수건을 집어 들고 뒤를 따랐다.“안 해도 되니까 오늘 밤에 같이 자면 안 돼? 손연지, 앞으로 1년 동안 못 볼 수도 있잖아.”머리를 말리던 손연지의 손이 멈칫하며 이렇게 말했다.“바닥에서 자.”“네.”노민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아래층에서 강하리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손연지가 놀라며 옷을 입고 내려가려고 하자 노민우가 말렸다.“가지 마. 승훈이가 있잖아.”손연지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내려가지 않았다.다행히도 구승훈이 강하리를 품에 안고 올라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엿들은 뒤 노민우는 절뚝거리며 바닥으로 돌아갔다.손연지가 침대 옆에 기댄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있자 노민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바보가 됐네?”정신을 차린 손연지가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들자 노민우는 손연지의 발목을 잡았다.“마지막 밤인데 나 좀 그만 찰 수는 없어?”손연지는 그의 손에서 발을 빼고 싶었지만 노민우는 놓지 않았다.“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거 놓으면 또 발길질할 거잖아.”손연지는 이를 갈며 베개를 집어 들어 노민우의 얼굴에 내리쳤다.“나가서 자!”노민우는 베개를 껴안은 채 바닥에
노민우는 식사를 마치고 손연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손연지가 그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노민우의 휴대폰이 울렸다.그의 모친이었다.노민우는 무의식적으로 손연지를 바라봤지만 손연지는 이미 시선을 거둔 뒤였다.그녀는 옷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가기 전 한 마디만 남겼다.“난 쉴 거니까 넌 가.”노민우는 혀를 차고는 어머니의 전화를 끊은 뒤 손연지를 끌어당겼다.“손연지, 우리 제대로 얘기 좀 하면 안 돼?”손연지가 눈을 흘겼다.“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얘기하다 내 기분 망치면 넌 끝장이야!”노민우가 손연지에게 다가왔다.“화내지 마.”손연지는 노민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누구는 화내고 싶어서 내는 줄 알아?’“할 말 있으면 빨리 해.”노민우는 잠시 머뭇거렸다.“손연지, 나 기다려줄 수 있어? 1년만 기다리면 내가 가서 집에서 정해준 약혼 해결할 테니까 우선 파혼하고 우리 둘이 어떤 관계로 지낼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응?”옷을 든 손연지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고개를 돌려 노민우를 바라봤다.“어떻게 할 건데?”노민우는 사실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어머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약혼했고 만약 그가 고집을 부리면 어머니에게 죽을 때까지 매를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결혼은 언젠가 취소해야 하는 것이었다.“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 여차하면 승훈이처럼 인연 끊으면 되지.”손연지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진심이야?”“당연히 진심이지.”“그래.”노민우는 손연지가 이렇게 빨리 동의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손연지에게 1년 더 기다리라고 하면 그를 한대 쥐어패기라도 할 줄 알았다.“정말 동의하는 거야?”손연지는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그럼 다시 생각해 볼게.”노민우는 갑자기 얼굴에 미소를 띠며 그녀를 껴안았다.“아니야, 생각하지 마. 내가 헛소리 한 거라고 생각해.”노민우는 말을 마치고 손연지를 안은 채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이 틈에 손연지와 가까워지려
입안의 술맛이 남자의 입속으로 전부 빨려 들어갔을 때쯤 구승훈이 그녀를 놓아주었다.“화 풀어, 응? 아니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까?”강하리는 웃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해봐.”구승훈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낮게 웃었다.“무릎을 꿇다 다리가 아프면 밤에 너 챙겨주지 못하잖아.”강하리는 웃으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고는 그를 밀어낸 뒤 식탁에 앉아 다시 한 잔을 따랐다.식당에는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고 강하리의 실크 가운은 구승훈의 손길에 미끄러져 내려가 불빛에 붉어진 그녀의 어깨가 선명하게 보였다.구승훈은 순간 멈칫하며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어쩌다 이런 거야?”강하리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맞춰봐.”구승훈이 가운을 잡아당겨 어깨 전체가 드러나도록 했다.붉게 물든 어깨에는 물집까지 생겼다.“대체 무슨 일이야? 아파? 왜 나한테 말...”말하던 구승훈은 이내 알아차리고 다소 무기력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그렇게 화났어? 다친 걸 얘기하지도 않을 만큼? 난 그냥 네가 걱정하는 게 싫었어.”강하리는 어지러워 손가락으로 구승훈의 얼굴을 훑다가 한참 후 욕설을 뱉었다.“개자식, 그러면 내가 걱정하지 않을 줄 알았어? 그동안 내가 계속 걱정하고 있었던 거 알아? 구승훈, 대체 언제쯤 홀로 모든 걸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건데? 이 나쁜 놈! 망할 놈!”강하리의 욕설이 커졌고 구승훈은 그녀를 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큰 별장에는 그렇게 적막이 감돌고 구승훈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하지만 강하리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히 분명했다.그런 추하고 더러운 가족을 강하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애써 감정을 조절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미안해, 자기야. 한 번만 더 용서해 줘, 응?”구승훈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안쓰러워 사실 더 화를
노민우는 멈칫하며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손연지에게 약속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을 거다.손연지가 발을 들어 그의 낭심을 걷어찼다.“꺼져, 고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마.”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화를 내며 계단을 쿵쾅쿵쾅 올라갔다.강하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보니 어깨의 피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뒤돌아 실크 가운을 집어 들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가는데 손연지는 그녀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일이야? 구승훈이랑 싸웠어?”“아니.” 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동료랑 갈등이 있었어.”손연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무언가 물어보려던 찰나 강하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일이면 몸조리도 끝나지? 내가 일자리 마련해 놨으니까 바로 출근하면 돼.”손연지는 깜짝 놀랐다.“그렇게 빨리?” 강하리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왜, 노민우랑 집에서 며칠 더 놀고 싶어?”손연지의 표정이 어색하게 바뀌었다.“내가 그 자식이랑 놀기는. 그러는 넌 얼른 쫓아내기나 해. 짜증 나 죽겠어.”강하리가 혀를 찼다.“내가 볼 땐 네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데?”“어딜 봐서 내 기분이 좋다는 거야? 난 그냥, 그냥...”“알아, 다 알아.”강하리가 웃으며 대꾸한 뒤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노민우는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가족들을 이기기 힘들 거야. 손연지, 저 사람이 파혼만 하면 너도 시도해 볼 수 있어. 물론 이건 그냥 내 단순한 조언이고 난 네가 나와 같은 길을 걷는 걸 원하지 않아. 하지만 네 선택을 응원해.”손연지는 입술을 달싹이며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알아.”하지만 문제는 노민우가 그녀를 좋아할까?조금 전 아래층에서 노민우가 보이던 반응을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강하리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손연지는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고 방문이 닫히자 강하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
하지만 강하리는 한 번도 상대하지 않았다.애초에 민감한 신분이고 만약 반격하면 진태형에게 성가신 일이 생길 테니까.그래서 오늘도 강하리가 예전처럼 행동할 거라 생각했는데 감히 그녀에게 물을 붓다니.여명희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감히 나한테 물을 뿌려요?”강하리가 비웃었다.“못 할 것 있나요? 아니면 나는 그쪽이 물을 뿌려도 반격도 못 한 채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요?”여명희는 너무 화가 나서 원래 하얗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아, 그러면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원래도 구승훈의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데 어깨가 너무 아프고 자료도 다 젖어 여기서 시간 낭비할 기분이 아니었다.그런데 두 발짝도 떼기 전에 여명희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붙잡았다.“강하리 씨,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혀요? 진 장관님 딸이라고 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여명희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괴롭히는 건지 아닌지 그쪽이 더 잘 알지 않나요? 여명희 씨, 아무리 진시연을 도와준다고 하지만 날 만만하게 보지는 마요.”그렇게 말한 후 강하리는 여명희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가버렸고 여명희가 계속해서 그녀를 붙잡으려는데 누군가 말렸다.“명희 씨, 그만해요. 괜히 건드리지 마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통역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가끔은 진태형과 부녀 사이인 것을 인정한 게 잘못된 것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그게 아니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겠나.강하리는 홀로 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이제 막 차가 멈춰 서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진태형이었다.강하리는 심호흡하고 전화를 받았다.“아빠.”“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아빠한테 얘기 안 해?”강하리는 문득 참아왔던 서글픔이 속절없이 치밀어 올랐다.분명 그녀의 친아빠인데 왜 사람들은 진시연에
해가 서산에서 지는 가운데 외교부 앞에서 한 명은 고개를 숙인 채 웃고, 한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연인 같았다.강하리는 주해찬이 떠난 후 외교부로 들어갔고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그녀와 주해찬의 영상이 온라인에 퍼진 후 강하리는 온갖 이상한 소문이 쏟아질 것을 알고 있었다.나중에 해명했어도 꼭 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었고, 게다가 외교부에서 주해찬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떠들어대니 그게 사실처럼 여겨졌다.강하리는 이상한 시선을 마주한 채 통역실로 들어섰고 들어서자마자 한 여자의 차가운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통역실 안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강하리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못 본 척 조용히 책상으로 걸어갔다.“주해찬도 참 눈이 멀었지. 고작 여자 때문에 앞날을 포기하다니.”“저렇게 예쁜 걸 어떡해? 부러워도 소용없어.”“예쁜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여기저기 엮이는 사람은 처음 봐. 인터넷에 올라온 해명이 거짓말인지 누가 알아? 시연 씨도 재수가 없지. 저 여자가 결백을 증명하는 도구로 됐잖아.”“어휴, 진 장관 딸이잖아. 그만해. 이따가 징계받을 수도 있어.”“그래, 진 장관님은 이제 시연 씨도 버렸는데. 보통 고단수가 아니야.”수군거리는 말이라기엔 너무 거침없이 내뱉었다.사실 그들은 강하리와 나쁘지 않게 지낸 사람들이지만 아무래도 진 장관의 딸은 진시연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혀 있었고 그녀는 갑자기 튀어나 진시연의 아버지를 빼앗은 사람이 되었다.게다가 그녀가 낙하산으로 통역실 주임을 맡았을 때도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 다시 외교부로 돌아오니 그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강하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귀를 닫았다.어쨌든 여긴 외교부고 진태형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반대로 그럴수록 성가신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이제 막 번역본을 펼쳤을 때 갑자기
노민준은 잠시 침묵했다.“많이 신경 써줘요. 사실... 힘들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누구라도 친엄마한테 그런 일을 당하면 괴로울 거예요. 강하리 씨는 지금 승훈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강하리 씨만 무사하면 승훈이도 괜찮을 거예요.”휴대폰을 든 강하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한참 후 그녀가 답했다.“알겠어요.”전화를 끊고 나서야 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뒤돌아 정안 건물을 바라보았다.구승훈에게 화가 나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조금 전 노민준의 말을 듣고 난 뒤 독하게 마음을 먹지 못했다.그래, 누구라도 친엄마에게 그런 식으로 당하면 괴로울 거다.구승훈에게서 보이는 쓸쓸함이 그의 모친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구승훈은 어린 시절 어떤 일을 겪었을까?왜... 그의 어머니는 그를 그렇게 미워하는 걸까.처음엔 연정이를 납치하고 그다음엔 구승훈에게 약을 주사했다.그렇게 그가 잘 지내는 게 싫었던 걸까.강하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다가 휴대폰을 들고 드디어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녁에 갈비찜 먹고 싶어.]구승훈의 마음속 무거웠던 돌덩이가 마침내 안착했다.[맡겨만 줘. 강 대표님, 아직도 화났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응.]문자를 보낸 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물건을 챙겨 외교부로 향했다.내일 외교부 회의가 있어 미리 가서 준비해야 하는데 그곳에서 주해찬을 만날 줄은 몰랐다.주해찬은 마치 추모하듯, 경의를 표하듯 외교부 입구에 홀로 서 있었고 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가갔다.발소리가 들리자 문득 몸을 돌린 주해찬은 강하리를 본 순간 마치 자신이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음의 어둠 속으로 깊게 가라앉아 더 이상 소생의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래도 주해찬의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보경대학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따스하고 맑고 깨끗한 눈빛이었다.“안녕, 난 주해찬이라고 해. 네 직속 선배니까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