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박진성은 방현수가 사무실로 들어간 틈을 타 빠르게 민여진 앞으로 걸어갔다.신나게 케익을 먹고 있던 민여진은 느껴지는 인기척에 방현수가 돌아온 줄 알고 물었다.“왜 또 왔어요? 이거 저번 거보다 더 맛있는 것 같은데, 현수 씨도 먹어볼래요?”입가에 케익을 묻히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박진성은 민여진이 방현수에게 입맞춤을 요구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케익이 제가 모르는 사이에 발전해버린 둘의 사이를 나타내는 것 같아 거슬렸던 박진성은 그걸 바닥으로 쳐냈다.그에 민여진이 당황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때려왔다.“민여진, 너 진짜 잘 숨는다.”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에 민여진은 뒷걸음질을 치며 방현수를 찾았다.“현수 씨...”옷소매를 꼭 말아쥔 채 그네에서 내려온 그녀는 제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지난날의 악몽에 몸을 떨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현수 씨 어딨어요? 현수 씨한테 가야 하는데...”민여진이 힘겹게 발을 떼자마자 박진성은 그녀의 팔을 낚아채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민여진, 언제까지 연기할 거야. 불쌍한 척도 그만하면 됐잖아.”“비켜!”그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 힘을 준 탓에 민여진 본인도 그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한 채 바닥을 더듬거리더니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고 박진성을 향해 겨누며 말했다.“당장 나가, 안 그러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아무 소용도 없는 나뭇가지를 들고 공포에 떠는 민여진을 보던 박진성은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지며 화까지 났다.방현수한테는 그렇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왜 제 앞에서는 이렇게 두려움에 떠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민여진, 네 지금 꼴을 봐. 내가 널 봐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두 남자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른 민여진에 화가 난 박진성은 그녀의 두 팔을 손아귀에 넣으며 말했다.“나는 내 자식 찾으러 온 거야. 우리 앤 어디에 숨긴 거야? 설
“민여진, 내일 다시 올 거니까 기다려.”이를 악물며 말을 마친 그는 곧 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고 그제야 긴장이 풀린 민여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그녀는 저를 부축하는 방현수를 향해 절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현수 씨.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요. 내가 좀 진정을 해야 해서... 괜찮아지면 그때 사실대로 말할게요.”“괜찮아.”하지만 민여진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다는 것쯤은 진작에 눈치챘던 방현수는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하나도 안 중요해. 중요한 건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민여진이라는 거야.”...이튿날, 민여진은 출근하지 않았지만 박진성은 말한 대로 진료실 앞에 도착해있었다.입구로 들어서던 그는 정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민여진이 임신했던 제 아이를 떠올리게 되었다.그 아이가 여기 있었다면 저 애들 못지않게 장난꾸러기였을 것 같아 아이들을 보는 박진성의 눈이 조금은 다정해졌다.그런 생각을 하던 박진성은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기억해내고는 안을 들여다봤지만 원하는 인영이 보이질 않자 곧장 방현수의 사무실로 향했다.환자들에게 진료를 봐주고 있던 방현수는 그를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꾹 참고 처방을 내준 다음 빠르게 환자를 돌려보냈다.“민여진은 어딨어요?”박진성도 그걸 기다렸는지 환자가 나가자마자 방현수를 향해 물었다.“당신이 무슨 염치로 그딴 말을 합니까?”“당신 무서워서 진료소도 못 나온 거잖아요. 제가 당신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 당신이 대영그룹 유일한 후계자더라고요.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왜 여진이한테 그렇게 질척대는 겁니까? 이미 끝난 사이면 깔끔하게 놓아주시죠.”“내가 질척댄다고요?”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사용에 박진성은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착각하신 것 같은데 내가 아무리 모자라도 얼굴이 다 망가진 여자를 좋아하진 않아요. 난 내 아이를 찾으러 온 겁니다.”“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아이라니요?
민여진이 누워있는 습기 가득한 방은 낡아빠진 다락방인 데다가 제대로 된 가구도 없는 허름한 곳이었다.침대만 덜렁 놓인 그곳에서 홀로 울고 있는 민여진이 안쓰러웠던 박진성이 그녀에게로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민여진이 물었다.“현수 씨에요?”몸이 아픈 탓에 그녀의 목소리가 한결 더 가냘파졌는데 그 목소리로 부르는 현수라는 이름이 귀에 꽂히자 박진성은 또 화가 치밀어 올라 잠시나마 느꼈던 연민의 감정도 싹 사라져버렸다.“현수 씨? 누구 꼬시려고 작정했어? 아주 죽고 못 사나 보네 둘이.”예상치 못한 박진성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민여진은 이불을 꽉 붙잡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소리쳤다.“당신이 어떻게 우리 집 열쇠를 가지고 있어?!”“방현수도 가지는 걸 나는 왜 못 가져.”저를 경계하는 민여진이 못마땅했던 그는 바로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었다.“인기척만 들리면 방현수야? 평소에 네 방에 자주 드나들었나 봐? 어젯밤 둘이 설마 같이 자기라도 한 거야?”모욕적인 그의 말에 얼굴이 빨개진 민여진은 손을 휘둘렀지만 박진성은 단번에 그 손까지 낚아챘다.그 반동에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렸고 땀에 젖은 얇은 잠옷이 몸에 달라붙어 몸매를 살짝씩 드러내고 있었다.그 모습에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낀 박진성은 마른 침을 삼켜내며 그녀의 몸을 훑었다.“진짜 대단하다 민여진, 이런 기회도 놓치지 않고 꼬시겠다는 거야?”“하긴, 그런 얼굴을 받아줄 남자가 더는 없을 테니 기회 생길 때마다 열심히 해야지.”그의 말에 낯빛이 창백해진 민여진은 몸을 움츠리며 발버둥 쳤다.만약 박진성이 올 줄 알았더라면 민여진은 더워죽는 한이 있어도 잠옷만 입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이제 와서 내숭이야? 그래도 우리가 부부의 연이 있는데 네가 원한다면 내가 뭔들 못 주겠어?”“원하는 대로 해줄 게 내가.”코웃음을 치던 박진성은 가볍게 그녀의 잠옷을 찢어냈고 차가운 공기가 빠르게 그녀의 몸을 감쌌다.몸이 이렇게 뜨거운데도 느껴지는 한기에 민여진은 박진성을 향해 애원했
민여진이 구급차에 실려 갈 때 박진성은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피가 날 정도로 벽을 세게 내리쳤다.2년 전만 해도 제 주위를 맴돌며 사랑을 갈구하던 민여진이 지금은 도망가고 싶단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이렇게 변한 건지 박진성은 혼란스럽기만 했다.“진성 씨, 괜찮아요?”그때 갑자기 튀어나온 문채연이 박진성에게로 달려오더니 그의 손을 잡으며 간호사더러 빨리 처치부터 하라고 했다.“괜찮아.”하지만 박진성은 이번에도 잡힌 손을 빼내며 물었다.“넌 어떻게 알고 온 거야?”양경호에게서 듣고 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던 문채연이 대충 아무 이유나 찾아 둘러댔다.“친구가 병원에서 검사하다가 우연히 당신을 봤다고 전화해서요.”병실 안에 누워서 링거를 맞고 있는 민여진을 한번 본 문채연은 박진성을 향해 물었다.“저기 누워있는 사람 여진 씨 아니에요?”아직 화가 채 가라앉지 않았던 박진성은 아무리 문채연이라 해도 더 내어줄 인내심이 없어 짤막하게 대꾸했다.“민여진이 좀 다쳐서 내가 병원으로 데리고 왔어.”“여진 씨가 다쳤는데 왜 당신이 병원에 데려와요?”아무리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봐도 문채연은 늘 짓고 있던 미소까지 유지할 수는 없었다.“둘이 따로 만났던 거에요?”“응.”남자의 짧고 굵은 대답에 문채연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얼굴까지 저 모양이 돼버렸는데 왜 박진성은 아직도 민여진을 잊지 못하고 있는지 문채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진성 씨, 당신 여진 씨 만난 이후로 나랑 있는 시간이 얼마나 줄었는지 알아요? 따로 만나기까지 하고 여진 씨 다쳤다고 본인 손은 신경도 안 쓰고... 솔직히 말해요, 아직 여진 씨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죠?”민여진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소리에 제대로 열 받은 박진성은 문채연을 향해 소리 질렀다.“그럴 리가 없잖아!”민여진은 박진성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아양을 떠는 사람일 뿐인데 박진성이 그런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그럼 왜...
“손 부어오르잖아, 움직이지 마!”미간을 찌푸리며 민여진에게로 다가간 박진성이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자 민여진은 또 발작이라도 하듯 발버둥 쳤다.“한 번만 더 움직이면 나도 너한테 무슨 짓 할지 몰라.”그 말에 겁을 집어먹은 민여진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채 다 쉬어버린 목소리를 쥐어짜 내고 있었다.“도대체 뭘 원해서 이러는 거야 당신...”이미 저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 유일하게 문채연과 닮은 얼굴까지 망가뜨려 놓고서 뭘 더 원하는지 민여진은 알 수가 없었다.“민여진, 너 거울 볼 줄 몰라? 내가 너 같은 애한테 왜 질척거리겠어? 난 내 아이를 되찾고 싶을 뿐이야. 제 핏줄이 있는 곳으로 데려갈 거니까 아이만 주면 다신 네 앞에 얼씬도 안 해.”“아이를... 달라고?”박진성의 어이없는 말에 악몽으로 고달팠던 지난날들이 떠올라 민여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아이는 진작에 감옥에서 1년 전 민여진과 함께 죽어버렸는데, 그 죽음을 사주한 사람이 이제 와서 아이를 집에 데려간다니, 정말 우습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웃음을 터뜨리던 민여진이 눈물까지 흘리자 미간을 찌푸린 박진성은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며 물었다.“왜 웃어? 내가 내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게 웃겨?”눈물을 흘리던 민여진은 이 순간 만큼은 눈이 멀어버린 게 참 다행스러웠다.눈이 멀쩡했다면 저 가증스러운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을 텐데 그보다 더 곤욕스러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박진성, 날 괴롭히고 싶은 거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 말도 안 되는 이유 들먹이지 말고.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당신이잖아.”“그게 무슨 소리야?”“무슨 소리냐고?”되묻는 박진성에 민여진은 이불을 부여잡으며 목놓아 울었다.“죽었다고! 당신이 바라던 대로 죽었어! 나한테 얼굴 한번 보여주지 못하고 죽어버렸다고... 이제 만족해?!”누군가 제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은 듯한 멍한 느낌에 벙쪄있던 박진성은 애써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죽었다고? 민여진, 내가 그딴
통화를 마친 양경호는 자책 어린 표정으로 손톱을 짓이겼다.문채연은 그런 양경호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양경호 씨, 이젠 우린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예요,비밀 제대로 지켜요. 만에 하나라도 진성 씨가 알게 되는 날엔 당신도 나도 모두 다 죽는 거예요.”문채연의 명령이라면 다 따르라던 박진성의 지시 때문에 그녀가 시키는 일을 해왔었는데 그게 이렇게 큰일로 번질 줄 양경호도 미처 몰랐었다.민여진이 얼굴을 버리고 아이도 잃은 데다가 눈까지 멀어버렸으니 이 모든 일을 시킨 게 저라는 걸 박진성이 알게 되면 양경호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민여진, 걔는 그런 얼굴을 하고 눈까지 병신이 됐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왜 또 진성 씨 앞에 나타나는 거야 정말!”하지만 이 와중에도 질투심에 눈이 멀어버린 문채연은 손에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민여진을 원망하고 있었다.“지금은 불쌍한 척하며 진성 씨를 흔들어놓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도 얼마 못 갈 거야, 두고 봐 진짜.”...밖에서 새 핸드폰을 산 뒤 담배를 피우던 박진성은 한참 만에 병실로 돌아갔다.“죄송한데 혹시 제 핸드폰 좀 가져다주실 수 있으세요?”“핸드폰이요? 실려 오실 때 핸드폰은 없었는데요?”“아... 그럼 혹시 간호사님 핸드폰 좀 빌릴 수 있을까요?”약을 바르는 중이라 조용히 있었는데 거듭해서 핸드폰을 요구하는 민여진에 박진성은 간호사가 대답도 하기 전에 화를 참으며 물었다.“눈도 멀어버린 게 핸드폰은 왜 찾아?”그 목소리에 더욱더 다급해진 민여진은 계속해서 간호사에게 부탁했다.“핸드폰 한 번만 빌려주세요...”제 말은 깡그리 무시하는 민여진에 화가 난 박진성은 눈짓 한 번으로 간호사를 내보내고 민여진에게로 다가갔다.“핸드폰은 왜 찾냐고, 뭐 설마 방현수한테 전화하려고 그러는 거야? 걔랑은 한시도 못 떨어지겠어?”그에 고개를 떨궈버린 민여진은 이불깃을 여며 쥐며 말했다.“걱정할까 봐 연락만 해주려는 거야.”정말 방현수에게 연락하려 했다는 말에 박진성은 제가 조금
“역겨운 당신 피를 물려받은 애라서 걔가 내 배 속에 있으니까 구역질이 나더라. 너랑 함께했던 내 과거가 너무 후회스러워,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난 그냥 당신이랑은 모르는 사람으로 사는 걸 택할 거야.”박진성도 조금 아파봤으면 해서 한 말인데 민여진의 바람대로 박진성은 가슴이 찢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오름을 느꼈다.제가 없으면 죽을 사람처럼 굴며 모든 사랑을 내어주던 민여진이 이젠 울부짖으며 저한테 역겹다고 하는 건 눈으로 보고도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박진성은 이 모든 게 방현수 때문인 것 같았다.“민여진,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뭐 정말 착한 사람 같아 보여?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상기시켜줘야겠네.”박진성은 민여진의 턱을 잡아 올리며 이를 갈았다.“네가 방금 한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내가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줄게.”말을 마친 그가 문을 세게 열며 나가버리자 민여진은 가빠오는 숨에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그런데 박진성의 마지막 한마디 때문에 그녀는 좀처럼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화가 나면 제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모조리 치워버리는 게 박진성이었기에 그녀는 혹시라도 방현수가 위험해질까 봐 당장 이불을 걷어내고 맨발 바람으로 뛰쳐나가 다른 사람에게 핸드폰을 빌려보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사람들의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저기 문채연이다! 차로 사람을 치어서 죽인 살인범이야!”“십 년형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형 적게 받으려고 얼굴까지 망가뜨린 거 좀 봐, 사람 죽인 년이 자기는 살겠다고 병원엘 와? 더러운 년!”“이제야 얼굴이랑 마음이 좀 같아 보이네, 똑같이 못생겼잖아. 얼른 찍어서 저 못생긴 얼굴로 인터넷에 뿌려버려, 감옥에서는 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저에게로 달려오는 사람들의 인파가 점점 몰려 앞이 보이지 않았던 민여진은 속수무책으로 그들에게 밟힐 수밖에 없었다.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부축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웃고만 있었다.“이게 살인범이 받아야 할 벌
하지만 방현수는 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민여진의 얼굴을 더 깊숙이 밀어 넣으며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그건 잘 모르겠지만 당신들이 병원에 들어와서 이런 식으로 촬영하는 게 불법이라는 건 알아요. 나갈 거니까 다들 비키세요.”“둘 다 똑같은 연놈들이네!”그때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주먹을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수액 걸이로 민여진의 등을 내려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걸 본 방현수가 빠르게 그녀를 잡아당겼지만 민여진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고 말았다.“여진아! 괜찮아? 어디 다쳤어? 봐봐!”“나 괜찮아요.”“거짓말 말고!”“얼른 가요, 나 찾아온 사람들이니까 현수 씨는 이런데 엮이지 말고 빨리 가라고요. 현수 씨가 나 대신 다치는 거 싫어요.”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민여진에 방현수는 그녀를 더욱더 꼭 껴안았다.“널 혼자 두고 가는 그런 나약한 남자 아니야 나.”그때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박진성은 방현수와 민여진이 서로를 꼭 안고 있는 걸 보자 또 혈압이 치솟았다.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그가 바로 달려가 그 둘을 떼어놓으려 하자 문채연이 나서서 박진성을 말렸다.“진성 씨, 당신이 민여진이랑 어떤 사이였는지 잊었어요? 지금 저기 끼어들면 대영그룹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거예요. 저 사람들 다 반쯤 돌아있는데 당신까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요!”아무리 화가 나도 이성이 남아있는 이상 박진성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는 또 주먹으로 벽을 내려쳤다.“대체 누가 저 사람들을 불러온 거야? 얼굴도 다 망가져 버렸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거지?”“큰 죄를 지었으니까 병원에서 알아본 사람이 있었겠죠.”분노를 삭이던 박진성은 바로 경호원들을 불러 사람들을 보내고 다른 사람을 시켜 방현수와 민여진을 뒷문 쪽으로 불러내게 했다.모든 일이 해결되고 민여진과 방현수가 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박진성은 이를 갈며 곧바로 민여진을 품에 안았다.“뭐 하는 짓입니까!”방현수가 이번에도 박진성을 향해 주먹을
“괜찮아.”박진성은 차라리 이 상처가 영원히 아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계속 아파야 한다. 그래야 그가 얼마나 잔인하게 한 사람을 망가뜨렸는지 잊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박진성은 떨리는 눈을 감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떴다.“돌아가자.”서원이 차를 몰아 박진성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런데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문 앞에 서 있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박진성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흐려졌고 눈앞이 아득해졌다.‘민여진인가? 민여진이 날 찾아온 건가?’그는 본능적으로 차에서 내려 몇 걸음 성급하게 내디뎠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고서야 깨달았다.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문채연이었다.“진성 씨!”그녀가 다가왔는데 손을 꼭 쥔 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박진성이 양경호를 찾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었다.문채연은 조심스럽게 박진성을 살폈다. 다행히 양경호가 입을 다물고 있었던 모양이다.박진성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물었다.“왜 왔어? 날씨도 추운데 그냥 돌아가.”“내가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요? 민여진 씨 때문에 진성 씨까지 망가져 가는 걸 두고 볼 순 없었어요!”문채연의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그리고 박진성도 표정이 굳어졌다.그녀의 입에서 ‘민여진’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의 심장이 강하게 조여왔다. 그 고통에 박진성은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그러나 문채연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팔을 더욱 세게 붙잡으며 말했다.“진성 씨 벌써 일주일째 회사에도 안 나가고 있잖아요. 아무리 민여진 씨의 일이 충격적이라도 이건 아니에요. 진성 씨는 보스 그룹의 대표예요!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모든 걸 내팽개쳐도 돼요?”박진성은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고 숨을 가다듬으며 차갑게 말했다.“나도 알아. 회사가 언제 내 도움이 필요한지.”“그런데도 진성 씨는 이렇게 무너지고 있잖아요! 민여진 씨는 이미 떠났어요! 계속 찾는다고 돌아올 사람
“누가 한 짓이야? 언제 벌어진 거야?”서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민여진 씨가 수감되기 전날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바로 민영미 씨가 대표님께 쫓겨난 날이기도 합니다. 민영미 씨가 병원에서 쫓겨난 직후 한 대의 차가 민영미 씨를 데려갔고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켰습니다. 영상도 그날 유출되었고요... 어쩌면 민여진 씨도 이미 봤을지 모릅니다.”박진성의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그리고 민여진이 전화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그녀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고 절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박진성, 네가 날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어.”그러나 그때 그는 코웃음을 쳤고 민여진이 동정심을 사려고 쇼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줬던 모든 것을 도로 가져온 것뿐인데.민여진은 마치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울부짖었고 감옥에 가겠다고 했다. 박진성은 그 이유가 그녀가 누리던 풍족한 삶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고 어머니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 민여진은 이미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는 것을.그 순간 박진성의 뺨을 세게 후려치는 듯한 충격이 몰려왔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던 자신의 태도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던 그녀의 모습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너무 아팠다.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그런데 민여진은 얼마나 더 아팠을까? 사랑했던 사람에게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내몰렸던 그녀가 그를 보고 왜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왜 그렇게 절박하게 도망치려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박진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그리고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누가 한 짓이야?”“양경호 씨입니다.”서원이 그 이름을 말하자 박진성은 정신이 혼미해졌다.“그 자식이 왜?”“아마 대표님을 위해서겠죠. 아니면 문채연 씨를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양경호 씨는 대표님을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대표님이 직접 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대신 처리해 줄 사람입니다.”서원의 주먹이 떨렸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해도 박진성은 포기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미 사흘이 지났고 아무리 찾아도 민여진의 흔적은 없었다. 경찰도 수색을 중단했다.민여진에게 남은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1년 전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그녀와 법적으로 연결된 사람은 오직 남편인 박진성뿐이었다.경찰이 찾아와 사망 확인서에 서명하라고 했다.그 순간 박진성은 손에 쥔 펜을 바닥에 내던졌다.“말도 안 돼요!”그의 태도는 단호했다.“죽었으면 시신이라도 확인 시켜줘요! 민여진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사망했다고 단정 짓는 거예요? 어쩌면 아예 그 차에 타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조사가 잘못된 거라고요!”경찰은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고 한숨을 쉬었다.“목격자도 있고 CCTV에도 분명히 찍혔습니다. 민여진 씨는 차 안에 있었습니다.”“중간에 내렸을 가능성은요?”박진성은 핏발 선 눈으로 경찰을 향해 번뜩였다.“시신을 직접 보기 전까지 서명하지 않을 거예요!”그는 결국 서명하지 않았고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사고 현장인 남산교로 향했다.가드레일은 부서져 있었고 차가 돌진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그 앞에 서자 싸늘한 겨울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박진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그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민여진이 정말 여기서 떨어졌다고?’믿을 수 없는 그는 이를 악물고 두 주먹을 쥐었다.박진성은 다시 힘을 내어 몸을 일으키고 철제 가드레일이 없는 바위 절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그만해!”이정화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그녀는 그를 있는 힘껏 붙잡았다.“이제 됐잖아! 언제까지 이렇게 미쳐 있을 거야! 여기서 떨어지면 끝이야. 사람이 이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민여진은 죽지 않았어요.”박진성은 이를 악물었다.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그는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민여진은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자신을 벌주려고 숨어 있는 것뿐이라고
“닥쳐요!”박진성이 미친 듯이 고함쳤다.순간 배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눈앞이 흐려지면서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민여진이 탄 차가 바다로 추락했다고? 죽었다는 말이야? 말도 안 돼...’어제까지만 해도 그를 저주하던 여자였다. 그를 끌어내고 어머니 대신 복수를 하겠다며 맹렬히 달려들던 여자였다. 그리고 그를 죽이라고 외치던 여자였다.그런 여자가 이제 생사조차 알 수 없다고?박진성은 눈앞이 새까매지더니 그대로 쓰러졌다.“민여진... 민여진...”희미한 의식 속에서 그는 그녀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다.간호사의 비명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고 그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박진성은 꿈을 꾸었고 다시 민여진이 교도소에 갇혔던 그 해로 돌아갔다.그는 별장으로 돌아오면 항상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민여진, 표고버섯죽 끓여줘.”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깨달았다. 이제 민여진은 없다고.새로 고용된 가정부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표님, 혹시 그분이 아주 소중한 분이셨나요? 이미 떠난 지 꽤 되셨잖아요. 표고버섯죽은 제가 끓일게요!”민여진은 감옥에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늦은 밤 업무를 마치고 머리가 지끈거리면 박진성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방을 찾았다.“민여진, 마사지 좀 해줘.”그러나 돌아온 것은 어둠뿐. 그는 찌푸린 얼굴로 문을 닫았다.처음에는 단순한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2년 동안 민여진이 그의 모든 순간에 함께했으니까. 그러니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서 그 빈자리가 쉽게 채워질 리 없었다.하지만 습관은 바뀌는 법. 그 자리에 다른 습관이 들어오면 그는 민여진을 잊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는 민여진을 그리워했다.그녀의 영리함을, 그녀의 눈치 빠름을, 그녀의 순응적인 태도를. 민여진은 항상 마치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듯했다. 그렇게 그는 그녀에게 ‘길들여져’ 있었다.민여진이 실종되었을 때도 박진성은 확신했다. 그녀가 돌아올 것이라고.왜냐
강렬한 후회와 두려움이 박진성을 휘감자 그는 머리가 어지러웠다.숨을 고르고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 서원이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박진성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조금만 더 기다려... 내가 한 번 더 만나서 설득해 볼게.”그는 민여진을 보낼 수 없었다. 절대로.그러나 박진성이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경찰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민여진이 입장을 바꿔 사적으로 해결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박진성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경찰은 병원까지 찾아와 확인했다. 민여진이 고의로 그를 해한 것이 아니었으며 박진성 역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자 이 일은 그대로 종결되었다.경찰이 떠나자마자 박진성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대표님!”서원이 다급하게 뛰어왔다.“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상처가 다시 벌어질 수도 있어요!”하지만 박진성은 수많은 감정이 얽혀서 몰려와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그는 서원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경찰서로 가서 민여진을 데려와.”서원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죽음을 불사할 듯하던 민여진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사적으로 해결하겠다고 할 줄은.박진성은 생각했다.‘혹시 민여진이 날 용서한 걸까? 혹시 내 변명을 들어줄 마음이 생긴 걸까? 아니면... 이 모든 걸 뒤로하고 그냥 끝내려는 걸까?’그렇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박진성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눈앞이 어두워질 만큼 피곤했음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기다렸고 마침내 서원의 전화가 걸려왔다.“대표님...”그런데 서원의 목소리가 낮았고 뭔가 이상했다.박진성은 눈썹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 민여진은? 병원으로 데려오라고 했잖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서원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민여진 씨가... 경찰서에서 풀려나자마자 차를 타고 떠났습니다.”“뭐?”박진성의 가슴 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감정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찔렀다.그는 황급히 소리쳤다.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이 방법밖에 없었다.“민여진은 평소에 너랑 접촉이 제일 많았잖아. 네가 가면 적어도 거부하진 않겠지. 가서 민여진을 설득해. 이대로 계속 버티면 아무도 구해 줄 수 없다고.”민여진이 경찰서에 있는 동안 박진성은 단 하루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그리고 서원은 결국 그녀를 만났다.유치장에서 마주한 그녀는 저번보다도 더 초라했다. 시력을 잃은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외형을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옷도 얼룩져 있었으며 마치 미치광이 같았다.서원은 유리창 너머로 그녀를 보자 가슴이 저릿해졌다.그는 천천히 수화기를 들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민여진 씨,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전에 겪어보셨으니 누구보다도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이 사건이 어떻게 끝날지. 교도소에 가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요.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그러나 민여진은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서원 씨가 날 설득하러 온 거면 더 이상 할 얘기 없어요.”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일어서려 했다.그 순간 서원은 가슴이 찢어질 듯했고 다급히 외쳤다.“죄송합니다!”민여진은 그 말을 듣고 움직임을 멈췄다.서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억눌려 있던 후회가 터져 나왔다.“전 진실을 알고 있었어요. 민여진 씨가 만났던 민영미 씨가 가짜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기회는 많았어요. 민여진 씨에게 말할 수도 있었고 도울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결국 제가 속였습니다. 민여진 씨는 절 믿어주셨는데... 제가 민여진 씨를 배신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민여진은 가만히 그의 고백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서원 씨.”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했다.“난 서원 씨를 탓한 적 없어요. 서원 씨는 박진성의 부하일 뿐이잖아요. 날 위해 박진성에게 맞설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어요.”그러나 오히려 민여진의 이렇게 담담한 태도가 서원의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곧
민여진은 미친 듯이 몸부림쳤고 입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박진성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통증도 잊은 채 소리쳤다.“그만해요! 안 보여요? 지금 얼마나 아파하는지!”경찰들은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결국 손을 놓았다.그 순간 힘이 풀린 민여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은 초점을 잃었고 온몸은 거대한 슬픔을 짊어진 듯 무거웠다.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박진성, 넌 정말 사람을 짓밟는 데 능숙하구나.”박진성은 그녀의 마음을 이용했다. 그의 잘못을 덮기 위해 그녀의 감정을 내던졌다.‘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넘어가자’, 그 한마디로 그는 모든 걸 지우려 했다.과거에도 그녀의 마음을 우습게 여기더니 지금도 변함없었다. 사람을 철저히 짓밟는 데 있어 박진성보다 더한 이는 없었다.이에 민여진은 완전히 무너졌다. 마치 심장이 바닥에 내던져져 짓밟히고 부서져 가루가 된 기분이었다.그리고 이제는 모든 감정조차 희미해졌다. 주변 소리가 멀어져 갔고 그녀는 벽을 더듬으며 일어섰다.박진성이 여전히 무언가를 소리치고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문을 나섰다.그 순간 박진성은 힘없이 자리에 쓰러졌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러자 경찰이 상황을 파악하고 급히 119에 신고했다.병원으로 실려 가는 동안 그의 눈꺼풀은 천천히 감겼다.이정화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아들이 수혈을 마친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넌 정말 목숨이 아깝지도 않니?”그녀는 화가 나 손가락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그 여자는 널 감옥에 집어넣으려고 발악하는데 너는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또 찾아가? 죽으려고 작정했어? 내가 도대체 뭘 낳은 거야!”박진성은 눈을 감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입술이 새하얗게 바싹 말라 있었다.문채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조차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몸을 내던지면서 경찰서까지 찾아갔다는 사실을.이정화는 이를 악물었다.“너는 일이 조용히 끝나
마치 감각을 잃은 듯 가만히 앉아 있던 민여진의 눈동자가 갑자기 미세하게 흔들렸다.오랫동안 손길이 닿지 않은 우물처럼 메마른 눈빛에 갑자기 증오가 물들었다.“상관없어.”너무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일까. 그녀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거기에 서늘한 조소까지 섞여 있었다.“감옥에 가는 게 뭐 어때서. 처음도 아닌데, 이미 익숙해. 난 얼마든지 다시 갈 수 있어. 하지만 넌...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거야.”그녀의 눈동자 속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증오가 박진성의 가슴을 송곳처럼 찔러왔다.“날 무너뜨리려고 네 인생까지 던질 거란 말이야?”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민여진을 바라보았다.“너의 꿈은? 너의 미래는? 그렇게 다 버릴 수 있어?”“미래?”민여진은 순간 피식하고 웃었다.그러나 그 웃음은 너무나 아팠고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그건 네가 이미 망쳐 놓았잖아.”박진성이 어떻게 그녀 앞에서 꿈과 미래를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민여진은 원래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었다. 대단한 연주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어머니와 함께 평범하게 살 수 있었다.그러나 박진성이 그녀의 두 눈을 앗아갔고 유일한 가족마저 잔인하게 빼앗았다.그런데 그런 놈이 이제 와서 미래를 말한다고?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민여진, 흥분하지 마...”박진성은 배를 감싼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고 입술이 창백해졌다.“진정하고 생각해 봐. 너한테는 아무 증거도 없어. 네가 혼자서 박씨 가문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네 앞에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어. 감옥에 가든가, 아니면 내 말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든가.”“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라고?”눈물이 민여진의 두 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우리 엄마가 죽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라고?”“나도 많이 놀랐어. 하지만 아주머니는 원래 상태가 불안정했잖아. 최선을 다해 대비했지만 삼 층에서 뛰어내릴 줄은...”“그래서 날 속였어? 다른 여자를 데려와
민여진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몸을 가누었다. 하지만 눈은 이미 핏발이 서 있었다.그녀는 변호사와 경찰들을 노려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왜 나를 속였어요?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 내 사건을 다시 조사해 준다고!”경찰서장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수사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해요. 민여진 씨 혼자서 살인미수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1년 전 결과가 갑자기 바뀔 것 같아요?”“그만해요...”서원이 민여진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그는 알았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을.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민여진 씨, 이제 그만해요. 대표님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고 나머지는 대표님께 맡겨요. 그러면 민여진 씨는 무사히 경찰서에서 나갈 수 있어요!”“고소를 취하하라고요?”민여진의 텅 빈 듯한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러나 곧이어 그 눈빛에 뼛속까지 스며든 증오가 서렸다.“내가 감옥에 가게 생겼고 우리 엄마가 처참하게 죽었는데... 이 모든 게 그냥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아요? 서원 씨, 역시 박진성의 부하다운 발상을 하는군요. 박진성한테 전해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다시 감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난 끝까지 박진성을 고발할 거예요.”그 말에 서원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민여진 씨...”“날 데려가 줘요.”민여진은 옆에 있는 경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표정은 차갑고 결연했다.그녀는 살인미수를 인정한 순간부터 이곳을 멀쩡히 걸어 나갈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만약 박진성을 무너뜨릴 수 없다면 적어도 그의 통제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뭐?”병실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박진성은 순간 눈앞이 흐려지고 숨이 거칠어졌다. 방금 꿰맨 상처에서 다시 통증이 밀려왔다.“민여진이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날 고소하려 했단 말이야?”“네...”서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경찰서 밖에 서 있었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믿을 수 없었다. 그동안 평온하게 유지되던 관계가 결국 이 지경까지 와 버릴 줄은.“게다가 민여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