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라는 갑자기 당황했다.“내가 언제 쫓아냈어요? 난 그저 자리를 비켜달라고 한 거라고요.”그녀는 억울한 듯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승훈 오빠, 설마 부장 따위로 나한테 화내는 건 아니죠?”송유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이 몇 년 동안 그녀는 해외에서 늘 구승훈이 먼저 자신에게 연락하기를 기다렸었다. 그런데 4년 동안 구승훈이 그녀에게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이 4년 동안 그녀는 몇 번이나 그를 만나러 돌아오려고 했다.하지만 송유라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당시 그녀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으니...구승훈은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하양이란 애칭을 부르기도 하고 필요할 때 제일 먼저 그녀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심지어 그녀를 위해 기꺼이 친한 친구들과 싸우기도 한다.하지만 그런 특별함에도 선이 있었다.그는 절대 그녀를 만지지 않았고 결혼 얘기를 꺼낸 적도 없었으며, 심지어 부모를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원래 송유라는 이 남자를 압박해서 위기감을 주고 당장 그녀와 결혼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그녀가 어떻게 구승훈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는 오직 그녀 본인만 알고 있다.이 결혼을 빨리 성사시키지 않으면 마음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그런데 구승훈이 헤어지자는 말에 바로 동의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홧김에 외국으로 나갔다. 가기 전에 그녀는 구승훈이 직접 와서 빌지 않는 이상,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었다.원래 송유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타협할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4년이 흘러갈 줄은 예상치 못했다.최근에서야 그녀는 구승훈과 강하리의 소문을 듣게 되고 더는 견딜 수가 없어 돌아온 것이었다.그녀는 강하리를 싫어했다. 강하리의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더할 나위 없이 그녀를 싫어했다.강하리는 송유라보다 예쁘고 품위가 있었으며 성적도 좋았다. 집안 환경을 빼고는 모든 것이 그녀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송유라는 강하리를 미친 듯이 싫어했다.만약 구승
송유라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구승훈의 팔짱을 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고 스튜디오 안으로 걸어갔다.그런데 입구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강 부장님.”송유라는 구승훈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꽁꽁 가린 탓에 강하리는 그녀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가 기뻐서 활짝 웃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조금 전에 차에서 내리라고 한 거, 미안했어요.”송유라는 사과한다는 핑계로 차에서 그녀를 쫓아낸 일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 스튜디오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그 말을 들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강하리에게로 향했다.강하리는 회사에서 꽤 오래 일한 직원이었고 제일 처음 회사가 설립되었을 때부터 구승훈의 옆에서 일을 도왔다. 그래서 구승훈은 늘 그녀를 믿고 있었다.비록 사직하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겪었었지만, 결국 떠나지 않고 회사에 남지 않았는가?회사에는 감히 그녀에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송유라만 그렇게 그녀를 대했다.송유라가 내뱉은 말은 사람들의 추측에 확신을 주는 듯했다. 그녀와 구승훈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추측 말이다.하지만 강하리는 송유라가 회사에서 밀던 사모님 이미지를 방해하는 요소였다.그 어느 사모님도 남편 옆에 자신보다 더 예쁘고 일 잘하는 직원이 있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모든 사람들이 굳은 표정으로 강하리를 쳐다보았다.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서로 엉켜 있는 두 사람의 팔을 보더니 다시 시선을 구승훈의 얼굴로 옮겼다. 그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있는 두 여자가 자신을 두고 기싸움을 벌이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강하리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고민했는지 몰랐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전 차에서 내려도 괜찮아요. 단지 상사의 명령을 따른 것뿐이지, 그쪽이랑 전혀 상관없거든요.”순간 송유라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강하리는 분명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게 면박을 주는 것이 틀
송유라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강하리, 네가 승훈 오빠 옆에 몇 년 있었다고 진짜 오빠 사람이 된 것 같아? 오빠는 이 몇 년 동안 대외적으로 항상 싱글이라고 알렸어. 아무것도 아닌 게 주제 파악도 안 되네!”강하리는 칼로 가슴을 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그녀라고 왜 모를까?다만 송유라 앞에서 약하게 물러서진 않았다.“대표님은 내 사람이 아니지만 네 사람은 더더욱 아니야!”송유라도 가슴이 쿡 찔려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강하리, 우쭐거리지 마. 오빠는 조만간 나랑 함께해. 나 이번에 오빠랑 결혼할 마음으로 다시 온 거야. 넌 언제까지 천하게 내연녀 행세나 할래? 네 엄마도 내연녀나 하더니 너도 이러네. 모녀가 쌍으로 역겹다 역겨워!”강하리는 순간 참지 못하고 송유라의 뺨을 후려쳤다.“강하리!”때리자마자 구승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강하리는 손이 움찔거리고 온몸이 얼어붙어 감히 고개 돌릴 엄두도 안 났다.“지금 뭐 하는 거야?”전례 없이 싸늘한 목소리였다.“뺨 때리잖아요. 안 보여요?”“그러니까 왜 뺨을 때리냐고!”강하리는 한없이 차가운 표정을 한 눈앞의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우리 엄마를 욕하는데 그럼 보고만 있을까요?”“아무 이유 없이 욕할 리 없잖아!”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그거야 송유라한테 물어야겠죠. 입이 너무 근질거려서 우리 엄마를 모욕하고 싶었는지.”구승훈은 차가운 시선으로 송유라를 쳐다봤다.송유라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아니에요 그런 거. 난 그저 강 부장님한테 사과하러 온 것뿐이에요. 저번에 차에서 내리게 한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려 사과하러 왔는데 제 마음을 받아주지도 못할망정 되레 저를 때리네요.”강하리는 송유라가 어떤 인간인지 진작 알고 있었지만 배우 뺨치는 연기에 여전히 소름이 끼쳤다.구승훈은 다시 강하리에게 시선을 옮겼다.강하리는 그를 마주 보며 쏘아붙였다.“대표님 지금 저 안 믿으시는 거예요?”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차갑고 싸늘한 표정이 모든 걸 설명해주었다.이
“공인이면 더더욱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죠, 안 그래요? 명확히 해둬야 아무도 유라 씨 비방 안 해요.”두 여자의 전쟁에서 승패를 가리는 건 이 사건의 진실이 아니었다. 오직 이 남자의 태도에 달렸다.현재 상황으로 봐선 강하리가 처참하게 졌다.그녀도 안다. 이렇게 추궁하는 게 결국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구승훈이 딱 잡아떼고 그녀를 죄인으로 인정하면 팩트가 눈앞에 놓여도 절대 승인하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에게 팩트를 알려주고 싶다.“더 돌려볼 거 없어요. 내가 안 따진다는데 대체 왜 이렇게 집요하게 굴어요 강 부장님?”송유라는 살짝 안달이 났다.강하리는 그녀를 쳐다보며 되물었다.“왜 그럴 필요 없죠? 송유라 씨 속상하게 그러면 안 되죠!”구승훈은 옆에 서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두 여자를 쳐다봤다.“강 부장, 이제 곧 촬영 들어가야 해. 언제까지 여기서 사람들 시간 지체할래?”저울이 기울어도 너무 기울었다.강하리는 순간 투지가 사라졌다.“미안해요.”이 한마디에 그녀는 온몸의 기운이 쫙 빠졌다.말을 마치자마자 강하리는 차갑게 식은 마음을 추스르며 자리를 떠났다.송유라와 신경전을 벌이는 것 같아도 실은 그녀 자신에게 달갑지 않았다. 3년 동안 옆에 함께 있어 줬는데 돌아오는 건 결국 이런 결과란 말인가?구승훈에게 송유라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이 남자가 과연 보고 싶어 하는지, 이 점을 소홀히 했다.어쩌면 그는 송유라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뿐이다.편애란 바로 이처럼 아무 이유도 따지지 않고 옳고 그름을 마음에 새겨두지 않는 거구나.강하리가 떠난 후에야 구승훈의 시선이 송유라를 향했다.송유라는 여전히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오빠, 너무 아파요.”구승훈은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병원 가자.”...시간을 지체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송유라가 얼굴을 다치는 바람에 결국 촬영이 중단됐다.송유라는 서러운 척하며 구승훈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가기 전 그녀는 조수더러 음료수를 사서 스튜디
그녀는 입가에 다다른 말을 꾹 참았다.구승훈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기에 이렇게까지 말한 건 오늘 반드시 그녀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강하리는 더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금방 갈게요.”전담 비서가 웃으며 대답했다.“서두르십시오.”집에 도착했을 때 구승훈은 막 샤워를 마치고 걸어 나왔다.널찍한 샤워 가운으로도 그의 완벽한 몸매를 가릴 순 없었다.구승훈은 소파에 앉아 담뱃불을 지피고 뽀얀 담배 연기 너머로 강하리를 쳐다봤다.잠시 후 그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우리 강 부장이 이렇게 강하게 나올 때도 있었어? 난 오늘 처음 알았네.”강하리는 제자리에 서서 꿈쩍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없었다.오늘 그녀가 스튜디오에서 송유라를 때린 일로 비꼬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안다.“나도 언제까지 괴롭힘을 당할 수만은 없잖아요. 그래서 대표님은 송유라 때문에 나한테 따져 물으려고 이러시는 거예요?”구승훈은 그녀를 쳐다보다가 한참 후 담뱃불을 껐다.“이리 와.”“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구승훈이 움직이지 않자 강하리는 마지못해 앞으로 다가갔다.그는 책상 위의 상자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마음에 드는지 한번 열어봐.”열어보니 안에는 목걸이가 하나 들어있었다.완벽하게 컷팅 된 다이아몬드가 불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났다.강하리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구승훈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선물해본 적이 없다.선물을 준다는 건 마음을 표한다는 뜻이기에 그녀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대표님이 선물을 줄 리가 있을까.돈은 줄 수 있어도 선물은 단 한 번도 안 줬다.전에는 강하리가 종종 그에게 옷, 신발, 넥타이 등을 선물해주었다.그녀는 돈이 없어 명품을 사주진 못했지만 의외로 대표님이 잘 입고 다녔다.다행히 이 남자가 잘생기고 몸매가 훤칠하여 보세 옷을 입어도 귀티가 났다.그래서인지 강하리도 자꾸만 더 옷을 사주고 싶었다.다만 구승훈은 그녀에게 선물을 준 적이 없다.생각나지 않아서? 또 혹은 아예 생각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일단 둘러싸이기만 하면 돌덩어리와 진흙이 그녀 몸에 날아왔고 간간이 도마뱀과 쥐, 그리고 뱀까지 섞여 있었다.한번은 강하리가 참다못해 송유라를 때렸는데 송동혁이 집까지 찾아와 두말없이 벨트로 그녀를 한바탕 두들겨 팼다.그때 강하리는 울면서 송유라의 만행을 다 말했지만 송동혁한테서 돌아온 그 한마디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얘가 널 때려죽여도 참아! 넌 그래야 해.”그리고 지금 똑같은 상황이 또다시 그녀에게 벌어졌다.하지만 구승훈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전보다 더 가슴 아프고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그녀는 쓰디쓴 이 마음을 꾹 참으며 그에게 물었다.“내가 왜 그래야 하죠?”‘왜 내가 송유라를 피해야 해? 왜 나만 피해야 하냐고? 내연녀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안 했는데 왜 나만 피해?’구승훈이 그녀를 쳐다봤다.“왜냐하면 걔는 송유라고 넌 강하리일 뿐이니까.”칼로 심장을 후벼 파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걸까?강하리는 애써 담담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내가 싫다면요?”구승훈의 안색이 확 짙어졌다.“강 부장, 미리 경고할 때 말 잘 들어. 반항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면 너한테 나쁠 것 없어.”강하리는 실소를 터트렸다.얌전하면 어떻고 얌전하지 않으면 또 뭐가 달라질까?어차피 다 똑같은 결과일 텐데.“알았어요. 대표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거죠.”구승훈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차 한 잔 타와.”구승훈은 커피를 안 마시고 차에 대한 요구도 매우 까다롭다.강하리는 한때 이 남자를 위해 일부러 차 끓이는 법을 배웠고 매번 출장 갈 때마다 전문적인 다기 세트도 챙겼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단지 오늘은 썩 달갑지가 않았다.“몸이 불편해서 타기 싫어요.”구승훈은 씩 웃으며 그녀의 마음을 훤히 꿰뚫은 것만 같았다.“강 부장 이젠 점점 더 기어오르네?”강하리가 그를 노려봤다.“대표님 그냥 송유라 씨한테 해달라고 하시죠. 왜요? 걔는 부려먹기 아까워요?”구승훈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강하리는 이미 선을 넘었다는 걸
강하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구승훈과 눈을 마주쳤다.“속이 좀 불편한 것뿐이에요.”그녀는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고 세면대에서 세수했다.구승훈은 묵묵히 그녀를 지켜봤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등 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진 후에야 강하리도 숨을 조금 돌렸다.세안을 마치고 그녀는 약을 챙겨 침실로 들어갔다.손연지가 처방한 정량대로 일일이 먹었고 다 먹고 나니 마침 구승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침대 머리맡에 놓은 그녀의 약통을 보더니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서서히 다가와 약통을 들고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어디서 처방한 약이야?”“병원에서요.”“언제?”강하리는 잠시 침묵한 후 말을 이었다.“한밤중에 병원 실려 간 그날이요.”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너 위병 있는 거 왜 전에는 몰랐지? 딱 한 번 발작했는데 그 정도로 심각해?”강하리가 웃으며 대답했다.“쭉 달고 사는 지병이었어요. 대표님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서 그랬겠죠.”구승훈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신경 쓰는 포인트가 오롯이 그녀와 딴 남자들 사이의 관계였을 뿐이다.그녀의 건강에 관해서는 관심해본 적이 없다.“그래?”그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몸이 불편하면 일찍 자.”“네.”강하리는 잠옷을 챙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샤워하고 나오니 구승훈은 어느덧 방에 없었다.이제 막 머리를 다 말렸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문을 열자 구승훈이 즐겨 먹던 레스토랑 배달원이 문 앞에 서 있었다.“대표님께서 사모님이 아직 저녁을 안 드셨다고 위가 불편하시다면서 친히 야채죽을 주문하셨습니다.”강하리는 음식을 받으며 인사했다.“고마워요.”그녀는 죽을 들고 방 안에 들어갔다.실은 위가 텅 비었지만 식욕이 없었다.그래도 아이를 위해서 야채죽을 먹는 수밖에.다 먹고 침대에 눕자 스르륵 잠들어버렸다.갑작스러운 휴대폰 벨 소리에 눈을 떴고 확인해보니 뜻밖에도 구승재였다.“승재 씨,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늦은
자리에 앉자마자 구승훈이 그녀의 허리를 확 감싸 안고 그녀의 어깨에 턱을 고인 채 술 냄새를 풍기며 물었다.“왜 왔어?”강하리는 허리가 경직됐다.“대표님이 취하신 줄 알고요.”구승훈이 가볍게 웃었다.“언제 내가 취하는 거 봤어?”강하리는 문득 침묵했다.그랬다. 이 남자는 단 한 번도 취한 적이 없다!그토록 자율적이고 경계심 많은 구승훈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될 리가 있을까?전에 그 많은 술자리에 참석하면서도 구승훈은 취한 적이 없다.“미안해요.”강하리는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사과할 거 없어. 난 그냥 궁금했거든. 오늘 밤에 누구 전화든 다 달려 나왔을지 말이야.”강하리는 침묵하다가 대답했다.“대표님과 연관된 일이라면 전부 달려왔을 겁니다.”구승훈이 천천히 말했다.“바보.”그리곤 한쪽 옆으로 기댔다.강하리는 ‘바보’라는 두 글자를 꼼꼼히 되새겨보았는데 아무래도 비난의 뜻에 더 치우치는 듯싶었다.나머지는 뭐... 그녀가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됐나 보지.“강 부장, 함께해요.”강하리가 거절했지만 이 인간들은 그녀를 놓아줄 기세가 아니었다.“강 부장, 괜찮아요! 게임은 게임일 뿐이잖아요.”“그래요. 다들 알고 지낸 지 오래됐는데 함께 게임한 적도 없네요. 강 부장 설마 이렇게까지 우릴 체면 안 주는 건 아니겠죠?”뭇사람들이 한마디씩 주고받았다.강하리는 구승훈을 힐긋 쳐다봤다.구승훈의 눈빛이 한없이 싸늘해졌다.“강 부장, 우리 형 왜 봐요? 얼른 와서 놀아요!”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강하리는 마지못해 눈 딱 감고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이번엔 왕게임이었다.첫판은 운 좋게 안 걸렸지만 이제 막 한숨 돌리려 할 때 사태는 벌어지고 말았다.이번 판에 왕은 구승재였고 그는 음침한 눈빛으로 지령을 내렸다.“3번이랑 4번 30초 동안 키스해.”3번은 강하리였고 4번은 구승훈의 몇몇 친구 중 한 명인 노민우였다.패를 보인 순간 룸 안이 발칵 뒤집혔다.놀리는
요양원 아래 주차장.구승재는 허겁지겁 달려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직 차에 다다르기도 전에, 멀리서 한 대의 차량이 조용히 들어오는 게 보였고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그는 서둘러 그 차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고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담배 냄새가 훅 들어왔다.“형, 또 담배 폈어?”구승훈은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고 몸을 가누는 모습이 눈에 띄게 힘겨워 보였다.무슨 말을 하려던 구승재는 그보다 먼저 들려온 거친 기침 소리에 놀라 멈칫했다.거친 기침 소리 끝에 피비린내가 섞였고 구승훈은 겨우 참으며 목까지 차오른 피를 억지로 삼켰고 구승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담배 피지 말랬잖아. 막 돌아다니지도 말라고 했고! 형, 제발 말 좀 들어라.”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손끝을 닦고는, 조용히 밤하늘 아래 그걸 쓰레기통에 던졌다.“승재야.”“나 진짜 걱정돼서 그런 거야.”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죽진 않아.”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임희주 그쪽은?”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방금 구승훈이 던진 손수건이 들어간 쓰레기통을 힐끔 보았다가, 이내 형의 뒤를 따라붙었다.“오늘 또 준봉이 신문했는데 여전히 같은 말만 해. 형 얼굴 한 번 보면 그때야 입 열겠다고.”구승훈은 고개만 끄덕이며 요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구승재는 그 뒤를 따르며 말했다.“근데 진짜로 누워서 쉬어야 해. 안 그러면 죽는다잖아.”구승훈은 짧게 웃었다.“폐색전증 온다고 했잖아! 이건 웃을 일이 아니라고!”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반응이었고 결국 구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비켜섰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밤의 요양원은 유독 조용했고 그만큼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병실 문이 열리는 순간, 임희주는 갑작스럽게 눈을 떴고 눈가엔 놀람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비쳤다.구승훈은 창가에 서 있었다.“하고 싶은 말 남았어요?”임희주는 눈가가 붉어지며
사실 ‘풀려났다’고는 했지만 그 모든 시간 동안 구승훈의 외삼촌 여초천은 줄곧 구가 사람들의 감시 아래에 있었다.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여초연을 구씨 가문에 붙잡아두기 위한 장기적인 수였을 뿐이다.그리고 여초연이 구씨 가문을 떠나던 날, 그녀는 구초천을 구동근 손아귀에서 힘겹게 빼내어 국내에 남겨두었다.하지만 여초천은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고 여초연은 그를 급히 남겨두고 치료만 맡긴 채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그 이후로 줄곧, 구승훈은 여초천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임희주를 내세운 건 어디까지나 미끼에 불과했다. 정확히 말하면 임희주를 이용해 여초연의 계획에 틈을 만들고 결국엔 여초천의 위치를 노출시키려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처음부터 임희주는 ‘진심’이 아니었다. 아무리 충성스럽다 한들, 그녀는 여초연에게 있어 하나의 도구일 뿐, 심지어 이미 의심까지 받고 있었기에 더욱이 버림받을 운명이었다.그러니 임희주를 제어한다는 건 보여주기일 뿐이고 정말로 여초연의 ‘숨통’을 쥐고 있는 건 여초천이었다.“외삼촌, 그렇게 흥분하실 것 없잖아요.”구승훈은 휠체어를 밀어 창가 쪽 테이블에 다가가 컵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물 마셔요. 괜히 화병 나시겠어요.”하지만 여초천은 그 잔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웃었다.“기막히군. 세상에... 그 지긋지긋한 놈 자식이 아직도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다니!”구승훈의 표정엔 분노도 없었다. 다만 짧게,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외삼촌이 아직 살아계신 데 제가 먼저 가면 섭섭하죠.”“구승훈! 네놈이 죽었어야 해! 모든 비극의 시작이 너야! 너 때문에 우리 여씨 집안이 망했고 네 엄마도 초연이도 이렇게 된 거야!”구승훈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침묵에 잠겼고 이내 서늘하게 웃음을 흘렸다.“제 탓이라고요? 그럼 저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요. 제가 엄마한테 날 낳아달라고 한 적 있습니까? 아니면 여씨 집안 사람을 한 번이라도 제 손으로 다치게 한 적이 있나요? 엄마가 가출하고 남자 따라다닐
구승재는 안절부절못한 얼굴이었지만 손발은 놀랄 만큼 재빠르게 움직였다.그는 구승훈을 부축해 조심스럽게 차에 태운 뒤, 곧장 외곽 요양병원으로 향했다.요양병원은 도심 외곽의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고 공기 맑고 조용한 데다 의료진과 시설도 최고급이었다.이곳은 원래 B시에서 육씨 가문이 운영하는 재단 계열 병원 중 하나였다.노민준은 구승훈의 검진 데이터를 들여다보다가, 이마를 살짝 찌푸렸고 그 표정을 본 구승재는 직감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형, 왜? 어디 많이 안 좋아?”노민준은 한참 말이 없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교통사고 자체는 그나마 괜찮아. 폐에 타박상이 좀 있어서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해. 문제는…”그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요즘 상태가 워낙 안 좋았잖아. 정신적 스트레스도 심했고. 지금처럼 밤새 일하고 제대로 쉬지 못하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이번엔 그냥 ‘붕괴 직전’이었고 다음엔 진짜 무너질 수도 있어.”구승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내가 그걸 말린다고 그 말을 들을 형이 아니지. 형은 강하리말만 듣잖아.”노민준은 헛기침을 하며 입꼬리를 씰룩였다.“하리가 말리면 다를 줄 알았지. 근데 말이 안 되니까 지금 이 모양인 거고. 내 생각엔 아예 입원시켜 놓고 감시하는 수밖에 없어.”“좋아. 난 찬성. 민준 형, 힘내!”구승재는 웃으며 받아쳤고 노민준도 키득 웃었다.“농담 말고 일주일은 무조건 쉬게 해야 돼. 진심이야.”“알았어.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병실 안, 구승훈은 이미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침대 옆엔 준봉이 서 있었고 바닥엔 산산조각 난 컵이 굴러다니고 있었다.구승재가 들어서자 준봉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말했다.“승준 씨, 대표님 약 절대 안 드시려고 해요. 설득 좀 해주시죠. 전 임희주 쪽 가보겠습니다.”“잠깐만 그건 또 무슨 소리야?”구승재가 준봉을 붙잡고 물었고 준봉은 한숨을 쉬었다.“꽃이랑 케이크, 하리 씨가 다 병원 밖으로 내버리라고 했
“여초연 쪽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지금은 제가 어머니에게서 멀어질수록, 그 사람한테 더 좋은 거예요.”천아름은 코웃음을 쳤다.“그럼 그렇게 잘난 사람이면 매일 밤 병실 앞에 숨어서 서성이는 건 또 뭔데요?”구승훈은 담배를 피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말을 내뱉고 나서 잠시 후회하는 듯했지만 곧바로 화제를 바꿨다.“구 대표님, 그날 대체 무슨 생각이었어요? 어차피 임희주랑은 다 쇼였잖아요. 그걸 알면서 왜 그렇게 망설이신 거예요?”구승훈은 묵묵히 담배를 피울 뿐,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됐어요, 그 얘긴 안 할게요. 그 대신 하나만 물을게요. 임희주는요? 아직 살려두신 거 아니죠?”구승훈은 담배를 털며 말했다.“제가 처리할 거예요. 이 일에 더는 끼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천아름은 그 말에 묘하게 화가 났다.손에 쥔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꾹 밟아 끄더니 차에 올려뒀던 꽃다발과 케이크를 들었다.“그래요. 그렇게 다 혼자 하실 거면 앞으로도 아무것도 부탁하지 마세요.”구승훈은 웃음만 지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천아름은 돌아보다 말고 그에게 짧게 쏘아붙였다.“진짜... 어떤 여자가 당신과...”그 말에 구승훈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더니 무심히 물었다.“조시욱, 형 있지 않아요? 조명현. 이번에 설에 내려왔다고 들었는데.”그 말에 천아름은 걸음을 멈췄다.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구승훈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다 타버릴 때까지 서 있었다가, 조용히 자기 차로 돌아갔다.도심 도로의 눈은 대부분 녹았지만 외곽 지역은 여전히 두껍게 쌓여 있었고 지나는 차들은 속도를 줄이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구승훈은 차를 몰며 준봉의 전화를 받았다.“안현우는 안가 쪽으로 넘겼습니다. 전에 회삿돈으로 땅 사들인 건도 곧 터질 거예요.”“그래.”구승훈은 짧게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 준봉이 다시 물었다.“그럼 임희주하고 그 경호원은요?”“계속 심문해. 여초연 쪽에서 심
하얀 병실. 귓가엔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가 아른거렸다.강하리는 천천히, 힘겹게 눈을 떴고 가장 먼저 마주친 건 백아영의 걱정 어린 눈빛이었다.“할머니.”쉰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부르자, 손을 뻗어 닿아보려 했지만 손끝조차 들어 올릴 힘이 없었다.백아영은 잠시 멍하더니 이내 눈에 반짝이는 기쁨이 스쳤다.“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급히 두 번을 외치자, 저쪽에서 손연지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의사가 고개를 돌렸다.강하리가 눈을 떴다는 걸 본 의사는 곧장 다가와 진료에 들어갔다. 손연지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이놈의 계집애... 그래도 깨어날 줄은 알았네.’의사가 전신을 점검하고 별다른 문제 없다는 말을 남긴 뒤 병실을 나섰다.손연지가 백아영 곁으로 다가갔다.“할머니 이제 좀 쉬세요. 제가 하리 곁에 있을게요.”백아영은 쉽게 떨어지지 못했지만 마침 그녀 담당 주치의가 찾아왔다.백아영은 아쉬운 듯 손을 뻗어 강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편히 쉬고 있어. 할머니 검사 좀 받고 다시 올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연지한테 말해. 집에 전화하게 할 테니까.”강하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백아영을 배웅했다.병실엔 조용히 둘만 남았고 손연지는 말없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강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침묵 끝에,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화났어?”손연지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내가 뭘 화나. 네 목숨이 내 것도 아닌데. 다친 것도, 수술받은 것도, 병원에서 몇 번씩이나 위독 통보 받은 것도 전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말을 이어가다, 어느 순간 그녀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예전에도 그녀는 무너진 적 있었다.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병을 얻었을 때도 흔들렸지만 그날 밤, 위급 통지서가 몇 장이나 연이어 나왔을 때만큼은 아니었다.그때만큼, 무섭고 혼란스러운 순간은 없었다.“너 정말 못됐다.”손연지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렇게 뛰어내리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다른
“지금 뭐 하려는 거야? 너 진짜 또 뭘 하려고 하는데!”주해찬은 온몸의 힘을 다해 구승훈을 붙잡았다.그제야 구승훈도 마치 정신이 번쩍 든 듯 돌아서더니 주해찬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주해찬이 그대로 반격하려는 순간, 조시욱이 급히 그를 막아섰다.구승훈의 시선은, 방금 막 차에 실린 사람에게 고정돼 있었다.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의 손은 총을 들기조차 힘들 정도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차 문이 쾅 닫히고 의료진은 단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를 병원으로 이송했다.수술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다.심준호는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도착했고 그 뒤엔 거의 정신을 못 차리는 백아영이 따라왔다.손연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술실에서 걸어 나왔고 천아름이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상태 어때요?”손연지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아직 수술 중이에요. 안에 더는 못 있겠더라고요.”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렸다.“하리는... 하리는...”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의 손에 들린 한 장의 병세 위급 통지서가 마지막 희망을 무너뜨렸다.백아영은 평생 숱한 풍파를 겪어온 사람이었지만 그 순간 눈앞이 하얘지며 그대로 실신해 버렸고 수술실 앞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졌다.강하리는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 강가의 작은 어촌 마을로. 리시안셔스 꽃이 들판 가득 피어 있었고 붉은 노을 속에서 어머니의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하지만 그 자리에, 더는 구승훈은 없었다. 그 봄날, 벽 너머에서 조심스레 그녀를 부르던 소년도 없었고 고요한 여름날, 폭우 속에서 사탕을 들고 뛰어오던 그 사람도 없었다.그 가을엔 이별도 없었고 그 후의 긴 시간, 끝없는 그리움도 존재하지 않았다.그녀는 생각했다.‘이대로라면 좋겠다. 정말... 좋다. 그런데 왜 이토록 가슴이 아픈 걸까?’창백한 얼굴과 붉게 물든 눈,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승훈 씨... 슬퍼하지 마. 당신이
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정확히 말하자면 그 영상을 본 순간부터 모든 감정이 사라졌고 그 이후의 행동은 모두 단지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었다.그동안 생긴 온갖 상처조차 그녀에겐 아무 느낌조차 없었다. 찬 바람이 휘몰아쳐도, 그녀의 마음속엔 단 하나, 구승훈의 얼굴을 끝까지 눈에 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아마도 단 한 순간의 망설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가 그녀에겐 긴 세월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리고 그 순간, 강하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내가 구승훈의 인생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구나.’그래서 결심은 오히려 단순했다. 그가 망설이는 대신, 자신이 선택하면 될 일이었다.고가 아래 도로는 이미 봉쇄된 상태였지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차들이 있어 안전 매트는 아직 완전히 깔리지 않은 상태였다.그 시각, 조시욱과 주해찬은 차량을 통제하며 진입을 막고 있었고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밤하늘을 가르며 붉은 드레스가 아래로 떨어졌다고 꽃잎처럼 아름다웠고 동시에 피처럼 잔혹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고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다.강하리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받아졌는지, 그대로 지면에 부딪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떨어지던 순간, 단 하나 기억나는 것은 구승훈의 창백한 얼굴과, 붉게 물든 그의 두 눈이었다.고통은 어쩌면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통증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심장에서 시작해 온몸의 관절, 근육, 뼛속까지 천천히 퍼져가는 고통이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눈을 감기 전 눈가에 살짝 맺힌 온기를 느꼈고 그 뒤로는 완전한 어둠뿐이었다.구승훈은 짐승처럼 날뛰며 안현우의 목을 움켜잡았다.안현우는 강하리가 그렇게 스스로 뛰어내릴 줄은 상상도 못 했고 그저 형식적으로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댔을 뿐이었다.강하리가 떨어지는 순간, 그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미친 듯이 웃어댔다.‘그년이 죽었다면 이 짓도 해볼 만했네.’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짓던 바로
그때, 밖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운전석 유리가 산산조각 났고 곧이어 안현우의 손에서 피가 튀더니 비명이 터져 나왔다.제어력을 잃은 차량은 그대로 고가도로 방호벽을 향해 돌진했고 안현우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었다.차량은 그대로 뒤집혀 강하리는 정신이 아득해지며 머릿속이 핑 돌았다.곧이어 안현우가 그녀를 강제로 차 밖으로 끌어내 칼을 목에 들이댔다.피범벅이 된 채 절뚝이며 강하리를 끌고 고가도로 난간 쪽으로 향했다.차에서 내린 구승훈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 옷조차 제대로 걸치지 못한 강하리의 모습을 목격했다.그녀는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이 고가도로는 누군가가 일부러 막아둔 듯 넓은 도로 위엔 몇 대의 차량만이 멈춰 있었고 주변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구승훈은 여전히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맹렬한 바람이 불었지만 그 바람조차도 오히려 그를 더 차갑고 냉정하게 보이게 했다.강하리는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졌다.구승훈은 그녀와 평생 함께 걸어왔던 남자였다.그녀가 오랫동안 밤낮으로 생각해 오며 미워하면서도 지우지 못했던 남자였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강하리는 문득 깨달았다. 어떤 사람은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것을.“풀어줘.”차가운 날씨처럼 냉정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강하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그 짧은 시선 속에서 구승훈의 가슴은 이유 모를 답답함으로 무거워졌다.착각일까?그녀의 눈에서 아무런 빛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하리야...”남자의 목소리는 쉰 듯 메마르게 그녀를 불렀지만 강하리는 그를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안현우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구승훈, 우리 게임 한 번 해볼까?”그가 말을 마치자 맞은편 도로에 차량이 멈춰 섰다.곧이어 한 남자가 임희주를 끌고 나타나 고가도로 반대편에 섰다.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그는 고개를 돌려 구승재를 향해 물었다.“노진우한테서 답장 왔어?”구승재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
강하리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어떤 여자와 부딪쳤고 목덜미에 느껴진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그리고 눈을 떴을 때, 온몸은 욱신거렸고 정신은 흐릿했다.손은 꽁꽁 묶여 있었고,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다.얼굴을 돌려보니 자신이 차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게다가 좌석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그 순간, 질주하는 차 안에서 낮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망할 놈,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온 거야? 됐어. 전에 약속한 장소로 가. 내 일 망치기만 해 봐, 죽여버릴 거야.”전화를 끊자마자 강하리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안현우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운전석에서 돌아본 안현우의 눈빛엔 광기와 탐욕이 엉켜 있었다.그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깨어났네?”강하리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앞좌석을 노려보았다.“날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요?”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보다 강하리 씨, 영상 하나 보여줄까요?”그는 휴대폰을 꺼내 재생 버튼을 눌렀다.곧 차 안엔 낯 뜨거운 신음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강하리는 화면을 제대로 보지 않아도 어떤 영상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진짜... 미쳤네요. 지금 당신 완전 변태 같아.”그녀의 조롱 섞인 말에 안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하지만 곧 비웃듯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 영상 끝까지 보고 나면 날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요.”그는 휴대폰을 안전벨트 위에 툭 던졌고 화면은 강하리의 시야에 정확히 들어왔다.그 고통스러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등골을 타고 식은 기운이 흘러내렸다.그때, 휴대폰 화면이 강하리의 눈에 정확히 들어왔다.거의 동시에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덮쳤다.이미 지쳐 있던 몸이 수천 개의 화살에 찔린 듯 깊은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영상 속 인물들은 모두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여자는 최근 구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