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축하드려요, 임신 4주 차예요.”의사의 축하에도 민여진은 전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검사가 잘 못 된 건 아닌가요..? 임신일 리가 없는데... 한 번만 다시 검사해주세요.”“혹시 한 달 전에 관계를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있긴 한데...”“피임조치를 했다거나 약을 드신 적은 있으세요?”비가 오던 날, 박진성과 보냈던 뜨거운 밤을 떠올리던 민여진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그러자 의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검사 다시 할 필요도 없잖아요. 관계도 하고 약도 안 먹었으면 원래도 임신 가능성이 높은데 결과가 잘못됐을 리는 없어요.”의사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민여진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진단서만 좀 고쳐주시면 안 될까요? 임신 아니라고 적어주세요 제발...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민여진 씨, 여긴 합법적인 병원입니다. 환자들의 진단서를 마음대로 고치는 건 불법이에요, 다른 용건 없으시면 이만 나가주세요.”“다음 환자분!”미간을 찌푸리며 축객령을 내리는 의사에 민여진은 진단서를 손에 꼭 쥔 채 비틀대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소란스러운 거리 한복판에 서 있던 민여진은 도무지 발을 뗄 수가 없었다.저를 받아들인 것도 박진성으로서는 많이 양보한 건데 아이까지 가졌다는 걸 알게 되면 당장 지우라고 할 게 뻔했기에 민여진은 이 진단서를 들고 그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민여진이 배 속의 아이를 지킬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박진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전화를 받자 박진성의 낮은 음성이 귀에 내려꽂혔다.“검사 끝났으면 빨리 집으로 와.”박진성은 인내심이 그리 깊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민여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30분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차에 타서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마침 3층 금지구역에서 내려오는 박진성을 보게 되었다.실크 잠옷의 윗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탓에 남자의 탄탄한 근육이 그대로 민
그 말을 들은 민여진은 선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전화를 할 때부터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때는 아무 말 않다가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할 때가 돼서야 잔인하게 아이를 지우라는 말을 하는 그가 민여진은 너무나 야속했다.하지만 저의 우는 모습을 싫어하는 박진성을 알기에 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자신을 진정시키고는 말했다.“진성 씨, 나 앞으로 말도 잘 들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아이만은 지키게 해주면 안 돼요? 절대 진성 씨 귀찮게 안 하고 문채연 씨 깨어나면 바로 애 데리고 나갈게요. 이 세상에 없는 아이처럼 키울게요.”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는 박진성의 동정은커녕 오히려 비웃음만 샀다.“민여진, 착각하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네 그 얼굴이 아니었으면 넌 박씨 집안 사모님 자격으로 지금처럼 누리고 살지도 못해. 가끔 선 넘는 거야 그렇다 쳐도 내 아이는 안돼. 나를 위해 아이를 낳을 여자는 채연이뿐이야. 너한테는 그럴 자격 없어.”자격이 없다는 그 말은 채찍이 되어 곧바로 민여진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내었다.그녀가 박진성의 무정함을 원망하고 있을 때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양경호가 안으로 들어섰다.“얘 좀 은밀한 병원으로 데려가서 수술시켜, 아무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게 신경 쓰고.”배 속의 아이한테는 아버지인 사람이 저토록 매정하니 민여진은 오장육부가 베이는 것처럼 아파왔다.“진성 씨...제발요... 안돼요!”하지만 박진성이 그 애원도 무시한 채 양경호를 향해 눈짓하자 민여진은 바닥에 꿇어앉아 버렸다.“진성 씨... 제발요, 나한테 무슨 짓을 시켜도 좋으니까 제발 아이만은 지키게 해줘요. 낳기만 하면 바로 보낼게요, 제발 살려만 줘요...”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애원한 탓에 민여진의 이마는 온통 피투성이였고 그걸 본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민여진, 넌 진짜 그 얼굴을 가지지 말았어야 했어. 채연이는 너처럼 비굴하진 않을 거야.”문채연이야 머리를 박지 않아도 박씨 집안 후계자 박진성의 사랑을
...문채연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서야 아래로 내려온 박진성은 사라져버린 민여진에 미간을 찌푸리며 양경호를 바라보았다.“민여진은?”그 질문에 양경호도 어리둥절해 할 때, 박진성은 본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진성아, 넌 이렇게 기쁜 소식을 왜 이제야 전해? 채연이 임신했대, 얼른 집으로 와.”본가에 도착한 박진성은 소파에 앉아 음식을 먹는 민여진을 보자마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민여진도 자신이 잘못한 건 아는지 박진성을 보자마자 고개를 푹 떨구고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하, 대단하네 진짜.”가엾은 토끼처럼 굴던 애가 이런 식으로 반항할 줄 몰랐기에 그 분노가 배가 되는 것 같았다.박진성의 분노를 마주한 민여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이정화가 나서서 박진성을 나무랐다.“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넌 무슨 애가 말을 그렇게 하니? 채연이가 임신했다는 데 안 기뻐?”박진성은 이를 악문 채 민여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아주 기뻐서 날아갈 것만 같은데요 뭘.”“그래야지, 이게 얼마나 기쁜 일이니. 결혼한 지 2년 만에 드디어 아기가 생겼으니, 딸이든 아들이든 다 박씨 집안의 경사지. 넌 채연이 잘 좀 챙겨. 혹시라도 애한테 문제 생기면 너한테 따질 거니까.”말을 하던 이정화를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어머, 주방에서 국 끓이고 있는데, 난 가서 좀 봐야겠다.”“어머님, 저도 같이 가요!”“거기 서.”하지만 민여진은 사냥감을 노리듯 번뜩이는 눈으로 한기를 뿜어내며 말하는 박진성 때문에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넌 나랑 얘기 좀 해야지.”이정화는 둘이 사랑싸움을 하는 줄로만 알고 민여진의 손을 꼭 잡으며 웃어 보였다.“채연아, 긴장할 필요 없어. 쟤가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속으로는 네가 자기 애 가졌다고 엄청 기뻐할 거야. 진성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둘이 얘기 나누고 있어 그럼.”사랑? 그래, 박진성이 문채연을 사랑하는 건 맞지.
“싫어요! 진성 씨, 제발 하지 마요!”“싫다고? 이 와중에도 밀당을 하겠다는 건가? 진짜 너답다.”민여진의 애원은 박진성에게 그저 거슬리는 울음소리일 뿐이었다.“진성 씨, 아이가 위험해져요!”“우리 아이잖아요...”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려대던 민여진이 애원하자 박진성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우리 아이? 걔는 그냥 인정도 못 받는 혼종일뿐이야.”말을 마친 박진성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 차가워졌다.이건 그가 감히 제게 반항한 민여진에게 내리는 벌이기도 했고 또 아이를 죽이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진성 씨...”하지만 민여진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발버둥 쳤고 하늘이 그녀를 돕듯 누군가가 박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양경호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박진성은 스피커 핸드폰으로 돌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대표님, 문채연 씨가 깨어나셨습니다!”...박진성은 전화를 받자마자 1분 만에 뛰쳐나가 운전대를 잡았다.더 이상 그 역겨운 여자와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드디어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그는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고민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한편 혼자 남은 민여진은 벗겨진 옷을 주섬주섬 껴입으며 멀어져가는 박진성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질수록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고 온몸이 찌릿찌릿하며 아파 났다.6년 전, 기부금을 받을 때 박진성을 처음 본 뒤로 민여진은 그에게 첫눈에 반해버렸었다.그리고 그들이 두 번째로 만날 때, 박진성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민여진이 생명의 위협도 무릅쓰고 그를 구해 나올 때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너를 아내로 맞이해서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하던 게 박진성이었는데 그는 민여진을 문채연 대용품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대타 노릇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것 같았다.진짜가 돌아왔으니 가짜는 더 이상 필요 없겠지....눈물을 머금은 채로 잠들었던 민여진은 이튿날 아침,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민여진은 화상을 입은 손보다도 마음이 더 아파왔다.울먹이는 문채연은 다정하게 달래주면서 다친 민여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게 박진성이었다.민여진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박진성은 우는 여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란 걸. 그는 그저 우는 민여진을 유독 싫어할 뿐이었다.“그런 거 아니에요...”억울함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민여진이 부어오른 손을 박진성에 들어 보였지만 그는 오히려 화를 내며 그녀의 상처를 매정하게 쳐냈다.“그 손 안 치워?!”민여진은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고통을 참아냈지만 박진성은 그걸 연기라고만 생각하며 치를 떨어댔다.“어디서 변명이야, 너한테 물이 튄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만약 다친 게 채연이였다면 너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당장 나가!”박진성의 말에 걸음을 옮기던 민여진은 그만 문채연의 득의양양한 표정을 봐버렸다.“진성 씨, 그만 해요. 여진 씨도 진성 씨 사랑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2년 동안 부부로 지내서 쌓인 정도 있을 텐데 나 때문에 싸우지 마요.”“정?”박진성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나랑 쟤 사이에 정 따위는 없어. 네가 깨어났으니까 쟨 이제 가야지. 본가에서 너랑 결혼하는 걸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쟤랑 결혼할 일은 없었어. 쟤가 박씨 집안 사모님 행세를 할 일은 더더욱 없었겠지.”닫혀버린 문 때문에 뒤에 이어지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이미 들은 말로도 민여진은 가슴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눈앞이 새까매질 정도로 어지러워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눈물을 흘렸다.그렇게 겨우겨우 1층으로 내려온 그녀가 소파에 앉아있은 지 한참 지나자 마침내 박진성이 아래로 내려왔다.“사인해.”그런데 그와 함께 제 앞에 놓은 이혼 합의서에 민여진은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물었다.“오늘은... 이혼 안 한다고 했잖아요.”“안 하면 네가 계속 채연이 해치는 거 보고만 있을까? 빨리 사인하고 나가. 그래야 내가 채연이랑 다시 시작하지.”짜증 가득한 투로 말하는 박진성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리던 민여진은 이를 악물며 힘겹게 현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문이 열리더니 박진성이 안으로 들어왔다.“진성 씨?”그를 본 민여진 눈을 반짝이며 걸음을 재촉했다.“진성 씨, 내 말 좀...”“입 다물고 따라 나와.”평소와는 다른 농도의 한기를 뿜어내는 그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채연이가 차를 몰고 나갔다가 사람을 죽인 것 같아. 그리고 사라졌어.”“그럼 당장 자수를 하라고 해야지 나는 왜...”목이 말라온 민여진이 말도 채 맺지 못하고 박진성을 바라봤는데 그는 차가운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네가 대신 감옥에 가줘야겠어.”“싫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박진성에 민여진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울부짖었다.“내가 왜요? 사람은 죽인 건 문채연인데 왜 걔 대신 나를 감옥에 보내냐고요!”“네가 채연이 자리에서 2년 동안이나 누릴 거 다 누렸잖아.”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채연이 도망가는 것도 CCTV에 이미 다 찍혔어. 둘이 얼굴이 똑같으니까 다들 널 의심할 텐데 네가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그럼 진실을 말하면 되잖아요, 나랑 문채연 씨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라고!”민여진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내가 채연 씨 대신 누릴 걸 누렸다니요? 그건 원래 6년 전부터 내가 누렸어야 할 생활이었어요. 진성 씨를 그때 불구덩이에서 구한 건 바로 나였다고요!”이 말을 들으면 박진성이 놀랄 줄 알았는데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미간조차도 찌푸리지 않았다.“역시 채연이 말이 맞네.”오히려 그의 얼굴에 드리운 혐오의 감정이 더 짙어질 뿐이었다.“채연이가 6년 전날 화재에서 구해준 걸 너도 알았다며. 그래서 바로 자기가 그 자리를 뺏으러들 거라고 하더니, 넌 진짜 어쩜 그렇게 염치가 없어?”“... 뭐라고요?”“정말 6년 전에 날 구한 게 너라면 네 성격으로 2년을 참을 수나 있었겠어? 당장이라도 모두한테 알렸겠지.”그 말을 들은 민
그제야 민여진이 대신 감옥에 가는 일을 얘길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박진성은 바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욕을 하고 억압해도 제 아이만은 포기하지 않던 여자가 이제 와서 모든 걸 버리고 떠나겠다니 박진성은 당연히 믿지 않았지만 제 입으로 대신 감옥에 가겠다고 말하는 그녀에 말투를 한껏 누그러뜨렸다.“걱정 마, 네가 채연이 죄 대신 뒤집어쓰겠다고만 약속하면 나도 너 죽게 안 내버려 둬. 많아도 5개월이야. 그동안 버티면 너도 바로 빼줄게. 그리고 네 엄마도 원래대로 바로 데려올 거야.”그의 말이 끝나도 대꾸를 안 하는 상대방에 인내심이 다 한 박진성은 빠르게 본인 할 말을 마무리했다.“빨리 경찰서 가서 자수해. 나 회의 있어서 다른 용건 없으면 이만 끊을게.”“박진성 씨.”그가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슬픔을 간신히 참아내는 듯한 민여진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우리 다신 보지 말아요.”울음 섞인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 있던 박진성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가 이미 끊겨버린 뒤였다.결의에 찬 듯한 말투가 민여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낯설기도 했고 묘하게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대신 감옥에 보냈다고 저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처럼 구는 게 2년 동안이나 저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녀답지 않아서 박진성은 이번에도 민여진이 그저 불쌍한 척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그리고 만약 정말 그녀가 말한 대로 다시 보지 않으면 좋아할 쪽은 오히려 박진성이었기에 그는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대표님.”옆에 있던 양경호가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신호를 주자 박진성도 민여진을 빠르게 잊고 회의실로 들어갔다....한편 통화를 끝낸 민여진은 그길로 경찰서로 향했다.“제가 문채연입니다. 오늘 차로 사람을 치어서 죽였어요. 벌 받을까 봐 도망갔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제라도 자수하려고요.”공허한 눈동자로 자수를 하러 온 그녀를 보자마자 유가족들이 달려들었다.그들에게 모진 욕을 들으면서도, 갖은 폭행을 당하면서도 민여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배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
“채연 씨는...”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서 하이힐 소리가 급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과 걱정이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진성 씨!”문채연이 핸드백을 들고 달려왔다.“왜 나와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수술 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박진성은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병실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아.”“그래도 저한테는 말했어야죠. 그리고 옷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으셨네요. 감기라도 다시 걸리면 어쩌려고요?”문채연은 핸드백을 비서에게 건네고 예쁜 손가락으로 박진성의 옷 단추를 하나씩 채워줬다. 단추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오히려 잘됐네요. 진성 씨가 다친 뒤로 우리 오랫동안 데이트도 못 했잖아요. 좀 움직이는 것도 좋아요. 오늘 나랑 같이 저 앞에 있는 레스토랑의 커플 메뉴를 먹으러 가요.”공포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민여진은 구석에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나마 압박감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박진성과 문채연의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가까워 보였다. 만약 박진성이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 계획까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안정적이라면, 민여진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갈 터였다. 그렇다면 설령 박진성이 나중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 생각에 민여진은 비록 안도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억울함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고통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조현준이 말했듯, 권력과 배경을 전부 가진 사람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진 씨? 왜 여기 웅크리고 계세요?”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시우는 창백한 얼굴로 화분 뒤에 웅크려 앉은 민여진을 발견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그런 사이 아니라고?”조현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깜짝 놀랐잖아.”조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여진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 사회의 다툼에 끼어들어선 안 돼. 권력도 배경도 없는 우리는 그들한테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이야.”조현준의 말에 민여진은 이 충고를 조금 일찍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현준 오빠, 진시우 씨는 안진에 리조트를 건설한다고 자주 다녀서 알게 된 거예요.”“리조트를 건설한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조현준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안진에 리조트를 세운다면 물론 수익은 있을 수 있지만, 진시우를 좀 과소평가한 일 아닌가?”“동진에서는 형이 모든 사업을 독차지해서 따로 나와 독립하는 거라고 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계속 말했다.“현준 오빠, 한 사람만 더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데요.”“임재윤?”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조현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조사할 생각이었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하고도 접촉이 많은 사람 같아서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불안하거든.”“고마워요. 현준 오빠, 이 신세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여진아, 우리는 이웃이기 전에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건 아니야.”조현준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넌 일단 쉬어. 나한테 기자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돼. 조사가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네, 수고해 줘요.”통화를 마치고 민여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마음이 놓이자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다시 눈을 뜨자 휴대전화 시계는 이미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씨, 깨셨나요?”“네. 잠시만
“그래. 조금 늦게 돌아오는 것도 좋겠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이 다 막혔거든. 진시우 씨와 임재윤 씨가 거기 있어서 나도 걱정은 안 해.”조인화는 민여진더러 안전에 신경 쓰고 사람 많은 데서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한참 동안 잔소리를 늘어놓은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민여진은 침대에 앉아 한참을 망설이다 조현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여보세요, 여진아.”너무 빠른 응답에 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현준 오빠, 왜 이렇게 빨리 받아요? 쉬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조현준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답했다.“몇 시간 자고 지금은 회사로 들어가는 중이야.”민여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죄송해요. 나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도 바쁜데 피곤하겠어요.”조현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여진아, 전화한 이유가 단지 사과하려는 거라면, 차라리 이 전화를 받지 말 걸 그랬어.”민여진도 함께 웃었다. 그녀는 조현준의 친절함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먹먹해졌다.“여진아,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지?”조현준이 물었다.“내가 뭐 도와줄 거라도 있어?”“역시 현준 오빠는 못 속이겠네요.”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워져 있었다.비록 오늘의 오해는 풀렸지만, 민여진은 임재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임재윤이라는 이름과 말을 못 한다는 것 외에 가족 상황은 어떠한지, 집은 어디에 있는지, 형제자매가 있는지 등등 임재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심지어 민여진은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매번 그녀한테 불리한 입장을 안겨주었다.“현준 오빠, 사실 두 사람에 관해 물어보고 싶어서요.”민여진은 긴장하며 휴대전화를 꽉 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말했다.“오빠도 동진 출신이시잖아요. 진시우라는 사람을 알아요?”“진시우?”조현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잠시만, 동료에게 물어볼게.”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잇는 조현
박진성의 이름과 그와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 민여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버렸다.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진시우는 다행히 더 캐묻지 않았다.“됐어요. 말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억지로 말하진 마세요.”“고마워요.”민여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때 간호사실의 한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까 문채연 씨가 오셨을 때 제가 임재윤 씨 병실을 알려드렸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직접 가서 말씀드릴까요?”간호 실장이 답했다.“괜찮아요. 위층 간호사에게 알려주면 돼요.”“알겠어요.”목소리들이 점차 사그라들자, 민여진은 문채연이 있을 것 같아 다시 임재윤의 병실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입술을 깨물고 고민했다.이때, 진시우가 말을 꺼냈다.“민여진 씨, 호텔에서 좀 쉬다가 저녁에 오는 게 어때요?”민여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좋아요.”의도치 않게 진시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민여진은 차 안에서 문득 의문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진시우 씨는 동진 사람이에요?”“그렇죠.”진시우는 태연하게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그런데 왜 안진까지 와서 리조트를 지을 생각을 하신 거예요? 너무 멀지 않아요?”“물론 멀긴 하죠. 하지만 저는 외동도 아니고 가족들 사이에서도 특별히 대우를 받는 위치도 아니에요. 동진의 사업은 대부분 형이 쥐고 있으니, 생계를 위해서라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죠.”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복잡한 사정이 있었구나.’그녀는 입술을 깨물다가 또 물었다.“그럼, 임재윤 씨는요?”진시우는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웃으며 말했다.“민여진 씨, 혹시 임재윤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렇게 돌려서 물어보는 건 아니죠?”진시우의 말에 당황한 민여진은 허둥지둥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무심코 여쭤본 거예요.”진시우는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임재윤도 동진 사람이에요. 우리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제가 회사를 나와 독립한다고 그러니까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