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엔 아무도 없었다박진성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목이 타들어 갈 듯 아팠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다가도 금세 차갑게 가라앉았다.몸이 이렇게 고장 난 건 분명 병 때문이었다.마지막으로 아팠던 게 거의 1년 전이었을까. 그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침대 머리맡 서랍을 열었다.민여진이 약상자를 거기에 뒀던 게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기침을 하며 상자를 꺼내보자 하나하나 약봉지마다 작은 메모지들이 붙어 있었다.‘언제까지 복용’, ‘이 약은 공복에’, ‘열이 나면 복용’, 세세한 설명이 다 적혀 있었다.그 여자는 항상 그랬다. 작은 것 하나까지 철저히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박진성은 메모지를 떼어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아팠다.며칠이 지나도 병은 쉽게 낫지 않았지만 그는 다음 날 아침부터 정상 출근했다.기침을 참아가며 몸살과 어지러움을 무릅쓰고 서류를 넘기고 회의를 소화했다. 하루, 하루, 또 하루.이제는 조금씩 잊히는가 싶었는데 그날 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대표님! 그 차량 위치를 찾았습니다!”박진성은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걸 놓고 바로 차를 몰았다.남산교에 도착하자 서원이 몇몇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벌써 윗옷을 벗고 준비 중인 남자들도 있었다.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원에게 다가갔다.“어떻게 됐어?”“차량 위치는 확인됐습니다. 지금 두 번째 잠수하러 들어가는 중이에요. 장비를 들고 들어가 유리창을 깨고 사모님을... 데리고 나올 겁니다.”“그래...”박진성은 정신이 아득해졌고 마비됐던 감정이 그 순간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묵직하고 차가운 통증이 심장을 찔렀다.그는 두려웠다. 정말로 민여진의 시신을 보게 될까 봐.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선 그녀를 드디어 편히 보내줄 수 있다는 조금의 평온도 느껴졌다. 이 차가운 물속에서 그녀가 더는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잠수팀은 장비를 짊어지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서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정식으로 시신 수습하
“확실합니다. 백 퍼센트 확실해요. 물속에 그렇게 어렵게 들어갔는데 차 안에 정말 아무도 없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쉽게 올라왔겠습니까.”잠수부는 거듭 말했다.“나는 이런 경우 처음 봐요. 차가 바다에 빠졌는데 안에 시신이 하나도 없어요.”“혹시 시신이 다른 데로 떠내려간 건 아닐까요?”누군가 조심스레 물었다.“말도 안 돼요.”남자가 고개를 저었다.“차창은 단단히 닫혀 있었어요. 내가 보기엔 누가 물속에서 문을 열고 나간다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니 가능성은 단 하나예요. 차가 빠질 당시 차 안엔 애초에 아무도 없었던 겁니다.”‘차 안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은 마치 벼락처럼 박진성의 가슴 속에 내리꽂혔다.그는 이 감정이 기쁨인지 절망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까매지고 숨조차 가빠왔다.‘민여진이 살아 있어.’그건 거의 본능적으로 떠오른 결론이었다. 이 모든 건 계획된 것이고 그녀의 죽음을 가장해 그를 내려놓게 만들려는 함정이었다.문득 그녀가 경찰서에서 나온 직후 곧장 이 차에 탑승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박진성은 가슴팍을 움켜쥐고 핏발 선 눈으로 서원에게 명령했다.“당장 조사해. 민여진이 경찰서에서 너와 나 말고 누구를 만났는지 전부.”서원은 곧장 움직였고 박진성은 차 안으로 돌아왔다.몸이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탓인지 오한과 열이 번갈아 밀려왔고 손끝까지 떨려왔다. 그는 죽음 끝에서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민여진은 죽지 않았다. 그녀는 엄청난 계략을 짰고 세상의 모든 이들을 속였다.정말 잔인한 여자였다. 그가 고통스러워할 것을 몰랐을까? 아니, 알았기에 더욱 철저히 저지른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죽기를 바랐으니까.박진성의 온몸이 끓어올랐다. 그 열기에 머리까지 지끈거렸고 결국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자신의 별장 소파 위였고 곁에서 휴대폰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강태화가 곁을 지키고 있었고 박진성은 몸을 가누며 통증을 참아내고 전화를 받았다
“이 못된 놈!”이정화는 오늘 들어 처음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그녀는 차갑게 눈을 부라리며 박진성을 노려봤다.“너는 네가 지은 죄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해?”박진성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많죠. 그래서 전 민여진을 찾아야 해요. 제가 저지른 모든 걸 하나하나 갚아야 하니까요.”“네가 갚고 싶다고 그 애가 받아들이기라도 할까?”이정화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박진성은 가슴이 쿡 하고 찢어지는 것 같아 손바닥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도 단호하게 말했다.“민여진이 거절해도 받아들일 때까지 전 끝까지 빌 거예요.”이정화는 두 손을 모아 불상 앞에 합장을 올리며 말했다.“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애가 떠난 건 내가 시켜서가 아니야. 그 애가 널 증오했기 때문이지. 널 벗어나고 싶어 했고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정말 그 애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전부 내려놔. 가볍고 평온한 삶을 살아. 그리고 그냥... 그 애가 죽은 셈 쳐.”“그럴 수 없습니다.”박진성은 망설임 없이 단칼에 잘랐다.그는 창백한 얼굴에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시 똑같이 물었다.“어머니, 민여진을 어디에 숨기셨습니까?”이정화는 대답하지 않았다.박진성은 격렬하게 기침하며 몸을 떨었고 계단을 비틀비틀 올라가려다 겨우 두 걸음 만에 바닥에 쓰러졌다.“진성 씨!”문채연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달려가 그를 붙들려 했다.그러나 박진성은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고 표정엔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그날의 사건을 문채연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문채연은 이를 꽉 깨물었다. 민여진이 죽지 않았고 그 사실을 박진성이 알아버렸다는 게 그녀는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다.박진성은 병 때문에 안색이 형편없었지만 바로 2층으로 올라가 구석구석 모든 방을 다 뒤졌다.그제야 이정화가 못 참겠다는 듯 소리쳤다.“너 정말 미쳤구나! 지금 여기 채연이도 있고 너희는 약혼을 앞두고 있어. 곧 결혼도 할 거고. 그런데 넌 채연이 앞에서 다른 여자를 찾겠다고 이
박진성의 입술은 새하얗게 바랬고 얼굴도 병든 사람처럼 창백했다.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힘이 있었다.“죽기 전엔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이어지는 기침에 온몸이 떨렸다.그래도 그는 참고 또 참으며 눈 내리는 바깥으로 나아가려 했다.“그만해!”이정화가 분노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함을 질렀다.“너 지금 목숨 걸고 나를 협박하는 거야? 내가 그 애가 어디 있는지 말 안 하면 저 추운 밖에 나가 죽을 거란 말이지? 너 그렇게까지 엄마를 몰아붙이고 싶어?”박진성은 문가에 멈춰 섰다.밖에서 미친 듯이 눈이 내렸고 거센 바람이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지만 그의 뒷모습은 단호했다.“어머니, 전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어머니가 저보다 더 후회하는 일을 막고 싶은 겁니다.”“그게 무슨 뜻이야?”“민여진이 죽게 된다면 2년 동안 어머니 곁을 지킨 사람도 같이 사라지게 되는 거죠. 그건 어머니 스스로 만든 일이에요. 정말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이정화의 얼굴이 삽시간에 핏기를 잃었다. 그녀는 멍하니 박진성을 바라보았다.문채연 역시 충격에 휩싸였다.“진성 씨!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그녀는 더 이상 이성을 붙잡지 못했다.박진성이 민여진을 위해 과거의 모든 진실을 밝히려 하다니?‘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하지만 박진성은 차분했다.“원래 민여진의 것들이었던 걸 이젠 돌려줘야죠.”문채연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이정화는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점점 짙어지는 불안을 안고 박진성에게 다그쳤다.“진성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2년 동안 날 곁에서 돌봐준 사람이 민여진이었다는 거야? 그 애가 언제 내 곁에 있었단 말이야?”“어머니, 민여진을 처음 봤을 때 익숙하다는 생각 안 드셨습니까?”그 말에 이정화의 신경이 순간 확 당겨졌다.그녀는 민여진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과 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
“그럼 지금 여기 있는 채연이는... 누구야?”박진성은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어머니가 저희 결혼을 반대했었던 그해에 채연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 일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의식이 돌아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죠.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아셨다면 식물인간 상태인 사람과 결혼하게 두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누군가를 시켜 채연이를 대신하게 했고 그 사람이 민여진이었습니다.”박진성이 문채연을 처음 박씨 가문에 데려왔을 때 이정화는 그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그녀는 문채연의 눈에 자리 잡은 야망과 욕심을 단번에 읽어냈다. 딱 봐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이 결혼은 이정화의 거센 반대를 맞았지만 어느 날 문채연이 변한 것이다. 이해타산만 따지던 여자는 이정화가 심장 발작을 일으킨 그날 이를 악문 채 그녀를 등에 업고 눈 속을 걸어 병원까지 갔다.그리고 며칠을 밤새 간병했고 이정화가 정신을 차린 후엔 쑥스럽고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게다가 공을 세우려 하지도 않았고 고열에도 묵묵히 약 몇 알로 견뎠다.며느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그렇게 묵묵히 이정화의 곁을 지켰다.그런 하나하나가 이정화의 마음을 서서히 열게 만들었다.하지만 지금 박진성은 기억 속의 그 문채연이 사실은 민여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이정화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동안 민여진에게 퍼부었던 차가운 말들이 머릿속을 쿵쿵 울렸다. 가슴이 뻐근해져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삼켰지만 손이 멈추지 않고 계속 떨렸다.“왜... 왜 그때 나한테 말 안 했니?”박진성은 눈을 내리깔았다.왜 말하지 않았냐고? 그건 그땐 그에게 민여진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문채연’이란 이름을 지켜주기 위한 대체물일 뿐이었다. 그런 존재에 대해 굳이 입을 열 이유가 없었다.이정화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오랜 침묵 끝에 펜을 들어 종이에 주소 하나를 적었다.“여진이가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그 애가 꼭 가보고 싶다고 했던
“현준 오빠가 돌아온다고요?”민여진은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왜요? 아직 시간 좀 남지 않았어요?”조인화가 웃으며 대답했다.“얼마 전에 현준이한테서 전화 왔거든. 얘기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네 얘기가 나왔었는데, 회사에 휴가 내고 바로 오겠다더라. 말로는 오랜만에 내가 보고 싶어서 온다고는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너 보러 오는 것 같아.”“저 보러 온다고요?”수건을 비틀어 물을 짜던 민여진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를 왜요?”“이 녀석이, 정말 몰라서 물어?”조인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우리 현준이, 어릴 때부터 너 좋아했었는데. 몰랐어?”물을 마시던 민여진은 그 말에 그만 사레가 들려버리고 말았다.조인화는 급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겨우 기침을 멈추고 진정한 민여진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민여진은 조현준을 이때까지 계속 친한 오빠로만 여겨왔다. 이곳을 떠나기 직전까지 둘 사이에 애매한 기류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조현준은 고등학교 때부터 다른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며 집에 돌아온 적도 거의 없었다.그런 조현준이 자신을 좋아해 왔을 줄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민여진은 민망한 마음에 말했다.“이모, 장난 좀 치지 마요.”“얘가, 내가 너한테 이런 거짓말을 왜 하겠니? 현준이가 중학교 때 쓴 일기 보니까 온통 네 얘기밖에 없더라. 못 믿겠으면 지금이라도 그때 일기장 꺼내서 읽어줄까?”“아, 아니요... 됐어요...”당황한 민여진이 손사래 쳤다.“다 지난 일이잖아요.”“지난 일이면 어때? 우리 현준이는 아직 너 못 놔준 것 같은데. 너한테 관심 없었으면 그 귀한 휴가까지 먼저 내가면서 이렇게 급하게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야.”조인화는 민여진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아예 그냥 여기서 살래? 우리 집안 며느리 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민여진은 잠시 멍해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급히 손을 뺐다.조인화도 그녀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다시 물었다.
민여진은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잠이 오지 않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옷장을 더듬다가 손끝에 만져지는 외투를 꺼내 몸에 두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문 앞에 다다랐을 즈음, 조인화가 마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있는 민여진을 발견하자마자 다급히 다가와 말했다.“왜 밖에 나와 있어, 안에서 기다리지. 지금 얼마나 추운 줄 알아?”조인화가 민여진에게 걸어오며 중얼거렸다.“날도 추운데 처음 보는 사람이 찾아왔더라고. 이런 날씨에 도대체 뭘 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 차림에, 외제 차까지 타고 왔더라고. 생긴 건 또 무지하게 잘생겼어. 동네 사람들 다 나와서 구경하고 있다니까.”“처음 보는 사람이요?”민여진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래. 누굴 찾는 것 같은데 계속 안 가고 기다리고 있더라. 방금도 나 보자마자 이것저것 캐묻고.”“뭘 물어봤는데요?”민여진이 다급히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잠시 당황한 듯 멈칫한 조인화가 대답해 주었다.“별거 안 물었어. 그냥 우리 마을은 어떻게 살고 있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은 있나 정도로만 물어보더라. 이상하긴 했어. 여기가 외부인 접근이 쉬운 곳도 아니고, 이렇게 외딴 산간 마을에 외부인이 찾아오는 건 거의 6개월 만이잖아.”민여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고 숨소리가 점점 가빠졌다. 그녀는 가빠진 숨을 억지로 고르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아니야, 아닐 거야... 이런 우연이 있을 수도 있나?’그들에게 민여진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박진성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찾아올까? 더군다나 이정화가 민여진의 행방을 누설할 리도 없었다.“왜 그래, 여진아?”조인화는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민여진의 반응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져주며 물었다.“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어디 아파서 그래?”“아니요...”민여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힘겹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축하드려요, 임신 4주 차예요.”의사의 축하에도 민여진은 전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검사가 잘 못 된 건 아닌가요..? 임신일 리가 없는데... 한 번만 다시 검사해주세요.”“혹시 한 달 전에 관계를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있긴 한데...”“피임조치를 했다거나 약을 드신 적은 있으세요?”비가 오던 날, 박진성과 보냈던 뜨거운 밤을 떠올리던 민여진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그러자 의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검사 다시 할 필요도 없잖아요. 관계도 하고 약도 안 먹었으면 원래도 임신 가능성이 높은데 결과가 잘못됐을 리는 없어요.”의사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민여진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진단서만 좀 고쳐주시면 안 될까요? 임신 아니라고 적어주세요 제발...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민여진 씨, 여긴 합법적인 병원입니다. 환자들의 진단서를 마음대로 고치는 건 불법이에요, 다른 용건 없으시면 이만 나가주세요.”“다음 환자분!”미간을 찌푸리며 축객령을 내리는 의사에 민여진은 진단서를 손에 꼭 쥔 채 비틀대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소란스러운 거리 한복판에 서 있던 민여진은 도무지 발을 뗄 수가 없었다.저를 받아들인 것도 박진성으로서는 많이 양보한 건데 아이까지 가졌다는 걸 알게 되면 당장 지우라고 할 게 뻔했기에 민여진은 이 진단서를 들고 그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민여진이 배 속의 아이를 지킬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박진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전화를 받자 박진성의 낮은 음성이 귀에 내려꽂혔다.“검사 끝났으면 빨리 집으로 와.”박진성은 인내심이 그리 깊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민여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30분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차에 타서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마침 3층 금지구역에서 내려오는 박진성을 보게 되었다.실크 잠옷의 윗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탓에 남자의 탄탄한 근육이 그대로 민
민여진은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잠이 오지 않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옷장을 더듬다가 손끝에 만져지는 외투를 꺼내 몸에 두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문 앞에 다다랐을 즈음, 조인화가 마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있는 민여진을 발견하자마자 다급히 다가와 말했다.“왜 밖에 나와 있어, 안에서 기다리지. 지금 얼마나 추운 줄 알아?”조인화가 민여진에게 걸어오며 중얼거렸다.“날도 추운데 처음 보는 사람이 찾아왔더라고. 이런 날씨에 도대체 뭘 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 차림에, 외제 차까지 타고 왔더라고. 생긴 건 또 무지하게 잘생겼어. 동네 사람들 다 나와서 구경하고 있다니까.”“처음 보는 사람이요?”민여진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래. 누굴 찾는 것 같은데 계속 안 가고 기다리고 있더라. 방금도 나 보자마자 이것저것 캐묻고.”“뭘 물어봤는데요?”민여진이 다급히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잠시 당황한 듯 멈칫한 조인화가 대답해 주었다.“별거 안 물었어. 그냥 우리 마을은 어떻게 살고 있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은 있나 정도로만 물어보더라. 이상하긴 했어. 여기가 외부인 접근이 쉬운 곳도 아니고, 이렇게 외딴 산간 마을에 외부인이 찾아오는 건 거의 6개월 만이잖아.”민여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고 숨소리가 점점 가빠졌다. 그녀는 가빠진 숨을 억지로 고르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아니야, 아닐 거야... 이런 우연이 있을 수도 있나?’그들에게 민여진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박진성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찾아올까? 더군다나 이정화가 민여진의 행방을 누설할 리도 없었다.“왜 그래, 여진아?”조인화는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민여진의 반응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져주며 물었다.“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어디 아파서 그래?”“아니요...”민여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힘겹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현준 오빠가 돌아온다고요?”민여진은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왜요? 아직 시간 좀 남지 않았어요?”조인화가 웃으며 대답했다.“얼마 전에 현준이한테서 전화 왔거든. 얘기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네 얘기가 나왔었는데, 회사에 휴가 내고 바로 오겠다더라. 말로는 오랜만에 내가 보고 싶어서 온다고는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너 보러 오는 것 같아.”“저 보러 온다고요?”수건을 비틀어 물을 짜던 민여진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를 왜요?”“이 녀석이, 정말 몰라서 물어?”조인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우리 현준이, 어릴 때부터 너 좋아했었는데. 몰랐어?”물을 마시던 민여진은 그 말에 그만 사레가 들려버리고 말았다.조인화는 급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겨우 기침을 멈추고 진정한 민여진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민여진은 조현준을 이때까지 계속 친한 오빠로만 여겨왔다. 이곳을 떠나기 직전까지 둘 사이에 애매한 기류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조현준은 고등학교 때부터 다른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며 집에 돌아온 적도 거의 없었다.그런 조현준이 자신을 좋아해 왔을 줄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민여진은 민망한 마음에 말했다.“이모, 장난 좀 치지 마요.”“얘가, 내가 너한테 이런 거짓말을 왜 하겠니? 현준이가 중학교 때 쓴 일기 보니까 온통 네 얘기밖에 없더라. 못 믿겠으면 지금이라도 그때 일기장 꺼내서 읽어줄까?”“아, 아니요... 됐어요...”당황한 민여진이 손사래 쳤다.“다 지난 일이잖아요.”“지난 일이면 어때? 우리 현준이는 아직 너 못 놔준 것 같은데. 너한테 관심 없었으면 그 귀한 휴가까지 먼저 내가면서 이렇게 급하게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야.”조인화는 민여진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아예 그냥 여기서 살래? 우리 집안 며느리 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민여진은 잠시 멍해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급히 손을 뺐다.조인화도 그녀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 여기 있는 채연이는... 누구야?”박진성은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어머니가 저희 결혼을 반대했었던 그해에 채연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 일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의식이 돌아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죠.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아셨다면 식물인간 상태인 사람과 결혼하게 두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누군가를 시켜 채연이를 대신하게 했고 그 사람이 민여진이었습니다.”박진성이 문채연을 처음 박씨 가문에 데려왔을 때 이정화는 그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그녀는 문채연의 눈에 자리 잡은 야망과 욕심을 단번에 읽어냈다. 딱 봐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이 결혼은 이정화의 거센 반대를 맞았지만 어느 날 문채연이 변한 것이다. 이해타산만 따지던 여자는 이정화가 심장 발작을 일으킨 그날 이를 악문 채 그녀를 등에 업고 눈 속을 걸어 병원까지 갔다.그리고 며칠을 밤새 간병했고 이정화가 정신을 차린 후엔 쑥스럽고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게다가 공을 세우려 하지도 않았고 고열에도 묵묵히 약 몇 알로 견뎠다.며느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그렇게 묵묵히 이정화의 곁을 지켰다.그런 하나하나가 이정화의 마음을 서서히 열게 만들었다.하지만 지금 박진성은 기억 속의 그 문채연이 사실은 민여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이정화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동안 민여진에게 퍼부었던 차가운 말들이 머릿속을 쿵쿵 울렸다. 가슴이 뻐근해져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삼켰지만 손이 멈추지 않고 계속 떨렸다.“왜... 왜 그때 나한테 말 안 했니?”박진성은 눈을 내리깔았다.왜 말하지 않았냐고? 그건 그땐 그에게 민여진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문채연’이란 이름을 지켜주기 위한 대체물일 뿐이었다. 그런 존재에 대해 굳이 입을 열 이유가 없었다.이정화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오랜 침묵 끝에 펜을 들어 종이에 주소 하나를 적었다.“여진이가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그 애가 꼭 가보고 싶다고 했던
박진성의 입술은 새하얗게 바랬고 얼굴도 병든 사람처럼 창백했다.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힘이 있었다.“죽기 전엔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이어지는 기침에 온몸이 떨렸다.그래도 그는 참고 또 참으며 눈 내리는 바깥으로 나아가려 했다.“그만해!”이정화가 분노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함을 질렀다.“너 지금 목숨 걸고 나를 협박하는 거야? 내가 그 애가 어디 있는지 말 안 하면 저 추운 밖에 나가 죽을 거란 말이지? 너 그렇게까지 엄마를 몰아붙이고 싶어?”박진성은 문가에 멈춰 섰다.밖에서 미친 듯이 눈이 내렸고 거센 바람이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지만 그의 뒷모습은 단호했다.“어머니, 전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어머니가 저보다 더 후회하는 일을 막고 싶은 겁니다.”“그게 무슨 뜻이야?”“민여진이 죽게 된다면 2년 동안 어머니 곁을 지킨 사람도 같이 사라지게 되는 거죠. 그건 어머니 스스로 만든 일이에요. 정말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이정화의 얼굴이 삽시간에 핏기를 잃었다. 그녀는 멍하니 박진성을 바라보았다.문채연 역시 충격에 휩싸였다.“진성 씨!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그녀는 더 이상 이성을 붙잡지 못했다.박진성이 민여진을 위해 과거의 모든 진실을 밝히려 하다니?‘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하지만 박진성은 차분했다.“원래 민여진의 것들이었던 걸 이젠 돌려줘야죠.”문채연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이정화는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점점 짙어지는 불안을 안고 박진성에게 다그쳤다.“진성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2년 동안 날 곁에서 돌봐준 사람이 민여진이었다는 거야? 그 애가 언제 내 곁에 있었단 말이야?”“어머니, 민여진을 처음 봤을 때 익숙하다는 생각 안 드셨습니까?”그 말에 이정화의 신경이 순간 확 당겨졌다.그녀는 민여진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과 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
“이 못된 놈!”이정화는 오늘 들어 처음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그녀는 차갑게 눈을 부라리며 박진성을 노려봤다.“너는 네가 지은 죄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해?”박진성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많죠. 그래서 전 민여진을 찾아야 해요. 제가 저지른 모든 걸 하나하나 갚아야 하니까요.”“네가 갚고 싶다고 그 애가 받아들이기라도 할까?”이정화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박진성은 가슴이 쿡 하고 찢어지는 것 같아 손바닥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도 단호하게 말했다.“민여진이 거절해도 받아들일 때까지 전 끝까지 빌 거예요.”이정화는 두 손을 모아 불상 앞에 합장을 올리며 말했다.“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애가 떠난 건 내가 시켜서가 아니야. 그 애가 널 증오했기 때문이지. 널 벗어나고 싶어 했고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정말 그 애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전부 내려놔. 가볍고 평온한 삶을 살아. 그리고 그냥... 그 애가 죽은 셈 쳐.”“그럴 수 없습니다.”박진성은 망설임 없이 단칼에 잘랐다.그는 창백한 얼굴에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시 똑같이 물었다.“어머니, 민여진을 어디에 숨기셨습니까?”이정화는 대답하지 않았다.박진성은 격렬하게 기침하며 몸을 떨었고 계단을 비틀비틀 올라가려다 겨우 두 걸음 만에 바닥에 쓰러졌다.“진성 씨!”문채연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달려가 그를 붙들려 했다.그러나 박진성은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고 표정엔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그날의 사건을 문채연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문채연은 이를 꽉 깨물었다. 민여진이 죽지 않았고 그 사실을 박진성이 알아버렸다는 게 그녀는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다.박진성은 병 때문에 안색이 형편없었지만 바로 2층으로 올라가 구석구석 모든 방을 다 뒤졌다.그제야 이정화가 못 참겠다는 듯 소리쳤다.“너 정말 미쳤구나! 지금 여기 채연이도 있고 너희는 약혼을 앞두고 있어. 곧 결혼도 할 거고. 그런데 넌 채연이 앞에서 다른 여자를 찾겠다고 이
“확실합니다. 백 퍼센트 확실해요. 물속에 그렇게 어렵게 들어갔는데 차 안에 정말 아무도 없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쉽게 올라왔겠습니까.”잠수부는 거듭 말했다.“나는 이런 경우 처음 봐요. 차가 바다에 빠졌는데 안에 시신이 하나도 없어요.”“혹시 시신이 다른 데로 떠내려간 건 아닐까요?”누군가 조심스레 물었다.“말도 안 돼요.”남자가 고개를 저었다.“차창은 단단히 닫혀 있었어요. 내가 보기엔 누가 물속에서 문을 열고 나간다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니 가능성은 단 하나예요. 차가 빠질 당시 차 안엔 애초에 아무도 없었던 겁니다.”‘차 안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은 마치 벼락처럼 박진성의 가슴 속에 내리꽂혔다.그는 이 감정이 기쁨인지 절망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까매지고 숨조차 가빠왔다.‘민여진이 살아 있어.’그건 거의 본능적으로 떠오른 결론이었다. 이 모든 건 계획된 것이고 그녀의 죽음을 가장해 그를 내려놓게 만들려는 함정이었다.문득 그녀가 경찰서에서 나온 직후 곧장 이 차에 탑승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박진성은 가슴팍을 움켜쥐고 핏발 선 눈으로 서원에게 명령했다.“당장 조사해. 민여진이 경찰서에서 너와 나 말고 누구를 만났는지 전부.”서원은 곧장 움직였고 박진성은 차 안으로 돌아왔다.몸이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탓인지 오한과 열이 번갈아 밀려왔고 손끝까지 떨려왔다. 그는 죽음 끝에서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민여진은 죽지 않았다. 그녀는 엄청난 계략을 짰고 세상의 모든 이들을 속였다.정말 잔인한 여자였다. 그가 고통스러워할 것을 몰랐을까? 아니, 알았기에 더욱 철저히 저지른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죽기를 바랐으니까.박진성의 온몸이 끓어올랐다. 그 열기에 머리까지 지끈거렸고 결국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자신의 별장 소파 위였고 곁에서 휴대폰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강태화가 곁을 지키고 있었고 박진성은 몸을 가누며 통증을 참아내고 전화를 받았다
차 안엔 아무도 없었다박진성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목이 타들어 갈 듯 아팠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다가도 금세 차갑게 가라앉았다.몸이 이렇게 고장 난 건 분명 병 때문이었다.마지막으로 아팠던 게 거의 1년 전이었을까. 그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침대 머리맡 서랍을 열었다.민여진이 약상자를 거기에 뒀던 게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기침을 하며 상자를 꺼내보자 하나하나 약봉지마다 작은 메모지들이 붙어 있었다.‘언제까지 복용’, ‘이 약은 공복에’, ‘열이 나면 복용’, 세세한 설명이 다 적혀 있었다.그 여자는 항상 그랬다. 작은 것 하나까지 철저히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박진성은 메모지를 떼어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아팠다.며칠이 지나도 병은 쉽게 낫지 않았지만 그는 다음 날 아침부터 정상 출근했다.기침을 참아가며 몸살과 어지러움을 무릅쓰고 서류를 넘기고 회의를 소화했다. 하루, 하루, 또 하루.이제는 조금씩 잊히는가 싶었는데 그날 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대표님! 그 차량 위치를 찾았습니다!”박진성은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걸 놓고 바로 차를 몰았다.남산교에 도착하자 서원이 몇몇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벌써 윗옷을 벗고 준비 중인 남자들도 있었다.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원에게 다가갔다.“어떻게 됐어?”“차량 위치는 확인됐습니다. 지금 두 번째 잠수하러 들어가는 중이에요. 장비를 들고 들어가 유리창을 깨고 사모님을... 데리고 나올 겁니다.”“그래...”박진성은 정신이 아득해졌고 마비됐던 감정이 그 순간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묵직하고 차가운 통증이 심장을 찔렀다.그는 두려웠다. 정말로 민여진의 시신을 보게 될까 봐.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선 그녀를 드디어 편히 보내줄 수 있다는 조금의 평온도 느껴졌다. 이 차가운 물속에서 그녀가 더는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잠수팀은 장비를 짊어지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서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정식으로 시신 수습하
분노한 박진성은 문채연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그런데 너 왜 이 일을 숨겼어? 나한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민여진이 감옥에 가게 내버려둔 이유가 네가 살아남기 위해서야? 문채연, 넌 죄책감도 안 느껴?”그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고 그는 그녀의 이름을 또렷이 불렀다.문채연은 본능적으로 겁에 질렸고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다.“진성 씨! 내 말을 들어봐요!”그러나 박진성은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그는 순간 깨달았다.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더 이상 자신이 알던 그 여자가 아니란 것을.어떻게 이렇게 냉랭해질 수 있을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토록 순수하고 따뜻했던 그녀가 말이다.문채연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녀는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진성 씨, 제발...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마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난 그냥... 너무 무서웠을 뿐이에요...”그녀는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내가 2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사이에 진성 씨는 민여진 씨와 관계를 이어갔잖아요. 민여진 씨는 이미 진성 씨의 아이까지 가졌고요... 만약 내가 감옥에 가게 된다면 민여진 씨가 아이를 낳고 나서 여전히 내 자리가 있을까요?”“난 진성 씨를 너무 사랑했어요. 그래서 진성 씨를 위해서라면 불 속에도 뛰어들 수 있었어요. 그만큼 내겐 목숨보다 진성 씨가 더 소중해요. 그런데... 그걸 빼앗길까 봐 두려웠어요. 그것뿐이에요.”“나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민여진 씨를 해치지도 않았고요. 나의 이기심이 문제라면 그건 인정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말아요, 진성 씨...”문채연은 흐느끼며 그를 힘껏 끌어안았고 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그러나 박진성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단호하게 밀어냈다.“진성 씨...”문채연의 얼굴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약혼은 미루자
상우가 도착했을 때 박진성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2층에서 내려왔다.“대표님.”상우는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문채연 씨의 약혼식 드레스 디자인입니다. 여러 가지 시안을 준비했는데 매장에서 빠르게 결정해달라고 합니다.”“그래.”박진성은 노트를 받아 들었다.그런데 상우가 돌아서려 할 때 박진성이 그를 불러 세웠다.“서원은 요즘 어디에 있어?”상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서원 형님은 아직도 인양팀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모님의 시신을 먼저 찾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대로 안치해 드리고 싶다면서요.”박진성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사실 그조차도 이제는 포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서원은 여전히 집착하고 있었다.박진성은 한참을 침묵하다 짧게 말했다.“추운 날씨에 바닷가에 계속 있게 하지 마. 아직 젊잖아.”“네. 저도 몇 번이나 말렸는데 잘 듣질 않네요. 하지만 대표님께서 말씀하시면 이제 포기할지도 모르죠.”상우가 떠난 후 박진성은 노트를 들고 문채연의 방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성 씨, 나 샤워 중이에요. 무슨 일이에요?”박진성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손에 든 노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업체에서 드레스 디자인을 보내왔어. 상우가 가져다줬는데 빨리 결정하라고 하네.”“네, 침대에 놓아 줘요. 곧 나갈게요.”문채연의 목소리는 왠지 조금 부끄러운 듯 들렸다.사실 그녀는 박진성이 기다려 주기를 바랐지만 박진성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그는 몇 걸음 걸어가 티 테이블 위에 노트를 내려놓았다.그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진동음이 울렸다. 박진성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휴대폰에 꽂혔다.그런데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그때 문채연이 서둘러 나왔다. 그녀는 목욕 가운을 걸치고 있었고 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으며 뺨은 열기로 붉어져 있었다.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박진성을 본 순간 그녀는 가슴이 뛰었다. 이제야 기회가 왔다. 민여진이 박진성의 마음을 차지한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그의 ‘첫 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