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마음이 씁쓸했다.“전 그저 예의상 웃었을 뿐이에요.”구승훈이 코웃음을 쳤다.“강 부장 매너 좋네.”강하리는 더 말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참았던 것을 분출하듯 그녀의 어깨에 키스하면서 가슴까지 내려왔다.몇억 되는 드레스는 한 번밖에 입지 못했는데 구승훈이 잡아당겨 찢어지는 바람에 다시는 못 입게 되었다.“대표님, 오늘 안 하면 안 돼요?”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물었다.“왜? 안현우 때문에 그래? 남겨 두었다가 걔랑 하려고?”강하리는 그제야 자신이 안현우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눈 것 때문에 구승훈이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 알아차렸다.어이없게도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미친 듯한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었다.남자들은 다 이런 걸까. 자신이 놀다 버린 장난감을 절대 다른 사람이 다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살살 하면 안 돼요?”구승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강 부장, 나한테 빌어봐.”차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자신을 향한 이 남자의 뜨거운 욕구를 견뎌내면서 조심스럽게 배를 가렸다.끝나고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집으로 올라갔다. 강하리는 구승훈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바로 욕실로 향했다. 그는 그녀를 씻긴 후 다시 안아서 침대 위에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주었다.강하리는 배가 불편한 것을 느꼈다. 그런데 구승훈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그를 밀어냈다. “대표님, 저 오늘 진짜 피곤해요.”그러나 구승훈은 무릎을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 놓고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막 욕구가 솟구칠 때 그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그는 관계가 진행될 때 방해받는 걸 제일 싫어했다.그는 짜증이 난 채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는데, 예상밖으로 화를 내지도 않고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 그저 갑자기 하던 일에 흥미를 잃었을 뿐이었다.구승훈은 일어나서 가운을 걸치고 핸드폰을 들고 나갔다.강하리는 침대
“자간전증이야.”손연지는 초음파 소견서를 들고 강하리에게 보여주었다.“이 개자식, 안 하면 죽는대?”강하리는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마음을 진정시켰다.손연지는 답답해서 말했다.“아니면 그냥 그 남자한테 말해.”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눈을 떴다. 그녀는 구승훈에게 말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는 조만간 구승훈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설령 말한다고 해도 아이를 지키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포기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구승훈에게 그 잔인한 일을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어떻게 말할지 생각해 볼게.”손연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결정한 거야?”강하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이렇게 끄는 건 해결책이 아니야.” 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빨리 결심하고 끝내. 다 끝나면 그 남자 차버리고 혼자 당당하고 멋지게 살면 돼!”강하리는 슬픔을 삼키고 말했다.“아직 엄마 병원비도 벌어야 하는데 어떻게 멋지게 살아?”손연지가 물었다.“요즘 어머님 상태는 어때? 좀 나아졌어?”강하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여전히 똑같아.”손연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외쳤다.“강하리!”강하리가 뒤를 돌아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찬수가 서 있었는데, 얼굴이 너무 부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양손은 두꺼운 거즈로 감싸고 있었다.“이년아, 네가 사람 시켜서 날 때렸지?”강찬수는 포효하며 강하리에게 달려들었다.강하리는 경멸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라면 당신을 죽이라고 했을 거야!”“이 년이...”“강찬수, 당신 뭐 하는 짓이에요!”손연지는 그 모습을 보고 강하리 앞에 황급히 막아섰다.“움직이면 당장 경비원을 부를 거예요!”강찬수는 차갑게 웃으며 강하리에게 말했다.“너 딱 기다려!”강찬수는 화를 내며 자리를 떴다.손연지는 눈살을 찌푸리고 강하리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야?”강하리가 강찬수가 찾아왔었던
그 의사는 말하다가 갑자기 멈칫했다.“그런데 송유라와 함께 온 남자는 꽤 잘 생겼을 뿐만 아니라 아우라가 너무 강했어요.”“맞아요. 남자 연예인보다 훨씬 더 잘생겼던데, 설마 송유라의 남자친구는 아니겠죠?”“맞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한밤중에 병원에 같이 왔겠어요?”두 의사가 이미 다른 화제로 넘어간 것을 본 손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아무렇지 않을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난 이만 돌아가야겠어.”손연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마음이 불편할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다른 사람들은 강하리와 송유라의 관계를 모르지만 손연지는 알고 있었다.송유라는 강하리의 이복동생이다. 강하리는 언니지만 사실 송유라보다 고작 30분 일찍 태어났다.같은 날 태어난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랐다.강하리의 어머니 정서원은 송동혁이 길가에서 발견하고 데려온 여자이다.송동혁이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엉망인 모습으로 자신의 이름이 정서원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 못 했다.정서원은 젊었을 때 매우 아름다웠고 아무 기억도 없었지만 몸에 두른 액세서리들은 전부 비싼 것들이었다.송동혁은 예쁜 여자를 보고 좋았는지 아니면 정서원의 몸에 있는 액세서리들 때문인지 그녀를 데리고 있기로 결정했다. 심지어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나중에 정서원이 임신을 했는데도 송동혁은 결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정서원이 참지 못하고 묻자 그제야 그는 본모습을 드러냈다.그때서야 모든 사람들은 송동혁이 정서원과만 만난 게 아니라, 제약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우연히도 그 제약 회사 사장의 딸도 임신했고 송동혁은 그녀와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는 정서원과 만난 것이 폭로될까 봐 두려워서 그녀에게 아기를 낙태하도록 강요했다.정서원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몰래 병원에서 도망쳤다.아이를 낳은 후 그녀는 거의 10년 동안 떠돌다가 연성시로 다시 돌아왔다. 강하리는 어머니를
강하리는 그들과 엮이기조차 싫었고, 송하양이라는 이름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그들이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강하리는 평생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3년 전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비가 절실히 필요했던 그녀는 송동혁 앞에서 구걸을 해야 했다.그때 그녀는 송동혁의 차가움을 완전히 알게 되었고, 그 후 그녀는 그의 가족과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다.단지 가끔 TV나 트위터에서 송유라의 이름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송유라는 4년 전 해외에서 데뷔했다.4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예뻤고 국민 첫사랑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으며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탔다.강하리는 집으로 돌아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그 해변으로 돌아왔다. 겨울의 해변은 찬바람이 강했다. 해변가 별장의 창문이 윙윙 거리며 날아갔다.송유라는 팔찌를 잃어버려서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며 가서 팔찌를 되찾아오라고 명령했다.강하리는 그 팔찌를 본 적이 있다. 다이아몬드가 아름답게 박혀 있는 팔찌에는 ‘하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송동혁이 송유라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송유라는 이 팔찌를 끼고 사진을 많이 찍었다.잃어버려서 정말 안타까웠지만, 강하리는 그녀가 그것을 찾도록 도와주지 않았다.어두운 밤, 그런 강풍이 부는 날에 외출하는 것은 죽으려는 것과 같았다.송유라의 포효가 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송동혁은 그녀를 서재로 불러와서 물었다.“네 엄마가 얼마 전에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며?”당시 강하리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아서 잘 몰랐지만, 그의 말에 담긴 위협을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오늘 여기 오라고 하신 이유가 정확히 뭐죠? 내 생일 때문인가요, 아니면 죽이려고 부른 건가요?”송동혁은 즉시 얼굴이 어두워졌다.강하리는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고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해변으로 향했다.강찬수가 하루 종일 술을 마셔대니 집안 살림은 모두 어머니에게 의존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때때로 장진영
그렇다면 구승훈은 어제 첫사랑의 전화를 받고 나간 것일까?강하리는 마음이 찌릿찌릿 아파왔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배를 만졌다. 그녀는 구승훈의 첫사랑이 정말 돌아왔다면, 자신이 떠나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떠나가서 배 속의 아이를 낳아도 되는 것인가?강하리는 자신의 배를 쳐다보았다.안예서는 또 뭐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보스?”강하리는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이제 일하자. 이런 건 그만 얘기하고, 대표님께서 들으시면 혼내실 수 있으니까 조심해.”안예서는 무안해서 혀를 내밀며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강하리도 일하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점심시간이 되자 안예서가 문을 두드렸다.“보스, 대표님께서 부르십니다.”...구승훈의 사무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안에서 새어 나오는 구승훈의 목소리를 들었다.아마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듯했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강하리는 심지어 그에게 이렇게 부드러운 모습이 있는 줄도 몰랐다.그때 전담 비서가 다가왔다.“강 부장님, 대표님께서 강 부장님께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셨습니다.”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피곤하면 좀 쉬어. 여기저기 다니지 말고. 그래, 난 일이 있어서 이만 먼저 끊을게.”구승훈은 전화를 끊은 후 넥타이를 살짝 풀고 강하리 쪽을 힐끗 쳐다봤다.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검은 눈동자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어젯밤에 전화했던데, 무슨 일 있었어?”그를 본 순간, 강하리를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는 구승훈에게 사실을 숨기기로 결심했다.그가 첫사랑과 잘 이어지면, 강하리는 떠나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몸이 좀 불편했어요.”구승훈은 코웃음을 쳤다.“난 또 내가 가서 아쉬워하는 줄 알았네.”강하리는 한참 아무 말도 없다가 입을 열었다.“그
강하리는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은 절대 그녀에게 벗어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 번도 그녀의 감정을 신경 쓴 적이 없었다.이 몇 년 동안 그녀는 저항할 수 없다면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지시한 임무도 그렇고, 그가 준 아픔도 마찬가지였다.“알겠어요.”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점심 식사를 했다,구승훈은 천천히 우아하게 밥을 먹었는데, 그는 원래부터 식사 시간에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극도로 수양을 따지는 사람이었다.한편 강하리는 넋이 나가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오전에 들은 소문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그들이 식사를 마치자 구승훈의 핸드폰이 울렸다.강하리가 힐끔 쳐다보자 스크린에 ‘S’가 떠 있었다.구승훈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또 무슨 일이야? 먹었어... 응, 너도 잘 챙겨 먹어... 알았어, 끊어.”강하리는 이미 누가 전화를 한 건지 짐작이 갔다.그 첫사랑 말고는 아무도 구승훈을 이렇게 부드럽게 변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어젯밤 그렇게 급하게 나가시더니, 첫사랑이 돌아온 거였어요?”강하리는 무심한 듯 한 마디 물었다.구승훈은 옆에서 향초를 켜려고 하다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그건 내 개인적인 일이야. 강 부장이 신경 쓸 게 아니야.”강하리는 몇 초간 침묵했다.“전 그저 제가 잘릴까 봐 걱정돼서요.”구승훈은 향초에 불을 붙이려다가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강 부장, 혹시 다른 데로 가려고 그래?”강하리는 입꼬리를 올렸다.“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요.”구승훈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걱정 마. 강 부장 돈 못 벌게 하지는 않을 거야. 난 아직 여자를 바꿀 생각이 없거든.”강하리는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가슴이 찌릿찌릿 아파오다가 점점 무감각해졌다.그녀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감사합니다, 대표님.”구승훈은 다시 고개를
송유라는 갑자기 당황했다.“내가 언제 쫓아냈어요? 난 그저 자리를 비켜달라고 한 거라고요.”그녀는 억울한 듯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승훈 오빠, 설마 부장 따위로 나한테 화내는 건 아니죠?”송유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이 몇 년 동안 그녀는 해외에서 늘 구승훈이 먼저 자신에게 연락하기를 기다렸었다. 그런데 4년 동안 구승훈이 그녀에게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이 4년 동안 그녀는 몇 번이나 그를 만나러 돌아오려고 했다.하지만 송유라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당시 그녀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으니...구승훈은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하양이란 애칭을 부르기도 하고 필요할 때 제일 먼저 그녀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심지어 그녀를 위해 기꺼이 친한 친구들과 싸우기도 한다.하지만 그런 특별함에도 선이 있었다.그는 절대 그녀를 만지지 않았고 결혼 얘기를 꺼낸 적도 없었으며, 심지어 부모를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원래 송유라는 이 남자를 압박해서 위기감을 주고 당장 그녀와 결혼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그녀가 어떻게 구승훈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는 오직 그녀 본인만 알고 있다.이 결혼을 빨리 성사시키지 않으면 마음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그런데 구승훈이 헤어지자는 말에 바로 동의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홧김에 외국으로 나갔다. 가기 전에 그녀는 구승훈이 직접 와서 빌지 않는 이상,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었다.원래 송유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타협할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4년이 흘러갈 줄은 예상치 못했다.최근에서야 그녀는 구승훈과 강하리의 소문을 듣게 되고 더는 견딜 수가 없어 돌아온 것이었다.그녀는 강하리를 싫어했다. 강하리의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더할 나위 없이 그녀를 싫어했다.강하리는 송유라보다 예쁘고 품위가 있었으며 성적도 좋았다. 집안 환경을 빼고는 모든 것이 그녀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송유라는 강하리를 미친 듯이 싫어했다.만약 구승
송유라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구승훈의 팔짱을 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고 스튜디오 안으로 걸어갔다.그런데 입구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강 부장님.”송유라는 구승훈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꽁꽁 가린 탓에 강하리는 그녀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가 기뻐서 활짝 웃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조금 전에 차에서 내리라고 한 거, 미안했어요.”송유라는 사과한다는 핑계로 차에서 그녀를 쫓아낸 일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 스튜디오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그 말을 들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강하리에게로 향했다.강하리는 회사에서 꽤 오래 일한 직원이었고 제일 처음 회사가 설립되었을 때부터 구승훈의 옆에서 일을 도왔다. 그래서 구승훈은 늘 그녀를 믿고 있었다.비록 사직하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겪었었지만, 결국 떠나지 않고 회사에 남지 않았는가?회사에는 감히 그녀에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송유라만 그렇게 그녀를 대했다.송유라가 내뱉은 말은 사람들의 추측에 확신을 주는 듯했다. 그녀와 구승훈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추측 말이다.하지만 강하리는 송유라가 회사에서 밀던 사모님 이미지를 방해하는 요소였다.그 어느 사모님도 남편 옆에 자신보다 더 예쁘고 일 잘하는 직원이 있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모든 사람들이 굳은 표정으로 강하리를 쳐다보았다.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서로 엉켜 있는 두 사람의 팔을 보더니 다시 시선을 구승훈의 얼굴로 옮겼다. 그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있는 두 여자가 자신을 두고 기싸움을 벌이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강하리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고민했는지 몰랐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전 차에서 내려도 괜찮아요. 단지 상사의 명령을 따른 것뿐이지, 그쪽이랑 전혀 상관없거든요.”순간 송유라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강하리는 분명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게 면박을 주는 것이 틀
강하리의 입꼬리가 파들 떨렸다.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웃음이 났다.조금 전 당황했던 자신이 퍽 우스웠다.“이미 결정했다면 그렇게 해.”어차피 그녀는 남자의 결정을 바꿀 수 없으니까.“그러면 오늘 오후 2시에 법원 앞에서 기다릴게.” 구승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강하리는 시선을 바닥으로 보내며 대꾸했다.“오후에 바빠. 내일 오전 10시로 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전화를 먼저 끊었다.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 회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했고 강하리는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휴대폰을 잡은 손이 살짝 떨리더니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나중에 병원 측에서 다시 연락이 왔지만 그쪽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러다 안예서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전했다.“대표님, 혹시 인수 때문에 연성으로 가시는 거예요? 제가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할까요?”그제야 강하리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그녀는 시계를 보고 벌써 열한 시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안예서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아니야. 이번엔 개인적인 일로 가는 거야.”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짐을 챙겨 몇몇 전문가들이 묵고 있는 호텔로 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한 후 함께 연성으로 향했다.노민준의 연구실에 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전문가들은 지체하지 않고 도착하자마자 노민준과 토론을 진행했고, 강하리는 소파에 앉아 무심코 잡지를 넘기며 저쪽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경청했다.휴대폰에 여러 개의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지만 강하리는 슬쩍 보고는 이내 휴대폰을 치워버렸다.굳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임희주가 보낸 것이니 보지 않아도 내용은 뻔했다.기껏해야 그녀를 조롱하면서 과시하는 말들이겠지.강하리는 조용히 번호를 차단했다.“수고했어요.”문득 노민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강하리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그건 제가 할 말이죠. 그동안 그 사람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저는 부담만 줬네요.”노민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서둘러 문제를 해결하고 강하리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가볍게 미간을 누르던 그가 잠시 후 나지막이 말했다.“백화점에 가서 아무 장신구나 하나 사서 임희주에게 보내. 크리스마스에 나랑 같이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하라고 해.”준봉은 얼굴을 찌푸렸다.“하지만 대표님, B시 비즈니스 파티에는 사모님도 무조건 참석할 텐데요.”구승훈의 다리에 얹은 손이 움찔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신경 안 쓸 거야.”지금 그와 임희주가 함께 들락날락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준봉은 문득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하리는 밤새 서재에서 자료를 보다가 날이 밝을 무렵 가정부에게 연정이를 심씨 가문으로 보내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회사로 달려갔다.연말이 다가오면서 회사에도 일이 많아졌다.그런데 회사 입구에 막 도착했을 때 길 건너편 정안 건물에서 서둘러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각자 엎거나 들고 있었는데 심각한 다친 것처럼 보였다.보이는 얼굴마저 푸른 멍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그녀가 다가가기도 전에 구승재가 안에서 황급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그는 재빨리 문 앞에 주차된 마이바흐 차량으로 걸어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구승훈은 천천히 걸었지만 엉망진창인 모습을 감추지는 못했다.그의 몸에 걸친 옷은 어젯밤과 똑같았고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으며 항상 꼼꼼하게 손질하던 머리도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강하리의 숨이 턱 막혔다.분명 새벽까지만 해도 구승훈이 멀쩡했는데 헤어진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사이에 왜 이렇게 된 걸까.강하리의 입술이 움찔하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찰나 구승훈이 갑자기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환한 아침 햇살 속에서 남자는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추운 겨울인데 강하리는 그의 얼굴에 뒤덮인 땀방울이 보였다.마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참는 것 같았다.그녀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지만 구승훈
강하리는 손목을 잡은 손을 바라보다가 다시 침착하게 시선을 들어 구승훈의 두 눈을 마주했다.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어서 기쁜 건지 화난 건지, 슬픈 건지 속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볍게 웃었다.“그게 구 대표님과 무슨 상관이죠?”구승훈은 마음이 답답했다. 그는 언제나 여자의 말 한마디에도 말문이 턱 막혔다.본인이 먼저 손을 놓아버렸으니 물어볼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여전히 강하리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단호하게 결심을 내렸던 만큼 미련이 그득했다.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벨벳 상자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생일 선물로 주려고 얼마 전에 낙찰받은 거야.”강하리의 시선이 상자로 향하며 이렇게 대꾸했다.“필요 없어.”구승훈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강하리는 손목에 전해지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그녀는 다쳐도 상관없다는 듯 그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금 더 세게 몸부림쳤다.“하리야...”“구승훈!”강하리의 눈에는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애초에 그런 결정을 내렸으면 다신 날 찾아오지 마. 힘들게 마음먹고 놓아줬는데 왜 계속 날 찾아오는 거야. 나는 뭐 힘들지 않은 줄 알아? 아니면 난 이런 고통을 겪어도 싸다고 생각하는 거야? 구승훈,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둬!”강하리의 말이 떨어지자 구승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더니 강하리의 손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미안, 일찍 자.”말을 마친 그가 뒤돌아 가버렸고 엘리베이터가 마침 도착했다.문이 열리고 구승훈이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불과 몇십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힌 뒤에야 강하리는 힘이 풀린 듯 벽에 기대었다.그런 말을 뱉고도 마음이 괴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하지만 그것 말고는 뭘 할 수 있겠나.차라리 구승훈이 예전처럼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으면 좋겠다.그러면 무의미한 갈등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까.아무리
게다가 손에 든 보고서에 대해선 더더욱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주해찬의 입꼬리가 얕게 올라갔다.이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사실 이번에도 마침 강하리가 전문가를 찾는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찾아온 건 아니었다.이모를 통해 강하리의 결혼식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들은 그는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아직도 병원에서 강하리가 망설임 없이 구승훈을 택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그녀는 언제나 망설임 없이 그 남자를 향해 달려가지만 모든 것을 내어준 뒤 또다시 깊은 상처를 받았다.이대로 무너진 그녀가 다시는 이겨내지 못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주변에서 말려도 꿋꿋이 돌아왔다.오로지 그녀가 잘 지내는지 보기 위해.하지만... 지금 주해찬은 웃고 있다.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다.훌륭한 후배를 둔 것에 대한 뿌듯함?귀하게 자라야 할 여자가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진 것에 대한 안쓰러움?아니면 그녀에게 더 이상 자신이 필요 없는 것 같아 느껴지는 허탈한 좌절일 수도 있다.강하리는 전문가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뒤 주해찬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가는 동안 주해찬은 그녀에게 유학 시절에 있었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과거나 결혼식에 대해 그가 물어볼 줄 알았는데 주해찬은 일절 말이 없었다.단지 주씨 가문 앞에 차가 멈춰 섰을 때쯤 그가 말했다.“연말에 같은 과 선배가 파티를 연다는데 그때 같이 가자.”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고 주해찬은 그녀가 차를 돌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한참 멀어진 뒤 문득 상대를 불렀다.“하리야.”강하리의 차가 속도를 줄이며 멈췄다.주해찬은 다가가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조심히 가.”강하리는 창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늦은 밤이라 도로가 유난히 조용했지만 도시는 여전히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운전했다.연말이 가까워진 시점이라 거리에는 아직 문을 연 가게들이 많았다.한 여자가 명품 매장에서 남자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있는데 문득 강하리가 차 속도를 늦추었다.결국 그녀는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강하리는 도착한 전문과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가려 했다.그런데 이제 막 그들과 얘기를 끝마칠 무렵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하리야!”강하리의 걸음이 멈칫하며 다가온 상대를 보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선배?”강하리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놀라움이 묻어났다.주해찬을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랜만에 만난 주해찬은 예전의 따뜻하고 쾌활한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그는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전문가분들과 함께 온 거예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로키 선생님께 연락할 때 나도 옆에 있어서 같은 비행기 타고 왔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에게 전문가들의 경력에 대해 소개했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문득 출입구에 다다랐을 때 강하리는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주해찬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그래?”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요.”강하리의 차가 떠난 뒤에야 구승훈은 담배를 끄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노진우가 다소 걱정스러운 마음에 따라가려 했지만 갑자기 그의 걸음이 멈추며 그가 고개를 돌렸다.“왜 날 따라와? 너한테 준 임무가 뭔지 잊었어?”남자의 목소리는 싸늘했다.조금 전 그 장면은 구승훈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노진우도 마음이 불편했다.구승훈은 그들 모녀의 안전을 위해 홀로 여초연과 싸우면서 평생 몸이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짊어지고 있는데, 정작 그녀는 주해찬을 맞이하기 위해 한밤중에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다니.원망스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어쨌든 두 사람은 아직 이혼하지 않았으니까.“대표님 모실게요.”오랫동안 구승훈 곁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노진우는 그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다.그는 말을 마친 뒤 구승훈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고집스럽게 구승훈 옆에 서 있었다.구승훈은 비웃
임희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칠흑같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런데도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구승훈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녀의 마음속엔 서늘한 감각이 일렁거렸다.‘여초연이 사람을 보내 감시하는 걸까?’구승훈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차 쪽으로 걸어가더니 쓰레기통을 지나칠 때 입고 있던 외투를 망설임 없이 벗어서 던져 넣었다.“신경 많이 쓰셨네요. 굳이 같은 걸로 사 오시고.”임희주는 입술을 벙긋하며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물론 구승훈도 그녀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터라 말을 마친 후 그대로 차를 몰고 떠났다.임희주는 구승훈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무의식적으로 다시 그늘진 곳을 바라보았다.여전히 깜깜한 밤이었지만 그녀는 저쪽에서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그저 단순한 의심이었다.정신과 의사로서 이러한 심리적 작용에 휘둘려선 안 되지만 여초연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았다.원래도 충분히 사람을 보내 그녀를 감시할 만한 사람이라고 의심했는데 이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자신과 구승훈 중에 먼저 백기를 들 사람은 당연히 구승훈이라고 생각했다.그녀가 구승훈 곁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이간질하면 언젠가 강하리가 이혼을 제기할 것이고, 강하리가 이혼을 고집하는 한 구승훈은 불안할 수밖에 없으니까.초조해지면 당연히 한발 물러서 손을 잡으려 할 거다.물론 구승훈이 이혼할 의향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말이다.한배를 타는 것보다 구승훈과 단단히 엮여있는 게 더 좋았다.그런데 강하리가 연성에 다녀온 이후 태도가 180도 바뀔 줄이야.강하리는 그녀가 구승훈 곁에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걸 보면서도 이혼을 제기하지 않았고 임희주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황급히 어두운 쪽을 힐끗 쳐다보다가 차로 뛰어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한 인물이
강하리는 로키의 도움을 받아 몇몇 약물 전문가를 찾았다. 사실 심씨 가문의 인맥으로도 찾을 수 있지만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을 찾기엔 정계 쪽 인물이 제격이었다.우산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강하리는 때마침 걸려 온 로키의 전화를 받았다.“전문가가 2시간 후에 B시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니 마중 나가요.”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강하리는 가정부를 부르고 옷을 챙겨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가로등 밑의 남자는 옆에 있는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밖으로 나온 강하리의 눈에 머리와 온몸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하얗게 물든 남자가 동상처럼 서 있고 옆에 있는 여자가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모습이 들어왔다.강하리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가니 운전기사는 이미 큰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눈길이 미끄러워 그녀는 직접 운전할 생각이 없었다.강하리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저쪽의 두 사람은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강하리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곧장 아파트 앞 큰길로 걸어갔다.“사모님, 늦은 시간에 어디 가세요?”임희주가 갑자기 외쳤다.“급한 일 있어요? 아니면 누구 만나러 가는 건가요?”강하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저쪽을 바라보았다.“임 선생님께선 오지랖도 참 넓으시네요. 내연녀 주제에 무슨 자신감으로 내 앞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죠?”임희주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간 굳어지더니 이내 다시 웃었다.“사모님, 전 두 사람 사이 방해할 생각 없어요. 다만 지금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게 저밖에 없으니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도 정신과 의사니까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챙길게요.”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잘 부탁드릴게요.”말을 마친 그녀가 구승훈을 힐끗 보고는 뒤돌아 떠났다.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노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강 대표 외출했으니까 잘 지켜.]메시지를 보낸 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붉은 불빛이 번뜩이며 구승훈이 마침내 임희주에게 시선을 돌렸고, 그와
데리러 온 구승재에게 보이는 건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홀로 서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는 구승훈이었다.그와 연정이의 생일은 불과 며칠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에 연정이의 생일을 언급함으로써 강하리에게 자신의 생일도 곧 다가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었다.강하리와 연정이가 끝을 알 수 없는 이 문제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그녀는 늘 그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존재였다.피식 웃던 구승훈은 갑자기 가슴 한구석에서 슬픔이 느껴졌다.강하리가 정말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형.”구승재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구승훈은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이렇게 물었다.“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야?”구승재는 잠시 침묵했다.“형,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거야? 솔직히 지금 형은 이기적인 것도 모자라 잔인하기까지 해. 게다가 임희주도 형수님이 지금까지 참은 게 용할 정도야. 우리가 처리할 수는 없는 거야?”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여초연 일을 끝내고 처리해도 늦지 않아.”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임희주가 고분고분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지만 형 나름대로 계획이 있을 테니 그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참, 오늘 B시 비즈니스 협회에서 초대장을 보냈는데 크리스마스에 사업가들 모임이 있대.”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차에 올랐다.강하리는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일어나서 우유 한 잔 마시려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밖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해 그녀는 우유를 손에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인월동 아래에는 인공 호수가 있었는데 연말연시가 다가오는 지금 인공 호수엔 온갖 장식을 둘러 밤에도 반짝이고 있었다.밝은 조명 아래 한 인물이 차 옆에 서 있었다.강하리는 꼭대기 층에 살았기 때문에 아래층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대는 인파 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사람이었다.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을까. 그의 어깨, 머리카락이 온통 흰 눈에 덮여 있었다.강하리는
강하리가 연정이를 데리러 왔을 때 구승훈은 연정이를 데리고 길거리 디저트 가게에서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연정이의 머리에는 작은 사슴 머리핀이 있었는데 살짝 곱슬곱슬한 머리를 구승훈이 두 갈래로 묶어주었다.원래 입었던 옷도 갈아입은 채 작은 케이크를 들고 신나게 베어 물고 있었다.하도 급하게 먹어 콧등에도 크림이 묻었다.강하리가 오자 연정이는 들떠서 방방 뛰었다.“엄마, 엄마.”구승훈은 유리창 너머로 밖에서 그들 부녀를 바라보는 강하리를 보았다.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유난히 짙었고 두 사람의 귀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강하리는 문득 씁쓸함이 밀려왔다.두 사람이 만나는 동안 구승훈도, 그녀도 한 번도 제대로 된 생일을 보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연정이마저 온전한 생일 한번 쇠어준 적이 없었다.구승훈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강하리에게 고정된 시선이 떠나질 않았다.하지만 강하리의 시선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뒤돌아 디저트 가게로 들어갔다.연정이의 코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고 연정이의 손과 얼굴까지 다 닦고 나서 그녀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아빠한테 인사해.”디저트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는 구승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연정이도 이별이라는 걸 알았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짝 웃고 있었지만 어느새 코끝이 붉어지기 시작했다.그래도 꿋꿋이 구승훈을 향해 손을 흔든 아이는 강하리의 품에 안겨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강하리도 연정이의 서글픈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한때는 연정이에게 온전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려고 애썼던 그녀였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녀에게 희망 고문만 남겨둔 채 매정하게 외면했다.강하리는 가슴 속 울분을 억누르고 연정이를 안은 채 뒤돌아 문을 나섰다.구승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강하리.”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췄다.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물었다.“왜?”자리에서 일어난 구승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연정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며칠 후면 연정이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