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을 잃은 두 눈은 앞에서 아무리 손을 휘저어봐도 움직이질 않았다.얼굴도 망가져 버린 채 온몸에 상처를 매달고 있는 민여진이 안쓰러웠던 여의사는 입술을 깨문 채 말을 잇지 못했다.“선생님, 아직 계세요?”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들리는 대답이 없자 민여진도 무언가를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팔을 뻗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불... 스위치 어딨어요? 여기 너무 어두워요. 불 켜주세요... 불 켤래요!”이불을 들추고 뛰어내리던 민여진은 침대 옆 트롤리에 있던 물건들을 쓰러뜨리며 본인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조심해요!”“여기 트롤리 있어서 그쪽으로 가면 안 돼요.”“약이요? 어디 있는데요?”민여진은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선생님, 왜 저는 안 보이죠? 제 눈앞은 그저 캄캄하기만 해요! 정전인 거죠? 불 들어오면 저도 보이는 거 맞죠?”그런 민여진을 보며 눈시울이 빨개진 여의사는 애써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일단 진정하시고 제가 눈 다시 검사해드릴게요. 지나친 압박으로 일시적인 실명이 왔을 수도 있어요. 그런 건 치료만 잘하면 금방 회복하니까 너무 무서워 말아요.”의사의 말을 들은 민여진은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몸을 떨었다.무서워하지 말라니, 어떻게 무서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감옥에 수감된 지 두 달 만에 아이를 잃고 실명까지 했는데...민여진은 절망스러운 제 처지에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울부짖었다.“제발요... 제발 제 눈 좀 고쳐주세요! 이제 저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단 말이에요!”여의사도 최선을 다해 검사했지만 지금의 의료조건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제가 신청서 올려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꼭 나가서 치료받게 도와드릴게요!”여의사가 민여진의 어깨를 다독이며 밖으로 나가자 홀로 남은 민여진은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숨 쉬고 있던 작은 생명이 제 아버지는 박진성 때문에 결국 사라져버리고 말았다.살아서는 안 될 아이였지만 아직 세상 빛도 못 본 아이의 생명이
...출소 전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하던 민여진은 경찰을 보며 물었다.“죄송한데 전화 한 번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전화번호.”민여진이 불러준 번호로 전화를 걸던 경찰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없는 번호라는데, 누구한테 전화할 거야?”“민영미 씨요. 제... 엄마 친구분이세요.”“엄마 친구?”이상하게 익숙한 이름에 옆에 놓인 사망보고서를 본 경찰은 거기에도 떡하니 적혀있는 민영미라는 이름을 보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경찰의 침묵에 되려 긴장한 민여진은 조심스레 물었다.“그분은 아직 잘 계세요? 핸드폰을 바꿔서 연락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주소라도 알 수 있을까요?”여전히 침묵을 유지 중인 경찰을 향해 민여진은 또 말했다.“새 주소만 알려주시면 제가 알아서 가볼게요.”민여진이 경찰의 안내에 따라 서동구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는데 그녀가 차에 타자마자 주위 사람들의 수군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그 말들이 귀에 거슬릴 법도 했지만 민여진은 엄마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은 채 그들의 말을 애써 무시했다.박진성이 말한 5개월보다는 석 달 늦어진 8개월 만에 출소했지만 민여진은 엄마만 살아있다면 모든 걸 다 잊고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하지만 차에서 내린 그녀는 멀어버린 눈 때문에 오로지 감각에만 의존하여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다가 옆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길을 물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돌아오는 건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과 차가운 손길이었다.“저기, 혹시...”“아! 얼굴이 왜 저래? 저리 비켜요!”처참하게 바닥으로 내던져진 민여진은 손으로 상처뿐인 얼굴을 매만지더니 이를 악물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죄송해요, 그런데 놀래키려는 게 아니라 물어볼게...”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마자 여자는 또 소리를 질렀고 같이 있던 남자는 되려 그녀를 발로 차기까지 했다.“미친년이 어디서 사람을 놀래켜! 당장 안 꺼져?! 또 따라오면 죽여버린다.”주먹을 들어 올리던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감싸며 자리를 뜨자 민여진은 또 다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여자한테만은 한없이 다정했다.“너 몸도 약하고 머리 아프다고 매일 그러잖아. 1년이 지나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지. 여기가 곳은 이래도 실력 있는 의사가 있다니까 너 꼭 낫게 해줄 거야.”“이런 작은 진료소에 그런 의사가 있다고요?”반신반의하며 묻던 문채연은 아까보다 어두워진 박진성의 표정에 바로 그의 팔짱을 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나는 당신이 사기꾼한테 속아서 돈도 버리고 시간도 낭비할까 봐 그러죠. 가뜩이나 일로 바쁜 당신이 나 때문에 그러면 내가 얼마나 미안해요...”“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팔짱을 껴오는 문채연에 박진성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네 몸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나을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난 뭐든 다 해볼 거야.”“날 그 정도로 생각해줘서 고마워요.”얼굴을 붉히며 하는 문채연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는데 방현수의 사무실을 물어 가려던 찰나, 한 아이의 목소리가 박진성의 귀에 들려왔다.“여진 누나, 나 그네 탈래요!”거리가 너무 멀어 소리는 제대로 듣지 못했던 박진성이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인영이 눈앞을 스쳐 갔다.그 모습이 민여진 같긴 했지만 그녀는 지금쯤 해외에서 아이를 낳고 잘살고 있어야 했기에 박진성은 빠르게 부인했다.만약 귀국을 했다 하더라도 민여진은 저를 가장 먼저 찾아올 사람이지 이런 허름한 진료소에 틀어박혀 있을 사람이 아니라서 박진성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진성 씨, 왜 그래요?”하지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 이름에 박진성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문채연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아무것도 아니야. 들어가자.”결국 아닐 거라고 단정 지은 박진성은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풀고는 문채연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방현수는 이내 문채연의 맥을 짚어보며 그녀에게 주의할 것들을 일러주었는데 옆에 있던 박진성은 자연스레 익숙한 황산철 화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민여진이 저와 결
갑자기 나타난 민여진에 문채연 역시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어 박진성을 따라 나가버렸다.방현수가 써준 처방을 들고 돈은 던지듯 내려놓고 나가던 문채연은 곧 큰 이변이 생길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구겨진 얼굴을 필 수가 없었다.하지만 감옥에 있던 여자들이 일을 잘 처리해준 덕에 민여진의 얼굴이 제대로 망가져 버렸다는 사실만은 만족스러웠다.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던 문채연은 이내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몇 초만 봐도 구역질이 나는 얼굴이니 박진성이 그녀를 알아본다 해도 절대 마음을 줄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생각을 마친 문채연은 화가 난듯한 남자에게로 다가갔다.한편 방에 있던 민여진은 방금 저를 스쳐 지나간 남자 몸에서 난 익숙한 향기에 저도 모르게 박진성을 떠올리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여기 올 리는 없었기에 민여진은 애써 힘을 주어 주먹을 쥐며 마음을 진정시켰다.“여진아, 괜찮아?”“놀랐지?”그때 방현수가 민여진의 손을 잡아오며 다정하게 물었다.“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네. 진료를 받다 말고 뛰쳐나가는 게 어딨어?”“괜찮아요 저는.”그제야 진정한 민여진은 익숙하다는 듯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제 얼굴을 보고 놀라서 그런 걸 거에요.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 그러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방현수는 그래도 뭔가 찝찝했지만 다른 이유는 찾지 못했기에 빠르게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네가 끊어졌다고?”“네.”그에 민여진도 안 좋은 기분을 애써 감추며 웃어 보였다.“애들은 자기가 무거워서 끊어진 줄 알고 저보다 더 당황했어요.”방현수는 조잘조잘 떠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마침 환자도 없으니까 일찍 문 닫고 시장가서 밧줄 사자. 이참에 정원도 다시 꾸미는 거 어때?”“좋아요.”민여진에게 지팡이를 쥐여주고 진료소 문을 잠근 방현수는 그녀와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진료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차를 대고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박진성은 가슴이 터질
그래서 박진성은 방현수가 사무실로 들어간 틈을 타 빠르게 민여진 앞으로 걸어갔다.신나게 케익을 먹고 있던 민여진은 느껴지는 인기척에 방현수가 돌아온 줄 알고 물었다.“왜 또 왔어요? 이거 저번 거보다 더 맛있는 것 같은데, 현수 씨도 먹어볼래요?”입가에 케익을 묻히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박진성은 민여진이 방현수에게 입맞춤을 요구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케익이 제가 모르는 사이에 발전해버린 둘의 사이를 나타내는 것 같아 거슬렸던 박진성은 그걸 바닥으로 쳐냈다.그에 민여진이 당황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때려왔다.“민여진, 너 진짜 잘 숨는다.”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에 민여진은 뒷걸음질을 치며 방현수를 찾았다.“현수 씨...”옷소매를 꼭 말아쥔 채 그네에서 내려온 그녀는 제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지난날의 악몽에 몸을 떨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현수 씨 어딨어요? 현수 씨한테 가야 하는데...”민여진이 힘겹게 발을 떼자마자 박진성은 그녀의 팔을 낚아채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민여진, 언제까지 연기할 거야. 불쌍한 척도 그만하면 됐잖아.”“비켜!”그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 힘을 준 탓에 민여진 본인도 그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한 채 바닥을 더듬거리더니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고 박진성을 향해 겨누며 말했다.“당장 나가, 안 그러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아무 소용도 없는 나뭇가지를 들고 공포에 떠는 민여진을 보던 박진성은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지며 화까지 났다.방현수한테는 그렇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왜 제 앞에서는 이렇게 두려움에 떠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민여진, 네 지금 꼴을 봐. 내가 널 봐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두 남자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른 민여진에 화가 난 박진성은 그녀의 두 팔을 손아귀에 넣으며 말했다.“나는 내 자식 찾으러 온 거야. 우리 앤 어디에 숨긴 거야? 설
“민여진, 내일 다시 올 거니까 기다려.”이를 악물며 말을 마친 그는 곧 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고 그제야 긴장이 풀린 민여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그녀는 저를 부축하는 방현수를 향해 절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현수 씨.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요. 내가 좀 진정을 해야 해서... 괜찮아지면 그때 사실대로 말할게요.”“괜찮아.”하지만 민여진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다는 것쯤은 진작에 눈치챘던 방현수는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하나도 안 중요해. 중요한 건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민여진이라는 거야.”...이튿날, 민여진은 출근하지 않았지만 박진성은 말한 대로 진료실 앞에 도착해있었다.입구로 들어서던 그는 정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민여진이 임신했던 제 아이를 떠올리게 되었다.그 아이가 여기 있었다면 저 애들 못지않게 장난꾸러기였을 것 같아 아이들을 보는 박진성의 눈이 조금은 다정해졌다.그런 생각을 하던 박진성은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기억해내고는 안을 들여다봤지만 원하는 인영이 보이질 않자 곧장 방현수의 사무실로 향했다.환자들에게 진료를 봐주고 있던 방현수는 그를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꾹 참고 처방을 내준 다음 빠르게 환자를 돌려보냈다.“민여진은 어딨어요?”박진성도 그걸 기다렸는지 환자가 나가자마자 방현수를 향해 물었다.“당신이 무슨 염치로 그딴 말을 합니까?”“당신 무서워서 진료소도 못 나온 거잖아요. 제가 당신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 당신이 대영그룹 유일한 후계자더라고요.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왜 여진이한테 그렇게 질척대는 겁니까? 이미 끝난 사이면 깔끔하게 놓아주시죠.”“내가 질척댄다고요?”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사용에 박진성은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착각하신 것 같은데 내가 아무리 모자라도 얼굴이 다 망가진 여자를 좋아하진 않아요. 난 내 아이를 찾으러 온 겁니다.”“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아이라니요?
민여진이 누워있는 습기 가득한 방은 낡아빠진 다락방인 데다가 제대로 된 가구도 없는 허름한 곳이었다.침대만 덜렁 놓인 그곳에서 홀로 울고 있는 민여진이 안쓰러웠던 박진성이 그녀에게로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민여진이 물었다.“현수 씨에요?”몸이 아픈 탓에 그녀의 목소리가 한결 더 가냘파졌는데 그 목소리로 부르는 현수라는 이름이 귀에 꽂히자 박진성은 또 화가 치밀어 올라 잠시나마 느꼈던 연민의 감정도 싹 사라져버렸다.“현수 씨? 누구 꼬시려고 작정했어? 아주 죽고 못 사나 보네 둘이.”예상치 못한 박진성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민여진은 이불을 꽉 붙잡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소리쳤다.“당신이 어떻게 우리 집 열쇠를 가지고 있어?!”“방현수도 가지는 걸 나는 왜 못 가져.”저를 경계하는 민여진이 못마땅했던 그는 바로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었다.“인기척만 들리면 방현수야? 평소에 네 방에 자주 드나들었나 봐? 어젯밤 둘이 설마 같이 자기라도 한 거야?”모욕적인 그의 말에 얼굴이 빨개진 민여진은 손을 휘둘렀지만 박진성은 단번에 그 손까지 낚아챘다.그 반동에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렸고 땀에 젖은 얇은 잠옷이 몸에 달라붙어 몸매를 살짝씩 드러내고 있었다.그 모습에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낀 박진성은 마른 침을 삼켜내며 그녀의 몸을 훑었다.“진짜 대단하다 민여진, 이런 기회도 놓치지 않고 꼬시겠다는 거야?”“하긴, 그런 얼굴을 받아줄 남자가 더는 없을 테니 기회 생길 때마다 열심히 해야지.”그의 말에 낯빛이 창백해진 민여진은 몸을 움츠리며 발버둥 쳤다.만약 박진성이 올 줄 알았더라면 민여진은 더워죽는 한이 있어도 잠옷만 입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이제 와서 내숭이야? 그래도 우리가 부부의 연이 있는데 네가 원한다면 내가 뭔들 못 주겠어?”“원하는 대로 해줄 게 내가.”코웃음을 치던 박진성은 가볍게 그녀의 잠옷을 찢어냈고 차가운 공기가 빠르게 그녀의 몸을 감쌌다.몸이 이렇게 뜨거운데도 느껴지는 한기에 민여진은 박진성을 향해 애원했
민여진이 구급차에 실려 갈 때 박진성은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피가 날 정도로 벽을 세게 내리쳤다.2년 전만 해도 제 주위를 맴돌며 사랑을 갈구하던 민여진이 지금은 도망가고 싶단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이렇게 변한 건지 박진성은 혼란스럽기만 했다.“진성 씨, 괜찮아요?”그때 갑자기 튀어나온 문채연이 박진성에게로 달려오더니 그의 손을 잡으며 간호사더러 빨리 처치부터 하라고 했다.“괜찮아.”하지만 박진성은 이번에도 잡힌 손을 빼내며 물었다.“넌 어떻게 알고 온 거야?”양경호에게서 듣고 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던 문채연이 대충 아무 이유나 찾아 둘러댔다.“친구가 병원에서 검사하다가 우연히 당신을 봤다고 전화해서요.”병실 안에 누워서 링거를 맞고 있는 민여진을 한번 본 문채연은 박진성을 향해 물었다.“저기 누워있는 사람 여진 씨 아니에요?”아직 화가 채 가라앉지 않았던 박진성은 아무리 문채연이라 해도 더 내어줄 인내심이 없어 짤막하게 대꾸했다.“민여진이 좀 다쳐서 내가 병원으로 데리고 왔어.”“여진 씨가 다쳤는데 왜 당신이 병원에 데려와요?”아무리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봐도 문채연은 늘 짓고 있던 미소까지 유지할 수는 없었다.“둘이 따로 만났던 거에요?”“응.”남자의 짧고 굵은 대답에 문채연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얼굴까지 저 모양이 돼버렸는데 왜 박진성은 아직도 민여진을 잊지 못하고 있는지 문채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진성 씨, 당신 여진 씨 만난 이후로 나랑 있는 시간이 얼마나 줄었는지 알아요? 따로 만나기까지 하고 여진 씨 다쳤다고 본인 손은 신경도 안 쓰고... 솔직히 말해요, 아직 여진 씨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죠?”민여진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소리에 제대로 열 받은 박진성은 문채연을 향해 소리 질렀다.“그럴 리가 없잖아!”민여진은 박진성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아양을 떠는 사람일 뿐인데 박진성이 그런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그럼 왜...
박진성은 유서 위에 종이를 덮으면서, 그의 눈은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저기요, 뭐 하는 분이시죠?”서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박진성이 고개를 들자, 멀리서 한 여자가 당황한 기색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서원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잘못했어요! 문채연 씨... 제발 저를 경찰서에 넘기지 말아주세요...”서원은 잠시 멈칫했다.“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여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그 눈먼 여자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딱해 보여서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일이 문채연 씨를 죽음으로 몰게 될 줄은 몰랐어요...”박진성,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는 분노에 찬 듯 벌떡 일어나며 그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눈먼 여자라니!”그 여자는 박진성의 강렬한 기세에 움찔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었다.“박 대표님! 박 대표님, 제가 다 말할게요! 그 여자가 시켰어요! 다 그 여자가 시킨 대로 한 거예요!”“대체 누구의 말을 따랐다는 거야!”박진성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분노에 차서 말했다.“헛소리 그만하고 똑바로 말해!!”여자는 간신히 진정하며 입을 열었다.“전 원래 이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었어요. 19일, 평소처럼 각 병실을 돌며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1209호실에 들어갔을 때... 그 방에 있던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가 갑자기 저에게 애절하게 부탁했어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제 손을 세게 움켜쥐고 어떻게든 피 나고 살집이 뜯기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나중에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래서 제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자, 문채연 씨를 쫓아내고 박 대표님을 다시 자기 곁으로 돌려놓으려 한다고 했어요.”“그게 정말이야?”“네! 문채연은 불륜녀라고 하면서 자기가 배신당한 조강지처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욱하는 마음에 그 여자를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박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민여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 속에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민여진은 손끝을 힘껏 쥐었다. 예전엔 그녀도 박진성이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라는 걸 믿었지만, 지금은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게 되었다.‘만약 그가 정말 문채연의 복수를 위해 이 일을 꾸몄다면, 왜 문채연에게 사과를 강요했을까?’“대답해. 맞아? 아니야?”“아니야.”박진성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결국 짧게 대답했다. 그 후 입술을 얇게 일그러뜨렸다.“네 머릿속에서 나는 그런 놈이야? 피도 눈물도 없이 널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인간으로 보여?”‘아니라고?’민여진의 머릿속이 엉켜버렸다. 이때 손목의 상처가 욱신거리며 다시금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민여진,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만약 내가 널 납치한 거라면, 내가 하루 종일 눈도 붙이지 않고 폭우 속에서 널 찾아다닐 이유가 뭐야? 그 남자를 보내버릴...”그는 순간 말을 멈췄다. 눈빛이 흔들렸고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방금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뭐라고?”민여진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물었다.“어디로 보냈다는 거야?”박진성은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함을 드러냈다.“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거짓말할 필요 없지.’박진성은 어차피 자기 손바닥 안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그렇다면 내가 당한 그 모든 일들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날 속이기 위해 벌인 연극이었나?’순간, 그녀의 가슴 속이 뒤집히듯 요동쳤다. 잘못된 사람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민여진!”갑자기 몸을 돌려 눕는 그녀를 보며, 박진성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아직 나한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답하지 않았어!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했어? 이 납치 사건이 내가
“손 좀 내밀어.”박진성은 창가에 서 있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그의 완벽한 이목구비를 감쌌지만, 오늘만큼은 그 얼굴에서 한 줌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의 목소리조차 싸늘했다.“손은 왜... 무슨 일이에요?”문채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뭐가 그렇게 심각한 건지, 정말 걱정 되네요.”박진성은 그녀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이틀이 지나면서 손톱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양옆이 사선으로 깎여 있었으며, 중앙 부분이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다.이 상태에서 힘을 주어 누군가를 움켜쥔다면, 단순히 살이 파이고 긁히는 정도가 아니라 고기 한 덩이가 뜯겨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손톱에 손댔어?”박진성은 그녀를 응시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네?”문채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재빨리 거둬들였다.“요즘 네일숍에서 디자인을 바꾸려고 다듬어서 그런 거예요.”박진성은 그녀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여진이의 손에 난 상처, 네가 한 짓이야?”문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며칠 전 일이잖아. 왜 이제 와서 이걸 들춰내는 거야?’“상처라니요?”문채연은 곧 정신을 가다듬고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여진 씨, 또 다쳤어요? 어디 다친 거예요? 괜찮아요?”박진성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문채연을 지켜보았다.문채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눈물이 고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진성 씨... 그 눈빛은 무슨 뜻이에요? 설마,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박진성은 깊은숨을 들이마셨고 애초에 믿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라면 의심하지 않는 쪽이 더 어리석은 일일지도 몰랐다.“민여진 손에는 깊게 파인 상처가 가득해. 19일, 그날 너희 둘은 손을 맞잡은 적이 있었잖아.”문채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갔고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진성 씨, 그래서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제가 일부러 여진 씨 손을 그
“자, 이제 다 짜냈으니까 조금 아플 겁니다. 절대 물 묻히지 말고, 매운 음식은 당분간 피해주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흉터는 체질에 따라 다를 거예요.”“감사합니다.”간호사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말한 뒤, 정리를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병실은 숨이 막힐 듯한 적막에 휩싸였다.박진성은 손가락 마디를 꽉 쥐고 몇 번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정말 네 말이 다 사실이면, 왜 한 번이라도 더 설명하려 하지 않았어?”민여진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한 마디만 해도 비웃고 모욕하는데, 내가 왜 또 말해야 해? 또 그런 꼴을 당하고 싶어야 말이지.’박진성은 스스로도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 말했다.“민여진, 네가 예전에 했던 일도 있는데, 솔직히 너를 믿기가 쉽겠어?”“그만해. 나 너무 피곤해. 정말 좀 쉬고 싶어.”그녀는 눈을 감고 몸을 돌렸다. 박진성은 그녀가 절대 잠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몰아붙이지는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박진성이 다시 물었다.“그날 밤, 왜 채연이를 그렇게 목 졸랐어? 내가 쓰러져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별일 없었어.”민여진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설명한다고 해서 바뀔 게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또 똑같은 결말일 텐데...’박진성은 답답함에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고 다시 참았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민여진, 나에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그 말에 그녀가 예상치 못한 듯 눈을 떴다.“내가 잘못했어. 너한테 따져 묻기 전에 먼저 확인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러지 않았어. 그때 나는...”“미안할 필요 없어.”민여진은 그의 말을 끊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네가 잘못한 거 없어. 그냥 네가 나를 믿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네가 믿고 싶은
“환자 손에 상처가 없다고요?”간호사는 잠시 멍해 있다가 당황한 듯 대답했다.“아닌데요? 상처 있습니다. 꽤 심각할 정도고요. 밤새 염증이 심해져서 고름까지 흘렀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약을 바르는 건데...”“염증?”박진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언제 생긴 일이죠?”간호사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19일 아침이에요.”그 순간 박진성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바로 그날, 문채연이 병원에 온 장면이었다. 그의 숨이 가빠지며 손을 꽉 쥐었다. 궁금증과 분노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 상처... 어떻게 생겼어요?”간호사는 살짝 움찔했지만, 대충 넘길 수 없는 분위기에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여기요... 손등 근처예요. 온통 손톱자국이에요. 처음부터 피멍이 들고 살까지 파여서 피가 멈추질 않았어요.”‘손톱자국... 손톱자국?’박진성은 혼란스러웠다. 민여진이 했던 말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민여진이 울먹이는 모습과 더불어 그가 무시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박진성, 나는 사람도 아니야? 내가 죽어야만 넌 날 이렇게까지 모욕하는 걸 멈추겠어?’그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여진이는 진심이었어. 정말 억울하고 괴로웠으니까 그렇게 울었겠지... 거기다 대고 나는 연기라고, 모함이라고, 마치 범죄라도 저지른 사람을 대하듯 몰아세웠지...’그는 단단히 주먹을 쥐었다.“저도 들어가서 처치하는 상황을 지켜봐야겠어요.”“네?”간호사는 순간 망설였지만, 그의 싸늘한 기세에 말없이 문을 열었다.불이 켜진 병실, 민여진은 눈물을 거둔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여진 씨, 약 바르러 왔어요. 죄송해요. 병원 일이 바빠서 늦었네요.”“괜찮습니다.”간호사가 능숙하게 붕대를 풀어내자, 박진성의 시선이 상처 위에 멈췄다. 부어오른 자국 사이로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심한 곳은 아직도
“깜빡했어. 뜨거운 물 마시다가 덴 거 같아.”“거짓말하지 마.”박진성은 그녀의 턱을 단단히 움켜잡고 힘을 줬다.그는 민여진이 거짓말을 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하려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사실대로 말해. 안 그러면 내가 직접 서원한테 확인할 거야.”민여진은 깊게 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말했다.“문채연이 했어. 이제 됐지?”그 말에 박진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민여진, 남을 모함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않아? 19일에 난 채연이랑 계속 같이 있었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꼭 이렇게까지 해야 속이 시원한 거야?”‘역시나... 또 이러네.’민여진은 허탈하게 웃었다.‘사실대로 말하라고 몰아붙이더니, 막상 말하면 또 믿지 않잖아. 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내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이제 와서 못 믿겠다면 나도 더 할 말 없어.”“좋아. 그럼 네 말대로 채연이 했다고 치자. 채연이가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건데?”박진성은 어디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꾸며낼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는 듯이 차갑게 비웃었다.그 말투에 민여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손톱으로. 움켜쥐고 힘줘서 상처를 냈어.”“그만해!”박진성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민여진, 서원이는 그래도 널 감싸주면서 네가 그날 채연한테 그렇게까지 한 게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 지금 보니까 넌 변한 게 없네. 여전히 뻔뻔하고 비열해. 착한 채연이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 그리고 손톱자국? 고작 손톱자국을 이렇게까지 과장한다고? 네가 뭐 공주라도 되는 줄 알아?”박진성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뼛속까지 날카롭게 파고들었지만, 민여진은 담담했다.이미 너무 익숙한 반응이라, 상처받지도, 놀랍지도 않았다.“그래. 네 말이 맞아.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실망했다면 미안하네.”박진성이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고, 그 반동으로 민여진의 팔이 침대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 상처 난 곳이 그대로
‘두 사람의 입장을 다 들어보라고?’박진성이 순간 멍해졌고 이내 이마에 주름이 깊게 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단 한 번도 민여진의 말에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채연이는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하지만...’그의 눈썹이 서서히 좁혀졌다.“채연이가 먼저 도발했다고?”문채연에게서 그런 얘기는 들은 바가 없었던 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러자 서원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여진 씨가 이렇게 화를 낸 건 처음 봤습니다. 그날 제가 여진 씨를 막았을 때, 채연 씨가 무슨 말을 했어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확실히 도발적인 말이었습니다.”“알았다.”박진성은 깊은숨을 내쉬며 서원에게 말했다.“너는 돌아가서 쉬어.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서원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박진성은 병실 문 밖에서 창문을 통해 민여진을 바라보았다. 민여진은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엔 온통 서원의 말이 맴돌았다.‘채연이가 먼저 도발적인 말을 했다고? 그렇다면 대체 뭐라고 했길래? 그리고 민여진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지?’그는 심란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문을 밀어 열었다.박진성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침대 위의 여자는 평온한 듯 보였지만,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녀의 손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온통 붕대로 감싸져 있었다.‘또 다친 거야?’박진성은 조심스레 조명을 켜고 그녀의 손을 살펴보았다. 그때 민여진이 미세한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서원 씨?”그녀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누군지 확신하지 못한 채 겨우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박진성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그녀가 혈색이 사라진 얼굴로 자신을 인지할 때까지 기다렸다.“박 대표님...”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고 공포를 억누르려 애쓰는 듯했다.박진성은 그 호칭을 듣고 화가 치밀었다.‘박 대표님? 며칠 못 본 사이에 이렇게 거리를 두겠다는 거야?’“손은 어떻게 된 거야?”박진성은 화를 참으려 애쓰며 그녀의 손목을 꽉 쥐었다
모든 사람은 문채연이 박진성에게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과 그녀가 갖는 특별한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문채연에게 도전하려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채연은 넘어지지 않으며, 만약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끝장이었기 때문이다.“알았어... 그럼 사람 불러서 치료받게 할게. 상처가 나면 감염될 수 있으니까.”민여진은 얼굴이 창백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괜찮아요.”...그 이후 며칠 동안, 박진성은 병원에 한 발짝도 들이지 않았고 문채연의 병실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혼자 사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며 밤늦게까지 일을 했고 틈이 나면 휴게실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눈을 감고 여러 번 뒤척였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민여진이 떠올랐다. 왜 하필이면 눈먼 여자 따위가 자기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고 화가 났다.그는 휴게실 침대에서 일어나, 정장을 입고 회사를 나섰다.서원은 그가 병실로 들어오는 걸 보고 당황해 전화를 끊었다.“대표님...”박진성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의 창문을 통해, 깊은 잠에 빠진 민여진을 바라보자 또 울컥하고 화가 났다. ‘나는 네가 신경 쓰여서 몇 날 밤을 지새웠는데, 넌 어떻게 이렇게 편안하게 자는 거야?’“박 대표님...”서원은 웃으며 말했다.“며칠 동안 오지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혹시라도 이제 다시는 오지 않으실까 봐 걱정되기도 했습니다.”박진성은 고개를 돌리며, 표정을 굳혔다.“누가 민여진을 보러 왔다고 그래?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약이라도 처방받으려고 온 거야.”“아...”서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사실 여진 씨의 상태가 좋지 않아요. 대표님도 시간이 되면 자주 와서 신경 써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진 씨는 매번 숨기기만 하니 저도 그 속을 알 수가 없네요.”박진성은 비웃듯이 웃었다.“내가 왜 민여진을 챙겨야 하지? 나만 없으면 편하게 잘 자고 잘 지내는데? 내가 아플 때, 민여진은
“사과 안 해도 돼. 하지만 넌 후회하게 될 거야.”박진성의 표정은 잔인했다.“또 방현수를 끌어들이겠다는 거야?”민여진의 몸이 떨렸다.“박진성! 너 그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뭐야!”박진성은 애초에 방현수를 건드릴 생각까진 없었다. 하지만 민여진이 그를 그렇게까지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그래, 사과 안 해도 돼. 네 말대로 방현수가 사과하면 되겠네. 그 녀석 요즘 꽤나 주목받는 거 알지? 사흘에 한 번씩 핫이슈에 올려서 제대로 인기 스타 만들어 줄게. 네 덕분에 ‘톱스타의 삶’ 한번 제대로 누려 보겠지.”그는 민여진을 그런 궁지로 몰아붙이고 싶었다.'문채연이 먼저 손을 댔다는 걸 알면서도 나에게만 사과를 강요하는 거야? 박진성에게 공정 따위는 기대조차 하면 안 됐어. 사랑하는 여자를 무조건 편들 악마니까.'민여진은 이미 감정적으로 마비된 상태였다.“알았어. 사과할게.”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문채연이 문밖에서 등장했다. 그녀는 억지로 착한 척하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진성 씨, 됐어요. 여진 씨가 아픈 몸으로 무슨 사과를 하겠어요? 괜히 몸 상태만 더 나빠질까 걱정돼요. 그리고 별일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여진 씨 덕분에 지난밤 진성 씨를 독차지할 수 있었으니 감사해야죠.”그 말을 들은 박진성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변했다.'방현수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할 수는 있지만, 내가 아프서 쓰러졌을 때는 거들떠보지 않는 태도였지... 그래. 이제 충분히 알겠어. 민여진은 정말로 나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나 보네. 이쯤 되면 나도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겠어.’“반드시 사과해.”박진성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내려다보며 말했다.“이렇게 경고라도 해 줘야 정신을 차리겠지!”“진성 씨...”문채연은 눈가에 눈물을 보이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정말 저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신다니... 고마워요.”두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기류가 민여진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