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 씨!”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문채연이 초조한 얼굴로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며 다가왔다.“기자들이 왔어요. 빨리 나가야 해요! 병원에 있는 거 걸리면 큰일난다고요!”그 소리를 들은 박진성의 눈빛에 짜증스럽게 변했다.‘대체 어떻게 알고 기자들까지 찾아온 거야...’다급해진 그는 시선을 민여진에게로 향했다.“민여진, 지금이라도 나랑 가자. 아직 늦지 않았어.”“박진성 씨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방현수는 온몸이 아프고 등이 욱신거렸지만, 전혀 상관없다는 듯 민여진을 품에 끌어안았고, 박진성을 바라보는 눈빛 또한 날카롭게 빛났다.“여진이는 내가 지킵니다. 박진성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방현수 씨가 뭔데, 지금 감히 나한테 도발하는 겁니까?”순간 박진성의 분노가 폭발했다.그때, 대포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후문까지 몰려와 출입구를 틀어막기 시작했다.그의 전처에 관련된 소식은 언제나 뜨거운 화젯거리였다.문채연은 불안하게 박진성의 소매를 잡아당겼고 박진성은 마지막으로 경고하듯 말했다.“민여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지금 나를 따라가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어!”박진성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로 양보한듯해 보였지만, 민여진에게는 그저 또 한 번의 상처가 됐을 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박진성은 한마디 덧붙였다.“민여진,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니야?”하지만 박진성을 바라보는 민여진의 동공에는 아무런 기대도 없는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진성 씨, 제발 가요! 대영 그룹을 위해서라도 가야 해요! 그리고 저를 위해서도요... 기자들 앞에서 제 얼굴이 알려지면 어떡하라고요?”그녀는 얼마 전 얼굴을 성형한 참이었다.박진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고, 뒤이어 민여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민여진은 그를 보는 체조차도 않았다.“민여진, 넌 결국 무릎 꿇고 나한테 빌게 될 거야.”그 말을 남기고 박진성은 문채연과 함께 떠났다.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직 어린 듯 앳된 목소리였지만 무슨 일인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민여진은 순간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했다.“누구신데 그러세요?”“누구냐고요? 그걸 물어볼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요?”갑자기 나타난 낯선 여자는 윤소정이었고 그녀는 불꽃 같은 눈빛으로 민여진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민여진 씨 같은 눈먼 여자 하나 때문에 현수 오빠가 인생을 통째로 쳤다는 거 알아요?”민여진의 손이 옷자락을 단단히 쥐었다.“현수 씨가... 어떻게 됐는데요?”“어떻게 됐냐고?”윤소정의 목소리가 떨렸다.“현수 오빠는 민여진 씨를 지키려다 얼굴 하나 제대로 팔렸죠! 사진이 인터넷에 퍼졌고 사진 아래에는 전부 오빠를 향한 비난뿐이에요! 오빠는 환자를 살려야 하는 의사인데 그쪽 때문에 병원에는 발도 못 붙이게 생겼다고요!”윤소정은 숨을 몰아쉬며 이어갔다.“그리고 민여진 씨의 전남편이 박진성이라면서요? 그사람은 지금 방씨 가문을 완전히 몰락시키려고 작정했어요! 모든 계약을 해지한 것도 모자라, 누구도 방씨 가문과 손잡지 못하게 막아버렸어요. 방씨 가문과 거래하면 대영 그룹을 적으로 돌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선포했다고요!”윤소정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민여진 씨! 민여진 씨는 진짜 재앙이나 다름없어요! 본인은 얼굴 하나 안 드러내놓고, 민여진 씨를 지키려던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버렸다고요!”민여진은 온몸이 굳은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세상에 버림받은 듯한 차가운 절망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현수 씨... 현수 씨는 지금 어디 있나요? 제가 만날 수 있을까요?”“절대 안 돼요!”윤소정은 눈물을 참으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이를 악물었다.“또 만나면 무슨 말을 하려고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이제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요. 방씨 가문에서 데려갔거든요. 애초에 방씨 가문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였던 오빠인데... 방씨 가문에서 가만둘 리가 없잖아요!”민여진은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윤소정은 잠시 울
방 안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목소리에 민여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몸을 떨었다.이는 틀림없이 경험에서 나온 두려움이었다.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문을 밀어 열었다.박진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듯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시선이 민여진의 여행 가방을 스치자, 검은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그는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더니 비아냥대기 시작했다.“짐까지 챙겼네? 방현수가 다치지만 않았으면 둘이 함께 도망이라도 갈 참이었어?”민여진은 무의식적으로 여행 가방을 뒤로 보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조용히 물었다.“현수 씨를... 놓아줄 수는 없어?”“현수 씨?”그 호칭에 박진성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손가락으로 애꿎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천천히 비틀었다. 그리고 눈동자에 분노가 불길처럼 번졌다.“내가 왜 그 자식을 봐줘야 하지? 감히 나에게 도발하는 걸 보고 대단한 놈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고작 방씨 가문에서 내다 버린 자식이었더라고! 그딴 놈이 네 눈에는 그리도 멋져 보였어?”박진성의 비아냥에 민여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더니, 대뜸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자 박진성의 눈빛이 흔들렸다.“진성 씨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원하는 대로 내가 무릎꿇고 빌게...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현수 씨를 놔줘...”말이 끝나자, 그녀는 머리를 숙였고, 곧이어 이마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그 모습에 박진성은 의자 팔걸이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민여진, 네 꼴을 좀 봐. 정말 비굴해 보여...”“맞아. 네 말이 다 맞아. 그러니까... 제발 현수 씨만은 살려줘. 하라는 대로 뭐든 할게...”박진성의 얼굴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번지고 있었다. 그녀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뭐? 뭐든 할 수 있다고?”박진성은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자세를 바꿔 몸을 기대며 민여진을 내려다봤다.“그렇다면... 벗어 봐.”순간, 민여진의 표정이 굳었다.박진성은 담배에
“왜?못하겠어?”박진성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민여진을 쏘아보며 의자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방현수를 위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릴 수 있으면서... 내 앞에서는 끼 부리는 건 거부한다고? 나는 남자도 아니라는 건가?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기회인 줄이나 알아? 얼마나 많은 여자가 너 대신 이 자리에 있고 싶어 하는지 너는 알기나 할까?’박진성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뭐야? 이제 와서 순결한 척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예전엔 내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다고 하지 않았었나?”민여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이 얼굴을 보고 역겹지도 않아? 무릎을 꿇으라면 꿇겠어. 하지만 왜... 이런 방법으로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건데?”‘왜냐고?’박진성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사실 그가 이런 요구를 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의 몸에 방현수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게다가 그는 민여진의 얼굴이 역겹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날 그녀가 보여준 강인한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서 그녀와 함께했던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민여진은 그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치명적인 존재였지만 그는 결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더욱 차가운 비웃음으로 대답했다.“너를 괴롭히는 건 나한테 흥미로운 일이거든. 네가 괴로워할수록 나는 기분이 좋아...”‘내 고통이 너에겐 즐거움이란 거네...’민여진은 쓸쓸히 눈을 감았고 더 이상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이리 와.”박진성이 또 한 번 명령하듯 말했다.민여진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쥔 채 한 걸음씩 다가갔다.박진성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잡아당겨 무릎 위로 끌어앉혔다. 얼떨결에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에 닿았고 얇은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에 민여진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현수 씨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해.”민여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순간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방현수뿐이었다는 것에 배신감을
민여진은 조용히 리셉션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물었다.“죄송한데... 근처에 가까운 약국이 어디에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리셉션 직원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었다.민여진은 지팡이를 짚으며 약국으로 향했다.약국에 도착한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피임약 주세요.”낮은 목소리였지만 주변 사람들을 집중시켰다.“저렇게 흉한 얼굴을 하고 피임약이 필요할 수도 있나?”“누가 쳐다나 보겠어? 피임약이 왜 필요해...”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젊은 남자들이 피식거리며 비웃었지만, 민여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약을 받은 그녀는 약국 문을 나서자마자 포장을 뜯어 물 없이 약을 삼켰다.‘박진성이 네게 남겼던 흔적 같은 건... 두 번 다시는 없어야 해.’그녀는 또다시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1%의 확률이라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 피임약을 복용했다. 악마 같은 박진성의 아이는 절대 다시 가지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리셉션 직원은 멀리서 그녀가 약을 먹고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보았다. 그리고 민여진이 택시에 타고 떠나자, 쓰레기통 속 약봉지를 다시 확인했다.‘피임약?’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세상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박 대표님 아이를 가지려고 혈안이 돼 있는데, 이 여자는 일부러 피임약을 먹었다고?’그녀는 이 쇼킹한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탕비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친한 동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너 방금 그 여자가 뭘 했는지 알아? 얼굴은 엉망이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재벌가 따님 부럽지 않더라니까. 박 대표님하고 관계까지 했으면서... 약국에서 피임약을 사 먹더라니까!”“뭐?”동료는 깜짝 놀라 물었다.“피임약을 왜?”“다른 사람들은 박 대표님의 아이를 가지려 혈안이 됐는데, 일부러 피임약을 삼켰다니까!”“대체 무슨... 대표님의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런데 말이야...”갑자기 탕비실 문이 열리며 냉기가 흘러들었다.“누가 내 아이를
박진성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이를 악물고 말했다.“민여진, 어디야?”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통화가 ‘뚝’하고 끊겼다.민여진은 대답 대신 전화를 끊어버렸다.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유는 전화를 걸어온 상대가 박진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던 것이었다.‘현수 씨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불안이 밀려왔지만, 방씨 가문처럼 알려진 가문이라면 그 주소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녀는 택시 기사에게 수소문해 방씨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저택 앞에 도착한 민여진은 문 앞에 설치된 초인종을 더듬어 눌렀다.조금 후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무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서 굴러먹다 온 미친년이 이 시간에 감히 방씨 가문의 초인종을 누르고 있어!”“죄송합니다...”민여진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혹시... 방현수 씨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전화를 받지 않아서...”“뭐라고? 방현수?”하인은 여전히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이 집에서 내쳐진 사생아 따위가 방씨 가문에 얼마나 큰 폐를 끼쳤는지 알기나 해? 당연히 가훈에 따라 처리했겠지. 지금쯤 별채 창고에서 기절해 있을지도 모르겠네. 방현수를 찾으러 왔다면 시신을 수습하러 늦게나마 다시 오는 게 나을 거야.”‘뭐라고요? 시신을 수습해요?’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박진성은 분명 모든 게 끝났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어?’민여진은 절망감에 몸이 떨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철문을 붙잡고 간절히 외쳤다.“부탁이에요! 제발... 제발 현수 씨를 보게 해주세요! 박진성이... 박진성이 모든 걸 끝내겠다고 약속했어요!”하인은 박진성의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민여진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보고 흠칫 놀라 욕설을 내뱉었다.“이런 미친년을 보았나! 도대체 왜 이렇게 흉측하게 생긴 거야? 간 떨어질 뻔했네!”철문이 덜컥 열렸다.민여진은 안도의 숨을 쉬며 들어가려는 순간, 가슴팍에 무언가가 세게
박진성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치욕과 분노가 섞인 이 감정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방현수가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 그 자식 없으면 죽기라도 하려고?”민여진은 두 손을 꽉 쥐었다.하인의 말투와 방현수가 방씨 가문에서 받는 취급을 보니 그가 얼마나 심하게 다쳤을지 짐작이 갔다. 그런데도 박진성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마치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하찮은 벌레처럼 취급한다고 생각했다.“그래! 현수 씨 없으면 난 죽어!”민여진의 목소리는 울분으로 떨렸다.“그런데 넌? 네가 약속했던 건 지켰어?”“민여진!”박진성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으로 그녀의 양팔을 거칠게 움켜잡았다.“너 지금 일부러 날 화나게 하는 거지? 믿어봐! 내 한마디면 방씨 가문도 방현수 그 자식도 이 도시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 있어!”박진성의 말에 민여진은 그 자리에서 흥분을 가라앉혔다.‘맞아. 박진성이 가진 힘을 난 너무 잘 알아. 내가 감히 대적할 수는 없어....’그녀는 방현수를 위해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박진성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민여진이 더 이상 방현수와 얽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대로 두면, 그녀의 마음속에 그가 들어설 자리는 영원히 없을 터였다.그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나랑 집에 가자.”‘집? 나한테 아직 집이란 게 남아 있었나?’민여진은 저항하지 않았지만 발걸음을 따라가지도 않았다.“난... 현수 씨를 봐야겠어.”모든 건 그녀로 인해 시작되었으니,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안 돼!”박진성은 짜증스러워졌다. 그는 절대로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내 말 들어. 나랑 같이 가.”하지만 민여진은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결국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억지로 한 걸음 끌어냈다.하지만 그녀는 힘겨운 발걸음 속에서 입술을 깨물며 울먹였다.“부탁이야... 단 한 번... 단 한 번만 보게 해 줘. 그다음엔 네가 원하
방 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운 공기가 가득 찼다.박진성이 ‘내 여자’라고 선언하자 방지혁을 포함한 방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만약 민여진이 절세미인이었다면 모를까, 흉터투성이의 얼굴을 한 여자를 박진성이 지키겠다고 나섰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방지혁은 순간적으로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민여진의 체격과 분위기를 살피던 그는 그동안 화제가 되었던 ‘실검’ 속 인물이 그녀임을 깨달았다.‘그래서 현수가 이 여자 하나 때문에 박진성을 건드리고, 자기가 가진 모든 걸 걸었단 말이야? 고작 이런 여자 때문에?’방지혁의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 불효자 녀석... 여자한테 홀려도 그럴 만한 여자를 골랐어야지... 방씨 가문을 파멸 위기로 몰아넣고도 후회는커녕....’그는 하인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리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두 분은 잠시 앉아서 차라도 한잔하시죠. 곧 현수를 데려오겠습니다.”박진성은 여유롭게 자리에 앉았고 민여진도 몸을 움츠리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두 손은 본능적으로 떨리고 있었고 차를 마시기는커녕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민여진은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방현수도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발견했다. 그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가 이내 박진성을 발견하곤 울부짖었다.“박진성 씨! 또 무슨 수작을 부린 겁니까! 대체 뭐로 여진이를 협박한 거냐고요! 네가 그러고도 남자냐!”“이 개 같은 놈이!”방지혁이 몇 걸음 다가가 방현수의 뺨을 후려쳤다. 큰 소리와 함께 방현수는 옆으로 휘청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방지혁은 곧바로 박진성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굽신거렸다.“이 불효자는 어릴 때부터 가문에서 내쳐져 자라다 보니 워낙 버릇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따끔히 훈계하겠습니다. 대표님께서 불쾌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박진성은 차를 홀짝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지만 민여진은 바짝 긴장한 채 몸이 떨
민여진은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잠이 오지 않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옷장을 더듬다가 손끝에 만져지는 외투를 꺼내 몸에 두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문 앞에 다다랐을 즈음, 조인화가 마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있는 민여진을 발견하자마자 다급히 다가와 말했다.“왜 밖에 나와 있어, 안에서 기다리지. 지금 얼마나 추운 줄 알아?”조인화가 민여진에게 걸어오며 중얼거렸다.“날도 추운데 처음 보는 사람이 찾아왔더라고. 이런 날씨에 도대체 뭘 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 차림에, 외제 차까지 타고 왔더라고. 생긴 건 또 무지하게 잘생겼어. 동네 사람들 다 나와서 구경하고 있다니까.”“처음 보는 사람이요?”민여진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래. 누굴 찾는 것 같은데 계속 안 가고 기다리고 있더라. 방금도 나 보자마자 이것저것 캐묻고.”“뭘 물어봤는데요?”민여진이 다급히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잠시 당황한 듯 멈칫한 조인화가 대답해 주었다.“별거 안 물었어. 그냥 우리 마을은 어떻게 살고 있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은 있나 정도로만 물어보더라. 이상하긴 했어. 여기가 외부인 접근이 쉬운 곳도 아니고, 이렇게 외딴 산간 마을에 외부인이 찾아오는 건 거의 6개월 만이잖아.”민여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고 숨소리가 점점 가빠졌다. 그녀는 가빠진 숨을 억지로 고르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아니야, 아닐 거야... 이런 우연이 있을 수도 있나?’그들에게 민여진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박진성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찾아올까? 더군다나 이정화가 민여진의 행방을 누설할 리도 없었다.“왜 그래, 여진아?”조인화는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민여진의 반응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져주며 물었다.“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어디 아파서 그래?”“아니요...”민여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힘겹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현준 오빠가 돌아온다고요?”민여진은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왜요? 아직 시간 좀 남지 않았어요?”조인화가 웃으며 대답했다.“얼마 전에 현준이한테서 전화 왔거든. 얘기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네 얘기가 나왔었는데, 회사에 휴가 내고 바로 오겠다더라. 말로는 오랜만에 내가 보고 싶어서 온다고는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너 보러 오는 것 같아.”“저 보러 온다고요?”수건을 비틀어 물을 짜던 민여진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를 왜요?”“이 녀석이, 정말 몰라서 물어?”조인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우리 현준이, 어릴 때부터 너 좋아했었는데. 몰랐어?”물을 마시던 민여진은 그 말에 그만 사레가 들려버리고 말았다.조인화는 급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겨우 기침을 멈추고 진정한 민여진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민여진은 조현준을 이때까지 계속 친한 오빠로만 여겨왔다. 이곳을 떠나기 직전까지 둘 사이에 애매한 기류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조현준은 고등학교 때부터 다른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며 집에 돌아온 적도 거의 없었다.그런 조현준이 자신을 좋아해 왔을 줄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민여진은 민망한 마음에 말했다.“이모, 장난 좀 치지 마요.”“얘가, 내가 너한테 이런 거짓말을 왜 하겠니? 현준이가 중학교 때 쓴 일기 보니까 온통 네 얘기밖에 없더라. 못 믿겠으면 지금이라도 그때 일기장 꺼내서 읽어줄까?”“아, 아니요... 됐어요...”당황한 민여진이 손사래 쳤다.“다 지난 일이잖아요.”“지난 일이면 어때? 우리 현준이는 아직 너 못 놔준 것 같은데. 너한테 관심 없었으면 그 귀한 휴가까지 먼저 내가면서 이렇게 급하게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야.”조인화는 민여진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아예 그냥 여기서 살래? 우리 집안 며느리 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민여진은 잠시 멍해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급히 손을 뺐다.조인화도 그녀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 여기 있는 채연이는... 누구야?”박진성은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어머니가 저희 결혼을 반대했었던 그해에 채연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 일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의식이 돌아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죠.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아셨다면 식물인간 상태인 사람과 결혼하게 두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누군가를 시켜 채연이를 대신하게 했고 그 사람이 민여진이었습니다.”박진성이 문채연을 처음 박씨 가문에 데려왔을 때 이정화는 그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그녀는 문채연의 눈에 자리 잡은 야망과 욕심을 단번에 읽어냈다. 딱 봐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이 결혼은 이정화의 거센 반대를 맞았지만 어느 날 문채연이 변한 것이다. 이해타산만 따지던 여자는 이정화가 심장 발작을 일으킨 그날 이를 악문 채 그녀를 등에 업고 눈 속을 걸어 병원까지 갔다.그리고 며칠을 밤새 간병했고 이정화가 정신을 차린 후엔 쑥스럽고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게다가 공을 세우려 하지도 않았고 고열에도 묵묵히 약 몇 알로 견뎠다.며느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그렇게 묵묵히 이정화의 곁을 지켰다.그런 하나하나가 이정화의 마음을 서서히 열게 만들었다.하지만 지금 박진성은 기억 속의 그 문채연이 사실은 민여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이정화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동안 민여진에게 퍼부었던 차가운 말들이 머릿속을 쿵쿵 울렸다. 가슴이 뻐근해져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삼켰지만 손이 멈추지 않고 계속 떨렸다.“왜... 왜 그때 나한테 말 안 했니?”박진성은 눈을 내리깔았다.왜 말하지 않았냐고? 그건 그땐 그에게 민여진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문채연’이란 이름을 지켜주기 위한 대체물일 뿐이었다. 그런 존재에 대해 굳이 입을 열 이유가 없었다.이정화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오랜 침묵 끝에 펜을 들어 종이에 주소 하나를 적었다.“여진이가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그 애가 꼭 가보고 싶다고 했던
박진성의 입술은 새하얗게 바랬고 얼굴도 병든 사람처럼 창백했다.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힘이 있었다.“죽기 전엔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이어지는 기침에 온몸이 떨렸다.그래도 그는 참고 또 참으며 눈 내리는 바깥으로 나아가려 했다.“그만해!”이정화가 분노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함을 질렀다.“너 지금 목숨 걸고 나를 협박하는 거야? 내가 그 애가 어디 있는지 말 안 하면 저 추운 밖에 나가 죽을 거란 말이지? 너 그렇게까지 엄마를 몰아붙이고 싶어?”박진성은 문가에 멈춰 섰다.밖에서 미친 듯이 눈이 내렸고 거센 바람이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지만 그의 뒷모습은 단호했다.“어머니, 전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어머니가 저보다 더 후회하는 일을 막고 싶은 겁니다.”“그게 무슨 뜻이야?”“민여진이 죽게 된다면 2년 동안 어머니 곁을 지킨 사람도 같이 사라지게 되는 거죠. 그건 어머니 스스로 만든 일이에요. 정말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이정화의 얼굴이 삽시간에 핏기를 잃었다. 그녀는 멍하니 박진성을 바라보았다.문채연 역시 충격에 휩싸였다.“진성 씨!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그녀는 더 이상 이성을 붙잡지 못했다.박진성이 민여진을 위해 과거의 모든 진실을 밝히려 하다니?‘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하지만 박진성은 차분했다.“원래 민여진의 것들이었던 걸 이젠 돌려줘야죠.”문채연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이정화는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점점 짙어지는 불안을 안고 박진성에게 다그쳤다.“진성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2년 동안 날 곁에서 돌봐준 사람이 민여진이었다는 거야? 그 애가 언제 내 곁에 있었단 말이야?”“어머니, 민여진을 처음 봤을 때 익숙하다는 생각 안 드셨습니까?”그 말에 이정화의 신경이 순간 확 당겨졌다.그녀는 민여진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과 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
“이 못된 놈!”이정화는 오늘 들어 처음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그녀는 차갑게 눈을 부라리며 박진성을 노려봤다.“너는 네가 지은 죄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해?”박진성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많죠. 그래서 전 민여진을 찾아야 해요. 제가 저지른 모든 걸 하나하나 갚아야 하니까요.”“네가 갚고 싶다고 그 애가 받아들이기라도 할까?”이정화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박진성은 가슴이 쿡 하고 찢어지는 것 같아 손바닥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도 단호하게 말했다.“민여진이 거절해도 받아들일 때까지 전 끝까지 빌 거예요.”이정화는 두 손을 모아 불상 앞에 합장을 올리며 말했다.“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애가 떠난 건 내가 시켜서가 아니야. 그 애가 널 증오했기 때문이지. 널 벗어나고 싶어 했고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정말 그 애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전부 내려놔. 가볍고 평온한 삶을 살아. 그리고 그냥... 그 애가 죽은 셈 쳐.”“그럴 수 없습니다.”박진성은 망설임 없이 단칼에 잘랐다.그는 창백한 얼굴에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시 똑같이 물었다.“어머니, 민여진을 어디에 숨기셨습니까?”이정화는 대답하지 않았다.박진성은 격렬하게 기침하며 몸을 떨었고 계단을 비틀비틀 올라가려다 겨우 두 걸음 만에 바닥에 쓰러졌다.“진성 씨!”문채연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달려가 그를 붙들려 했다.그러나 박진성은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고 표정엔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그날의 사건을 문채연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문채연은 이를 꽉 깨물었다. 민여진이 죽지 않았고 그 사실을 박진성이 알아버렸다는 게 그녀는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다.박진성은 병 때문에 안색이 형편없었지만 바로 2층으로 올라가 구석구석 모든 방을 다 뒤졌다.그제야 이정화가 못 참겠다는 듯 소리쳤다.“너 정말 미쳤구나! 지금 여기 채연이도 있고 너희는 약혼을 앞두고 있어. 곧 결혼도 할 거고. 그런데 넌 채연이 앞에서 다른 여자를 찾겠다고 이
“확실합니다. 백 퍼센트 확실해요. 물속에 그렇게 어렵게 들어갔는데 차 안에 정말 아무도 없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쉽게 올라왔겠습니까.”잠수부는 거듭 말했다.“나는 이런 경우 처음 봐요. 차가 바다에 빠졌는데 안에 시신이 하나도 없어요.”“혹시 시신이 다른 데로 떠내려간 건 아닐까요?”누군가 조심스레 물었다.“말도 안 돼요.”남자가 고개를 저었다.“차창은 단단히 닫혀 있었어요. 내가 보기엔 누가 물속에서 문을 열고 나간다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니 가능성은 단 하나예요. 차가 빠질 당시 차 안엔 애초에 아무도 없었던 겁니다.”‘차 안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은 마치 벼락처럼 박진성의 가슴 속에 내리꽂혔다.그는 이 감정이 기쁨인지 절망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까매지고 숨조차 가빠왔다.‘민여진이 살아 있어.’그건 거의 본능적으로 떠오른 결론이었다. 이 모든 건 계획된 것이고 그녀의 죽음을 가장해 그를 내려놓게 만들려는 함정이었다.문득 그녀가 경찰서에서 나온 직후 곧장 이 차에 탑승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박진성은 가슴팍을 움켜쥐고 핏발 선 눈으로 서원에게 명령했다.“당장 조사해. 민여진이 경찰서에서 너와 나 말고 누구를 만났는지 전부.”서원은 곧장 움직였고 박진성은 차 안으로 돌아왔다.몸이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탓인지 오한과 열이 번갈아 밀려왔고 손끝까지 떨려왔다. 그는 죽음 끝에서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민여진은 죽지 않았다. 그녀는 엄청난 계략을 짰고 세상의 모든 이들을 속였다.정말 잔인한 여자였다. 그가 고통스러워할 것을 몰랐을까? 아니, 알았기에 더욱 철저히 저지른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죽기를 바랐으니까.박진성의 온몸이 끓어올랐다. 그 열기에 머리까지 지끈거렸고 결국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자신의 별장 소파 위였고 곁에서 휴대폰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강태화가 곁을 지키고 있었고 박진성은 몸을 가누며 통증을 참아내고 전화를 받았다
차 안엔 아무도 없었다박진성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목이 타들어 갈 듯 아팠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다가도 금세 차갑게 가라앉았다.몸이 이렇게 고장 난 건 분명 병 때문이었다.마지막으로 아팠던 게 거의 1년 전이었을까. 그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침대 머리맡 서랍을 열었다.민여진이 약상자를 거기에 뒀던 게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기침을 하며 상자를 꺼내보자 하나하나 약봉지마다 작은 메모지들이 붙어 있었다.‘언제까지 복용’, ‘이 약은 공복에’, ‘열이 나면 복용’, 세세한 설명이 다 적혀 있었다.그 여자는 항상 그랬다. 작은 것 하나까지 철저히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박진성은 메모지를 떼어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아팠다.며칠이 지나도 병은 쉽게 낫지 않았지만 그는 다음 날 아침부터 정상 출근했다.기침을 참아가며 몸살과 어지러움을 무릅쓰고 서류를 넘기고 회의를 소화했다. 하루, 하루, 또 하루.이제는 조금씩 잊히는가 싶었는데 그날 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대표님! 그 차량 위치를 찾았습니다!”박진성은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걸 놓고 바로 차를 몰았다.남산교에 도착하자 서원이 몇몇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벌써 윗옷을 벗고 준비 중인 남자들도 있었다.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원에게 다가갔다.“어떻게 됐어?”“차량 위치는 확인됐습니다. 지금 두 번째 잠수하러 들어가는 중이에요. 장비를 들고 들어가 유리창을 깨고 사모님을... 데리고 나올 겁니다.”“그래...”박진성은 정신이 아득해졌고 마비됐던 감정이 그 순간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묵직하고 차가운 통증이 심장을 찔렀다.그는 두려웠다. 정말로 민여진의 시신을 보게 될까 봐.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선 그녀를 드디어 편히 보내줄 수 있다는 조금의 평온도 느껴졌다. 이 차가운 물속에서 그녀가 더는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잠수팀은 장비를 짊어지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서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정식으로 시신 수습하
분노한 박진성은 문채연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그런데 너 왜 이 일을 숨겼어? 나한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민여진이 감옥에 가게 내버려둔 이유가 네가 살아남기 위해서야? 문채연, 넌 죄책감도 안 느껴?”그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고 그는 그녀의 이름을 또렷이 불렀다.문채연은 본능적으로 겁에 질렸고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다.“진성 씨! 내 말을 들어봐요!”그러나 박진성은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그는 순간 깨달았다.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더 이상 자신이 알던 그 여자가 아니란 것을.어떻게 이렇게 냉랭해질 수 있을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토록 순수하고 따뜻했던 그녀가 말이다.문채연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녀는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진성 씨, 제발...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마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난 그냥... 너무 무서웠을 뿐이에요...”그녀는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내가 2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사이에 진성 씨는 민여진 씨와 관계를 이어갔잖아요. 민여진 씨는 이미 진성 씨의 아이까지 가졌고요... 만약 내가 감옥에 가게 된다면 민여진 씨가 아이를 낳고 나서 여전히 내 자리가 있을까요?”“난 진성 씨를 너무 사랑했어요. 그래서 진성 씨를 위해서라면 불 속에도 뛰어들 수 있었어요. 그만큼 내겐 목숨보다 진성 씨가 더 소중해요. 그런데... 그걸 빼앗길까 봐 두려웠어요. 그것뿐이에요.”“나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민여진 씨를 해치지도 않았고요. 나의 이기심이 문제라면 그건 인정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말아요, 진성 씨...”문채연은 흐느끼며 그를 힘껏 끌어안았고 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그러나 박진성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단호하게 밀어냈다.“진성 씨...”문채연의 얼굴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약혼은 미루자
상우가 도착했을 때 박진성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2층에서 내려왔다.“대표님.”상우는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문채연 씨의 약혼식 드레스 디자인입니다. 여러 가지 시안을 준비했는데 매장에서 빠르게 결정해달라고 합니다.”“그래.”박진성은 노트를 받아 들었다.그런데 상우가 돌아서려 할 때 박진성이 그를 불러 세웠다.“서원은 요즘 어디에 있어?”상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서원 형님은 아직도 인양팀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모님의 시신을 먼저 찾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대로 안치해 드리고 싶다면서요.”박진성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사실 그조차도 이제는 포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서원은 여전히 집착하고 있었다.박진성은 한참을 침묵하다 짧게 말했다.“추운 날씨에 바닷가에 계속 있게 하지 마. 아직 젊잖아.”“네. 저도 몇 번이나 말렸는데 잘 듣질 않네요. 하지만 대표님께서 말씀하시면 이제 포기할지도 모르죠.”상우가 떠난 후 박진성은 노트를 들고 문채연의 방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성 씨, 나 샤워 중이에요. 무슨 일이에요?”박진성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손에 든 노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업체에서 드레스 디자인을 보내왔어. 상우가 가져다줬는데 빨리 결정하라고 하네.”“네, 침대에 놓아 줘요. 곧 나갈게요.”문채연의 목소리는 왠지 조금 부끄러운 듯 들렸다.사실 그녀는 박진성이 기다려 주기를 바랐지만 박진성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그는 몇 걸음 걸어가 티 테이블 위에 노트를 내려놓았다.그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진동음이 울렸다. 박진성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휴대폰에 꽂혔다.그런데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그때 문채연이 서둘러 나왔다. 그녀는 목욕 가운을 걸치고 있었고 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으며 뺨은 열기로 붉어져 있었다.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박진성을 본 순간 그녀는 가슴이 뛰었다. 이제야 기회가 왔다. 민여진이 박진성의 마음을 차지한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그의 ‘첫 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