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강연찬의 마음속은 죄책감과 긴장, 자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혹시라도 남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남설아는 살짝 강연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 사람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고 그 순간 가슴 한쪽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억울하고 서러움이 복받쳤다.혼자서 고통과 위험을 감내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강해져야만 했다.하지만 누군가 다가와 걱정해 주고 안아주는 순간, 간신히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이런 감정의 격차에 남설아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하지만 강연찬을 끌어안고 있자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배나은이 떠나던 날, 남설아는 이미 배서준에 대한 모든 사랑과 기대를 내려놨다.그리고 지금, 어린 시절 좋아했던 사람이 다시 돌아온 이 순간 자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여전히 헤어날 수 없이 사랑하고 있었고 여전히 그 마음을 제어할 수 없었다.“울지 마.”강연찬의 마음은 더더욱 찢어졌다.남설아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설아야, 이혼하자. 그 사람은 네가 붙잡을 가치도 없어.”남설아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배서준은 붙잡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하지만 아직 돌려받아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기에 여기서 멈출 수 없었고 끝까지 가야만 했다.“선배, 나 지금은 갈 수 없어.”“내 걸 다 찾아와야 해. 나은이가 그냥 허무하게 죽은 게 되면 안 돼.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남설아는 눈가가 붉게 물든 채 꼭 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강연찬을 바라봤다.상처 입은 토끼처럼 가엾고 순한 눈빛이었다.강연찬은 원래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모든 결심이 흐트러졌다.답답한 듯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너 진짜 왜 이렇게 고집이 세니. 이제 애까지 있는 사람이 예전보다 더 고집불통이 됐어.”“원래 난 이런 사람이잖아.”
“남설아 씨, 모르셨어요? 아이의 병은 유전성 골암이에요. 남은 시간이 길면 두 달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설아 씨 어머님도 이 병으로 돌아가셨죠. 제 생각엔 설아 씨도 정밀 검사를 받으시는 게 좋겠네요...”남설아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싶었다. 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고 몸이 멈출 수 없이 떨려왔다.“엄마, 왜 그래요?” 배나은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남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제가 사과할까요?”남설아는 병상 위 배나은의 깡마른 얼굴을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자신의 전부인 아이의 남은 시간이 겨우 두 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부모도 가족도 없었고 결혼 생활은 허울뿐이었다. 나은이는 그녀가 살아갈 유일한 이유였다.남설아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엄마는 슬프지 않아. 너무 행복해. 나은이가 곧 나을 테니까.”배나은의 눈이 빛났다. “정말이요? 너무 좋아요. 아빠는... 오늘 저 보러 올까요?”맑고 까만 눈에 살짝 기대가 스쳤지만 아이는 금세 고개를 떨궜다. 또 실망할까 봐 기대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 말은 남설아의 가슴을 더 무겁게 짓눌러 고통스럽게 했다.남설아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말했다. “올 거야. 엄마가 약속해. 오늘 아빠가 나은이 만나러 꼭 올 거야.”“정말이에요...?” 아이의 목소리는 불안했고 확신이 없이 되물었다. 남설아는 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나은이를 낳아준 엄마인 자신이 나은이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네 살짜리 아이는 어른들 사이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평범한 가족의 온기와 아주 조금의 아버지 사랑을 바랐을 뿐이다.그런데 아이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었다.“나은아, 엄마가 약속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꼭 아빠 데려올게. 생일 축하해.” 남설아는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배나은은 환하게 웃었다.남설아는
배서준은 서유라의 손을 바라보며 점점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그럼 딱 한 달이야. 남설아,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마. 네가 다른 속셈이라도 품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남설아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좋아요. 당신이 나은이랑 함께 있어 주기만 한다면, 전 뭐든지 협조할게요. 아버지로서, 최소한 생일 선물은 챙겨야 하지 않나요?”배나은은 남설아의 품에 안겨 있었고 차는 천천히 배 씨 저택을 향해 달렸다.“엄마, 아빠 정말 오는 거예요...?”배나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눈에 비친 간절함은 숨길 수 없었다.남설아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당연하지.”배나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럼 엄마, 아빠한테 제가 아픈 거 말하지 마요. 아빠가 속상해할까 봐요.”그 말을 들은 순간 남설아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는 조용히 아이의 잔머리를 쓰다듬었다.“알았어. 엄마가 약속할게.”배나은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남설아는 이해했다는 듯 손가락을 걸었다.“엄마가 우리 나은이랑 손가락을 걸고 약속할게.”배나은은 해맑게 웃었지만, 남설아의 시야는 점차 흐릿해졌다.그녀의 아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와 혈연으로 이어진 소중한 존재가 곧 떠날 것이다.아이가 떠나기 전에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행복한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었다.배 씨 저택에 도착하자, 집사는 두 사람의 짐을 받았다.“대표님은 안에 계시는가요?”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안에 계십니다.”그 말을 듣고 남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 후, 배서준이 이 집에 머문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은이가 아빠를 본 건, 대부분 TV 화면 속에서였다.남설아는 배나은의 손을 잡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멀리 소파에 앉아 있는 배서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배나은의 눈빛이 반짝였다. 남설아는 살며시 아이의 손을 놓으며 어깨를 두드렸다.“얼른 아빠한테 가.”배나은은 조심스럽게 아빠에게 다가갔다.
나은이는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를 정말 좋아하니까요. 아빠가 나은이를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엄마를 조금 더 좋아해 줄 수는 없나요? 앞으로 엄마한테 좀 더 잘해주실 수 있나요...?”아이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고 가벼웠다. 크고 또렷한 눈망울이 배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배서준의 눈빛이 흔들렸다.‘역시.’그는 남설아의 의도가 순수하게 아이 때문일 리 없다고 예상했었다.“그 말 네 엄마가 시킨 거야?”배서준의 목소리는 차갑고 그 속엔 냉기가 섞여 있었다.“아니에요!” 배나은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배서준은 쉽게 믿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배나은은 자신이 아빠를 화나게 한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사실 아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인어공주처럼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말이다. 엄마는 병이 나았다고 했지만, 나은이는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분명 심각하게 아팠다.그런데도 아이는 만약 자신이 거품이 되어 바다로 돌아가야 한다면 그 후에도 엄마가 사랑받기를 바랐다.배나은은 일어나 푹신한 카펫을 밟으며 작은 책장으로 갔다. 그리고 오래된 가죽 노트 하나를 꺼내 배서준에게 건넸다.“아빠, 엄마가 아빠를 정말 좋아해요. 여기 안에 그게 다 적혀 있어요.”배서준은 멈칫하며 나은이의 간절한 눈빛을 바라봤다. 그는 마지못해 그 오래된 노트를 받았다.“꼭 읽어보세요.” 나은은 해맑게 웃었다.배서준은 남설아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굳이 글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트를 펼칠 마음이 없었다.그저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그날 밤, 남설아가 따뜻한 우유를 가지고 오는 동안, 나은은 곧장 잠이 들었다.남설아는 조심스럽게 배서준을 방 밖으로 이끌었다. 문을 닫고 멀리 떨어지자 그녀가 말했다.“내일 아침에 직접 나은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세요. 손님방은 안 쓰셔도 돼요. 제가 잘 테니까요.”배서준은 그 말을 듣고 냉소를 지었다.“왜? 또 밤에 내
이 피드는 그녀를 차단하는 걸 잊은 게 분명했다.그녀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그 어떤 감정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어제 보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오늘은 서유라의 손에 쥐어진 걸 보니 그 빠른 처리 속도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그럴 만도 했다. 어차피 서유라는 배서준이 마음속에 가장 아끼는 사람이니까.남설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막 휴대폰을 끄려던 찰나,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설아야, 나 열흘 후에 귀국해.]프로필 사진은 새까맸고 이니셜 ‘kyc'가 적혀있었다..오랫동안 연락처 목록에 잠들어 있던 사람, 계산해보면 둘이 연락하지 않은 지도 벌써 6년이 흘렀다.남설아는 가라앉은 숨을 내쉬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후 4시 20분, 배서준은 무거운 회의에서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장우진의 알림이 없었더라면 배나은을 데리러 가야 한다는 걸 잊을 뻔했다.곧장 차량에 올라타 유치원으로 향했다.배서준은 피곤한 이마를 문지르며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빨리 가.”운전기사는 그 눈빛을 보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배서준은 아이를 데려다 남설아에게 맡긴 후 서유라의 집으로 갈 계획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침묵을 깨고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선명하게 ‘서유라'라는 세 글자가 떠 있었다.배서준은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유라는 울먹이며 말했다.“서준아, 짱아가 너무 아파. 지금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는데, 의사 선생님이 이번엔 정말 힘들 수 있다고...”짱아는 서유라가 키우는 강아지로 한때 배서준이 생일 선물로 준 아이였다.둘이 헤어진 뒤로도 짱아는 줄곧 서유라의 곁을 지키며 그녀가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데 큰 위안이 되어줬다.서유라에게 짱아는 둘 사이의 아이 같은 존재였다.배서준의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목소리는 평온했다.“걱정하지 마. 이따가 금방 갈게.”“아니야... 지금 빨리 와줘...”서유라의 목소리는 이미 완전히 무너져 있
“콜록, 콜록...” 배나은은 다시 한번 심하게 기침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침이 멈추지 않아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조그마한 몸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피를 한입 가득 토해냈다.“나은아!” 남설아의 목소리가 떨려왔고 그녀는 황급히 아이에게 다가갔다.배나은의 얼굴은 열기로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입술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엄마, 괜찮아요...”남설아는 서둘러 아이를 품에 안았다. “엄마가 병원에 데려갈게.”배나은은 작은 손으로 남설아의 옷자락을 꼭 잡았다. 이미 눈가가 새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혈액 검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배나은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엄마, 아빠는 저를 싫어하는 거예요...?”그 말을 듣는 순간, 남설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진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나은아, 아빠는 너를 싫어하는 게 아니야. 아빠가 싫어하는 건... 나야. 만약 네가 서유라의 아이로 태어났다면 지금쯤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했을 거야.’남설아는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은아. 아빠는 널 싫어하지 않아. 그냥 너무 바빠서 그래...”배나은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창백한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작은 손으로 엄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가 행복하면 돼요.”그 말에 남설아는 눈물이 무너질 뻔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눈물을 삼키고 오히려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 순간, 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의사 선생님!”남설아는 온몸이 굳었다. 두 모녀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그곳에는 여기 있을 리 없는 배서준이 서 있었다.그의 두 팔에는 또 다른 여자가 안겨 있었다. 서유라였다.배나은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빠.”그 한마디에 배서준의 눈길이 순간 흔들렸다. 그는 남설아와 배나은을 보며 잠시 멈칫했다.그 순간, 배서준의 품 안에 있던 서유라가 그의 소매를 꼭 잡았다.
“서준아, 설아 씨가 너랑 얘기하고 싶다니까 천천히 이야기해. 아이 앞에서는 싸우지 마.”서유라는 배서준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당기며 억울함을 꾹 눌러 담은 눈빛을 보냈지만, 여전히 이해심 많은 사람처럼 행동하려 애썼다.그 모습을 본 배서준은 살짝 불만스러워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으로 물러섰다.얼마나 오래된 일인지도 모를 만큼, 둘만의 시간이 이렇게 주어진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그래서인지 남설아는 한동안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배서준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에게는 이미 남설아에게 쏟을 인내심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대체 뭘 말하고 싶은데? 애를 데리고 이런 데까지 와서 소란을 피우다니, 엄마라는 사람이 이래도 돼?”그녀가 과거에 자신을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다는 생각에 심지어 그 수단으로 자기 아이까지 이용한다고 느껴져서 배서준은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당신이 나은이랑 한 달만 함께하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한 달 동안, 제발 서유라 씨는 나은이 앞에 나타나지 않게 해주세요.”남설아는 이제 배서준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없었다.그녀는 그저 딸이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길 바랄 뿐이었다.“난 나은이랑 한 달 같이 있겠다고 했지, 네가 뭘 요구하든 더 들어줄 생각은 없어. 넌 참 한결같다. 예전에도 더럽고 비열한 수법으로 내 침대에 기어들더니... 너만 아니었어도 난 누구의 아빠도 되지 않았을 거야!”배서준의 눈빛이 점점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그는 나은을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만 떠올려도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역시나 몇 년이 흘러도 그는 끝내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그날 밤은 정말 의도치 않은 사고였고 남설아조차 왜 그 방에 있었는지, 왜 그의 침대에 누워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그런데 그렇게 하루 만에 나은을 품에 안게 되었을 때, 남설아는 그저 하늘이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 여겼다.하지만 지금...나은의 병약한 모습을 떠올리면 그녀는 가슴이 무너
온 병원이 배나은 때문에 소란스러웠다.그런데 남설아는 마치 머릿속이 텅 빈 듯했다.들리는 건 발소리와 사람들의 외침뿐, 눈앞에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남설아 씨? 괜찮으세요?”의사가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온 듯 남설아는 멍하니 의사를 바라봤다.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모든 이성이 한꺼번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제 딸... 어떻게 됐나요?”“일단 상태는 안정시켰습니다. 그런데 병세가 급격히 악화해서 지금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 우선은 ICU에 입원시켜서 안정될 때까지 지켜보고 그 이후에 수술할 수 있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남설아 씨, 지금 아이의 상태로 봐서는 수술은...”의사는 말을 흐렸다.굳이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남설아는 이해했다.수술은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컸다. 그저 아이의 몸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었다.그런데도,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단 1%의 가능성이라도 자신의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어떤 희망도 놓고 싶지 않았다.“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는 순간, 눈물이 예고도 없이 터졌다.그녀는 다급히 손으로 눈물을 닦았지만 닦을수록 더 쏟아졌다.결국 복도에 주저앉아, 온몸을 웅크리고 자신을 꼭 끌어안았다.이 순간, 그녀는 절망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깊고 아픈지 뼛속까지 깨달았다.위생복을 입고 중환자실에 들어간 남설아는 나은이의 침대 옆에 앉았다.나은이의 얼굴은 창백했고 온몸에는 수많은 튜브와 기계들이 연결돼 있었다.그런데도 느껴졌다. 그녀의 소중한 딸의 생명이 손끝에서 조용히 흘러나가는 듯했다.“나은아, 미안해. 다 엄마가 잘못했어. 엄마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아이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지난 일들이 스쳐 갔다. 만약 자신이 배서준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은이는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태어나지 않았을까?이렇게 착하고
지금 강연찬의 마음속은 죄책감과 긴장, 자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혹시라도 남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남설아는 살짝 강연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 사람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고 그 순간 가슴 한쪽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억울하고 서러움이 복받쳤다.혼자서 고통과 위험을 감내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강해져야만 했다.하지만 누군가 다가와 걱정해 주고 안아주는 순간, 간신히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이런 감정의 격차에 남설아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하지만 강연찬을 끌어안고 있자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배나은이 떠나던 날, 남설아는 이미 배서준에 대한 모든 사랑과 기대를 내려놨다.그리고 지금, 어린 시절 좋아했던 사람이 다시 돌아온 이 순간 자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여전히 헤어날 수 없이 사랑하고 있었고 여전히 그 마음을 제어할 수 없었다.“울지 마.”강연찬의 마음은 더더욱 찢어졌다.남설아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설아야, 이혼하자. 그 사람은 네가 붙잡을 가치도 없어.”남설아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배서준은 붙잡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하지만 아직 돌려받아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기에 여기서 멈출 수 없었고 끝까지 가야만 했다.“선배, 나 지금은 갈 수 없어.”“내 걸 다 찾아와야 해. 나은이가 그냥 허무하게 죽은 게 되면 안 돼.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남설아는 눈가가 붉게 물든 채 꼭 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강연찬을 바라봤다.상처 입은 토끼처럼 가엾고 순한 눈빛이었다.강연찬은 원래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모든 결심이 흐트러졌다.답답한 듯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너 진짜 왜 이렇게 고집이 세니. 이제 애까지 있는 사람이 예전보다 더 고집불통이 됐어.”“원래 난 이런 사람이잖아.”
예전 같았으면 배서준이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하면 남설아는 며칠이고 기분이 좋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남설아는 이런 다정함이 그저 역겹기만 했다.가볍게 웃은 남설아는 조용히 손을 뻗어 배서준의 목을 감쌌다.배서준은 그 동작이 자신에게 순순히 응한 것이라 착각해 흐뭇하게 웃었다. 눈빛에도 여유와 자만이 가득했다.“남설아, 넌 역시 똑똑하네. 적당할 때 멈출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지.”그 순간 남설아는 그의 목을 세차게 물어버렸다. 거의 온몸의 힘을 다 실은 듯 입 안 가득 쇠 맛이 번졌다.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 배서준은 남설아를 거칠게 밀쳐냈다.그런데 남설아의 등 뒤는 기술팀 출입문이었고 그 충격에 유리문이 산산이 부서지며 남설아는 그 조각들 위로 쓰러졌다. 등이 유리에 찔려 피가 흘러내렸다.“남 팀장님!”한원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피 웅덩이에 쓰러진 남설아에게 달려왔다.“괜찮으세요? 대표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기술팀 직원들도 놀라 달려왔고 이내 누군가가 급히 구급차를 불렀다.남설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을 때 등에선 피가 멈추지 않았고 옷은 이미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배서준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조롱이 담겨 있었고 얼굴엔 싸늘한 웃음이 있었다.남설아가 실려 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배서준은 무의식적으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은 어둡게 굳어 있었다.마음속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꿈틀거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서준아, 목이 왜 그래? 피나잖아!”“어디 좀 봐!”서유라는 남설아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 대신 배서준의 목에서 피가 나는 걸 보고는 다급히 달려왔다.“설아 씨가 너무 심했어!”“서준아, 우리도 병원 가자!”서유라는 배서준의 팔을 잡고 병원으로 가자며 서둘렀다.두 사람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배서준은 처음으로 뭔가 몹시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예전엔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그런 관계가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요즘 들어 무언가가
남설아는 눈앞에서 분노로 가득 찬 배서준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처음 기술팀으로 보내겠다고 한 건 당신이었어요. 근데 지금 와서 여기서 이 난리에요? 안 창피해요? 우리 문제를 회사에서 해결하겠다는 거예요?”“남 팀장, 밖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서준이 앞에서 이렇게 떳떳하게 굴 수 있어?”서유라는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마치 타이르듯이 덧붙였다.“사실 서준이는 그렇게 따지는 사람 아니야. 그냥 사과 한마디면... 용서해줄 수 있어, 그치? 서준아?”남설아는 도무지 이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앞에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에 차가운 눈빛으로 서유라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여기서 제일 입 다물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쪽이야.”“너...!”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남설아를 노려봤다.남편 앞에서, 그것도 정면에서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이 더 통하지 않겠다 판단한 서유라는 곧바로 배서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그럼 두 사람 얘기해. 난 나갈게. 서준아, 너무 흥분하지 마. 남 팀장도 그냥 기분 좀 상해서 그러는 거니까 천천히 얘기해.”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마치 모든 걸 이해하고 감싸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남설아를 보고 조용히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이런 연극을 남설아는 지난 몇 년간 수도 없이 봐왔다.처음에는 억울하고 속이 뒤집혔지만 지금은 그냥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처음엔 괴로웠으나 이제는 우스웠다.“남설아, 이쯤 됐으면 그만해도 되지 않겠어? 언제까지 이딴 식으로 굴 건데?”“혹시 네가 이러면 내가 너한테 관심이나 줄 거라고 생각해? 사랑이라도 하게 될 것 같아?”배서준은 팔짱을 낀 채 위압적인 자세로 남설아를 내려다봤다.그의 눈엔 여전히 과거 자신에게 집착하던 그 못난 여자가 보일 뿐이었다.그저 눈치 빠르고 집요한 여자, 그런데 지금은 거기에 독기까지 더해졌다고 생각했다.그 말에 남설아는 참지 못하고 결국 ‘하하하’ 하고 세 번이나 웃어버렸다.너무
“지금 뭐 하는 거예요?”남설아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이를 꽉 물고 배서준을 날카롭게 노려봤다.“남설아, 넌 아직도 배씨 가문 사모님이야. 그런데 밖에서 저렇게 질질 웃으며 남자들한테 들러붙어? 창피한 줄은 알아야지!”배서준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그가 이렇게까지 격하게 분노하는 모습을 본 한원준은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대표님, 그런 게 아닙니다. 저희가 남 팀장님께 드리려고 깜짝 이벤트 준비한 거였어요. 남 팀장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어요.”“닥쳐.”배서준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한원준을 노려봤다.그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고 사나웠다.그 기세에 눌린 한원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남설아를 염려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남설아는 그의 손을 확 뿌리치고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이건 그냥 회사 동료들하고의 정상적인 인사일 뿐이야. 당신 말처럼 들러붙는다느니 뻔뻔하다느니, 그런 말 나올 일이 아니라고요.”여기는 회사였다.남설아는 이곳에서 더 이상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창피한 꼴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하지만 오늘 배서준은 완전히 이성을 놓은 사람처럼 체면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았다.“남설아, 넌 역시 수를 잘 쓴다니까. 봐, 기술팀 전체가 네 발밑에 꿇고 있잖아. 인정할 수밖에 없지, 대단하긴 해.”“서준 씨, 정신에 문제 있으면 병원 가요. 혹시 돈 없어서 못 가는 거예요?”남설아는 고개를 돌리고는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그때 서유라가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난처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남 팀장, 이제 그만하지. 서준이 이미 다 알아. 남 팀장이랑 강 대표님 사이 일, 더는 숨길 수 없어.”‘강 대표님? 연찬 선배?’그 말을 들은 남설아는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나랑 연찬 선배는 서로 깨끗해. 당신들이랑은 다르다고. 두 사람은 이미
천주 쪽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고 남설아는 아직 처리해야 할 다른 일들이 많았다.배서준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남설아는 신경 쓰지 않았고 바로 항공권을 예매해 돌아갈 준비를 했다.한편, 배서준은 몇 장의 사진을 전달받았다.사진 속에는 남설아와 강연찬이 함께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 그리고 남설아가 강연찬을 배웅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손에 들린 사진을 꽉 움켜쥔 채 배서준은 이를 악물었다.지금껏 남설아를 마음에 둔 적도, 눈에 넣은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지금 법적으로 배씨 가문 사모님이었다. 이런 행동은 명백히 부적절했다.게다가 이건 그를 정면으로 모욕하는 짓이었다.“서준아, 왜 그래?”서유라는 그런 배서준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와 그의 소매를 살며시 당겼다.“이제 우리도 짐 싸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우연히 배서준 손에 들린 사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이, 이게 뭐야? 이건... 남 팀장이랑 강 대표님? 왜 저 사람들이 같이 호텔에 간 거야?”“닥쳐.”배서준은 사진을 전부 걷어 들이더니 차가운 시선으로 서유라를 노려봤다.배서준에게 있어 이 일은 말 그대로 치욕이었다.절대 누구에게도 알려선 안 되는 일이었고 그 대상이 서유라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서유라는 놀란 얼굴로 배서준을 바라보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연신 사과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그녀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배서준은 얼른 그녀의 두 손을 붙잡았다.“됐어, 됐어. 너한테 뭐라 한 거 아니야. 잘못한 거 없어. 넌 아무 잘못 없어, 알았지?”“서준아... 나 뭐든 다 할게. 제발... 날 버리지 마. 부탁이야.”서유라는 울먹이며 배서준의 팔에 매달렸고 이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배서준이 가장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이렇게 절대 자신을 떠나지 않겠다
호텔에 돌아온 후, 강연찬은 망설임 없이 곧장 남설아의 방으로 들어왔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남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아까 그 사람 누구야?”“송우민이야.”“오늘 나 그 사람한테 납치당했어. 그러다 협력하게 된 거고 그게 다야.”남설아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실을 말하는 남설아의 모습에 강연찬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송우민은 정말 위험한 인물이야. 될 수 있으면 멀리해야 해.”“그건 당연히 나도 알아. 근데 지금은 멀어지려 해도 이미 늦은 것 같아. 그 사람은 절대 날 놓아주지 않을 거야.”“선배가 나 위해서 애쓰고 있다는 거 알아. 우리 목표도 같다는 것도 알아. 근데 우리는 가는 길이 달라.”남설아는 예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타이밍을 놓쳐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연찬의 맞은편에 서서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선배, 미안해. 앞으로 우린 함께 갈 수 없을 것 같아.”그 말에 강연찬은 심장이 쿡쿡 쑤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 내 잘못인 거 알아. 그때 내가 다시 선택할 수 있었다면 너 혼자 두고 떠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거야.”그 시절의 기억은 사실 남설아에게도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하지만 다시 만나고 나니 그 시절의 감정들이 마치 파도처럼 마음속을 뒤덮었다.그렇지만 파도는 결국엔 밀려 나간다. 언제나처럼 잠시뿐인 감정이었다.그녀는 강연찬을 바라보며 마치 자신의 한 시절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남설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선배, 그때 선배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잘못된 사람을 선택한 건 나였지. 근데 걱정 마, 이제는 다시는 그런 실수 안 할 거야.”그녀는 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더니 고개를 돌려 강연찬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나는 여전히 배씨 가문 사
비록 아주 약한 슬픔이었지만 그 감정은 남설아가 가까스로 쌓아 올린 단단한 마음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남설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더 이상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이곳을 떠나려 돌아섰다. 하지만 막 고개를 돌린 순간 두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 둘은 술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렸고 얼굴에는 탐욕스럽고 음흉한 웃음이 가득했다.남설아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가방 안에 있던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냈다.“당신들, 뭐 하자는 거예요?”“뭐 하긴? 하하, 남자가 여자를 봤는데 뭘 하겠어?”“아가씨, 꽤 예쁘네.”두 남자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낄낄 웃었다. 그 웃음은 듣는 이의 소름을 돋게 만들 만큼 야비하고 불쾌했다.남설아는 이들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리자 강한 혐오감이 올라왔다. 하여 주저하지 않고 스프레이를 꺼내 정면으로 뿌려버리고는 반응을 볼 틈도 없이 등을 돌려 전속력으로 달렸다.하지만 몇 발자국 채 뛰지 못해 누군가의 단단한 가슴팍에 세게 부딪쳤다. 그런데 상대는 밀쳐내는 대신 오히려 그녀를 품 안에 안아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리더니 뒤따라오던 남자 하나를 발로 거세게 걷어찼다.“꺼져.”그 목소리 남설아는 꿈에서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그 음침한 눈빛이 마주했다.남설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송우민의 품에서 벗어나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우민 씨 덕분이에요.”“내가 너보다 한 살 어리거든? 굳이 우민 씨라고 안 불러도 돼.”송우민이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잘생긴 얼굴인데 눈빛이 지나치게 날카롭고 음울해서 원래의 부드러운 인상이 깨져버렸다. 오히려 보는 사람의 속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그런 그를 바라보며 남설아는 다소 민망하게 말했다.“근데 우민이라고 부르면 좀 이상하잖아요...”“그냥 송우민이라고 불러.”송우민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낮에는 간신히 목숨 부지하더니 밤엔 이런 데까지 나올 여유가 생겼네? 멘탈이 내 생각보다 훨
“아아악!!”서유라가 비명을 지르며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을 마구 집어 던지고 부수기 시작했다.거칠게 날뛰던 그녀는 급기야 자기 팔을 긋기 시작했고 여러 군데서 피가 철철 흘렀다.곧장 호텔 직원들이 옆방 투숙객의 항의 전화를 받고 달려왔는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하나같이 혼비백산했다.직원들은 급히 배서준에게 연락을 시도했다.한편 배서준은 어렵게 시간을 내 천주에 와 있었고 여러 사람들과 인맥을 쌓기 위해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잔이 오가며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마시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서유라 이름이 뜬 화면을 본 배서준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배 대표님, 드디어 받으셨네요. 유라 씨가 지금 미쳐 날뛰고 있어요. 빨리 와서 처리 좀 해주세요!”그 말에 배서준의 얼굴이 확 변했고 그는 결국 잔을 내려놓고 급히 자리를 떴다.조성우는 그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고 마음속으로는 남설아가 너무 안됐다 싶었다.배서준이 떠나자 조성우는 바로 강연찬에게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강연찬은 남설아를 데리고 그 자리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걸 본 조성우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남설아를 바라봤다.“설아 씨는 여기 웬일이에요?”그 말에 남설아는 이 자리가 자신에게 예정된 자리가 아니었단 걸 눈치챘고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어색한 침묵 끝에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억지로 끌려왔다고 하면... 믿을래요?”“친구들끼리 모여서 얘기 좀 하는 게 뭐 어때서요.”강연찬은 남설아의 손을 끌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하지만 남설아는 그의 손을 조용히 뿌리치며 진지하게 말했다.“오빠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배서준과 어떤 사이든 간에 지금 난 법적으로 그 사람의 아내야. 밖에선 모두가 날 사모님이라 부른다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오빠랑 얽히는 건 나도 싫고 오빠에게도 민폐야.”그 말을 끝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남설아는 알고 있었다. 강연찬은 그녀의 앞날을 위
송우민은 남설아의 슬픔을 느끼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그의 뜻밖의 너그러운 태도에 남설아는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지금 이 세상 모두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에겐 상관없었다.단 하나, 자신의 계획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그뿐이었다.목숨이든, 자존심이든, 사실 남설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놨다.이 모든 걸 끝낼 수만 있다면 그 아이를 따라가 배나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송우민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빛이 살짝 달라지더니 탁자 위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올리고 가볍게 웃었다.“참, 묘한 여자네.”“형님, 이렇게 그냥 보내버리면... 의뢰인한텐 뭐라 말하죠?”전기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송우민을 바라봤다.그러자 송우민은 그를 보며 마치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대꾸했다.“우리가 어떤 사람들인데? 그 사람한테 무슨 설명을 해? 그리고 말이야, 저 여자가 벌인 일은 지금 가리고 숨기기에도 벅찰 판인데 뭐? 되레 우리가 책임지라고?”“형님, 그래도 이건 좀... 규칙을 어기는 거 아닌가요?”전기태는 여전히 찝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처음 보는 여자 하나 때문에 평소의 원칙을 어기는 송우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돌아온 건 송우민의 싸늘한 시선과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든 커피잔뿐이었다.남설아는 카페에서 나온 순간까지도 이 모든 상황이 마치 꿈속 같았다.호텔에 돌아왔을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그녀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물속에 자신을 잠기게 했다.숨이 막힐 듯한 그 찰나의 순간을 지나 다시 물 위로 올라왔을 땐 감정이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몸을 닦지도 않은 채 그녀는 그대로 욕실 거울 앞에 섰다.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피멍이 든 자국들, 크고 작은 상처들이 온몸에 가득했다.“기억해. 오늘 이 모든 건... 다 서유라, 네가 만든 결과야.”남설아의 눈빛엔 차디찬 증오가 담겨 있었고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