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입가에 다다른 말을 꾹 참았다.구승훈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기에 이렇게까지 말한 건 오늘 반드시 그녀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강하리는 더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금방 갈게요.”전담 비서가 웃으며 대답했다.“서두르십시오.”집에 도착했을 때 구승훈은 막 샤워를 마치고 걸어 나왔다.널찍한 샤워 가운으로도 그의 완벽한 몸매를 가릴 순 없었다.구승훈은 소파에 앉아 담뱃불을 지피고 뽀얀 담배 연기 너머로 강하리를 쳐다봤다.잠시 후 그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우리 강 부장이 이렇게 강하게 나올 때도 있었어? 난 오늘 처음 알았네.”강하리는 제자리에 서서 꿈쩍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없었다.오늘 그녀가 스튜디오에서 송유라를 때린 일로 비꼬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안다.“나도 언제까지 괴롭힘을 당할 수만은 없잖아요. 그래서 대표님은 송유라 때문에 나한테 따져 물으려고 이러시는 거예요?”구승훈은 그녀를 쳐다보다가 한참 후 담뱃불을 껐다.“이리 와.”“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구승훈이 움직이지 않자 강하리는 마지못해 앞으로 다가갔다.그는 책상 위의 상자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마음에 드는지 한번 열어봐.”열어보니 안에는 목걸이가 하나 들어있었다.완벽하게 컷팅 된 다이아몬드가 불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났다.강하리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구승훈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선물해본 적이 없다.선물을 준다는 건 마음을 표한다는 뜻이기에 그녀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대표님이 선물을 줄 리가 있을까.돈은 줄 수 있어도 선물은 단 한 번도 안 줬다.전에는 강하리가 종종 그에게 옷, 신발, 넥타이 등을 선물해주었다.그녀는 돈이 없어 명품을 사주진 못했지만 의외로 대표님이 잘 입고 다녔다.다행히 이 남자가 잘생기고 몸매가 훤칠하여 보세 옷을 입어도 귀티가 났다.그래서인지 강하리도 자꾸만 더 옷을 사주고 싶었다.다만 구승훈은 그녀에게 선물을 준 적이 없다.생각나지 않아서? 또 혹은 아예 생각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일단 둘러싸이기만 하면 돌덩어리와 진흙이 그녀 몸에 날아왔고 간간이 도마뱀과 쥐, 그리고 뱀까지 섞여 있었다.한번은 강하리가 참다못해 송유라를 때렸는데 송동혁이 집까지 찾아와 두말없이 벨트로 그녀를 한바탕 두들겨 팼다.그때 강하리는 울면서 송유라의 만행을 다 말했지만 송동혁한테서 돌아온 그 한마디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얘가 널 때려죽여도 참아! 넌 그래야 해.”그리고 지금 똑같은 상황이 또다시 그녀에게 벌어졌다.하지만 구승훈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전보다 더 가슴 아프고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그녀는 쓰디쓴 이 마음을 꾹 참으며 그에게 물었다.“내가 왜 그래야 하죠?”‘왜 내가 송유라를 피해야 해? 왜 나만 피해야 하냐고? 내연녀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안 했는데 왜 나만 피해?’구승훈이 그녀를 쳐다봤다.“왜냐하면 걔는 송유라고 넌 강하리일 뿐이니까.”칼로 심장을 후벼 파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걸까?강하리는 애써 담담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내가 싫다면요?”구승훈의 안색이 확 짙어졌다.“강 부장, 미리 경고할 때 말 잘 들어. 반항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면 너한테 나쁠 것 없어.”강하리는 실소를 터트렸다.얌전하면 어떻고 얌전하지 않으면 또 뭐가 달라질까?어차피 다 똑같은 결과일 텐데.“알았어요. 대표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거죠.”구승훈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차 한 잔 타와.”구승훈은 커피를 안 마시고 차에 대한 요구도 매우 까다롭다.강하리는 한때 이 남자를 위해 일부러 차 끓이는 법을 배웠고 매번 출장 갈 때마다 전문적인 다기 세트도 챙겼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단지 오늘은 썩 달갑지가 않았다.“몸이 불편해서 타기 싫어요.”구승훈은 씩 웃으며 그녀의 마음을 훤히 꿰뚫은 것만 같았다.“강 부장 이젠 점점 더 기어오르네?”강하리가 그를 노려봤다.“대표님 그냥 송유라 씨한테 해달라고 하시죠. 왜요? 걔는 부려먹기 아까워요?”구승훈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강하리는 이미 선을 넘었다는 걸
강하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구승훈과 눈을 마주쳤다.“속이 좀 불편한 것뿐이에요.”그녀는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고 세면대에서 세수했다.구승훈은 묵묵히 그녀를 지켜봤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등 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진 후에야 강하리도 숨을 조금 돌렸다.세안을 마치고 그녀는 약을 챙겨 침실로 들어갔다.손연지가 처방한 정량대로 일일이 먹었고 다 먹고 나니 마침 구승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침대 머리맡에 놓은 그녀의 약통을 보더니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서서히 다가와 약통을 들고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어디서 처방한 약이야?”“병원에서요.”“언제?”강하리는 잠시 침묵한 후 말을 이었다.“한밤중에 병원 실려 간 그날이요.”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너 위병 있는 거 왜 전에는 몰랐지? 딱 한 번 발작했는데 그 정도로 심각해?”강하리가 웃으며 대답했다.“쭉 달고 사는 지병이었어요. 대표님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서 그랬겠죠.”구승훈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신경 쓰는 포인트가 오롯이 그녀와 딴 남자들 사이의 관계였을 뿐이다.그녀의 건강에 관해서는 관심해본 적이 없다.“그래?”그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몸이 불편하면 일찍 자.”“네.”강하리는 잠옷을 챙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샤워하고 나오니 구승훈은 어느덧 방에 없었다.이제 막 머리를 다 말렸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문을 열자 구승훈이 즐겨 먹던 레스토랑 배달원이 문 앞에 서 있었다.“대표님께서 사모님이 아직 저녁을 안 드셨다고 위가 불편하시다면서 친히 야채죽을 주문하셨습니다.”강하리는 음식을 받으며 인사했다.“고마워요.”그녀는 죽을 들고 방 안에 들어갔다.실은 위가 텅 비었지만 식욕이 없었다.그래도 아이를 위해서 야채죽을 먹는 수밖에.다 먹고 침대에 눕자 스르륵 잠들어버렸다.갑작스러운 휴대폰 벨 소리에 눈을 떴고 확인해보니 뜻밖에도 구승재였다.“승재 씨,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늦은
자리에 앉자마자 구승훈이 그녀의 허리를 확 감싸 안고 그녀의 어깨에 턱을 고인 채 술 냄새를 풍기며 물었다.“왜 왔어?”강하리는 허리가 경직됐다.“대표님이 취하신 줄 알고요.”구승훈이 가볍게 웃었다.“언제 내가 취하는 거 봤어?”강하리는 문득 침묵했다.그랬다. 이 남자는 단 한 번도 취한 적이 없다!그토록 자율적이고 경계심 많은 구승훈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될 리가 있을까?전에 그 많은 술자리에 참석하면서도 구승훈은 취한 적이 없다.“미안해요.”강하리는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사과할 거 없어. 난 그냥 궁금했거든. 오늘 밤에 누구 전화든 다 달려 나왔을지 말이야.”강하리는 침묵하다가 대답했다.“대표님과 연관된 일이라면 전부 달려왔을 겁니다.”구승훈이 천천히 말했다.“바보.”그리곤 한쪽 옆으로 기댔다.강하리는 ‘바보’라는 두 글자를 꼼꼼히 되새겨보았는데 아무래도 비난의 뜻에 더 치우치는 듯싶었다.나머지는 뭐... 그녀가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됐나 보지.“강 부장, 함께해요.”강하리가 거절했지만 이 인간들은 그녀를 놓아줄 기세가 아니었다.“강 부장, 괜찮아요! 게임은 게임일 뿐이잖아요.”“그래요. 다들 알고 지낸 지 오래됐는데 함께 게임한 적도 없네요. 강 부장 설마 이렇게까지 우릴 체면 안 주는 건 아니겠죠?”뭇사람들이 한마디씩 주고받았다.강하리는 구승훈을 힐긋 쳐다봤다.구승훈의 눈빛이 한없이 싸늘해졌다.“강 부장, 우리 형 왜 봐요? 얼른 와서 놀아요!”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강하리는 마지못해 눈 딱 감고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이번엔 왕게임이었다.첫판은 운 좋게 안 걸렸지만 이제 막 한숨 돌리려 할 때 사태는 벌어지고 말았다.이번 판에 왕은 구승재였고 그는 음침한 눈빛으로 지령을 내렸다.“3번이랑 4번 30초 동안 키스해.”3번은 강하리였고 4번은 구승훈의 몇몇 친구 중 한 명인 노민우였다.패를 보인 순간 룸 안이 발칵 뒤집혔다.놀리는
룸 안의 뭇사람들은 전부 구승훈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다들 그가 자존심만 내세우는 거라고 여겼지만 강하리는 알고 있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그녀가 키스하든 말든 구승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오직 누가 제 물건을 건드렸을지, 그 하나만 신경 쓸 뿐이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추슬렀다.게임은 계속됐고 이번 판에 강하리는 그리 쉽게 넘어가지 못했다.왕게임에서 노민우와 극도로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던지라 그녀가 선뜻 진실게임을 선택했는데 구승재가 이런 질문을 내던졌다.“강 부장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있다면 좋아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뭇사람들의 시선이 또다시 구승훈에게 쏠렸다.구승훈도 이 질문에 구미가 당겼는지 눈썹을 치켜세웠다.강하리는 한참 침묵한 후에야 대답했다.“있어요.”다들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고 구승훈도 눈을 가늘게 떴다.구승재는 그런 형을 쳐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그럼 좋아한 지는 몇 년이나 됐어요?”몇 년이라...강하리도 기억이 잘 안 났다.17살에 재회했을 때부터 계산해도 대충 10년 좌우이다.“10년이요.”“우와.”룸 안에 탄성이 자자했고 유독 구승재만 가슴이 아찔거렸다.그가 알기로 강하리와 구승훈은 알고 지낸 지 고작 3년밖에 안 되는데 강하리가 좋아한 사람이 10년이나 됐다고 하니 형은 한물간 셈이다!구승재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는 요즘 강하리와 상극인가 보다.저번에 그가 부추긴 것 때문에 강하리가 처음으로 구승훈과 정색했고 오늘도 그 때문에 강하리가 좋아하는 사람이 구승훈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이건 분명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게임일 듯싶다.구승재가 울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다음엔 절대 강 부장과 이런 게임을 하지 말아야지.’한편 옆에 앉아있는 구승훈은 얼굴에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반응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이 질문이 나온 순간부터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좋든 나쁘든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게다가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
대체 그 남자의 정체는 뭘까? 얼마나 잘났길래 강하리가 10년을 좋아한 걸까?10년이라, 그녀는 이제 고작 27살인데 벌써 10년을 좋아했다고?어쩌면 그와 섹스할 때도 머릿속엔 짝사랑한 남자뿐이었을지...구승훈은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10년이면 17살 때부터 좋아한 거야?”강하리는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었다.“네.”“근데 왜 함께 안 있어?”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안 좋아해요.”구승훈이 차가운 미소를 날렸다.“그래. 그러다 어느 날 널 좋아한다면?”강하리도 가볍게 웃었다.“그럴 일은 없어요. 그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구승훈은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우리 강 부장 순정파였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도 여전히 마음 못 접은 거야?”“네,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 그리 쉽게 단념할 수 있던가요.”구승훈의 얼굴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차 세워.”뜬금없는 명령에 강하리는 핸들을 틀어 길옆에 주차했다.“대표님, 왜 그러세요?”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미친 듯이 입술을 탐했다.강하리는 갑작스러운 키스에 본능적으로 밀쳐내려 했고 이 동작은 순식간에 구승훈의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켰다.“왜? 이젠 내가 키스하는 것도 싫어?”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노민우가 키스하자고 할 땐 선뜻 들이댔잖아.”다 지나간 일인데 왜 들추는 거지?!“게임이잖아요? 룰 안 지켜요 그럼?”구승훈이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그렇지. 깜빡했네. 강 부장은 항상 룰에 철두철미한 사람이잖아.”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대표님도 그다지 신경 쓰는 건 아니잖아요?”“맞아. 그렇지만 너는 처신 똑바로 해야 해. 게임은 게임이지만 네 몸을 더럽혀서야 되겠어? 나 그런 거 딱 질색인데, 너무 역겹거든!”강하리는 표정이 얼어붙었다.“걱정 마세요 대표님, 그럴 일 없어요.”구승훈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강 부장이 누굴 좋아하든
강하리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마침 마케팅 부서의 한 실습생이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왔다.“강 부장님, 큰일 났어요. 예서 씨가 다투고 있어요.”강하리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어떻게 된 거예요?”그 실습생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누군가가 부장님 험담하는 걸 듣더니 도저히 못 참고 가서 따져 묻기 시작했는데 대화로 잘 안 풀렸나 봐요. 그만... 그만 몸싸움으로 번지고 말았어요.”“그래서 지금 어딘데요?”“대표님 사무실로 불려갔어요.”강하리는 숨을 깊게 들이쉬곤 위층으로 올라갔다.대표이사 사무실 문 앞에서 전담 비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강 부장님.”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서 씨는요?”전담 비서가 대답했다.“퇴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강하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강하리와 안예서는 똑같이 입사 3년 차이다.안예서의 집안 상황은 강하리가 제일 잘 안다.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시고 그녀 아래로 남매까지 더 있다.만약 진짜 강하리를 위해 나섰다가 퇴사 당하는 거라면 이 미안함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강하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대표님 오늘 기분 어때요?”전담 비서가 고개를 내저었다.“저기압이에요.”강하리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한번 들어가 볼게요.”“네.”강하리가 노크했지만 안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구승훈의 심기가 아주 불편한가 보다.또 몇 번 노크하고 나서야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안예서는 강하리를 본 순간 방금 울어서 빨개진 두 눈에 또다시 눈물이 북받쳤다.“부장님...”강하리는 얼른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구승훈에게 시선을 돌렸다.“대표님, 이 일은 저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구승훈은 의자에 앉아 침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몸싸움을 벌인 것도 네가 시킨 거야?”“그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저 때문에 몸싸움을 벌인 거니까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대표님.”구승훈은 안예서와 다른 직원을 번갈아 보았다.“강 부장이
강하리가 속절없이 웃었다.“아니, 아직 목숨까지 내걸 필요는 없고 앞으론 오늘처럼 충동적이지 않길 바랄게.”안예서가 입을 삐죽거렸다.“하지만 그 사람들 하는 말 진짜 못 들어주겠다니까요.”강하리는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 날 전혀 자극하지 못해.”안예서는 그런 강하리가 안쓰러웠다.“그래도 가만 내버려 둘 순 없죠! 그 송유라 씨도 나쁜 년이에요. 딱 봐도 가여운 척 오지는 약아빠진 년인데, 보기만 해도 눈꼴사나워 죽겠는데 대표님은 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어요.”“입 조심해. 대표님께 또 걸리면 그땐 나도 구할 수 없어.”안예서는 입을 꾹 다물더니 금세 비명을 질렀다.“보스, 아까 열 받으셨어요? 입술이 다 터졌어요.”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방금 구승훈에게 깨물린 듯싶다.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맞아, 열 받았어.”...퇴근 무렵, 강하리는 손연지의 전화를 받았다.두 사람은 디저트 가게에서 만나기로 했다.강하리가 도착했을 때 손연지는 버블티 한 잔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를 보자 손연지는 얼른 레모네이드를 건넸다.강하리가 막막한 표정을 짓자 손연지가 말했다.“이 정도면 좋은 줄 알아. 하도 나니까 레모네이드 주지 안 그러면 그냥 생수였어.”“약은 가져왔어?”강하리가 웃으며 물었다.손연지는 머리를 끄덕이며 약을 꺼냈다.“입덧 방지에 효과가 꽤 좋을 거야. 너 입덧 심해?”강하리는 가방에 약을 챙겨 넣었다.“평상시엔 괜찮은데 뭐 이상한 냄새를 맡으면 헛구역질 나.”“그럼 최대한 약 먹지 마.”“대표님이 또 의심할까 봐 그래.”그날 밤 토했을 때 구승훈은 또 한 번 그녀의 약을 봤다.이 남자는 아무래도 슬슬 의심하기 시작한 듯싶다.다행히 임신 검사결과 보고서가 옆에 있어서 의심이 크게 일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고 언제까지 위병으로 둘러댈 순 없으니 손연지에게 구토 방지 약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손연지는 구승훈만 떠올리면 울화가 치밀었다.“구승훈 씨 첫사랑 진짜 송유라래?”강하리가 고개를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