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동안 지속된 배서준과의 혼인 관계는 남설아가 몸과 마음의 모든 존엄을 갈아먹으면서 이어온 악연이었다. 남설아는 사랑이 없는 이 관계에 적어도 정은 남아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버텨오던 어느 날이었다. 두 사람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던 아이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 그 사람이 자신의 첫사랑을 위해 거액의 돈을 썼다는 기사가 연예 뉴스 헤드라인에 실렸다. 두 비보가 눈앞에 놓인 순간부터 남설아는 배서준의 사모님 노릇을 때려치우기로 했다. 쓰레기 같은 그 남자는 모든 매체를 매수하여 눈이 쌓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붉어진 눈으로 첫사랑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다. 그 순간, 남설아는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남자의 등장을 모두에게 알리는 순간이었다.
Узнайте больше예전 같았으면 배서준이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하면 남설아는 며칠이고 기분이 좋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남설아는 이런 다정함이 그저 역겹기만 했다.가볍게 웃은 남설아는 조용히 손을 뻗어 배서준의 목을 감쌌다.배서준은 그 동작이 자신에게 순순히 응한 것이라 착각해 흐뭇하게 웃었다. 눈빛에도 여유와 자만이 가득했다.“남설아, 넌 역시 똑똑하네. 적당할 때 멈출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지.”그 순간 남설아는 그의 목을 세차게 물어버렸다. 거의 온몸의 힘을 다 실은 듯 입 안 가득 쇠 맛이 번졌다.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 배서준은 남설아를 거칠게 밀쳐냈다.그런데 남설아의 등 뒤는 기술팀 출입문이었고 그 충격에 유리문이 산산이 부서지며 남설아는 그 조각들 위로 쓰러졌다. 등이 유리에 찔려 피가 흘러내렸다.“남 팀장님!”한원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피 웅덩이에 쓰러진 남설아에게 달려왔다.“괜찮으세요? 대표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기술팀 직원들도 놀라 달려왔고 이내 누군가가 급히 구급차를 불렀다.남설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을 때 등에선 피가 멈추지 않았고 옷은 이미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배서준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조롱이 담겨 있었고 얼굴엔 싸늘한 웃음이 있었다.남설아가 실려 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배서준은 무의식적으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은 어둡게 굳어 있었다.마음속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꿈틀거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서준아, 목이 왜 그래? 피나잖아!”“어디 좀 봐!”서유라는 남설아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 대신 배서준의 목에서 피가 나는 걸 보고는 다급히 달려왔다.“설아 씨가 너무 심했어!”“서준아, 우리도 병원 가자!”서유라는 배서준의 팔을 잡고 병원으로 가자며 서둘렀다.두 사람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배서준은 처음으로 뭔가 몹시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예전엔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그런 관계가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요즘 들어 무언가가
남설아는 눈앞에서 분노로 가득 찬 배서준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처음 기술팀으로 보내겠다고 한 건 당신이었어요. 근데 지금 와서 여기서 이 난리에요? 안 창피해요? 우리 문제를 회사에서 해결하겠다는 거예요?”“남 팀장, 밖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서준이 앞에서 이렇게 떳떳하게 굴 수 있어?”서유라는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마치 타이르듯이 덧붙였다.“사실 서준이는 그렇게 따지는 사람 아니야. 그냥 사과 한마디면... 용서해줄 수 있어, 그치? 서준아?”남설아는 도무지 이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앞에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에 차가운 눈빛으로 서유라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여기서 제일 입 다물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쪽이야.”“너...!”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남설아를 노려봤다.남편 앞에서, 그것도 정면에서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이 더 통하지 않겠다 판단한 서유라는 곧바로 배서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그럼 두 사람 얘기해. 난 나갈게. 서준아, 너무 흥분하지 마. 남 팀장도 그냥 기분 좀 상해서 그러는 거니까 천천히 얘기해.”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마치 모든 걸 이해하고 감싸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남설아를 보고 조용히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이런 연극을 남설아는 지난 몇 년간 수도 없이 봐왔다.처음에는 억울하고 속이 뒤집혔지만 지금은 그냥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처음엔 괴로웠으나 이제는 우스웠다.“남설아, 이쯤 됐으면 그만해도 되지 않겠어? 언제까지 이딴 식으로 굴 건데?”“혹시 네가 이러면 내가 너한테 관심이나 줄 거라고 생각해? 사랑이라도 하게 될 것 같아?”배서준은 팔짱을 낀 채 위압적인 자세로 남설아를 내려다봤다.그의 눈엔 여전히 과거 자신에게 집착하던 그 못난 여자가 보일 뿐이었다.그저 눈치 빠르고 집요한 여자, 그런데 지금은 거기에 독기까지 더해졌다고 생각했다.그 말에 남설아는 참지 못하고 결국 ‘하하하’ 하고 세 번이나 웃어버렸다.너무
“지금 뭐 하는 거예요?”남설아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이를 꽉 물고 배서준을 날카롭게 노려봤다.“남설아, 넌 아직도 배씨 가문 사모님이야. 그런데 밖에서 저렇게 질질 웃으며 남자들한테 들러붙어? 창피한 줄은 알아야지!”배서준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그가 이렇게까지 격하게 분노하는 모습을 본 한원준은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대표님, 그런 게 아닙니다. 저희가 남 팀장님께 드리려고 깜짝 이벤트 준비한 거였어요. 남 팀장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어요.”“닥쳐.”배서준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한원준을 노려봤다.그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고 사나웠다.그 기세에 눌린 한원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남설아를 염려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남설아는 그의 손을 확 뿌리치고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이건 그냥 회사 동료들하고의 정상적인 인사일 뿐이야. 당신 말처럼 들러붙는다느니 뻔뻔하다느니, 그런 말 나올 일이 아니라고요.”여기는 회사였다.남설아는 이곳에서 더 이상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창피한 꼴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하지만 오늘 배서준은 완전히 이성을 놓은 사람처럼 체면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았다.“남설아, 넌 역시 수를 잘 쓴다니까. 봐, 기술팀 전체가 네 발밑에 꿇고 있잖아. 인정할 수밖에 없지, 대단하긴 해.”“서준 씨, 정신에 문제 있으면 병원 가요. 혹시 돈 없어서 못 가는 거예요?”남설아는 고개를 돌리고는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그때 서유라가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난처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남 팀장, 이제 그만하지. 서준이 이미 다 알아. 남 팀장이랑 강 대표님 사이 일, 더는 숨길 수 없어.”‘강 대표님? 연찬 선배?’그 말을 들은 남설아는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나랑 연찬 선배는 서로 깨끗해. 당신들이랑은 다르다고. 두 사람은 이미
천주 쪽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고 남설아는 아직 처리해야 할 다른 일들이 많았다.배서준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남설아는 신경 쓰지 않았고 바로 항공권을 예매해 돌아갈 준비를 했다.한편, 배서준은 몇 장의 사진을 전달받았다.사진 속에는 남설아와 강연찬이 함께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 그리고 남설아가 강연찬을 배웅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손에 들린 사진을 꽉 움켜쥔 채 배서준은 이를 악물었다.지금껏 남설아를 마음에 둔 적도, 눈에 넣은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지금 법적으로 배씨 가문 사모님이었다. 이런 행동은 명백히 부적절했다.게다가 이건 그를 정면으로 모욕하는 짓이었다.“서준아, 왜 그래?”서유라는 그런 배서준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와 그의 소매를 살며시 당겼다.“이제 우리도 짐 싸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우연히 배서준 손에 들린 사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이, 이게 뭐야? 이건... 남 팀장이랑 강 대표님? 왜 저 사람들이 같이 호텔에 간 거야?”“닥쳐.”배서준은 사진을 전부 걷어 들이더니 차가운 시선으로 서유라를 노려봤다.배서준에게 있어 이 일은 말 그대로 치욕이었다.절대 누구에게도 알려선 안 되는 일이었고 그 대상이 서유라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서유라는 놀란 얼굴로 배서준을 바라보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연신 사과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그녀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배서준은 얼른 그녀의 두 손을 붙잡았다.“됐어, 됐어. 너한테 뭐라 한 거 아니야. 잘못한 거 없어. 넌 아무 잘못 없어, 알았지?”“서준아... 나 뭐든 다 할게. 제발... 날 버리지 마. 부탁이야.”서유라는 울먹이며 배서준의 팔에 매달렸고 이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배서준이 가장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이렇게 절대 자신을 떠나지 않겠다
호텔에 돌아온 후, 강연찬은 망설임 없이 곧장 남설아의 방으로 들어왔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남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아까 그 사람 누구야?”“송우민이야.”“오늘 나 그 사람한테 납치당했어. 그러다 협력하게 된 거고 그게 다야.”남설아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실을 말하는 남설아의 모습에 강연찬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송우민은 정말 위험한 인물이야. 될 수 있으면 멀리해야 해.”“그건 당연히 나도 알아. 근데 지금은 멀어지려 해도 이미 늦은 것 같아. 그 사람은 절대 날 놓아주지 않을 거야.”“선배가 나 위해서 애쓰고 있다는 거 알아. 우리 목표도 같다는 것도 알아. 근데 우리는 가는 길이 달라.”남설아는 예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타이밍을 놓쳐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연찬의 맞은편에 서서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선배, 미안해. 앞으로 우린 함께 갈 수 없을 것 같아.”그 말에 강연찬은 심장이 쿡쿡 쑤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 내 잘못인 거 알아. 그때 내가 다시 선택할 수 있었다면 너 혼자 두고 떠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거야.”그 시절의 기억은 사실 남설아에게도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하지만 다시 만나고 나니 그 시절의 감정들이 마치 파도처럼 마음속을 뒤덮었다.그렇지만 파도는 결국엔 밀려 나간다. 언제나처럼 잠시뿐인 감정이었다.그녀는 강연찬을 바라보며 마치 자신의 한 시절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남설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선배, 그때 선배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잘못된 사람을 선택한 건 나였지. 근데 걱정 마, 이제는 다시는 그런 실수 안 할 거야.”그녀는 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더니 고개를 돌려 강연찬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나는 여전히 배씨 가문 사
비록 아주 약한 슬픔이었지만 그 감정은 남설아가 가까스로 쌓아 올린 단단한 마음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남설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더 이상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이곳을 떠나려 돌아섰다. 하지만 막 고개를 돌린 순간 두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 둘은 술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렸고 얼굴에는 탐욕스럽고 음흉한 웃음이 가득했다.남설아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가방 안에 있던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냈다.“당신들, 뭐 하자는 거예요?”“뭐 하긴? 하하, 남자가 여자를 봤는데 뭘 하겠어?”“아가씨, 꽤 예쁘네.”두 남자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낄낄 웃었다. 그 웃음은 듣는 이의 소름을 돋게 만들 만큼 야비하고 불쾌했다.남설아는 이들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리자 강한 혐오감이 올라왔다. 하여 주저하지 않고 스프레이를 꺼내 정면으로 뿌려버리고는 반응을 볼 틈도 없이 등을 돌려 전속력으로 달렸다.하지만 몇 발자국 채 뛰지 못해 누군가의 단단한 가슴팍에 세게 부딪쳤다. 그런데 상대는 밀쳐내는 대신 오히려 그녀를 품 안에 안아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리더니 뒤따라오던 남자 하나를 발로 거세게 걷어찼다.“꺼져.”그 목소리 남설아는 꿈에서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그 음침한 눈빛이 마주했다.남설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송우민의 품에서 벗어나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우민 씨 덕분이에요.”“내가 너보다 한 살 어리거든? 굳이 우민 씨라고 안 불러도 돼.”송우민이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잘생긴 얼굴인데 눈빛이 지나치게 날카롭고 음울해서 원래의 부드러운 인상이 깨져버렸다. 오히려 보는 사람의 속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그런 그를 바라보며 남설아는 다소 민망하게 말했다.“근데 우민이라고 부르면 좀 이상하잖아요...”“그냥 송우민이라고 불러.”송우민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낮에는 간신히 목숨 부지하더니 밤엔 이런 데까지 나올 여유가 생겼네? 멘탈이 내 생각보다 훨
“아아악!!”서유라가 비명을 지르며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을 마구 집어 던지고 부수기 시작했다.거칠게 날뛰던 그녀는 급기야 자기 팔을 긋기 시작했고 여러 군데서 피가 철철 흘렀다.곧장 호텔 직원들이 옆방 투숙객의 항의 전화를 받고 달려왔는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하나같이 혼비백산했다.직원들은 급히 배서준에게 연락을 시도했다.한편 배서준은 어렵게 시간을 내 천주에 와 있었고 여러 사람들과 인맥을 쌓기 위해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잔이 오가며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마시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서유라 이름이 뜬 화면을 본 배서준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배 대표님, 드디어 받으셨네요. 유라 씨가 지금 미쳐 날뛰고 있어요. 빨리 와서 처리 좀 해주세요!”그 말에 배서준의 얼굴이 확 변했고 그는 결국 잔을 내려놓고 급히 자리를 떴다.조성우는 그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고 마음속으로는 남설아가 너무 안됐다 싶었다.배서준이 떠나자 조성우는 바로 강연찬에게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강연찬은 남설아를 데리고 그 자리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걸 본 조성우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남설아를 바라봤다.“설아 씨는 여기 웬일이에요?”그 말에 남설아는 이 자리가 자신에게 예정된 자리가 아니었단 걸 눈치챘고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어색한 침묵 끝에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억지로 끌려왔다고 하면... 믿을래요?”“친구들끼리 모여서 얘기 좀 하는 게 뭐 어때서요.”강연찬은 남설아의 손을 끌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하지만 남설아는 그의 손을 조용히 뿌리치며 진지하게 말했다.“오빠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배서준과 어떤 사이든 간에 지금 난 법적으로 그 사람의 아내야. 밖에선 모두가 날 사모님이라 부른다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오빠랑 얽히는 건 나도 싫고 오빠에게도 민폐야.”그 말을 끝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남설아는 알고 있었다. 강연찬은 그녀의 앞날을 위
송우민은 남설아의 슬픔을 느끼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그의 뜻밖의 너그러운 태도에 남설아는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지금 이 세상 모두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에겐 상관없었다.단 하나, 자신의 계획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그뿐이었다.목숨이든, 자존심이든, 사실 남설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놨다.이 모든 걸 끝낼 수만 있다면 그 아이를 따라가 배나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송우민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빛이 살짝 달라지더니 탁자 위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올리고 가볍게 웃었다.“참, 묘한 여자네.”“형님, 이렇게 그냥 보내버리면... 의뢰인한텐 뭐라 말하죠?”전기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송우민을 바라봤다.그러자 송우민은 그를 보며 마치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대꾸했다.“우리가 어떤 사람들인데? 그 사람한테 무슨 설명을 해? 그리고 말이야, 저 여자가 벌인 일은 지금 가리고 숨기기에도 벅찰 판인데 뭐? 되레 우리가 책임지라고?”“형님, 그래도 이건 좀... 규칙을 어기는 거 아닌가요?”전기태는 여전히 찝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처음 보는 여자 하나 때문에 평소의 원칙을 어기는 송우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돌아온 건 송우민의 싸늘한 시선과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든 커피잔뿐이었다.남설아는 카페에서 나온 순간까지도 이 모든 상황이 마치 꿈속 같았다.호텔에 돌아왔을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그녀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물속에 자신을 잠기게 했다.숨이 막힐 듯한 그 찰나의 순간을 지나 다시 물 위로 올라왔을 땐 감정이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몸을 닦지도 않은 채 그녀는 그대로 욕실 거울 앞에 섰다.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피멍이 든 자국들, 크고 작은 상처들이 온몸에 가득했다.“기억해. 오늘 이 모든 건... 다 서유라, 네가 만든 결과야.”남설아의 눈빛엔 차디찬 증오가 담겨 있었고 두
“노트북 하나 줘요.”남설아는 울다가 웃은 얼굴로 말했다.사실 처음에 이 프로그램 만들 때는 중간에 해제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설정해 둔 거라 지금 와서 해제하려니 꽤나 번거로웠다.송우민은 별말 없이 부하에게 눈짓해 노트북을 가져오게 했다.남설아는 손가락을 재빠르게 움직이며 프로그램을 조작했고 결국 5분 안에 경보 시스템을 해제해냈다.그런 다음 송우민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실 이 경보 시스템, 꽤 비싸요.”“죽고 싶어?”송우민은 더는 참지 못하고 화를 터뜨렸다.남설아는 입만 열면 꼭 사람 속을 긁는 말만 골라서 했다. 거슬리고 짜증 나고 아주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송우민이 진심으로 화난 걸 느낀 남설아는 한숨을 쉬며 작게 말했다.“그럼 우리 이제 자리 좀 옮겨서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긴 좀... 애매해서요. 편하지도 않고.”“그래, 따라와.”송우민 역시 이 공간이 다음 대화를 나누기엔 부적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카페에 앉는 순간까지도 남설아는 이게 현실이 맞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자기를 납치한 범인과 이렇게 한자리에서 커피 마시며 대화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정말 웃긴 상황이었다.커피잔을 휘휘 저으며 한숨을 쉰 남설아는 송우민을 바라보며 물었다.“결국 돈이 목적이에요? 아니면 목숨이에요?”“둘 다.”송우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송가는 배씨 가문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 그러니 배씨 가문 역시 똑같이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자본의 세계가 피 냄새 나는 법이라는 걸 남설아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 답변이 전혀 의외는 아니었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럼 확실히 말해두죠. 그 사람 죽이고 나서는 나 건드리면 안 돼요. 지금 우리는 부부라고는 하지만 껍데기뿐인 관계예요. 곧 남남이 될 거고 나까지 엮이면 안 돼요.”“진심이야?”송우민은 더는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말한 게 진심이라는 증거들을 하나둘
“남설아 씨, 모르셨어요? 아이의 병은 유전성 골암이에요. 남은 시간이 길면 두 달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설아 씨 어머님도 이 병으로 돌아가셨죠. 제 생각엔 설아 씨도 정밀 검사를 받으시는 게 좋겠네요...”남설아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싶었다. 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고 몸이 멈출 수 없이 떨려왔다.“엄마, 왜 그래요?” 배나은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남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제가 사과할까요?”남설아는 병상 위 배나은의 깡마른 얼굴을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자신의 전부인 아이의 남은 시간이 겨우 두 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부모도 가족도 없었고 결혼 생활은 허울뿐이었다. 나은이는 그녀가 살아갈 유일한 이유였다.남설아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엄마는 슬프지 않아. 너무 행복해. 나은이가 곧 나을 테니까.”배나은의 눈이 빛났다. “정말이요? 너무 좋아요. 아빠는... 오늘 저 보러 올까요?”맑고 까만 눈에 살짝 기대가 스쳤지만 아이는 금세 고개를 떨궜다. 또 실망할까 봐 기대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 말은 남설아의 가슴을 더 무겁게 짓눌러 고통스럽게 했다.남설아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말했다. “올 거야. 엄마가 약속해. 오늘 아빠가 나은이 만나러 꼭 올 거야.”“정말이에요...?” 아이의 목소리는 불안했고 확신이 없이 되물었다. 남설아는 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나은이를 낳아준 엄마인 자신이 나은이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네 살짜리 아이는 어른들 사이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평범한 가족의 온기와 아주 조금의 아버지 사랑을 바랐을 뿐이다.그런데 아이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었다.“나은아, 엄마가 약속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꼭 아빠 데려올게. 생일 축하해.” 남설아는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배나은은 환하게 웃었다.남설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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