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7화

작가: 목련청
온 병원이 배나은 때문에 소란스러웠다.

그런데 남설아는 마치 머릿속이 텅 빈 듯했다.

들리는 건 발소리와 사람들의 외침뿐, 눈앞에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남설아 씨? 괜찮으세요?”

의사가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온 듯 남설아는 멍하니 의사를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모든 이성이 한꺼번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제 딸... 어떻게 됐나요?”

“일단 상태는 안정시켰습니다. 그런데 병세가 급격히 악화해서 지금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 우선은 ICU에 입원시켜서 안정될 때까지 지켜보고 그 이후에 수술할 수 있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남설아 씨, 지금 아이의 상태로 봐서는 수술은...”

의사는 말을 흐렸다.

굳이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남설아는 이해했다.

수술은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컸다. 그저 아이의 몸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자신의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어떤 희망도 놓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의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는 순간, 눈물이 예고도 없이 터졌다.

그녀는 다급히 손으로 눈물을 닦았지만 닦을수록 더 쏟아졌다.

결국 복도에 주저앉아, 온몸을 웅크리고 자신을 꼭 끌어안았다.

이 순간, 그녀는 절망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깊고 아픈지 뼛속까지 깨달았다.

위생복을 입고 중환자실에 들어간 남설아는 나은이의 침대 옆에 앉았다.

나은이의 얼굴은 창백했고 온몸에는 수많은 튜브와 기계들이 연결돼 있었다.

그런데도 느껴졌다. 그녀의 소중한 딸의 생명이 손끝에서 조용히 흘러나가는 듯했다.

“나은아, 미안해. 다 엄마가 잘못했어. 엄마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아이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지난 일들이 스쳐 갔다. 만약 자신이 배서준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은이는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태어나지 않았을까?

이렇게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분명 아빠가 아껴주고 소중히 했을 텐데.

자신이 잘못된 사람을 사랑했기에 아이의 짧은 인생조차 이렇게 가혹하게 흘러가 버렸다.

나은이의 손을 꼭 쥔 채, 그녀의 가슴은 한없이 무너졌다.

아이의 작은 몸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녀의 모든 감각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망설이다가,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어렵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ICU에서 나와 복도에 섰을 때, 그녀 앞에는 깔끔하게 정장 차림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를 보는 순간, 남설아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배서준 회사의 법무팀에서 가장 뛰어난 변호사, 방찬혁이었다.

“방 변호사님, 무슨 일이시죠?”

남설아는 목소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대표님께서 이혼 조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전에 남설아 씨가 제안했던 황당한 거래는 법적으로 무효라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합니다. 이제 그 거래는 폐기될 예정입니다.”

방찬혁은 준비해온 이혼 서류를 서류 가방에서 꺼내 건넸다.

“대표님께서 전하신 말씀은, 이혼 조건은 다시 논의할 수 있지만... 남설아 씨께서 더 이상 헛된 집착을 하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겁니다.”

‘헛된 집착?'

그 말을 듣는 순간, 남설아는 웃음이 나왔다.

아주 작은, 비웃음 같은 웃음이었다.

그래, 그녀는 헛된 집착을 해왔다. 그 집착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난리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배서준을 사랑한 일은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이고 재앙이었다.

“가서 전해 주세요. 그 조건 말고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요.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계속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어요. 저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남설아는 싸늘하게 웃으며 변호사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방찬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지막 설득을 시도했다.

“남설아 씨, 이렇게 하셔도 아무 의미 없습니다.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대표님이 제시한 조건은 충분히 좋은 겁니다. 사랑 없는 결혼은 의미가 없어요.”

방찬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간곡한 목소리로 설득을 이어갔다.

그렇다. 세상 사람들 눈에 남설아는 자업자득이었다.

배서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남설아는 이제 그 사랑에 미련이 없었다.

그저 나은의 마지막 순간에 단 한 조각 아빠의 사랑이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게 설령 거짓이고 연극 같은 사랑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면 그 작은 소망조차 이루기 어려워 보였다.

“제 입장은 확실합니다. 죄송하지만 전 더 이상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차갑게 말을 남긴 채 남설아는 다시 중환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은이는 여전히 생과 사의 경계에 놓여있는데 그 아이의 아빠라는 사람은 오직 자유만을 원했다.

그의 세상엔 서유라뿐이었다.

자신과 아이, 둘을 합쳐도 서유라 하나만큼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남설아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는 울면서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와중에 변호사는 바로 상황을 배서준에게 보고했다.

“그럴 줄 알았어. 저 여자가 순순히 물러설 리 없지.”

배서준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 속에선 싫증과 혐오가 넘쳐흘렀다.

바로 그때, 장우진이 들어왔다.

“대표님, 남도일이 또 나타났습니다. 아마 남설아 씨에게 돈을 뜯으려고 온 것 같습니다.”

“돈? 어림도 없지.”

배서준은 차갑게 웃으며 지시를 내렸다.

“당장 남설아의 카드를 전부 정지시켜. 돈 한 푼 없이 바닥을 기어봐야 정신 차리지.”

그는 마치 저녁 메뉴를 고르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결국 허영심 많은 여자니까 돈이 사라지면 스스로 포기하고 이혼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 여자에게 배서준은 단 한 톨의 동정도 없었다.

그 사이 나은이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하였다.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바로 수술하지 않으면, 오늘 밤 넘기기 어려울 겁니다.”

“수술해 주세요.”

남설아는 망설이지도 않고 소리쳤다. 비록 수술해도 나은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엄마로서 아이가 죽어가는 걸 그대로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수술비를 내려고 카드를 꺼냈을 때 모든 카드가 정지된 걸 알게 되었다.

결국 그녀가 가진 전 재산은 혹시 몰라서 챙겨둔 400만 원의 현금뿐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건 배서준의 복수였다.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 자신을 벌주기 위해 아픈 아이를 인질로 삼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도 없었다.

지금은 나은을 살려야 했다.

남설아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꺼내 배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 한 번만, 딸을 살릴 기회를 달라고 빌고 싶었다.

한편, 저 멀리 도심의 밤하늘에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터져 올랐다.

배서준은 서유라를 품에 안은 채,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서준아, 너무 예쁘다. 고마워.”

서유라는 행복하게 웃으며 그에게 기댔다.

그 미소는 꽃잎처럼 빛나고 있었다.

“기념일 축하해.”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의 눈에는 사랑과 온기가 가득했다.

그때,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순간, 배서준의 얼굴엔 짜증이 스쳤다.

그는 전화를 끊고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

핸드폰에서는 무정한 기계음만 흘러나왔다.

남설아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절망에 빠져 나은이의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나은이는 피를 토하며 힘겹게 숨을 쉬었다. 작은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런데도 나은은 떨리는 손으로 엄마의 얼굴을 만지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엄마, 울지 마. 엄마, 우리는 아빠 필요 없어. 엄마 행복해야 해.”

나은이는 작은 손으로 산소마스크를 벗어 엄마한테 마지막 얘기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작은 손은 끝내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그 순간, 병실 가득 모니터의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관련 챕터

  • 굿바이 쓰레기   제8화

    “나은아!”남설아는 비명을 지르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눈물이 멈출 수 없이 쏟아졌고 가슴이 뭔가에 꽉 막힌 듯 답답해져 숨쉬기조차 힘들었다.그녀는 알았다.나은이가 떠났다.세상에 잠시 왔다가 이 세상을 보고 결국 실망한 채 하늘로 돌아갔다.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돌아갔다.“나은아,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남설아는 아이의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차가워진 나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고 떨리는 입술로 수없이 입을 맞추며 사죄했다.모든 게 자기 잘못이었다.무리하게 배서준에게 매달린 것도 아이에게 이런 고통을 준 것도 모두 다 자신 때문이었다. 그런 자신이 나은의 엄마가 될 자격이 없었다.나은이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추슬렀다. 직접 아이의 몸을 씻기고 나은이 가장 좋아하던 분홍색 공주 드레스로 갈아입혔다.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내주고 싶었다.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모두가 작은 천사 같던 나은을 정말 아꼈기에 이 갑작스러운 이별이 믿기지 않았다.그런데 정작 남설아는 더 이상 울지도 않았다.눈물조차 말라버린 듯한 얼굴로 울고 있는 간호사들을 오히려 다독였다.“그동안 나은이를 잘 돌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설아 씨... 괜찮으신 거예요?”간호사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떤 엄마가 아이를 잃고도 이렇게 담담하게 웃을 수 있을까.그 모습이 오히려 더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 후, 남설아는 남은 마지막 현금 400만 원으로 분홍색 유골함을 샀다. 나은이 가장 좋아했던 색이었다. 이게 그녀가 나은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나은의 유골함을 품에 안고 그녀는 온기가 사라진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의 물건을 정리하고 모든 걸 정리한 뒤 조용히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그런데 집 앞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마주쳤다.남설아의 인생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모든 비극의 시작점인 사

  • 굿바이 쓰레기   제9화

    “유라야, 너 어디야? 무슨 일이야?”“배서준, 네가 내 조카를 그렇게 괴롭혔다며? 내가 널 쉽게 놔줄 것 같아? 네가 그렇게 아끼는 그 여자는 죽게 될 거야!”남도일의 목소리는 전화기 너머로 날카롭고 잔인하게 울렸다.“헛소리하지 마!”배서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평소엔 늘 차가운 그였지만 서유라와 관련된 일에서는 두려움과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살리고 싶으면 당장 와.”남도일은 이 한마디를 내뱉고 전화를 끊어버렸다.곧장 휴대폰으로 주소가 전송되었고 그는 곧바로 서유라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다 너 때문이야. 뻔뻔한 불륜녀 주제에 남의 가정을 망쳐놓고도 당당해?”“아, 아니야. 내가 먼저 서준이랑 사귄 거야.”서유라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애썼다.하지만 남도일은 배서준이 아니었다.그에게는 동정심 같은 건 없었다.남설아가 이혼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그렇게 되면 자신 역시 아무런 이득도 볼 수 없다는 걸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그는 분노를 참지 않고 서유라의 뺨을 거칠게 내리쳤다.“합법적으로 부부인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 게 사랑이야? 너 같은 더러운 계집애는 맞아야 정신 차리지.”“날 때렸어? 당신 가만 안 둘 거야! 배서준이 널 가만 안 둘 거라고!”서유라는 고통에 얼굴을 감싸 쥐었지만 이내 독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협박했다.하지만 남도일은 이제 막다른 길에 선 사람이었다.그런 위협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으며 그녀가 울면서 애원할 때까지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한편, 남설아는 조용히 아이의 물건들과 자신의 짐을 정리했다.사실 이 결혼은 진작 끝냈어야 했다.아이까지 떠난 마당에 더 이상 붙잡을 이유는 없었다.나은이가 마지막까지 자신을 걱정했다는 걸 떠올리며, 남설아는 이를 악물었다.‘반드시 살아야 해. 그래야 나은이에게 부끄럽지 않지...’마지막으로 몇 년 동안 살던 집을 돌아봤다.그들이 남긴 물건이 사라지자, 집은 오히려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이었다.그 순간,

  • 굿바이 쓰레기   제10화

    그 웃음 한 번에 배서준은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무언가 중요한 것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서준아, 설아 씨가 정말로 이혼에 동의했어. 사인도 끝났어.”서유라는 이혼 서류를 확인하더니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에 배서준은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놀란 얼굴로 서류를 얼른 낚아챘다.‘속임수일 줄 알았는데, 정말 사인했다고?’서류 끝에 휘갈겨진 낯익은 서명이 그렇게도 눈에 거슬릴 줄은 몰랐다. 그녀가 정말로 이렇게 쉽게 포기해버린 걸까?“배서준, 넌 정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20억을 최대한 빨리 보내.”남도일은 서로를 껴안은 두 사람을 보며 혐오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그는 비웃음을 흘리며 거침없이 자리를 떠났다.오랜 시간 바라던 결말이었는데도 배서준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그리고 그 허전함 속에서 서서히 화가 끓어올랐다.“잘 됐다, 서준아! 이제 자유야! 우리 이제 정말 함께할 수 있어.”서유라는 눈물을 흘리며 배서준을 꼭 껴안았다.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했다.앞으로는 누구도 그녀에게 불륜녀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을 것이다.“일단 병원부터 가자.”하지만 배서준은 기대했던 해방감 대신 알 수 없는 불쾌함에 사로잡혔다.그녀가 정말 떠난다니 왜 이토록 찝찝한 걸까?그 답답함이 그를 짜증 나게 했고 결국 그는 그 감정을 서유라에게 그대로 쏟아냈다.그녀를 번쩍 들어 아무 말 없이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서유라는 배서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그의 작은 표정 변화만 봐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그는 분명 복잡한 심경에 휩싸여 있었고 그 안에 기쁨은 한 조각도 없었다.“서준아, 너 기쁘지 않아?”“기뻐.”그는 서유라를 안은 채 몇 번이고 기쁘다고 되뇌었다.하지만 그 말이 진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날 밤, 배서준은 평소와 달리 스스로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예전엔 그가 집에 늦게 들어

  • 굿바이 쓰레기   제11화

    ‘장례식장?’배서준은 그 단어들을 듣자마자 아무 생각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요즘 사기 전화가 이렇게까지 뻔뻔해졌나? 장례식장 직원인 척까지 하다니, 진짜 끝도 없군! 나은이는 멀쩡한데 장례식장은 무슨 장례식장이야?’하지만 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배나은 보호자님, 장례식장에서 연락 드립니다. 아이의 사망진단서와 화장 절차를 빨리 진행해 주시길 바랍니다.”상대방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배서준이 폭발하기 직전,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마지막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했다. 이젠 정말 참을 수 없었다.‘남설아, 그 여자는 진짜 미쳤어!’‘유혹하고 싶어서 뭐든 할 수 있는 건가? 제 딸이 죽었다고까지 거짓말을 하다니, 대체 세상에 어떤 엄마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지?’“서준아.”바로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서유라가 서 있었다.막 분노로 눈이 붉어질 정도였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그 눈빛 속 불길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유라는 배서준의 화난 기색을 단번에 알아챘다. 한숨을 쉬며 다가와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또 설아 씨가 장난친 거야? 내가 대신 설명해줄까?”“그럴 필요 없어.”배서준은 냉소를 터트렸다.“방금 장례식장에서 전화가 왔어. 나은이가 죽었다고. 당장 와서 절차 밟으래.”그는 핸드폰을 대충 옆으로 던지며 눈빛에 조소를 가득 담았다.‘진짜 별의별 수를 다 쓰는군. 날 유혹하려고, 관심을 끌려고, 이제는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지어낸다? 심지어 집을 나간 것도 계획적인 연출이라니.’처음엔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사람 취급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뭐라고?”서유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커다란 눈동자에는 충격이 가득했다.“설아 씨가 그런 장난을 쳤다고? 너무 심하잖아! 아이가 얼마나 어린데...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어?”“서준아, 설아 씨랑 제대로 이

  • 굿바이 쓰레기   제12화

    “서준아, 그래도 설아 씨한테 가서 한 번 봐. 정말로 무슨 일이 난 거면 어쩌려고?”서유라는 한숨을 쉬며 배서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마치 참고 또 참는 듯한, 억울하지만 인내하는 표정이었다.배서준이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게 바로 그녀가 억울해하는 모습이었다. 때문에 지금 이 말을 듣자 마음속 분노가 더욱 치솟았다.“내가 거기 가는 순간, 그 여자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거야. 한번 두고 볼 거야. 내가 없으면 그 연극을 어떻게 끝낼 건지.”차갑게 비웃은 뒤 그는 바로 서유라를 끌어안았다.“그 여자도 너처럼 착하기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이 말을 들었지만 서유라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고 그저 겉으로만 얌전히 배서준의 가슴에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너무 화내지 마. 어쨌든 설아 씨도 배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자리를 너무 아끼니까 그래. 조금은 이해해줘야지.”어느새 촉촉해진 눈가로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하지만 너희는 이미 이혼했잖아... 대체 언제까지 이러려는 걸까?”이혼.그 단어가 배서준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얼굴빛이 순간적으로 변하더니 그는 팔을 거두고 한 손으로 셔츠 단추 두 개를 풀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서유라는 평소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다정한지 알고 있었다.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던 남자였다.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이렇게 냉랭한 얼굴을 한 채 침묵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대체 왜 이렇게까지 감정이 흔들리는 거지? 심지어 나조차 모르게 이 감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고 있잖아.’“서준아... 괜찮아?”“별거 아니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순식간에 배서준은 다시 다정한 얼굴로 돌아왔다.속에서 꿈틀대던 모든 감정을 애써 억누른 채 말이다.‘그 여자는 사라졌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일 아닌가?’이제야 드디어 자유를 찾았는데 기분 좋게 한 끼 정도는 먹으면서 축하해야 마땅했다.‘근데 왜지?’현관을 나서려는 순간, 텅 빈 집을 바라보니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그리고 설명할 수

  • 굿바이 쓰레기   제13화

    아침에 눈을 떠보니 또다시 눈물로 젖어 있는 베개가 보였다.눈이 퉁퉁 부은 채로 남설아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켰다.그동안 너무 힘들어서 바깥세상과 단절하고 싶어 전원을 꺼둔 상태였다. 핸드폰을 켜자마자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장례식장에서 보내온 절차 진행 요청 문자였다.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배나은의 유골은 이미 안치했지만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절차와 서류가 남아 있다는 것을.“그래, 이걸 다 끝내면... 나도 여길 떠날 수 있겠지.”“나은아, 엄마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남설아는 가슴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꼭 쥐었다.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그동안 노력했다. 너무 슬퍼하지 않으려 애썼다.마지막 순간까지도 배나은은 엄마가 슬퍼할까 봐 걱정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었다.아이를 생각하는 순간, 배나은을 떠올리는 순간,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작고 여린 아이가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남설아는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서류에 사인하고 도장을 찍는 모든 과정이 기계적으로 진행됐다.“부모라는 사람들이 너무 무책임하네. 아이의 마지막 가는 길인데 신경 좀 써줄 수도 없나?”“책임질 각오도 안 됐으면 애초에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지. 아빠야 그렇다 쳐도 엄마까지 이러면 어쩌라는 거야?”장례식장 직원이 옆에서 툭툭 내뱉었다.며칠 동안 보호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를 안 받거나 아예 끊어버리기 일쑤였다.심지어 한 번은 한 남자가 전화를 받더니 미친 듯이 화를 내고 막말을 퍼붓기까지 했다.우리 같은 노동자들이 뭘 잘못했나?왜 부모라는 사람들이 아이 일조차 제대로 신경 쓰지 않는 거야?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과연 사랑받았을까?어쩌면 평소에도 방치됐던 게 아닐까?그래서 이렇게 어린 나이에 떠난 거 아닐까?여러 비난이 난무했지만 남설아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대신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아이 아빠한테도 연락을 했다

  • 굿바이 쓰레기   제14화

    그 외의 것들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너무 많이 울어서일까 남설아의 눈이 쓰리고 아팠다.장례식장을 나서자 따스한 햇살이 그녀의 온몸을 비췄다.그 순간에서야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실감했다.하늘을 올려다보았다.햇살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그런데도 결국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나은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우리 나은이... 내 딸...”가슴에 걸린 펜던트를 두 손으로 꼭 감싸 쥔 채 남설아는 길가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아무리 스스로 다짐해도, 아무리 아이가 바라던 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다그쳐도, 버틸 수가 없었다.그녀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울다 지쳐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질 즈음에서야 겨우 일어나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그녀가 향한 곳은 오래된 본가였다.고작 20평도 안 되는 작은 집, 이것이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녀에게 남겨준 유일한 유산이었다.배씨 가문 저택의 화장실보다도 작은 공간이지만 여기가 그녀의 집이었다.유일한 ‘집’ 이었다.하지만 가까스로 도착한 집 앞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과 마주쳤다.그녀가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배서준은 이미 반나절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발밑에는 꺼진 담배꽁초들이 흩어져 있었다.그녀가 나타나자 그는 거칠게 걸어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팔을 움켜잡았다.“너한테 돈을 얼마나 줬는데 내 딸을 이런 데서 살게 해?”“남설아, 대체 이게 엄마란 인간이 할 짓이냐? 너 같은 게 엄마 자격이나 있긴 해?”예전이라면 이런 질책은 두 사람 사이의 일상적인 대화였다.그를 사랑했기에, 남설아는 언제나 참고 또 참았다.하지만 이제는 다 끝났다.아이도 없고 사랑도 없고 남은 것도 없는데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그녀는 그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그러고는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차갑게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엄마 자

  • 굿바이 쓰레기   제15화

    남설아는 이제 눈앞의 이 남자를 한 번만 더 바라보는 것도 역겨웠다.더 이상 쳐다보는 것조차 배나은에 대한 모욕이었다.그녀는 배서준이 말없이 서 있는 틈을 타 곧바로 집으로 들어갔다.그리고 문을 있는 힘껏 닫아버렸다.쾅!닫힌 문이 덜컥거렸다.그 짧은 순간 남설아의 시선은 테이블 위로 향했다.거기에는 흑백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배나은의 얼굴이 놓여 있었다.그건 그녀가 5월 5일, 어린이날에 찍어준 사진이었다.그날 배나은은 유치원에서 공연을 했고 좋은 성적을 받아서 무척이나 기뻐했다.그래서 저렇게 활짝 웃었던 것이다.남설아는 일부러 그 사진을 골랐다.딸이 언제나 이렇게 환하게 웃으며 행복하길 바랐으니 말이다.“나은아.”남설아는 문을 등지고 주저앉았다.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울음은 참아지지 않았다.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남설아, 네가 무슨 속셈을 꾸미든 상관없지만 나은이는 내 딸이야! 함부로 욕되게 하지 마!”“그리고 양육권? 장난하지 마. 네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보자. 배건 그룹의 법무팀이 어떤 수준인지 너도 잘 알잖아?”문밖에서는 배서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이를 악물고 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예전 같았으면 남설아는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을 것이다.하지만 배나은도 이 세상에 없는 마당에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양육권? 법정 공방?그 모든 게 허무할 뿐이었다.곧이어 수제 가죽 구두가 시멘트 바닥을 밟으며 멀어져 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불협화음 같은 소리가 남설아의 신경을 긁었다.힘겹게 몸을 일으켰다.배나은이 떠난 후, 그녀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온 머릿속에는 오직 딸아이의 모습뿐이었다.비틀거리며 소파로 다가가 사진을 조심스럽게 손에 들었다.그러고는 부드럽고도 애틋하게 입을 맞췄다.“나은아, 엄마... 이제 여기서 떠날 거야.”“걱정하지 마. 너랑 한 약속 꼭 지킬게. 엄마 열심히 살 거야. 너를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할 거야.”눈물방울이

최신 챕터

  • 굿바이 쓰레기   제40화

    남설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서류를 받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강연찬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걸 어떻게 알고 있었어?”“나 원래 이쪽 일 했잖아. 이런 정보 찾는 건 어렵지 않아.”강연찬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외식용 도시락을 열었다.이렇게 뻔뻔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남설아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이제는 제법 성숙하고 듬직해졌지만 여전히 어딘가 어린애 같은 면이 남아 있었다.“하늘이 무너져도 밥은 먹어야지. 일단 먹자. 먹고 나서 천천히 이야기하자.”그는 젓가락을 내밀며 웃었다.이 며칠 동안 강연찬은 늘 남설아 곁을 지켰다. 그의 배려는 마치 스며드는 이슬처럼 조용하고 은은했지만 남설아는 그 섬세한 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가 건네는 젓가락을 바라보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들을 보며, 남설아의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예전엔 자신이 집에서 배서준을 기다리고 그를 챙기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배서준은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밥을 먹었는지 신경 쓴 적이 있었던가?사랑과 무관심은 확연히 드러나는 법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심지어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못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고마워.”남설아는 살짝 미소를 짓고 젓가락을 받아들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한 입 먹자마자 그녀는 이 음식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코끝이 살짝 시큰해지며 조용히 물었다.“이거... 학교 식당 밥이야?”“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억하네?”강연찬이 웃으며 말했다.“역시 넌 똑똑해.”남설아는 어이가 없어 웃으며 솔직히 말했다.“이렇게 맛없는 걸 어떻게 잊어?”학교 식당 음식이 원래 맛있을 리 없었고 그들이 다녔던 대학은 특히나 더 심했다. 솔직히 말해 그땐 하루에도 몇 번씩 불평했었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다시 먹어보니 음식 맛은 그대로인데 정작 변한 건 그녀 자신이었다.어느새 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심지어 이 맛마저 익숙하고 애틋하게 느껴졌다.그러나 몇 입을 더 먹던 남설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음식을 뱉고

  • 굿바이 쓰레기   제39화

    서유라는 배서준과 결혼하면 그야말로 평생 안락한 삶이 보장될 줄 알았다.하지만 이렇게 중간에 뜻밖의 변수가 등장할 줄이야!‘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서유라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처음부터 배건 그룹이 배서준 손에 없는 줄 알았다면 그를 유혹할 게 아니라 남설아를 꼬셨을 것이었다.‘그토록 애써 손에 넣은 결과가 고작 빈 껍데기라니.’배서준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유라야, 지금 기분은 어때?”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눈빛 속엔 질문이 섞여 있었다.서유라는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늘 그래왔듯 빠르게 감정을 정리하고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서준아, 난 괜찮아. 제발... 제발 더 이상 설아 씨랑 싸우지 마.”“설아 씨는 항상 말한 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잖아. 네가 날 위해 너무 많은 걸 잃게 될까 봐 걱정돼.”그 말이 떨어지자 배서준의 표정이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바로 이거였다.그는 여자가 자신의 말에 따르고 의존하는 걸 좋아했다.그가 원하는 건 강한 여자가 아니라 순종적인 여자였다.배서준은 곧장 서유라를 품에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그깟 주식 몇 개 있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회사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지금까지 빨래하고 밥하는 것밖에 할 줄 몰랐던 여자가 회사에서 뭘 할 수 있겠어?”그에게 남설아는 집안일을 해주는 기계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이제 와서 무슨 능력이 있다고 주식 운운하는지 우스울 뿐이었다.이상한 점을 느껴왔기에 배서준은 오래전부터 대비책을 세워두고 있었다.그 말에 서유라는 안심하며 더욱 그의 품에 매달렸다.“서준아,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그냥 이렇게 너랑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바보야, 우린 이미 함께 있잖아.”배서준은 만족스러운 듯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병원을 나선 남설아의 눈빛은 전보다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그냥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그렇게 한다면 나은이의 죽음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배서준이 이미

  • 굿바이 쓰레기   제38화

    남설아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예전엔 부부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제 각자의 길을 가야 할 상황에서 모든 걸 확실하게 정리해야 했다.배서준은 눈앞의 여자가 낯설게만 느껴졌다.예전에는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들고 한 장 한 장 살펴보자 그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졌다.“이럴 리가 없어!”“돈에 눈이 멀더니 결국 이런 짓까지 서슴지 않는 거야? 감히 서류를 위조하다니!”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손을 뻗어 남설아의 목을 움켜잡았다.눈빛에는 분노와 위협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남설아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배건 그룹 법무팀의 수준이 어떤지는 서준 씨가 더 잘 알 텐데요?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당신이랑 부부로 지낸 세월이 있으니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생각은 없지만 받아야 할 건 확실히 받아야겠어요.”남설아는 단호하게 그의 손을 쳐냈다.한때는 그가 그렇게도 멋져 보였다.잘생기고 키 크고 능력까지 뛰어난 남자였으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보니 그 모든 겉모습 아래에는 썩어 문드러진 정신이 도사리고 있었다.진절머리가 났다.‘어떻게 이런 인간을 사랑했던 걸까?’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역시 사랑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남설아, 이런 짓을 한다고 내가 다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해?”비웃음을 터트린 배서준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바닥에 내던졌다.“설령 이 서류가 진짜라고 해도 그게 뭐?”“이 꼴을 하고서 대체 뭘 할 수 있는데? 네가 무슨 수로 날 이기겠다는 거야? 주제도 모르고 지분을 운운하다니, 꿈도 참 크다.”새장 속의 새인, 자신이 가둬둔 여자가 감히 하늘을 날겠다고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처럼 보였다.경멸하는 듯한 뻔뻔한 태도가 확실했다.그리고 그제야 남설아는 완전히 깨달았다.이 남자의 눈에 자신은 그저 배씨 가문의 온실 속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힘없는

  • 굿바이 쓰레기   제37화

    서유라는 배서준의 목에 팔을 감고 조용히 속삭였다.“이게 다 서준이 너를 위해서야. 만약 그 여자가 꼼수를 부려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안 찍으면 어쩌려고?”“서준아, 우리 여기까지 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내가 너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정말 싫어.”말을 하던 서유라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사실 나도 알아.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떳떳한 건 아니라는 거.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널 떠나고 싶지 않고 떠날 수도 없어.”울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경련까지 일어났다.배서준은 그녀의 상태를 보자마자 긴장하며 발걸음을 재촉해 병원으로 향했다.곧바로 그는 최고의 전문의를 불러 서유라를 진찰하게 했다.“대표님, 서유라 씨의 정서가 최근에 상당히 불안정합니다. 우울증이 재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이미 신체 증상까지 나타나고 있는데 이대로 두면 예전처럼 악화될 겁니다. 서유라 씨가 안정될 수 있도록 대표님께서 방법을 찾아보셔야 합니다.”의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보았다.그 말을 듣자 배서준의 얼굴빛이 미묘하게 변했다.서유라의 감정이 왜 이렇게 불안정한지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남설아를 반드시 오게 하라고 지시했다.하지만 이미 이혼한 상태였으니 당연히 남설아가 협조할 리 없었다.비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 성격 잘 아시잖아요. 안 가시면 또 난리가 날 겁니다.”그렇다. 배서준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오직 자신의 입장만 생각할 뿐 타인의 감정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남설아는 처음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떠오르는 그 계약서가 그녀의 마음을 바꿔놓았다.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요. 그렇게까지 보고 싶다면 가 줘야죠. 다만 나중에 후회만 하지 않으면 좋겠네요.”더 이상 이런 일로 감정이 흔들릴 줄 몰랐지만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니 예상보다 더 쓰라렸다.여러 명의 전문가들이 서유라 한 사람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리고 배

  • 굿바이 쓰레기   제36화

    서유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남설아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고 가까이 다가섰다.“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나랑 비교해? 도대체 네가 뭐라고!”“나랑 서준이는 천생연분이야. 그쪽은 그냥 침대에 기어오른 천한 년일 뿐이야. 그쪽이 낳은 딸도 마찬가지고!”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참을 필요조차 없었다.남설아는 온몸의 힘을 담아 서유라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서 머리카락을 거칠게 틀어쥐고 그녀의 머리를 배나은의 사진 앞에 힘껏 박아버렸다.“아악! 남설아, 감히 날 때려?”“놔! 당장 놔!”서유라는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남설아는 그녀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감정을 품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엄마가 분노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서유라는 끝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남설아는 머리채를 세차게 잡아당긴 채 서유라의 무릎을 걷어찼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뒷목을 단단히 눌러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았다.뭐든 말할 수 있지만 나은이만큼은 절대 입에 올려선 안 된다.“미쳤어? 미친년!”서유라는 세 번이나 이마를 바닥에 세게 부딪친 끝에야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그대로 되갚아주려 했지만 남설아가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내가 떠났다고 해서 네가 배서준의 아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과연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몰랐나 본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알아? 배건 그룹의 51% 지분이 아직도 내 거라는 걸 알고는 있니?”이건 결혼 당시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긴 보장이었다. 남설아는 배서준을 사랑했기에 한 번도 이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관계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원래라면 배씨 가문의 재산 따위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은이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서유라는 배서준을 믿고 남의 아이 앞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었다.참을 수 없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이 파렴치한 남녀는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악랄했다.한 명은 위기에

  • 굿바이 쓰레기   제35화

    강연찬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그저 잠시 해외로 연수를 다녀온 것뿐인데 그사이에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질 줄 말이다.외국에 있을 때, 남설아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소식을 들고 그는 정말 한동안 술에 절어 살았다.애초에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왠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지금은 그 이야기를 이어갈 때가 아니었다.“일단은 쉬어. 지금 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있어. 며칠 푹 쉬고 컨디션이 좀 나아지면 나 찾아와. 그때 내가 직접 회사로 데려가서 입사 절차 밟게 해줄게.”강연찬은 가볍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손길은 따뜻했고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남설아는 그 모습에 가슴 깊숙이 작은 불씨 하나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희망이라는 불씨 말이다.하지만 그 불씨는 금세 사그라졌다.‘나에게 그런 걸 꿈꿀 자격이 있을까?’그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남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돌아서서 낡은 집으로 들어가며 남설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며 문득 생각했다.애초에 자신은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배서준과도 같은 세계에서 살아온 적 없었고 강연찬과는 더더욱 아니었다.우연한 계기로 배서준과 결혼하고 배나은을 낳았지만 결국 모든 걸 잃었다.이제 모든 게 끝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혼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남설아는 손을 뻗어 고쳐 붙인 사진을 꺼냈다.그러고는 부모님의 영정 옆에 조심스럽게 배나은의 사진을 놓았다.사진 속 나은이는 여전히 밝게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를 짓는 작은 생명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었다.조금이라도 쉬려 했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이 시간에 누가 찾아올 리 없는데.’남설아는 짜증 섞인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리고 곧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마주했다.서유라였다.그녀는 허락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 굿바이 쓰레기   제34화

    강연찬은 문 앞에 서서 남설아의 초라하고 불안한 모습을 바라보았다.주먹을 꽉 쥔 손끝이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한없이 어두웠다.그때, 단 한 순간의 선택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 줄은 몰랐다.그저 잠시 떠나 있는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힘든 일을 겪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만약 그때 알았더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국내에 남아도 충분히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세상에 후회에 해당되는 약은 없었다.강연찬은 묵묵히 핸드폰을 꺼내 장례식장과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며 배나은의 마지막 길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갔다.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남설아는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아이의 장례를 직접 준비하고 싶었다.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방 한가득 놓여 있는 종이로 만든 장난감들을 보고 남설아는 멍해졌다.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강연찬을 바라보았다.“이건?”“나은이가 핑크색 좋아하잖아. 그래서 준비했어.”“이렇게 함께 있으면 나은이도 덜 외롭고 무서워하지 않을 거야.”강연찬은 그녀 곁에 서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목소리는 한없이 따뜻하고 조용했다.퇴원하기 전, 남설아는 배서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배나은을 위해서라도 그가 마지막으로 한번쯤은 와주길 바랐다.하지만 해가 지고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가 오지 않는다는 현실이 마지막까지 확인되고서야 남설아의 가슴은 깊이 가라앉았다.사진 속 나은이를 바라보며 그녀는 조용히 입을 뗐다.“나은아... 미안해. 다음 생에는 좀 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해. 부디 이런 사람을 아빠로 고르지 마.”“엄마는 열심히 살아볼게. 그러니까, 나은아... 천천히 가.”목소리는 끝내 떨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그 자리에 주저앉아 남설아는 끝없이 눈물을 쏟아냈다.오늘이 지나면 정말로 이 세상에 배나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작 세 살, 너무나 짧았던 생이었다.하지만 그 짧은 시간조차 나은이는 온전히 행복하지 못

  • 굿바이 쓰레기   제33화

    “나 괜찮아!”남설아는 다급하게 말했다.‘고작 뼈에 금이 간 것뿐인데 무슨 휴식이 필요하다는 거야?’하지만 강연찬은 그녀의 말을 단숨에 무시하고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몸조리 잘해.”강압적인 듯하면서도 따뜻한 태도였다. 몇 년 전과 다르지 않은 듯했지만 또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몇 년 동안 떨어져 있었는데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그간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서로의 호흡은 여전히 척척 맞았다.“잠깐 쉬고 있어. 뭐 좀 먹을 걸 가져올게.”강연찬은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방을 나섰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남설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따뜻함이 스며들었다.바로 그때, 문이 열리고 서도현이 들어왔다.그는 남설아를 내려다보며 얼굴에 역겨움을 숨기지도 않았다.“남설아, 넌 진짜 천하에 둘도 없는 천박한 여자야. 그렇게까지 남자가 필요해? 솔직히 말해줄까? 형은 네가 낳은 그 계집애가 병에 걸린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근데 그 애가 나약하고 재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신경도 안 쓴 거야. 그런 쓰레기 같은 애는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서도현의 말이 가시처럼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심장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산산조각이 난 기분이었다.남설아는 이를 악물며 깊이 숨을 들이켰다.“헛소리하지 마!”“헛소리? 현실을 부정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한 가지 확실히 해줄까? 형은 네가 낳은 그 더러운 애한테 눈곱만큼도 관심 없었어.”“그 애가 쓴 일기며 남긴 물건들? 다 쓰레기통에 버렸어.”“그래도 우리 누나가 착해서 네 편 들어준다고 그걸 주워왔지. 너도 부끄러움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우리 누나한테서 떨어져.”이 말과 함께 서도현은 메고 있던 가방을 그대로 남설아에게 던졌다.충격이 전해졌지만 아픔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급히 가방을 열어 확인하자 정말로 그 안에는 나은이의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표지는 잉크 자국이 얼룩져 있었다.쓰레기통에서 건져냈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 굿바이 쓰레기   제32화

    이건 노골적인 협박이었다.남설아는 배서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입 밖으로 낸 말은 반드시 실행하는 인간이었다.그렇기에 바로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서며 강연찬 앞을 가로막았다.“그만해요! 이 사람한테 손대지 마요!”“명령하는 거야? 남설아, 네가?”배서준이 비웃듯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이 여자가 자기 앞에서 다른 남자를 감싸고 도는 모습이 너무나도 거슬렸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배서준 씨, 우리 문제예요. 제발 다른 사람 끌어들이지 마요!”“우리 문제라는 거 알면 됐어.”배서준은 냉소를 지으며 강연찬과 남설아를 훑어보았다.날카로운 눈빛이 두 사람을 베듯 스쳐 가더니 그는 갑자기 강연찬의 어깨를 세게 밀치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남설아는 곧장 강연찬을 돌아보며 다급하게 말했다.“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선배가 위험해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난 저 사람 안 무서워.”강연찬이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그는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참이었다.하지만 외국에서 연구하며 여러 개의 특허를 획득했고 이미 자기만의 기반을 닦아놓은 상태였다.배서준이 원하는 걸 빼앗아 갈 수는 있어도 그가 가진 특허까지 뺏을 수는 없었다.“아니야, 선배. 배서준은 냉혈한이야. 자기 친자식조차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이라고. 난... 선배를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그러니까 우린... 다시는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남설아는 고개를 떨구고 억지로 말을 내뱉었다.그러나 강연찬은 마치 듣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네 삼촌, 손가락 하나 잘리고 감옥에 갔어. 3, 5년은 못 나올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장례식장 쪽에서 연락이 왔어. 나은이 장례 일정 정해야 한다고. 날짜 정하면 내가 준비할게.”남설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단 하루, 단 하룻밤 잤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거지?’“선배,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