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손가락을 살짝 구부렸다.“아직도 위가 약간 불편해요.”“약 먹고 술은 적게 마셔. 샴페인은 별로 독하지 않아.”강하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더 말했다가는 오히려 들통날 것이다.사실 구승훈은 그녀에게 술을 강요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이런 면에서 항상 신사다웠다.하지만 오늘 그는 고집스러웠는데, 아직도 그녀가 임신했다고 의심하는지 일부러 떠보는 것 같았다.파티장에 도착하자 강하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구승훈의 팔짱을 낀 채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안현우를 발견했다.안현우는 제 자리에서 그녀를 향해 샴페인 잔을 들어 보였고, 구승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강 부장 매력이 대단한가 보네.”그러자 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구 대표님 안심하세요. 저는 돈에만 관심 있어요.”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말은 누구든지 돈만 주면 강 부장이랑 잘 수 있다는 거네?”강하리는 덤덤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구 대표님께서 더 많은 돈을 내놓으시면 되잖아요. 그럼 전 절대 다른 사람한테 가지 않을 겁니다.”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확 굳어졌고, 강하리는 더 말하지 않았다.구승훈에게 다가와서 샴페인을 권하는 사람은 많았다. 강하리는 예의 있게 그들을 맞이하고 샴페인을 살짝 입술에 대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샴페인을 마시지 않았다.“저 좀 쉬러 가도 될까요?”한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 강하리는 다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구승훈은 그녀를 보내주며 말했다.“가서 뭐 좀 먹어.”“네.”강하리는 접시를 들고 가서 케이크 두 조각을 챙긴 후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어느새 안현우가 그녀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안 대표님.”강하리는 정중하게 인사했다.안현우는 그녀에게 샴페인 잔을 건넸지만 그녀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그런데 이번에 안현우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구 대표랑 잘 지내요?”강하리가 대답했다.“그럭저럭 괜찮아요.”안현우가 웃으
구승훈은 강하리의 옆에 와서 앉고 큰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어? 나도 들어보자.”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안 대표님께서 대표님의 첫사랑이 곧 돌아오신다고 하셨어요.”구승훈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치더니 별다른 대답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그래서 강 부장이 그렇게 즐겁게 웃고 있었던 거야?”강하리는 가슴이 답답했다. 웃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를 붙잡고 울며불며 왜 첫사랑은 사랑하면서 자신은 사랑하지 않냐고 묻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그녀는 눈치 있는 사람이었다.“전 그저 구 대표님께는 좋은 일인 것 같아서 기뻤을 뿐입니다.”구승훈의 안색은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렇다면 강 부장의 관심에 고마워해야겠네.”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안현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구 대표님, 첫사랑분이 돌아오시면 저한테 알려주세요. 제가 강 부장을 데려갈게요. 이건 구 대표님의 사람을 빼앗는 거 아니죠?”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구승훈은 그 말을 듣고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왜요? 두 사람 벌써 협상했어요?”“아니요!”강하리는 바로 부정했다.안현우는 구승훈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강하리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저 조금 전에 이미 안 대표님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그러나 안현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강 부장, 그렇게 빨리 거절하지는 마요. 겪어보지 않으면 뭐가 진짜 자신한테 어울리는 것인지 몰라요.”안현우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강하리의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웠다. 그녀는 안현우가 일부러 자신한테 보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대표님, 저는 진짜 안 대표님한테 마음이 없어요.”구승훈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샴페인 잔을 흔들고 있었다.“강 부장은 돈만 있으면 되잖아. 왜 안 대표는 안 되는 거지?”강하리의 입술을 하얗게 질렸다
강하리는 마음이 씁쓸했다.“전 그저 예의상 웃었을 뿐이에요.”구승훈이 코웃음을 쳤다.“강 부장 매너 좋네.”강하리는 더 말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참았던 것을 분출하듯 그녀의 어깨에 키스하면서 가슴까지 내려왔다.몇억 되는 드레스는 한 번밖에 입지 못했는데 구승훈이 잡아당겨 찢어지는 바람에 다시는 못 입게 되었다.“대표님, 오늘 안 하면 안 돼요?”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물었다.“왜? 안현우 때문에 그래? 남겨 두었다가 걔랑 하려고?”강하리는 그제야 자신이 안현우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눈 것 때문에 구승훈이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 알아차렸다.어이없게도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미친 듯한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었다.남자들은 다 이런 걸까. 자신이 놀다 버린 장난감을 절대 다른 사람이 다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살살 하면 안 돼요?”구승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강 부장, 나한테 빌어봐.”차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자신을 향한 이 남자의 뜨거운 욕구를 견뎌내면서 조심스럽게 배를 가렸다.끝나고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집으로 올라갔다. 강하리는 구승훈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바로 욕실로 향했다. 그는 그녀를 씻긴 후 다시 안아서 침대 위에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주었다.강하리는 배가 불편한 것을 느꼈다. 그런데 구승훈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그를 밀어냈다. “대표님, 저 오늘 진짜 피곤해요.”그러나 구승훈은 무릎을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 놓고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막 욕구가 솟구칠 때 그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그는 관계가 진행될 때 방해받는 걸 제일 싫어했다.그는 짜증이 난 채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는데, 예상밖으로 화를 내지도 않고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 그저 갑자기 하던 일에 흥미를 잃었을 뿐이었다.구승훈은 일어나서 가운을 걸치고 핸드폰을 들고 나갔다.강하리는 침대
“자간전증이야.”손연지는 초음파 소견서를 들고 강하리에게 보여주었다.“이 개자식, 안 하면 죽는대?”강하리는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마음을 진정시켰다.손연지는 답답해서 말했다.“아니면 그냥 그 남자한테 말해.”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눈을 떴다. 그녀는 구승훈에게 말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는 조만간 구승훈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설령 말한다고 해도 아이를 지키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포기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구승훈에게 그 잔인한 일을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어떻게 말할지 생각해 볼게.”손연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결정한 거야?”강하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이렇게 끄는 건 해결책이 아니야.” 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빨리 결심하고 끝내. 다 끝나면 그 남자 차버리고 혼자 당당하고 멋지게 살면 돼!”강하리는 슬픔을 삼키고 말했다.“아직 엄마 병원비도 벌어야 하는데 어떻게 멋지게 살아?”손연지가 물었다.“요즘 어머님 상태는 어때? 좀 나아졌어?”강하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여전히 똑같아.”손연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외쳤다.“강하리!”강하리가 뒤를 돌아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찬수가 서 있었는데, 얼굴이 너무 부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양손은 두꺼운 거즈로 감싸고 있었다.“이년아, 네가 사람 시켜서 날 때렸지?”강찬수는 포효하며 강하리에게 달려들었다.강하리는 경멸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라면 당신을 죽이라고 했을 거야!”“이 년이...”“강찬수, 당신 뭐 하는 짓이에요!”손연지는 그 모습을 보고 강하리 앞에 황급히 막아섰다.“움직이면 당장 경비원을 부를 거예요!”강찬수는 차갑게 웃으며 강하리에게 말했다.“너 딱 기다려!”강찬수는 화를 내며 자리를 떴다.손연지는 눈살을 찌푸리고 강하리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야?”강하리가 강찬수가 찾아왔었던
그 의사는 말하다가 갑자기 멈칫했다.“그런데 송유라와 함께 온 남자는 꽤 잘 생겼을 뿐만 아니라 아우라가 너무 강했어요.”“맞아요. 남자 연예인보다 훨씬 더 잘생겼던데, 설마 송유라의 남자친구는 아니겠죠?”“맞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한밤중에 병원에 같이 왔겠어요?”두 의사가 이미 다른 화제로 넘어간 것을 본 손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아무렇지 않을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난 이만 돌아가야겠어.”손연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마음이 불편할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다른 사람들은 강하리와 송유라의 관계를 모르지만 손연지는 알고 있었다.송유라는 강하리의 이복동생이다. 강하리는 언니지만 사실 송유라보다 고작 30분 일찍 태어났다.같은 날 태어난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랐다.강하리의 어머니 정서원은 송동혁이 길가에서 발견하고 데려온 여자이다.송동혁이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엉망인 모습으로 자신의 이름이 정서원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 못 했다.정서원은 젊었을 때 매우 아름다웠고 아무 기억도 없었지만 몸에 두른 액세서리들은 전부 비싼 것들이었다.송동혁은 예쁜 여자를 보고 좋았는지 아니면 정서원의 몸에 있는 액세서리들 때문인지 그녀를 데리고 있기로 결정했다. 심지어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나중에 정서원이 임신을 했는데도 송동혁은 결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정서원이 참지 못하고 묻자 그제야 그는 본모습을 드러냈다.그때서야 모든 사람들은 송동혁이 정서원과만 만난 게 아니라, 제약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우연히도 그 제약 회사 사장의 딸도 임신했고 송동혁은 그녀와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는 정서원과 만난 것이 폭로될까 봐 두려워서 그녀에게 아기를 낙태하도록 강요했다.정서원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몰래 병원에서 도망쳤다.아이를 낳은 후 그녀는 거의 10년 동안 떠돌다가 연성시로 다시 돌아왔다. 강하리는 어머니를
강하리는 그들과 엮이기조차 싫었고, 송하양이라는 이름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그들이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강하리는 평생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3년 전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비가 절실히 필요했던 그녀는 송동혁 앞에서 구걸을 해야 했다.그때 그녀는 송동혁의 차가움을 완전히 알게 되었고, 그 후 그녀는 그의 가족과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다.단지 가끔 TV나 트위터에서 송유라의 이름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송유라는 4년 전 해외에서 데뷔했다.4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예뻤고 국민 첫사랑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으며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탔다.강하리는 집으로 돌아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그 해변으로 돌아왔다. 겨울의 해변은 찬바람이 강했다. 해변가 별장의 창문이 윙윙 거리며 날아갔다.송유라는 팔찌를 잃어버려서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며 가서 팔찌를 되찾아오라고 명령했다.강하리는 그 팔찌를 본 적이 있다. 다이아몬드가 아름답게 박혀 있는 팔찌에는 ‘하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송동혁이 송유라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송유라는 이 팔찌를 끼고 사진을 많이 찍었다.잃어버려서 정말 안타까웠지만, 강하리는 그녀가 그것을 찾도록 도와주지 않았다.어두운 밤, 그런 강풍이 부는 날에 외출하는 것은 죽으려는 것과 같았다.송유라의 포효가 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송동혁은 그녀를 서재로 불러와서 물었다.“네 엄마가 얼마 전에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며?”당시 강하리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아서 잘 몰랐지만, 그의 말에 담긴 위협을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오늘 여기 오라고 하신 이유가 정확히 뭐죠? 내 생일 때문인가요, 아니면 죽이려고 부른 건가요?”송동혁은 즉시 얼굴이 어두워졌다.강하리는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고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해변으로 향했다.강찬수가 하루 종일 술을 마셔대니 집안 살림은 모두 어머니에게 의존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때때로 장진영
그렇다면 구승훈은 어제 첫사랑의 전화를 받고 나간 것일까?강하리는 마음이 찌릿찌릿 아파왔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배를 만졌다. 그녀는 구승훈의 첫사랑이 정말 돌아왔다면, 자신이 떠나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떠나가서 배 속의 아이를 낳아도 되는 것인가?강하리는 자신의 배를 쳐다보았다.안예서는 또 뭐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보스?”강하리는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이제 일하자. 이런 건 그만 얘기하고, 대표님께서 들으시면 혼내실 수 있으니까 조심해.”안예서는 무안해서 혀를 내밀며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강하리도 일하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점심시간이 되자 안예서가 문을 두드렸다.“보스, 대표님께서 부르십니다.”...구승훈의 사무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안에서 새어 나오는 구승훈의 목소리를 들었다.아마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듯했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강하리는 심지어 그에게 이렇게 부드러운 모습이 있는 줄도 몰랐다.그때 전담 비서가 다가왔다.“강 부장님, 대표님께서 강 부장님께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셨습니다.”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피곤하면 좀 쉬어. 여기저기 다니지 말고. 그래, 난 일이 있어서 이만 먼저 끊을게.”구승훈은 전화를 끊은 후 넥타이를 살짝 풀고 강하리 쪽을 힐끗 쳐다봤다.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검은 눈동자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어젯밤에 전화했던데, 무슨 일 있었어?”그를 본 순간, 강하리를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는 구승훈에게 사실을 숨기기로 결심했다.그가 첫사랑과 잘 이어지면, 강하리는 떠나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몸이 좀 불편했어요.”구승훈은 코웃음을 쳤다.“난 또 내가 가서 아쉬워하는 줄 알았네.”강하리는 한참 아무 말도 없다가 입을 열었다.“그
강하리는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은 절대 그녀에게 벗어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 번도 그녀의 감정을 신경 쓴 적이 없었다.이 몇 년 동안 그녀는 저항할 수 없다면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지시한 임무도 그렇고, 그가 준 아픔도 마찬가지였다.“알겠어요.”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점심 식사를 했다,구승훈은 천천히 우아하게 밥을 먹었는데, 그는 원래부터 식사 시간에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극도로 수양을 따지는 사람이었다.한편 강하리는 넋이 나가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오전에 들은 소문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그들이 식사를 마치자 구승훈의 핸드폰이 울렸다.강하리가 힐끔 쳐다보자 스크린에 ‘S’가 떠 있었다.구승훈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또 무슨 일이야? 먹었어... 응, 너도 잘 챙겨 먹어... 알았어, 끊어.”강하리는 이미 누가 전화를 한 건지 짐작이 갔다.그 첫사랑 말고는 아무도 구승훈을 이렇게 부드럽게 변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어젯밤 그렇게 급하게 나가시더니, 첫사랑이 돌아온 거였어요?”강하리는 무심한 듯 한 마디 물었다.구승훈은 옆에서 향초를 켜려고 하다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그건 내 개인적인 일이야. 강 부장이 신경 쓸 게 아니야.”강하리는 몇 초간 침묵했다.“전 그저 제가 잘릴까 봐 걱정돼서요.”구승훈은 향초에 불을 붙이려다가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강 부장, 혹시 다른 데로 가려고 그래?”강하리는 입꼬리를 올렸다.“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요.”구승훈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걱정 마. 강 부장 돈 못 벌게 하지는 않을 거야. 난 아직 여자를 바꿀 생각이 없거든.”강하리는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가슴이 찌릿찌릿 아파오다가 점점 무감각해졌다.그녀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감사합니다, 대표님.”구승훈은 다시 고개를
강하리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커피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최근 증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치료를 받고 있나요?”임희주는 그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사실 지금은 증상이 뚜렷하지 않은데 유난히 조급하세요. 빨리 낫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사모님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아세요?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일상에서 누가 부담을 주고 있나요?”강하리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더니 커피잔을 잡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도 서서히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한참 동안 임희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지금 증상이 어떤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세요.”임희주는 잠시 침묵했다.“죄송하지만 대표님께서 말하지 않으셨다면 저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제가 아내인 데도요?”“죄송해요.”강하리가 웃었다.“임 선생님, 만약 구승훈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야 할 사람이 나란 건 알고 있죠?”임희주의 입꼬리가 움찔했지만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죄송해요.”강하리는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부담감을 느끼는 부분에 대해선 제가 나중에 물어볼게요.”임희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강하리가 떠난 뒤에야 임희주는 시선을 돌려 한숨을 내쉬며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사모님 상대하기 너무 힘드네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 아내를 만났습니까?”“네, 우연히 만났어요.”임희주가 커피를 살며시 저었다.“미안해요. 아직 대표님 상황에 대해 모르는 줄 모르고 서두르지 않게 설득해 달라던 참이었는데.”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속도 늦출 필요 없다고 했는데 제 말 못 알아들으세요?”“다른 뜻이 아니라 그냥...”“할 말 있으면 나한테 직접 얘기하고 다시는 내 아내한테 찾아가지 마세요.”구승훈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임희주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구승훈
노민우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났고 손연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아쉬워?”강하리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뒤에서 묻자 돌아보는 손연지의 눈에 머금은 눈물이 보였다.강하리는 깜짝 놀라 황급히 손연지를 토닥였다.“그렇게 아쉬우면 돌아오라고 해. 울긴 왜 울어?”하지만 손연지는 웃으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돌아오라고 하겠어. 하리야, 지금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그럼 넌?”강하리는 손연지의 다소 부은 눈을 바라보니 어젯밤에 운 게 분명했다.“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야지. 돈, 돈, 돈을 벌 거야. 난 돈 많은 사람이 될 거야!”손연지는 말을 마친 후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참, 나 몸조리 끝나면 이사 갈 거야. 계속 너희 집에서 애정행각이나 보면서 신세 질 수는 없어.”그녀가 구승훈을 흘끗 쳐다보며 말하자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손 선생님은 신세 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네요?”손연지는 그를 흘겨보며 강하리를 안았다.“아니면 하리야, 나랑 같이 나가서 살래?”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손 선생님은 B시에서도 쫓겨나고 싶은 건 아니죠?”손연지는 강하리에게 기대었다.“자기야, 나 B시에서 쫓아낼 거야?”강하리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얼른 출근이나 해.”구승훈은 다가와 손연지의 품에서 그녀를 떼어냈다.“일단 약부터 바르자.”강하리의 어깨는 사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물집이 더 커진 상태였다.구승훈은 이틀 정도 쉬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오늘 외교부 회의가 있어 출근해야 했다.약을 바르고 나니 손연지도 준비를 마친 뒤라 강하리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자리를 잡게 도와준 뒤 이렇게 덧붙였다.“연지야, 난 그래도 네가 나와 함께 좀 더 지냈으면 좋겠어.”노민우는 약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갔지만 이미 약혼한 이상 그렇게 쉽게 파혼할 리 만무했다.그 과정에서 분명 손연지도 끌어들일 텐
손연지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던 샴푸를 집어 들어 그에게 던졌다.“나가!”노민우는 샴푸를 피하며 순식간에 옷을 벗었다.“씻으면서 얘기하자.”“얘기하긴 뭘... 읍...”손연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민우가 그녀의 입을 막았고 몇 번이나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욕실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닿은 두 몸이 곧바로 욕망에 달아올랐다.노민우는 손연지의 입술을 깨물었다.“이젠 해도 돼?”손연지가 다리를 들어 가격하자 노민우는 중요 부위를 가린 채 뒤로 물러섰다.익숙한 행동에 괜히 안쓰러웠지만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난 손연지를 능글맞게 바라봤다.“농담이야. 아직 몸이 성치 않은데 못한다는 거 알아.”손연지가 타월을 꺼내 몸을 감싸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가자 노민우도 서둘러 수건을 집어 들고 뒤를 따랐다.“안 해도 되니까 오늘 밤에 같이 자면 안 돼? 손연지, 앞으로 1년 동안 못 볼 수도 있잖아.”머리를 말리던 손연지의 손이 멈칫하며 이렇게 말했다.“바닥에서 자.”“네.”노민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아래층에서 강하리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손연지가 놀라며 옷을 입고 내려가려고 하자 노민우가 말렸다.“가지 마. 승훈이가 있잖아.”손연지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내려가지 않았다.다행히도 구승훈이 강하리를 품에 안고 올라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엿들은 뒤 노민우는 절뚝거리며 바닥으로 돌아갔다.손연지가 침대 옆에 기댄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있자 노민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바보가 됐네?”정신을 차린 손연지가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들자 노민우는 손연지의 발목을 잡았다.“마지막 밤인데 나 좀 그만 찰 수는 없어?”손연지는 그의 손에서 발을 빼고 싶었지만 노민우는 놓지 않았다.“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거 놓으면 또 발길질할 거잖아.”손연지는 이를 갈며 베개를 집어 들어 노민우의 얼굴에 내리쳤다.“나가서 자!”노민우는 베개를 껴안은 채 바닥에
노민우는 식사를 마치고 손연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손연지가 그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노민우의 휴대폰이 울렸다.그의 모친이었다.노민우는 무의식적으로 손연지를 바라봤지만 손연지는 이미 시선을 거둔 뒤였다.그녀는 옷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가기 전 한 마디만 남겼다.“난 쉴 거니까 넌 가.”노민우는 혀를 차고는 어머니의 전화를 끊은 뒤 손연지를 끌어당겼다.“손연지, 우리 제대로 얘기 좀 하면 안 돼?”손연지가 눈을 흘겼다.“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얘기하다 내 기분 망치면 넌 끝장이야!”노민우가 손연지에게 다가왔다.“화내지 마.”손연지는 노민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누구는 화내고 싶어서 내는 줄 알아?’“할 말 있으면 빨리 해.”노민우는 잠시 머뭇거렸다.“손연지, 나 기다려줄 수 있어? 1년만 기다리면 내가 가서 집에서 정해준 약혼 해결할 테니까 우선 파혼하고 우리 둘이 어떤 관계로 지낼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응?”옷을 든 손연지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고개를 돌려 노민우를 바라봤다.“어떻게 할 건데?”노민우는 사실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어머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약혼했고 만약 그가 고집을 부리면 어머니에게 죽을 때까지 매를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결혼은 언젠가 취소해야 하는 것이었다.“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 여차하면 승훈이처럼 인연 끊으면 되지.”손연지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진심이야?”“당연히 진심이지.”“그래.”노민우는 손연지가 이렇게 빨리 동의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손연지에게 1년 더 기다리라고 하면 그를 한대 쥐어패기라도 할 줄 알았다.“정말 동의하는 거야?”손연지는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그럼 다시 생각해 볼게.”노민우는 갑자기 얼굴에 미소를 띠며 그녀를 껴안았다.“아니야, 생각하지 마. 내가 헛소리 한 거라고 생각해.”노민우는 말을 마치고 손연지를 안은 채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이 틈에 손연지와 가까워지려
입안의 술맛이 남자의 입속으로 전부 빨려 들어갔을 때쯤 구승훈이 그녀를 놓아주었다.“화 풀어, 응? 아니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까?”강하리는 웃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해봐.”구승훈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낮게 웃었다.“무릎을 꿇다 다리가 아프면 밤에 너 챙겨주지 못하잖아.”강하리는 웃으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고는 그를 밀어낸 뒤 식탁에 앉아 다시 한 잔을 따랐다.식당에는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고 강하리의 실크 가운은 구승훈의 손길에 미끄러져 내려가 불빛에 붉어진 그녀의 어깨가 선명하게 보였다.구승훈은 순간 멈칫하며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어쩌다 이런 거야?”강하리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맞춰봐.”구승훈이 가운을 잡아당겨 어깨 전체가 드러나도록 했다.붉게 물든 어깨에는 물집까지 생겼다.“대체 무슨 일이야? 아파? 왜 나한테 말...”말하던 구승훈은 이내 알아차리고 다소 무기력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그렇게 화났어? 다친 걸 얘기하지도 않을 만큼? 난 그냥 네가 걱정하는 게 싫었어.”강하리는 어지러워 손가락으로 구승훈의 얼굴을 훑다가 한참 후 욕설을 뱉었다.“개자식, 그러면 내가 걱정하지 않을 줄 알았어? 그동안 내가 계속 걱정하고 있었던 거 알아? 구승훈, 대체 언제쯤 홀로 모든 걸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건데? 이 나쁜 놈! 망할 놈!”강하리의 욕설이 커졌고 구승훈은 그녀를 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큰 별장에는 그렇게 적막이 감돌고 구승훈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하지만 강하리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히 분명했다.그런 추하고 더러운 가족을 강하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애써 감정을 조절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미안해, 자기야. 한 번만 더 용서해 줘, 응?”구승훈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안쓰러워 사실 더 화를
노민우는 멈칫하며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손연지에게 약속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을 거다.손연지가 발을 들어 그의 낭심을 걷어찼다.“꺼져, 고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마.”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화를 내며 계단을 쿵쾅쿵쾅 올라갔다.강하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보니 어깨의 피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뒤돌아 실크 가운을 집어 들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가는데 손연지는 그녀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일이야? 구승훈이랑 싸웠어?”“아니.” 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동료랑 갈등이 있었어.”손연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무언가 물어보려던 찰나 강하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일이면 몸조리도 끝나지? 내가 일자리 마련해 놨으니까 바로 출근하면 돼.”손연지는 깜짝 놀랐다.“그렇게 빨리?” 강하리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왜, 노민우랑 집에서 며칠 더 놀고 싶어?”손연지의 표정이 어색하게 바뀌었다.“내가 그 자식이랑 놀기는. 그러는 넌 얼른 쫓아내기나 해. 짜증 나 죽겠어.”강하리가 혀를 찼다.“내가 볼 땐 네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데?”“어딜 봐서 내 기분이 좋다는 거야? 난 그냥, 그냥...”“알아, 다 알아.”강하리가 웃으며 대꾸한 뒤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노민우는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가족들을 이기기 힘들 거야. 손연지, 저 사람이 파혼만 하면 너도 시도해 볼 수 있어. 물론 이건 그냥 내 단순한 조언이고 난 네가 나와 같은 길을 걷는 걸 원하지 않아. 하지만 네 선택을 응원해.”손연지는 입술을 달싹이며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알아.”하지만 문제는 노민우가 그녀를 좋아할까?조금 전 아래층에서 노민우가 보이던 반응을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강하리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손연지는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고 방문이 닫히자 강하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
하지만 강하리는 한 번도 상대하지 않았다.애초에 민감한 신분이고 만약 반격하면 진태형에게 성가신 일이 생길 테니까.그래서 오늘도 강하리가 예전처럼 행동할 거라 생각했는데 감히 그녀에게 물을 붓다니.여명희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감히 나한테 물을 뿌려요?”강하리가 비웃었다.“못 할 것 있나요? 아니면 나는 그쪽이 물을 뿌려도 반격도 못 한 채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요?”여명희는 너무 화가 나서 원래 하얗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아, 그러면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원래도 구승훈의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데 어깨가 너무 아프고 자료도 다 젖어 여기서 시간 낭비할 기분이 아니었다.그런데 두 발짝도 떼기 전에 여명희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붙잡았다.“강하리 씨,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혀요? 진 장관님 딸이라고 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여명희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괴롭히는 건지 아닌지 그쪽이 더 잘 알지 않나요? 여명희 씨, 아무리 진시연을 도와준다고 하지만 날 만만하게 보지는 마요.”그렇게 말한 후 강하리는 여명희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가버렸고 여명희가 계속해서 그녀를 붙잡으려는데 누군가 말렸다.“명희 씨, 그만해요. 괜히 건드리지 마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통역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가끔은 진태형과 부녀 사이인 것을 인정한 게 잘못된 것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그게 아니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겠나.강하리는 홀로 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이제 막 차가 멈춰 서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진태형이었다.강하리는 심호흡하고 전화를 받았다.“아빠.”“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아빠한테 얘기 안 해?”강하리는 문득 참아왔던 서글픔이 속절없이 치밀어 올랐다.분명 그녀의 친아빠인데 왜 사람들은 진시연에
해가 서산에서 지는 가운데 외교부 앞에서 한 명은 고개를 숙인 채 웃고, 한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연인 같았다.강하리는 주해찬이 떠난 후 외교부로 들어갔고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그녀와 주해찬의 영상이 온라인에 퍼진 후 강하리는 온갖 이상한 소문이 쏟아질 것을 알고 있었다.나중에 해명했어도 꼭 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었고, 게다가 외교부에서 주해찬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떠들어대니 그게 사실처럼 여겨졌다.강하리는 이상한 시선을 마주한 채 통역실로 들어섰고 들어서자마자 한 여자의 차가운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통역실 안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강하리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못 본 척 조용히 책상으로 걸어갔다.“주해찬도 참 눈이 멀었지. 고작 여자 때문에 앞날을 포기하다니.”“저렇게 예쁜 걸 어떡해? 부러워도 소용없어.”“예쁜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여기저기 엮이는 사람은 처음 봐. 인터넷에 올라온 해명이 거짓말인지 누가 알아? 시연 씨도 재수가 없지. 저 여자가 결백을 증명하는 도구로 됐잖아.”“어휴, 진 장관 딸이잖아. 그만해. 이따가 징계받을 수도 있어.”“그래, 진 장관님은 이제 시연 씨도 버렸는데. 보통 고단수가 아니야.”수군거리는 말이라기엔 너무 거침없이 내뱉었다.사실 그들은 강하리와 나쁘지 않게 지낸 사람들이지만 아무래도 진 장관의 딸은 진시연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혀 있었고 그녀는 갑자기 튀어나 진시연의 아버지를 빼앗은 사람이 되었다.게다가 그녀가 낙하산으로 통역실 주임을 맡았을 때도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 다시 외교부로 돌아오니 그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강하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귀를 닫았다.어쨌든 여긴 외교부고 진태형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반대로 그럴수록 성가신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이제 막 번역본을 펼쳤을 때 갑자기
노민준은 잠시 침묵했다.“많이 신경 써줘요. 사실... 힘들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누구라도 친엄마한테 그런 일을 당하면 괴로울 거예요. 강하리 씨는 지금 승훈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강하리 씨만 무사하면 승훈이도 괜찮을 거예요.”휴대폰을 든 강하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한참 후 그녀가 답했다.“알겠어요.”전화를 끊고 나서야 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뒤돌아 정안 건물을 바라보았다.구승훈에게 화가 나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조금 전 노민준의 말을 듣고 난 뒤 독하게 마음을 먹지 못했다.그래, 누구라도 친엄마에게 그런 식으로 당하면 괴로울 거다.구승훈에게서 보이는 쓸쓸함이 그의 모친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구승훈은 어린 시절 어떤 일을 겪었을까?왜... 그의 어머니는 그를 그렇게 미워하는 걸까.처음엔 연정이를 납치하고 그다음엔 구승훈에게 약을 주사했다.그렇게 그가 잘 지내는 게 싫었던 걸까.강하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다가 휴대폰을 들고 드디어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녁에 갈비찜 먹고 싶어.]구승훈의 마음속 무거웠던 돌덩이가 마침내 안착했다.[맡겨만 줘. 강 대표님, 아직도 화났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응.]문자를 보낸 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물건을 챙겨 외교부로 향했다.내일 외교부 회의가 있어 미리 가서 준비해야 하는데 그곳에서 주해찬을 만날 줄은 몰랐다.주해찬은 마치 추모하듯, 경의를 표하듯 외교부 입구에 홀로 서 있었고 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가갔다.발소리가 들리자 문득 몸을 돌린 주해찬은 강하리를 본 순간 마치 자신이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음의 어둠 속으로 깊게 가라앉아 더 이상 소생의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래도 주해찬의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보경대학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따스하고 맑고 깨끗한 눈빛이었다.“안녕, 난 주해찬이라고 해. 네 직속 선배니까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