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차가운 심장이라도 따뜻한 온기로 녹여주면 언젠가는 변할 줄 알았다, 그래서 민여진은 박진성의 꼭두각시 아내로 2년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 끝은 차디찬 이혼서류 한 장이었다. “걔가 일어났어. 그 아이 대용이었던 넌 이제 필요 없어졌어.” 민여진에게는 마음을 전혀 내어주지 않던 그가 돌아온 건 오로지 민여진을 제 첫사랑 대신 감옥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감옥에서 갖은 고초를 당한 민여진은 배 속의 아이도 잃고 얼굴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한 채 실명까지 당해버렸다. 그녀는 악몽 같았던 짧디짧은 두 달을 버텨내며 박진성에 대한 마음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2년 뒤, 민여진은 박진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길을 걷다가 우연히 그를 보게 되었다. 첫사랑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할 그가 웬일인지 민여진을 보자마자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박진성은 자신이 이러면 민여진이 전처럼 다시 저를 봐줄 줄 알았는데 그녀의 눈에서는 더 이상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다. “민여진, 어떻게 해야 다시 나한테 돌아올 거야? 말만 하면 내가 뭐든 다 들어줄게!” “2년 전엔 당신이 준 구리반지도 아까워서 잘 못 꼈는데, 이젠 아니에요. 당신이 뭘 준대도 난 안 돌아가요.”
View More“난 할 말 없어.”민여진은 입술 끝을 억지로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할 말이 없는 거야, 아니면 들통나서 더 이상 거짓말을 못 하겠는 거야?”박진성은 다시 물었다.“말해. 그날 누가 민영미가 죽었다고 말했어?”문채연이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CCTV를 피해서 민여진을 만났다는 건, 분명 그녀의 마음을 흔들려는 의도였다...박진성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민여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방현수지? 그 자식이 돌아왔어?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려고!”“무슨 소리야?”민여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현수 씨랑 무슨 상관인데?”“방현수가 아니라면 네가 왜 그렇게 숨기려 들었겠어? 채연을 모함하면서도 그 사람의 행방은 끝까지 감추려 했겠냐고!”박진성은 점점 더 확신했다. 다른 도시에 있다고 해도 방현수가 몰래 돌아왔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는 민여진이 절망에 빠지고 우리 사이가 망가지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다시 민여진을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방현수가 널 만나러 왔지? 너희 둘이 무슨 짓을 했어?”박진성은 술김에 탁자 위에 민여진을 밀어붙이고 그 나름의 처벌을 가했다.다음 날 아침, 민여진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 몸에는 담요가 덮여 있었지만 온몸이 차가웠다.어젯밤 일을 떠올리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박진성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모든 것을 방현수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민여진 씨, 일어나셨어요? 아침 식사가 다 식었는데 데워 드릴까요?”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침부터 거실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민여진은 몸에 덮인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이거 서원 씨가 덮어 준 거예요?”“네.”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별말씀을요. 신경 쓰지 마세요.”서원은 주방으로 향했다. 민여진은 자신의 옷을 만지작거렸다. 그나마 박진성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적어도 옷매무새는 단정하게 해 줘서 서원 앞에서 망신당하지는 않았으니까.물론 이미 숱하게 망신을 당했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박진성은 차가운 눈으로 민여진을 쏘아보며 말했다.“이제 남이 시켜야 움직인다 이거야? 민여진, 넌 나한테 부탁할 일이 있잖아. 내 비위를 맞추는 게 네가 지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아니겠어?”그의 원망 섞인 말에 민여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나한테 묻는 거야? 내가 술 마셨을 때 네가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 안 나?”민여진은 그제야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 심호흡을 한 뒤 손을 뻗어 박진성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그리고 그의 턱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넥타이를 풀었다.셔츠 단추를 몇 개 푸니 박진성의 숨소리가 조금은 편안해졌다. 민여진은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관자놀이를 살살 눌러 주었다. 술 마셔서 머리 아플 테니 조금이라도 풀어주려는 마음이었다.그러나 박진성은 평소처럼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무표정한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얼굴에 마음이 드러난다는 말, 예전엔 안 믿었는데 이젠 네 얼굴을 보면 딱 알겠어.”민여진의 손길이 멈칫했다. 박진성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네 말을 믿고 채연이를 의심했지.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고 조사까지 했어. 넌 입만 열면 거짓말인데 내가 또 속아 넘어가다니, 내가 미친놈이지.”그는 민여진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을 잡고 거칠게 물었다.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거야?”아마도 너무 아파서였을까. 민여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무슨 소리야? 조사 다 했어?”“그날 채연이가 백화점에 있었던 CCTV 영상까지 확인했어. 그래도 부족해?”박진성이 손에 힘을 주는 순간, 민여진은 그대로 무너져 그의 품에 떨어졌다. 그는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고 핏발 선 눈으로 쏘아붙였다.“채연이는 그렇게 멀리에 있었는데도 넌 누명을 뒤집어씌웠잖아! 네 마음이 얼마나 악독하면 그래? 채연이가 얼마나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날 봤는지 알아?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군. 내가 널 믿고 채
그런데도 민여진은 악랄한 본성을 버리지 못했다. 자신도 바보 같았다. 그 말을 듣고 문채연을 의심하다니.박진성은 차가운 얼굴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때 옆으로 한 여자가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저기, 혼자예요?”“꺼져.”박진성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잘생기면 다야...”그 말에 여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자리를 떴다.시간이 늦어지자 상우가 다가와 물었다.“대표님, 이제 그만 가시죠?”“어딜 가?”박진성은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와서 같이 마셔.”상우는 박진성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이렇게 술을 마시는 날이면 항상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상우는 정중하게 거절했다.“저는 운전해야 합니다.”박진성은 억지로 권하지 않고 술을 더욱 맹렬하게 마셨다. 몇 병을 비우자 그의 얼굴색이 변하고 눈빛이 흐려졌다.상우는 재빨리 계산하고 박진성을 부축해 차에 태웠다.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그는 박진성을 거실 소파에 앉히고 물었다.“대표님, 물 좀 드릴까요?”박진성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바라보다가 숨을 몰아쉬고는 2층에 있는 민여진의 방을 바라보았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그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예전에는 그가 술에 취하면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걱정하며 자신을 돌봐 주었는데 이제는 얼굴조차 비추지 않다니.“민여진, 당장 내려오라고 해!”상우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2층으로 올라가 민여진의 방문을 두드렸다.한참 후,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리더니 민여진이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피곤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상우가 대답했다.“대표님이 오늘 좀 많이 취하셨습니다.”민여진은 술 냄새를 맡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우가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상우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민여진 씨가 내려와서 돌봐 드리길 바라십니다.”민여진은 놀란 눈으로 상우를 바라보았다. 상우 역시 어이가
“어쩌다...”문채연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더니 다급하게 물었다.“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민여진 씨 괜찮아요? 어떻게 그런 일로 뛰어내리려고...”“구했어.”“다행이네요...”문채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뭔가 생각난 듯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박진성을 바라보았다.“진성 씨, 그런데 왜 저한테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제가 어제 어디에 갔었는지까지 묻고... 설마 제가 민여진 씨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줬다고 의심하는 거예요?”박진성은 침묵하자 문채연의 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민여진 씨가 그랬어요? 제가 말했다고요?”“아니야.”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그냥 물어본 것뿐이야.”문채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민여진 편들지 마세요. 민여진이 먼저 말하지 않았으면 저를 의심했겠어요? 그리고 진성 씨, 저 정말 서운해요. 어떻게 제가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 강아지 때문인가요?”“맞아요! 인정해요! 그 가정부가 한 짓, 반은 내가 시킨 거예요. 하지만 그 개가 그렇게 죽을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설사 내가 시켰다고 해도 그게 잘못된 거예요? 민여진이 날 모함해서 죽을 뻔하게 만들었고 내 다리도 망가뜨렸어요. 그런데 이제 당신까지 뺏어가려고 하는데! 내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돼요? 당신을 그 여자한테 순순히 넘겨야 하냐고요!”문채연은 흐느끼며 서럽게 울었다.억울하게 우는 그녀를 보며 박진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채연아...”“아란아, 어제 내가 쓴 영수증들 다 가져와!”문채연은 눈물을 닦으며 지시했다. 가정부가 영수증을 가져오자 문채연은 그것을 박진성에게 건넸다.“이게 어제 오전부터 오후까지 쓴 영수증들이에요. 시간이 다 나와 있으니까 확인해 보세요. 내가 있던 곳에서 당신 별장까지는 차로 왕복 두 시간이 걸려요. 내가 별장에 갔었는지 이 영수증들이 증명해 줄 거예요.”박진성은 영수증을 들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문채연은 더 이상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위층으
그녀는 더 이상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도, 마음도 없었다. 오직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진성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화난 얼굴을 들이밀었다.“민여진, 네가 거짓말할 때 다 티 나는 거 알아? 너 자꾸 이렇게 말 안 들으면 민영미 못 만나게 할 거야!”민여진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결국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박진성, 내가 사실대로 말하면 내 말 믿을 거야?”그 말에 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또 무슨 잔꾀를 부리려는 거야? 네가 진실을 말한다면 내가 왜 못 믿겠어?”“문채연이야.”민여진은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박진성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조하며 말을 이었다.“어제 문채연이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어. 그래서 내가 그렇게 흥분했던 거고 심지어 죽겠다고까지 했던 거야...”박진성은 깊은 눈으로 민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거짓말을 꾸며낸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잠시 침묵하던 민여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내 말 안 믿어도 괜찮아.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하지만 박진성은 그 일이 결코 지나간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민영미는 이미 죽었고 그는 보름 안에 민여진을 안심시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모든 것이 다 이 일 때문이었다.‘정말 문채연이 그런 짓을 했을까? 그녀가 정말 그렇게 잔인하게 진실을 털어놓았단 말인가? 누구든 그 일이 민여진과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을 텐데.’그는 아무 대답 없이 돌아서서 나갔다. 회사로 가던 중 그가 갑자기 말했다.“회사 말고 채연이네 집으로 가.”운전기사는 곧바로 차를 돌렸다. 십여 분쯤 달려 도착한 집 앞에는 이미 가정부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문채
“이젠... 안 그럴 거야...”민여진은 빨갛게 부어오른 손을 감싸 쥐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살아야지. 살아야 어머니를 만날 수 있으니까...”그 말에 박진성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그는 넥타이를 매려고 했지만 초조함에 제대로 맬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민여진을 잡아당겨 그녀의 손에 넥타이를 쥐여주었다.“매 줘.”민여진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넥타이를 받아들었다. 오랜만이었지만 능숙한 손길로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박진성의 아내로서 부족함 없이 행동하기 위해 매일같이 연습했던 덕분이었다.그러나 박진성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박진성은 단지 화제를 돌리려고 민여진에게 넥타이를 매달라고 했을 뿐인데 그녀가 너무나 능숙하게 넥타이를 매는 모습에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잘 매네. 방현수가 손수 가르쳐 줬나 보지? 그 촌구석 의사가 양복 입을 일이 뭐가 있다고.”갑작스럽게 방현수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가슴이 아팠지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박진성은 재빨리 그녀의 턱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다그쳤다.“벙어리야? 말해!”“뭘 말하라는 거야?”민여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현수 씨랑 무슨 상관인데? 그는 이미 이 도시를 떠났잖아...”이미 떠난 사람인데 박진성은 언제까지 틈만 나면 방현수를 언급하며 비아냥거릴 것인지...“떠났다고 해서 예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잖아!”박진성은 깔끔하게 매어진 자신의 넥타이를 보며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며 민여진을 노려보았다.“이거 누가 가르쳐 줬냐고!”“혼자 배웠어...”박진성은 코웃음 쳤다.“눈도 안 보이는 게 혼자 배웠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예전에 당신이 넥타이 매는 걸 보고 배웠어.”그녀는 전에 그의 넥타이를 가져다가 가정부의 목에 걸고 연습했었다. 언젠가 그에게 넥타이를 매어 줄 날을 꿈꾸면서.그토록 바라던 날이 왔지만 박진성은 냉소적인 말만 쏟아냈고 그녀의 마음은 더
모두 민영미에 대한 이야기였다.박진성은 오래전부터 민영미가 민여진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민영미는 민여진 때문에 병을 얻었고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딸을 부양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도 재가하지 않았다.민여진은 전에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진성 씨, 당신은 내 마음속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사람이야.”그때 마음이 초조했던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충 물었다.“그럼 첫 번째는 누군데?”“당연히 우리 어머니지!”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그가 질투하는 줄 알고 허둥지둥 변명했다. “오해하지 마!”“내가 뭘 오해한다는 거야?”민여진은 다시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어머니는 날 위해서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셨어. 어머니가 단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다면 난 죽어도 좋아.”그때의 민여진은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고 민영미가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민영미는 그녀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존재였다.그런 민영미의 죽음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박진성은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비겁하다고 해도 좋고 치졸하다고 해도 좋았다. 그러니 이 거짓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지되어야만 했다.하지만 보름 안에 무슨 핑계를 대야 할까?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극심한 피로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후유증으로 박진성은 탈진 상태였다. 그는 차라리 민여진을 품에 안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의외로 다음 날 오후에야 깨어난 박진성은 반사적으로 품 안을 확인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그의 가슴에 기댄 여자의 얼굴은 더 이상 창백하지 않았다. 병색이 완연한 붉은 기가 뺨에 어려 있었고 불안한 듯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얕은 숨을 내쉬는 그녀의 모습에 박진성은 잠시 멍해졌다.지난 2년간 그들이 함께 잠에서 깨어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하고 그리운 감정이 들었다.그때, 민여진이 멍한 눈으로
강태화도 달려와 민여진의 이마를 짚어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다급하게 말했다.“방으로 옮겨야겠어요! 몸이 약해서 감기 든 것 같습니다.”박진성은 민여진을 안아들고 방으로 내려가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 에어컨을 켜주었다. 그녀의 체온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조금 가셨다.이제 남은 건 의사인 강태화에게 맡기면 되었다.박진성은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왔다. 서원은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박진성을 보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그는 고개를 숙인 채 복잡한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민여진 씨 어머니... 정말 살아 계신 건가요?”박진성은 차갑게 그를 쏘아보며 무언의 경고를 보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서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민여진 씨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지 않다면 이건 영원히 유지될 수 없는 거짓말입니다. 민여진 씨에게 차라리 짧고 굵게 아픈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짧고 굵게?”박진성은 주먹으로 벽에 걸린 그림을 내리쳐 산산조각 내며 이를 갈았다.“말이 쉽지. 민여진 상태 못 봤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민여진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민여진의 눈에 가득했던 고통과 절망, 세상에 대한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채 죽음을 향해 뛰어들던 그 순간을 떠올리자 그는 이 끔찍한 거짓말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그는 민여진이 다시 자살을 시도하는 걸 볼 수 없었다. 방금 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그 느낌을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네 입이나 잘 간수해.. 네가 뭘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잘 생각하라고. 알겠어?”박진성은 차갑게 경고했다. 민여진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서원은 여기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서원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강태화가 방문을 열고 나와보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이때 박진성이 물었다.“상태는 어때?”“별로 좋지 않습니다
“살아 있어야 희망이 있다고?”민여진에게 그 말은 엄청난 조롱처럼 들렸다.그녀는 늘 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그 결과는 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뿐이었다.“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난 이 꼴이 됐는데... 내게 무슨 희망이 있다는 거죠?”그녀는 그런 말을 너무 쉽게 하는 서원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절망적인 삶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서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박진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겨우 진정하고 민여진을 쏘아보며 물었다.“누가 네 어머니가 죽었다고 했어?”“이제 와서 또 날 속이려는 거야?”민여진은 증오와 절망에 찬 눈으로 박진성을 바라보았다.“어머니가 살아있다면 왜 여기 데려오지 않았어? 박진성, 날 속이고 어머니를 이용해서 날 협박하는 게 그렇게 즐거워?”그녀의 절규에 박진성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민영미의 죽음은 그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건 단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 이상이었다. 민여진은 살아갈 희망을 잃고 영원히 그를 미워하고 거부할 터였으니까.그건 박진성이 절대로 바라지 않는 결과였다.“내가 말했지. 내가 널 속일 이유가 없다고. 네 어머니가 짧은 시간 안에 병원에서 나와 널 찾아오는 게 가능할 것 같아? 못 믿겠으면 들어봐!”박진성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병원에 부탁해서 녹음한 거야.”그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잡음과 함께 민영미의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내 딸? 응, 참 착하고 예쁜 아인데. 근데 나랑 같이 있었던 시간이 너무 짧아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많이 보고 싶지만 사람들이 이제 다 큰 애니까 엄마 곁에 오래 있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전화도 못 했고... 난 많은 걸 바라지 않아. 우리 딸이 내 생각이 나서 언젠가 날 한 번만 보러 와주면 좋겠어...”테라스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녹음된 목소리는 매우 또렷하게 들렸다.민여진은 무너지듯 눈물을 쏟아냈다.박진성이 말했다.“네 어머니 맞지? 넌 딸이니까 엄마 목소
“축하드려요, 임신 4주 차예요.”의사의 축하에도 민여진은 전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검사가 잘 못 된 건 아닌가요..? 임신일 리가 없는데... 한 번만 다시 검사해주세요.”“혹시 한 달 전에 관계를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있긴 한데...”“피임조치를 했다거나 약을 드신 적은 있으세요?”비가 오던 날, 박진성과 보냈던 뜨거운 밤을 떠올리던 민여진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그러자 의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검사 다시 할 필요도 없잖아요. 관계도 하고 약도 안 먹었으면 원래도 임신 가능성이 높은데 결과가 잘못됐을 리는 없어요.”의사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민여진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진단서만 좀 고쳐주시면 안 될까요? 임신 아니라고 적어주세요 제발...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민여진 씨, 여긴 합법적인 병원입니다. 환자들의 진단서를 마음대로 고치는 건 불법이에요, 다른 용건 없으시면 이만 나가주세요.”“다음 환자분!”미간을 찌푸리며 축객령을 내리는 의사에 민여진은 진단서를 손에 꼭 쥔 채 비틀대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소란스러운 거리 한복판에 서 있던 민여진은 도무지 발을 뗄 수가 없었다.저를 받아들인 것도 박진성으로서는 많이 양보한 건데 아이까지 가졌다는 걸 알게 되면 당장 지우라고 할 게 뻔했기에 민여진은 이 진단서를 들고 그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민여진이 배 속의 아이를 지킬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박진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전화를 받자 박진성의 낮은 음성이 귀에 내려꽂혔다.“검사 끝났으면 빨리 집으로 와.”박진성은 인내심이 그리 깊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민여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30분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차에 타서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마침 3층 금지구역에서 내려오는 박진성을 보게 되었다.실크 잠옷의 윗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탓에 남자의 탄탄한 근육이 그대로 민...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