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듣는 순간 민여진은 화상을 입은 손보다도 마음이 더 아파왔다.울먹이는 문채연은 다정하게 달래주면서 다친 민여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게 박진성이었다.민여진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박진성은 우는 여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란 걸. 그는 그저 우는 민여진을 유독 싫어할 뿐이었다.“그런 거 아니에요...”억울함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민여진이 부어오른 손을 박진성에 들어 보였지만 그는 오히려 화를 내며 그녀의 상처를 매정하게 쳐냈다.“그 손 안 치워?!”민여진은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고통을 참아냈지만 박진성은 그걸 연기라고만 생각하며 치를 떨어댔다.“어디서 변명이야, 너한테 물이 튄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만약 다친 게 채연이였다면 너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당장 나가!”박진성의 말에 걸음을 옮기던 민여진은 그만 문채연의 득의양양한 표정을 봐버렸다.“진성 씨, 그만 해요. 여진 씨도 진성 씨 사랑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2년 동안 부부로 지내서 쌓인 정도 있을 텐데 나 때문에 싸우지 마요.”“정?”박진성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나랑 쟤 사이에 정 따위는 없어. 네가 깨어났으니까 쟨 이제 가야지. 본가에서 너랑 결혼하는 걸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쟤랑 결혼할 일은 없었어. 쟤가 박씨 집안 사모님 행세를 할 일은 더더욱 없었겠지.”닫혀버린 문 때문에 뒤에 이어지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이미 들은 말로도 민여진은 가슴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눈앞이 새까매질 정도로 어지러워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눈물을 흘렸다.그렇게 겨우겨우 1층으로 내려온 그녀가 소파에 앉아있은 지 한참 지나자 마침내 박진성이 아래로 내려왔다.“사인해.”그런데 그와 함께 제 앞에 놓은 이혼 합의서에 민여진은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물었다.“오늘은... 이혼 안 한다고 했잖아요.”“안 하면 네가 계속 채연이 해치는 거 보고만 있을까? 빨리 사인하고 나가. 그래야 내가 채연이랑 다시 시작하지.”짜증 가득한 투로 말하는 박진성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리던 민여진은 이를 악물며 힘겹게 현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문이 열리더니 박진성이 안으로 들어왔다.“진성 씨?”그를 본 민여진 눈을 반짝이며 걸음을 재촉했다.“진성 씨, 내 말 좀...”“입 다물고 따라 나와.”평소와는 다른 농도의 한기를 뿜어내는 그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채연이가 차를 몰고 나갔다가 사람을 죽인 것 같아. 그리고 사라졌어.”“그럼 당장 자수를 하라고 해야지 나는 왜...”목이 말라온 민여진이 말도 채 맺지 못하고 박진성을 바라봤는데 그는 차가운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네가 대신 감옥에 가줘야겠어.”“싫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박진성에 민여진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울부짖었다.“내가 왜요? 사람은 죽인 건 문채연인데 왜 걔 대신 나를 감옥에 보내냐고요!”“네가 채연이 자리에서 2년 동안이나 누릴 거 다 누렸잖아.”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채연이 도망가는 것도 CCTV에 이미 다 찍혔어. 둘이 얼굴이 똑같으니까 다들 널 의심할 텐데 네가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그럼 진실을 말하면 되잖아요, 나랑 문채연 씨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라고!”민여진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내가 채연 씨 대신 누릴 걸 누렸다니요? 그건 원래 6년 전부터 내가 누렸어야 할 생활이었어요. 진성 씨를 그때 불구덩이에서 구한 건 바로 나였다고요!”이 말을 들으면 박진성이 놀랄 줄 알았는데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미간조차도 찌푸리지 않았다.“역시 채연이 말이 맞네.”오히려 그의 얼굴에 드리운 혐오의 감정이 더 짙어질 뿐이었다.“채연이가 6년 전날 화재에서 구해준 걸 너도 알았다며. 그래서 바로 자기가 그 자리를 뺏으러들 거라고 하더니, 넌 진짜 어쩜 그렇게 염치가 없어?”“... 뭐라고요?”“정말 6년 전에 날 구한 게 너라면 네 성격으로 2년을 참을 수나 있었겠어? 당장이라도 모두한테 알렸겠지.”그 말을 들은 민
그제야 민여진이 대신 감옥에 가는 일을 얘길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박진성은 바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욕을 하고 억압해도 제 아이만은 포기하지 않던 여자가 이제 와서 모든 걸 버리고 떠나겠다니 박진성은 당연히 믿지 않았지만 제 입으로 대신 감옥에 가겠다고 말하는 그녀에 말투를 한껏 누그러뜨렸다.“걱정 마, 네가 채연이 죄 대신 뒤집어쓰겠다고만 약속하면 나도 너 죽게 안 내버려 둬. 많아도 5개월이야. 그동안 버티면 너도 바로 빼줄게. 그리고 네 엄마도 원래대로 바로 데려올 거야.”그의 말이 끝나도 대꾸를 안 하는 상대방에 인내심이 다 한 박진성은 빠르게 본인 할 말을 마무리했다.“빨리 경찰서 가서 자수해. 나 회의 있어서 다른 용건 없으면 이만 끊을게.”“박진성 씨.”그가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슬픔을 간신히 참아내는 듯한 민여진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우리 다신 보지 말아요.”울음 섞인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 있던 박진성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가 이미 끊겨버린 뒤였다.결의에 찬 듯한 말투가 민여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낯설기도 했고 묘하게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대신 감옥에 보냈다고 저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처럼 구는 게 2년 동안이나 저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녀답지 않아서 박진성은 이번에도 민여진이 그저 불쌍한 척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그리고 만약 정말 그녀가 말한 대로 다시 보지 않으면 좋아할 쪽은 오히려 박진성이었기에 그는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대표님.”옆에 있던 양경호가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신호를 주자 박진성도 민여진을 빠르게 잊고 회의실로 들어갔다....한편 통화를 끝낸 민여진은 그길로 경찰서로 향했다.“제가 문채연입니다. 오늘 차로 사람을 치어서 죽였어요. 벌 받을까 봐 도망갔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제라도 자수하려고요.”공허한 눈동자로 자수를 하러 온 그녀를 보자마자 유가족들이 달려들었다.그들에게 모진 욕을 들으면서도, 갖은 폭행을 당하면서도 민여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배
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들은 하나둘씩 민여진의 팔과 다리를 잡아 왔다.“뭐 하는 짓이에요! 이거 놔요! 놔달라고요!”민여진이 아무리 울어도 돌아오는 건 여자들의 욕설뿐이었다.“얘도 끈질기네, 어떻게 아직도 살아있어? 두 달이나 지났는데 진작 죽었어야지.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직접 움직일 일도 없잖아. 재수가 없으려니까 진짜!”그녀들의 말을 다 들은 민여진은 바로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땅에 박기 시작했다.“제발 아이만은 살려주세요, 애는 아무 잘못이 없잖아요!”“애는 잘못이 없어도 네가 잘못이 있잖아. 그러게 왜 박 대표님을 두고 그딴 생각을 해, 다 네 업보야. 박 대표님은 네가 하루빨리 죽길 바라셔, 그래서 애도 절대 남기지 말라고 우리한테 지시하셨으니까 어차피 넌 그냥 당할 운명이야.”그들 중 하나가 민여진을 발로 차 넘어뜨리자 나머지 여자들이 그녀의 팔다리를 압박해왔다.하지만 육신의 고통보다 아까 들은 말이 더 의아했던 민여진은 울부짖으며 소리쳤다.“박진성 씨가 아이는 지킬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어요!”어쩐지 두 달 동안 저가 그렇게 당하는데도 교도관이 지독하게 무시하더라니, 민여진은 그제야 이 모든 게 박진성의 지시였다는 걸 알아챘다.문채연을 위해 죄까지 다 뒤집어써 줬는데 왜 아직도 저에게만은 이토록 가혹한지, 정말 제가 그 정도로 혐오스러운지 민여진은 도무지 박진성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아!”그때 한창 고통에 몸부림치던 민여진이 미친 사람처럼 눈물을 흘려대며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발버둥 치자 여자들은 깜짝 놀라며 대화를 주고받았다.“빨리 잡아서 약부터 먹이자, 얘 곧 미치겠어.”그녀들은 민여진의 상태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억지로 그녀의 입을 벌려 알약 하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하지만 민여진이 삼키려 하지 않자 그녀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자는 민여진의 배를 계속해서 걷어차며 그녀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억지로 약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아, 맞다.”여자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초점을 잃은 두 눈은 앞에서 아무리 손을 휘저어봐도 움직이질 않았다.얼굴도 망가져 버린 채 온몸에 상처를 매달고 있는 민여진이 안쓰러웠던 여의사는 입술을 깨문 채 말을 잇지 못했다.“선생님, 아직 계세요?”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들리는 대답이 없자 민여진도 무언가를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팔을 뻗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불... 스위치 어딨어요? 여기 너무 어두워요. 불 켜주세요... 불 켤래요!”이불을 들추고 뛰어내리던 민여진은 침대 옆 트롤리에 있던 물건들을 쓰러뜨리며 본인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조심해요!”“여기 트롤리 있어서 그쪽으로 가면 안 돼요.”“약이요? 어디 있는데요?”민여진은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선생님, 왜 저는 안 보이죠? 제 눈앞은 그저 캄캄하기만 해요! 정전인 거죠? 불 들어오면 저도 보이는 거 맞죠?”그런 민여진을 보며 눈시울이 빨개진 여의사는 애써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일단 진정하시고 제가 눈 다시 검사해드릴게요. 지나친 압박으로 일시적인 실명이 왔을 수도 있어요. 그런 건 치료만 잘하면 금방 회복하니까 너무 무서워 말아요.”의사의 말을 들은 민여진은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몸을 떨었다.무서워하지 말라니, 어떻게 무서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감옥에 수감된 지 두 달 만에 아이를 잃고 실명까지 했는데...민여진은 절망스러운 제 처지에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울부짖었다.“제발요... 제발 제 눈 좀 고쳐주세요! 이제 저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단 말이에요!”여의사도 최선을 다해 검사했지만 지금의 의료조건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제가 신청서 올려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꼭 나가서 치료받게 도와드릴게요!”여의사가 민여진의 어깨를 다독이며 밖으로 나가자 홀로 남은 민여진은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숨 쉬고 있던 작은 생명이 제 아버지는 박진성 때문에 결국 사라져버리고 말았다.살아서는 안 될 아이였지만 아직 세상 빛도 못 본 아이의 생명이
...출소 전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하던 민여진은 경찰을 보며 물었다.“죄송한데 전화 한 번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전화번호.”민여진이 불러준 번호로 전화를 걸던 경찰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없는 번호라는데, 누구한테 전화할 거야?”“민영미 씨요. 제... 엄마 친구분이세요.”“엄마 친구?”이상하게 익숙한 이름에 옆에 놓인 사망보고서를 본 경찰은 거기에도 떡하니 적혀있는 민영미라는 이름을 보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경찰의 침묵에 되려 긴장한 민여진은 조심스레 물었다.“그분은 아직 잘 계세요? 핸드폰을 바꿔서 연락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주소라도 알 수 있을까요?”여전히 침묵을 유지 중인 경찰을 향해 민여진은 또 말했다.“새 주소만 알려주시면 제가 알아서 가볼게요.”민여진이 경찰의 안내에 따라 서동구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는데 그녀가 차에 타자마자 주위 사람들의 수군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그 말들이 귀에 거슬릴 법도 했지만 민여진은 엄마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은 채 그들의 말을 애써 무시했다.박진성이 말한 5개월보다는 석 달 늦어진 8개월 만에 출소했지만 민여진은 엄마만 살아있다면 모든 걸 다 잊고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하지만 차에서 내린 그녀는 멀어버린 눈 때문에 오로지 감각에만 의존하여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다가 옆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길을 물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돌아오는 건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과 차가운 손길이었다.“저기, 혹시...”“아! 얼굴이 왜 저래? 저리 비켜요!”처참하게 바닥으로 내던져진 민여진은 손으로 상처뿐인 얼굴을 매만지더니 이를 악물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죄송해요, 그런데 놀래키려는 게 아니라 물어볼게...”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마자 여자는 또 소리를 질렀고 같이 있던 남자는 되려 그녀를 발로 차기까지 했다.“미친년이 어디서 사람을 놀래켜! 당장 안 꺼져?! 또 따라오면 죽여버린다.”주먹을 들어 올리던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감싸며 자리를 뜨자 민여진은 또 다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여자한테만은 한없이 다정했다.“너 몸도 약하고 머리 아프다고 매일 그러잖아. 1년이 지나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지. 여기가 곳은 이래도 실력 있는 의사가 있다니까 너 꼭 낫게 해줄 거야.”“이런 작은 진료소에 그런 의사가 있다고요?”반신반의하며 묻던 문채연은 아까보다 어두워진 박진성의 표정에 바로 그의 팔짱을 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나는 당신이 사기꾼한테 속아서 돈도 버리고 시간도 낭비할까 봐 그러죠. 가뜩이나 일로 바쁜 당신이 나 때문에 그러면 내가 얼마나 미안해요...”“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팔짱을 껴오는 문채연에 박진성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네 몸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나을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난 뭐든 다 해볼 거야.”“날 그 정도로 생각해줘서 고마워요.”얼굴을 붉히며 하는 문채연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는데 방현수의 사무실을 물어 가려던 찰나, 한 아이의 목소리가 박진성의 귀에 들려왔다.“여진 누나, 나 그네 탈래요!”거리가 너무 멀어 소리는 제대로 듣지 못했던 박진성이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인영이 눈앞을 스쳐 갔다.그 모습이 민여진 같긴 했지만 그녀는 지금쯤 해외에서 아이를 낳고 잘살고 있어야 했기에 박진성은 빠르게 부인했다.만약 귀국을 했다 하더라도 민여진은 저를 가장 먼저 찾아올 사람이지 이런 허름한 진료소에 틀어박혀 있을 사람이 아니라서 박진성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진성 씨, 왜 그래요?”하지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 이름에 박진성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문채연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아무것도 아니야. 들어가자.”결국 아닐 거라고 단정 지은 박진성은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풀고는 문채연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방현수는 이내 문채연의 맥을 짚어보며 그녀에게 주의할 것들을 일러주었는데 옆에 있던 박진성은 자연스레 익숙한 황산철 화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민여진이 저와 결
갑자기 나타난 민여진에 문채연 역시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어 박진성을 따라 나가버렸다.방현수가 써준 처방을 들고 돈은 던지듯 내려놓고 나가던 문채연은 곧 큰 이변이 생길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구겨진 얼굴을 필 수가 없었다.하지만 감옥에 있던 여자들이 일을 잘 처리해준 덕에 민여진의 얼굴이 제대로 망가져 버렸다는 사실만은 만족스러웠다.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던 문채연은 이내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몇 초만 봐도 구역질이 나는 얼굴이니 박진성이 그녀를 알아본다 해도 절대 마음을 줄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생각을 마친 문채연은 화가 난듯한 남자에게로 다가갔다.한편 방에 있던 민여진은 방금 저를 스쳐 지나간 남자 몸에서 난 익숙한 향기에 저도 모르게 박진성을 떠올리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여기 올 리는 없었기에 민여진은 애써 힘을 주어 주먹을 쥐며 마음을 진정시켰다.“여진아, 괜찮아?”“놀랐지?”그때 방현수가 민여진의 손을 잡아오며 다정하게 물었다.“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네. 진료를 받다 말고 뛰쳐나가는 게 어딨어?”“괜찮아요 저는.”그제야 진정한 민여진은 익숙하다는 듯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제 얼굴을 보고 놀라서 그런 걸 거에요.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 그러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방현수는 그래도 뭔가 찝찝했지만 다른 이유는 찾지 못했기에 빠르게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네가 끊어졌다고?”“네.”그에 민여진도 안 좋은 기분을 애써 감추며 웃어 보였다.“애들은 자기가 무거워서 끊어진 줄 알고 저보다 더 당황했어요.”방현수는 조잘조잘 떠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마침 환자도 없으니까 일찍 문 닫고 시장가서 밧줄 사자. 이참에 정원도 다시 꾸미는 거 어때?”“좋아요.”민여진에게 지팡이를 쥐여주고 진료소 문을 잠근 방현수는 그녀와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진료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차를 대고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박진성은 가슴이 터질
“돈이 필요하면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생활하는 데 부족한 것도 없잖아. 그런데도 굳이 나가서 일하겠다고 하는 걸 보니 도망가고 싶은 거잖아.”박진성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민여진에게 다가가 어깨를 꽉 잡았다.“민여진, 며칠 내버려 뒀더니 정말 날개 달고 날아가 버리고 싶은 모양이지?”민여진은 문에 밀쳐진 채 박진성의 화난 목소리를 들으며 무력감을 느꼈다.“진성 씨, 나도 살아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나가서 일할 자유도 없어?”“네가 나가서 일하려면 스스로를 돌볼 수 있어야지. 내가 없으면 넌 겨울도 못 넘길 거야. 어디 길바닥에서 얼어 죽어도 아무도 모를걸!”박진성은 단지 밖에서 시각장애인이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 너무 심하게 나가 버렸다.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배어 나왔지만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민여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돈이 필요하면 내가 줄게. 네가 외출하는 것도 막지 않았잖아. 너한테 충분한 자유를 줄 테니까 제발 나가서 일하겠다는 소리는 하지 마. 너 밖에서 잘못되면 아무도 책임 못 져.”민여진은 박진성의 손을 뿌리치고는 차가운 손끝과 표정 없는 눈으로 말했다.“알았어.”박진성은 민여진의 턱을 들어 올리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갑자기 다시 공허해진 눈빛에 그는 짜증이 났다.“민여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알아. 나 이만 나갈게.”민여진은 문을 열고 나갔다. 마음이 무감각했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마음이 아팠다.그녀의 욕심이 과했던 것 같았다. 민영미가 무사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박진성의 인내심을 시험한 건 그녀의 잘못이었다.방으로 돌아온 민여진의 표정은 어두웠다. 정수향은 결과를 예상했지만 그래도 물었다.“왜 그래? 진성이가 허락 안 했어?”민여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진성 씨는... 내가 밖에서 힘든 일을 겪을까 봐 걱정하더라고요. 눈이 안 보이니까.
‘그러게. 박진성은...’민여진의 눈빛에 실망감이 어렸다. 박진성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정수향은 풀이 죽은 민여진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여진아, 별장에서 지내는 게 편하지 않아? 왜 굳이 나와서 일하고 싶어 하는 거야?”“나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고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느껴 보고 싶어서요.”민여진은 자조하며 말했다.“그리고 언제까지나 남한테 기대 살 수는 없잖아요. 만약에 내가 이 일을 잘 해내면,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잖아요. 만약... 만약에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박진성에게 손 벌리지 않고 엄마를 도울 수 있고요.”정수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 살아가기도 힘든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민여진은 생각보다 훨씬 독립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어쩌면 민여진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의지해서 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정수향은 그제야 박진성처럼 훌륭한 남자가 왜 민여진을 잊지 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의 매력은 외모보다 훨씬 강력하다.“그렇다면 진성이와 상의해 보는 게 좋겠다. 너희는 부부니까, 네가 스스로를 잘 챙길 수 있다면 그도 이해해 줄 거야.”민여진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얘기해 볼게요.”민여진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저녁에 방에서 기다렸다. 9시가 되어서야 박진성이 돌아왔지만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서재로 향했다.민여진은 준비한 디저트를 들고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민여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를 본 박진성은 화가 누그러졌다.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답답하고 고지식한 성격이라 내가 화난 줄도 모를 거라 여겼다“무슨 일이야?”박진성은 여전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책상 위의 서류를 뒤적였지만 눈에는 글자가 들어오지 않았다.민여진은 겁이 났지만 나가고 싶은 마음을 참고 박진성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디저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저기...
민여진은 망설였다.‘나는 속상해할까? 예전 같았으면 정말 속상했을 테지.’속상한 정도가 아니라 마음이 아프고 숨쉬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하지만 도도한 박진성이 예전의 그녀와 같은 생각일 수 있겠는가.“생각해 볼게요.”민여진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그때 옆에서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고급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에 민여진은 마음이 끌렸다.정수향은 민여진의 마음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진아, 저 피아노 한번 쳐 보고 싶어?”“내가요?”민여진은 당황하며 말했다.“안 돼요. 난 잘 못 쳐요. 잠깐 배운데다가 지금은 눈도 안 보이잖아요. 아마 다 잊어버렸을 거예요.”“쳐 보지 않고 어떻게 알아?”정수향은 종업원을 불러 피아노를 잠깐 써도 되는지 물었다.종업원은 흔쾌히 허락했다.“네, 괜찮습니다.”정수향은 민여진을 부축해 피아노 앞에 앉혔다.민여진은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을 올려놓자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건반을 누르며 기억 속의 멜로디를 연주했다.민여진에게는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 빈민가에서 남들이 버린 전자 피아노를 민영미가 가져와 전원을 연결해 주자 민여진은 며칠 만에 그럴듯하게 연주했었다.민영미는 아프기 전에 민여진의 연주를 들으며 웃으며 말했었다.“우리 여진이는 정말 재주가 많구나. 나중에 피아노 연주자가 될지도 몰라. 좀만 기다려. 엄마가 일 더 해서 음악 선생님을 모셔 줄게.”민영미는 약속을 지켰다. 정말로 피아노 선생님을 구해 줬지만 그 후 건강이 나빠졌다. 민여진은 자신이 피아노를 치는 바람에 민영미가 아프게 됐다고 생각했고 그 이후로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그런데 이제 민영미가 다시 용기를 주었다. 연주를 마친 민여진은 목이 메어왔다.“바보야, 왜 울어? 네가 피아노 치는 모습이 너무 자랑스러운데.”정수향은 민여진의 얼굴을 감싸며 칭찬했다.민여진은 눈물을 참으며 웃었다.“아니에요. 그냥 너무 기뻐서... 엄마가 무사히 돌아와서 나랑 함께 있어 줘서 너무 다행이에요.
박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민여진이 이 사실을 알게 될까 봐 항상 마음을 졸였기 때문이다. 그는 곧바로 물었다.“그래서 지금은? 아직도 의심하고 있어요?”정수향은 고개를 저으며 흉터투성이인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다행히 미리 준비해 둔 덕분에, 바로 의심을 풀었습니다.”“다행이네요.”박진성의 얼굴은 어두웠다.“당신이 옷 갈아입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누군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을 거예요. 내가 알아볼 테니 당신은 당신 할 일이나 제대로 하세요.”“알겠습니다.”정수향은 눈치껏 나가려고 했다.“잠깐만.”박진성은 정수향을 불러 세우고 눈살을 찌푸렸다.“민여진이 선물 살 때 당신은 계속 옆에 있었나요?”“왜 그러세요?”“서원이랑 강태화 선물 말고 다른 것도 샀어요?”정수향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잘 기억이 안 나네요. 제가 계산할 때 잠깐 밖에 나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민여진 씨 손에는 두 개밖에 없었으니 아마 그 두 사람 것뿐이었을 거예요.”박진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알았어요.”그 후 이틀 동안, 정수향도 별장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박진성과 민여진의 사이가 갑자기 서먹해졌다. 아침에 마주쳐도 두어 마디 나누고 박진성은 나가 버렸고 밤늦게야 돌아왔다.꼭 싸운 연인 같았다.하루는 외식을 하다가 정수향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여진아, 엄마가 오지랖 넓게 참견하는 것 같지만 너 혹시 진성이랑 무슨 일 있었니?”민여진은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아... 아니요...”정수향은 웃으며 말했다.“말 못 할 거 뭐 있어? 오래 같이 산 부부도 싸울 때가 있는데 너희는 아직 젊으니까 가끔 싸우는 것도 당연하지. 그런데 벌써 이틀째잖니. 나도 이유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이유요...”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혼란스러운 듯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나도 모르겠어요.”“네가 어떻게 몰라? 다투는 데는 이유가 있어야지. 설마 진성이 혼자 꽁해 있는 거니?”민여진은 정말 몰랐다. 아무리
박진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돈? 무슨 돈?”“선물 산 돈... 나 지금 돈이 없어서 당신 카드를 썼어. 갚을게.”박진성은 갑자기 짜증이 났다. 그는 돈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민여진이 자신의 돈을 쓰는 게 오히려 좋았다.“뭘 그렇게 선을 그어?”박진성은 퉁명스럽게 말했다.“내가 겨우 몇백만 원 가지고 그럴 것 같아?”민여진은 침묵했다.‘돈 때문이 아니라면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박진성은 심호흡을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내 건?”“뭐?”“태화랑 서원이한테는 선물을 사 줬잖아. 그럼 내 선물은 네가 갖고 있는 거야?”이 말에 민여진은 말문이 막혔다.민여진의 멍한 표정을 본 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음침하게 말했다.“민여진, 나한테는 안 사 준 거야?”“난...”민여진은 당황하며 입술을 깨물었다.“뭘 사 줘야 할지 모르겠어. 당신은 부족한 게 없고 갖고 있는 건 다 비싸니까...”박진성은 탁자 위의 물건들을 바닥에 던졌다. 민여진은 깜짝 놀라 박진성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팔을 들어 올렸지만 박진성은 그녀의 옆을 지나쳐 차갑게 위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쾅 닫았다.민여진은 2층을 바라보았다. 박진성이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선물을 사 주지 않았다고?하지만 재벌가로 도도한 박진성에게 부족한 게 뭐가 있을까? 분명 예전처럼 그 물건이 싸구려라고 생각하며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민여진, 꼴값 떨지 마. 이런 유치한 건 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안 주워.”민여진은 멍하니 돌아갔다. 정수향은 침대를 정리하고 있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민여진을 보고 물었다.“여진아, 물 뜨러 간 거 아니었어? 왜 빈손으로 돌아왔어? 못 찾았어?”민여진의 표정을 본 정수향은 하던 일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래?”정수향은 민여진에게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이야?"“엄마, 아무 일도 아니에요.”민여진은 억지로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아, 이거요.”강태화는 넥타이를 다시 매만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민여진 씨가 오늘 쇼핑 나갔다가 선물을 사 왔어요. 제 거는 이 넥타이고 서원이한테는 휴대폰 액세서리를 사 줬어요.”박진성 뒤에 서 있던 서원은 순간 멍해졌다.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민여진이 쇼핑을 나가서 다른 남자들 선물까지 챙겨 오다니.“휴대폰 액세서리는 어디 있어?”강태화는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저는 오늘 약속이 있어서 이만...”“가 봐.”박진성은 짜증스럽게 손을 휘젓고 탁자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는 정말 귀여운 강아지 모양의 휴대폰 액세서리가 담긴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서원의 시선은 좀처럼 액세서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박진성은 뒤돌아 서원을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마음에 들어?”서원은 고개를 저었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민여진 씨가 사 온 건데, 민여진 씨의 마음을 헛되게 할 순 없잖아요.”그 말인즉 그것은 자신의 것이니 갖고 싶다는 뜻이었다.박진성은 순간 불같이 화가 났다. 그는 휴대폰 액세서리를 상자에 담아 손에 들고 말했다.“내가 갖고 있을게. 그럼 마음이 헛되지 않겠지.”서원은 속이 쓰렸지만 감히 불평할 수 없었다.“민여진 씨는 아마 모두에게 선물을 샀을 거예요. 분명 박 대표님 선물도 있을 겁니다. 방에 있을지도 몰라요.”민여진은 꼼꼼한 성격이었다. 결혼 생활 2년 동안,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박진성이 맡긴 일은 항상 완벽하게 처리했다. 물론 이번 선물도 강태화와 서원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박진성은 불쾌하면서도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민여진이 나에게 준 선물은 뭘까?’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박진성은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반쯤 올라가다가 멈춰 서서 서원에게 말했다.“너는 이제 할 일 없으니까 일찍 돌아가 쉬고 내일 다시 와.”박진성은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하지만 침대, 소파, 책장, 어디에도 선물은 없었다.서재에도 없었다.설마 민여진이 직접 주려고 가지고 있는 걸
민여진은 떨리는 입술로 애써 손을 뻗으며 말했다.“엄마, 손... 한번 만져 봐도 돼요?”민영미의 손은 알고 있었다. 굳은살이 박인 그 손을 어렸을 때 잡았던 느낌은 지금과는 달랐다.특히 몇 군데는 유난히 달랐다.전에는 제대로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문채연의 말 때문에 의심이 생겼다.정수향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이야? 여진아... 왜 그래?”“아니에요...”민여진은 심호흡을 하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예전에 엄마 손을 자주 잡았었잖아요. 그때가 갑자기 생각나서. 학교 다닐 때 엄마가 손잡고 집에 데려다주던 게 그리워요...”“그랬구나.”정수향은 웃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민여진이 뭔가를 눈치채고 불안해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그래, 우리 여진이 손잡아 줘야지.”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다.하지만 민여진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혹시나 매끄럽고 부드러운 마치 평생 고생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손을 잡게 될까 봐 말이다.만약 그렇다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민여진은 떨리는 손을 들어 정수향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손에 느껴지는 거친 감촉에 민여진은 순간 멍해졌다. 문채연의 말과는 달리 굳은살이 가득한 손으로 젊은 여자의 손이 아니었다.기쁜 동시에 민여진의 마음은 착잡해졌다. 민영미의 손에 비하면 이 손은 너무 부드러웠다.“왜 그래?”정수향의 마음은 불안했다. 민영미의 영상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손을 눈여겨봤었다.늙고 메말랐으며 굳은살이 가득하고 누렇게 변색된 손이었다.영상 속 민영미는 50대처럼 보였지만 그 손은 마치 말라 죽은 나무처럼 흔적투성이였다.정수향은 그 손을 재현하기 위해 며칠 동안 사포로 자신의 손을 문질렀다. 하지만 민영미의 손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니에요...”민여진은 손가락으로 민영미의 손에서 익숙한 굳은살을 찾았다. 딱딱하고 거친 굳은살이 손끝에 닿자 민여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민영미다. 틀림없는 엄마야!’이곳은 오랫동안
문채연은 혀를 찼다.“민여진, 너 설마 저기 너랑 웃고 떠드는 여자가 민영미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직도 그렇게 순진해? 박진성이 아무 여자나 데려다 놓으니까 진짜인 줄 알겠지?”“진짜 민영미이면 너보다 키가 이렇게 크고 이렇게 젊고 정상인처럼 너랑 같이 옷을 사러 다니겠어? 게다가 외모는 네가 눈이 안 보인다고 해도 너무 멍청한 거 아니야? 저 여자는 관리를 잘해서 주름 하나 없어. 네가 손으로 만져보면 몰라? 저런 여자가 너랑 같이 빈민가에서 고생했던 엄마일 리가 없잖아!”“닥쳐!”민여진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지만 가슴은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뭐라고? 문채연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방금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여자가 엄마가 아니라고? 말도 안 돼. 분명 길에서도 함께 웃고 다정하게 이야기했잖아. 어색한 부분도 전혀 없었는데. 어떻게 낯선 사람일 수가 있지?’민여진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문채연을 노려보며 말했다.“그만해, 문채연! 이런 수작, 언제까지 부릴 거야! 내가 또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우리 엄마는 멀쩡히 살아 계시는데 어떻게 돌아가셨겠어! 넌 그저 나랑 박진성 사이를 갈라놓고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거잖아. 꿈 깨!”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너한테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내가 엄마라고 부른 사람이 누군지!”문채연은 동정하는 어조로 말했다.“정말 알고 있는 거야? 민여진, 너 정말 우스워. 박진성 말은 믿으면서 내 말을 안 믿다니. 잊었어? 널 지옥으로 밀어 넣은 건 박진성이라고!”민여진의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다.‘잊었어? 널 지옥으로 밀어 넣은 건 박진성이라고!’순간, 한기가 온몸을 휘감으며 민여진의 오장육부를 짓눌렀다.민여진의 눈은 붉게 달아올랐고 문채연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민여진, 네가 날 안 믿는 건 당연해. 하지만 네가 확인할 방법은 많다는 걸 알아. 눈은 안 보이지만 손과 입은 있잖아? 결과가 나오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게 되겠지. 나와 박진성 중에.”문채연은
“저 사람들 옆에 다른 사람이 있었나요?”점원은 고개를 저었다.“모녀 두 분뿐이었어요. 다른 사람은 못 봤어요.”문채연은 순간 동공이 수축되며 점원의 팔을 와락 붙잡았다.“모녀? 모녀라니!”그녀의 감정이 격해지자 점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문채연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는지 알 수가 없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지금 문의하신 두 분 말씀이시죠? 두 분은 모녀 사이세요... 얼굴에 흉터가 있는 젊은 여성분이 매장에 들어오자마자 어머니께 옷을 골라드리겠다고 하셨는데, 모녀가 아니면 뭐겠어요...”문채연의 눈에 엄청난 충격이 어렸다. 민영미가 1년 전에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문채연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으니까.그러니 민여진에게 어머니는 있을 수 없었다.문채연은 음침한 표정으로 점원에게 다가가 말했다.“확실해요? 젊은 여자가 저 여자를 자기 어머니라고 인정했다는 게 확실하냐고요?”점원은 마늘 찧듯 고개를 끄덕였다.“백 퍼센트 아주 확실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확실하지 않은 건 말하지 않습니다. 그 젊은 여자분은 매장에 들어온 후로 계속 옆에 있는 분을 엄마라고 불렀어요. 거짓일 리가 없어요.”“알겠어요...”문채연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흔들리며 민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정수향은 문채연을 몰랐고 민여진은 더더욱 볼 수 없었다. 그러니 문채연은 전혀 거리낌 없이 민여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와 낯선 여자에게 의지하는 모습, 행동거지와 말투까지 모두 어머니를 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그러다가 민여진이 하는 말을 들었다.“엄마, 이 옷 괜찮은 것 같아요. 한번 입어봐요. 잘 맞는지.”“하...”문채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차갑게 웃었다.박진성이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해 낯선 여자까지 데려와 민여진을 속였다는 사실이 문채연은 믿기지 않았다.어쩐지, 민여진이 민영미의 죽음에 대해 갑자기 침묵하고 박진성이랑 나가는 것도 받아들이더라니. 처음에 그녀는 민여진이 어머니의 죽음에 무덤덤해진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