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구승훈과 눈을 마주쳤다.“속이 좀 불편한 것뿐이에요.”그녀는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고 세면대에서 세수했다.구승훈은 묵묵히 그녀를 지켜봤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등 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진 후에야 강하리도 숨을 조금 돌렸다.세안을 마치고 그녀는 약을 챙겨 침실로 들어갔다.손연지가 처방한 정량대로 일일이 먹었고 다 먹고 나니 마침 구승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침대 머리맡에 놓은 그녀의 약통을 보더니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서서히 다가와 약통을 들고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어디서 처방한 약이야?”“병원에서요.”“언제?”강하리는 잠시 침묵한 후 말을 이었다.“한밤중에 병원 실려 간 그날이요.”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너 위병 있는 거 왜 전에는 몰랐지? 딱 한 번 발작했는데 그 정도로 심각해?”강하리가 웃으며 대답했다.“쭉 달고 사는 지병이었어요. 대표님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서 그랬겠죠.”구승훈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신경 쓰는 포인트가 오롯이 그녀와 딴 남자들 사이의 관계였을 뿐이다.그녀의 건강에 관해서는 관심해본 적이 없다.“그래?”그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몸이 불편하면 일찍 자.”“네.”강하리는 잠옷을 챙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샤워하고 나오니 구승훈은 어느덧 방에 없었다.이제 막 머리를 다 말렸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문을 열자 구승훈이 즐겨 먹던 레스토랑 배달원이 문 앞에 서 있었다.“대표님께서 사모님이 아직 저녁을 안 드셨다고 위가 불편하시다면서 친히 야채죽을 주문하셨습니다.”강하리는 음식을 받으며 인사했다.“고마워요.”그녀는 죽을 들고 방 안에 들어갔다.실은 위가 텅 비었지만 식욕이 없었다.그래도 아이를 위해서 야채죽을 먹는 수밖에.다 먹고 침대에 눕자 스르륵 잠들어버렸다.갑작스러운 휴대폰 벨 소리에 눈을 떴고 확인해보니 뜻밖에도 구승재였다.“승재 씨,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늦은
자리에 앉자마자 구승훈이 그녀의 허리를 확 감싸 안고 그녀의 어깨에 턱을 고인 채 술 냄새를 풍기며 물었다.“왜 왔어?”강하리는 허리가 경직됐다.“대표님이 취하신 줄 알고요.”구승훈이 가볍게 웃었다.“언제 내가 취하는 거 봤어?”강하리는 문득 침묵했다.그랬다. 이 남자는 단 한 번도 취한 적이 없다!그토록 자율적이고 경계심 많은 구승훈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될 리가 있을까?전에 그 많은 술자리에 참석하면서도 구승훈은 취한 적이 없다.“미안해요.”강하리는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사과할 거 없어. 난 그냥 궁금했거든. 오늘 밤에 누구 전화든 다 달려 나왔을지 말이야.”강하리는 침묵하다가 대답했다.“대표님과 연관된 일이라면 전부 달려왔을 겁니다.”구승훈이 천천히 말했다.“바보.”그리곤 한쪽 옆으로 기댔다.강하리는 ‘바보’라는 두 글자를 꼼꼼히 되새겨보았는데 아무래도 비난의 뜻에 더 치우치는 듯싶었다.나머지는 뭐... 그녀가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됐나 보지.“강 부장, 함께해요.”강하리가 거절했지만 이 인간들은 그녀를 놓아줄 기세가 아니었다.“강 부장, 괜찮아요! 게임은 게임일 뿐이잖아요.”“그래요. 다들 알고 지낸 지 오래됐는데 함께 게임한 적도 없네요. 강 부장 설마 이렇게까지 우릴 체면 안 주는 건 아니겠죠?”뭇사람들이 한마디씩 주고받았다.강하리는 구승훈을 힐긋 쳐다봤다.구승훈의 눈빛이 한없이 싸늘해졌다.“강 부장, 우리 형 왜 봐요? 얼른 와서 놀아요!”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강하리는 마지못해 눈 딱 감고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이번엔 왕게임이었다.첫판은 운 좋게 안 걸렸지만 이제 막 한숨 돌리려 할 때 사태는 벌어지고 말았다.이번 판에 왕은 구승재였고 그는 음침한 눈빛으로 지령을 내렸다.“3번이랑 4번 30초 동안 키스해.”3번은 강하리였고 4번은 구승훈의 몇몇 친구 중 한 명인 노민우였다.패를 보인 순간 룸 안이 발칵 뒤집혔다.놀리는
룸 안의 뭇사람들은 전부 구승훈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다들 그가 자존심만 내세우는 거라고 여겼지만 강하리는 알고 있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그녀가 키스하든 말든 구승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오직 누가 제 물건을 건드렸을지, 그 하나만 신경 쓸 뿐이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추슬렀다.게임은 계속됐고 이번 판에 강하리는 그리 쉽게 넘어가지 못했다.왕게임에서 노민우와 극도로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던지라 그녀가 선뜻 진실게임을 선택했는데 구승재가 이런 질문을 내던졌다.“강 부장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있다면 좋아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뭇사람들의 시선이 또다시 구승훈에게 쏠렸다.구승훈도 이 질문에 구미가 당겼는지 눈썹을 치켜세웠다.강하리는 한참 침묵한 후에야 대답했다.“있어요.”다들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고 구승훈도 눈을 가늘게 떴다.구승재는 그런 형을 쳐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그럼 좋아한 지는 몇 년이나 됐어요?”몇 년이라...강하리도 기억이 잘 안 났다.17살에 재회했을 때부터 계산해도 대충 10년 좌우이다.“10년이요.”“우와.”룸 안에 탄성이 자자했고 유독 구승재만 가슴이 아찔거렸다.그가 알기로 강하리와 구승훈은 알고 지낸 지 고작 3년밖에 안 되는데 강하리가 좋아한 사람이 10년이나 됐다고 하니 형은 한물간 셈이다!구승재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는 요즘 강하리와 상극인가 보다.저번에 그가 부추긴 것 때문에 강하리가 처음으로 구승훈과 정색했고 오늘도 그 때문에 강하리가 좋아하는 사람이 구승훈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이건 분명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게임일 듯싶다.구승재가 울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다음엔 절대 강 부장과 이런 게임을 하지 말아야지.’한편 옆에 앉아있는 구승훈은 얼굴에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반응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이 질문이 나온 순간부터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좋든 나쁘든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게다가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
대체 그 남자의 정체는 뭘까? 얼마나 잘났길래 강하리가 10년을 좋아한 걸까?10년이라, 그녀는 이제 고작 27살인데 벌써 10년을 좋아했다고?어쩌면 그와 섹스할 때도 머릿속엔 짝사랑한 남자뿐이었을지...구승훈은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10년이면 17살 때부터 좋아한 거야?”강하리는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었다.“네.”“근데 왜 함께 안 있어?”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안 좋아해요.”구승훈이 차가운 미소를 날렸다.“그래. 그러다 어느 날 널 좋아한다면?”강하리도 가볍게 웃었다.“그럴 일은 없어요. 그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구승훈은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우리 강 부장 순정파였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도 여전히 마음 못 접은 거야?”“네,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 그리 쉽게 단념할 수 있던가요.”구승훈의 얼굴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차 세워.”뜬금없는 명령에 강하리는 핸들을 틀어 길옆에 주차했다.“대표님, 왜 그러세요?”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미친 듯이 입술을 탐했다.강하리는 갑작스러운 키스에 본능적으로 밀쳐내려 했고 이 동작은 순식간에 구승훈의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켰다.“왜? 이젠 내가 키스하는 것도 싫어?”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노민우가 키스하자고 할 땐 선뜻 들이댔잖아.”다 지나간 일인데 왜 들추는 거지?!“게임이잖아요? 룰 안 지켜요 그럼?”구승훈이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그렇지. 깜빡했네. 강 부장은 항상 룰에 철두철미한 사람이잖아.”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대표님도 그다지 신경 쓰는 건 아니잖아요?”“맞아. 그렇지만 너는 처신 똑바로 해야 해. 게임은 게임이지만 네 몸을 더럽혀서야 되겠어? 나 그런 거 딱 질색인데, 너무 역겹거든!”강하리는 표정이 얼어붙었다.“걱정 마세요 대표님, 그럴 일 없어요.”구승훈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강 부장이 누굴 좋아하든
강하리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마침 마케팅 부서의 한 실습생이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왔다.“강 부장님, 큰일 났어요. 예서 씨가 다투고 있어요.”강하리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어떻게 된 거예요?”그 실습생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누군가가 부장님 험담하는 걸 듣더니 도저히 못 참고 가서 따져 묻기 시작했는데 대화로 잘 안 풀렸나 봐요. 그만... 그만 몸싸움으로 번지고 말았어요.”“그래서 지금 어딘데요?”“대표님 사무실로 불려갔어요.”강하리는 숨을 깊게 들이쉬곤 위층으로 올라갔다.대표이사 사무실 문 앞에서 전담 비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강 부장님.”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서 씨는요?”전담 비서가 대답했다.“퇴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강하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강하리와 안예서는 똑같이 입사 3년 차이다.안예서의 집안 상황은 강하리가 제일 잘 안다.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시고 그녀 아래로 남매까지 더 있다.만약 진짜 강하리를 위해 나섰다가 퇴사 당하는 거라면 이 미안함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강하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대표님 오늘 기분 어때요?”전담 비서가 고개를 내저었다.“저기압이에요.”강하리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한번 들어가 볼게요.”“네.”강하리가 노크했지만 안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구승훈의 심기가 아주 불편한가 보다.또 몇 번 노크하고 나서야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안예서는 강하리를 본 순간 방금 울어서 빨개진 두 눈에 또다시 눈물이 북받쳤다.“부장님...”강하리는 얼른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구승훈에게 시선을 돌렸다.“대표님, 이 일은 저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구승훈은 의자에 앉아 침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몸싸움을 벌인 것도 네가 시킨 거야?”“그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저 때문에 몸싸움을 벌인 거니까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대표님.”구승훈은 안예서와 다른 직원을 번갈아 보았다.“강 부장이
강하리가 속절없이 웃었다.“아니, 아직 목숨까지 내걸 필요는 없고 앞으론 오늘처럼 충동적이지 않길 바랄게.”안예서가 입을 삐죽거렸다.“하지만 그 사람들 하는 말 진짜 못 들어주겠다니까요.”강하리는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 날 전혀 자극하지 못해.”안예서는 그런 강하리가 안쓰러웠다.“그래도 가만 내버려 둘 순 없죠! 그 송유라 씨도 나쁜 년이에요. 딱 봐도 가여운 척 오지는 약아빠진 년인데, 보기만 해도 눈꼴사나워 죽겠는데 대표님은 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어요.”“입 조심해. 대표님께 또 걸리면 그땐 나도 구할 수 없어.”안예서는 입을 꾹 다물더니 금세 비명을 질렀다.“보스, 아까 열 받으셨어요? 입술이 다 터졌어요.”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방금 구승훈에게 깨물린 듯싶다.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맞아, 열 받았어.”...퇴근 무렵, 강하리는 손연지의 전화를 받았다.두 사람은 디저트 가게에서 만나기로 했다.강하리가 도착했을 때 손연지는 버블티 한 잔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를 보자 손연지는 얼른 레모네이드를 건넸다.강하리가 막막한 표정을 짓자 손연지가 말했다.“이 정도면 좋은 줄 알아. 하도 나니까 레모네이드 주지 안 그러면 그냥 생수였어.”“약은 가져왔어?”강하리가 웃으며 물었다.손연지는 머리를 끄덕이며 약을 꺼냈다.“입덧 방지에 효과가 꽤 좋을 거야. 너 입덧 심해?”강하리는 가방에 약을 챙겨 넣었다.“평상시엔 괜찮은데 뭐 이상한 냄새를 맡으면 헛구역질 나.”“그럼 최대한 약 먹지 마.”“대표님이 또 의심할까 봐 그래.”그날 밤 토했을 때 구승훈은 또 한 번 그녀의 약을 봤다.이 남자는 아무래도 슬슬 의심하기 시작한 듯싶다.다행히 임신 검사결과 보고서가 옆에 있어서 의심이 크게 일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고 언제까지 위병으로 둘러댈 순 없으니 손연지에게 구토 방지 약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손연지는 구승훈만 떠올리면 울화가 치밀었다.“구승훈 씨 첫사랑 진짜 송유라래?”강하리가 고개를
전에 구승훈이 술자리 약속이 없을 때 강하리는 종종 집에서 그에게 밥을 해줬다.구승훈은 식성도 까다롭고 식자재에 대한 요구도 엄청 까다롭다.약속이 없을 땐 거의 외식하지 않는다.강하리는 애초에 그와 같이 있을 때 음식을 잘 차려 먹이려고 얼마나 공 들인지 모른다.한때는 ‘괜찮네’라는 그의 한마디에 반나절이나 싱글벙글해있었다.그녀의 모든 청춘과 시도와 노력을 전부 구승훈에게 바친 것만 같았다.풋풋했던 청춘과 설레던 순간까지, 그땐 행복한 마음을 담아 그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를 해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득히 먼 옛날 같았다.“왜? 무슨 일인데?”강하리는 통화를 마친 후 안색이 썩 좋지 못했다.“나 돌아가야 해.”강하리는 돈이 모자라 구승훈한테 계속 돈을 받아야 한다. 엄마의 치료비용은 밑 빠진 독이다.전에는 아이를 낙태할 생각이라 부담이 크지 않았지만 이젠 아이를 낳기로 했으니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손연지와 작별하고 그녀는 곧게 식자재 마트로 향했다.구승훈이 매일 가장 신선한 식자재를 요구해서 냉장고 안에는 전날 음식이 단 하나도 없다.식자재 마트를 다 돌고 집에 돌아오니 어느덧 해가 어둑어둑해졌다.강하리는 주방에 들어가 무려 2시간이나 공들여서 요리 네 개에 국 한 그릇 만들어냈다.구승훈이 음식에 대한 요구가 까다롭다 보니 강하리도 요리할 때 꼼꼼해질 수밖에 없다.두 시간 동안 기름 냄새와 연기 때문에 그녀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요리를 다 한 후 강하리는 구토 방지 약을 먹고 나서야 구승훈에게 전화했다.그가 줄곧 전화를 받지 않아 벽시계를 봤더니 어느덧 밤 8시가 다 됐다.이 시간대는 회의하는 것도 아니고 야근하는 것도 아닌데 못 들은 걸까 아니면 받기 싫은 걸까?강하리는 이것저것 추측하며 다시 전화를 걸었고 이번엔 아예 그녀의 전화를 꺼버렸다.그녀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문자를 보냈다.「언제 와요? 밥 다 차렸어요.」잠시 후 문자음이 울렸다.「먹으러 안 가.」강하리는 이 문자를 한참
아마 임신하면 감정 기복이 심한가 보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얼마나 지났을까, 구두 한 쌍이 그녀 눈에 들어왔다.강하리는 머리를 들지 않았다.구승훈에게 지금 같은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구승훈도 그녀 앞에 서서 아무 말 없이 그녀가 고양이, 강아지들에게 먹이를 주는 걸 지켜봤다.강아지, 고양이들이 다 먹고 흩어진 후에야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일어나.”중저음의 살짝 퉁명한 말투였다.분노도 조금 섞여 있는 듯싶었다.송유라한테서 스트레스를 받고 온 걸까?강하리는 감정을 추스르고 머리 들어 그를 쳐다봤다.“왔어요?”구승훈은 실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울었어?”강하리가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요, 아까 벌레가 들어가서요.”구승훈도 딱히 신경 쓰이는 건 아니겠지. 예의상 물은 거겠지.그녀의 대답에 구승훈은 머리를 끄덕였다.“다 먹였어? 다 먹였으면 들어가.”“나 여기 좀 더 있고 싶어요.”구승훈이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화내는 거야?”“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 정도 분수는 저도 지킬 줄 알아요, 대표님.”“알면 됐어. 강 부장은 유치하게 삐지거나 그런 거 하지 마.”강하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구승훈은 제자리에 좀 더 서 있다가 또다시 질문을 건넸다.“진짜 안 돌아갈 거야?”“네. 좀 더 있을게요.”“마음대로 해.”말을 마친 구승훈은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바닥에 쪼그리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일어났다.집에 오니 구승훈은 샤워를 마치고 서재로 들어갔다.그녀도 샤워하고 약을 먹은 후 바로 잠들었다.구승훈이 언제 방으로 들어왔고 또 언제 나갔는지조차 모른 채 깊게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깨보니 침대 옆자리가 쌀쌀했다.어쩌면 그는 어젯밤에 아예 여기서 안 잔 듯싶다.강하리는 잡생각을 접고 마음을 추슬렀다.그녀는 회사로 간 게 아니라 바로 스튜디오로 향했다.오늘은 송유라와 촬영 약속이 있는 날이다.신제품 출시가 코앞이라 진작 홍보를 시작했어야 했는데 모델 교체로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나중엔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
B시 대양그룹.정양철이 사무실로 들어가니 이미 비서가 대기하고 있었다.“강하리 검색어는 어떻게 된 거야?”비서는 잠시 머뭇거렸다.“사모님께서 대양그룹 명의로 매수한 것인데 아마도 회장님을 시험하려는 의도 같습니다.”정 회장이 강하리를 아낀다면 이 일을 거론할 것이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하든 말든 넘어가겠지.정양철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고 그가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주현이 통해 강하리에게 연락해서 대양그룹이 JM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라고 해.”말을 마친 그가 멈칫했다.“집사람이 물어보면 강하리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고.”비서의 눈이 번뜩이더니 대답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정주현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지난번 구승훈과 함께 대양그룹 입찰을 뺏은 이후 정양철 측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정양철이 무슨 꿍꿍이로 합작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지금은 정양철을 상대로 놀아줄 기분이 아니었다.“정주현 씨, 대양그룹에서 마음만 먹으면 파트너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죠?”정주현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는 다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강하리 씨, 우리랑 같이 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강하리가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던 찰나, 정주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B시에 언제 와요? 얼굴 보고 얘기할까요? 협업 안 해도 오랜만에 얼굴 한번 봐요. 우리 안 본 지 오래됐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요, 그럼 가면 연락할게요.”정주현이 전화를 끊자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연미숙의 모습이 보였다.“엄마, 여기서 뭐 해?”연미숙이 웃었다.“우리가 강하리랑 같이 일해?”정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구씨 집안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밖으로 사업을 넓히려는 것 같아.”연미숙은 인상을 찌푸렸다. “꼭 강하리여야만 대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야?”정주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하리가 왜?”연미숙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두 사람이 차 안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리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화사한 아침 햇살 같은 그 미소가 구승훈은 왠지 모르게 눈에 거슬렸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구승훈의 차가 보였다.그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시선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강하리가 안으로 들어간 후 주해찬은 차에서 내려 구승훈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그가 창문을 살며시 두드리자 구승훈이 창문을 내렸다.“구 대표님 시간 있으세요? 얘기 좀 할까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주해찬 씨는 남의 연애에 참견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구승훈의 가시 돋친 말에도 주해찬은 계속 웃기만 했다.“구승훈 씨, 당신과 하리가 잘 지낸다면 나도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당신은 하리를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긴 한가요?”그의 말에 구승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신 후 말을 시작했다.“주해찬 씨, 행복하든 아니든 그건 다 나와 강하리 사이의 일이지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주해찬은 조롱 섞인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웃었다. “구승훈 씨, 내가 하리 데려간다고 했죠. 이번엔 말한 대로 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다시 차로 향했다.구승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완전히 사라진 채 떠나는 차를 바라보았다.그는 한참 동안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보면서 결국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그 자식이랑 떠날 거야?]강하리가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그냥 대화창을 닫아버렸다.구승훈은 전송된 메시지에 답장이 오지 않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입안의 쓴맛을 삼키고 휴대폰을 치우려던 찰나,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왔다.“형, 큰어머니가 그
“죽기 전엔 안 해.”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구승훈의 손가락이 한참을 굳어 있다가 말을 꺼냈다.“안 해.”하고 싶었지만 그게 그녀를 더 멀리 밀어낼까 봐 더 두려웠다.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 문제의 핵심은 아이였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아이 문제로 말을 돌렸다.“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 문연진이 어떻게 아이의 존재를 안 거야?”구승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구승재가 통화하는 걸 들었어.”심준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정말 문연진이 아니야?”구승훈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그 여자가 아니야.”문연진은 이미 연정이를 죽였다고 인정했는데 굳이 연정이를 차로 치어 산에서 떨어뜨렸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그녀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도중에 가정부가 연정이와 함께 차에서 내린 사실을 모른다는 것.“그럼 문연진 말고 또 아는 사람이 있어?”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여초연, 문연진 말로는 그날 밤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침 여초연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했어.”멈칫한 심준호의 눈에서 차가움이 번뜩였다.여초연이란 사람은 솔직히 줄곧 속내를 알 수 없었다.전에는 여러 번이나 구승훈을 죽이려고 했다가 지금은 무척 다정하게 굴었다.그 여자는 지금까지도 끔찍한 존재로 느껴졌다.“설마 그 사람이?”심준호는 문득 구승훈이 안타까웠다.정말 여초연이라면 구승훈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아직 확인하고 있어.”심준호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만 해.”구승훈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심준호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고 이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그도 떠났다.심준호를 배웅하고 차로 돌아온 구승훈의 휴대폰이 울렸다.“형, 어제 강하리 씨 인기 검색어가 대양그룹과 관련이 있어.”구승훈의 눈에 냉기가 감돌았다.“최근 정양철 측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어?”“아니, 이 검색어 말고는 그동안 잠잠했
강하리의 입꼬리가 굳어지며 다시 말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한 대의 자동차가 도로변에 멈춰 서는 것을 목격했다.주해찬이 차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왔다.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렇게 말했다.“직접 만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말을 마친 그는 강하리에게 눈썹을 치켜세웠고 강하리는 길 건너편에 주차된 너무나도 낯익은 차를 보았다.검은색 마이바흐 창문은 반쯤 내려져 있고 차에 탄 남자는 담배를 손에 쥐고 있었다. 멀리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구승훈이 이쪽을 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그쪽을 힐끗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그러면 나중에 메시지 보낼게요.”심준호는 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러면 그동안 잘 돌봐주세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이끌고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강하리의 손목이 잡혔다.어느 틈엔가 구승훈이 길을 건너 이쪽으로 걸어왔고 주해찬이 얼굴을 찡그리며 막으려는데 심준호가 옆에서 말렸다.강하리의 손가락이 살짝 조여졌다.“구승훈 씨, 이거 놔요.”구승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었다.“하리야, 이제 고맙다는 말도 안 할 거야?”강하리의 몸이 굳어지고 입꼬리가 몇 번 움직이다가 말을 꺼냈다.“고마워요.”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이제 놔줄래요?”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나한테 꼭 이래야겠어?”강하리가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씨,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요.”그가 원망스러웠다.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를 보면 연정이가 생각난다는 사실이었다.숨도 쉴 수 없을 것만 같은 고통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나도 놔주지 않겠다고 했잖아. 하리야, 얘기 좀 하자.”강하리의 눈이 빨개지며 입을 열자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강하리가 유치장 벤치에 기대어 홀로 앉아 있었다.머릿속에는 구승훈이 차를 막았을 때와 이곳을 떠날 때의 모습만이 가득했다.강하리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 모든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그 남자의 움직임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그가 이름을 불러줄 때, 그 다급하면서도 부드러운 어투가.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점점 더 가슴이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노민우의 말이 틀린 게 없다는 건 안다.구승훈의 의도는 좋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생각만 해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밤새 달려온 심준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여자가 벤치에 홀로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가녀린 어깨를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그는 부드럽게 한숨을 쉬며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심준호를 보았다.“심 변호사님.” 낮게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엔 어딘가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심준호는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겁내지 마요. 내가 아무 일도 없게 할 테니까.”강하리는 눈가에 맺힌 시큰한 감각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심준호는 손에 든 음식을 그녀에게 건넸다.“아직 밥 안 먹었죠?”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배 안 고파요.”심준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배 안 고프면 안 먹을 거예요?” 그는 곧바로 음식을 열고 숟가락을 그녀의 손에 밀어 넣었다.“마침 나도 안 먹었는데 같이 먹어요.”강하리는 거절하지 못했지만 그 음식들을 보자마자 그녀의 움직임은 멈췄고 자신도 모르게 숟가락을 꽉 움켜쥐었다.“왜요, 입맛에 안 맞아요?”심준호는 눈썹을 치켜뜬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강하리는 음식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 맞는 게 아니라 너무 입맛에 맞아서 문제다.그녀의 취향에 딱 맞는 요리를 주문했다.심준호가 웃었다.“좋아하면 많이 먹어요. 그동안 야윈 것 좀 봐요.”강하리가 그를 슬쩍 쳐다봤다.“구승훈 씨가 주문한 거예요?”심준호는 새우를 그녀의 그릇에 넣어주었다
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하리야...”손연지는 어쩔 줄 몰라 했다.하지만 막상 부르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노민우를 노려보았다.노민우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대략 알고 있었기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강하리 씨, 이번 일은 승훈이 잘못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 거예요. 승훈이도 아이를 지키기 위한 의도였어요. 아이의 상황이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까지 힘들게 버텨왔는데 그래도 하리 씨가 조금만 더 너그럽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됐어, 입 다물어!”손연지가 끼어들었다.“하리가 얼마나 더 너그럽게 봐줘야 해? 심지어... 아주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하리는 더 원망하지 않았어. 그 사람은 뭔데? 그래, 정말 아이를 지키려고 그랬을지 몰라도 하리를 고통스럽게 한 건 사실이잖아. 한번 또 한 번 하리가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알아? 하리는 이해해 줬는데 그 사람은 하리를 이해해 준 적 있어? 하리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고통까지 겪어야 해?”손연지의 이어지는 반박에 노민우는 할 말을 잃었다.“난 그냥 강하리 씨에게 좋은 말을 해주려고 그런 건데.”손연지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무슨 일이 있어도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남자든 아이든 너만큼 중요하지 않아, 알겠지?”강하리는 눈가에 담긴 씁쓸함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알아. 고마워, 연지야.”손연지가 부드럽게 토닥이며 주해찬에게 고개를 돌렸다.“더 달래봐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고 손연지는 노민우를 밖으로 끌어냈다.주해찬은 몸을 숙인 채 강하리를 같은 높이에서 바라봤고 강하리는 그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선배, 난 괜찮아요.”주해찬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거절당할 것을 생각하며 결국 참았다.그는 말을 하기 전까지 한참 동안 침묵했다.“하리야, 이번
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하리야, 브레이크가 고장 났고 넌 몸에 이상이 있었어. 문연진이 도망가려고 했던 거야, 알겠어? 알겠냐고?”강하리가 웃었다.“예전에 송유라도 이런 식으로 법의 심판을 받지 않게 도와준 거지?”구승훈은 말문이 막혔다.“하리야...”강하리가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구승훈, 이제부터 내 일에 신경 쓰지 마.”말을 마친 그녀가 안으로 들어갔고 구승훈의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강하리를 끌어당겼다.“내가 신경 끄면 누가 신경 쓰는데, 주해찬?”강하리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결국 밀어냈다.앞으로 그 사람이 누가 되든 구승훈은 아닐 것이다.주해찬은 손연지, 노민우와 함께 서둘러 달려왔고 세 사람이 도착했을 때 구승훈은 유치장 바깥을 지키고 있었고 강하리는 바깥을 등진 채 앉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마치 거대한 간극이 있는 것 같았다.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걸음을 멈칫했다.강하리를 구해주지 않는 구승훈 때문에 화가 났지만 강하리가 한 짓을 알고는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하리야.”강하리는 손연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뒤를 돌아보았다.그녀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거짓말해서 미안해.”손연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하리야, 너 바보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연지야, 내가 하지 않으면 평생 불안할 것 같았어.”“하리야...” 손연지의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팠다.“그럼 넌 이제 어떡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참 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난 이대로도 괜찮아.”정말 형을 선고받는다고 해도 원망할 건 없었다.“그런 말 하지 마! 하리야, 넌 아직 할 일도 많고 나이도 젊잖아. 아주머니 가족도 있고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살아 계시면서 네가 돌아오길 기다릴 수도 있잖아, 아니야? 이대로 널 포기하면 안 돼!”강하리는 눈가가 촉촉해진 채 한참이 지난 후 말했다.“나한테 가족이 있을까?”“있
구승훈의 눈동자가 움츠러들었다.거리가 너무 짧아서 피하고 싶어도 이미 너무 늦었다.“하리야!” 그가 차를 향해 소리쳤지만 강하리의 차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가속 페달을 밟았다.강하리가 구승훈을 노려보는 것 같아도 그녀의 시야는 진작 눈물로 흐려졌다.하지만 구승훈을 치기 직전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가 구승훈 바로 앞에서 멈췄다.구승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순간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강하리만 바라보았다.조금 전 강하리가 정말로 그를 차로 쳐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하리야.”구승훈이 낮게 부르며 그녀에게 가려는데 그가 막 차 앞을 벗어난 순간 강하리가 다시 액셀을 밟더니 그를 스쳐 지나며 달려갔다.당황한 구승훈이 저쪽을 향해 소리쳤다.“다들 비켜!”문연진을 지키고 있던 몇 명의 경찰이 문연진을 끌어당겨 옆으로 피했지만 문연진은 너무 느렸고 강하리는 지나치게 빨랐다.문연진은 몇 발짝도 뛰지 못하고 쾅 소리와 함께 그대로 부딪혔다.차에 앉아 핸들을 잡고 있던 강하리의 손이 덜덜 떨렸고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성큼성큼 차로 다가온 구승훈이 밖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하리야, 내려.”“하리야, 차 문 열어.”“하리야, 차에서 내려, 응?”반면 강하리는 들리지 않는 듯 혼자서 운전대에 엎드린 채 울기만 했다.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 구승훈조차도.아이의 복수는 그녀가 할 것이다.그 대가가 그녀 본인이라고 해도 말이다.밖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고 차에 부딪힌 문연진의 하체에서 선홍빛 액체가 흘러나왔다.류덕구는 서둘러 사람을 시켜 그녀를 병원으로 보냈고 구승훈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강하리를 달래고 있었다.하지만 강하리는 문을 열어주지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사고 현장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고 동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류덕구를 바라보았다.“저 영상 좀 처리 부탁드립니다.”류덕구가 인상을 찌푸렸다.“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