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라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강하리, 네가 승훈 오빠 옆에 몇 년 있었다고 진짜 오빠 사람이 된 것 같아? 오빠는 이 몇 년 동안 대외적으로 항상 싱글이라고 알렸어. 아무것도 아닌 게 주제 파악도 안 되네!”강하리는 칼로 가슴을 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그녀라고 왜 모를까?다만 송유라 앞에서 약하게 물러서진 않았다.“대표님은 내 사람이 아니지만 네 사람은 더더욱 아니야!”송유라도 가슴이 쿡 찔려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강하리, 우쭐거리지 마. 오빠는 조만간 나랑 함께해. 나 이번에 오빠랑 결혼할 마음으로 다시 온 거야. 넌 언제까지 천하게 내연녀 행세나 할래? 네 엄마도 내연녀나 하더니 너도 이러네. 모녀가 쌍으로 역겹다 역겨워!”강하리는 순간 참지 못하고 송유라의 뺨을 후려쳤다.“강하리!”때리자마자 구승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강하리는 손이 움찔거리고 온몸이 얼어붙어 감히 고개 돌릴 엄두도 안 났다.“지금 뭐 하는 거야?”전례 없이 싸늘한 목소리였다.“뺨 때리잖아요. 안 보여요?”“그러니까 왜 뺨을 때리냐고!”강하리는 한없이 차가운 표정을 한 눈앞의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우리 엄마를 욕하는데 그럼 보고만 있을까요?”“아무 이유 없이 욕할 리 없잖아!”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그거야 송유라한테 물어야겠죠. 입이 너무 근질거려서 우리 엄마를 모욕하고 싶었는지.”구승훈은 차가운 시선으로 송유라를 쳐다봤다.송유라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아니에요 그런 거. 난 그저 강 부장님한테 사과하러 온 것뿐이에요. 저번에 차에서 내리게 한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려 사과하러 왔는데 제 마음을 받아주지도 못할망정 되레 저를 때리네요.”강하리는 송유라가 어떤 인간인지 진작 알고 있었지만 배우 뺨치는 연기에 여전히 소름이 끼쳤다.구승훈은 다시 강하리에게 시선을 옮겼다.강하리는 그를 마주 보며 쏘아붙였다.“대표님 지금 저 안 믿으시는 거예요?”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차갑고 싸늘한 표정이 모든 걸 설명해주었다.이
“공인이면 더더욱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죠, 안 그래요? 명확히 해둬야 아무도 유라 씨 비방 안 해요.”두 여자의 전쟁에서 승패를 가리는 건 이 사건의 진실이 아니었다. 오직 이 남자의 태도에 달렸다.현재 상황으로 봐선 강하리가 처참하게 졌다.그녀도 안다. 이렇게 추궁하는 게 결국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구승훈이 딱 잡아떼고 그녀를 죄인으로 인정하면 팩트가 눈앞에 놓여도 절대 승인하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에게 팩트를 알려주고 싶다.“더 돌려볼 거 없어요. 내가 안 따진다는데 대체 왜 이렇게 집요하게 굴어요 강 부장님?”송유라는 살짝 안달이 났다.강하리는 그녀를 쳐다보며 되물었다.“왜 그럴 필요 없죠? 송유라 씨 속상하게 그러면 안 되죠!”구승훈은 옆에 서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두 여자를 쳐다봤다.“강 부장, 이제 곧 촬영 들어가야 해. 언제까지 여기서 사람들 시간 지체할래?”저울이 기울어도 너무 기울었다.강하리는 순간 투지가 사라졌다.“미안해요.”이 한마디에 그녀는 온몸의 기운이 쫙 빠졌다.말을 마치자마자 강하리는 차갑게 식은 마음을 추스르며 자리를 떠났다.송유라와 신경전을 벌이는 것 같아도 실은 그녀 자신에게 달갑지 않았다. 3년 동안 옆에 함께 있어 줬는데 돌아오는 건 결국 이런 결과란 말인가?구승훈에게 송유라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이 남자가 과연 보고 싶어 하는지, 이 점을 소홀히 했다.어쩌면 그는 송유라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뿐이다.편애란 바로 이처럼 아무 이유도 따지지 않고 옳고 그름을 마음에 새겨두지 않는 거구나.강하리가 떠난 후에야 구승훈의 시선이 송유라를 향했다.송유라는 여전히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오빠, 너무 아파요.”구승훈은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병원 가자.”...시간을 지체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송유라가 얼굴을 다치는 바람에 결국 촬영이 중단됐다.송유라는 서러운 척하며 구승훈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가기 전 그녀는 조수더러 음료수를 사서 스튜디
그녀는 입가에 다다른 말을 꾹 참았다.구승훈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기에 이렇게까지 말한 건 오늘 반드시 그녀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강하리는 더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금방 갈게요.”전담 비서가 웃으며 대답했다.“서두르십시오.”집에 도착했을 때 구승훈은 막 샤워를 마치고 걸어 나왔다.널찍한 샤워 가운으로도 그의 완벽한 몸매를 가릴 순 없었다.구승훈은 소파에 앉아 담뱃불을 지피고 뽀얀 담배 연기 너머로 강하리를 쳐다봤다.잠시 후 그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우리 강 부장이 이렇게 강하게 나올 때도 있었어? 난 오늘 처음 알았네.”강하리는 제자리에 서서 꿈쩍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없었다.오늘 그녀가 스튜디오에서 송유라를 때린 일로 비꼬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안다.“나도 언제까지 괴롭힘을 당할 수만은 없잖아요. 그래서 대표님은 송유라 때문에 나한테 따져 물으려고 이러시는 거예요?”구승훈은 그녀를 쳐다보다가 한참 후 담뱃불을 껐다.“이리 와.”“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구승훈이 움직이지 않자 강하리는 마지못해 앞으로 다가갔다.그는 책상 위의 상자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마음에 드는지 한번 열어봐.”열어보니 안에는 목걸이가 하나 들어있었다.완벽하게 컷팅 된 다이아몬드가 불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났다.강하리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구승훈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선물해본 적이 없다.선물을 준다는 건 마음을 표한다는 뜻이기에 그녀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대표님이 선물을 줄 리가 있을까.돈은 줄 수 있어도 선물은 단 한 번도 안 줬다.전에는 강하리가 종종 그에게 옷, 신발, 넥타이 등을 선물해주었다.그녀는 돈이 없어 명품을 사주진 못했지만 의외로 대표님이 잘 입고 다녔다.다행히 이 남자가 잘생기고 몸매가 훤칠하여 보세 옷을 입어도 귀티가 났다.그래서인지 강하리도 자꾸만 더 옷을 사주고 싶었다.다만 구승훈은 그녀에게 선물을 준 적이 없다.생각나지 않아서? 또 혹은 아예 생각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일단 둘러싸이기만 하면 돌덩어리와 진흙이 그녀 몸에 날아왔고 간간이 도마뱀과 쥐, 그리고 뱀까지 섞여 있었다.한번은 강하리가 참다못해 송유라를 때렸는데 송동혁이 집까지 찾아와 두말없이 벨트로 그녀를 한바탕 두들겨 팼다.그때 강하리는 울면서 송유라의 만행을 다 말했지만 송동혁한테서 돌아온 그 한마디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얘가 널 때려죽여도 참아! 넌 그래야 해.”그리고 지금 똑같은 상황이 또다시 그녀에게 벌어졌다.하지만 구승훈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전보다 더 가슴 아프고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그녀는 쓰디쓴 이 마음을 꾹 참으며 그에게 물었다.“내가 왜 그래야 하죠?”‘왜 내가 송유라를 피해야 해? 왜 나만 피해야 하냐고? 내연녀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안 했는데 왜 나만 피해?’구승훈이 그녀를 쳐다봤다.“왜냐하면 걔는 송유라고 넌 강하리일 뿐이니까.”칼로 심장을 후벼 파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걸까?강하리는 애써 담담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내가 싫다면요?”구승훈의 안색이 확 짙어졌다.“강 부장, 미리 경고할 때 말 잘 들어. 반항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면 너한테 나쁠 것 없어.”강하리는 실소를 터트렸다.얌전하면 어떻고 얌전하지 않으면 또 뭐가 달라질까?어차피 다 똑같은 결과일 텐데.“알았어요. 대표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거죠.”구승훈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차 한 잔 타와.”구승훈은 커피를 안 마시고 차에 대한 요구도 매우 까다롭다.강하리는 한때 이 남자를 위해 일부러 차 끓이는 법을 배웠고 매번 출장 갈 때마다 전문적인 다기 세트도 챙겼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단지 오늘은 썩 달갑지가 않았다.“몸이 불편해서 타기 싫어요.”구승훈은 씩 웃으며 그녀의 마음을 훤히 꿰뚫은 것만 같았다.“강 부장 이젠 점점 더 기어오르네?”강하리가 그를 노려봤다.“대표님 그냥 송유라 씨한테 해달라고 하시죠. 왜요? 걔는 부려먹기 아까워요?”구승훈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강하리는 이미 선을 넘었다는 걸
강하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구승훈과 눈을 마주쳤다.“속이 좀 불편한 것뿐이에요.”그녀는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고 세면대에서 세수했다.구승훈은 묵묵히 그녀를 지켜봤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등 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진 후에야 강하리도 숨을 조금 돌렸다.세안을 마치고 그녀는 약을 챙겨 침실로 들어갔다.손연지가 처방한 정량대로 일일이 먹었고 다 먹고 나니 마침 구승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침대 머리맡에 놓은 그녀의 약통을 보더니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서서히 다가와 약통을 들고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어디서 처방한 약이야?”“병원에서요.”“언제?”강하리는 잠시 침묵한 후 말을 이었다.“한밤중에 병원 실려 간 그날이요.”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너 위병 있는 거 왜 전에는 몰랐지? 딱 한 번 발작했는데 그 정도로 심각해?”강하리가 웃으며 대답했다.“쭉 달고 사는 지병이었어요. 대표님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서 그랬겠죠.”구승훈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신경 쓰는 포인트가 오롯이 그녀와 딴 남자들 사이의 관계였을 뿐이다.그녀의 건강에 관해서는 관심해본 적이 없다.“그래?”그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몸이 불편하면 일찍 자.”“네.”강하리는 잠옷을 챙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샤워하고 나오니 구승훈은 어느덧 방에 없었다.이제 막 머리를 다 말렸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문을 열자 구승훈이 즐겨 먹던 레스토랑 배달원이 문 앞에 서 있었다.“대표님께서 사모님이 아직 저녁을 안 드셨다고 위가 불편하시다면서 친히 야채죽을 주문하셨습니다.”강하리는 음식을 받으며 인사했다.“고마워요.”그녀는 죽을 들고 방 안에 들어갔다.실은 위가 텅 비었지만 식욕이 없었다.그래도 아이를 위해서 야채죽을 먹는 수밖에.다 먹고 침대에 눕자 스르륵 잠들어버렸다.갑작스러운 휴대폰 벨 소리에 눈을 떴고 확인해보니 뜻밖에도 구승재였다.“승재 씨,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늦은
자리에 앉자마자 구승훈이 그녀의 허리를 확 감싸 안고 그녀의 어깨에 턱을 고인 채 술 냄새를 풍기며 물었다.“왜 왔어?”강하리는 허리가 경직됐다.“대표님이 취하신 줄 알고요.”구승훈이 가볍게 웃었다.“언제 내가 취하는 거 봤어?”강하리는 문득 침묵했다.그랬다. 이 남자는 단 한 번도 취한 적이 없다!그토록 자율적이고 경계심 많은 구승훈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될 리가 있을까?전에 그 많은 술자리에 참석하면서도 구승훈은 취한 적이 없다.“미안해요.”강하리는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사과할 거 없어. 난 그냥 궁금했거든. 오늘 밤에 누구 전화든 다 달려 나왔을지 말이야.”강하리는 침묵하다가 대답했다.“대표님과 연관된 일이라면 전부 달려왔을 겁니다.”구승훈이 천천히 말했다.“바보.”그리곤 한쪽 옆으로 기댔다.강하리는 ‘바보’라는 두 글자를 꼼꼼히 되새겨보았는데 아무래도 비난의 뜻에 더 치우치는 듯싶었다.나머지는 뭐... 그녀가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됐나 보지.“강 부장, 함께해요.”강하리가 거절했지만 이 인간들은 그녀를 놓아줄 기세가 아니었다.“강 부장, 괜찮아요! 게임은 게임일 뿐이잖아요.”“그래요. 다들 알고 지낸 지 오래됐는데 함께 게임한 적도 없네요. 강 부장 설마 이렇게까지 우릴 체면 안 주는 건 아니겠죠?”뭇사람들이 한마디씩 주고받았다.강하리는 구승훈을 힐긋 쳐다봤다.구승훈의 눈빛이 한없이 싸늘해졌다.“강 부장, 우리 형 왜 봐요? 얼른 와서 놀아요!”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강하리는 마지못해 눈 딱 감고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이번엔 왕게임이었다.첫판은 운 좋게 안 걸렸지만 이제 막 한숨 돌리려 할 때 사태는 벌어지고 말았다.이번 판에 왕은 구승재였고 그는 음침한 눈빛으로 지령을 내렸다.“3번이랑 4번 30초 동안 키스해.”3번은 강하리였고 4번은 구승훈의 몇몇 친구 중 한 명인 노민우였다.패를 보인 순간 룸 안이 발칵 뒤집혔다.놀리는
룸 안의 뭇사람들은 전부 구승훈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다들 그가 자존심만 내세우는 거라고 여겼지만 강하리는 알고 있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그녀가 키스하든 말든 구승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오직 누가 제 물건을 건드렸을지, 그 하나만 신경 쓸 뿐이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추슬렀다.게임은 계속됐고 이번 판에 강하리는 그리 쉽게 넘어가지 못했다.왕게임에서 노민우와 극도로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던지라 그녀가 선뜻 진실게임을 선택했는데 구승재가 이런 질문을 내던졌다.“강 부장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있다면 좋아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뭇사람들의 시선이 또다시 구승훈에게 쏠렸다.구승훈도 이 질문에 구미가 당겼는지 눈썹을 치켜세웠다.강하리는 한참 침묵한 후에야 대답했다.“있어요.”다들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고 구승훈도 눈을 가늘게 떴다.구승재는 그런 형을 쳐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그럼 좋아한 지는 몇 년이나 됐어요?”몇 년이라...강하리도 기억이 잘 안 났다.17살에 재회했을 때부터 계산해도 대충 10년 좌우이다.“10년이요.”“우와.”룸 안에 탄성이 자자했고 유독 구승재만 가슴이 아찔거렸다.그가 알기로 강하리와 구승훈은 알고 지낸 지 고작 3년밖에 안 되는데 강하리가 좋아한 사람이 10년이나 됐다고 하니 형은 한물간 셈이다!구승재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는 요즘 강하리와 상극인가 보다.저번에 그가 부추긴 것 때문에 강하리가 처음으로 구승훈과 정색했고 오늘도 그 때문에 강하리가 좋아하는 사람이 구승훈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이건 분명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게임일 듯싶다.구승재가 울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다음엔 절대 강 부장과 이런 게임을 하지 말아야지.’한편 옆에 앉아있는 구승훈은 얼굴에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반응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이 질문이 나온 순간부터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좋든 나쁘든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게다가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
대체 그 남자의 정체는 뭘까? 얼마나 잘났길래 강하리가 10년을 좋아한 걸까?10년이라, 그녀는 이제 고작 27살인데 벌써 10년을 좋아했다고?어쩌면 그와 섹스할 때도 머릿속엔 짝사랑한 남자뿐이었을지...구승훈은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10년이면 17살 때부터 좋아한 거야?”강하리는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었다.“네.”“근데 왜 함께 안 있어?”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안 좋아해요.”구승훈이 차가운 미소를 날렸다.“그래. 그러다 어느 날 널 좋아한다면?”강하리도 가볍게 웃었다.“그럴 일은 없어요. 그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구승훈은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우리 강 부장 순정파였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도 여전히 마음 못 접은 거야?”“네,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 그리 쉽게 단념할 수 있던가요.”구승훈의 얼굴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차 세워.”뜬금없는 명령에 강하리는 핸들을 틀어 길옆에 주차했다.“대표님, 왜 그러세요?”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미친 듯이 입술을 탐했다.강하리는 갑작스러운 키스에 본능적으로 밀쳐내려 했고 이 동작은 순식간에 구승훈의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켰다.“왜? 이젠 내가 키스하는 것도 싫어?”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노민우가 키스하자고 할 땐 선뜻 들이댔잖아.”다 지나간 일인데 왜 들추는 거지?!“게임이잖아요? 룰 안 지켜요 그럼?”구승훈이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그렇지. 깜빡했네. 강 부장은 항상 룰에 철두철미한 사람이잖아.”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대표님도 그다지 신경 쓰는 건 아니잖아요?”“맞아. 그렇지만 너는 처신 똑바로 해야 해. 게임은 게임이지만 네 몸을 더럽혀서야 되겠어? 나 그런 거 딱 질색인데, 너무 역겹거든!”강하리는 표정이 얼어붙었다.“걱정 마세요 대표님, 그럴 일 없어요.”구승훈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강 부장이 누굴 좋아하든
말하면서도 강하리는 자신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미소는 몇 초도 유지하지 못한 채 굳어버렸고 그녀는 도망치듯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의 턱을 잡았다.“더 이상 날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남자의 손가락에 얇게 박힌 굳은살이 강하리의 턱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문득 모든 게 갑자기 우스꽝스러워졌다.‘울며불며 이혼하지 않겠다고 소란을 피워야 하나. 그렇게 애원해야만 이 이혼이 없었던 일이 될까.’그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애원하지 않았던가.몇 번이고 이 남자를 위해선 아무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힘든 건 그녀의 마음뿐이었다.“구승훈, 좋게 끝내자. 지금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구승훈의 눈동자가 검게 가라앉고 입꼬리가 움찔하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말했다.“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이혼도 했는데 저녁 한 끼 어때?”강하리는 그의 손가락을 떼어냈다.“됐어, 두 사람 데이트 방해하지 않을게.”강하리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구승훈은 어느새 법원 앞에 나타난 임희주를 발견했다.하지만 구승훈은 상대를 끌어당기며 놓아주지 않았다.“놔!”강하리의 얼굴이 다소 창백했다.어젯밤 임희주와 그런 통화를 나눈 후로 다시는 그런 괴로운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그러자 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임희주를 바라봤다.“임 선생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잘만 찾아오네.”임희주는 주먹을 꽉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승훈 씨, 오늘 드레스 사러 가자면서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강하리를 옆으로 끌어당겼다.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고 강하리도, 구승훈도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강하리의 휴대폰이 울렸다.시선을 내려 휴대폰을 확인하니 화면 위에 ‘선배’ 두 글자가 나타났다.“할 말 없으면 이만 가볼게.”하지만 구승훈이 단숨에 그녀를 붙잡았다. 이대로 놓치면 그녀가 자기 삶에서 영영 사라질까 봐 두려운 듯
구승훈을 도와줄 수 없기에 기꺼이 손을 놓았다.다음 날 12월 25일.강하리가 비행기에서 내려 법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시 30분이었다.날씨가 좋아 햇살이 몸을 비췄을 때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구승훈은 검은색 코트를 입고 법원 앞에 서 있었다.엉망진창인 어제와 다르게 안색도 훨씬 좋아 보였다.“미안, 늦었네.”구승훈은 그녀를 슬쩍 보고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이미 서명한 이혼 합의서를 건넸다.“내가 다시 작성했는데 한번 봐.”전에 작성한 합의서는 두 사람 모두에게 공평한 내용이었지만 이번 합의서에는 구승훈이 공동 재산을 모두 그녀에게 준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가방에서 펜을 꺼내 사인만 했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서명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소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에 시선이 향했다.“어젯밤에 제대로 못 잤어?” 구승훈이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아니.” 강하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답했다.“잘 잤어. 가자.”말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그의 눈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누가 봐도 제대로 못 잤는데 왜 거짓말해?”강하리는 가슴이 꽉 막히며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러게. 부부 사이에 속일 게 뭐가 있다고 당신은 나한테 거짓말하는데?’하지만 결국 입 밖에 꺼내진 않았다.“거짓말이 아니라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의 손을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로비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말끔히 사라진 뒤였다.이혼하려는 사람이 많아 그들의 차례가 됐을 땐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직원은 두 사람의 서류를 살펴본 후 다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네요?”강하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마음이 안 맞아서요.”직원이 중얼거렸다.“요즘 젊은 사람들은 결혼이 장난인
복도 끝에서 강하리의 모습이 빠르게 사라졌다.희미한 조명이 켜진 복도 입구에서 안현우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뜩이다가 의식을 잃었다.‘망할 년이 감히 날 때려?’파티장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고 강하리의 표정은 조금의 이상한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최하영은 그녀와 함께 사람들과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나지막이 말했다.“죽이지는 않았죠?”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상대와 잔을 부딪쳤다.“안현우를 때린 사람들은 내가 괴롭힘을 당하는 걸 지켜볼 수 없어 정의롭게 나선 거예요.”최하영은 문득 기분이 좋아 보였다.“구 대표와 정말 이혼하면 제가 대시해도 될까요?”강하리는 차분하게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대꾸하지 않았다.최하영이 피식 웃었다.“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나 봐요?”강하리는 최하영과 함께 창가로 걸어가 바깥의 불빛을 바라보았다.“내려놓기가 쉽지 않지만 못할 건 없죠. 최 대표님도 오랫동안 재혼하지 않다가 저한테 대시한다고 말하셨잖아요.”최하영은 크게 웃더니 낮은 목소리로 안현우를 위해 파놓은 함정에 관해 이야기했다.“안현우가 정말 그 땅에 속을까요?”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손에 든 와인 잔을 바라보았다.“예전 같으면 망설였을 텐데 오늘 밤이 지나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뛸 거예요. 내가 뭘 하든 막으려 들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넘어와요.”최하영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강하리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우리가 적이 되는 일은 영원히 없었으면 좋겠네요.”...파티가 끝났을 때는 이미 열시가 넘었고 강하리가 경찰서에 가서 진술하고 나왔을 때는 열한 시가 다 되어갔다.연성의 깊은 밤은 B시처럼 화려하고 북적거리진 않아도 강하리는 거리를 거닐면서 무척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결국엔 그녀가 오래도록 살아온 곳이라 어디를 가도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하지만 동시에 모든 곳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결국 그녀는 작은 선술집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한잔씩 술을 넘기면서 강하리는 문득 구승훈의 총각 파티에 갔던 사람들로
강하리가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이를 본 최하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녀에게 당부했다.“그럼 이따가 조심해요.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날 부르고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하영과 함께 파티장으로 들어섰다.두 사람은 입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강하리와 최하영이 함께 등장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두 사람의 모습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애초에 강하리와 구승훈의 열애설이 연성에서 큰 이슈가 됐던 데다,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면서 강하리와 최하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자연히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안현우는 사람들 틈에 서서 두 사람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역시 천박하다니까. 구승훈과 헤어지자마자 최하영에게 들러붙네.”그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강하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였다.강하리도 당연히 안현우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저 조용히 최하영을 따라다니며 사교를 이어갔다.한바탕 대화를 나눈 후 강하리는 다소 술기운이 오른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바깥 복도로 나갔다.안현우는 강하리가 혼자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와인 잔을 비우고 강하리를 따라 나갔다.그런데 그가 막 밖으로 나왔을 때 강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기명 사건은 이제 포기해요. 애초에 우리의 목적은 기명 제약이 아니었고 그건 단지 눈속임이라는 걸 잊지 마요. 성동 지역 땅만이 우리의 진짜 목적이에요.”상대가 무슨 말을 하자 강하리가 피식 웃었다.“삼촌이 곧 그쪽 땅을 개발한다고 알려줬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투자 규모가 크진 않아도 손에 넣으면 반드시 배로 뛸 테니까. 게다가 이미 최 대표님과 얘기 끝났어요. 최씨 가문과 협력하면 손에 넣는 건 시간 문제죠.”안현우의 눈에서 어두운 빛이 번쩍이며 가슴 속에 울화가 치밀었다.‘기명 제약이 사실은 강하리의 연막작전이라니, 젠장!’기명 제약을 손에 넣기 위해 수백억을 들이부었던 안현우는 강하리의 뒷모습을
강하리의 입꼬리가 파들 떨렸다.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웃음이 났다.조금 전 당황했던 자신이 퍽 우스웠다.“이미 결정했다면 그렇게 해.”어차피 그녀는 남자의 결정을 바꿀 수 없으니까.“그러면 오늘 오후 2시에 법원 앞에서 기다릴게.” 구승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강하리는 시선을 바닥으로 보내며 대꾸했다.“오후에 바빠. 내일 오전 10시로 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전화를 먼저 끊었다.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 회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했고 강하리는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휴대폰을 잡은 손이 살짝 떨리더니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나중에 병원 측에서 다시 연락이 왔지만 그쪽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러다 안예서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전했다.“대표님, 혹시 인수 때문에 연성으로 가시는 거예요? 제가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할까요?”그제야 강하리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그녀는 시계를 보고 벌써 열한 시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안예서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아니야. 이번엔 개인적인 일로 가는 거야.”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짐을 챙겨 몇몇 전문가들이 묵고 있는 호텔로 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한 후 함께 연성으로 향했다.노민준의 연구실에 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전문가들은 지체하지 않고 도착하자마자 노민준과 토론을 진행했고, 강하리는 소파에 앉아 무심코 잡지를 넘기며 저쪽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경청했다.휴대폰에 여러 개의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지만 강하리는 슬쩍 보고는 이내 휴대폰을 치워버렸다.굳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임희주가 보낸 것이니 보지 않아도 내용은 뻔했다.기껏해야 그녀를 조롱하면서 과시하는 말들이겠지.강하리는 조용히 번호를 차단했다.“수고했어요.”문득 노민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강하리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그건 제가 할 말이죠. 그동안 그 사람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저는 부담만 줬네요.”노민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서둘러 문제를 해결하고 강하리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가볍게 미간을 누르던 그가 잠시 후 나지막이 말했다.“백화점에 가서 아무 장신구나 하나 사서 임희주에게 보내. 크리스마스에 나랑 같이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하라고 해.”준봉은 얼굴을 찌푸렸다.“하지만 대표님, B시 비즈니스 파티에는 사모님도 무조건 참석할 텐데요.”구승훈의 다리에 얹은 손이 움찔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신경 안 쓸 거야.”지금 그와 임희주가 함께 들락날락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준봉은 문득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하리는 밤새 서재에서 자료를 보다가 날이 밝을 무렵 가정부에게 연정이를 심씨 가문으로 보내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회사로 달려갔다.연말이 다가오면서 회사에도 일이 많아졌다.그런데 회사 입구에 막 도착했을 때 길 건너편 정안 건물에서 서둘러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각자 엎거나 들고 있었는데 심각한 다친 것처럼 보였다.보이는 얼굴마저 푸른 멍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그녀가 다가가기도 전에 구승재가 안에서 황급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그는 재빨리 문 앞에 주차된 마이바흐 차량으로 걸어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구승훈은 천천히 걸었지만 엉망진창인 모습을 감추지는 못했다.그의 몸에 걸친 옷은 어젯밤과 똑같았고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으며 항상 꼼꼼하게 손질하던 머리도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강하리의 숨이 턱 막혔다.분명 새벽까지만 해도 구승훈이 멀쩡했는데 헤어진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사이에 왜 이렇게 된 걸까.강하리의 입술이 움찔하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찰나 구승훈이 갑자기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환한 아침 햇살 속에서 남자는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추운 겨울인데 강하리는 그의 얼굴에 뒤덮인 땀방울이 보였다.마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참는 것 같았다.그녀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지만 구승훈
강하리는 손목을 잡은 손을 바라보다가 다시 침착하게 시선을 들어 구승훈의 두 눈을 마주했다.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어서 기쁜 건지 화난 건지, 슬픈 건지 속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볍게 웃었다.“그게 구 대표님과 무슨 상관이죠?”구승훈은 마음이 답답했다. 그는 언제나 여자의 말 한마디에도 말문이 턱 막혔다.본인이 먼저 손을 놓아버렸으니 물어볼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여전히 강하리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단호하게 결심을 내렸던 만큼 미련이 그득했다.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벨벳 상자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생일 선물로 주려고 얼마 전에 낙찰받은 거야.”강하리의 시선이 상자로 향하며 이렇게 대꾸했다.“필요 없어.”구승훈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강하리는 손목에 전해지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그녀는 다쳐도 상관없다는 듯 그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금 더 세게 몸부림쳤다.“하리야...”“구승훈!”강하리의 눈에는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애초에 그런 결정을 내렸으면 다신 날 찾아오지 마. 힘들게 마음먹고 놓아줬는데 왜 계속 날 찾아오는 거야. 나는 뭐 힘들지 않은 줄 알아? 아니면 난 이런 고통을 겪어도 싸다고 생각하는 거야? 구승훈,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둬!”강하리의 말이 떨어지자 구승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더니 강하리의 손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미안, 일찍 자.”말을 마친 그가 뒤돌아 가버렸고 엘리베이터가 마침 도착했다.문이 열리고 구승훈이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불과 몇십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힌 뒤에야 강하리는 힘이 풀린 듯 벽에 기대었다.그런 말을 뱉고도 마음이 괴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하지만 그것 말고는 뭘 할 수 있겠나.차라리 구승훈이 예전처럼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으면 좋겠다.그러면 무의미한 갈등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까.아무리
게다가 손에 든 보고서에 대해선 더더욱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주해찬의 입꼬리가 얕게 올라갔다.이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사실 이번에도 마침 강하리가 전문가를 찾는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찾아온 건 아니었다.이모를 통해 강하리의 결혼식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들은 그는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아직도 병원에서 강하리가 망설임 없이 구승훈을 택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그녀는 언제나 망설임 없이 그 남자를 향해 달려가지만 모든 것을 내어준 뒤 또다시 깊은 상처를 받았다.이대로 무너진 그녀가 다시는 이겨내지 못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주변에서 말려도 꿋꿋이 돌아왔다.오로지 그녀가 잘 지내는지 보기 위해.하지만... 지금 주해찬은 웃고 있다.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다.훌륭한 후배를 둔 것에 대한 뿌듯함?귀하게 자라야 할 여자가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진 것에 대한 안쓰러움?아니면 그녀에게 더 이상 자신이 필요 없는 것 같아 느껴지는 허탈한 좌절일 수도 있다.강하리는 전문가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뒤 주해찬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가는 동안 주해찬은 그녀에게 유학 시절에 있었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과거나 결혼식에 대해 그가 물어볼 줄 알았는데 주해찬은 일절 말이 없었다.단지 주씨 가문 앞에 차가 멈춰 섰을 때쯤 그가 말했다.“연말에 같은 과 선배가 파티를 연다는데 그때 같이 가자.”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고 주해찬은 그녀가 차를 돌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한참 멀어진 뒤 문득 상대를 불렀다.“하리야.”강하리의 차가 속도를 줄이며 멈췄다.주해찬은 다가가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조심히 가.”강하리는 창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늦은 밤이라 도로가 유난히 조용했지만 도시는 여전히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운전했다.연말이 가까워진 시점이라 거리에는 아직 문을 연 가게들이 많았다.한 여자가 명품 매장에서 남자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있는데 문득 강하리가 차 속도를 늦추었다.결국 그녀는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강하리는 도착한 전문과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가려 했다.그런데 이제 막 그들과 얘기를 끝마칠 무렵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하리야!”강하리의 걸음이 멈칫하며 다가온 상대를 보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선배?”강하리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놀라움이 묻어났다.주해찬을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랜만에 만난 주해찬은 예전의 따뜻하고 쾌활한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그는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전문가분들과 함께 온 거예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로키 선생님께 연락할 때 나도 옆에 있어서 같은 비행기 타고 왔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에게 전문가들의 경력에 대해 소개했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문득 출입구에 다다랐을 때 강하리는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주해찬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그래?”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요.”강하리의 차가 떠난 뒤에야 구승훈은 담배를 끄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노진우가 다소 걱정스러운 마음에 따라가려 했지만 갑자기 그의 걸음이 멈추며 그가 고개를 돌렸다.“왜 날 따라와? 너한테 준 임무가 뭔지 잊었어?”남자의 목소리는 싸늘했다.조금 전 그 장면은 구승훈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노진우도 마음이 불편했다.구승훈은 그들 모녀의 안전을 위해 홀로 여초연과 싸우면서 평생 몸이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짊어지고 있는데, 정작 그녀는 주해찬을 맞이하기 위해 한밤중에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다니.원망스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어쨌든 두 사람은 아직 이혼하지 않았으니까.“대표님 모실게요.”오랫동안 구승훈 곁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노진우는 그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다.그는 말을 마친 뒤 구승훈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고집스럽게 구승훈 옆에 서 있었다.구승훈은 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