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그 남자의 정체는 뭘까? 얼마나 잘났길래 강하리가 10년을 좋아한 걸까?10년이라, 그녀는 이제 고작 27살인데 벌써 10년을 좋아했다고?어쩌면 그와 섹스할 때도 머릿속엔 짝사랑한 남자뿐이었을지...구승훈은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10년이면 17살 때부터 좋아한 거야?”강하리는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었다.“네.”“근데 왜 함께 안 있어?”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안 좋아해요.”구승훈이 차가운 미소를 날렸다.“그래. 그러다 어느 날 널 좋아한다면?”강하리도 가볍게 웃었다.“그럴 일은 없어요. 그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구승훈은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우리 강 부장 순정파였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도 여전히 마음 못 접은 거야?”“네,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 그리 쉽게 단념할 수 있던가요.”구승훈의 얼굴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차 세워.”뜬금없는 명령에 강하리는 핸들을 틀어 길옆에 주차했다.“대표님, 왜 그러세요?”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미친 듯이 입술을 탐했다.강하리는 갑작스러운 키스에 본능적으로 밀쳐내려 했고 이 동작은 순식간에 구승훈의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켰다.“왜? 이젠 내가 키스하는 것도 싫어?”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노민우가 키스하자고 할 땐 선뜻 들이댔잖아.”다 지나간 일인데 왜 들추는 거지?!“게임이잖아요? 룰 안 지켜요 그럼?”구승훈이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그렇지. 깜빡했네. 강 부장은 항상 룰에 철두철미한 사람이잖아.”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대표님도 그다지 신경 쓰는 건 아니잖아요?”“맞아. 그렇지만 너는 처신 똑바로 해야 해. 게임은 게임이지만 네 몸을 더럽혀서야 되겠어? 나 그런 거 딱 질색인데, 너무 역겹거든!”강하리는 표정이 얼어붙었다.“걱정 마세요 대표님, 그럴 일 없어요.”구승훈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강 부장이 누굴 좋아하든
강하리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마침 마케팅 부서의 한 실습생이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왔다.“강 부장님, 큰일 났어요. 예서 씨가 다투고 있어요.”강하리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어떻게 된 거예요?”그 실습생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누군가가 부장님 험담하는 걸 듣더니 도저히 못 참고 가서 따져 묻기 시작했는데 대화로 잘 안 풀렸나 봐요. 그만... 그만 몸싸움으로 번지고 말았어요.”“그래서 지금 어딘데요?”“대표님 사무실로 불려갔어요.”강하리는 숨을 깊게 들이쉬곤 위층으로 올라갔다.대표이사 사무실 문 앞에서 전담 비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강 부장님.”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서 씨는요?”전담 비서가 대답했다.“퇴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강하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강하리와 안예서는 똑같이 입사 3년 차이다.안예서의 집안 상황은 강하리가 제일 잘 안다.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시고 그녀 아래로 남매까지 더 있다.만약 진짜 강하리를 위해 나섰다가 퇴사 당하는 거라면 이 미안함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강하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대표님 오늘 기분 어때요?”전담 비서가 고개를 내저었다.“저기압이에요.”강하리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한번 들어가 볼게요.”“네.”강하리가 노크했지만 안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구승훈의 심기가 아주 불편한가 보다.또 몇 번 노크하고 나서야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안예서는 강하리를 본 순간 방금 울어서 빨개진 두 눈에 또다시 눈물이 북받쳤다.“부장님...”강하리는 얼른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구승훈에게 시선을 돌렸다.“대표님, 이 일은 저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구승훈은 의자에 앉아 침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몸싸움을 벌인 것도 네가 시킨 거야?”“그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저 때문에 몸싸움을 벌인 거니까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대표님.”구승훈은 안예서와 다른 직원을 번갈아 보았다.“강 부장이
강하리가 속절없이 웃었다.“아니, 아직 목숨까지 내걸 필요는 없고 앞으론 오늘처럼 충동적이지 않길 바랄게.”안예서가 입을 삐죽거렸다.“하지만 그 사람들 하는 말 진짜 못 들어주겠다니까요.”강하리는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 날 전혀 자극하지 못해.”안예서는 그런 강하리가 안쓰러웠다.“그래도 가만 내버려 둘 순 없죠! 그 송유라 씨도 나쁜 년이에요. 딱 봐도 가여운 척 오지는 약아빠진 년인데, 보기만 해도 눈꼴사나워 죽겠는데 대표님은 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어요.”“입 조심해. 대표님께 또 걸리면 그땐 나도 구할 수 없어.”안예서는 입을 꾹 다물더니 금세 비명을 질렀다.“보스, 아까 열 받으셨어요? 입술이 다 터졌어요.”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방금 구승훈에게 깨물린 듯싶다.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맞아, 열 받았어.”...퇴근 무렵, 강하리는 손연지의 전화를 받았다.두 사람은 디저트 가게에서 만나기로 했다.강하리가 도착했을 때 손연지는 버블티 한 잔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를 보자 손연지는 얼른 레모네이드를 건넸다.강하리가 막막한 표정을 짓자 손연지가 말했다.“이 정도면 좋은 줄 알아. 하도 나니까 레모네이드 주지 안 그러면 그냥 생수였어.”“약은 가져왔어?”강하리가 웃으며 물었다.손연지는 머리를 끄덕이며 약을 꺼냈다.“입덧 방지에 효과가 꽤 좋을 거야. 너 입덧 심해?”강하리는 가방에 약을 챙겨 넣었다.“평상시엔 괜찮은데 뭐 이상한 냄새를 맡으면 헛구역질 나.”“그럼 최대한 약 먹지 마.”“대표님이 또 의심할까 봐 그래.”그날 밤 토했을 때 구승훈은 또 한 번 그녀의 약을 봤다.이 남자는 아무래도 슬슬 의심하기 시작한 듯싶다.다행히 임신 검사결과 보고서가 옆에 있어서 의심이 크게 일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고 언제까지 위병으로 둘러댈 순 없으니 손연지에게 구토 방지 약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손연지는 구승훈만 떠올리면 울화가 치밀었다.“구승훈 씨 첫사랑 진짜 송유라래?”강하리가 고개를
전에 구승훈이 술자리 약속이 없을 때 강하리는 종종 집에서 그에게 밥을 해줬다.구승훈은 식성도 까다롭고 식자재에 대한 요구도 엄청 까다롭다.약속이 없을 땐 거의 외식하지 않는다.강하리는 애초에 그와 같이 있을 때 음식을 잘 차려 먹이려고 얼마나 공 들인지 모른다.한때는 ‘괜찮네’라는 그의 한마디에 반나절이나 싱글벙글해있었다.그녀의 모든 청춘과 시도와 노력을 전부 구승훈에게 바친 것만 같았다.풋풋했던 청춘과 설레던 순간까지, 그땐 행복한 마음을 담아 그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를 해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득히 먼 옛날 같았다.“왜? 무슨 일인데?”강하리는 통화를 마친 후 안색이 썩 좋지 못했다.“나 돌아가야 해.”강하리는 돈이 모자라 구승훈한테 계속 돈을 받아야 한다. 엄마의 치료비용은 밑 빠진 독이다.전에는 아이를 낙태할 생각이라 부담이 크지 않았지만 이젠 아이를 낳기로 했으니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손연지와 작별하고 그녀는 곧게 식자재 마트로 향했다.구승훈이 매일 가장 신선한 식자재를 요구해서 냉장고 안에는 전날 음식이 단 하나도 없다.식자재 마트를 다 돌고 집에 돌아오니 어느덧 해가 어둑어둑해졌다.강하리는 주방에 들어가 무려 2시간이나 공들여서 요리 네 개에 국 한 그릇 만들어냈다.구승훈이 음식에 대한 요구가 까다롭다 보니 강하리도 요리할 때 꼼꼼해질 수밖에 없다.두 시간 동안 기름 냄새와 연기 때문에 그녀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요리를 다 한 후 강하리는 구토 방지 약을 먹고 나서야 구승훈에게 전화했다.그가 줄곧 전화를 받지 않아 벽시계를 봤더니 어느덧 밤 8시가 다 됐다.이 시간대는 회의하는 것도 아니고 야근하는 것도 아닌데 못 들은 걸까 아니면 받기 싫은 걸까?강하리는 이것저것 추측하며 다시 전화를 걸었고 이번엔 아예 그녀의 전화를 꺼버렸다.그녀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문자를 보냈다.「언제 와요? 밥 다 차렸어요.」잠시 후 문자음이 울렸다.「먹으러 안 가.」강하리는 이 문자를 한참
아마 임신하면 감정 기복이 심한가 보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얼마나 지났을까, 구두 한 쌍이 그녀 눈에 들어왔다.강하리는 머리를 들지 않았다.구승훈에게 지금 같은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구승훈도 그녀 앞에 서서 아무 말 없이 그녀가 고양이, 강아지들에게 먹이를 주는 걸 지켜봤다.강아지, 고양이들이 다 먹고 흩어진 후에야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일어나.”중저음의 살짝 퉁명한 말투였다.분노도 조금 섞여 있는 듯싶었다.송유라한테서 스트레스를 받고 온 걸까?강하리는 감정을 추스르고 머리 들어 그를 쳐다봤다.“왔어요?”구승훈은 실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울었어?”강하리가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요, 아까 벌레가 들어가서요.”구승훈도 딱히 신경 쓰이는 건 아니겠지. 예의상 물은 거겠지.그녀의 대답에 구승훈은 머리를 끄덕였다.“다 먹였어? 다 먹였으면 들어가.”“나 여기 좀 더 있고 싶어요.”구승훈이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화내는 거야?”“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 정도 분수는 저도 지킬 줄 알아요, 대표님.”“알면 됐어. 강 부장은 유치하게 삐지거나 그런 거 하지 마.”강하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구승훈은 제자리에 좀 더 서 있다가 또다시 질문을 건넸다.“진짜 안 돌아갈 거야?”“네. 좀 더 있을게요.”“마음대로 해.”말을 마친 구승훈은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바닥에 쪼그리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일어났다.집에 오니 구승훈은 샤워를 마치고 서재로 들어갔다.그녀도 샤워하고 약을 먹은 후 바로 잠들었다.구승훈이 언제 방으로 들어왔고 또 언제 나갔는지조차 모른 채 깊게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깨보니 침대 옆자리가 쌀쌀했다.어쩌면 그는 어젯밤에 아예 여기서 안 잔 듯싶다.강하리는 잡생각을 접고 마음을 추슬렀다.그녀는 회사로 간 게 아니라 바로 스튜디오로 향했다.오늘은 송유라와 촬영 약속이 있는 날이다.신제품 출시가 코앞이라 진작 홍보를 시작했어야 했는데 모델 교체로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나중엔
강하리는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참으며 스튜디오로 돌아와 스태프들에게 손이 발이 되게 사정한 후에야 회사로 복귀했다.‘어제는 일부러 나 안 알려준 거야. 내가 또 뭘 어쨌길래?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사무실에 한참 앉아있다가 구승훈의 전화가 걸려왔다.“올라와서 차 내려.”“죄송합니다, 대표님. 스튜디오 촬영 스케쥴을 다시 짜야 합니다.”“그래서?”“지금은 시간 없으니 다른 직원에게 시키세요.”강하리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장하다, 강하리, 이젠 대표님 전화도 다 끊고 말이야.’그녀는 내심 뿌듯했다.구승훈이 화내든 말든 지금은 정말 그의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사람 놀리는 게 재밌어?’강하리는 여전히 씩씩거렸다.이 남자는 단 한 번이라도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를 위해 차려줬던 음식을 강아지와 고양이에게 먹여서 기분이 언짢은 듯싶다.그 음식들 그대로 남겨둔다고 구승훈이 먹을 리가 있을까?송유라 만나고 돌아왔는데 그 시간에 밥도 안 먹었을까 봐?송유라한테도 얻어먹고 그녀가 해준 밥도 따지는 걸까?잠시 후 전담 비서의 내선 전화가 안예서에게 걸려왔다.안예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들어왔다.“보스, 대표님이 올라오라고 하십니다.”안예서는 그녀가 오늘 농락당한 걸 알고 있다.스튜디오의 스태프들도 어찌 된 영문인지 잘 안다.두 여자의 날 선 기 싸움에서 이번 판에 또 강하리가 진 거겠지.송유라는 마치 중전마마의 자리를 꿰찬 듯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고 강하리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렸다.안예서도 그런 강하리가 안쓰러웠지만 머리 위에 대표님이 앉아 계시니 하늘 같은 대표님이 송유라를 감싸는 한 감히 입을 나불거릴 수 없다.강하리는 제자리에 앉아 꿈쩍하지 않았다.다만 계속 이렇게 앉아있으면 피해를 보는 건 결국 딴사람들이다.구승훈은 이 점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다.그녀가 뭘 중히 여기는지도 잘 안다.그녀가 명령을 거부하면 처벌받는 건 안예서나 전담 비서이다.그의 앞에서 강하리는 얌전히 분부를 따를
“강 부장 게으름 참 잘 피워.”“죄송합니다, 대표님. 아까 바쁘신 것 같아서 밖에 있었습니다.”“사장은 바빠서 이 지경인데 강 부장은 여유 부리면서 물 한잔에 풍경이나 감상해? 월급 받기 부끄럽지도 않아?”강하리가 대답했다.“죄송합니다.”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실례지만 송유라 씨는 언제쯤 다시 촬영할 수 있을까요? 컨디션 회복이 어려우면 모델 교체를 허락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음 달에 곧 신제품을 출시해야 하는데 더 지체했다가 신제품 홍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구승훈이 드디어 머리를 들었다.“그건 강 부장 업무 능력이 달려서겠지. 모델 교체는 불가능하니까 그쪽으론 생각 접어. 이번 일 감당하기 어려우면 강 부장이 내놔.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게.”강하리는 온몸이 굳었다.구승훈이 말한 인원 교체는 절대 이 기획안의 담당자를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지금 마케팅 부서의 부장을 바꾸려고 한다.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송유라가 약속을 펑크 내고 업무에 협조하지 않는데 구승훈은 오히려 강하리를 바꾸겠다고 한다.강하리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그녀는 돈이 너무 필요했기에 이 직장을 절대 잃을 수 없다.“최선을 다하겠습니다.”강하리가 마지못해 대답했고 구승훈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제때 완벽하게 수행하도록 해, 강 부장.”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네.”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송유라의 매니저에게 연락해 약속 시간을 정했다.이번엔 매니저도 바로 전화를 받더니 깍듯하게 사과했다.강하리는 매니저가 주저리주저리 늘여놓는 말을 다 들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럼 송유라 씨의 쵤영 시간을 정해주세요. 촬영 시간을 정해야 후속 작업도 진행할 수 있거든요.”매니저가 웃으며 말했다.“구체적인 시간은 정하기 힘들 것 같아요.”강하리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정 그렇게 시간 없으시면 다른 볼일 보라고 하세요. 우리도 굳이 송유라 씨여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매니저가 쓴웃음을 지었다.“
순간 강하리는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한참 뒤에야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 내며 말했다.“그럼 저 대신 구 대표님에게 전해주세요. 송유라 씨 이제 건강 회복했으면 최대한 빨리 다음 촬영 시간을 정할 수 있도록 저에게 가능한 시간을 알려주면 감사하겠다고요.”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돌아서서 떠났다.대표사무실에서.구승훈의 사무실을 둘러보는 송유라의 표정은 많이 언짢아 보였다.“오빠 사무실 인테리어 너무 썰렁해 보여요. 전부 흑백에 그레이 톤이라 하나도 안 예뻐요.”구승훈이 계약서를 살펴보다가 송유라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어차피 네가 쓰는 사무실도 아닌데 예쁘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그 순간 송유라는 기분이 확 나빠졌다.“여긴 오빠 사무실인데 왜 나랑 상관없어요?”그러자 구승훈은 고개를 들고 송유라를 바라보면서 가볍게 웃었다.“넌 왜 예전이랑 똑같이 제멋대로야?”송유라는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왜요? 싫어요?”구승훈은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고 옆에 있는 대본을 가리켰다.“네가 말했던 대본 나도 읽어보고 전문인한테 분석 부탁드렸는데, 이 대본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이 드라마에 시간 낭비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시간에 브랜드 광고 촬영을 앞당기자. 전속모델을 맡았으면 협조 잘 해야지. 정 싫으면 모델 바꾸면 돼.”“누가 싫댔어요!”송유라는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난 네가 하기 싫어하는 줄 알았어. 꾀병 부리는 것도 모자라 회사까지 찾아오는 건 뭐야? 시위하는 거야?”송유라는 그의 말에 뜨끔해서 목소리를 더 높였다.“나 진짜 아팠단 말이에요!”구승훈은 그녀를 흘끗 쳐다보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송유라는 대본을 그의 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정말 투자 안 해 줄 거예요?”구승훈이 대답했다.“나 사업하는 사람이야. 투자하려면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봐야지, 내 돈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말이야.”“그러면 오빠는 왜 강하리한테는 돈을 그렇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