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가 속절없이 웃었다.“아니, 아직 목숨까지 내걸 필요는 없고 앞으론 오늘처럼 충동적이지 않길 바랄게.”안예서가 입을 삐죽거렸다.“하지만 그 사람들 하는 말 진짜 못 들어주겠다니까요.”강하리는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 날 전혀 자극하지 못해.”안예서는 그런 강하리가 안쓰러웠다.“그래도 가만 내버려 둘 순 없죠! 그 송유라 씨도 나쁜 년이에요. 딱 봐도 가여운 척 오지는 약아빠진 년인데, 보기만 해도 눈꼴사나워 죽겠는데 대표님은 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어요.”“입 조심해. 대표님께 또 걸리면 그땐 나도 구할 수 없어.”안예서는 입을 꾹 다물더니 금세 비명을 질렀다.“보스, 아까 열 받으셨어요? 입술이 다 터졌어요.”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방금 구승훈에게 깨물린 듯싶다.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맞아, 열 받았어.”...퇴근 무렵, 강하리는 손연지의 전화를 받았다.두 사람은 디저트 가게에서 만나기로 했다.강하리가 도착했을 때 손연지는 버블티 한 잔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를 보자 손연지는 얼른 레모네이드를 건넸다.강하리가 막막한 표정을 짓자 손연지가 말했다.“이 정도면 좋은 줄 알아. 하도 나니까 레모네이드 주지 안 그러면 그냥 생수였어.”“약은 가져왔어?”강하리가 웃으며 물었다.손연지는 머리를 끄덕이며 약을 꺼냈다.“입덧 방지에 효과가 꽤 좋을 거야. 너 입덧 심해?”강하리는 가방에 약을 챙겨 넣었다.“평상시엔 괜찮은데 뭐 이상한 냄새를 맡으면 헛구역질 나.”“그럼 최대한 약 먹지 마.”“대표님이 또 의심할까 봐 그래.”그날 밤 토했을 때 구승훈은 또 한 번 그녀의 약을 봤다.이 남자는 아무래도 슬슬 의심하기 시작한 듯싶다.다행히 임신 검사결과 보고서가 옆에 있어서 의심이 크게 일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고 언제까지 위병으로 둘러댈 순 없으니 손연지에게 구토 방지 약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손연지는 구승훈만 떠올리면 울화가 치밀었다.“구승훈 씨 첫사랑 진짜 송유라래?”강하리가 고개를
전에 구승훈이 술자리 약속이 없을 때 강하리는 종종 집에서 그에게 밥을 해줬다.구승훈은 식성도 까다롭고 식자재에 대한 요구도 엄청 까다롭다.약속이 없을 땐 거의 외식하지 않는다.강하리는 애초에 그와 같이 있을 때 음식을 잘 차려 먹이려고 얼마나 공 들인지 모른다.한때는 ‘괜찮네’라는 그의 한마디에 반나절이나 싱글벙글해있었다.그녀의 모든 청춘과 시도와 노력을 전부 구승훈에게 바친 것만 같았다.풋풋했던 청춘과 설레던 순간까지, 그땐 행복한 마음을 담아 그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를 해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득히 먼 옛날 같았다.“왜? 무슨 일인데?”강하리는 통화를 마친 후 안색이 썩 좋지 못했다.“나 돌아가야 해.”강하리는 돈이 모자라 구승훈한테 계속 돈을 받아야 한다. 엄마의 치료비용은 밑 빠진 독이다.전에는 아이를 낙태할 생각이라 부담이 크지 않았지만 이젠 아이를 낳기로 했으니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손연지와 작별하고 그녀는 곧게 식자재 마트로 향했다.구승훈이 매일 가장 신선한 식자재를 요구해서 냉장고 안에는 전날 음식이 단 하나도 없다.식자재 마트를 다 돌고 집에 돌아오니 어느덧 해가 어둑어둑해졌다.강하리는 주방에 들어가 무려 2시간이나 공들여서 요리 네 개에 국 한 그릇 만들어냈다.구승훈이 음식에 대한 요구가 까다롭다 보니 강하리도 요리할 때 꼼꼼해질 수밖에 없다.두 시간 동안 기름 냄새와 연기 때문에 그녀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요리를 다 한 후 강하리는 구토 방지 약을 먹고 나서야 구승훈에게 전화했다.그가 줄곧 전화를 받지 않아 벽시계를 봤더니 어느덧 밤 8시가 다 됐다.이 시간대는 회의하는 것도 아니고 야근하는 것도 아닌데 못 들은 걸까 아니면 받기 싫은 걸까?강하리는 이것저것 추측하며 다시 전화를 걸었고 이번엔 아예 그녀의 전화를 꺼버렸다.그녀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문자를 보냈다.「언제 와요? 밥 다 차렸어요.」잠시 후 문자음이 울렸다.「먹으러 안 가.」강하리는 이 문자를 한참
아마 임신하면 감정 기복이 심한가 보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얼마나 지났을까, 구두 한 쌍이 그녀 눈에 들어왔다.강하리는 머리를 들지 않았다.구승훈에게 지금 같은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구승훈도 그녀 앞에 서서 아무 말 없이 그녀가 고양이, 강아지들에게 먹이를 주는 걸 지켜봤다.강아지, 고양이들이 다 먹고 흩어진 후에야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일어나.”중저음의 살짝 퉁명한 말투였다.분노도 조금 섞여 있는 듯싶었다.송유라한테서 스트레스를 받고 온 걸까?강하리는 감정을 추스르고 머리 들어 그를 쳐다봤다.“왔어요?”구승훈은 실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울었어?”강하리가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요, 아까 벌레가 들어가서요.”구승훈도 딱히 신경 쓰이는 건 아니겠지. 예의상 물은 거겠지.그녀의 대답에 구승훈은 머리를 끄덕였다.“다 먹였어? 다 먹였으면 들어가.”“나 여기 좀 더 있고 싶어요.”구승훈이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화내는 거야?”“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 정도 분수는 저도 지킬 줄 알아요, 대표님.”“알면 됐어. 강 부장은 유치하게 삐지거나 그런 거 하지 마.”강하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구승훈은 제자리에 좀 더 서 있다가 또다시 질문을 건넸다.“진짜 안 돌아갈 거야?”“네. 좀 더 있을게요.”“마음대로 해.”말을 마친 구승훈은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바닥에 쪼그리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일어났다.집에 오니 구승훈은 샤워를 마치고 서재로 들어갔다.그녀도 샤워하고 약을 먹은 후 바로 잠들었다.구승훈이 언제 방으로 들어왔고 또 언제 나갔는지조차 모른 채 깊게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깨보니 침대 옆자리가 쌀쌀했다.어쩌면 그는 어젯밤에 아예 여기서 안 잔 듯싶다.강하리는 잡생각을 접고 마음을 추슬렀다.그녀는 회사로 간 게 아니라 바로 스튜디오로 향했다.오늘은 송유라와 촬영 약속이 있는 날이다.신제품 출시가 코앞이라 진작 홍보를 시작했어야 했는데 모델 교체로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나중엔
강하리는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참으며 스튜디오로 돌아와 스태프들에게 손이 발이 되게 사정한 후에야 회사로 복귀했다.‘어제는 일부러 나 안 알려준 거야. 내가 또 뭘 어쨌길래?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사무실에 한참 앉아있다가 구승훈의 전화가 걸려왔다.“올라와서 차 내려.”“죄송합니다, 대표님. 스튜디오 촬영 스케쥴을 다시 짜야 합니다.”“그래서?”“지금은 시간 없으니 다른 직원에게 시키세요.”강하리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장하다, 강하리, 이젠 대표님 전화도 다 끊고 말이야.’그녀는 내심 뿌듯했다.구승훈이 화내든 말든 지금은 정말 그의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사람 놀리는 게 재밌어?’강하리는 여전히 씩씩거렸다.이 남자는 단 한 번이라도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를 위해 차려줬던 음식을 강아지와 고양이에게 먹여서 기분이 언짢은 듯싶다.그 음식들 그대로 남겨둔다고 구승훈이 먹을 리가 있을까?송유라 만나고 돌아왔는데 그 시간에 밥도 안 먹었을까 봐?송유라한테도 얻어먹고 그녀가 해준 밥도 따지는 걸까?잠시 후 전담 비서의 내선 전화가 안예서에게 걸려왔다.안예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들어왔다.“보스, 대표님이 올라오라고 하십니다.”안예서는 그녀가 오늘 농락당한 걸 알고 있다.스튜디오의 스태프들도 어찌 된 영문인지 잘 안다.두 여자의 날 선 기 싸움에서 이번 판에 또 강하리가 진 거겠지.송유라는 마치 중전마마의 자리를 꿰찬 듯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고 강하리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렸다.안예서도 그런 강하리가 안쓰러웠지만 머리 위에 대표님이 앉아 계시니 하늘 같은 대표님이 송유라를 감싸는 한 감히 입을 나불거릴 수 없다.강하리는 제자리에 앉아 꿈쩍하지 않았다.다만 계속 이렇게 앉아있으면 피해를 보는 건 결국 딴사람들이다.구승훈은 이 점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다.그녀가 뭘 중히 여기는지도 잘 안다.그녀가 명령을 거부하면 처벌받는 건 안예서나 전담 비서이다.그의 앞에서 강하리는 얌전히 분부를 따를
“강 부장 게으름 참 잘 피워.”“죄송합니다, 대표님. 아까 바쁘신 것 같아서 밖에 있었습니다.”“사장은 바빠서 이 지경인데 강 부장은 여유 부리면서 물 한잔에 풍경이나 감상해? 월급 받기 부끄럽지도 않아?”강하리가 대답했다.“죄송합니다.”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실례지만 송유라 씨는 언제쯤 다시 촬영할 수 있을까요? 컨디션 회복이 어려우면 모델 교체를 허락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음 달에 곧 신제품을 출시해야 하는데 더 지체했다가 신제품 홍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구승훈이 드디어 머리를 들었다.“그건 강 부장 업무 능력이 달려서겠지. 모델 교체는 불가능하니까 그쪽으론 생각 접어. 이번 일 감당하기 어려우면 강 부장이 내놔.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게.”강하리는 온몸이 굳었다.구승훈이 말한 인원 교체는 절대 이 기획안의 담당자를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지금 마케팅 부서의 부장을 바꾸려고 한다.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송유라가 약속을 펑크 내고 업무에 협조하지 않는데 구승훈은 오히려 강하리를 바꾸겠다고 한다.강하리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그녀는 돈이 너무 필요했기에 이 직장을 절대 잃을 수 없다.“최선을 다하겠습니다.”강하리가 마지못해 대답했고 구승훈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제때 완벽하게 수행하도록 해, 강 부장.”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네.”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송유라의 매니저에게 연락해 약속 시간을 정했다.이번엔 매니저도 바로 전화를 받더니 깍듯하게 사과했다.강하리는 매니저가 주저리주저리 늘여놓는 말을 다 들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럼 송유라 씨의 쵤영 시간을 정해주세요. 촬영 시간을 정해야 후속 작업도 진행할 수 있거든요.”매니저가 웃으며 말했다.“구체적인 시간은 정하기 힘들 것 같아요.”강하리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정 그렇게 시간 없으시면 다른 볼일 보라고 하세요. 우리도 굳이 송유라 씨여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매니저가 쓴웃음을 지었다.“
순간 강하리는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한참 뒤에야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 내며 말했다.“그럼 저 대신 구 대표님에게 전해주세요. 송유라 씨 이제 건강 회복했으면 최대한 빨리 다음 촬영 시간을 정할 수 있도록 저에게 가능한 시간을 알려주면 감사하겠다고요.”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돌아서서 떠났다.대표사무실에서.구승훈의 사무실을 둘러보는 송유라의 표정은 많이 언짢아 보였다.“오빠 사무실 인테리어 너무 썰렁해 보여요. 전부 흑백에 그레이 톤이라 하나도 안 예뻐요.”구승훈이 계약서를 살펴보다가 송유라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어차피 네가 쓰는 사무실도 아닌데 예쁘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그 순간 송유라는 기분이 확 나빠졌다.“여긴 오빠 사무실인데 왜 나랑 상관없어요?”그러자 구승훈은 고개를 들고 송유라를 바라보면서 가볍게 웃었다.“넌 왜 예전이랑 똑같이 제멋대로야?”송유라는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왜요? 싫어요?”구승훈은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고 옆에 있는 대본을 가리켰다.“네가 말했던 대본 나도 읽어보고 전문인한테 분석 부탁드렸는데, 이 대본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이 드라마에 시간 낭비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시간에 브랜드 광고 촬영을 앞당기자. 전속모델을 맡았으면 협조 잘 해야지. 정 싫으면 모델 바꾸면 돼.”“누가 싫댔어요!”송유라는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난 네가 하기 싫어하는 줄 알았어. 꾀병 부리는 것도 모자라 회사까지 찾아오는 건 뭐야? 시위하는 거야?”송유라는 그의 말에 뜨끔해서 목소리를 더 높였다.“나 진짜 아팠단 말이에요!”구승훈은 그녀를 흘끗 쳐다보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송유라는 대본을 그의 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정말 투자 안 해 줄 거예요?”구승훈이 대답했다.“나 사업하는 사람이야. 투자하려면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봐야지, 내 돈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말이야.”“그러면 오빠는 왜 강하리한테는 돈을 그렇
하지만 구승훈은 달래주기는커녕 차갑게 웃었다.“그래, 애초에 네가 상관할 일 아니었어.”그러자 송유라는 화가 나 이를 악물고 말했다.“강하리더러 사무실로 오라고 해요. 광고 촬영에 관해서 의논할 게 있어요!”구승훈은 시선을 돌렸다.“네가 직접 가서 말해. 까칠하게 굴지 말고 얘기 잘 나눠봐.”송유라는 ‘흥’하고 돌아서서 사무실을 나갔다....강하리는 바로 꼭대기 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회사 밖에는 직원들이 편히 휴식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작은 정원이 있었다.강하리는 정원으로 들어와서 연못가에 앉자 그제야 마음이 살짝 편해졌다.구승훈는 늘 욕구가 강한 터라 강하리는 그 요구를 들어주느라 버거웠다.그는 매번 강하리를 지치게 했지만 그래도 가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구승훈은 파트너에 대해 까다로운지 만족하지 못해도 절대 다른 사람을 찾지는 않았다.어쨌든 송유라는 그의 첫사랑이기 때문에 애틋한 감정이 있어서 송유라와 시간을 보내는 게 강하리와 같이 있는 것보다 즐거워야 할 것이다.구승훈은 강하리와 관계를 나눌 때만 사무실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분부한다.강하리는 마음속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사실 자신이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정작 이번 일에 부닥치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송유라와 구승훈은 서로의 첫사랑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렇게 다시 만나고 관계를 맺을 것도 당연했다.강하리는 벤치에 기대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누군가가 와서 햇빛을 가렸다.“강 부장, 왜 여기 앉아 있어요?”안현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농땡이 피우느라고요. 안 대표님도 참 한가롭네요. 출근 시간에 저희 회사 정원에 와서 돌아다니시고.”안현우는 강하리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당연히 한가로워서 강 부장 회사 정원에 온 건 아니죠. 구 대표 만나러 온 건데 지금 다른 분과 얘기 중이라 사무실에 못 들어가게 한다네요. 그래서 다시 나왔다가 강 부장
그 말을 듣자 강하리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안현우는 조금도 감추지 않고 모욕감이 담긴 말을 내뱉으면서 그녀를 조롱하는 듯했다.강하리는 자신이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구승훈을 포함한 이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확실히 그녀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강하리는 안현우를 쳐다보면서 최대한 타격 없는 척 표정 관리했다.“남의 남자를 뺏는다니요?”“송유라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말이겠죠. 난 늘 강 부장이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뻔뻔할 줄은 몰랐어요.”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그 말 참 웃기네요. 구 대표님이 송유라 씨와 만나면 제가 낄 자리가 있겠어요? 아니면 안 대표님은 제가 구 대표님의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구 대표님이 저를 잡았으면 이 자리는 원래 제 자리인 겁니다. 다들 남의 일에 너무 관심이 지나친 거 아니에요? 그리고...”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어서 말했다.“만약 제가 창녀라면 저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안 대표님은 또 뭐죠? 본능에 충실한 거예요, 아니면 남의 여자를 얻지 못해서 배가 아픈 거예요?”그 말을 듣자 안현우 얼굴의 미소는 싹 사라졌다. 강하리가 신경 쓰이는 것도 맞고 미치도록 갖고 싶은 것도 맞다.특히 지난번에 구승훈이 전화로 그런 소리를 들려준 후로 더 안달 났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강하리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었다.언젠가 그녀를 손에 넣게 되면 반드시 제대로 치욕감을 느끼게 한 후 잔인하게 차버릴 것이다!그때 가서도 이렇게 또박또박 반박할 수 있을지 보자.“강 부장, 설마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를 몰라요?”강하리는 자리에 일어서며 말했다.“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왜 내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죠?”말을 마친 후 그녀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정원을 벗어난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강하리는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송유라가 자신의 자리에서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구승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가 겨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하리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소중한 보물이다.이미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그녀였기에 더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도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저 그녀가 밝게만 지내길 바랐다. 여초연도, 구동근도, 자신의 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자기야,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조금만 더 시간을 줘서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때 모든 걸 이 여자에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알았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은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속상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구승훈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이 점점 더 씁쓸해졌다.여초연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여초연의 인생을 망쳤으니 본인도 똑같게 망가뜨리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하지만 구승훈은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이대로 그녀의 손에 망가질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그를 낳은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시선을 내린 구승훈이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치료하는 데 협조할게.]노민준은 곧장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의 무기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잘 생각했어.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노민준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웬일로 구승훈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끊기 전 노민준이 갑자기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구승훈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힘들게 얻은 지금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겠지.”전화를 끊고 구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어도 기꺼이 노력해 보고 싶었다.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강하리의 말에 심문석은 한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번졌고 벌써 결혼식 장소까지 고심하고 있었다.“너희 둘이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땐 할아버지가 키우마.”강하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꾸하며 넘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구승훈을 보며 강하리가 물었다.“여기 안 있을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보내기 싫어?”입술을 달싹이며 빤히 상대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줄곧 그가 회피하던 답을 찾으려는 듯했다.비록 구승훈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빠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고 관계를 갖지 않아도 늘 그녀를 탐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요 며칠 그녀가 약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만 능글맞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연정이가 같이 가도 돼?”멈칫한 구승훈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더 원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응.”구승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강하리의 말이 다시 들렸다.“방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좀 무서워. 구승훈, 여기 남던지 내가 따라갈게.”강하리가 말을 마치며 허리를 감싸자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이걸 어떻게 거절하나.구승훈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가 이곳에 머물자 백아영은 연정이를 자신의 방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구승훈이 나가서 노민준에게 연락하고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샤워를 끝낸 뒤였다.얇은 잠옷만 입고 있는 몸에는 구승훈이 새긴 흔적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몸이 견딜 수 있겠어?”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화장대 거울로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