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배서준은 그 단어들을 듣자마자 아무 생각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요즘 사기 전화가 이렇게까지 뻔뻔해졌나? 장례식장 직원인 척까지 하다니, 진짜 끝도 없군! 나은이는 멀쩡한데 장례식장은 무슨 장례식장이야?’하지만 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배나은 보호자님, 장례식장에서 연락 드립니다. 아이의 사망진단서와 화장 절차를 빨리 진행해 주시길 바랍니다.”상대방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배서준이 폭발하기 직전,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마지막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했다. 이젠 정말 참을 수 없었다.‘남설아, 그 여자는 진짜 미쳤어!’‘유혹하고 싶어서 뭐든 할 수 있는 건가? 제 딸이 죽었다고까지 거짓말을 하다니, 대체 세상에 어떤 엄마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지?’“서준아.”바로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서유라가 서 있었다.막 분노로 눈이 붉어질 정도였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그 눈빛 속 불길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유라는 배서준의 화난 기색을 단번에 알아챘다. 한숨을 쉬며 다가와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또 설아 씨가 장난친 거야? 내가 대신 설명해줄까?”“그럴 필요 없어.”배서준은 냉소를 터트렸다.“방금 장례식장에서 전화가 왔어. 나은이가 죽었다고. 당장 와서 절차 밟으래.”그는 핸드폰을 대충 옆으로 던지며 눈빛에 조소를 가득 담았다.‘진짜 별의별 수를 다 쓰는군. 날 유혹하려고, 관심을 끌려고, 이제는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지어낸다? 심지어 집을 나간 것도 계획적인 연출이라니.’처음엔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사람 취급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뭐라고?”서유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커다란 눈동자에는 충격이 가득했다.“설아 씨가 그런 장난을 쳤다고? 너무 심하잖아! 아이가 얼마나 어린데...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어?”“서준아, 설아 씨랑 제대로 이
“서준아, 그래도 설아 씨한테 가서 한 번 봐. 정말로 무슨 일이 난 거면 어쩌려고?”서유라는 한숨을 쉬며 배서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마치 참고 또 참는 듯한, 억울하지만 인내하는 표정이었다.배서준이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게 바로 그녀가 억울해하는 모습이었다. 때문에 지금 이 말을 듣자 마음속 분노가 더욱 치솟았다.“내가 거기 가는 순간, 그 여자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거야. 한번 두고 볼 거야. 내가 없으면 그 연극을 어떻게 끝낼 건지.”차갑게 비웃은 뒤 그는 바로 서유라를 끌어안았다.“그 여자도 너처럼 착하기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이 말을 들었지만 서유라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고 그저 겉으로만 얌전히 배서준의 가슴에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너무 화내지 마. 어쨌든 설아 씨도 배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자리를 너무 아끼니까 그래. 조금은 이해해줘야지.”어느새 촉촉해진 눈가로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하지만 너희는 이미 이혼했잖아... 대체 언제까지 이러려는 걸까?”이혼.그 단어가 배서준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얼굴빛이 순간적으로 변하더니 그는 팔을 거두고 한 손으로 셔츠 단추 두 개를 풀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서유라는 평소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다정한지 알고 있었다.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던 남자였다.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이렇게 냉랭한 얼굴을 한 채 침묵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대체 왜 이렇게까지 감정이 흔들리는 거지? 심지어 나조차 모르게 이 감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고 있잖아.’“서준아... 괜찮아?”“별거 아니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순식간에 배서준은 다시 다정한 얼굴로 돌아왔다.속에서 꿈틀대던 모든 감정을 애써 억누른 채 말이다.‘그 여자는 사라졌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일 아닌가?’이제야 드디어 자유를 찾았는데 기분 좋게 한 끼 정도는 먹으면서 축하해야 마땅했다.‘근데 왜지?’현관을 나서려는 순간, 텅 빈 집을 바라보니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그리고 설명할 수
아침에 눈을 떠보니 또다시 눈물로 젖어 있는 베개가 보였다.눈이 퉁퉁 부은 채로 남설아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켰다.그동안 너무 힘들어서 바깥세상과 단절하고 싶어 전원을 꺼둔 상태였다. 핸드폰을 켜자마자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장례식장에서 보내온 절차 진행 요청 문자였다.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배나은의 유골은 이미 안치했지만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절차와 서류가 남아 있다는 것을.“그래, 이걸 다 끝내면... 나도 여길 떠날 수 있겠지.”“나은아, 엄마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남설아는 가슴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꼭 쥐었다.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그동안 노력했다. 너무 슬퍼하지 않으려 애썼다.마지막 순간까지도 배나은은 엄마가 슬퍼할까 봐 걱정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었다.아이를 생각하는 순간, 배나은을 떠올리는 순간,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작고 여린 아이가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남설아는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서류에 사인하고 도장을 찍는 모든 과정이 기계적으로 진행됐다.“부모라는 사람들이 너무 무책임하네. 아이의 마지막 가는 길인데 신경 좀 써줄 수도 없나?”“책임질 각오도 안 됐으면 애초에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지. 아빠야 그렇다 쳐도 엄마까지 이러면 어쩌라는 거야?”장례식장 직원이 옆에서 툭툭 내뱉었다.며칠 동안 보호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를 안 받거나 아예 끊어버리기 일쑤였다.심지어 한 번은 한 남자가 전화를 받더니 미친 듯이 화를 내고 막말을 퍼붓기까지 했다.우리 같은 노동자들이 뭘 잘못했나?왜 부모라는 사람들이 아이 일조차 제대로 신경 쓰지 않는 거야?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과연 사랑받았을까?어쩌면 평소에도 방치됐던 게 아닐까?그래서 이렇게 어린 나이에 떠난 거 아닐까?여러 비난이 난무했지만 남설아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대신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아이 아빠한테도 연락을 했다
그 외의 것들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너무 많이 울어서일까 남설아의 눈이 쓰리고 아팠다.장례식장을 나서자 따스한 햇살이 그녀의 온몸을 비췄다.그 순간에서야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실감했다.하늘을 올려다보았다.햇살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그런데도 결국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나은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우리 나은이... 내 딸...”가슴에 걸린 펜던트를 두 손으로 꼭 감싸 쥔 채 남설아는 길가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아무리 스스로 다짐해도, 아무리 아이가 바라던 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다그쳐도, 버틸 수가 없었다.그녀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울다 지쳐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질 즈음에서야 겨우 일어나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그녀가 향한 곳은 오래된 본가였다.고작 20평도 안 되는 작은 집, 이것이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녀에게 남겨준 유일한 유산이었다.배씨 가문 저택의 화장실보다도 작은 공간이지만 여기가 그녀의 집이었다.유일한 ‘집’ 이었다.하지만 가까스로 도착한 집 앞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과 마주쳤다.그녀가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배서준은 이미 반나절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발밑에는 꺼진 담배꽁초들이 흩어져 있었다.그녀가 나타나자 그는 거칠게 걸어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팔을 움켜잡았다.“너한테 돈을 얼마나 줬는데 내 딸을 이런 데서 살게 해?”“남설아, 대체 이게 엄마란 인간이 할 짓이냐? 너 같은 게 엄마 자격이나 있긴 해?”예전이라면 이런 질책은 두 사람 사이의 일상적인 대화였다.그를 사랑했기에, 남설아는 언제나 참고 또 참았다.하지만 이제는 다 끝났다.아이도 없고 사랑도 없고 남은 것도 없는데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그녀는 그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그러고는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차갑게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엄마 자
남설아는 이제 눈앞의 이 남자를 한 번만 더 바라보는 것도 역겨웠다.더 이상 쳐다보는 것조차 배나은에 대한 모욕이었다.그녀는 배서준이 말없이 서 있는 틈을 타 곧바로 집으로 들어갔다.그리고 문을 있는 힘껏 닫아버렸다.쾅!닫힌 문이 덜컥거렸다.그 짧은 순간 남설아의 시선은 테이블 위로 향했다.거기에는 흑백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배나은의 얼굴이 놓여 있었다.그건 그녀가 5월 5일, 어린이날에 찍어준 사진이었다.그날 배나은은 유치원에서 공연을 했고 좋은 성적을 받아서 무척이나 기뻐했다.그래서 저렇게 활짝 웃었던 것이다.남설아는 일부러 그 사진을 골랐다.딸이 언제나 이렇게 환하게 웃으며 행복하길 바랐으니 말이다.“나은아.”남설아는 문을 등지고 주저앉았다.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울음은 참아지지 않았다.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남설아, 네가 무슨 속셈을 꾸미든 상관없지만 나은이는 내 딸이야! 함부로 욕되게 하지 마!”“그리고 양육권? 장난하지 마. 네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보자. 배건 그룹의 법무팀이 어떤 수준인지 너도 잘 알잖아?”문밖에서는 배서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이를 악물고 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예전 같았으면 남설아는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을 것이다.하지만 배나은도 이 세상에 없는 마당에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양육권? 법정 공방?그 모든 게 허무할 뿐이었다.곧이어 수제 가죽 구두가 시멘트 바닥을 밟으며 멀어져 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불협화음 같은 소리가 남설아의 신경을 긁었다.힘겹게 몸을 일으켰다.배나은이 떠난 후, 그녀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온 머릿속에는 오직 딸아이의 모습뿐이었다.비틀거리며 소파로 다가가 사진을 조심스럽게 손에 들었다.그러고는 부드럽고도 애틋하게 입을 맞췄다.“나은아, 엄마... 이제 여기서 떠날 거야.”“걱정하지 마. 너랑 한 약속 꼭 지킬게. 엄마 열심히 살 거야. 너를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할 거야.”눈물방울이
“뭐라고?”배서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며칠째 배나은을 보지 못했다. 지난번 남설아를 찾아갔을 때도 배나은은 보이지 않았다.그때 장례식장에서 걸려온 전화가 떠올랐다. 괜히 불안해졌다. 분명 남설아의 수작일 텐데도 가슴이 답답했다.“서준아, 너무 조급해하지 마. 설아 씨는 그저 너랑 잠시 감정싸움을 하는 거야. 설마 나은이를 해칠 리가 있겠어?”“근데 나은이를 어디에 데려갔을까? 설아 씨한테 다른 친척이라도 있어?”서유라가 한 걸음 다가와 배서준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위로했다.‘친척?’배서준의 머릿속에 남도일과 그가 버린 비행기 표가 떠올랐다.그 사람은 도박에 미친 사람이었다. 돈만 된다면 무슨 짓이든 할 인간 말이다.만약 수수가 그의 손에 들어갔다면 그건 정말 위험했다.“지금 당장 공항으로 간다.”배서준은 서유라를 밀쳐내고는 거침없이 밖으로 향했다.어찌 됐든 배나은은 배씨 성을 가진 아이, 배서준의 딸이다. 자기 핏줄이 남에게 짓밟히게 놔둘 수는 없었다.‘그래, 그거야.’공항으로 향하는 순간, 배서준은 이미 자기 자신에게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그 여자가 낳은 아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자신의 혈통, 배씨 가문의 체면이었다.“서준아, 아파... 발을 삐었어.”서유라는 책상에 몸을 기댄 채 작게 신음 소리를 흘렸다.하지만 이번에 배서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며 걸어 나갔다.처음이었다.배서준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서유라의 감정을 무시한 순간이 말이다.이전까지는 손가락 하나만 긁혀도 가슴 아파하며 안아 주고 한참을 달래 주던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그 천한 여자가 낳은 천한 아이 때문에 날 밀쳐내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떠나간다고?’서유라의 가슴속에 전례 없는 위기감이 스며들었다.어금니를 꽉 물고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옆에서 지켜보던 비서는 싸늘한 소름이 돋았지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준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서유라가 황급히 달려와 배서준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그의 행동을 다소 비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아무리 그래도 설아 씨도 여자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그녀는 몸을 돌려 바닥에 쓰러진 남설아를 부축하려고 허리를 숙였다.배나은이 죽기 전에 바란 건 그저 아빠와 며칠만이라도 함께 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유라는 끝까지 배서준을 독차지했다. 심지어 배나은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밤에도 배서준을 끌고 가 기념일을 보냈다.하여 남설아는 서유라를 볼 때마다 수수가 느꼈을 슬픔과 억울함이 떠올랐다.그리고 배나은이 떠나던 그날 밤, 단 한 사람을 위해 터졌던 1억 2000만 원어치의 불꽃놀이가 떠올랐다.“건드리지 마!”“더러우니까.”남설아는 서유라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다해 일어서며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그 눈빛은 마치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했다.예전엔 서유라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모든 책임은 오로지 배서준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설득할 수 없었다.만약 서유라가 정말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면 어째서 수차례 배서준을 배나은의 곁에서 데려갔던 걸까?“아야.”서유라는 그녀가 뿌리친 힘을 따라 일부러 바닥으로 넘어지며 아픈 듯 신음 소리를 냈다.눈가는 단숨에 붉어졌고 애써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또 그 뻔한 연극이었던 것이다.남설아는 이를 몇 년을 지켜보며 질릴 대로 질렸다. 하지만 지겹지도 않은지 서유라는 여전히 같은 연기를 하고 있었다.그리고 배서준은 그 연기에 늘 속아 넘어갔다.그는 차가운 눈으로 남설아를 노려보다가 몸을 숙여 서유라를 부축했다. 그런데 서유라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랐다.조금 전까지 얼음처럼 차가웠던 시선이 단숨에 사르르 녹아내린 것이다.“괜찮아?”이런 온기와 인내를 남설아와 배나은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그 순간 남설아는 깨달았다.자신이 몇 년을 사랑했던 것도, 배나은이 그토록 애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자신의 딸이 이런 여자와 계속 함께 살게 놔두지 않을 것이리라 배서준은 마음먹었다.“나은이 죽었어요!”“죽었다고요! 당신이 이 여자랑 알콩달콩하고 있을 때, 도시 전체에 불꽃놀이를 터뜨려줄 때, 우리의 나은이, 당신 친딸은... 수술비가 없어서 죽었다고요! 당신 딸이 죽었다고요!”남설아는 거칠게 몸부림쳤다.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한 마디 한 마디가 배서준을 향한 날카로운 비난이었다.절망이자 분노였다.그리고 한 어머니의 한없는 무력감이 담긴 소리였다.온 힘을 다해 배서준의 손을 뿌리치고 그녀는 바닥에 흩어진 사진을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그 순간 깨진 유리 조각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어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그러나 남설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대충 옷에 피를 닦아내고 꾸깃꾸깃한 사진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사진 위의 먼지를 닦고 또 닦았다.“너...”배서준의 가슴은 한순간 철렁 내려앉았다.뭔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설아 씨, 설아 씨가 서준이 오래 짝사랑해온 건 알아. 그리고 서준이가 설아 씨를 좋아해 주길 바랐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설아 씨도 엄마라면서 어떻게 자기 아이를 저주할 수 있어? 나은이가 이걸 알면 얼마나 상처받겠어?”서유라가 다가와 부드럽게 설득하더니 한숨을 쉬며 조용히 남설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서준이가 나를 좀 더 챙기는 건 맞지만 난 정말 설아 씨 가정을 망치고 싶은 생각 없어. 나도 나은이가 건강한 가정에서 자랐으면 좋겠어. 설아 씨가 날 오해하고 있는 거야.”남설아는 무릎을 꿇은 채 손에 꼭 쥔 사진을 가슴에 끌어안았다.죽은 후까지도 배나은에게서 아빠를 빼앗아 간 여자가 이렇게 뻔뻔하게 굴다니.그런데도 서유라는 계속 그녀를 자극했다.“그러니 제발 나은이 데려와. 내가 서준이 잘 설득할게. 설아 씨가 나은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줄게. 나도...”“닥쳐, 당장 닥치라고!”마침내 무너진 남설아는 두 손으로 서유라
지금 강연찬의 마음속은 죄책감과 긴장, 자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혹시라도 남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남설아는 살짝 강연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 사람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고 그 순간 가슴 한쪽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억울하고 서러움이 복받쳤다.혼자서 고통과 위험을 감내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강해져야만 했다.하지만 누군가 다가와 걱정해 주고 안아주는 순간, 간신히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이런 감정의 격차에 남설아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하지만 강연찬을 끌어안고 있자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배나은이 떠나던 날, 남설아는 이미 배서준에 대한 모든 사랑과 기대를 내려놨다.그리고 지금, 어린 시절 좋아했던 사람이 다시 돌아온 이 순간 자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여전히 헤어날 수 없이 사랑하고 있었고 여전히 그 마음을 제어할 수 없었다.“울지 마.”강연찬의 마음은 더더욱 찢어졌다.남설아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설아야, 이혼하자. 그 사람은 네가 붙잡을 가치도 없어.”남설아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배서준은 붙잡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하지만 아직 돌려받아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기에 여기서 멈출 수 없었고 끝까지 가야만 했다.“선배, 나 지금은 갈 수 없어.”“내 걸 다 찾아와야 해. 나은이가 그냥 허무하게 죽은 게 되면 안 돼.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남설아는 눈가가 붉게 물든 채 꼭 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강연찬을 바라봤다.상처 입은 토끼처럼 가엾고 순한 눈빛이었다.강연찬은 원래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모든 결심이 흐트러졌다.답답한 듯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너 진짜 왜 이렇게 고집이 세니. 이제 애까지 있는 사람이 예전보다 더 고집불통이 됐어.”“원래 난 이런 사람이잖아.”
예전 같았으면 배서준이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하면 남설아는 며칠이고 기분이 좋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남설아는 이런 다정함이 그저 역겹기만 했다.가볍게 웃은 남설아는 조용히 손을 뻗어 배서준의 목을 감쌌다.배서준은 그 동작이 자신에게 순순히 응한 것이라 착각해 흐뭇하게 웃었다. 눈빛에도 여유와 자만이 가득했다.“남설아, 넌 역시 똑똑하네. 적당할 때 멈출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지.”그 순간 남설아는 그의 목을 세차게 물어버렸다. 거의 온몸의 힘을 다 실은 듯 입 안 가득 쇠 맛이 번졌다.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 배서준은 남설아를 거칠게 밀쳐냈다.그런데 남설아의 등 뒤는 기술팀 출입문이었고 그 충격에 유리문이 산산이 부서지며 남설아는 그 조각들 위로 쓰러졌다. 등이 유리에 찔려 피가 흘러내렸다.“남 팀장님!”한원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피 웅덩이에 쓰러진 남설아에게 달려왔다.“괜찮으세요? 대표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기술팀 직원들도 놀라 달려왔고 이내 누군가가 급히 구급차를 불렀다.남설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을 때 등에선 피가 멈추지 않았고 옷은 이미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배서준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조롱이 담겨 있었고 얼굴엔 싸늘한 웃음이 있었다.남설아가 실려 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배서준은 무의식적으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은 어둡게 굳어 있었다.마음속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꿈틀거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서준아, 목이 왜 그래? 피나잖아!”“어디 좀 봐!”서유라는 남설아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 대신 배서준의 목에서 피가 나는 걸 보고는 다급히 달려왔다.“설아 씨가 너무 심했어!”“서준아, 우리도 병원 가자!”서유라는 배서준의 팔을 잡고 병원으로 가자며 서둘렀다.두 사람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배서준은 처음으로 뭔가 몹시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예전엔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그런 관계가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요즘 들어 무언가가
남설아는 눈앞에서 분노로 가득 찬 배서준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처음 기술팀으로 보내겠다고 한 건 당신이었어요. 근데 지금 와서 여기서 이 난리에요? 안 창피해요? 우리 문제를 회사에서 해결하겠다는 거예요?”“남 팀장, 밖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서준이 앞에서 이렇게 떳떳하게 굴 수 있어?”서유라는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마치 타이르듯이 덧붙였다.“사실 서준이는 그렇게 따지는 사람 아니야. 그냥 사과 한마디면... 용서해줄 수 있어, 그치? 서준아?”남설아는 도무지 이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앞에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에 차가운 눈빛으로 서유라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여기서 제일 입 다물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쪽이야.”“너...!”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남설아를 노려봤다.남편 앞에서, 그것도 정면에서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이 더 통하지 않겠다 판단한 서유라는 곧바로 배서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그럼 두 사람 얘기해. 난 나갈게. 서준아, 너무 흥분하지 마. 남 팀장도 그냥 기분 좀 상해서 그러는 거니까 천천히 얘기해.”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마치 모든 걸 이해하고 감싸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남설아를 보고 조용히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이런 연극을 남설아는 지난 몇 년간 수도 없이 봐왔다.처음에는 억울하고 속이 뒤집혔지만 지금은 그냥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처음엔 괴로웠으나 이제는 우스웠다.“남설아, 이쯤 됐으면 그만해도 되지 않겠어? 언제까지 이딴 식으로 굴 건데?”“혹시 네가 이러면 내가 너한테 관심이나 줄 거라고 생각해? 사랑이라도 하게 될 것 같아?”배서준은 팔짱을 낀 채 위압적인 자세로 남설아를 내려다봤다.그의 눈엔 여전히 과거 자신에게 집착하던 그 못난 여자가 보일 뿐이었다.그저 눈치 빠르고 집요한 여자, 그런데 지금은 거기에 독기까지 더해졌다고 생각했다.그 말에 남설아는 참지 못하고 결국 ‘하하하’ 하고 세 번이나 웃어버렸다.너무
“지금 뭐 하는 거예요?”남설아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이를 꽉 물고 배서준을 날카롭게 노려봤다.“남설아, 넌 아직도 배씨 가문 사모님이야. 그런데 밖에서 저렇게 질질 웃으며 남자들한테 들러붙어? 창피한 줄은 알아야지!”배서준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그가 이렇게까지 격하게 분노하는 모습을 본 한원준은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대표님, 그런 게 아닙니다. 저희가 남 팀장님께 드리려고 깜짝 이벤트 준비한 거였어요. 남 팀장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어요.”“닥쳐.”배서준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한원준을 노려봤다.그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고 사나웠다.그 기세에 눌린 한원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남설아를 염려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남설아는 그의 손을 확 뿌리치고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이건 그냥 회사 동료들하고의 정상적인 인사일 뿐이야. 당신 말처럼 들러붙는다느니 뻔뻔하다느니, 그런 말 나올 일이 아니라고요.”여기는 회사였다.남설아는 이곳에서 더 이상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창피한 꼴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하지만 오늘 배서준은 완전히 이성을 놓은 사람처럼 체면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았다.“남설아, 넌 역시 수를 잘 쓴다니까. 봐, 기술팀 전체가 네 발밑에 꿇고 있잖아. 인정할 수밖에 없지, 대단하긴 해.”“서준 씨, 정신에 문제 있으면 병원 가요. 혹시 돈 없어서 못 가는 거예요?”남설아는 고개를 돌리고는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그때 서유라가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난처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남 팀장, 이제 그만하지. 서준이 이미 다 알아. 남 팀장이랑 강 대표님 사이 일, 더는 숨길 수 없어.”‘강 대표님? 연찬 선배?’그 말을 들은 남설아는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나랑 연찬 선배는 서로 깨끗해. 당신들이랑은 다르다고. 두 사람은 이미
천주 쪽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고 남설아는 아직 처리해야 할 다른 일들이 많았다.배서준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남설아는 신경 쓰지 않았고 바로 항공권을 예매해 돌아갈 준비를 했다.한편, 배서준은 몇 장의 사진을 전달받았다.사진 속에는 남설아와 강연찬이 함께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 그리고 남설아가 강연찬을 배웅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손에 들린 사진을 꽉 움켜쥔 채 배서준은 이를 악물었다.지금껏 남설아를 마음에 둔 적도, 눈에 넣은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지금 법적으로 배씨 가문 사모님이었다. 이런 행동은 명백히 부적절했다.게다가 이건 그를 정면으로 모욕하는 짓이었다.“서준아, 왜 그래?”서유라는 그런 배서준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와 그의 소매를 살며시 당겼다.“이제 우리도 짐 싸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우연히 배서준 손에 들린 사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이, 이게 뭐야? 이건... 남 팀장이랑 강 대표님? 왜 저 사람들이 같이 호텔에 간 거야?”“닥쳐.”배서준은 사진을 전부 걷어 들이더니 차가운 시선으로 서유라를 노려봤다.배서준에게 있어 이 일은 말 그대로 치욕이었다.절대 누구에게도 알려선 안 되는 일이었고 그 대상이 서유라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서유라는 놀란 얼굴로 배서준을 바라보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연신 사과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그녀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배서준은 얼른 그녀의 두 손을 붙잡았다.“됐어, 됐어. 너한테 뭐라 한 거 아니야. 잘못한 거 없어. 넌 아무 잘못 없어, 알았지?”“서준아... 나 뭐든 다 할게. 제발... 날 버리지 마. 부탁이야.”서유라는 울먹이며 배서준의 팔에 매달렸고 이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배서준이 가장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이렇게 절대 자신을 떠나지 않겠다
호텔에 돌아온 후, 강연찬은 망설임 없이 곧장 남설아의 방으로 들어왔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남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아까 그 사람 누구야?”“송우민이야.”“오늘 나 그 사람한테 납치당했어. 그러다 협력하게 된 거고 그게 다야.”남설아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실을 말하는 남설아의 모습에 강연찬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송우민은 정말 위험한 인물이야. 될 수 있으면 멀리해야 해.”“그건 당연히 나도 알아. 근데 지금은 멀어지려 해도 이미 늦은 것 같아. 그 사람은 절대 날 놓아주지 않을 거야.”“선배가 나 위해서 애쓰고 있다는 거 알아. 우리 목표도 같다는 것도 알아. 근데 우리는 가는 길이 달라.”남설아는 예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타이밍을 놓쳐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연찬의 맞은편에 서서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선배, 미안해. 앞으로 우린 함께 갈 수 없을 것 같아.”그 말에 강연찬은 심장이 쿡쿡 쑤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 내 잘못인 거 알아. 그때 내가 다시 선택할 수 있었다면 너 혼자 두고 떠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거야.”그 시절의 기억은 사실 남설아에게도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하지만 다시 만나고 나니 그 시절의 감정들이 마치 파도처럼 마음속을 뒤덮었다.그렇지만 파도는 결국엔 밀려 나간다. 언제나처럼 잠시뿐인 감정이었다.그녀는 강연찬을 바라보며 마치 자신의 한 시절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남설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선배, 그때 선배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잘못된 사람을 선택한 건 나였지. 근데 걱정 마, 이제는 다시는 그런 실수 안 할 거야.”그녀는 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더니 고개를 돌려 강연찬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나는 여전히 배씨 가문 사
비록 아주 약한 슬픔이었지만 그 감정은 남설아가 가까스로 쌓아 올린 단단한 마음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남설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더 이상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이곳을 떠나려 돌아섰다. 하지만 막 고개를 돌린 순간 두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 둘은 술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렸고 얼굴에는 탐욕스럽고 음흉한 웃음이 가득했다.남설아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가방 안에 있던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냈다.“당신들, 뭐 하자는 거예요?”“뭐 하긴? 하하, 남자가 여자를 봤는데 뭘 하겠어?”“아가씨, 꽤 예쁘네.”두 남자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낄낄 웃었다. 그 웃음은 듣는 이의 소름을 돋게 만들 만큼 야비하고 불쾌했다.남설아는 이들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리자 강한 혐오감이 올라왔다. 하여 주저하지 않고 스프레이를 꺼내 정면으로 뿌려버리고는 반응을 볼 틈도 없이 등을 돌려 전속력으로 달렸다.하지만 몇 발자국 채 뛰지 못해 누군가의 단단한 가슴팍에 세게 부딪쳤다. 그런데 상대는 밀쳐내는 대신 오히려 그녀를 품 안에 안아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리더니 뒤따라오던 남자 하나를 발로 거세게 걷어찼다.“꺼져.”그 목소리 남설아는 꿈에서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그 음침한 눈빛이 마주했다.남설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송우민의 품에서 벗어나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우민 씨 덕분이에요.”“내가 너보다 한 살 어리거든? 굳이 우민 씨라고 안 불러도 돼.”송우민이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잘생긴 얼굴인데 눈빛이 지나치게 날카롭고 음울해서 원래의 부드러운 인상이 깨져버렸다. 오히려 보는 사람의 속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그런 그를 바라보며 남설아는 다소 민망하게 말했다.“근데 우민이라고 부르면 좀 이상하잖아요...”“그냥 송우민이라고 불러.”송우민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낮에는 간신히 목숨 부지하더니 밤엔 이런 데까지 나올 여유가 생겼네? 멘탈이 내 생각보다 훨
“아아악!!”서유라가 비명을 지르며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을 마구 집어 던지고 부수기 시작했다.거칠게 날뛰던 그녀는 급기야 자기 팔을 긋기 시작했고 여러 군데서 피가 철철 흘렀다.곧장 호텔 직원들이 옆방 투숙객의 항의 전화를 받고 달려왔는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하나같이 혼비백산했다.직원들은 급히 배서준에게 연락을 시도했다.한편 배서준은 어렵게 시간을 내 천주에 와 있었고 여러 사람들과 인맥을 쌓기 위해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잔이 오가며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마시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서유라 이름이 뜬 화면을 본 배서준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배 대표님, 드디어 받으셨네요. 유라 씨가 지금 미쳐 날뛰고 있어요. 빨리 와서 처리 좀 해주세요!”그 말에 배서준의 얼굴이 확 변했고 그는 결국 잔을 내려놓고 급히 자리를 떴다.조성우는 그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고 마음속으로는 남설아가 너무 안됐다 싶었다.배서준이 떠나자 조성우는 바로 강연찬에게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강연찬은 남설아를 데리고 그 자리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걸 본 조성우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남설아를 바라봤다.“설아 씨는 여기 웬일이에요?”그 말에 남설아는 이 자리가 자신에게 예정된 자리가 아니었단 걸 눈치챘고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어색한 침묵 끝에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억지로 끌려왔다고 하면... 믿을래요?”“친구들끼리 모여서 얘기 좀 하는 게 뭐 어때서요.”강연찬은 남설아의 손을 끌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하지만 남설아는 그의 손을 조용히 뿌리치며 진지하게 말했다.“오빠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배서준과 어떤 사이든 간에 지금 난 법적으로 그 사람의 아내야. 밖에선 모두가 날 사모님이라 부른다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오빠랑 얽히는 건 나도 싫고 오빠에게도 민폐야.”그 말을 끝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남설아는 알고 있었다. 강연찬은 그녀의 앞날을 위
송우민은 남설아의 슬픔을 느끼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그의 뜻밖의 너그러운 태도에 남설아는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지금 이 세상 모두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에겐 상관없었다.단 하나, 자신의 계획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그뿐이었다.목숨이든, 자존심이든, 사실 남설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놨다.이 모든 걸 끝낼 수만 있다면 그 아이를 따라가 배나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송우민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빛이 살짝 달라지더니 탁자 위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올리고 가볍게 웃었다.“참, 묘한 여자네.”“형님, 이렇게 그냥 보내버리면... 의뢰인한텐 뭐라 말하죠?”전기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송우민을 바라봤다.그러자 송우민은 그를 보며 마치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대꾸했다.“우리가 어떤 사람들인데? 그 사람한테 무슨 설명을 해? 그리고 말이야, 저 여자가 벌인 일은 지금 가리고 숨기기에도 벅찰 판인데 뭐? 되레 우리가 책임지라고?”“형님, 그래도 이건 좀... 규칙을 어기는 거 아닌가요?”전기태는 여전히 찝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처음 보는 여자 하나 때문에 평소의 원칙을 어기는 송우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돌아온 건 송우민의 싸늘한 시선과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든 커피잔뿐이었다.남설아는 카페에서 나온 순간까지도 이 모든 상황이 마치 꿈속 같았다.호텔에 돌아왔을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그녀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물속에 자신을 잠기게 했다.숨이 막힐 듯한 그 찰나의 순간을 지나 다시 물 위로 올라왔을 땐 감정이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몸을 닦지도 않은 채 그녀는 그대로 욕실 거울 앞에 섰다.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피멍이 든 자국들, 크고 작은 상처들이 온몸에 가득했다.“기억해. 오늘 이 모든 건... 다 서유라, 네가 만든 결과야.”남설아의 눈빛엔 차디찬 증오가 담겨 있었고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