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박진성은 방현수가 사무실로 들어간 틈을 타 빠르게 민여진 앞으로 걸어갔다.신나게 케익을 먹고 있던 민여진은 느껴지는 인기척에 방현수가 돌아온 줄 알고 물었다.“왜 또 왔어요? 이거 저번 거보다 더 맛있는 것 같은데, 현수 씨도 먹어볼래요?”입가에 케익을 묻히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박진성은 민여진이 방현수에게 입맞춤을 요구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케익이 제가 모르는 사이에 발전해버린 둘의 사이를 나타내는 것 같아 거슬렸던 박진성은 그걸 바닥으로 쳐냈다.그에 민여진이 당황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때려왔다.“민여진, 너 진짜 잘 숨는다.”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에 민여진은 뒷걸음질을 치며 방현수를 찾았다.“현수 씨...”옷소매를 꼭 말아쥔 채 그네에서 내려온 그녀는 제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지난날의 악몽에 몸을 떨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현수 씨 어딨어요? 현수 씨한테 가야 하는데...”민여진이 힘겹게 발을 떼자마자 박진성은 그녀의 팔을 낚아채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민여진, 언제까지 연기할 거야. 불쌍한 척도 그만하면 됐잖아.”“비켜!”그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 힘을 준 탓에 민여진 본인도 그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한 채 바닥을 더듬거리더니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고 박진성을 향해 겨누며 말했다.“당장 나가, 안 그러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아무 소용도 없는 나뭇가지를 들고 공포에 떠는 민여진을 보던 박진성은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지며 화까지 났다.방현수한테는 그렇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왜 제 앞에서는 이렇게 두려움에 떠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민여진, 네 지금 꼴을 봐. 내가 널 봐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두 남자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른 민여진에 화가 난 박진성은 그녀의 두 팔을 손아귀에 넣으며 말했다.“나는 내 자식 찾으러 온 거야. 우리 앤 어디에 숨긴 거야? 설
“민여진, 내일 다시 올 거니까 기다려.”이를 악물며 말을 마친 그는 곧 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고 그제야 긴장이 풀린 민여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그녀는 저를 부축하는 방현수를 향해 절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현수 씨.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요. 내가 좀 진정을 해야 해서... 괜찮아지면 그때 사실대로 말할게요.”“괜찮아.”하지만 민여진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다는 것쯤은 진작에 눈치챘던 방현수는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하나도 안 중요해. 중요한 건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민여진이라는 거야.”...이튿날, 민여진은 출근하지 않았지만 박진성은 말한 대로 진료실 앞에 도착해있었다.입구로 들어서던 그는 정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민여진이 임신했던 제 아이를 떠올리게 되었다.그 아이가 여기 있었다면 저 애들 못지않게 장난꾸러기였을 것 같아 아이들을 보는 박진성의 눈이 조금은 다정해졌다.그런 생각을 하던 박진성은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기억해내고는 안을 들여다봤지만 원하는 인영이 보이질 않자 곧장 방현수의 사무실로 향했다.환자들에게 진료를 봐주고 있던 방현수는 그를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꾹 참고 처방을 내준 다음 빠르게 환자를 돌려보냈다.“민여진은 어딨어요?”박진성도 그걸 기다렸는지 환자가 나가자마자 방현수를 향해 물었다.“당신이 무슨 염치로 그딴 말을 합니까?”“당신 무서워서 진료소도 못 나온 거잖아요. 제가 당신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 당신이 대영그룹 유일한 후계자더라고요.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왜 여진이한테 그렇게 질척대는 겁니까? 이미 끝난 사이면 깔끔하게 놓아주시죠.”“내가 질척댄다고요?”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사용에 박진성은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착각하신 것 같은데 내가 아무리 모자라도 얼굴이 다 망가진 여자를 좋아하진 않아요. 난 내 아이를 찾으러 온 겁니다.”“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아이라니요?
민여진이 누워있는 습기 가득한 방은 낡아빠진 다락방인 데다가 제대로 된 가구도 없는 허름한 곳이었다.침대만 덜렁 놓인 그곳에서 홀로 울고 있는 민여진이 안쓰러웠던 박진성이 그녀에게로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민여진이 물었다.“현수 씨에요?”몸이 아픈 탓에 그녀의 목소리가 한결 더 가냘파졌는데 그 목소리로 부르는 현수라는 이름이 귀에 꽂히자 박진성은 또 화가 치밀어 올라 잠시나마 느꼈던 연민의 감정도 싹 사라져버렸다.“현수 씨? 누구 꼬시려고 작정했어? 아주 죽고 못 사나 보네 둘이.”예상치 못한 박진성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민여진은 이불을 꽉 붙잡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소리쳤다.“당신이 어떻게 우리 집 열쇠를 가지고 있어?!”“방현수도 가지는 걸 나는 왜 못 가져.”저를 경계하는 민여진이 못마땅했던 그는 바로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었다.“인기척만 들리면 방현수야? 평소에 네 방에 자주 드나들었나 봐? 어젯밤 둘이 설마 같이 자기라도 한 거야?”모욕적인 그의 말에 얼굴이 빨개진 민여진은 손을 휘둘렀지만 박진성은 단번에 그 손까지 낚아챘다.그 반동에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렸고 땀에 젖은 얇은 잠옷이 몸에 달라붙어 몸매를 살짝씩 드러내고 있었다.그 모습에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낀 박진성은 마른 침을 삼켜내며 그녀의 몸을 훑었다.“진짜 대단하다 민여진, 이런 기회도 놓치지 않고 꼬시겠다는 거야?”“하긴, 그런 얼굴을 받아줄 남자가 더는 없을 테니 기회 생길 때마다 열심히 해야지.”그의 말에 낯빛이 창백해진 민여진은 몸을 움츠리며 발버둥 쳤다.만약 박진성이 올 줄 알았더라면 민여진은 더워죽는 한이 있어도 잠옷만 입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이제 와서 내숭이야? 그래도 우리가 부부의 연이 있는데 네가 원한다면 내가 뭔들 못 주겠어?”“원하는 대로 해줄 게 내가.”코웃음을 치던 박진성은 가볍게 그녀의 잠옷을 찢어냈고 차가운 공기가 빠르게 그녀의 몸을 감쌌다.몸이 이렇게 뜨거운데도 느껴지는 한기에 민여진은 박진성을 향해 애원했
민여진이 구급차에 실려 갈 때 박진성은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피가 날 정도로 벽을 세게 내리쳤다.2년 전만 해도 제 주위를 맴돌며 사랑을 갈구하던 민여진이 지금은 도망가고 싶단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이렇게 변한 건지 박진성은 혼란스럽기만 했다.“진성 씨, 괜찮아요?”그때 갑자기 튀어나온 문채연이 박진성에게로 달려오더니 그의 손을 잡으며 간호사더러 빨리 처치부터 하라고 했다.“괜찮아.”하지만 박진성은 이번에도 잡힌 손을 빼내며 물었다.“넌 어떻게 알고 온 거야?”양경호에게서 듣고 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던 문채연이 대충 아무 이유나 찾아 둘러댔다.“친구가 병원에서 검사하다가 우연히 당신을 봤다고 전화해서요.”병실 안에 누워서 링거를 맞고 있는 민여진을 한번 본 문채연은 박진성을 향해 물었다.“저기 누워있는 사람 여진 씨 아니에요?”아직 화가 채 가라앉지 않았던 박진성은 아무리 문채연이라 해도 더 내어줄 인내심이 없어 짤막하게 대꾸했다.“민여진이 좀 다쳐서 내가 병원으로 데리고 왔어.”“여진 씨가 다쳤는데 왜 당신이 병원에 데려와요?”아무리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봐도 문채연은 늘 짓고 있던 미소까지 유지할 수는 없었다.“둘이 따로 만났던 거에요?”“응.”남자의 짧고 굵은 대답에 문채연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얼굴까지 저 모양이 돼버렸는데 왜 박진성은 아직도 민여진을 잊지 못하고 있는지 문채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진성 씨, 당신 여진 씨 만난 이후로 나랑 있는 시간이 얼마나 줄었는지 알아요? 따로 만나기까지 하고 여진 씨 다쳤다고 본인 손은 신경도 안 쓰고... 솔직히 말해요, 아직 여진 씨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죠?”민여진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소리에 제대로 열 받은 박진성은 문채연을 향해 소리 질렀다.“그럴 리가 없잖아!”민여진은 박진성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아양을 떠는 사람일 뿐인데 박진성이 그런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그럼 왜...
“손 부어오르잖아, 움직이지 마!”미간을 찌푸리며 민여진에게로 다가간 박진성이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자 민여진은 또 발작이라도 하듯 발버둥 쳤다.“한 번만 더 움직이면 나도 너한테 무슨 짓 할지 몰라.”그 말에 겁을 집어먹은 민여진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채 다 쉬어버린 목소리를 쥐어짜 내고 있었다.“도대체 뭘 원해서 이러는 거야 당신...”이미 저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 유일하게 문채연과 닮은 얼굴까지 망가뜨려 놓고서 뭘 더 원하는지 민여진은 알 수가 없었다.“민여진, 너 거울 볼 줄 몰라? 내가 너 같은 애한테 왜 질척거리겠어? 난 내 아이를 되찾고 싶을 뿐이야. 제 핏줄이 있는 곳으로 데려갈 거니까 아이만 주면 다신 네 앞에 얼씬도 안 해.”“아이를... 달라고?”박진성의 어이없는 말에 악몽으로 고달팠던 지난날들이 떠올라 민여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아이는 진작에 감옥에서 1년 전 민여진과 함께 죽어버렸는데, 그 죽음을 사주한 사람이 이제 와서 아이를 집에 데려간다니, 정말 우습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웃음을 터뜨리던 민여진이 눈물까지 흘리자 미간을 찌푸린 박진성은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며 물었다.“왜 웃어? 내가 내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게 웃겨?”눈물을 흘리던 민여진은 이 순간 만큼은 눈이 멀어버린 게 참 다행스러웠다.눈이 멀쩡했다면 저 가증스러운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을 텐데 그보다 더 곤욕스러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박진성, 날 괴롭히고 싶은 거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 말도 안 되는 이유 들먹이지 말고.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당신이잖아.”“그게 무슨 소리야?”“무슨 소리냐고?”되묻는 박진성에 민여진은 이불을 부여잡으며 목놓아 울었다.“죽었다고! 당신이 바라던 대로 죽었어! 나한테 얼굴 한번 보여주지 못하고 죽어버렸다고... 이제 만족해?!”누군가 제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은 듯한 멍한 느낌에 벙쪄있던 박진성은 애써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죽었다고? 민여진, 내가 그딴
통화를 마친 양경호는 자책 어린 표정으로 손톱을 짓이겼다.문채연은 그런 양경호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양경호 씨, 이젠 우린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예요,비밀 제대로 지켜요. 만에 하나라도 진성 씨가 알게 되는 날엔 당신도 나도 모두 다 죽는 거예요.”문채연의 명령이라면 다 따르라던 박진성의 지시 때문에 그녀가 시키는 일을 해왔었는데 그게 이렇게 큰일로 번질 줄 양경호도 미처 몰랐었다.민여진이 얼굴을 버리고 아이도 잃은 데다가 눈까지 멀어버렸으니 이 모든 일을 시킨 게 저라는 걸 박진성이 알게 되면 양경호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민여진, 걔는 그런 얼굴을 하고 눈까지 병신이 됐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왜 또 진성 씨 앞에 나타나는 거야 정말!”하지만 이 와중에도 질투심에 눈이 멀어버린 문채연은 손에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민여진을 원망하고 있었다.“지금은 불쌍한 척하며 진성 씨를 흔들어놓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도 얼마 못 갈 거야, 두고 봐 진짜.”...밖에서 새 핸드폰을 산 뒤 담배를 피우던 박진성은 한참 만에 병실로 돌아갔다.“죄송한데 혹시 제 핸드폰 좀 가져다주실 수 있으세요?”“핸드폰이요? 실려 오실 때 핸드폰은 없었는데요?”“아... 그럼 혹시 간호사님 핸드폰 좀 빌릴 수 있을까요?”약을 바르는 중이라 조용히 있었는데 거듭해서 핸드폰을 요구하는 민여진에 박진성은 간호사가 대답도 하기 전에 화를 참으며 물었다.“눈도 멀어버린 게 핸드폰은 왜 찾아?”그 목소리에 더욱더 다급해진 민여진은 계속해서 간호사에게 부탁했다.“핸드폰 한 번만 빌려주세요...”제 말은 깡그리 무시하는 민여진에 화가 난 박진성은 눈짓 한 번으로 간호사를 내보내고 민여진에게로 다가갔다.“핸드폰은 왜 찾냐고, 뭐 설마 방현수한테 전화하려고 그러는 거야? 걔랑은 한시도 못 떨어지겠어?”그에 고개를 떨궈버린 민여진은 이불깃을 여며 쥐며 말했다.“걱정할까 봐 연락만 해주려는 거야.”정말 방현수에게 연락하려 했다는 말에 박진성은 제가 조금
“역겨운 당신 피를 물려받은 애라서 걔가 내 배 속에 있으니까 구역질이 나더라. 너랑 함께했던 내 과거가 너무 후회스러워,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난 그냥 당신이랑은 모르는 사람으로 사는 걸 택할 거야.”박진성도 조금 아파봤으면 해서 한 말인데 민여진의 바람대로 박진성은 가슴이 찢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오름을 느꼈다.제가 없으면 죽을 사람처럼 굴며 모든 사랑을 내어주던 민여진이 이젠 울부짖으며 저한테 역겹다고 하는 건 눈으로 보고도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박진성은 이 모든 게 방현수 때문인 것 같았다.“민여진,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뭐 정말 착한 사람 같아 보여?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상기시켜줘야겠네.”박진성은 민여진의 턱을 잡아 올리며 이를 갈았다.“네가 방금 한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내가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줄게.”말을 마친 그가 문을 세게 열며 나가버리자 민여진은 가빠오는 숨에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그런데 박진성의 마지막 한마디 때문에 그녀는 좀처럼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화가 나면 제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모조리 치워버리는 게 박진성이었기에 그녀는 혹시라도 방현수가 위험해질까 봐 당장 이불을 걷어내고 맨발 바람으로 뛰쳐나가 다른 사람에게 핸드폰을 빌려보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사람들의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저기 문채연이다! 차로 사람을 치어서 죽인 살인범이야!”“십 년형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형 적게 받으려고 얼굴까지 망가뜨린 거 좀 봐, 사람 죽인 년이 자기는 살겠다고 병원엘 와? 더러운 년!”“이제야 얼굴이랑 마음이 좀 같아 보이네, 똑같이 못생겼잖아. 얼른 찍어서 저 못생긴 얼굴로 인터넷에 뿌려버려, 감옥에서는 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저에게로 달려오는 사람들의 인파가 점점 몰려 앞이 보이지 않았던 민여진은 속수무책으로 그들에게 밟힐 수밖에 없었다.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부축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웃고만 있었다.“이게 살인범이 받아야 할 벌
하지만 방현수는 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민여진의 얼굴을 더 깊숙이 밀어 넣으며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그건 잘 모르겠지만 당신들이 병원에 들어와서 이런 식으로 촬영하는 게 불법이라는 건 알아요. 나갈 거니까 다들 비키세요.”“둘 다 똑같은 연놈들이네!”그때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주먹을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수액 걸이로 민여진의 등을 내려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걸 본 방현수가 빠르게 그녀를 잡아당겼지만 민여진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고 말았다.“여진아! 괜찮아? 어디 다쳤어? 봐봐!”“나 괜찮아요.”“거짓말 말고!”“얼른 가요, 나 찾아온 사람들이니까 현수 씨는 이런데 엮이지 말고 빨리 가라고요. 현수 씨가 나 대신 다치는 거 싫어요.”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민여진에 방현수는 그녀를 더욱더 꼭 껴안았다.“널 혼자 두고 가는 그런 나약한 남자 아니야 나.”그때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박진성은 방현수와 민여진이 서로를 꼭 안고 있는 걸 보자 또 혈압이 치솟았다.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그가 바로 달려가 그 둘을 떼어놓으려 하자 문채연이 나서서 박진성을 말렸다.“진성 씨, 당신이 민여진이랑 어떤 사이였는지 잊었어요? 지금 저기 끼어들면 대영그룹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거예요. 저 사람들 다 반쯤 돌아있는데 당신까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요!”아무리 화가 나도 이성이 남아있는 이상 박진성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는 또 주먹으로 벽을 내려쳤다.“대체 누가 저 사람들을 불러온 거야? 얼굴도 다 망가져 버렸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거지?”“큰 죄를 지었으니까 병원에서 알아본 사람이 있었겠죠.”분노를 삭이던 박진성은 바로 경호원들을 불러 사람들을 보내고 다른 사람을 시켜 방현수와 민여진을 뒷문 쪽으로 불러내게 했다.모든 일이 해결되고 민여진과 방현수가 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박진성은 이를 갈며 곧바로 민여진을 품에 안았다.“뭐 하는 짓입니까!”방현수가 이번에도 박진성을 향해 주먹을
박진성은 유서 위에 종이를 덮으면서, 그의 눈은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저기요, 뭐 하는 분이시죠?”서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박진성이 고개를 들자, 멀리서 한 여자가 당황한 기색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서원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잘못했어요! 문채연 씨... 제발 저를 경찰서에 넘기지 말아주세요...”서원은 잠시 멈칫했다.“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여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그 눈먼 여자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딱해 보여서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일이 문채연 씨를 죽음으로 몰게 될 줄은 몰랐어요...”박진성,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는 분노에 찬 듯 벌떡 일어나며 그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눈먼 여자라니!”그 여자는 박진성의 강렬한 기세에 움찔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었다.“박 대표님! 박 대표님, 제가 다 말할게요! 그 여자가 시켰어요! 다 그 여자가 시킨 대로 한 거예요!”“대체 누구의 말을 따랐다는 거야!”박진성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분노에 차서 말했다.“헛소리 그만하고 똑바로 말해!!”여자는 간신히 진정하며 입을 열었다.“전 원래 이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었어요. 19일, 평소처럼 각 병실을 돌며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1209호실에 들어갔을 때... 그 방에 있던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가 갑자기 저에게 애절하게 부탁했어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제 손을 세게 움켜쥐고 어떻게든 피 나고 살집이 뜯기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나중에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래서 제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자, 문채연 씨를 쫓아내고 박 대표님을 다시 자기 곁으로 돌려놓으려 한다고 했어요.”“그게 정말이야?”“네! 문채연은 불륜녀라고 하면서 자기가 배신당한 조강지처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욱하는 마음에 그 여자를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박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민여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 속에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민여진은 손끝을 힘껏 쥐었다. 예전엔 그녀도 박진성이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라는 걸 믿었지만, 지금은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게 되었다.‘만약 그가 정말 문채연의 복수를 위해 이 일을 꾸몄다면, 왜 문채연에게 사과를 강요했을까?’“대답해. 맞아? 아니야?”“아니야.”박진성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결국 짧게 대답했다. 그 후 입술을 얇게 일그러뜨렸다.“네 머릿속에서 나는 그런 놈이야? 피도 눈물도 없이 널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인간으로 보여?”‘아니라고?’민여진의 머릿속이 엉켜버렸다. 이때 손목의 상처가 욱신거리며 다시금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민여진,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만약 내가 널 납치한 거라면, 내가 하루 종일 눈도 붙이지 않고 폭우 속에서 널 찾아다닐 이유가 뭐야? 그 남자를 보내버릴...”그는 순간 말을 멈췄다. 눈빛이 흔들렸고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방금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뭐라고?”민여진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물었다.“어디로 보냈다는 거야?”박진성은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함을 드러냈다.“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거짓말할 필요 없지.’박진성은 어차피 자기 손바닥 안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그렇다면 내가 당한 그 모든 일들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날 속이기 위해 벌인 연극이었나?’순간, 그녀의 가슴 속이 뒤집히듯 요동쳤다. 잘못된 사람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민여진!”갑자기 몸을 돌려 눕는 그녀를 보며, 박진성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아직 나한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답하지 않았어!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했어? 이 납치 사건이 내가
“손 좀 내밀어.”박진성은 창가에 서 있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그의 완벽한 이목구비를 감쌌지만, 오늘만큼은 그 얼굴에서 한 줌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의 목소리조차 싸늘했다.“손은 왜... 무슨 일이에요?”문채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뭐가 그렇게 심각한 건지, 정말 걱정 되네요.”박진성은 그녀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이틀이 지나면서 손톱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양옆이 사선으로 깎여 있었으며, 중앙 부분이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다.이 상태에서 힘을 주어 누군가를 움켜쥔다면, 단순히 살이 파이고 긁히는 정도가 아니라 고기 한 덩이가 뜯겨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손톱에 손댔어?”박진성은 그녀를 응시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네?”문채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재빨리 거둬들였다.“요즘 네일숍에서 디자인을 바꾸려고 다듬어서 그런 거예요.”박진성은 그녀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여진이의 손에 난 상처, 네가 한 짓이야?”문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며칠 전 일이잖아. 왜 이제 와서 이걸 들춰내는 거야?’“상처라니요?”문채연은 곧 정신을 가다듬고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여진 씨, 또 다쳤어요? 어디 다친 거예요? 괜찮아요?”박진성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문채연을 지켜보았다.문채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눈물이 고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진성 씨... 그 눈빛은 무슨 뜻이에요? 설마,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박진성은 깊은숨을 들이마셨고 애초에 믿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라면 의심하지 않는 쪽이 더 어리석은 일일지도 몰랐다.“민여진 손에는 깊게 파인 상처가 가득해. 19일, 그날 너희 둘은 손을 맞잡은 적이 있었잖아.”문채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갔고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진성 씨, 그래서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제가 일부러 여진 씨 손을 그
“자, 이제 다 짜냈으니까 조금 아플 겁니다. 절대 물 묻히지 말고, 매운 음식은 당분간 피해주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흉터는 체질에 따라 다를 거예요.”“감사합니다.”간호사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말한 뒤, 정리를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병실은 숨이 막힐 듯한 적막에 휩싸였다.박진성은 손가락 마디를 꽉 쥐고 몇 번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정말 네 말이 다 사실이면, 왜 한 번이라도 더 설명하려 하지 않았어?”민여진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한 마디만 해도 비웃고 모욕하는데, 내가 왜 또 말해야 해? 또 그런 꼴을 당하고 싶어야 말이지.’박진성은 스스로도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 말했다.“민여진, 네가 예전에 했던 일도 있는데, 솔직히 너를 믿기가 쉽겠어?”“그만해. 나 너무 피곤해. 정말 좀 쉬고 싶어.”그녀는 눈을 감고 몸을 돌렸다. 박진성은 그녀가 절대 잠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몰아붙이지는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박진성이 다시 물었다.“그날 밤, 왜 채연이를 그렇게 목 졸랐어? 내가 쓰러져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별일 없었어.”민여진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설명한다고 해서 바뀔 게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또 똑같은 결말일 텐데...’박진성은 답답함에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고 다시 참았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민여진, 나에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그 말에 그녀가 예상치 못한 듯 눈을 떴다.“내가 잘못했어. 너한테 따져 묻기 전에 먼저 확인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러지 않았어. 그때 나는...”“미안할 필요 없어.”민여진은 그의 말을 끊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네가 잘못한 거 없어. 그냥 네가 나를 믿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네가 믿고 싶은
“환자 손에 상처가 없다고요?”간호사는 잠시 멍해 있다가 당황한 듯 대답했다.“아닌데요? 상처 있습니다. 꽤 심각할 정도고요. 밤새 염증이 심해져서 고름까지 흘렀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약을 바르는 건데...”“염증?”박진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언제 생긴 일이죠?”간호사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19일 아침이에요.”그 순간 박진성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바로 그날, 문채연이 병원에 온 장면이었다. 그의 숨이 가빠지며 손을 꽉 쥐었다. 궁금증과 분노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 상처... 어떻게 생겼어요?”간호사는 살짝 움찔했지만, 대충 넘길 수 없는 분위기에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여기요... 손등 근처예요. 온통 손톱자국이에요. 처음부터 피멍이 들고 살까지 파여서 피가 멈추질 않았어요.”‘손톱자국... 손톱자국?’박진성은 혼란스러웠다. 민여진이 했던 말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민여진이 울먹이는 모습과 더불어 그가 무시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박진성, 나는 사람도 아니야? 내가 죽어야만 넌 날 이렇게까지 모욕하는 걸 멈추겠어?’그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여진이는 진심이었어. 정말 억울하고 괴로웠으니까 그렇게 울었겠지... 거기다 대고 나는 연기라고, 모함이라고, 마치 범죄라도 저지른 사람을 대하듯 몰아세웠지...’그는 단단히 주먹을 쥐었다.“저도 들어가서 처치하는 상황을 지켜봐야겠어요.”“네?”간호사는 순간 망설였지만, 그의 싸늘한 기세에 말없이 문을 열었다.불이 켜진 병실, 민여진은 눈물을 거둔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여진 씨, 약 바르러 왔어요. 죄송해요. 병원 일이 바빠서 늦었네요.”“괜찮습니다.”간호사가 능숙하게 붕대를 풀어내자, 박진성의 시선이 상처 위에 멈췄다. 부어오른 자국 사이로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심한 곳은 아직도
“깜빡했어. 뜨거운 물 마시다가 덴 거 같아.”“거짓말하지 마.”박진성은 그녀의 턱을 단단히 움켜잡고 힘을 줬다.그는 민여진이 거짓말을 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하려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사실대로 말해. 안 그러면 내가 직접 서원한테 확인할 거야.”민여진은 깊게 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말했다.“문채연이 했어. 이제 됐지?”그 말에 박진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민여진, 남을 모함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않아? 19일에 난 채연이랑 계속 같이 있었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꼭 이렇게까지 해야 속이 시원한 거야?”‘역시나... 또 이러네.’민여진은 허탈하게 웃었다.‘사실대로 말하라고 몰아붙이더니, 막상 말하면 또 믿지 않잖아. 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내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이제 와서 못 믿겠다면 나도 더 할 말 없어.”“좋아. 그럼 네 말대로 채연이 했다고 치자. 채연이가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건데?”박진성은 어디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꾸며낼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는 듯이 차갑게 비웃었다.그 말투에 민여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손톱으로. 움켜쥐고 힘줘서 상처를 냈어.”“그만해!”박진성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민여진, 서원이는 그래도 널 감싸주면서 네가 그날 채연한테 그렇게까지 한 게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 지금 보니까 넌 변한 게 없네. 여전히 뻔뻔하고 비열해. 착한 채연이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 그리고 손톱자국? 고작 손톱자국을 이렇게까지 과장한다고? 네가 뭐 공주라도 되는 줄 알아?”박진성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뼛속까지 날카롭게 파고들었지만, 민여진은 담담했다.이미 너무 익숙한 반응이라, 상처받지도, 놀랍지도 않았다.“그래. 네 말이 맞아.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실망했다면 미안하네.”박진성이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고, 그 반동으로 민여진의 팔이 침대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 상처 난 곳이 그대로
‘두 사람의 입장을 다 들어보라고?’박진성이 순간 멍해졌고 이내 이마에 주름이 깊게 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단 한 번도 민여진의 말에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채연이는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하지만...’그의 눈썹이 서서히 좁혀졌다.“채연이가 먼저 도발했다고?”문채연에게서 그런 얘기는 들은 바가 없었던 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러자 서원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여진 씨가 이렇게 화를 낸 건 처음 봤습니다. 그날 제가 여진 씨를 막았을 때, 채연 씨가 무슨 말을 했어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확실히 도발적인 말이었습니다.”“알았다.”박진성은 깊은숨을 내쉬며 서원에게 말했다.“너는 돌아가서 쉬어.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서원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박진성은 병실 문 밖에서 창문을 통해 민여진을 바라보았다. 민여진은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엔 온통 서원의 말이 맴돌았다.‘채연이가 먼저 도발적인 말을 했다고? 그렇다면 대체 뭐라고 했길래? 그리고 민여진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지?’그는 심란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문을 밀어 열었다.박진성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침대 위의 여자는 평온한 듯 보였지만,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녀의 손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온통 붕대로 감싸져 있었다.‘또 다친 거야?’박진성은 조심스레 조명을 켜고 그녀의 손을 살펴보았다. 그때 민여진이 미세한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서원 씨?”그녀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누군지 확신하지 못한 채 겨우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박진성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그녀가 혈색이 사라진 얼굴로 자신을 인지할 때까지 기다렸다.“박 대표님...”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고 공포를 억누르려 애쓰는 듯했다.박진성은 그 호칭을 듣고 화가 치밀었다.‘박 대표님? 며칠 못 본 사이에 이렇게 거리를 두겠다는 거야?’“손은 어떻게 된 거야?”박진성은 화를 참으려 애쓰며 그녀의 손목을 꽉 쥐었다
모든 사람은 문채연이 박진성에게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과 그녀가 갖는 특별한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문채연에게 도전하려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채연은 넘어지지 않으며, 만약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끝장이었기 때문이다.“알았어... 그럼 사람 불러서 치료받게 할게. 상처가 나면 감염될 수 있으니까.”민여진은 얼굴이 창백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괜찮아요.”...그 이후 며칠 동안, 박진성은 병원에 한 발짝도 들이지 않았고 문채연의 병실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혼자 사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며 밤늦게까지 일을 했고 틈이 나면 휴게실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눈을 감고 여러 번 뒤척였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민여진이 떠올랐다. 왜 하필이면 눈먼 여자 따위가 자기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고 화가 났다.그는 휴게실 침대에서 일어나, 정장을 입고 회사를 나섰다.서원은 그가 병실로 들어오는 걸 보고 당황해 전화를 끊었다.“대표님...”박진성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의 창문을 통해, 깊은 잠에 빠진 민여진을 바라보자 또 울컥하고 화가 났다. ‘나는 네가 신경 쓰여서 몇 날 밤을 지새웠는데, 넌 어떻게 이렇게 편안하게 자는 거야?’“박 대표님...”서원은 웃으며 말했다.“며칠 동안 오지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혹시라도 이제 다시는 오지 않으실까 봐 걱정되기도 했습니다.”박진성은 고개를 돌리며, 표정을 굳혔다.“누가 민여진을 보러 왔다고 그래?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약이라도 처방받으려고 온 거야.”“아...”서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사실 여진 씨의 상태가 좋지 않아요. 대표님도 시간이 되면 자주 와서 신경 써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진 씨는 매번 숨기기만 하니 저도 그 속을 알 수가 없네요.”박진성은 비웃듯이 웃었다.“내가 왜 민여진을 챙겨야 하지? 나만 없으면 편하게 잘 자고 잘 지내는데? 내가 아플 때, 민여진은
“사과 안 해도 돼. 하지만 넌 후회하게 될 거야.”박진성의 표정은 잔인했다.“또 방현수를 끌어들이겠다는 거야?”민여진의 몸이 떨렸다.“박진성! 너 그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뭐야!”박진성은 애초에 방현수를 건드릴 생각까진 없었다. 하지만 민여진이 그를 그렇게까지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그래, 사과 안 해도 돼. 네 말대로 방현수가 사과하면 되겠네. 그 녀석 요즘 꽤나 주목받는 거 알지? 사흘에 한 번씩 핫이슈에 올려서 제대로 인기 스타 만들어 줄게. 네 덕분에 ‘톱스타의 삶’ 한번 제대로 누려 보겠지.”그는 민여진을 그런 궁지로 몰아붙이고 싶었다.'문채연이 먼저 손을 댔다는 걸 알면서도 나에게만 사과를 강요하는 거야? 박진성에게 공정 따위는 기대조차 하면 안 됐어. 사랑하는 여자를 무조건 편들 악마니까.'민여진은 이미 감정적으로 마비된 상태였다.“알았어. 사과할게.”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문채연이 문밖에서 등장했다. 그녀는 억지로 착한 척하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진성 씨, 됐어요. 여진 씨가 아픈 몸으로 무슨 사과를 하겠어요? 괜히 몸 상태만 더 나빠질까 걱정돼요. 그리고 별일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여진 씨 덕분에 지난밤 진성 씨를 독차지할 수 있었으니 감사해야죠.”그 말을 들은 박진성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변했다.'방현수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할 수는 있지만, 내가 아프서 쓰러졌을 때는 거들떠보지 않는 태도였지... 그래. 이제 충분히 알겠어. 민여진은 정말로 나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나 보네. 이쯤 되면 나도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겠어.’“반드시 사과해.”박진성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내려다보며 말했다.“이렇게 경고라도 해 줘야 정신을 차리겠지!”“진성 씨...”문채연은 눈가에 눈물을 보이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정말 저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신다니... 고마워요.”두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기류가 민여진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