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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Author: 목련청
그 웃음 한 번에 배서준은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준아, 설아 씨가 정말로 이혼에 동의했어. 사인도 끝났어.”

서유라는 이혼 서류를 확인하더니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배서준은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놀란 얼굴로 서류를 얼른 낚아챘다.

‘속임수일 줄 알았는데, 정말 사인했다고?’

서류 끝에 휘갈겨진 낯익은 서명이 그렇게도 눈에 거슬릴 줄은 몰랐다. 그녀가 정말로 이렇게 쉽게 포기해버린 걸까?

“배서준, 넌 정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20억을 최대한 빨리 보내.”

남도일은 서로를 껴안은 두 사람을 보며 혐오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비웃음을 흘리며 거침없이 자리를 떠났다.

오랜 시간 바라던 결말이었는데도 배서준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

그리고 그 허전함 속에서 서서히 화가 끓어올랐다.

“잘 됐다, 서준아! 이제 자유야! 우리 이제 정말 함께할 수 있어.”

서유라는 눈물을 흘리며 배서준을 꼭 껴안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앞으로는 누구도 그녀에게 불륜녀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병원부터 가자.”

하지만 배서준은 기대했던 해방감 대신 알 수 없는 불쾌함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정말 떠난다니 왜 이토록 찝찝한 걸까?

그 답답함이 그를 짜증 나게 했고 결국 그는 그 감정을 서유라에게 그대로 쏟아냈다.

그녀를 번쩍 들어 아무 말 없이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서유라는 배서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의 작은 표정 변화만 봐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복잡한 심경에 휩싸여 있었고 그 안에 기쁨은 한 조각도 없었다.

“서준아, 너 기쁘지 않아?”

“기뻐.”

그는 서유라를 안은 채 몇 번이고 기쁘다고 되뇌었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배서준은 평소와 달리 스스로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예전엔 그가 집에 늦게 들어와도 남설아는 항상 집을 깔끔하게 정리해두었다. 꽃까지 사다 두며 집 안에 온기를 채우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가 더 우스워 보였다. 집안에 꽃이 있다고 가족이 따뜻해지는 건 아니다. 사랑이 있어야 집이 따뜻해지는 것이다.

“아주머니, 사람들은 다 어디 갔어?”

집 안을 둘러봐도 남설아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사모님께서는 모든 짐을 챙겨서 떠나셨습니다. 앞으로 대표님께 폐 끼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장숙자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오랜 세월을 지켜본 그녀는 남설아의 진심도 배서준의 무심함도 모두 알고 있었다.

“나은이는?”

배서준은 더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도 짐을 다 챙겨서 사모님과 함께 떠났습니다.”

장숙자는 사실대로 보고했을 뿐인데도 그 말에 배서준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참 빠르기도 하지. 그렇게까지 도망치고 싶었나?”

그는 차갑게 웃음을 지었다.

이혼 서류에는 나은의 양육권이 남설아에게 넘어간다고 명확히 명시되어 있었다.

어차피 그는 그 여자를 싫어했고 그 여자가 낳은 아이도 딱히 원치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진짜로 떠나버리자 집 안 공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나은이 태어났을 때, 집은 한순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깔끔했던 공간은 온갖 장난감과 기저귀로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그때 그는 그런 변화가 끔찍하다고 느꼈다. 고양이 같은 어린 애가 한 명 생겼다고 그렇게 많은 물건이 늘어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지금, 그 많던 물건들이 다 정리되어 사라지자, 배서준은 오히려 집 안이 휑하게 느껴졌다.

아니, 집뿐만 아니라 마음속까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가 정말 이렇게 떠났을 리가 없다고, 분명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라고 그는 애써 부정했다.

‘분명 또 밀고 당기기를 하려는 거야. 또 나한테 뭔가를 바라는 수단일 거라고.’

배서준은 답답한 듯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필사적으로 단서를 찾으려 했다.

이 모든 게 함정이라는, 그녀가 완전히 떠난 게 아니라는 작은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집 안 어디에서도 남설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아니, 나은의 흔적조차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은의 물건들이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흔적 하나 남지 않을 수 있지?

순간 뭔가 떠오른 듯, 배서준은 곧장 서재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책장 쪽으로 다가가 눈을 빛냈다.

나은이가 두 살 때, 장난삼아 서재에 몰래 들어와 책장에 칼자국을 여러 개 남긴 적이 있었다.

그 책장은 배서준이 서유라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직접 고른 거라 더 애지중지했던 물건이었다.

그래서 당시 나은에게 크게 화를 냈던 기억이 선명했다.

작은 손으로 조각칼을 쥐고 엉엉 울던 나은의 모습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처 자국이 어디 갔지?’

책장을 자세히 보니 그 부분이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수리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유심히 보지 않으면 손상됐던 부분이라는 걸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지우고 간 거야?’

배서준은 거실, 방, 서재를 빙글빙글 돌며 끝없이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남설아와 나은이 이 집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제야 배서준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 떠났다.

원래라면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에서 설명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결국 넥타이를 확 잡아당겨 목에서 벗겨내더니 바닥에 세게 내던졌다.

“아주머니, 남설아가 언제 돌아온다고 말했어?”

배서준은 잔뜩 굳은 얼굴로 장숙자에게 물었다.

장숙자는 당황한 듯 손을 닦으며 작게 대답했다.

“사모님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돌아오지 않는다? 정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배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역시나 정 없는 여자였어.’

“그럼 나은이는?”

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저는 나은 아가씨를 못 봤어요. 지금쯤이면... 아마 유치원에 있을 시간일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배서준은 지난번 나은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그날, 유치원에 데리러 가겠다고 해놓고 끝내 못 갔던 날 말이다.

‘이번에 가면 되지. 적어도 아이는 아무 잘못 없으니까.’

그는 마침내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떠올린 듯,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너무도 익숙하지만, 이제는 듣기만 해도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차가운 자동 응답 음성이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대답은 똑같았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배서준은 불쾌하게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누구랑 통화하고 있는 거야?”

그때 옆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장숙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표님, 보통 그런 안내 멘트가 나오면 차단된 경우가 많아요.”

‘차단했다고? 남설아가 날 차단할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배서준은 황당한 듯 냉소를 흘렸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작정했네.”

장숙자는 그런 배서준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그녀는 여자였고 긴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었기에 이번에는 사모님이 정말 지쳐버렸다는 걸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절대 단순한 투정이나 밀당이 아니었다.

그 순간, 배서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장숙자를 흘겨봤다.

“봐, 결국 전화하잖아?”

그러나 전화를 받은 순간, 들려오는 것은 싸늘하고 딱딱하지만, 예의를 갖춘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배나은 양의 보호자 되시죠? 이곳은 장례식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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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준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서유라가 황급히 달려와 배서준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그의 행동을 다소 비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아무리 그래도 설아 씨도 여자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그녀는 몸을 돌려 바닥에 쓰러진 남설아를 부축하려고 허리를 숙였다.배나은이 죽기 전에 바란 건 그저 아빠와 며칠만이라도 함께 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유라는 끝까지 배서준을 독차지했다. 심지어 배나은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밤에도 배서준을 끌고 가 기념일을 보냈다.하여 남설아는 서유라를 볼 때마다 수수가 느꼈을 슬픔과 억울함이 떠올랐다.그리고 배나은이 떠나던 그날 밤, 단 한 사람을 위해 터졌던 1억 2000만 원어치의 불꽃놀이가 떠올랐다.“건드리지 마!”“더러우니까.”남설아는 서유라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다해 일어서며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그 눈빛은 마치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했다.예전엔 서유라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모든 책임은 오로지 배서준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설득할 수 없었다.만약 서유라가 정말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면 어째서 수차례 배서준을 배나은의 곁에서 데려갔던 걸까?“아야.”서유라는 그녀가 뿌리친 힘을 따라 일부러 바닥으로 넘어지며 아픈 듯 신음 소리를 냈다.눈가는 단숨에 붉어졌고 애써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또 그 뻔한 연극이었던 것이다.남설아는 이를 몇 년을 지켜보며 질릴 대로 질렸다. 하지만 지겹지도 않은지 서유라는 여전히 같은 연기를 하고 있었다.그리고 배서준은 그 연기에 늘 속아 넘어갔다.그는 차가운 눈으로 남설아를 노려보다가 몸을 숙여 서유라를 부축했다. 그런데 서유라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랐다.조금 전까지 얼음처럼 차가웠던 시선이 단숨에 사르르 녹아내린 것이다.“괜찮아?”이런 온기와 인내를 남설아와 배나은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그 순간 남설아는 깨달았다.자신이 몇 년을 사랑했던 것도, 배나은이 그토록 애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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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자신의 딸이 이런 여자와 계속 함께 살게 놔두지 않을 것이리라 배서준은 마음먹었다.“나은이 죽었어요!”“죽었다고요! 당신이 이 여자랑 알콩달콩하고 있을 때, 도시 전체에 불꽃놀이를 터뜨려줄 때, 우리의 나은이, 당신 친딸은... 수술비가 없어서 죽었다고요! 당신 딸이 죽었다고요!”남설아는 거칠게 몸부림쳤다.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한 마디 한 마디가 배서준을 향한 날카로운 비난이었다.절망이자 분노였다.그리고 한 어머니의 한없는 무력감이 담긴 소리였다.온 힘을 다해 배서준의 손을 뿌리치고 그녀는 바닥에 흩어진 사진을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그 순간 깨진 유리 조각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어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그러나 남설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대충 옷에 피를 닦아내고 꾸깃꾸깃한 사진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사진 위의 먼지를 닦고 또 닦았다.“너...”배서준의 가슴은 한순간 철렁 내려앉았다.뭔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설아 씨, 설아 씨가 서준이 오래 짝사랑해온 건 알아. 그리고 서준이가 설아 씨를 좋아해 주길 바랐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설아 씨도 엄마라면서 어떻게 자기 아이를 저주할 수 있어? 나은이가 이걸 알면 얼마나 상처받겠어?”서유라가 다가와 부드럽게 설득하더니 한숨을 쉬며 조용히 남설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서준이가 나를 좀 더 챙기는 건 맞지만 난 정말 설아 씨 가정을 망치고 싶은 생각 없어. 나도 나은이가 건강한 가정에서 자랐으면 좋겠어. 설아 씨가 날 오해하고 있는 거야.”남설아는 무릎을 꿇은 채 손에 꼭 쥔 사진을 가슴에 끌어안았다.죽은 후까지도 배나은에게서 아빠를 빼앗아 간 여자가 이렇게 뻔뻔하게 굴다니.그런데도 서유라는 계속 그녀를 자극했다.“그러니 제발 나은이 데려와. 내가 서준이 잘 설득할게. 설아 씨가 나은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줄게. 나도...”“닥쳐, 당장 닥치라고!”마침내 무너진 남설아는 두 손으로 서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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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굿바이 쓰레기   제40화

    남설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서류를 받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강연찬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걸 어떻게 알고 있었어?”“나 원래 이쪽 일 했잖아. 이런 정보 찾는 건 어렵지 않아.”강연찬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외식용 도시락을 열었다.이렇게 뻔뻔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남설아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이제는 제법 성숙하고 듬직해졌지만 여전히 어딘가 어린애 같은 면이 남아 있었다.“하늘이 무너져도 밥은 먹어야지. 일단 먹자. 먹고 나서 천천히 이야기하자.”그는 젓가락을 내밀며 웃었다.이 며칠 동안 강연찬은 늘 남설아 곁을 지켰다. 그의 배려는 마치 스며드는 이슬처럼 조용하고 은은했지만 남설아는 그 섬세한 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가 건네는 젓가락을 바라보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들을 보며, 남설아의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예전엔 자신이 집에서 배서준을 기다리고 그를 챙기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배서준은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밥을 먹었는지 신경 쓴 적이 있었던가?사랑과 무관심은 확연히 드러나는 법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심지어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못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고마워.”남설아는 살짝 미소를 짓고 젓가락을 받아들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한 입 먹자마자 그녀는 이 음식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코끝이 살짝 시큰해지며 조용히 물었다.“이거... 학교 식당 밥이야?”“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억하네?”강연찬이 웃으며 말했다.“역시 넌 똑똑해.”남설아는 어이가 없어 웃으며 솔직히 말했다.“이렇게 맛없는 걸 어떻게 잊어?”학교 식당 음식이 원래 맛있을 리 없었고 그들이 다녔던 대학은 특히나 더 심했다. 솔직히 말해 그땐 하루에도 몇 번씩 불평했었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다시 먹어보니 음식 맛은 그대로인데 정작 변한 건 그녀 자신이었다.어느새 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심지어 이 맛마저 익숙하고 애틋하게 느껴졌다.그러나 몇 입을 더 먹던 남설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음식을 뱉고

  • 굿바이 쓰레기   제39화

    서유라는 배서준과 결혼하면 그야말로 평생 안락한 삶이 보장될 줄 알았다.하지만 이렇게 중간에 뜻밖의 변수가 등장할 줄이야!‘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서유라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처음부터 배건 그룹이 배서준 손에 없는 줄 알았다면 그를 유혹할 게 아니라 남설아를 꼬셨을 것이었다.‘그토록 애써 손에 넣은 결과가 고작 빈 껍데기라니.’배서준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유라야, 지금 기분은 어때?”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눈빛 속엔 질문이 섞여 있었다.서유라는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늘 그래왔듯 빠르게 감정을 정리하고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서준아, 난 괜찮아. 제발... 제발 더 이상 설아 씨랑 싸우지 마.”“설아 씨는 항상 말한 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잖아. 네가 날 위해 너무 많은 걸 잃게 될까 봐 걱정돼.”그 말이 떨어지자 배서준의 표정이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바로 이거였다.그는 여자가 자신의 말에 따르고 의존하는 걸 좋아했다.그가 원하는 건 강한 여자가 아니라 순종적인 여자였다.배서준은 곧장 서유라를 품에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그깟 주식 몇 개 있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회사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지금까지 빨래하고 밥하는 것밖에 할 줄 몰랐던 여자가 회사에서 뭘 할 수 있겠어?”그에게 남설아는 집안일을 해주는 기계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이제 와서 무슨 능력이 있다고 주식 운운하는지 우스울 뿐이었다.이상한 점을 느껴왔기에 배서준은 오래전부터 대비책을 세워두고 있었다.그 말에 서유라는 안심하며 더욱 그의 품에 매달렸다.“서준아,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그냥 이렇게 너랑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바보야, 우린 이미 함께 있잖아.”배서준은 만족스러운 듯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병원을 나선 남설아의 눈빛은 전보다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그냥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그렇게 한다면 나은이의 죽음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배서준이 이미

  • 굿바이 쓰레기   제38화

    남설아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예전엔 부부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제 각자의 길을 가야 할 상황에서 모든 걸 확실하게 정리해야 했다.배서준은 눈앞의 여자가 낯설게만 느껴졌다.예전에는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들고 한 장 한 장 살펴보자 그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졌다.“이럴 리가 없어!”“돈에 눈이 멀더니 결국 이런 짓까지 서슴지 않는 거야? 감히 서류를 위조하다니!”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손을 뻗어 남설아의 목을 움켜잡았다.눈빛에는 분노와 위협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남설아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배건 그룹 법무팀의 수준이 어떤지는 서준 씨가 더 잘 알 텐데요?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당신이랑 부부로 지낸 세월이 있으니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생각은 없지만 받아야 할 건 확실히 받아야겠어요.”남설아는 단호하게 그의 손을 쳐냈다.한때는 그가 그렇게도 멋져 보였다.잘생기고 키 크고 능력까지 뛰어난 남자였으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보니 그 모든 겉모습 아래에는 썩어 문드러진 정신이 도사리고 있었다.진절머리가 났다.‘어떻게 이런 인간을 사랑했던 걸까?’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역시 사랑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남설아, 이런 짓을 한다고 내가 다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해?”비웃음을 터트린 배서준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바닥에 내던졌다.“설령 이 서류가 진짜라고 해도 그게 뭐?”“이 꼴을 하고서 대체 뭘 할 수 있는데? 네가 무슨 수로 날 이기겠다는 거야? 주제도 모르고 지분을 운운하다니, 꿈도 참 크다.”새장 속의 새인, 자신이 가둬둔 여자가 감히 하늘을 날겠다고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처럼 보였다.경멸하는 듯한 뻔뻔한 태도가 확실했다.그리고 그제야 남설아는 완전히 깨달았다.이 남자의 눈에 자신은 그저 배씨 가문의 온실 속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힘없는

  • 굿바이 쓰레기   제37화

    서유라는 배서준의 목에 팔을 감고 조용히 속삭였다.“이게 다 서준이 너를 위해서야. 만약 그 여자가 꼼수를 부려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안 찍으면 어쩌려고?”“서준아, 우리 여기까지 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내가 너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정말 싫어.”말을 하던 서유라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사실 나도 알아.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떳떳한 건 아니라는 거.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널 떠나고 싶지 않고 떠날 수도 없어.”울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경련까지 일어났다.배서준은 그녀의 상태를 보자마자 긴장하며 발걸음을 재촉해 병원으로 향했다.곧바로 그는 최고의 전문의를 불러 서유라를 진찰하게 했다.“대표님, 서유라 씨의 정서가 최근에 상당히 불안정합니다. 우울증이 재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이미 신체 증상까지 나타나고 있는데 이대로 두면 예전처럼 악화될 겁니다. 서유라 씨가 안정될 수 있도록 대표님께서 방법을 찾아보셔야 합니다.”의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보았다.그 말을 듣자 배서준의 얼굴빛이 미묘하게 변했다.서유라의 감정이 왜 이렇게 불안정한지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남설아를 반드시 오게 하라고 지시했다.하지만 이미 이혼한 상태였으니 당연히 남설아가 협조할 리 없었다.비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 성격 잘 아시잖아요. 안 가시면 또 난리가 날 겁니다.”그렇다. 배서준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오직 자신의 입장만 생각할 뿐 타인의 감정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남설아는 처음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떠오르는 그 계약서가 그녀의 마음을 바꿔놓았다.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요. 그렇게까지 보고 싶다면 가 줘야죠. 다만 나중에 후회만 하지 않으면 좋겠네요.”더 이상 이런 일로 감정이 흔들릴 줄 몰랐지만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니 예상보다 더 쓰라렸다.여러 명의 전문가들이 서유라 한 사람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리고 배

  • 굿바이 쓰레기   제36화

    서유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남설아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고 가까이 다가섰다.“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나랑 비교해? 도대체 네가 뭐라고!”“나랑 서준이는 천생연분이야. 그쪽은 그냥 침대에 기어오른 천한 년일 뿐이야. 그쪽이 낳은 딸도 마찬가지고!”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참을 필요조차 없었다.남설아는 온몸의 힘을 담아 서유라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서 머리카락을 거칠게 틀어쥐고 그녀의 머리를 배나은의 사진 앞에 힘껏 박아버렸다.“아악! 남설아, 감히 날 때려?”“놔! 당장 놔!”서유라는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남설아는 그녀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감정을 품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엄마가 분노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서유라는 끝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남설아는 머리채를 세차게 잡아당긴 채 서유라의 무릎을 걷어찼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뒷목을 단단히 눌러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았다.뭐든 말할 수 있지만 나은이만큼은 절대 입에 올려선 안 된다.“미쳤어? 미친년!”서유라는 세 번이나 이마를 바닥에 세게 부딪친 끝에야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그대로 되갚아주려 했지만 남설아가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내가 떠났다고 해서 네가 배서준의 아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과연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몰랐나 본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알아? 배건 그룹의 51% 지분이 아직도 내 거라는 걸 알고는 있니?”이건 결혼 당시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긴 보장이었다. 남설아는 배서준을 사랑했기에 한 번도 이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관계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원래라면 배씨 가문의 재산 따위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은이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서유라는 배서준을 믿고 남의 아이 앞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었다.참을 수 없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이 파렴치한 남녀는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악랄했다.한 명은 위기에

  • 굿바이 쓰레기   제35화

    강연찬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그저 잠시 해외로 연수를 다녀온 것뿐인데 그사이에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질 줄 말이다.외국에 있을 때, 남설아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소식을 들고 그는 정말 한동안 술에 절어 살았다.애초에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왠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지금은 그 이야기를 이어갈 때가 아니었다.“일단은 쉬어. 지금 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있어. 며칠 푹 쉬고 컨디션이 좀 나아지면 나 찾아와. 그때 내가 직접 회사로 데려가서 입사 절차 밟게 해줄게.”강연찬은 가볍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손길은 따뜻했고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남설아는 그 모습에 가슴 깊숙이 작은 불씨 하나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희망이라는 불씨 말이다.하지만 그 불씨는 금세 사그라졌다.‘나에게 그런 걸 꿈꿀 자격이 있을까?’그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남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돌아서서 낡은 집으로 들어가며 남설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며 문득 생각했다.애초에 자신은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배서준과도 같은 세계에서 살아온 적 없었고 강연찬과는 더더욱 아니었다.우연한 계기로 배서준과 결혼하고 배나은을 낳았지만 결국 모든 걸 잃었다.이제 모든 게 끝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혼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남설아는 손을 뻗어 고쳐 붙인 사진을 꺼냈다.그러고는 부모님의 영정 옆에 조심스럽게 배나은의 사진을 놓았다.사진 속 나은이는 여전히 밝게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를 짓는 작은 생명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었다.조금이라도 쉬려 했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이 시간에 누가 찾아올 리 없는데.’남설아는 짜증 섞인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리고 곧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마주했다.서유라였다.그녀는 허락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 굿바이 쓰레기   제34화

    강연찬은 문 앞에 서서 남설아의 초라하고 불안한 모습을 바라보았다.주먹을 꽉 쥔 손끝이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한없이 어두웠다.그때, 단 한 순간의 선택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 줄은 몰랐다.그저 잠시 떠나 있는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힘든 일을 겪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만약 그때 알았더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국내에 남아도 충분히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세상에 후회에 해당되는 약은 없었다.강연찬은 묵묵히 핸드폰을 꺼내 장례식장과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며 배나은의 마지막 길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갔다.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남설아는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아이의 장례를 직접 준비하고 싶었다.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방 한가득 놓여 있는 종이로 만든 장난감들을 보고 남설아는 멍해졌다.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강연찬을 바라보았다.“이건?”“나은이가 핑크색 좋아하잖아. 그래서 준비했어.”“이렇게 함께 있으면 나은이도 덜 외롭고 무서워하지 않을 거야.”강연찬은 그녀 곁에 서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목소리는 한없이 따뜻하고 조용했다.퇴원하기 전, 남설아는 배서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배나은을 위해서라도 그가 마지막으로 한번쯤은 와주길 바랐다.하지만 해가 지고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가 오지 않는다는 현실이 마지막까지 확인되고서야 남설아의 가슴은 깊이 가라앉았다.사진 속 나은이를 바라보며 그녀는 조용히 입을 뗐다.“나은아... 미안해. 다음 생에는 좀 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해. 부디 이런 사람을 아빠로 고르지 마.”“엄마는 열심히 살아볼게. 그러니까, 나은아... 천천히 가.”목소리는 끝내 떨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그 자리에 주저앉아 남설아는 끝없이 눈물을 쏟아냈다.오늘이 지나면 정말로 이 세상에 배나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작 세 살, 너무나 짧았던 생이었다.하지만 그 짧은 시간조차 나은이는 온전히 행복하지 못

  • 굿바이 쓰레기   제33화

    “나 괜찮아!”남설아는 다급하게 말했다.‘고작 뼈에 금이 간 것뿐인데 무슨 휴식이 필요하다는 거야?’하지만 강연찬은 그녀의 말을 단숨에 무시하고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몸조리 잘해.”강압적인 듯하면서도 따뜻한 태도였다. 몇 년 전과 다르지 않은 듯했지만 또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몇 년 동안 떨어져 있었는데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그간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서로의 호흡은 여전히 척척 맞았다.“잠깐 쉬고 있어. 뭐 좀 먹을 걸 가져올게.”강연찬은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방을 나섰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남설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따뜻함이 스며들었다.바로 그때, 문이 열리고 서도현이 들어왔다.그는 남설아를 내려다보며 얼굴에 역겨움을 숨기지도 않았다.“남설아, 넌 진짜 천하에 둘도 없는 천박한 여자야. 그렇게까지 남자가 필요해? 솔직히 말해줄까? 형은 네가 낳은 그 계집애가 병에 걸린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근데 그 애가 나약하고 재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신경도 안 쓴 거야. 그런 쓰레기 같은 애는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서도현의 말이 가시처럼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심장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산산조각이 난 기분이었다.남설아는 이를 악물며 깊이 숨을 들이켰다.“헛소리하지 마!”“헛소리? 현실을 부정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한 가지 확실히 해줄까? 형은 네가 낳은 그 더러운 애한테 눈곱만큼도 관심 없었어.”“그 애가 쓴 일기며 남긴 물건들? 다 쓰레기통에 버렸어.”“그래도 우리 누나가 착해서 네 편 들어준다고 그걸 주워왔지. 너도 부끄러움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우리 누나한테서 떨어져.”이 말과 함께 서도현은 메고 있던 가방을 그대로 남설아에게 던졌다.충격이 전해졌지만 아픔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급히 가방을 열어 확인하자 정말로 그 안에는 나은이의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표지는 잉크 자국이 얼룩져 있었다.쓰레기통에서 건져냈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 굿바이 쓰레기   제32화

    이건 노골적인 협박이었다.남설아는 배서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입 밖으로 낸 말은 반드시 실행하는 인간이었다.그렇기에 바로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서며 강연찬 앞을 가로막았다.“그만해요! 이 사람한테 손대지 마요!”“명령하는 거야? 남설아, 네가?”배서준이 비웃듯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이 여자가 자기 앞에서 다른 남자를 감싸고 도는 모습이 너무나도 거슬렸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배서준 씨, 우리 문제예요. 제발 다른 사람 끌어들이지 마요!”“우리 문제라는 거 알면 됐어.”배서준은 냉소를 지으며 강연찬과 남설아를 훑어보았다.날카로운 눈빛이 두 사람을 베듯 스쳐 가더니 그는 갑자기 강연찬의 어깨를 세게 밀치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남설아는 곧장 강연찬을 돌아보며 다급하게 말했다.“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선배가 위험해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난 저 사람 안 무서워.”강연찬이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그는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참이었다.하지만 외국에서 연구하며 여러 개의 특허를 획득했고 이미 자기만의 기반을 닦아놓은 상태였다.배서준이 원하는 걸 빼앗아 갈 수는 있어도 그가 가진 특허까지 뺏을 수는 없었다.“아니야, 선배. 배서준은 냉혈한이야. 자기 친자식조차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이라고. 난... 선배를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그러니까 우린... 다시는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남설아는 고개를 떨구고 억지로 말을 내뱉었다.그러나 강연찬은 마치 듣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네 삼촌, 손가락 하나 잘리고 감옥에 갔어. 3, 5년은 못 나올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장례식장 쪽에서 연락이 왔어. 나은이 장례 일정 정해야 한다고. 날짜 정하면 내가 준비할게.”남설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단 하루, 단 하룻밤 잤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거지?’“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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